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00)

032.

자신의 어깨를 꼭 쥔 그의 손으로부터 느껴지는 떨림에 소리오닌은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나온 것도 미안한데, 가방까지 잃어버렸으니. 속으로 가방을 훔쳐간 도둑에게 온갖 욕을 퍼부은 소리오닌이 차마 에리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얘기했다.

“에리한 님, 갑자기 사라져서 죄송해요. 그리고…… 에리한 님의 가방을 누가 훔쳐갔어요. 제가 잘 지키고 있었어야 하는데. 정말 죄송해요.”

울먹이며 말하는 소리오닌의 얼굴을 내려다 본 에리한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소리에 소리오닌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깟 가방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러다 소리오닌 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더 큰일입니다.”

“하지만, 사브만으로 보내는 중요한 선물이…….”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에리한은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운이 좋아 자신이 먼저 찾았지, 조금만 늦었어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리오닌을 겨우 달래서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헤에, 이거 무슨 일이야? 금발 도련님이랑 아가씨잖아? 겁도 없이 호위기사도 안 데리고 포레즈로 데이트 온 거야?”

“크아! 청춘이네, 청춘이야! 형씨! 우리도 청춘 좀 즐기려는데, 좀 도와주지? 뭐 가진 것 좀 없어?”

골목길 안쪽에서 껄렁한 차림새의 남자들이 튀어나와 에리한과 소리오닌을 막아섰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곱상하게 생긴 남자와 여자. 특별히 손쓰지 않아도 자신들의 손에 뭔가를 쥐어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제대로 된 사냥감에 남자들이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에리한은 품에서 작은 칼을 꺼내 본격적으로 협박하기 시작하는 남자들을 쳐다봤다.

어디서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고 찾아온다. 상대하기도 싫을 만큼 질 낮은 남자들을 보는 에리한의 눈에 냉기가 차올랐다.

안 그래도 지금 기분이 안 좋은데, 잘 됐군. 괜히 소리오닌 님께 안 좋은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고.

짧은 생각을 마친 에리한이 눈을 휘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남자들은 그가 겁을 먹고 좋게, 좋게 끝내려는 줄로 착각하고 말았다.

“그래, 도련님! 우리 많이 바라지 않아. 딱! 가지고 있는 것만 내놓고 가면 돼. 거기 아가씨는 그 머리핀까지만 놓고 가고.”

인심 쓰듯 말하는 남자의 요구에 소리오닌은 기가 막힌 웃음을 지었다. 이게 어떤 머리핀인데! 순간 화가 나서 남자에게 따지려던 소리오닌을 막아 선 에리한이 말했다.

“거기까지. 아무래도 곱게는 못 갈 것 같군.”

그의 말을 들은 남자들은 크게 웃었다.

“크하하, 아니야! 우리는 정말 아무 짓도 안 할 거라니까? 돈이랑 저 커다란 보석만 내놓는…… 컥!”

제일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에리한의 검이 그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아무런 준비 자세도 없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검이 생겼지? 에리한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가 어떤 검술을 쓰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남자의 어깨를 관통한 에리한의 검에서 붉은 피가 똑,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그 피를 본 에리한의 파란 눈이 순간 보라색으로 변하며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너 이 자식, 좋게 얘기할 때 듣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줄 테다!”

“이 새끼!”

같은 패거리가 다친 것에 눈이 돌아간 남자들은 아무도 에리한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남자들에게 피식, 웃음을 지은 에리한이 가볍게 바닥을 차며 칼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 차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단도로는 에리한의 머리칼 하나조차 건드릴 수 없었다. 

에리한은 일부러 그들의 급소가 아닌 관절 부분만 노렸다. 직접적으로 목숨이 위험하진 않지만, 통증은 어느 부분보다 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들이 하나둘씩 길바닥 위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주위로는 흥미로운 구경을 하듯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본 에리한이 어깨를 으쓱인 후 검을 없앴다.

소리오닌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그녀를 본 에리한의 눈이 어느새 파란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서우셨습니까?”

“……네?”

“저 남자들 말입니다. 어떻게 저런 식으로 떼로 몰려들 수가 있는 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에리한이 머리칼에 튄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니, 큰일은 저 사람들한테 난 거 같은데요. 소리오닌은 에리한의 엄살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의 표정을 오해한 에리한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

“보세요, 소리오닌 님. 이곳이 이렇게 위험한 마을입니다. 절대로 혼자 움직이면 안 됩니다. 아셨죠?”

말을 마친 에리한이 신발에 묻어 있던 피를 털어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이 마을에서 제일 위험해 보이는 건 에리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도 결국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리오닌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앞으로 조심할게요. 그런데 어디 다치신 데는 없어요?”

소리오닌이 예의상 물어봤다. 딱 봐도 에리한은 남자들이 튀긴 피 빼고는 멀쩡해 보였다. 에리한은 그녀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곧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미간을 구겼다.

“어깨가 많이 아픕니다.”

“…….”

거짓말. 어깨가 아픈 사람이 칼춤 추듯 움직인단 말이야? 소리오닌은 에리한의 새빨간 거짓말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곧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알았어요. 숙소에 가서 봐 줄게요.”

“네, 꼭 봐 주십시오.”

소리오닌이 치료를 해준다는 말을 하자마자, 에리한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약간의 소동으로 달이 떠 있었다. 소리오닌과 에리한은 어두운 거리를 천천히 걸어갔다. 

***

에리한과 소리오닌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로비 한쪽 구석에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세리와, 그런 그녀를 달래주고 있는 페릴이 있었다.

“세리!”

“소리오닌 님?”

소리오닌이 세리의 이름을 부르자, 세리의 눈에서 다시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소리오닌은 엉엉 울면서 자신에게 안기는 세리를 꽈악 안아줬다.

“세리, 미안해. 걱정 많이 했지? 내가 생각이 짧았어.”

“정말, 큰일 난 줄 알았어요! 흐앙!”

“미안, 미안해.”

아까 전에는 에리한의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그녀들의 감동적인 상봉을 보던 페릴이 뒤에 있던 에리한의 몰골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아니, 에리한 님, 피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 이거 내 피 아니야. 갑자기 달려드는 놈들 때문에.”

“그랬습니까, 에리한 님이라면 크게 걱정은 안 되지만 혹시나 했습니다.”

페릴이 얼굴에 가득했던 긴장감을 지우며 말했다. 그의 말에 에리한은 씨익 웃어 보였다.

“소리오닌 님, 저는 좀 씻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쉬고 계세요.”

“네, 알겠습니다.”

소리오닌에게 말한 에리한이 곧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제야 에리한 몸 곳곳에 묻어 있는 피를 발견한 세리가 깜짝 놀랐다.

“에, 에리한 님 다치신 거예요?”

“아니, 저거 에리한 님이 다쳐서 흘린 게 아니야.”

“네? 그럼요?”

“에리한 님이 다치게 한 사람들 피.”

소리오닌이 짧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그녀의 말에 세리의 눈이 더 커졌다. 

“에리한 님이요? 전혀 상상이 안 돼요!”

소리 높여 말하는 세리를 본 페릴이 웃으며 답했다.

“에리한 님은 원래 검술이 뛰어나셔. 바론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이지. 그러니까 이렇게 멀리가는 데 호위로 나 한 명만 데려가는 거잖아.”

“저, 저는 진짜 페릴님이 엄청 잘해서 그런 건줄 알았어요.”

“물론 나도 어디 가서 무시 받을 실력은 아니지만, 에리한 님에 비하면 아직 멀었어.”

“그 정도예요?”

에리한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세리가 신기해하며 말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리오닌이 조심스럽게 페릴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 페릴 님. 에리한 님은 평소에 칼을 안 갖고 다니시는데 어떻게 갑자기 칼이 생길 수가 있죠?”

“아, 아마 에리한 님 손목에 봉인해 놓은 칼을 쓰셔서 그런 걸 거예요.”

“손목에?”

선뜻 이해가 안 가는 페릴의 말에 소리오닌과 세리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들의 반응에 페릴이 웃으며 자신의 손목을 내보였다.

그의 손목 안쪽에는 금색으로 빛나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페릴이 짧게 주문을 외우자 그의 손에서 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와!”

소리오닌과 세리가 동시에 소리쳤다. 다시 주문을 외워 칼을 봉인한 페릴이 설명을 마저 이어갔다.

“이런 식으로 편하게 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멋있다! 그럼 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봉인해 놓는 건가요?”

“아, 그건 아닙니다. 이 마법진은 기사단의 임원들만 갖고 있습니다. 일반 병사들은 검을 들고 다니죠. 평소에는 검을 쓸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마법진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페릴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에리한이 내려왔다. 그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며 물었다.

“무슨 얘기 중이기에 이렇게 가까이 모여 앉아 계십니까?”

“아, 에리한 님! 아까 에리한 님이 사용하신 검에 대해서 페릴 님이 알려주셨어요!”

소리오닌이 말끔해진 에리한을 보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페릴을 힐끗 쳐다본 에리한이 소리오닌의 옆에 앉으며 자신의 손목을 보였다.

“이 마법진 말씀이십니까? 제게 물어보셨어도 됐을 텐데.”

“하, 하하. 물론 에리한 님이 알려주셨으면 저보다 더 자세히 말씀해 주셨겠죠!”

페릴이 재빨리 에리한의 기분을 파악하고 맞장구쳤다. 바임이 옆에 있었다면 쫌생이라고 말했겠지만, 페릴은 상관의 기분이 곧 자신의 운명인 기사 출신이었다.

에리한의 표정이 뾰루퉁했다. 소리오닌은 이제 알 것 같았다. 에리한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페릴에게는 미안했지만, 에리한이 귀여워 보였다. 속으로 키득거린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어깨를 잡았다.

“에리한 님, 올라가요. 제가 어깨 만져드릴게요.”

“네.”

소리오닌이 어깨를 만져준다고 하자마자 에리한의 표정이 확 펴졌다. 재빨리 대답한 에리한이 소리오닌을 데리고 이층으로 사라졌다.

로비에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리와 페릴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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