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각자 방에서 휴식을 취한 뒤 저녁에 다시 모인 사람들은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니까 사브만으로 가는 도중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호오, 사브만은 여기서 마차로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왕자님, 내일 아침에는 저와 가볍게 사냥을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브만으로 가는 도중이라는 에리한의 말을 듣자, 공작의 눈이 반짝였다. 오랜만에 자신과 비슷한 실력을 가진 에리한을 만났으니, 인사만 하고 보내기에는 아쉬운 탓이었다.
“사냥이요?”
로센 공작의 말을 들은 페릴의 눈도 반짝였다. 아침마다 운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격하게 움직여본 게 언제인지. 요즘 들어 계속 몸이 찌뿌둥했는데 사냥을 하러 숲에 가면 신나게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왕자님, 사냥하러 가시죠!”
“제가 마차를 빌려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두 사람을 보던 에리한이 고개를 돌려 소리오닌과 눈을 마주쳤다. 응? 공작과 얘기를 하다 말고 자신을 바라보는 에리한의 행동에 소리오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리오닌 님, 내일 사냥을 갔다 와도 될까요?”
“네? 아, 네. 다녀오세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소리오닌뿐만 아니라, 에리한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정작 에리한은 소리오닌에게 허락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럼 아침에 사냥하는 걸로 하시죠. 요즘 숲에 몬스터들은 없습니까?”
“다행히 요즘은 녀석들이 잠잠합니다. 몇 주 전부터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로센 공작님은 언제 수도로 돌아오실 겁니까?”
즐거운 사냥 얘기를 하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 수도로의 복귀에 대한 이야기에 로센 공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로센 공작은 입술을 일자로 굳히며 얘기했다.
“수도에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 많습니다. 저는 여기서 지내는 게 훨씬 좋습니다, 왕자님.”
“그래도 로센 공작님 같은 분이 이런 변방에 있기에는 실력이 아깝습니다.”
“저도 이제 예전 같지 않습니다. 왕자님이 전하가 되신 다음, 그때도 필요하시면 다시 불러주십시오.”
“로센 공작.”
“그때까지 저는 이곳에서 국경을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로센 공작의 완강한 거절에 에리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모습에 멋쩍은 웃음을 지은 로센 공작이 소리오닌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리오닌은 수도에서 지내기 힘들지는 않고?”
“아,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있나, 소문을 듣자하니 초크센에서 잡혀간 귀족들은 작은 집에 갇혀 산다고 하던데.”
로센 공작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래도 소리오닌은 조금 심심하기만 할 뿐, 나름 전원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소리오닌이 한 번 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자 로센 공작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그래! 여기 디그롬에 와서 살지 않을래? 수도보다는 불편하겠지만 조용해서 지내기 좋을 거다. 내 너의 아버지와 친분도 있었고. 전하께 잘 말씀드리면 허락해 주실 거 같은데 어떠냐?”
“네?”
뜬금없는 로센 공작의 제안에 소리오닌이 당황했다. 로센 공작은 딸 같은 나이의 그녀가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에리한은 속이 뒤틀린 표정을 지었다.
“로센 공작.”
“아, 왕자님께서 전하께 잘 말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소리오닌이 안쓰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직 에리한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로센 공작은 계속해서 소리오닌을 디그롬에 보내달라 졸랐다.
덕분에 골치가 썩는 건 페릴이었다. 아니, 로센 공작님. 왜 이렇게 눈치가 없으셔! 페릴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도 없었다.
“소리오닌 님은 앞으로 영원히 평생 수도에서 살 것입니다. 그러니 디그롬에는 보낼 수 없습니다.”
“허, 너무하십니다. 왕자님!”
에리한의 딱 떨어지는 대답에 로센 공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생각보다 냉정하시구만!
“너무하다 해도 저는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죠.”
에리한이 식기를 내려놓고 먼저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로센 공작이 툴툴거렸다.
“소리오닌, 왕자님께 뭐 밉보인 거라도 있는 게냐? 왕자님이 왜 이러시는 거야?”
“아, 아니에요, 그런 게!”
물론 에리한이 애매모호하게 답하긴 했다. 그렇지만 자꾸 헛다리를 짚는 공작을 보며 답답해하던 페릴이 소리쳤다. 페릴이 자신의 가슴을 퉁퉁 치며 말을 이어갔다.
“에리한 왕자님은 소리오닌 님과 평생 같이 살고 싶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죠, 소리오닌 님?”
자신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말하는 페릴의 기세에 소리오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에리한이 없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고백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알게 된 로센 공작이 파안대소했다.
“뭐야, 그랬던 건가? 그럼 그렇게 말을 하셔야지. 저렇게 돌려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으라는 거야.”
“그야, 당연히 소리오닌 님이 불편해 하실까 봐 그런 거죠!”
“흠흠, 그렇군. 소리오닌, 미안하게 됐다. 내가 주책이었네.”
로센 공작은 헛기침을 하며 사과했다. 그의 사과에 소리오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 걱정해 주시느라 그러신 건데요.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죠.”
“소리오닌, 이렇게 반듯하게 자라 주다니! 대견해. 아주 대견하구나!”
로센 공작은 커다란 손을 뻗어 소리오닌의 머리카락을 마구 비볐다. 그의 억센 손길에 소리오닌의 머리가 마구 움직였다.
끝날 줄 모르는 공작의 손길에 소리오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보다 못한 페릴이 다시 한번 로센 공작을 말려야 했다.
***
“소리오닌 님, 에리한 님이랑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되신 거예요?”
“어,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응, 그런 거 같아.”
방으로 올라가던 도중 세리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소리오닌에게 말했다. 아직 어린 세리에게는 누군가와 만남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럼 소리오닌 님, 바론의 왕자비가 되시는 거네요!”
“뭐?”
“그렇잖아요! 소리오닌 님은 이제 바론으로 돌아가면 에리한 님이랑 결혼하시겠죠.”
세리는 소리오닌의 두 손을 마주잡고 붕붕 흔들었다.
“우리 소리오닌 님, 이제 꽃길만 남았어요!”
“근데 내가 결혼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에리한 님의 부모님들은 싫어하겠지?”
요즘 소리오닌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에리한을 좋아하는 감정은 이제 확실하다. 그와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하지만 여기는 엄연히 권력 관계가 확실한 곳인데, 에리한과 자신이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도 결혼이 가능할까 싶었다.
“으음, 아니에요. 할 수 있으실 거랍니다!”
세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세리?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제가 다 들은 게 있죠!”
소리오닌의 물음에 세리가 키득거리면 말했다.
“에리한 님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지금 전하의 아버지께서도 꽤나 차이나는 신분의 아내를 맞으셨대요! 그리고 에리한 님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많이 따라서 신분에 대한 차별은 많이 없으실 거라고 했어요!”
“정말? 어디서 들은 얘기야?”
“제가 페릴 님에게 직접 들었답니다!”
세리의 이야기를 들은 소리오닌은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에리한의 태도가 호의적이었던 건가 싶었다.
“고마워, 세리. 덕분에 맘이 편해졌어.”
“에이, 뭘요! 어? 에리한 님!”
소리오닌의 방 앞에 에리한이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본 세리는 인사를 하고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복도에 남은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에리한이 큼, 작게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소리오닌 님, 혹시 기분 나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제가요? 음…… 왜요?”
영문을 모른다는 듯한 소리오닌의 얼굴에 에리한이 쭈뼛거렸다.
“일부러 그런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제가 좀 소리오닌 님을 무시하는 듯이 말한 것 같아서.”
로센 공작과 얘기할 때 무심코 나온 말이 소리오닌의 기분을 나쁘게 했을까 봐, 올라와 있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로센 공작이 소리오닌을 데려가겠다는 말에 울컥해 버려 나오는 대로 지껄였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유치해지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에리한의 빨개진 귀끝을 본 소리오닌이 풋, 웃으며 말했다.
“전혀 그렇게 안 느꼈어요. 괜찮아요. 사실이잖아요? 앞으로 영원히 평생!”
“흠, 흠흠.”
소리오닌이 그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자, 에리한은 목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소리오닌은 에리한의 볼이라도 꼭 꼬집어 주고 싶은 걸 참느라 힘들었다.
***
아침 일찍 사냥 장비를 챙겨 나온 에리한과 페릴은 먼저 나와 있는 로센 공작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응, 그래, 페릴. 어때, 자는데 불편한 건 없었나?”
“네, 좋았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페릴의 대답에 너털웃음을 지은 공작이 이번엔 에리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왕자님도 편히 주무셨습니까?”
“네. 편안히 잤습니다.”
에리한의 짧은 대답을 끝으로 세 사람은 하인이 준비해둔 말에 올라탔다.
“저희 세 사람만 가는 겁니까? 공작님의 부하들은요?”
“아, 오늘은 그냥 쉬라고 했네. 페릴, 자네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저야 공작님이랑 왕자님 따라가려면 멀었죠!”
공작의 칭찬에 페릴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기사단이 생긴 이래 최연소 간부가 된 페릴이었다. 에리한 역시 페릴의 실력을 믿고 있기에 그만 데리고 길을 나선 것이었다.
세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숲속은 캄캄했다.
“이 정도면 몬스터 한두 마리 정도는 나올 만도 한데, 정말 조용하네요?”
“그러게. 정말 몬스터가 많이 사라진 겁니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숲속을 지나며 페릴이 의아함을 담아 얘기했다. 에리한도 페릴의 말에 동의하며 공작에게 물었다.
“사라진 건지, 어쩐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제가 처음 디그롬에 왔을 때만해도 몬스터를 처치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