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린셀은 숨을 꼭 참았다. 자연스럽게 보였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마리딘 왕비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들키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린셀은 평소와 같아 보이도록 최대한 투정 부리는 것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누가 공주 아니랄까 봐, 저 불편한 건 정말 질색하는군. 린셀의 퉁퉁 부어 있는 입을 보던 왕비는 살짝 미소 지으며 알았다는 허락을 했다.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저 정말 잘 쉬고 돌아와서 준비 잘할게요!”
“그래. 알았다.”
린셀은 폴짝 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그러고 나서는 서둘러 인사를 한 다음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자하만 백작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린셀 공주님은 언제 봐도 소녀 같습니다. 이제 몇 달 후면 혼인을 하실 분으로는 안 보이는군요.”
“아직 부족합니다. 그래도 좋은 혼처가 생겼으니 늦기 전에 보내는 게 좋겠지요.”
“물론입니다. 비록 막내 왕자라 형제들 때문에 사브만에서 왕위 계승에는 불리하지만, 그래도 왕자와의 혼인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
그게 가장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사브만의 왕자면 손해 볼 건 아니었다. 린셀도 지금과 같이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고. 왕비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왕자님은 언제쯤 돌아오십니까? 위나와의 혼인도 슬슬 진행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백작이 재빨리 본심을 말했다. 위나도 곧 24살이 되는데 성인식이 지나기 전에 결혼을 시키고 싶었다. 백작의 말에 왕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초크센의 공녀. 그 계집애가 얼른 사라져야……. 물론 바임에 의해 며칠 뒤면 없어지겠지만.
왕비는 곧 표정을 풀고 얘기했다.
“곧 돌아오게 될 겁니다. 왕자가 돌아오는 대로 혼인을 진행하시지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부족함 없이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렇지, 위나?”
“물론이죠. 완벽한 결혼식이 될 거예요, 왕비님.”
자하만 부녀는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하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왕비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왕비의 응접실 문을 닫고 나온 린셀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우선 왕비는 크게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평소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 건 에리한과 바임 뿐이었다. 그게 정말 다행이었다. 자신이 바임에게 맘이 있다는 사실을 왕비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결혼 전날까지 갇혀 있을 뻔했다.
“휴우.”
긴장했던 어깨에 힘을 뺀 린셀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기.”
“네? 무슨 일이신가요, 공주님?
마침 그녀의 앞을 지나치는 시녀 한 명을 불렀다. 자신의 부름에 시녀가 걸음을 멈추자, 린셀이 물었다.
“혹시 민츠라는 애 알고 있어?”
“민츠요? 아, 네! 지금쯤 주방에 있을 거예요. 불러다 드릴까요?”
“아냐, 내가 가 볼게. 고마워.”
“아닙니다. 그럼.”
시녀는 하던 일이 급했는지 인사를 하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린셀도 서둘러 왕비궁의 식당 쪽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식당은 부산스러웠다. 어린 나이로 보이는 시녀들만 해도 수십 명이었다. 그 안에서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민츠를 찾는 일은 어려웠다. 결국 다시 누군가에게 물어보려 했을 때였다.
“린셀 공주님?”
린셀을 알아본 시녀 한 명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다행이다, 다들 너무 바빠 보여서 말 걸기가 민망했는데. 말을 건 시녀는 주근깨가 많은 귀여운 얼굴이었다. 시녀에게 싱긋 미소 지은 린셀이 말했다.
“안녕? 여기 혹시 민츠라는 애가 있니? 좀 불러 주겠어?”
“네? 민츠……? 제가 민츠인데요?”
“뭐어?”
린셀은 바임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민츠를 보고 크게 놀랐다. 그의 동생은 좀 더 조용하고 어른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린셀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민츠를 향해 한 번 싱긋 미소 지었다.
“네가 민츠구나. 바임 님의 여동생 맞니?”
“네, 네! 혹시 저희 오빠가 뭘 잘못했나요?”
갑작스럽게 오빠의 이름을 들은 민츠의 얼굴이 구겨졌다. 린셀이 재빨리 변명했다.
“아냐! 그런 건 아니고, 에리한 오라버니 옆에서 바임 님을 자주 봤거든. 엄청 능력도 좋으시잖아. 그런 바임 님의 여동생이라니 궁금했었어.”
“아아, 그렇군요! 오빠를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겨우 얼굴이 돌아온 민츠가 감사의 인사를 했다.
“으응!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내 옆에서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제가 공주님을요? 하지만 왕비님께서 여기에만 있으라고 하셨는데…….”
“그건 걱정 마! 방금 어마마마께 허락을 받았어. 어려운 일도 아니야, 여행갈 때 함께 가 줬으면 하고.”
“왕비님께서 허락하셨다면 저는 상관없어요! 제가 공주님께 도움이 된다면 기쁠 거예요.”
배시시 웃으며 예쁘게 말하는 민츠를 본 린셀이 손을 들어 민츠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민츠, 앞으로 잘 부탁해.”
“네, 언제든지 편하게 불러 주세요.”
“응, 고마워.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조심히 가세요!”
민츠는 뒤돌아 가는 린셀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린셀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걸어갔다.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거짓을 말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첫눈에 반한 상대를 두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혼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자신의 방에 돌아온 린셀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며칠 뒤면 바임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다른 의미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
린셀을 배웅하고 온 왕비는 민츠를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 대신 급하게 들어 온 시녀장에게서 민츠가 린셀과 함께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왕비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버렸다.
“린셀이 민츠를 데려갔다고?”
“네, 그렇습니다. 아침 일찍 선발대와 함께 출궁하는 것을 봤습니다.”
시녀장의 대답에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 많은 시녀들 중에 왜 하필이면 민츠를 데려갔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왕비가 물었다.
“에리한은 계속 걸어서 간다 했나?”
“네, 어제 파논 백작이 직접 보고했습니다. 말로 이동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으니 아무래도 천천히 걸어가시지 않을까요?”
“흠…….”
에리한이 사브만까지 걸어간다면 브리온에 들렀다 갈 시간적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린셀이 에리한이 브리온에 갈 예정이라는 걸 알 방법도 없고. 둘이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지.
한참 이리저리 계산을 해보던 왕비는 결국 이 감정을 자신의 괜한 조바심이라 결론지었다.
“알겠다. 이제 곧 왕자와 공주의 혼인이 연달아 있을 테니 미리 준비해 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나가 봐.”
시녀장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왕비는 창밖을 바라봤다. 정원에는 온갖 색의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이 화려함과 권력.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왕과 에리한이 방해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뜻대로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왕비는 입술 끝을 올려 미소 지었다.
***
에리한 일행은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 겨우 숲 밖을 벗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시야가 짧아졌다. 짐승인지, 몬스터인지 모를 것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그 때문에 오는 내내 잔뜩 겁을 먹은 소리오닌은 에리한만 붙잡고 덜덜 떨었다.
“소리오닌 님, 이제 괜찮습니다. 안전한 마을 결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에리한은 말의 속도를 줄이며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소리오닌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도착했어요?”
“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무서우셨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진짜 무서웠어요! 앞은 깜깜하지, 짐승들의 눈은 번쩍거리지!”
소리오닌이 부르르 몸을 떨면서 얘기했다. 에리한은 그녀의 과장된 투정이 귀여워서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다음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소리오닌의 손을 잡았다.
“?”
자신의 손등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손가락. 순간 몸을 굳힌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어깨만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을 느낀 에리한이 짧게 숨을 내뱉고 말했다.
“흠, 손을 잡으면 무서운 게 좀 괜찮아 질 겁니다.”
“네에…… 고마워요. 훨씬 낫네요.”
살짝 긴장한 듯한 에리한의 목소리에 소리오닌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지 못했다.
아니, 사실 그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서로의 숨소리만 들으며 천천히 마을을 향했다. 그리고 얼마 뒤 여전히 소리오닌의 손을 놓지 않은 에리한이 말했다.
“지금은 어두워져서 잘 안 보이겠지만, 이곳 브리온은 바론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로 손꼽힙니다. 마을 안은 안전하니 걱정 마세요. 내일 밝을 때 함께 보시죠.”
“그런가요? 얼마나 멋있을 지 궁금하네요!”
“브리온에서 며칠간 있을 계획이니, 천천히 둘러봐도 괜찮습니다.”
“근데 저희 시간이 빠듯한 게 아니었나요?”
에리한의 설명을 들은 소리오닌이 되물었다.
“아, 파논 백작에게 말을 얻을 수 있어서 시간이 많이 단축될 것 같습니다. 말이 있으면 낮에는 숲으로도 갈 수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잘 됐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아직 안 먹었으니까 이 도시에 유명한 가게로 가도 될까요?”
금세 신난 소리오닌이 들썩거리는 게 느껴졌다. 에리한은 그녀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바임을 불렀다.
“이곳에는 우리가 온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지? 숙소와 식사는 어떻게 할까?”
“네, 시내에 여관과 식당을 같이 하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쪽으로 가시죠.”
“좋아. 그렇게 하지.”
에리한은 먼저 앞서나가는 바임의 뒤를 따랐다. 왕비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이곳에서 벗어난다면, 큰 고비 하나는 넘는 것이다.
이틀 뒤에 린셀이 도착하면 결론이 나겠지. 에리한은 자신의 뒤에 앉은 소리오닌을 슬쩍 쳐다본 뒤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
소리오닌은 식당을 둘러봤다. 식당은 이세계에 떨어진 후로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항상 집과 텃밭에서만 있다 보니,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왠지 그동안의 시간이 억울했지만 이렇게라도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로 했다.
“소리오닌 님, 이 식당 엄청 크네요, 그렇죠?”
“으응. 그러게! 세리, 맛있는 거 많이 시키자.”
“좋아요! 저 이제 속도 괜찮아졌어요!”
세리 역시 자신의 옆에 꼭 붙어서 휘둥그레 뜬 눈으로 식당을 둘러봤다. 식당은 1, 2층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는데,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많은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에리한 님, 여기 자리가 있습니다!”
“응. 소리오닌 님, 세리. 이쪽으로.”
페릴이 구석에 비어 있는 테이블로 뛰어가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일행들도 함께 비어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어, 의자가 하나 모자라네요?”
일행은 다섯 명인데 의자는 네 개뿐이었다. 소리오닌이 의자를 찾으러 두리번거릴 때였다.
“오빠가 가져오겠습니다!”
아까부터 소리오닌의 모습을 보던 페릴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