소설리스트

38화 (38/100)

038.

말끔해진 세 사람과 소리오닌, 세리는 햇볕이 좋아 정원에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마치 피크닉을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모두들 들떠 있었다.

과일이 가득 들어간 샌드위치를 집으며 페릴이 아까 못했던 얘기를 다시 이어갔다.

“세리, 내가 아까 뭘 봤냐면, 사르그! 사르그를 봤어! 그것도 붉은 눈이었다니까?”

페릴은 눈에서 광선이라도 나갈 것 같았다. 그와 같이 흥분한 로센 공작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내 평생 살면서 야생 사르그는 본 적이 없는데. 오늘 그 붉은 눈을 마주쳤을 때 그 느낌이란!”

“그쵸, 공작님! 정말 예뻤어요. 이 세상 동물이 아닌 것 같았다니까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리는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여기 소리오닌 님은 그 사르그한테 이름도 지어 주고, 밥도 주시는 걸요? 사르그가 애교도 부려요, 소리오닌 님한테는.”

세리의 말을 들은 에리한도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맞네, 나도 소리오닌 님에게 놀러 온 사르그는 몇 번 봤어.”

에리한은 자신과 소리오닌 사이를 방해하던 심술 가득한 사르그를 떠올리며 말했다.

“야옹이에요.”

“네?”

“제가 ‘야옹이’라고 이름을 지어줬어요.”

소리오닌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싱긋 웃었다.

페릴과 로센 공작은 존경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까칠함의 대명사인 사르그한테 그렇게 동글동글한 이름을 지어 주다니! 

“소리오닌 님, 능력이 대체 몇 개나 되시는 겁니까?”

“아니, 능력은 무슨! 아니에요.”

페릴의 순수한 물음에 소리오닌이 손사래를 쳤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센 공작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소리오닌을 바라봤다.

“능력이라니? 소리오닌한테 뭔가 능력이 있는 건가?”

“어, 모르셨어요? 소리오닌 님 치유 능력이 엄청난데!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싹 나아요! 수도에서는 이미 소문이 다 났습니다!”

호오? 페릴의 설명을 들은 로센 공작의 얼굴이 번뜩였다. 소리오닌은 속으로 ‘망했다!’ 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

한편 에리한을 한껏 비웃은 야옹이는 숲 속 깊은 곳으로 내달렸다. 

처음에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그 다음에는 나무 꼭대기에서 두세 그루를 한 번에 뛰어넘었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나중에는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였다.

달리던 도중 멈춰서 몬스터들의 시체를 눈에 담은 야옹이가 작게 그르렁거렸다. 그러나 곧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숲의 맞은 편으로 나온 야옹이가 소리도 없이 땅에 내려앉았다. 그 뒤 희미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 주위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환한 빛이 퍼져나갔다. 

어느새 야옹이가 내려앉았던 자리에는 훤칠한 키의 청년이 서 있었다. 

남자는 바람에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을 무심하게 손으로 빗어 넘겼다. 그 다음 붉은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긴 다리를 이용해 숲의 입구를 벗어났다.

숲의 입구에서 벗어난 남자가 향한 곳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사브만의 성이었다.

“왕자님, 오셨습니까? 지금 히튼 왕세자님께서 찾으십니다.”

“알았어.”

“네!”

성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를 불렀다던 왕세자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흰색의 거대한 문 앞에 선 남자가 문을 두드렸다. 얼마 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며 신하들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히튼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응.”

신하들 사이 중 가운데 선 시종장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대답한 후 안 쪽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그와 같은 은발을 한 왕세자가 앉아있었다.

“형님. 부르셨습니까?”

히튼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남자가 말했다. 그의 인사를 받은 왕세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가트. 자꾸 어디를 돌아다니는 거냐? 요즘 너와 관련된 일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나? 당사자가 없으면 어쩌자는 거냐!”

“그럼 제게 관련된 일들에 대한 제 생각, 솔직히 말씀 드려도 됩니까?”

히튼의 잔소리를 들은 가트의 붉은 눈이 번쩍였다. 그 모습을 본 히튼은 한숨을 내쉰 뒤 손을 저었다.

“됐다! 그래, 너 마음대로 돌아다녀!”

“그것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고작 그 말하려고 귀찮게 부른 건 아니겠지.’ 눈빛으로 말하는 동생의 얼굴에 히튼은 기가 막힌 웃음을 내뱉었다. 

“허! 그런 거면 어쩔 건데?”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그냥 여기 온 걸음 수만큼 마법진 해체하는 거죠.”

가트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말을 말지. 너 진짜로 마법진 건드릴 생각 하지 마라. 그리고 그거 때문에 부른 거 아냐.”

동생이 진짜로 마법진을 없앨까 봐 바로 꼬리를 내린 히튼이 손가락을 딱, 마주쳤다. 그러자 옅은 파란색의 빛이 넘실거리며 집무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게 뭡니까?”

“바람의 전령. 바론에서 또 왔어. 그 나라는 뭐 이렇게 바꾸는 게 많은지.”

히튼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를 가만히 보던 가트는 손가락을 움직여 바람의 정령을 끌어왔다.

그의 움직임에 사방에 퍼져있던 파란 빛이 가트 주변으로 모여 들어 동그란 구슬 모양으로 변했다. 가트는 동그랗게 변한 바람의 전령을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왕자와 결혼할 신부의 상대는 소리오닌 알몬느 공녀로 다시 정해졌습니다. 곧 혼인 서약서를 보내겠습니다.]

“소리오닌 공녀?”

바람의 전령을 읽은 가트의 눈이 커졌다. 힐끗 동생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던 히튼이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그게 갑자기 바론에서 보낸 거라, 아무래도 결혼 상대가 공주였다가 공녀로 바뀌는 건 좀 그렇지? 내가 거절할게.”

“아니, 아닙니다.”

“응?”

분명히 기분 나빠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트는 거절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저는 이 결혼.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뭐어? 너 왜 그러냐?”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괜찮다는 말까지! 저번 공주 때와는 너무도 다른 반응에 오히려 히튼의 의심이 더 커져 갔다. 이렇게 나오다가 언제 뒤통수를 칠 지 모르는 동생이었기에, 히튼은 가늘어진 눈으로 가트를 응시했다.

히튼의 불신 가득한 눈을 보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가트가 갑자기 등을 돌렸다.

“야, 내 말에 대답 안 해?”

그대로 방을 빠져나갈 것 같은 모습에 히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큰 소리에 잠깐 걸음을 멈춘 가트가 얘기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이따 식사시간에 뵙겠습니다.”

“으응? 웬 식사?”

뜬금없는 식사 얘기에 히튼의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평소 식사시간에 코빼기도 안 비추던 놈이 웬 식사시간? 

“점심, 안 드십니까?”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동생의 얼굴을 본 히튼의 이마에 핏줄이 빠직, 솟아났다. 히튼의 속은 열불이 나든 말든 가트는 자신이 하고픈 말만 내뱉었다. 

“식사시간에 다른 형님들도 오시는 거겠죠?”

“알았다. 다 모이라고 하지.”

결국 가트의 일방적인 통보에 히튼이 항복했다. 그러나 답을 듣기도 전, 이미 나가버린 동생의 건방진 태도에 히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점심 식사 때 다 같이 모여라 이거군. 진짜 누가 윗사람인지. 나이도 내가 20살은 더 많은데! 굉장히 억울했지만 대놓고 투덜거릴 수도 없는 위치라 히튼의 속만 까맣게 타들어갔다.

가트는 바람의 전령을 꼭 쥔 채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온갖 마법진으로 가득 찬 방은 한 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그는 발에 차이는 온갖 도구들을 밀어낸 뒤 침대 끝 쪽에 자리를 잡았다.

[왕자와 결혼할 신부의 상대는 소리오닌 알몬느 공녀로 다시 정해졌습니다. 곧 혼인 서약서를 보내겠습니다.]

몇 번을 읽어도 ‘소리오닌’ 그녀의 이름이 맞았다. 

심심해서 찾아갔던 바론. 거기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분명히 사르그로 변해 있는 자신을 보면 놀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렇지 않은 태도가 이상했다.

먹다 남은 빵이나 주고, 이상한 풀로 만든 스프를 먹이고. 거기다 ‘야옹이’라는 괴상한 이름까지 붙여줬다.

그 어이없는 행동에 호기심이 생겨 찾아가기를 몇 번. 어느새 야옹이라고 불리며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점점 좋아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피식, 그동안 소리오닌과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던 가트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나왔다.

어차피 그녀와 이뤄질 거란 생각은 없어 그동안 야옹이로만 지냈는데, 천금 같은 기회가 생길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소리오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그 눈엣가시인 에리한부터 떨어트려 놔야겠군.

가트는 손가락으로 바람의 전령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동그란 구슬이 물방울처럼 움푹 파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

큰 형님인 히튼의 명령으로 한 자리에 모인 왕자들이 저마다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 저는 사냥을 가기로 이미 선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오늘은 학자들과 오찬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어찌 큰 형님은!”

사브만의 둘째 왕자이자, 기사단의 단장인 타만은 자신 대신 신나게 사냥을 하고 있을 기사단원들을 생각하면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의 동생 셋째 왕자 카민 또한 새로 발견한 학설을 제일 먼저 들을 기회가 사라진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모이라고 했지만 부른 사람은 내가 아닐세.”

그들의 투정을 조용히 듣던 히튼이 물을 들이키며 얘기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형님에게 똑같이 물은 두 사람은 순간 이 자리에 없는 막내를 생각해냈다.

“설마, 가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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