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네?”
“뭐?”
“오빠?”
페릴의 한마디에 소리오닌을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싸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한 페릴이 한 박자 늦게 소리를 질렀다.
“헉!”
소리오닌의 얼굴을 보면 자꾸 오빠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오빠라고 나왔나 보다.
“그, 그게 아니라……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다시 소리 친 페릴이 에리한을 한 번 쳐다봤다. 페릴을 쳐다보는 에리한의 눈빛은 한 겨울의 바람처럼 날카로웠다.
히익, 큰일 났네! 이놈의 입이 대체 뭐라고 말한 거야?! 페릴은 울먹이며 다신 한 번 죄송하다 말하고 의자를 찾아 뛰었다. 소리오닌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가 전에 모르고 한 번 오빠라고 했었는데, 그때 말이 인상적이었나 봐요.”
“……페릴에게 오빠라고 부르셨습니까?”
그녀의 말에 에리한은 지하 저 밑에서부터 기어 나오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리오닌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저는 피가 통한 사람에게만 오빠라고 말하는 건 줄 몰랐어요! 그리고 또…….”
분명히 그 뜻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반응이었다. 에리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흠, 오빠. 저한테도 한 번 불러주시죠.”
“네?”
에리한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다음, 아직 서 있는 소리오닌을 쳐다보며 말했다. 살짝 삐져 있는 듯한 그의 모습에 소리오닌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소리오닌은 에리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뒤에 꽃받침을 한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삐쳤어요, 에리한 오빠?”
소리오닌의 입에서 나온 오빠라는 단어가 에리한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덕에 귀 끝이 빨개진 에리한이 입술만 올려 웃으며 말했다.
“삐진 적 없습니다.”
“거짓말, 제가 페릴 님한테만 오빠라고 해서 기분 나빴던 거 맞잖아요!”
“그, 그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던 겁니다.”
“그으래요? 그랬구나, 난 또. 페릴 님을 너무 무섭게 쳐다봐서.”
소리오닌은 에리한을 놀리는 재미에 빠져서 그들의 뒤에서 바임이 한심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주 제대로 꽁냥이구만. 바임은 고개를 저으며 에리한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의 옆에서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하는 세리만이 둥그런 눈으로 그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의, 의자 가져왔습니다! 여기 앉겠습니다!”
얼마 뒤 의자를 가져 온 페릴이 에리한의 눈치를 한 번 본 다음 빈자리에 의자를 놓았다.
소리오닌에게 오빠라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에리한은 별 말없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쉰 페릴이 허겁지겁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은 그들은 식당 3층에 위치한 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리오닌과 세리는 이번엔 같이 방을 쓰기로 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네. 좋은 꿈꾸세요.”
간단한 저녁 인사를 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소리오닌의 방에는 두 개의 침대와 협탁, 옷장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밥을 먹고 미리 방으로 올라 온 세리가 그녀를 반겼다.
“소리오닌 님, 여기, 이쪽 침대를 사용하시어요. 제가 미리 다 준비해 놨답니다!”
“고마워, 세리. 덕분에 편히 잘 수 있겠다.”
“네! 하지만 여관 방이라서 좀 불편하실 수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이 정도면 바론에서 지내는 집보다 훨씬 좋은데?”
솔직한 소리오닌의 말에, 세리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휴우, 소리오닌 님. 그런 곳에서 있으려니 너무 힘드셨죠? 이번에 사브만에 갔다가 바론으로 돌아가면 더 좋은 집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드리는 건 어떠세요? 이렇게 부려먹었는데 그 정도는 하셔야 해요!”
“그럴까? 그렇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나쁜 편은 아닌데, 살다 보니 집에 정도 들었고.”
“무슨 말씀이셔요! 초크센에 있는 저택의 화장실보다 작은 집에 정이 들다니요!”
예전에 살던 집의 화장실보다 작다고? 아니, 대체 얼마나 큰 집에 살았던 거야? 속으로 크게 놀란 소리오닌이 괜히 침대를 팡팡 내리치며 말했다.
“원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내 걱정은 하지 마, 작은 집에서도 잘 지낼 수 있어!”
“물론 소리오닌 님이 바론에 와서 상당히 긍정적이고 밝아지신 건 너무 좋은 일이지만, 그 모습이 저는 더 속상해요.”
초크센에서는 왕족에게도 큰소리를 빵빵 치며, 패악을 부리던 소리오닌이었는데. 여기서는 왕자에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루 종일 그의 비위를 맞추는 거 같아서 속상했다. 세리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지는 걸 본 소리오닌이 얼른 그녀를 옆에 앉히며 말했다.
“속상해 하지 마, 나는 정말 지금도 너무 좋아. 예전 일에 집착해서 뭐 하겠어. 그렇지? 나는 세리도 내 시녀가 아니라 동생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데, 이제 그런 얘기는 하지 말자. 알았지?”
“그렇지만 에리한 왕자님한테 맨날 웃기만 하시고, 왕자님이 무슨 말만 하면 싫다는 말도 못하시고 그저 좋다고만 하시고. 사실은 왕자님이 소리오닌 님한테 완전 눈치 주는 거죠?”
세리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세리는 자신과 왕자의 사이를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세리의 입에서 나오는 투덜거림에 순간 소리오닌은 뭔가를 깨달았다.
“세리. 내가 왕자님 볼 때 맨날 웃기만 했어?”
“네, 계속 웃으셨었죠!”
“내가 왕자님한테 싫다는 말도 안 했어?”
“네, 왕자님이 뭐라고 말만 하면 다 좋다고 하셨죠! 것 봐요! 왕자님한테 싫다는 말도 못하시고…….”
아니야, 세리. 싫다고 말을 못한 게 아니야. 그냥 싫지 않았던 거지.
생각지도 못한 감정을 이렇게 알게 된 소리오닌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하, 하하……!”
“응? 왜 그러시나요?”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소리오닌의 모습을 세리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세리, 고마워. 세리가 말해 준 덕분에 고민하던 게 사라졌어!”
“네? 그래요?”
“응, 응. 세리가 최고야!”
“정말요? 헤헤. 저도 소리오닌 님 너무 좋아요.”
소리오닌은 세리를 꼭 안아줬다. 세리 역시 소리오닌을 꼭 안았다. 바론에서 사는 건 가끔씩 서럽고, 여전히 어렵지만 소리오닌의 변화는 너무 좋았다. 초크센에서는 눈 마주치는 것도 무서워했는데, 이렇게 따뜻한 사람인 줄 몰랐다.
소리오닌과 세리는 꽤 오랜 시간 두런두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늦은 밤, 세리는 먼저 잠이 들었다. 소리오닌은 조용한 세리를 쳐다보다 일어나 앉았다.
어쩌다보니 자신의 감정을 깨닫긴 했다. 하지만 에리한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는 건지, 그와 같은 감정이라고 해서 뭐가 달라질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왕자님 같은 남자가 아니고 진짜 왕자님인데. 내가 감히 그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위치일까?
되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고민에 소리오닌은 한숨을 내뱉었다.
***
다음 날, 에리한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오늘은 소리오닌과 함께 브리온을 한 번 둘러 볼 생각이었다.
바론의 수도도 멋있지만 조금만 더 걸어가면 바다가 나오는 브리온의 풍경은 가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똑똑.
“에리한 님, 일어나셨습니까?”
“아, 바임. 일어났어.”
에리한이 일어난 걸 어떻게 알았는지, 옆방에서 묵었던 바임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여기 세숫물 가져왔습니다.”
“고마워.”
에리한은 적당한 온도의 물에 꼼꼼히 얼굴을 닦았다. 옆에 서서 자신에게 수건을 건네는 바임을 쳐다본 에리한이 말했다.
“내일이면 린셀이 올 텐데, 각오는 되어 있어?”
“물론입니다.”
“뭐야, 너 린셀 싫어하는 건 아니었나 봐?”
“싫다기보다는…….”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바임을 대신해 에리한이 말했다.
“부담스럽게 들이대서 무섭다?”
그의 말이 정답이었는지, 바임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에리한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해해 줘, 무려 첫 눈에 반했다잖아.”
자신을 놀리는 듯한 말에 바임이 슬쩍 에리한을 쳐다보고 답했다.
“큼, 첫눈에 반하는 건 왕자님 남매의 특징인가 봅니다?”
“뭐?”
“왕자님도 소리오닌 님에게 첫눈에 반하셨지 않습니까?”
에리한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어깨를 고쳐준 뒤 시원하게 웃던 얼굴에 반한 게 사실이니까. 이렇게 진지해질 거라는 예상은 못했지만. 그때도 평소답지 않게 그녀를 찾는 일에 꽤나 집착하긴 했었다.
결국 두 손을 들어 졌다는 표시를 한 에리한이 바임의 어깨에 툭 치며 말했다.
“린셀을 잘 부탁해. 이래봬도 하나뿐인 내 동생이잖아?”
“그 하나뿐인 동생, 정말 저에게 맡겨도 괜찮으신 겁니까?”
그의 말에 바임이 다시 한번 물었다.
“바임, 너니까 맡기는 거지. 린셀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엄청 지랄 맞은 성격이야.”
“지랄…… 대체 그런 단어는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어디서 배우기는. 아바마마한테서 배웠지.”
왕에게 욕을 배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에리한을 본 바임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나는 오늘 소리오닌 님이랑 단둘이 돌아다닐 생각이니 방해하지 마.”
에리한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내보낸 바임이 답했다.
“오늘은 꼭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시길 바랍니다.”
“응? 데이트다운 데이트?”
“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사이좋은 오누이 같았습니다. 왕자님이 더 분발하셔야죠.”
예전과 달리 소리오닌과 관계를 긍정적으로 봐주는 건 좋은데, 묘하게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결국 에리한은 방을 나서기 전 바임을 한 번 흘겨봤다.
오늘 데이트는 정말로 평소와는 다를 거라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하바나톰의 축복’을 보러 갈 계획이었다. 그 동상에 전해져 오는 전설을 생각하던 에리한은 소리오닌이 묵고 있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그녀와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진전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