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00)

028.

에리한과 함께 브리온의 시내로 나온 소리오닌은 이색적인 풍경에 입을 벌리고 구경하느라 바빴다. 

생각보다 훨씬 좋아하는 소리오닌의 모습에 에리한도 낮은 웃음을 흘렸다. 

“소리오닌 님, 어떠십니까? 브리온은 마음에 드십니까?”

“네, 정말 예뻐요! 이곳에 와서 바다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색이 정말 멋지네요!”

“다행입니다. 브리온에서는 발길 닿는 곳 어디를 가더라도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으실 겁니다.”

“오늘 이렇게 멋진 구경 시켜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얼굴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둘은 작은 벽돌로 태양과 바다, 꽃을 수놓은 길을 따라 걸었다. 골목마다 있는 장신구 가게들의 물건들이 햇빛을 받아 더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특히 브리온은 여러 가지 보석들이 생산되는 곳으로도 유명해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관광지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반짝거리는 가게들이 많았던 거였네요.”

유난히 보석들이 많았던 가게들을 보며 소리오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걸어가기를 몇 분, 에리한의 걸음이 어느 가게 앞에서 멈췄다. 그가 계속 뭔가를 보고 있는 걸 눈치챈 소리오닌이 의아한 얼굴로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쳐 온 가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장신구 가게였다. 에리한이 뭔가에 홀린 듯이 가게 문을 열면서 얘기했다. 

“소리오닌 님, 여기 좀 들어가 봐도 될까요?”

“네? 네, 그래요!”

소리오닌은 서둘러 가게를 향하는 에리한을 따라 들어갔다. 에리한이 사실은 보석을 많이 좋아한다거나, 사치가 심하다거나 그런 성격이었나 생각이 든 소리오닌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게 안은 밖에서 봤던 것 보다 더 화려하고 멋진 악세사리들이 많이 있었다. 색색으로 나눠놓은 장신구들로 소리오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천히 구경을 하고 있는 그녀를 슬쩍 쳐다본 에리한이 재빨리 물건 하나를 계산대에 올려놨다.

“이거 주십시오.”

그가 올려놓은 물건을 집어 든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네. 어머, 손님 역시 안목이 있으시네요. 이건 메랄도 중에서도 상급이랍니다! 인기가 많아서 갖다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가는데, 운이 좋으셨네요?”

“그렇습니까?”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이 자신의 말에 대꾸를 해오자, 신이 난 주인이 줄줄이 얘기를 이어갔다.

“그럼요! 메랄도 자체는 흔한 보석이지만, 이렇게 영롱하게 빛나는 건 찾기 힘들죠. 혹시 프러포즈를 위한 선물인가요? 그렇다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시죠! 하나바톰의 축복 앞에서 주신다면 최고일 거예요!”

“조언 감사합니다.”

에리한은 싱긋 웃으며 계산을 마쳤다. 장신구 가게 주인은 내내 뒷모습만 보여주다, 뒤 돌아 선 소리오닌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유독 눈에 띄는 녹색 눈을 본 주인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쩐지 들어오자마자 메랄도를 집더니만! 아직은 약간의 거리가 있는 두 사람을 보던 주인은 속으로 말했다. 하나바톰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

“뭐 사셨어요?”

“아, 그냥.”

에리한이 어쩐지 말하기 꺼려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소리오닌은 뭘 샀길래 저렇게 꽁꽁 싸매고 있나 궁금했지만, 어쩐지 예전처럼 장난을 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 번 깨달은 마음은 물밀듯이 몰려왔다. 계속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에리한을 보며 긴장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의 대답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에리한을 따라 걸었다.

“잠시 바다 구경을 하시겠습니까?”

“좋아요!”

한동안 말없이 걷던 에리한이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소리오닌이 반색을 하고 대답했다. 평소에도 산 보다는 바다를 좋아했다. 이세계에도 바다가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둘은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언덕 아래 펼쳐진 바다에는 잔잔한 파도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희게 빛나는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신나서 달려가고 싶은 기분과 달리 부드러운 모래에 자꾸 발이 푹푹 빠져서 휘청거렸다. 

“소리오닌 님, 제 손을 잡고 가시죠.”

불안한 듯 그녀를 쳐다보던 에리한이 재빨리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소리오닌은 눈앞에 놓인 희고 커다란 손을 쳐다봤다. 꽤 많이 잡아 본 손인데, 오늘따라 그의 손을 잡는 것이 왜 이렇게 떨리는지.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킨 소리오닌의 손이 천천히 에리한에게 향했다. 곧 커다랗고 따뜻한 손에 감싸였다. 

“감사합니다. 걷기가 훨씬 수월하네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바다 근처라 바람이 좀 차가우니 조금만 더 걷고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소리오닌의 손이 바람 때문에 차다고 생각한 에리한이 말했다. 정작 그녀는 바람이 차다는 것도 못 느끼고 있었다. 소리오닌의 손이 차가운 건 급격히 긴장 된 몸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런 마음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에리한은 계속해서 차갑기만 한 소리오닌의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혹시 몸이 불편하십니까? 손이 너무 찹니다.”

걱정스런 얼굴로 허리를 숙여 소리오닌과 눈높이를 맞춘 에리한이 말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원래 몸이 차서 그래요!”

“그랬습니까……?”

갑자기 눈에 들어온 그의 파란 눈동자를 본 소리오닌이 얼굴을 푹 숙이며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평소와 뭔가 다른 듯한 모습이었지만 정확히 감이 안 잡혔다. 결국 소리오닌의 컨디션이 안 좋다고 결론을 내린 에리한이 올라가자며 그녀를 이끌었다. 

소리오닌은 아무 말 없이 에리한을 따라 올라갔다. 그녀 자신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태어나서 남자 손 한 번 못 잡아 본 것처럼 이게 뭐야. 속으로 자기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한 소리오닌은 그래도 에리한의 손은 놓지 않고 꼭 붙잡고 있었다. 

“소리오닌 님, 여기 좀 보세요.”

“네?”

광장의 중앙에 도착했을 때 에리한이 소리오닌에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소리오닌은 에리한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커다란 동상이 서 있었다.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의 뒤로 온갖 식물과 동물들이 뒤섞여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섬세하게 만들어졌는지, 그녀뿐만 아니라 동상의 모든 것들이 금방이라도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았다. 

난생 처음 보는 엄청난 예술 작품에 소리오닌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동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는 예술에 관해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이 동상은 존재 자체만으로 고귀함이 느껴졌다. 이 동상 앞에서는 불안한 지금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들이 모두 쓸데없는 고민인 것 같았다.

괜찮은 척했어도 마음 한 구석이 항상 무거웠는데, 지금 이 순간 한없는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소리오닌은 눈을 반짝이며 동상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에리한의 얼굴에 미소가 퍼져갔다. 자신도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따라 브리온에 처음 왔을 적, 이 동상을 보고 똑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그 뒤로 가끔 브리온을 찾아올 때 마다 보러 왔는데, 몇 번을 봐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보고 있는 소리오닌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린 에리한이 얘기를 시작했다. 

“이 동상은, 하나바톰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아주 예전, 바론이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하던 동상이라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바톰의 축복이요?”

“네. 저 여신의 이름이 하나바톰입니다. 축복과 사랑의 여신입니다. 모든 신들의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곳 브리온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도 하나바톰의 축복이 있어서라고 하더군요.”

조금 과장이 섞인 말이었지만,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이 동상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하나바톰의 축복이 유명한 건 그 자체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이 동상에 내려오는 전설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설? 어떤 전설인데요?”

전설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내비치는 소리오닌의 모습을 본 에리한이 말을 이어갔다. 

“이 동상 앞에서 한 맹세는 무조건 이뤄진다는 전설이죠.”

“무조건이요?”

“네, 그게 무엇이든 하나바톰이 그 맹세를 이뤄준다고 합니다.”

그의 대답에 깜짝 놀란 소리오닌이 말했다.

“네에? 아무 조건도 없이요? 만약 세계정복을 하겠다거나, 누군가를 죽인다는 그런 맹세면 어떡해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에리한이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물론 그런 허무맹랑한 맹세는 안 됩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런 맹세는 안 받아 주시거든요.”

“아아, 역시 그렇죠? 그럼 제 맹세가 이뤄질지는 어떻게 알아요?”

“여기 이 종이를 날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리한은 소리오닌의 손에 종이 한 장을 쥐어 줬다. 종이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것을 본 소리오닌이 의문이 담긴 눈으로 에리한을 쳐다봤다.

“이 종이에 자신의 맹세를 말한 뒤, 종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종이가 저기 하나바톰 님의 머리 위까지 날아가면 맹세가 이뤄집니다.”

“그럼…… 종이가 안 날아가면?”

“아쉽게도 여신님이 맹세를 이뤄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야겠지요.”

말을 마친 에리한이 먼저 종이를 입에 가져다 댄 다음 손바닥에 종이를 올려놓았다.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 바람 한 점 없는 광장임이 분명한데도, 종이가 팔랑거리며 하나바톰의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천천히 내려앉았다. 

“말도 안 돼. 마, 마법 쓴 게 아니고요?”

“저는 마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이 동상 앞에서는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정말요? 그럼 저…… 저도 해 볼까요? 해봐도 돼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하는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어떤 맹세를 할까 고민하던 소리오닌이 곧 생각을 마치고 종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만 움직여 맹세를 말한 소리오닌이 손바닥에 종이를 올려놨다. 두근두근, 정말 내 맹세도 이루어 주실까?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 소리를 들으며 종이만 뚫어지게 쳐다볼 때였다. 

팔랑, 정말 신기하게도 종이가 바람을 타고 동상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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