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00)

025.

백작이 에리한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에리한은 그런 백작을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얘기했다.

“제가 말을 빌려 갔다는 걸 비밀로 해주시면 됩니다.”

“네? 그, 그게 전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만 비밀로 해주시면 저도 백작의 사소한 허물은 눈 감겠습니다.”

너무도 파격적인 제안에 파논 백작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백작은 에리한에게 몇 번이나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한 에리한은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에리한이 나간 지 한참이 지났지만, 백작은 무릎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10년이 넘게 세금을 빼돌렸다. 그동안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는데, 올해 에리한이 업무를 맡자마자 들켜버렸다. 온실 속에 곱게 자란 도련님인 줄 알았더니,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천운인지 세금을 빼돌린 것치고는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왕자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알아서 몸을 사려야 했다. 이 일을 덮을 수만 있다면 말 몇 마리가 대수겠는가! 몇 백 마리라도 바칠 수 있었다.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백작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

이층에 있던 소리오닌과 세리는 에리한이 부르는 소리에 내려왔다. 바임과 페릴, 에리한은 이미 문 앞에서 백작의 인사를 받는 중이었다. 

“왕자님, 부디 몸 건강히 가시길 바랍니다! 마…… 말은 제가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백작이 덜덜 떨면서 얘기했다. 

“고맙습니다. 잘 쉬다 갑니다.”

에리한은 그에게 형식적인 대답을 건넸다. 백작은 아침에 한 얘기에 대해 다시 한번 확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눈치 정도는 있었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백작을 힐끗 쳐다본 에리한이 별 말없이 뒤돌아섰다.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 옆에는 말 세 마리가 서 있었다.

“웬 말이에요?”

예전 무도회 갔을 때 탔던 말만큼은 아니지만, 이 말들도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순하게 서 있는 말들을 보고 감탄한 소리오닌이 물었다.

“오늘은 숲길로 갈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빨리 통과하려면 말을 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네? 하지만 숲은 몬스터가 나온다고…….”

전에 지도를 보면서 에리한이 얘기했던 게 생각났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이 말했다.

“해가 지기 전에 통과할 거라 괜찮습니다. 그리고 깊이 들어가지도 않을 거니까요.”

“아아, 그러면 다행이네요.”

에리한의 설명을 듣고 안심이 된 소리오닌의 얼굴이 금세 폈다.

“그럼 어서 출발하시죠.”

에리한이 말했다. 소리오닌 역시 그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분명 사람은 다섯 명인데 말은 세 마리뿐이라니…….

소리오닌은 또다시 의아한 눈으로 에리한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에리한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소리오닌 님과 세리는 말을 타 본 적이 많지 않으니, 저희와 같이 타야 할 것 같아서 세 마리만 데려왔습니다.”

“아, 맞아요. 소리오닌 님은 어릴 때 말 타는 걸 배우시지 않으셨어요!”

에리한의 설명이 끝나자 세리가 손을 들어 답했다.

“그래, 그러니 뒤에 타서 가는 게 안전할 거야.”

에리한이 세리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 바임이 물었다.

“그럼, 소리오닌 님은 누구 뒤에 타시겠습니까?”

“음……”

살짝 난감해진 소리오닌이 그들을 쳐다봤다. 바임은 왠지 불편하고, 역시 페릴이 나으려나? 분홍머리를 하고 웃고 있는 페릴을 본 소리오닌이 그에게 부탁을 하려고 할 때였다.

“소리오닌 님은 내가 모시도록 하지.”

에리한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오닌의 손에 들려 있던 배낭을 들었다. 그 순간, 그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아, 아니. 왕자님 불편하실 텐데. 제가 모시겠습니다!”

“네, 왕자님. 페릴에게 맡기시지요.”

에리한의 앞을 막은 페릴이 급히 소리쳤다. 그의 말에 바임도 동의했다. 하지만 에리한은 고개를 저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예전에도 소리오닌 님은 나와 함께 말을 탄 적이 있으니 내가 더 편하실 거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네에…….”

아니, 저는 어제 일 때문에 좀 불편한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절대로 알아차린 티를 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해 버린 소리오닌이었다.

결국 소리오닌은 에리한의 뒤에, 세리는 페릴의 뒤에 타고 숲을 지나기로 결정했다.

에리한은 이번에도 소리오닌이 말에 타는 것을 친절하게 도와줬다. 그녀가 잘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한 에리한이 앞쪽으로 훌쩍 올라탔다. 

“소리오닌 님, 이번에는 저번과 다르게 좀 빨리 달릴 테니 꼭 붙잡으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소리오닌에게 한 번 웃어 준 에리한이 말의 고삐를 당겨 출발했다.

소리오닌은 아침에 에리한의 얼굴을 볼 때부터 그가 계속 의식되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제 정원에서 있었던 장면만 되풀이 중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소리오닌이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그의 몸통을 꽉 껴안았다. 전에는 아무 느낌 없었는데, 지금은 손에 만져지는 단단한 근육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뒤에서 꼭 안아오는 소리오닌의 팔을 내려다 본 에리한이 조용히 입술만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애정이 없는 이런 스킨십만으로도 좋아 죽겠는데, 만약 그녀가 정말 나와 같은 감정이라면…… 생각만으로도 떨리는 일이었다. 

소리오닌과 함께 하는 미래도 꿈꾸고 있다. 중요한 건 그녀의 마음이지만 오랜 시간이 걸려도 꼭 얻어낼 것이다. 다시 한번 자신을 꼭 잡고 있는 소리오닌의 손을 본 에리한이 굳게 다짐했다.

“잠깐 쉬었다 가겠습니다.”

한참 빠르게 달리던 에리한이 말의 속도를 늦추면서 얘기했다. 그의 말에 격하게 찬성한 소리오닌이었다. 멈춰선 말의 등에서 재빨리 뛰어내렸다.

어, 엉덩이 아파! 딱딱한 안장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벅지 엉덩이 허리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굳어 버린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소, 소리오닌 님……. 으웁?”

“어? 세리, 왜 그래?”

그녀의 뒤를 따라 말에서 내린 세리가 급하게 입을 막았다. 몇 번 헛구역질을 하던 세리가 크게 침을 삼킨 뒤 크게 숨을 내뱉었다. 

“하아, 저 멀미 났어요……. 그래도 다행히 토는 안 나오네요.”

“어떡하지? 도착할 때까지 계속 말을 타야할 텐데!”

“괘…… 괜찮아요! 좀 쉬고 나면 적응이 되겠죠.”

누렇게 뜬 얼굴로 말하는 세리가 안쓰러웠다. 그녀의 옆에서 같이 말을 타고 온 페릴도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세리를 바라봤다. 

“세리, 미안해. 내가 너무 험하게 탔지?”

“아니에요! 페릴 님! 제가 처음 타 보는 거라서 그렇답니다!”

“앞으로는 조심할게! 물 좀 마실래? 내가 떠 올게!”

페릴이 오면서 봐둔 시냇가를 향해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소리오닌이 바닥에 앉아서 자신의 허벅지를 톡톡 쳤다.

“세리, 여기 누워. 페릴 님이 오는 동안 좀 누워 있으면 괜찮을 거야.”

“네에? 제, 제가 어떻게 소리오닌 님을 베고…….”

“응? 뭐 어때. 너도 나 아플 때 돌봐줄 거잖아.”

“그건 당연하죠! 그치만…….”

“어허, 빨리 누워. 속 얼른 가라앉히고 좋은 컨디션으로 가는 게 더 도움 되는 거야. 그렇죠?”

소리오닌이 나머지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것 봐, 그러니까 얼른!”

소리오닌은 자신의 허벅지를 치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세리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하지만 소리오닌은 뻣뻣하게 목에 힘을 준 세리의 얼굴을 잡아서 허벅지에 꾹 눌렀다. 

“소, 소리오닌 님. 제 머리 무거워요!”

“아니야, 가벼워.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있어.”

소리오닌은 세리를 위해서 커다란 나뭇잎으로 부채질도 해 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세리는 점점 몸에 힘을 빼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한편 에리한은 어느새 잠이 든 세리를 에리한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의 눈에 깃든 질투와 부러움을 눈치 챈 바임이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젠 하다못해 동생 같은 여자애한테도 질투인 건가. 아주 중증이군. 

***

똑똑.

린셀은 떨리는 손으로 왕비의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에 숨을 크게 들이쉰 린셀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응접실 내부는 저번에 왔을 때와 또 달라져 있었다. 왕비의 사치스러움은 이제 왕가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왕비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자하만 백작과 그의 딸 위나가 함께였다.

“어마마마, 드릴 말씀이 있어요.”

백작과 위나를 한 번 쳐다본 린셀이 말했다.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할 말이 무엇이냐?”

“저, 브리온으로 며칠 동안 다녀오면 안 될까요?”

린셀은 바임에게 들었던 지명을 되새기며 말했다. 

왕비는 갑작스런 린셀의 요청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웬만하면 수도 밖으로는 나간 적도 없는 린셀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브리온으로? 어째서? 한 번 가 본 적도 없는 곳이 아닌가?”

“네, 그렇죠. 하지만 이제 저는 사브만으로 가게 될 텐데, 그 전에 바론에서 아름답다 소문 난 곳에서 한 번 지내보고 싶어요.”

“흠…….”

가라앉은 표정을 한 린셀을 본 왕비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론 언젠가 혼인을 할 딸이지만, 이렇게 급하게 보낼 생각은 아니었다. 이게 다 에리한이 쓸데없는 고집을 피워서 그런 것이다. 

아들의 얼굴을 떠올린 왕비가 쯧, 짧게 혀를 찼다. 그러다 곧 린셀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된다. 이제 곧 혼인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알았지?”

“네, 그럼요.”

왕비의 허락이 떨어졌다. 속으로 안도한 린셀이 제일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 치마를 꼭 쥐었다.

“어마마마, 저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어요.”

“음? 또? 뭐지?”

“제 성에 있는 시녀들이 좀 부족해서. 제대로 저를 돌봐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여기에 있는 시녀 몇 명만 데려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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