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우, 우와!”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크게 소리 낸 소리오닌이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종이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붙잡았다.
“에리한 님! 그럼 제 맹세도 이뤄지는 건가요?”
“네, 물론입니다.”
그녀가 환하게 웃는 걸 본 에리한이 작게 헛기침을 한 뒤,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를 소리오닌에게 건넸다. 소리오닌은 에리한이 건네는 크림색의 주머니를 받은 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예요?”
“브리온에 온 기념품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소리오닌은 얼떨떨한 얼굴로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의 안에는 머리핀이 있었다. 소리오닌의 눈과 똑같이 초록색으로 빛나는 보석이 박힌 머리핀이었다.
딱 봐도 엄청 큰 크기의 보석에 놀란 소리오닌이 에리한에게 말했다.
“이거 정말 제가 받아도 되는 거예요? 기념품이라고 하기에는…….”
“제 성의이니 꼭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커다란 보석이 부담스러운 듯한 반응에 에리한이 얼른 덧붙였다. 소리오닌은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소리오닌이 풀어놓고 있던 머리카락을 올려 묶으며 물었다. 그녀에게 웃으며 말한 에리한은 슬며시 그녀의 뒤에 가서 섰다. 그 다음 소리오닌의 손에서 머리핀을 가져온 에리한이, 곱슬거리는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기기 시작했다.
“거울이 없으니까, 제가 대신 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에. 감사해요.”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손가락이 느껴지자, 소리오닌은 등 뒤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소리오닌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을 봤지만, 에리한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계속해서 만지고 싶은 걸 겨우 참은 에리한이 탁, 소리를 내며 머리핀을 고정시켰다.
그녀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메랄도가 소리오닌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에리한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 됐습니다. 역시 잘 어울리십니다.”
“그래요? 이따 거울로 봐야겠어요, 안 그래도 머리카락이 좀 거추장스러웠는데, 정말 잘 쓸게요!”
소리오닌은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어 답한 에리한이 문득 생각난 궁금증을 물었다.
“근데, 하나바톰 님 앞에서 무슨 맹세를 하셨습니까?”
“음…… 이런 건 비밀 아닌가요? 말하면 재미없죠!”
“비밀인 겁니까?”
“어? 그럼 에리한 님은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소리오닌이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에리한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비밀입니다.”
“네? 뭐죠? 왠지 말해 주려고 했던 거 같은데요?”
“아닙니다. 저도 비밀이었습니다.”
입을 꾹 다문 에리한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소리오닌이 말했다.
“으음, 그러면! 여기서 한 맹세가 이뤄지게 됐을 때 말해주기로 하는 거 어때요?”
“좋습니다. 과연 누구의 맹세가 먼저 이뤄지는지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좋아요. 약속!”
소리오닌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에리한은 갑자기 내밀어진 그녀의 손가락을 빤히 쳐다봤다. 에리한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소리오닌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이거 몰라요? 약속하는 거.”
“네?”
여기는 이런 동작이 없나 보네. 소리오닌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뻗어 그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러고 나서 손목을 꺾어 서로의 엄지를 맞대고 꾹 눌렀다.
“제가 사는 곳에서는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기로 할 때 이렇게 해요.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로 도장을 찍는 거죠!”
소리오닌은 씨익 웃으면서 서로 맞댄 손을 흔들며 말했다.
“초크센에는 제가 평소 몰랐던 흥미로운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흠, 아무래도 바론이랑은 다른 나라니까요.”
초크센 사람들이 알면 뒤통수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를 따라 웃은 에리한이 걸려 있는 손가락을 풀고 그녀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앗?!”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소리오닌이 깜짝 놀라 에리한을 쳐다봤다.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본 에리한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바론에서 하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동작입니다.”
“이…… 이게요?”
“네. 그렇습니다.”
소리오닌은 너무 평온한 그의 표정에 자라나는 의심의 싹을 잘라냈다. 엄청 낯간지러운 표현이라 생각하면서.
잠깐 고민하던 얼굴을 하던 소리오닌의 표정이 어느 정도 납득한 듯이 바뀌자, 에리한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바론에는 문서 작성이 아닌 이상, 따로 약속을 하는 동작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한 행동은 사모하는 사람에게 하는 맹세의 입맞춤이었다. 소리오닌이 나중에 알게 되면 놀라겠지만, 싫어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바톰의 앞에서 한 자신의 맹세가 이뤄질 테니까.
***
린셀은 저녁 늦게 브리온의 별장에 도착했다. 그녀가 별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시녀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공주님. 여기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죠?”
“으응, 피곤해.”
살갑게 말하는 시녀장에게 대답한 린셀이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민츠와 눈을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민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린셀은 그런 민츠를 지나치며 작게 속삭였다.
“민츠. 모두 잠들면 조용히 내 방으로 와.”
“……?”
눈치가 빠른지 민츠는 눈만 동그랗게 떴을 뿐, 소리내어 묻지 않았다. 티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민츠를 본 린셀이 입술 끝만 올려 미소 지었다.
밤이 깊은 시간. 잠들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눈을 깜빡이던 민츠가 살며시 일어났다. 같은 방에 있는 시녀들은 깊은 잠에 빠졌는지 숨소리도 안정적으로 들려왔다.
발소리도 나지 않게 살금살금 복도로 나간 민츠는, 보초들의 눈길을 피해 린셀의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린셀이 자신의 방 앞에는 사람을 미리 물러가게 해놨는지, 들키지 않고 방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똑똑,
“들어와.”
민츠가 낸 작은 노크 소리에 린셀이 대답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민츠가 말했다.
“부르셨나요, 공주님?”
“응. 어서 와.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어.”
“네, 어떤 일을 하면 될까요?”
린셀이 웃으며 민츠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린셀의 손짓에 쭈뼛거리면서도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는 민츠였다.
“민츠, 혹시 여벌옷을 가져왔어?”
“네! 몇 벌 가져왔습니다.”
“그럼 나 한 벌만 빌려주면 안 될까?”
“제 옷을요?”
지금 린셀이 입고 있는 옷에 비하면 자신의 옷은 거적때기나 마찬가지였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린셀의 말에 민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나 사실 여기를 탈출해야 하거든. 좀 도와 줘.”
“네에?”
순간 비명을 지를 뻔한 민츠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텁, 막았다. 린셀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쳐다보는 민츠에게 윙크했다.
“내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근데 몰래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도와줄 거지?”
“아, 네. 알겠습니다. 얼른 가서 옷을 가져올게요!”
“응, 고마워!”
민츠는 재빨리 방을 나섰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눈치 빠르게 자신이 원하는 걸 알아채다니, 점점 민츠가 맘에 들었다.
린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개인적으로 챙겨온 가방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꽤 어렵게 구한 약이었다. 린셀은 갈색의 물약이 들어 있는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 다음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머리 위로 약을 쏟아 부었다.
차가운 느낌에 살짝 몸을 부르르 떨던 린셀은 빠르게 변하는 머리색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벽에 걸려 있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민츠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민츠는 안에서 들려오는 린셀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 앉아 있는 린셀은 풍성하고 빛나던 금발이 아닌 평범한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고, 공주님? 머리색이!”
“아, 이거? 머리색을 바꿨어. 들키지 않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잖아? 어때?”
깜짝 놀라 묻는 민츠의 말에, 린셀은 천진하게 웃으며 답했다. 거기에 커다란 눈망울 또한 평소보다 작아져 있었다.
겉모습을 바꿔주는 약이 있다는 소문만 들었었는데, 진짜 그런 약이 있었단 말이야? 민츠는 저도 모르게 린셀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공주님,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응. 그럼, 만져 봐도 돼.”
민츠가 조심스럽게 린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신기하게도 손바닥에 갈색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너무 신기해하는 민츠의 모습을 본 린셀이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꽤 괜찮은 약이지? 효과는 3일이라 좀 짧지만.”
“너무 신기해요! 어쩜 이렇게 자연스러울까요? 머릿결도 상하지 않고 그대로에요! 얼굴도 전혀 못 알아보겠어요!”
“자, 이제 옷을 줄래? 미리 갈아입고 아침 일찍 나가자.”
“네? 저도 같이 가는 건가요?”
린셀에게 옷을 건네던 민츠가 놀라서 물었다.
“그럼, 나 혼자 보내려고? 한 번도 혼자 안 나가봤는데…….”
“아, 아니요! 제가 꼭 같이 갈게요! 걱정 마세요!”
자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하는 민츠에게 고맙다고 말한 린셀이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탐스럽게 풀어 놨던 머리카락도 질끈 묶고, 예쁘게 칠했던 입술색도 박박 문질러서 지워 버렸다.
순식간에 아름다운 공주님에서 평범한 여자아이가 되었다. 민츠와 나란히 서 있으니 자매 같기도 했다.
“민츠, 나 들키지 않겠지?”
“네, 네! 공주님인 줄 전혀 모르겠어요!”
“좋아. 이제 나갈 준비를 하자.”
이불 안에 베개를 넣어 불룩하게 만든 린셀이 민츠의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왔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시간이라 별장에는 몇 명의 시녀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을 것 같아 안심한 두 사람이 막 계단을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거기, 왜 아침 일찍부터 공주님 방에서 나오는 거야?”
복도의 문을 열며 환기시키던 시녀 한 명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