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페릴 님, 혹시 에리한 님이 소리오닌 님을 좋아하시는 건가요?”
“아직도 눈치 못 챘어? 이미 성 안에는 소문이 좍 퍼졌잖아.”
“저야 성 안에서 왕자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만큼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근데 소리오닌 님이랑 잘 될까요? 아무래도 에리한 님은 왕자님이신데.”
“뭐, 그렇게 결혼한 사례가 없던 것도 아니고.”
페릴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의 말에 세리의 눈에 호기심이 찼다.
“네? 이렇게 신분 차이가 있는 상대와 결혼하신 분이 계셨어요?”
“응? 응.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어. 에리한 님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전대 전하가 그렇게 결혼하셨지. 에리한 님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많이 따랐으니까, 신분 자체에 큰 거부감은 없으실지도 몰라.”
“그렇구나. 몰랐어요.”
세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분이 서로 좋아한다는 가정 하에, 어쩌면 소리오닌 님이 왕비가 되는 건가? 어머나! 이게 무슨 굴러들어 온 복이야?
세리는 소리오닌 님이 평생 좁은 집에 갇혀 있게 둘 수 없다는 목표가 생겼다.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바론의 왕비는 소리오닌 님이다. 좋아!
갑자기 주먹을 꽉 쥐고 허공을 향해 팔을 내지르는 세리의 모습에 페릴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리는 놀란 토끼 눈을 한 페릴의 손을 잡고 같이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페릴 님! 이제부터 저희는 소리오닌 님이 왕비가 되실 때까지 함께 하는 거예요!”
“으, 으응?”
“아셨죠? 페릴 님도 도와주시는 겁니다?”
“어, 알았어.”
세리의 패기에 페릴은 자기도 모르게 그러겠다고 대답해 버렸다.
근육이 가득한 남자들 사이에서 격한 몸의 대화는 많이 해봤지만, 이렇게 보들보들한 손은 처음 잡아 봤다. 그 감촉이 싫지 않아서 먼저 손을 떼지는 않았다.
세리는 여전히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부끄러운데 좋다. 페릴의 얼굴이 어느새 그의 머리색과 같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
이층에 위치한 에리한의 방으로 올라 온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오래 된 건물이라 방 안의 조명은 어두침침했고,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 에리한 님. 여기 앉아 보세요.”
어색한 침묵에 못 견딘 소리오닌이 먼저 말을 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리한이 침대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상의, 벗을까요?”
“네?”
“전에는 어깨 상의 벗고 봐 주셔서.”
에리한의 말에 화들짝 놀란 소리오닌이 크게 소리쳤다. 그녀의 반응에 의아함이 느껴졌지만 에리한은 차분히 얘기했다.
“아, 아아! 네! 네, 벗어야 할 것 같아요.”
“네, 그럼.”
에리한이 천천히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방 안에는 사락거리는 옷감이 부딪히는 소리만 가득 했다.
미치겠네, 예전에는 왜 아무렇지도 않았지? 이렇게 야한데! 소리오닌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고 옷을 벗는 에리한의 모습은, 누가 봐도 예술작품이라 칭할 만큼 외설적이고 아름다웠다. 옷 안에 감춰진 탄탄한 근육도 이제 보니 손대고 싶을 만큼 매끄러웠다.
“소리오닌 님?”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에리한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아, 네! 어, 어디가 아파요?”
같은 쪽의 팔과 다리가 동시에 나가는 어색한 발걸음으로 에리한의 옆에 다가갔다. 소리오닌은 바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에리한의 단단한 어깨를 잡고 말했다.
“소리오닌 님이 잡고 계신 그 부분 주위가 계속 뻐근합니다.”
“음.”
하지만 막상 에리한의 어깨를 잡자, 소리오닌은 곧 그의 근육 상태에 집중하게 됐다. 굳어 있는 근육을 풀어 주고 관절을 움직여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다. 한 번으로 완벽하게 낫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가벼워 질 것이다.
“어때요? 어깨 좀 움직여 볼래요?”
“이렇게 말입니까?”
에리한은 팔꿈치를 구부린 채로 어깨를 앞뒤로 돌렸다. 확실히 움직이기 수월했다. 그동안 아프지는 않았지만 계속 묵직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도 없어졌다.
역시 소리오닌 님의 치료는 대단하군. 에리한은 속으로 다시 한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확실히 움직이기 편합니다.”
“아마 내일 되면 다시 불편해질 거예요. 한 번에 완전히 좋아지는 건 어려우니까. 시간 날 때마다 치료해 드릴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에리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에게 마주 웃어준 소리오닌이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려고 할 때였다. 에리한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
생각지도 못한 에리한의 행동에 소리오닌이 크게 놀라 그를 내려다봤다.
“소리오닌 님.”
“……네?”
에리한이 조급한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소리오닌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게 붙잡힌 손이 마치 심장이라도 있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에리한은 천천히 소리오닌의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 하나하나에 모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소리오닌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소리오닌 님.”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부른 에리한이 말을 이어갔다.
“저는 소리오닌 님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바론으로 돌아가면 정식으로 청혼하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많이 고민하시고 제게 대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에, 에리한 님!”
당황한 듯한 소리오닌의 반응에 에리한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소리오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어쩌면 소리오닌 님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소리오닌 님을 찾기 전, 그 몇 분간의 제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습니다. 아마 소리오닌 님을 못 보는 상황이 온다면, 저는 제대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게 평생 소리오닌 님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절절하게 이어지는 에리한의 고백에 소리오닌은 울컥했다. 이 정도였나? 이렇게 깊은 마음으로 나를…….
고개를 숙여 입술을 꾹 깨물고 가빠오는 숨을 정리한 소리오닌이 고개를 들어 에리한을 바라봤다.
“고마워요. 에리한 님, 정말 고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갑작스러워서……”
“괜찮습니다. 저도 아직 정식으로 청혼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지금 제 마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안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에리한이 당황한 듯한 소리오닌을 달랬다. 정신없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자신에게 신경써 주는 게 고마웠다.
그 모습에 소리오닌이 웃으며 까치발을 했다. 가까이 오라는 소리오닌의 손짓에 에리한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저, 에리한 님이 싫지 않아요. 기다릴게요, 정식 청혼.”
소리오닌은 작게 속삭이고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에리한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
바론 수도의 성은 고요한 적막만이 가득 차 있었다. 왕과 왕비가 앉아 있는 단상 아래, 시녀장을 비롯한 시녀와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걸 지금 보고라고 하는 건가?”
“왕비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누가 죽이지 않는다 했나? 그딴 소리 말고, 린셀을 찾아내란 말이다!”
왕비가 부채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그녀가 보이는 히스테릭한 반응에 모두들 벌벌 떨며 더욱 더 고개를 숙였다.
“왕비, 그만 하시오. 이들이 무슨 잘못이오. 린셀이 제 발로 나간 것을. 아랫사람들을 다그쳐 봤자 해결이 되겠소?”
“제 발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게 아랫것들이 할 일입니다! 어찌 잘못이 없다 하십니까?”
“그렇게 치면, 린셀이 사라진 첫 번째 이유는 왕비가 아니오?”
왕은 차갑게 대꾸했다. 왕비는 그의 말에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저 때문에 린셀이 사라졌다고 말씀하셨나요, 지금?”
“그렇소.”
“어째서죠?”
미간을 구기며 말하는 왕비를 본 왕이 말했다.
“왕비가 린셀에게 혼인을 강요하지 않았소? 그렇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없어지지 않았겠지.”
“분명히 말하지만, 린셀은 제게 싫다고 하지 않았어요. 전하도 옆에서 보셨지 않습니까?”
“싫다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소? 린셀이 싫다하면, 혼인을 취소할 거였소?”
“……”
정곡을 찌르는 왕의 말에 왕비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한 번 흘겨 본 왕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직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건가? 누구와 갔는지도 모르고?”
“그게 공주님과 같이 사라진 시녀는 민츠라고 합니다. 왕비궁에서 일했던 시녀라고 하던데.”
그나마 이성적인 왕의 물음에 시녀장이 답했다.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였다.
“뭐?”
시녀장의 말을 듣고 답한 것은 왕비였다. 또다시 날카롭게 소리치는 왕비의 모습에 왕은 피곤한 듯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왕비는 왕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지금 민츠라고 했느냐? 민츠가 같이 사라진 게 맞느냐?”
“네? 네, 그렇습니다. 시녀들의 명단을 확인해 봐도 없어진 사람은 민츠뿐이었습니다.”
쾅! 주먹으로 팔걸이를 내리친 왕비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부러 그랬구나, 일부러 내게 그런 거였어. 민츠를 같이 빼돌린 걸 보면 예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을 테지. 그리고 그 계획의 중심에는 에리한이 있을 거고.
“왕비. 지금 무얼 하는 것이오? 혹시 짐작 가는 게 있소?”
“아니요, 아닙니다.”
어느새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왕비가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려 정리했다. 언제 흥분을 했냐는 듯 고요하게 돌아 온 왕비의 모습에 시녀들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왕비는 왕에게 살짝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무래도 린셀은 이번 혼인을 올릴 수 없을 것 같군요.”
“흠, 그렇겠지. 우선 사브만에 혼인할 수 없다고 전령을 보내야겠군.”
소리오닌이 혼인 서약서를 가져가긴 했지만, 아직 사브만에서는 혼인서약서를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로 주고받은 것은 아니니 혼인을 취소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의 명령에 제일 빠른 바람의 전령을 보내려고 준비하는 시종장을 왕비가 막았다.
“잠깐,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음?”
왕비가 새빨간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린셀은 혼인을 올릴 수 없겠지만, 아무래도 사브만과는 혼인 관계로 묶이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사브만에는 공주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에리한은 결혼할 수 없을 텐데?”
“네? 이 얘기에 에리한이 왜 나옵니까?”
“응? 아니 그러면 우리에게 린셀 아니면 에리한 말고 또 누가 있소?”
두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왕비는 그런 왕을 보고 더이상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소리오닌 공녀가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