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뭐?”
왕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초크센은 이미 우리의 속국이긴 하지만 공녀는 공녀. 사브만의 왕자와 혼인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관계지요. 마침 사브만에 가 있을 테니, 소리오닌 공녀를 사브만의 왕자와 혼인하게 하는 게 좋겠네요.”
“왕비. 하지만 소리오닌은.”
뭔가를 더 말하려는 왕의 말을 무시한 왕비는 그대로 시종장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바람의 전령으로 보내. 소리오닌 공녀와의 혼인을 원한다고.”
“하지만 왕자님 일행도 린셀 공주님이 없어진 걸 아시면 그냥 돌아오시지 않을까요?”
“아니, 에리한은 무조건 사브만에 갈 거야. 그리고 어쨌든 신붓감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뭐, 신부가 그 나라에 있으니 더 좋아할지도 모르고. 어서 내 말대로 해!”
시종장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바람의 전령에 짧게 마법어를 전했다. 정식 서류의 역할은 할 수 없지만, 국가 간의 중요한 전달사항이 있을 때 사용하고는 했다.
바람의 전령이 파란 빛을 내며 순식간에 창을 통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왕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에리한, 내 아들. 네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내 손바닥 안이지. 민츠를 무사히 빼돌린 이상, 바임은 내게 충성할 이유가 없으니 소리오닌을 죽이라는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을 테고.
나중에 린셀이 없어졌다는 걸 몰랐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사브만까지는 어떻게든 갈 생각이겠지.
린셀이 결혼하기 싫어하는 걸 이용해 바임과 함께 생각해낸 ‘소리오닌이 죽지 않는 방법’이 이거야? 하지만 소리오닌은 바론에 돌아올 수 없어. 절대로. 결국 너는 우리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게 될 거야.
왕비가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 자신의 궁으로 향했다.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시녀들을 본 왕비는 차갑게 명령했다.
“이 쓸모없는 것들을 궁에서 내쫓아. 다시는 궁에 발 디딜 생각도 하지 말거라!”
“와, 왕비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그들의 애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왕비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보던 왕, 도이첸이 시종장에게 말했다.
“왕비의 말은 무시하도록 해. 저들은 며칠간 쉬고 다시 돌아오라 해라.”
“네, 알겠습니다.”
왕의 명령에 시종장은 눈물범벅이 된 사람들을 이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뒤 겨우 조용해진 홀에 왕 홀로 앉아 있었다.
“그래, 린셀은 바임과 함께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럼 다행이구만. 언제든 돌아오긴 할 테지.”
왕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왕은 그제야 긴장했던 몸을 이완시키며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그 모습을 보던 네이드는 왕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음, 뭐. 괜찮지 않겠는가? 내 자식들은 그들의 인생을 살게 해 줘야지. 다 큰 아들딸의 문제에 부모가 끼어드는 것만큼 꼴불견은 없으니.”
“그렇다면, 왕비님은 언제까지 두고 보실 겁니까?”
네이드의 목소리가 딱딱해진 것을 느낀 왕이 슬쩍 미소 지었다.
“글쎄, 어느 정도 분풀이는 하게 둬야 할 거 같은데.”
“도이첸, 당신은 너무 무르십니다.”
“그래? 근데 설마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걸.”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왕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의 웃음을 듣고 있던 네이드는 왕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뒤돌아섰다.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알고 있지?”
왕은 상냥하게 얘기했다. 그 말에 잠깐 멈칫했던 네이드는 곧 아무 말도 못 들은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에리한에게 절절한 고백을 들은 밤, 소리오닌은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다. 과연 이세계에서 결혼까지 해서 잘 살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는 건 아니겠지?
에리한을 너무 좋아한다.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뒤로, 스스로도 어쩌지 못할 만큼 이 감정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다만, 자꾸 자신은 소리오닌이 아닌 김희은인 게 마음에 걸린다. 남의 것을 도둑질한 사람처럼 마음 한 구석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답답한 가슴을 통통 두드리던 소리오닌은 머리를 마구 흔들더니, 속으로 기합을 넣었다.
아냐, 지금 이 몸의 주인은 나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안 돌아온 거 보면 분명히 이 몸은 내 것이 맞아. 쫄지 말자! 에리한은 내 거다!
창밖의 둥근 달을 보며 손을 모은 소리오닌이 기도했다.
달님, 하나바톰 님, 공자님, 부처님, 예수님. 제발 제가 이곳에서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신에게 빌고 난 다음에야 조금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어젯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늦게 잠든 소리오닌은 결국 늦잠을 자고 말았다. 옆 침대를 쓰던 세리는 이미 짐까지 다 싸놓고 있었다.
“소리오닌 님!”
“으음.”
“얼른 일어나세요! 곧 출발한다고 했단 말이에요!”
“아아, 진짜? 으으응, 알았어. 일어날게. 일어났어.”
“눈을 뜨고 말하셔야죠! 계속 눈 감은 채로 일어났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소리오닌이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추며 세리가 소리쳤다.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그제야 소리오닌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방에 붙어 있는 세면대에서 대강 세수를 마친 소리오닌은 세리와 함께 로비로 내려왔다.
페릴과 에리한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늦잠을 자서.”
“괜찮습니다. 많이 피곤하셨습니까?”
소리오닌의 사과에 괜찮다 말한 에리한이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불쑥, 잘생긴 에리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소리오닌이 멈칫했다. 정말로 몸이 안 좋은지 거뭇해진 그녀의 눈 밑을 한 번 쓸었다.
그 모습을 본 세리는 페릴의 옆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거 내가 안 나서도 척척 진행되겠는데?
“에, 에리한 님! 얼른 출발해야죠!”
“아. 그럴까요. 오늘 가는 도시만 지나면 사브만에 도착합니다.”
“벌써요?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네요?”
드디어 사브만이 코앞이라는 생각에 소리오닌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의 변화에 웃음을 지은 에리한이 문을 열고 나섰다.
천천히 길을 따라 걷는 도중 소리오닌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다.
“에리한 님, 그 사브만으로 보낸 선물이요. 진짜 뭐가 들어 있었어요? 다시 살 수는 없을까요?”
“아, 선물 말입니까?”
“네, 네! 아무래도 계속 마음에 걸려서.”
울상이 된 소리오닌의 모습에 에리한은 어쩔 수 없이 진실을 밝혔다.
“사실…… 그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 아무것도 없다고요?”
소리오닌은 깜짝 놀라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반응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든 에리한이 얼른 자세히 설명을 했다.
“아버님께서 저를 소리오닌 님과 함께 보내주시기 위해 만든 명령입니다. 사실 사브만의 왕과 아버님은 선물을 주고받을 일이 없기 때문에, 제가 가는 것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허어……?”
대체 이게 무슨……?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은 소리오닌에게 에리한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제가 먼저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데. 제 불찰입니다.”
“아, 결국 아무 일도 없었으니 된 거죠. 아무튼 깜빡 속았네요.”
“화나셨습니까?”
“네?”
슬슬 소리오닌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에리한이었다. 그의 반응에 소리오닌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저 속인 거 미안해요?”
“물론입니다. 일부러 속인 건 아니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손 주세요.”
“?”
소리오닌이 왼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녀의 요구에 에리한이 의아한 얼굴로 소리오닌을 쳐다봤다.
“저 오늘 너무 피곤하니까 에리한 님한테 기대서 가야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제 지팡이 역할 좀 해 주세요.”
“아, 얼마든지.”
에리한이 재빨리 소리오닌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두근, 누구의 심장박동인지 모를 소리가 둘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
에리한이 얘기한 마을은 포레즈에서 걸어서 반나절이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사브만과 가까이 있는 곳이라 그런가, 마을 주위로는 온통 울창한 숲과 높은 성벽뿐이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에리한과 페릴을 알아보고 재빨리 영주인 로센 공작에게 보고했다. 그 보고를 들은 로센 공작은 하던 집무를 멈추고 에리한 일행을 맞이했다.
“왕자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장신인 에리한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와, 단단한 몸을 가진 로센 공작은 웃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에리한 또한 이 전과는 다르게 편한 얼굴로 로센 공작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 코찔찔이 페릴 아닌가?”
“로, 로센 공작님! 언제 적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로센 공작이 페릴의 분홍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놀렸다. 페릴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싫지는 않은 듯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듯한 그들의 모습에 소리오닌과 세리는 뒤에서 어색하게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에리한과 페릴에게 인사를 나누던 로센 공작이 소리오닌을 발견했다. 공작이 반가운 얼굴을 한 채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런, 소리오닌! 어렸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날 기억하나?”
“네?”
소리오닌의 지금 상태라면 어렸을 적 기억은커녕 가족들마저 못 알아볼 게 뻔했다. 하지만 전혀 못 알아보겠다고 정색하면 수습 못할 분위기로 넘어가겠지?
소리오닌은 한껏 반가운 얼굴을 가장하고 말했다.
“그, 그럼요! 기억나죠. 여전하시네요. 멋있으세요!”
“허허, 소리오닌은 그래도 사교성이 좀 늘었구나. 어렸을 때는 째려보기만 하더니.”
어른을 째려보기만 했다니…… 아무래도 원래의 소리오닌은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나보다. 몇 번의 증언들을 토대로 종합해보면 소리오닌은 콧대 높은 귀족 아가씨였던 게 분명하다.
원래 소리오닌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도도한 연기를 하기에는 내공이 부족하다고. 성격이 많이 바뀐 걸로 노선을 정한 소리오닌이 웃으며 로센 공작에게 답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많이 부족했죠. 지금은 그런 예의 없는 행동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답니다. 그때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그래,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그래도 삐뚤어지지 않고 잘 지내는 거 같아 보기 좋구나.”
“감사합니다.”
소리오닌의 살가운 태도에 기분이 좋아진 로센 공작이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꽤 길었던 요란한 환영 인사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