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00)

030.

갑작스러운 물음에 민츠는 들킨 건가 싶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을 때 옆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린셀 공주님께서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하셔서 다시 봐 드리고 나오는 길입니다.”

“그래? 많이 불편하시대?”

“아뇨, 그렇지는 않으신 것 같아요. 그리고 피곤하시다고 공주님이 먼저 부르기 전까지는 방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린셀의 입을 통해 매끄럽게 나오는 말에 그녀 앞에 있던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알았어. 가서 할 일들 해.”

“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두 사람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 손만 꼭 잡은 채, 한마디 말도 없이 빠르게 걸었다.

철컹, 린셀과 민츠는 정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도로로 튕겨져 나왔다.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쉰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다.

“공주님, 어쩜 이렇게 연기를 잘하세요? 저는 너무 놀라서 완전 얼음처럼 굳어 있었는데.”

“어떻게든 나가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서 그랬나 봐. 자연스러웠어?”

“엄청요! 대단하세요, 정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린셀을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던 민츠가 문득 생각 난 사실에 린셀에게 물었다.

“근데 저희 어디로 가는 건가요? 아예 브리온 밖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 아침에 브리온 광장에 있는 분수 앞에서 보기로 했어.”

“그렇구나. 가까워서 다행이에요.”

민츠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민츠, 너 내가 누구 만나는지 궁금하지 않아?”

“네? 어, 음.”

안 궁금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자신이 궁금해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츠를 본 린셀이 말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 보면 아마 민츠, 너도 엄청 좋아할걸?”

“그, 그런가요?”

“응, 물론이지! 그러니까 얼른 가자.”

한껏 기대감에 부푼 얼굴을 한 린셀이 민츠를 이끌었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린셀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브리온 광장에 도착했다. 

아침 이른 시각이라 광장은 평소보다 한산해 보였다. 고개를 두리번거려 분수대를 찾던 민츠는 눈에 익은 실루엣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왕자님과 사브만으로 떠난 자신의 오빠가 분수대 앞에 서 있었다.

“저기 있다! 민츠, 바임 님이 보여?”

“네. 근데 왜 오빠가 여기에…….”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민츠가 말했다. 

그때, 민츠와 린셀을 발견한 바임이 그녀들 앞으로 뛰어왔다. 

“린셀 님! 민츠!”

“오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사브만에 가야 할 사람이 여기에 있는 것도 이상한데, 공주님이 만나려고 한 사람이 오빠라고? 

바임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에게 설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민츠. 어떻게 된 거냐면…….”

바임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찰나, 바임의 옆에 있던 린셀이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민츠, 이제 우리는 가족이 될 거야! 나는 바임 님이랑 결혼할 거거든! 어때, 좋지?”

린셀이 바임의 팔짱을 끼고 웃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민츠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소리오닌은 창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난 세리는 침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세리, 잘 잤어?”

“네! 소리오닌 님,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아냐, 괜찮았어. 얼른 내려가서 아침 먹자.”

“네!”

방을 정리하고 계단을 따라 내려오던 소리오닌의 눈에 에리한과 페릴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함께 아침을 먹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갔다.

“에리한 님, 페릴 님! 좋은 아침이에요!”

“아, 소리오닌 님. 이쪽으로.”

소리오닌의 인사에 그녀를 쳐다본 에리한이 자신의 옆 자리를 가리켰다. 소리오닌은 그의 손을 따라 옆자리에 앉았다. 세리 또한 페릴의 옆에 앉아 아침 식사 메뉴를 보고 있었다. 

식사 주문을 위해 직원을 찾던 소리오닌이 그제야 옆 테이블에 바임과 모르는 여자 두 명이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바임 님 옆에는 누구세요?”

뭔가 심각한 분위기의 테이블을 보며 에리한에게 조그맣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잠시 뜸들이던 에리한은 난감한 웃음을 띠며 답했다.

“음, 바임 옆자리에 앉은 여자아이는 바임의 여동생 민츠입니다. 어마마마의 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맞은편은 제 여동생 린셀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고 있던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여동생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린셀을 쳐다봤다. 린셀은 여전히 갈색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 머리색이랑 옷차림이 공주님이라고 하기에는…….”

지금 린셀은 빈말이라도 우아하다는 말이 나오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복동생인건가? 설마, 그 유명한 출생의 비밀? 소리오닌은 전혀 닮지 않은 두 남매를 번갈아봤다. 어쩐지 한국에서 보던 드라마의 줄거리들이 떠올랐다. 

몇 번 고개를 돌려 보더니 묘한 표정이 된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이 급히 덧붙였다.

“지금은 약을 써서 머리색과 생김새를 살짝 바꿨습니다. 원래는 저와 같은 금발입니다.”

“아아, 네…… 네?! 얼굴을 바꿀 수 있어요?”

“마법으로 만든 약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오, 신기해라! 소리오닌은 반짝이는 눈으로 린셀을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푸른 눈과 하얀 피부, 도톰한 입술은 에리한과 똑 닮아 있었다.

소리오닌의 눈길을 받고 있는 린셀은 정작 눈앞에 앉아 있는 바임을 보느라 바빴다. 여기로 오면서도 혹시 못 만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큰 모험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만났으니 떨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린셀은 생글생글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바임의 손을 꼭 잡았다. 

“저, 공주님.”

린셀의 적극적인 행동에 바임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으음, ‘공주님’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냥 편하게 ‘린셀’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린셀 님, 손 좀…….”

“‘린셀 님’도 싫어요.”

린셀이 뾰루퉁한 얼굴로 얘기했다. 그녀의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볼을 보던 바임이 낮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린셀. 손 좀 놔 주십시오. 사람들이 봅니다.”

“근데, 보면 어때서요? 우리는 결혼할 사이인 걸요!”

바임을 꽉 잡은 채 놓지 않고 말하는 린셀을 보던 민츠가 물었다.

“고, 공주님. 정말 저희 오빠랑 결혼하시려고요? 사브만의 왕자님은 어쩌고…….”

“민츠, 사브만 얘기는 꺼내지도 마. 내가 미쳤니? 그 나라 왕자랑은 절대 결혼 안 해! 나는 바임 님이랑 결혼할 거라고!”

린셀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오히려 사색이 된 민츠가 바임의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바임은 양쪽에서 자신을 들들 볶는 두 여자 때문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의 곤란한 표정을 본 에리한이 린셀을 말렸다. 

“린셀, 적당히 해. 어리광 그만 부려.”

나직이 타박하는 목소리에 린셀이 발끈했다. 

“오라버니는 정말 뭘 모르시네요. 좋아한다는 표현에 적당이 어디 있나요? 그동안 못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 당장 키스라도 해 주고 싶은 걸 참고 있는 중이라고요!”

“린셀.”

“흥, 됐어요! 오라버니랑은 말이 안 통해요!”

반대쪽으로 휙 고개를 돌리는 린셀을 보며 에리한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와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릴 때는 언제고, 일이 잘 풀리니까 내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건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에리한의 모습에 오히려 바임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던 소리오닌은 바임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린셀의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저렇게 마음을 숨기지를 못할까, 온몸으로 좋아하는 감정을 내뿜는 린셀이 너무 귀여웠다.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리한의 팔에 손을 올린 소리오닌이 말했다. 

“에리한, 그만하고 얼른 밥 먹어요. 어서 출발해야죠.”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바로 수긍한 에리한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린셀은 콧방귀를 꼈다. 아니, 누가 누구보고 적당히 하라는 거야? 아주 말 잘 듣는 개가 따로 없는데.

그렇게 대강 일단락 된 남매의 싸움은 그들이 출발하기 전 다시 불 붙고 말았다. 

“린셀. 바임 부려먹지 말고, 어디 가서 예의 없게 굴지 말도록 해.”

“제 걱정은 마시고 에리한 오라버니나 잘하세요. 저도 내년이면 성인식을 하는 숙녀랍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라버니보다 더 빨리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고요!”

“뭐? 하아, 못하는 말이 없군.”

바임 옆에 꼭 붙어서 얄밉게 대꾸하는 린셀을 본 에리한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린셀은 에리한이 소리오닌의 앞에서는 본 성격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그의 머리끝까지 기어 오르는 중이었다. 

“에리한 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바임. 그래, 린셀에게 너무 휘둘리지 말고. 몇 달간만 잘 숨어 있다가 오도록 해. 머물 곳은 다 정해놨지?”

“네. 물론입니다. 함께 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페릴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에리한은 그의 뒤에서 눈만 도로록 굴리고 있는 페릴을 보며 말했다. 페릴은 아침에 대강 얘기를 듣긴 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믿기지는 않았다. 

린셀 공주님이 사실은 바임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과의 결혼이 싫어서 함께 도망칠 정도로. 생각보다 추진력이 엄청난 공주님이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덩굴보다 더 질길지도 몰랐다.

물론 그것 외에 에리한과 소리오닌 역시 이 일에 관련되어 있었지만. 에리한은 거기까지는 너무 복잡해 설명에서 생략했다.

“어서 가. 이제 곧 사람들이 린셀이 없어진 걸 알아차릴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에리한의 재촉에 바임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던 린셀이 얼른 소리오닌에게 다가왔다. 

“소리오닌 맞죠?”

“네? 네.”

“우리 오라버니, 잘 부탁해요. 그럼 다음에는 정식으로 궁에서 만나요!”

린셀은 소리오닌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한 채 준비 된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는 이미 민츠와 바임이 타 있었다.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을 한 민츠의 옆에 린셀이 앉았다.

“자, 그럼 가 볼까요? 출발!”

한없이 신난 린셀의 구령에 맞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부지 같은 그녀의 모습에 모두의 걱정이 더 깊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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