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던 마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에리한도 서둘러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곧 있으면 사람들이 린셀을 찾으러 나올 테고, 혹시나 자신이 브리온에 있는 걸 들키게 된다면 골치 아플 것이 분명했다.
마침, 페릴이 마굿간에서 말을 끌고 나왔다. 말을 나눠 탄 두 사람은 각각 소리오닌과 세리를 뒤에 태우고 숲을 향해 출발했다.
“소리오닌 님, 이제부터는 마을에서 잠만 자고 대부분 숲을 달릴 겁니다. 혹시나 불편하면 말씀해 주세요.”
“네, 알겠어요.”
소리오닌은 에리한의 넓은 등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자신의 가방 안에 있는 린셀의 혼인 서약서는 어떻게 되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공주의 부재를 모르는 척 사브만에 무사히 도착하는 게 먼저였다.
***
한편, 점심이 다 된 시간. 공주의 방에서는 여전히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린셀 공주님이 깨우지 말라 했다고?”
시녀장은 아침도 거른 채 방에서 나오지 않는 린셀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린셀의 명령을 전한 시녀를 다시 한번 다그쳤다.
“네, 분명히 아침에 공주님의 방에서 나온 시녀 두 명이 얘기했어요!”
“하지만 너무 늦는 게 아니신가? 내가 한 번 들어가 봐야겠어.”
“네. 솔직히 이렇게까지 잠이 많으신 분이 아니잖아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방을 바라보던 시녀장이 똑똑,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린셀 공주님, 벌써 점심시간입니다. 일어나셔야죠.”
힘을 줘 크게 말해도 전혀 반응이 없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시녀장이 살며시 문을 열었다. 커다란 창을 통해 햇빛이 비추는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 쓴 린셀이 누워 있었다.
얕은 한숨을 내쉰 시녀장이 그녀의 침대 곁으로 가서 이불을 들추며 얘기했다.
“공주님, 혹시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의사를 부를…… 헉……!”
걷어진 이불 안에는 린셀 대신 베개 몇 개가 놓여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공주의 행방에 브리온 별장은 발칵 뒤집어졌다.
“대체 뭣들 한 거야? 어제 저녁부터 아침에 될 동안 아무도 공주님을 못 봤다는 게 말이 돼?”
“저, 정말입니다! 맹세해요! 공주님은 절대 이 문을 통과하시지 않으셨어요!”
시녀장의 서슬 퍼런 눈빛에 현관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과 시녀들이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맹세코 공주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며 억울해 했다. 계속 되풀이 되는 억울하다는 말에 한숨을 내쉰 시녀장이 이번에는 다른 인물들의 행방을 물었다.
“아침에 린셀 공주님의 명령을 전한 시녀들은 아직도 못 찾았나?”
“저…… 그게, 그 시녀들은 새벽에 브리온 시내 쪽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뭐? 그 뒤로 안 들어온 거야?”
“네. 그 뒤로 그 시녀들을 본 사람들이 없습니다.”
시녀장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장 며칠 후면 바론으로 돌아가서 결혼 준비를 해야 할 공주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브리온을 샅샅이 뒤져서 공주님을 찾아 와. 공주님을 못 찾는다면 그 시녀들이라도 내 눈앞에 데려와야 해.”
거짓말을 한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감히 무단 외출까지 했단 말이지? 생각할수록 괘씸한 시녀들의 행동에 시녀장의 꼭 쥔 주먹이 분노로 부들거렸다.
“저 그러면 지금이라도 왕비님께 연락해야할까요? 공주님이 사라지셨다고…….”
“아직. 오늘 하루만 기다려 보도록 해. 이 일이 알려지면 우리 모두 무사하지 못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단 한 번도 큰 사고를 친 적이 없던 공주였는데,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냥 없어진 것도 아니고, 중대한 일을 앞에 두고 사라지다니.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은 시녀장은 제발 공주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
“소리오닌 님,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에리한 님은요?”
“저도 괜찮습니다. 우선 여기에 조금만 앉아 계십시오. 페릴을 돕고 오겠습니다.”
바임과 린셀을 보낸 후, 에리한의 일행은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숲의 초반과는 다르게 어느 순간부터 주위가 어둡고 음습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갑자기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다행히 위험한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말들이 놀라 중심을 잃는 바람에 네 사람 모두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에리한과 함께 마지막 몬스터를 처치한 페릴이 말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아. 말들은 어때?”
“네. 다행히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페릴의 말대로 그들의 근처에 있던 말들은 콧김을 내뿜으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에리한이 말들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소리오닌 님!”
“아, 세리. 어디 다치진 않았어?”
“저, 손목이 조금.”
“정말? 이리 내 봐!”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한 세리의 손목을 보고 혀를 찬 소리오닌이 가방에서 부목과 붕대를 꺼냈다. 재빨리 손목이 움직이지 않게 단단히 고정했다.
“아휴. 속상해, 정말. 거기서 갑자기 몬스터가 튀어나올 게 뭐람.”
“그러게요. 그래도 상급 몬스터가 아니라서 다행이죠.”
“그러면 뭐해. 세리, 네가 이렇게 다쳤잖아!”
“괜찮아요. 소리오닌 님이 치료해 주셔서 금방 나을 거예요.”
속상해 하는 소리오닌을 향해 말갛게 웃어 보인 세리가 말했다. 다쳐서 아픈 건 세리인데 자신이 더 성을 낼 수는 없어서 소리오닌은 굳어 있는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세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많이 아프면 얘기해, 마을에 도착하면 약이라도 사 먹게. 알았지?”
“네, 걱정 마셔요.”
그녀들이 응급처치를 하고 있을 때 에리한과 페릴은 몬스터의 사체를 치우고 있었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겠습니다. 피 냄새를 맡고 더 큰 녀석들이 모여들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알았어. 어서 서두르자. 다음 도착지가 포레즈 맞지? 하필이면 맘 놓고 쉴 수도 없는 곳이군.”
“네! 최대한 머무르는 시간을 짧게 잡는 수밖에 없죠.”
서둘러 말에 올라탄 네 사람은 쉬지 않고 달려 포레즈에 도착했다.
전에 에리한이 얘기한대로 포레즈는 사논이나 브리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길가 곳곳에는 불량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어린 아이들 또한 특유의 똘망한 눈동자 대신 초점이 없는 멍한 눈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세리, 소리오닌 님. 이곳은 아무래도 바론에서 제일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니, 저희 곁에 꼭 붙어 다니셔야 합니다.”
숲을 벗어나면서부터 말에서 내린 네 사람은 천천히 걸어갔다. 마을을 통과하는 도중 페릴이 진지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칠게 생긴 남자들과 눈이 마주친 세리는 깜짝 놀라 소리오닌의 손을 꼭 쥐었다.
“세리, 괜찮아. 아까 봤지? 페릴 님이랑 에리한 님. 몬스터도 처치하시잖아. 이런 못된 사람들 정도는 위험하지도 않을 거야.”
“물론 그…… 그렇긴 하지만요.”
소리오닌의 위로에 안심이 되면서도, 계속해서 따라오는 험악한 시선에 자꾸 움찔거리는 세리였다.
다행히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었다.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 에리한이 소리오닌에게 말했다.
“이곳은 마을을 따로 관리를 하는 영주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숙소에서 지낼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늘 저녁만 지내면 되니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정중히 부탁하는 에리한에게 소리오닌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숙소 안에만 있을 예정이고 내일 아침 일찍 벗어날 테니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우선 세리와 소리오닌에게 로비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 에리한과 페릴은 방을 예약하기 위해 주인을 찾으러 갔다.
각자의 짐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세리는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리, 같이 가줄까?”
“아니에요! 바로 코앞인 걸요? 크게 소리 지르면 다 들릴 거리니까, 걱정 마셔요.”
세리는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써 있는 화장실 표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세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리오닌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직 숙소의 주인을 못 찾았는지,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도중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옆에 있던 에리한의 짐을 채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뭐라 알릴 틈도 없이 소리오닌은 그 사람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몇 분쯤 달렸을까, 에리한의 가방을 훔친 도둑은 복잡한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찾기에는 무리였다.
“하아, 저걸 어쩌지?”
그 안에는 사브만에 전해 줄 선물이 들어 있을 텐데. 좀 더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던 자신을 책망하며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비추고 있는 마을은 조금 전보다 더 음산해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무모하게 뛰어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 걸음을 빨리 했다.
“소리오닌 님!”
그녀의 눈에 멀리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고 있는 에리한이 보였다.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 그의 등장은 너무나 반가웠지만, 에리한의 가방을 도둑맞았다는 생각에 소리오닌은 금방 의기소침해졌다.
“에리한 님…….”
“이게 대체! 아니, 아무 말도 없이 왜 혼자 나오셨습니까?”
그답지 않게 크게 소리 지르는 에리한의 모습에 소리오닌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놀란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은 에리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분명히 제가 위험한 마을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제가 얼마나 걱정할 지 생각이나 해 보셨습니까?”
“아, 아니.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그녀가 잘못 됐을까 봐 온갖 걱정을 하며 흥분한 에리한에게 소리오닌의 변명은 들리지 않았다.
“제발! 제발…… 이런 식으로 사라지지 말아 주십시오.”
소리오닌의 어깨로 손을 올린 에리한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