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어느 날 갑자기요?”
“네. 정말 갑작스러웠습니다. 이유를 찾으려고 해봤습니다. 하지만, 몬스터들이 나와야 뭘 알아볼 텐데 말입니다.”
디그롬에 부임했던 초반, 공작은 밤이 되면 숲에서 몬스터들과 싸우느라 정신없었다.
최상급 몬스터들은 아니었지만 꽤나 강한 중급 이상의 몬스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난 탓이었다.
어느 날부터 중급 몬스터는커녕, 하급 몬스터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몬스터가 안 나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자꾸 뭔가가 찝찝했던 것이었다.
공작의 설명을 듣던 페릴은 자신이 세운 가설에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혹시. 완전 센 몬스터가 나온 거 아닐까요? 왜, 완전 최상급 몬스터들은 따로 그들만의 영역이 있다잖아요! 이 숲이 그 몬스터의 영역인 거죠.”
“뭐?”
“그 몬스터 눈에 안 띄려고 하급 몬스터들이 숨죽여 있는 거예요. 어때요?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페릴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해 보였다. 그의 가설을 들은 공작은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무슨 소리인가. 최상급 몬스터가 살기에는 최악의 조건이라고. 사브만과 바론의 경계라 병사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은 숲을 돌아다니는데, 그런 걸 좋아하는 몬스터는 없어. 더구나 최상급 몬스터들은 인간들을 싫어한다고 하지 않나.”
“흐음, 그런가요?”
시무룩한 얼굴을 하던 페릴이 다시 반짝 고개를 들었다.
“그럼 독극물 아닐까요? 누군가 몬스터들의 먹이에 독극물을!”
“페릴. 몬스터들의 먹이는 종류가 너무 많아.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무들도 죽어야 한다고. 하지만 식물들은 아무렇지도 않잖아.”
이번에는 에리한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페릴은 야심차게 추리한 내용이 둘 다 쓸모없는 취급을 받자,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페릴, 너는 어디 가서 탐정 같은 거 하면 안 되겠다.”
“그러게 말입니다. 자네, 내가 추리 소설 몇 권 빌려줄까? 내 아들이 12살 때 읽었던 건데.”
그의 반응이 재밌어진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페릴을 놀리기 시작했다. 페릴은 계속되는 놀림에 발끈했지만, 세 사람 중에는 제일 말단이라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을 뿐이었다.
세 사람 모두 사냥은 뒷전으로 두고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커다란 몬스터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늘은 무슨 날인 겁니까? 소식이 끊겼다던 몬스터가 나오다니.”
에리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페릴 역시 짓궂은 미소를 지은 뒤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맞장구쳤다.
“헤에, 저희 몸 좀 풀어 주려고 왔나본데요?”
“페릴, 그래도 조심하게. 상급은 아니지만 중급은 되는 거 같으니.”
신나서 엉덩이를 들썩이는 페릴에게 로센 공작이 진지하게 경고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페릴이 순식간에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몬스터는 지능은 낮지만 재빠른 몸놀림으로 시도 때도 없이 공격을 하는 ‘사타문’이었다. 페릴 역시 몇 번 맞서 본 적이 있는 몬스터였기에 크게 망설이지 않고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짧은 주문이 흘러나오자, 곧 손에 검이 쥐어졌다. 눈으로 움직임을 쫓을 수 없는 몬스터였기 때문에 오로지 감에만 의존해야했다.
몬스터의 비명과 페릴의 기합만 난무하는 숲에서 에리한과 로센 공작은 태평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릴이 몇 분 만에 끝낼까요?”
“몇 분이나 걸리겠습니까. 이제 곧 쓰러질 듯합니다.”
에리한의 말에 로센 공작은 흥이 나기도 전에 끝난다는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셨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몬스터가 풀썩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몬스터의 피가 튄 얼굴을 닦으며 페릴이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왕자님, 사타문 가죽이 비싸게 팔린다고 했었나요?”
“음, 그런가?”
“아니었나? 어디서 들었던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한 페릴이 다시 발걸음을 돌려 사타문의 앞에 섰다. 그 다음 사타문의 등으로 칼을 집어넣어 가죽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에리한은 진심으로 기사단 월급이 적은 건가 하는 걱정을 했다.
“페릴, 그만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 몬스터 피 냄새 때문에 동물들이 하나도 안 오겠어.”
“네, 잠시만요!”
사타문의 가죽을 접어 가방에 넣어 놓은 페릴이 다시 말에 올라탔다.
몬스터가 나왔던 곳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 곳에서도 또 다른 몬스터 세 마리가 튀어나왔다. 쇠가 긁히는 듯한 몬스터의 울음소리에 인상을 쓴 에리한이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님, 몬스터가 어느 날부터 한 마리도 안 보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앞에 있는 이것들은 몬스터가 아닌 겁니까?”
“아니, 진짜로 그동안은 안 나타났습니다. 저도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겁니다. 허, 참!”
로센 공작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상했다. 공작저 근처 숲의 순찰은 이틀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하고 있다. 그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것들이 오늘은 가는 곳마다 나타나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우선 이것들부터 처리하고 알아보겠습니다.”
“그러시죠.”
공작이 이를 바드득 갈며 얘기했다. 이 몬스터 새끼들이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로센 공작이 재빠른 동작으로 화살을 쏘았다. 그 화살을 신호로 몬스터들이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에리한과 페릴은 말에서 내려 검을 고쳐 들었다. 좀 전의 사타문보다는 느리지만 마법을 쓸 수 있어 좀 더 까다로운 몬스터들이었다.
몬스터가 팔을 휘두르자 땅 속에서 흙덩이들이 튀어 올라와 세 사람에게 쏟아졌다. 순간 에리한의 시야가 흔들렸지만, 그는 몬스터가 있는 방향으로 곧장 뛰어가 칼을 휘둘렀다.
급소에 빗겨 맞았는지 칼을 맞고도 꿈틀거리는 몬스터를 향해 혀를 쯧 차고 다시 공격을 하려고 할 때였다.
에리한의 뒤에서 튀어나온 공작이 몬스터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이미 자신의 몫이었던 몬스터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놓은 뒤였다.
에리한은 여전히 현역 시절의 모습을 보이는 공작의 몸짓에 고개를 흔들었다. 화나면 앞 뒤 안 가리고 휘두르는 저 성미. 아직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페릴 또한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그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페릴, 뭐하는 거야?”
“아, 이 몬스터는 뭐 건질만한 게 없나 찾는 중이었어요.”
여전히 몬스터를 툭툭 건드리면서 답했다.
“페릴. 기사단 월급이 적어?”
“네?”
“아니, 몬스터 뒤져서 나온 걸 팔아야 할 만큼 힘든가, 해서.”
“아하하,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제 취미가 수집한 물건을 물물교환 하는 거거든요.”
페릴이 크게 웃으며 손을 저으며 말했다. 기어코 몬스터의 피를 작은 약병에 담은 뒤 에리한에게 다가 온 페릴이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걸 가져가서 게시판에 써서 올려놓으면 연락이 와요. 제가 없는 몬스터의 기념품으로 바꾸기도 하고, 좀 비싼 마법 물품이랑 바꾸기도 하고.”
“그런 게 있어?”
“네, 생각보다 재미있어요! 저도 일이 바빠서 자주 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 같이 기회가 있을 때는 최대한 많이 챙겨두려고 하죠.”
검붉은 피가 담긴 병을 다시 가방에 넣은 페릴이 배시시 웃었다.
“이 숲에서 몬스터가 안 나타난다고 해서 좀 실망했었는데, 수확이 좀 있네요?”
“흐음, 그러게. 그러고 보니 몬스터가 갑자기 나타난 걸까?”
에리한이 로센 공작의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그의 말에 누구도 시원하게 답할 수 없었다. 로센 공작 역시 페릴의 옆에서 몬스터를 살펴봤지만 특별한 점은 없어보였다.
“저도 이제 다시 바빠지려나 봅니다. 몬스터들이 이렇게 나타나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도 불안해 할 텐데 말입니다.”
“아까 보니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던데요.”
“아닙니다. 저도 이제 늙었지 않습니까.”
로센 공작이 어느새 맘씨 좋은 중년의 사내로 돌아와 얘기했다. 확실히 싸울 때와 평소의 모습에 차이가 큰 사람이었다.
어느새 해가 하늘에 높이 떠 숲 속에도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이때쯤이면 웬만한 동물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는 시간이었다.
동물을 사냥하고자 야심차게 준비하고 왔건만, 세 사람은 결국 동물 대신 몬스터 사냥만 열심히 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로센 공작의 저택 근처 커다란 나무 위. 제일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한 생물체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빛 털에 매끈한 몸, 붉은 눈. 한참 에리한을 지켜보던 사르그는 곧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뮤!”
희미한 울음소리를 들은 페릴이 고개를 들어 커다란 나뭇가지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곧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으악!”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는 페릴 때문에 깜짝 놀란 에리한과 로센 공작이 물었다.
“왜, 왜 그러는가! 뭐가 또 나타났어?!”
“저, 저기. 저기!”
페릴이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무 위를 가리켰다. 페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본 로센 공작도 작은 신음을 흘렸다.
“이런!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게 아니지?”
“로, 로센 공작님도 보이십니까?”
“그, 그러게. 아주 잘 보이네!”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빛나는 저 동물. 바로 사르그였다. 거기다 붉은 눈의 사르그. 페릴은 이때까지 책에서만 사르그를 봤을 뿐,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로센 공작도 전대 왕이 키우는 것만 봤지, 야생 사르그는 처음이었다.
페릴과 로센이 사르그의 출현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입만 벌리고 구경하고 있을 때, 에리한 역시 사르그를 발견했다.
흔하지 않은 생김새. 왠지 소리오닌의 집에서 봤던 야옹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설마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왔겠어.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에리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사르그를 쳐다봤다.
에리한과 시선을 마주친 사르그가 붉은 눈을 접었다. 그리고 작게 운 뒤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에리한은 왠지 사르그가 자신을 보고 비웃은 것만 같아, 눈썹을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