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00)

037.

“세리? 손목 좀 움직여 봐.”

“이, 이렇게요?”

세리는 소리오닌의 말대로 손목을 살살 움직였다. 소리오닌이 손목을 치료해준 다음이라 그런지 훨씬 수월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때? 괜찮아?”

“아까보다 엄청 편해요. 역시!”

“잘 됐다. 그래도 많이 움직이면 안 돼.”

“그럼요! 저 요즘 일 하나도 안 하잖아요.”

세리가 귀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모습에 소리오닌도 마주 웃어준 뒤, 방을 나섰다. 

“소리오닌 님, 뭐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방금 내가 많이 움직이지 말라고 한 거 기억 안 나? 내가 할 테니까 좀 쉬고 있어. 그냥 산책할 겸 나가 보려고 하는 거니까.”

소리오닌은 쓰읍! 소리를 내며 세리에게 잔소리를 했다. 세리는 그녀의 말에 일어나려다 다시 침대에 앉았다. 세리가 잘 앉아 있는 걸 확인한 소리오닌이 손을 흔들고 나갔다.

로센 공작의 정원은 꽤 큰 편이었다. 앞쪽에는 아직 아침이슬을 머금고 있는 꽃들과 나무들이 있었고, 뒤쪽으로는 꽤 넓은 밭이 있었다.

앞 쪽 정원을 보고는 별 반응이 없던 소리오닌이 넓게 펼쳐져 있는 밭을 보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이게 다 먹을 수 있는 거야?”

재빨리 밭으로 뛰어 간 소리오닌은 그 안에 있는 채소들의 생김새를 유심히 살펴봤다. 자신의 집에 있는 텃밭과 같은 종류의 것들도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채소들도 있었다.

때마침 밭을 관리하던 시녀가 쪼그려 앉아 밭을 구경하는 소리오닌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의 손님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조심스레 인사하는 시녀에게 소리오닌 역시 마주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밭을 보고 있었다.

앞쪽 정원이면 몰라도 채소들 밖에 없는 밭을 구경하는 소리오닌을 신기해하며 하녀가 물었다. 

“저, 혹시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아, 아니요! 채소들이 잘 자라서 구경 중이었어요.”

“채소 구경이요?”

독특한 사람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린 하녀는 자신이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리오닌은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물어라도 보자며 옆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시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네?”

“여기 이 채소들. 씨 좀 받을 수 없을까요?”

“씨?”

“네! 제가 좀 키워보고 싶어서.”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소리오닌이 말했다. 바론에 가면 자신의 집 앞 텃밭에 키워보고 싶었다.

“아아, 그러시구나. 잠시만요! 창고에 있을 거예요. 가져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시녀가 얼른 뒤돌아 뛰어갔다. 소리오닌은 바론에 있는 텃밭이 풍성해질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야옹이가 문득 생각났다. 

“흐음, 잘 있으려나?”

자신이 오래 집을 비운다는 말을 이해했을까? 그것도 모르고 계속 문 앞에서 기다리면 어떡하지? 야옹이가 그녀의 집에 오는 건 일주일에 한두 번뿐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계속 기다리느라 밥도 굶을까 봐 걱정이었다.

쪼그려 앉아 멍하니 야옹이를 생각하던 때였다.

“뮤?”

어디선가 야옹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야옹이 걱정에 환청까지 들리는구나. 내가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야옹이 생각을 못했네. 

“휴우.”

얼른 바론에 돌아가서 야옹이 밥 줘야 하는데, 소리오닌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먀먓!”

“?”

사르그가 그녀의 무릎을 탁! 소리가 나게 친 뒤 크게 울음소리를 냈다. 

“으응?”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털에, 루비보다 붉은 눈. 야옹이와 똑같은 생김새의 사르그가 소리오닌 앞에 앉아 있었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갑자기 나타난 사르그의 모습에 깜짝 놀란 소리오닌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에 기분이 좀 풀렸는지, 눈을 지긋이 감고 손길을 느꼈다.

“야옹이 친구인 건가? 야옹이가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고. 친구도 엄청 예쁘네?”

소리오닌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어이없다는 한숨을 내뱉은 사르그가 소리오닌을 째려봤다.

사르그의 험악한 눈길을 눈치 못 챈 소리오닌이 본격적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사르그을 껴안았다.

“야옹이는 잘 있을까? 친구야, 어떻게 생각해? 야옹이는 잘 지낸대? 아니, 여기는 바론 수도랑 너무 멀어서 서로 못 만나려나.”

“뮤우!”

사르그의 보드라운 털에 입을 부비며 소리오닌은 야옹이 걱정만 한가득이었다.

끝까지 자신을 눈치채지 못하는 소리오닌이 얄미워 야옹이는 꼬리로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물론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는 야옹이 걱정에 완전 나쁠 뻔한 기분이 아주 조금 좋아졌지만. 한참 소리오닌의 품에서 야옹이가 골골거리고 있을 때였다. 

“소리오닌 님!”

아무래도 혼자 쉴 수 없었는지 세리가 소리오닌을 부르며 뛰어왔다.

“응, 나 여기 있어!”

소리오닌이 사르그를 안은 채로 대답했다. 세리는 그녀의 품에 안긴 사르그를 보고 놀란 얼굴로 소리오닌을 쳐다봤다.

“야옹이에요?”

“응? 아니지 않을까? 설마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바론이랑도 너무 멀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사르그가 이렇게 흔한 동물은 아니잖아요.”

혼란스러운 얼굴로 사르그를 바라보는 세리였다. 그런 세리에게는 별 흥미가 없는지 사르그는 다시 소리오닌의 품으로 머리를 숨겼다.

그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던 세리가 사르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저를 무시하는 저 태도. 야옹이가 분명한 거 같은데요.”

“하하, 야옹이 왜 싫어해. 잘 지내야지.”

“저는 잘 지내고 싶어요! 근데 야옹이가 저를 싫어하는 거죠.”

소리오닌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세리가 툴툴거렸다. 그녀의 투정을 듣던 야옹이는 꼬리로 세리의 손등을 탁, 치고 그대로 숲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사라진 사르그를 보며 소리오닌이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서 세리가 빨개진 손등을 문지르며 소리쳤다.

“이거 좀 보세요, 소리오닌 님! 쟤 야옹이 맞다니까요? 손등 빨개졌어! 으, 진짜 얄밉다.”

“정말? 어디 봐봐, 정말 빨개졌네? 많이 아파?”

“아니, 아픈 건 아니에요.”

세리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아꼈다. 야옹이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험담하는 건 안 좋겠지. 

둘이서 밭을 보며, 방금 나타났던 사르그가 고양이인지 아닌지 한참 토론을 하고 있을 때, 시녀가 작은 주머니 몇 개를 가져와 소리오닌에게 내밀었다.

“저, 여기. 밭에 있는 채소들 씨앗이에요.”

“와아, 감사합니다.”

“색깔별로 다른 채소들이 들어 있어요.”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소리오닌에게 시녀는 일일이 주머니를 열어, 채소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소리오닌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꼼꼼하게 설명해 준 시녀는 곧 점심 준비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게 다 뭐에요? 채소 씨앗은 왜요?”

“나, 바론에 돌아가면 심으려고.”

소리오닌은 뿌듯한 마음으로 주머니를 흔들었다. 세리는 그 모습에 크게 웃었다.

“소리오닌 님, 정말 많이 변하셨어요. 알몬느 공작님과 도련님께서도 못 알아보시겠어요.”

“그, 그래?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됐을까?”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세리가 소리오닌의 눈치를 보며 말을 시작했다.

“공작님이랑 공작부인님은 도망치시다가 사고로……. 노미텐 도련님도 도망가셨는데, 소식이 끊겼대요.”

“아, 그래.”

알몬느 가의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소식을 들으니 맘이 씁쓸해졌다. 급격히 어두워진 소리오닌의 얼굴을 본 세리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랍니다. 솔직히 초크센의 전하가 먼저 도발했던 거니까, 에리한 님한테 화내시면 안 되셔요. 아셨죠?”

“뭐?”

“소리오닌 님이 이 얘기 듣고 에리한 님이랑 싸우실까 봐.”

“아냐, 안 그래.”

소리오닌이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세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리가 걱정하는 게 어떤 건지 대강 짐작이 갔다. 아마 에리한과 사이가 틀어져서 다시 그 작은 집에서 평생 갇혀 살까 봐 걱정이겠지. 

원래의 가족들에게는 야속한 일일지 몰라도, 소리오닌은 에리한에게 원망을 품을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들은 얼굴조차 모르니까. 

비겁하지만 에리한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소리오닌 님, 저희도 얼른 들어가요! 왕자님이 오셨을지도 몰라요.”

“그럴까? 얼른 가자!”

풀죽어 있던 세리가 다시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소리오닌이 우울해질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소리오닌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미소 지었다. 

“역시 오셨네요!”

세리가 저택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며 소리쳤다. 세리의 말대로 에리한과 페릴, 로센 공작은 막 도착했는지 사냥 도구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아, 세리! 내가 오는 길에 뭘 봤는지 알아?”

“네? 잠시만요, 페릴님! 왕자님께서 시장해 하시지는 않으신가요? 급한 게 아니라면 얼른 점심을 차릴 테니 점심 드시면서 얘기해주셔도 될까요?”

페릴은 세리를 보고 발을 구르며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어 신난 얼굴로 얘기했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보다 당장 식사 준비에 더 신경이 쓰이는 듯한 세리의 반응에 페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아, 알았어. 우선 씻고 올게. 이따 얘기하지 뭐.”

페릴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얼른 씻고 오셔요!”

왠지 페릴의 어깨가 내려간 것 같았지만, 세리는 자신이 할 일을 다시 떠올리며 주방으로 일을 도우러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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