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그러나 정작 소리오닌에게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음…… 눈치 못 챘나?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섭섭함이 든 에리한이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였다.
소리오닌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와 눈을 맞춘 뒤 씨익 웃은 소리오닌이 말했다.
“어때요, 좀 속이 편해지지 않았어요?”
“네? 아아, 네……. 네!”
에리한은 그녀의 물음에 당황했다. 입술에 남아 있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촉감, 은은히 풍기던 꽃향기에 취해 있느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의 어설픈 대답에 만족한 듯 소리오닌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앞으로도 속이 안 좋으면 그렇게 해 주시면 돼요. 얇게 입고 나왔더니 좀 추워지는 것 같아서, 저는 먼저 올라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네, 에리한 님도 좋은 꿈꾸세요!”
에리한에게 손을 흔든 소리오닌이 통통 소리를 내며 뛰어 들어갔다. 그녀가 집 안으로 사라지자, 에리한은 손을 올려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다음에는 그녀의 이마에, 콧등에, 뺨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에리한은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그녀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에리한을 정원에 둔 소리오닌은 후다닥 이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방에 도착해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얼굴에 두 손을 갖다 대자, 후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분명 뛰어 올라 와서 생긴 열이 아니었다. 에리한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은 그가 했던 입맞춤을 다 알고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친절하게 대해 줬던 게 다 나에게 호감이 있어서?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호감이 없는 사람한테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지……?
그동안 자신을 바라보던 에리한의 눈빛이 떠올랐다. 소리오닌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우선 좀 더 지켜봐야 했다. 확실한 것도 아니고,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이세계로 떨어진 후, 소리오닌은 이곳에 적응하느라 급급해서 이성 문제 같은 건 신경도 안 썼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괜히 울렁거리는 심장 때문에 잠까지 설쳤다.
***
“으으, 피곤해.”
소리오닌은 결국 해가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몸을 쭉, 늘리며 창밖을 쳐다보자 뒷마당 쪽에서 분홍색 머리칼이 보였다.
“어? 페릴 님이다.”
그도 아침 일찍 일어났는지 혼자 나와서 운동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처음 본 소리오닌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한달음에 계단을 내려가 뒷마당으로 갔다.
“페릴 님!”
“아, 소리오닌 님!”
갑자기 등장한 그녀의 모습에 칼을 휘두르던 페릴이 급하게 자세를 고쳤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네! 소리오닌 님도 편히 주무셨습니까?”
패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리오닌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혼자 운동하시는 거예요?”
“아, 네. 바임과 왕자님은 파논 백작님과 면담 준비를 하시는 중입니다.”
“그렇구나, 저 옆에서 검술 연습하는 거 구경 좀 해도 될까요?”
“네? 네, 물론입니다!”
페릴이 크게 대답했다. 하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영애들은 이렇게 흙먼지가 날리고 땀 냄새가 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분명 소리오닌 역시 곧 자리를 떠나리라. 그래도 그는 다시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순식간에 옆으로. 그의 손에서 검이 수려하게 움직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소리오닌이 옆에 있다는 걸 까먹을 정도로 신나게 몸을 움직였다.
페릴은 어느 정도 몸이 풀린 느낌에 검을 느슨하게 쥐고 땀을 닦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화려하게 움직이던 검이 멈추자, 소리오닌은 박수를 쳤다.
“와아, 진짜 멋있어요!”
“어엇, 아직도 계셨습니까?”
“네? 제가 구경한다고 했잖아요!”
“그…… 그렇지만…….”
페릴은 눈만 깜박였다. 당연히 잠깐 보다가 가 버릴 줄 알았는데. 페릴은 당황한 얼굴로 소리오닌을 쳐다봤다.
“아무튼 정말 멋있네요! 근육들도 제대로 자리 잡혀 있고.”
소리오닌이 엄지를 치켜들고 얘기했다. 그녀의 말에 페릴은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정말 소리오닌 님은 투시를 할 수 있으십니까? 제 근육들이 움직이는 게 보이시는 겁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고…….”
페릴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소리오닌의 앞에서 팔을 붕붕 흔들었다. 난감한 웃음을 지은 소리오닌이 그의 말을 부정했다. 페릴은 소리오닌의 대답에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렇지만 어디 아프신 데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능력이 되는 만큼 꼭 도와드릴게요.”
“아……. 그럼 그 치유 능력은 진짜로군요!”
“하하, 네에.”
또 아니라고 하면 울어 버릴까 봐 그냥 맞다고 얘기했다. 엄밀히 따지면 치유 능력이 아니라 기술이지만, 그게 그거라고 애써 합리화시켰다.
“소리오닌 님, 그리고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소리오닌 님은 지금 왕비님과 왕자님의 귀빈이니까요.”
“네? 아니에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거 같은데, 그럴 수는 없죠.”
아무리 어려 보여도 기사단의 부단장 정도면 지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란 말을 안 하는 것을 보니 소리오닌의 예상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럼…… 호칭만 편하게 할까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페릴 오빠?”
“……예에? 오, 오빠 말입니까?”
“네? 네. 오빠는 싫으세요?”
페릴의 당황한 얼굴을 본 소리오닌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페릴의 나이가 자신보다 어린 건가 했다.
“시…… 싫은 게 아니라, 바론에서 오빠라는 말은 피를 나눈 형제들에게만 사용하는 단어 입니다.”
“아아! 그랬군요. 제가 실수 했네요.”
“아닙니다. 초크센과 바론의 문화가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 물론! 정말 친밀한 사이에서는 가끔 쓰이기도 합니다.”
아니. 나도 초크센에 관련된 거 잘 모르는데…… 페릴의 말에 뜨끔한 소리오닌은 어색하게 웃어 넘겼다. 그리고 정말 친밀한 사이에 쓸 수 있다면, 페릴에게는 더더욱 쓰면 안 되는 말이었다.
마주 보고 서 있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때 이층에서 소리오닌을 부르는 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오닌은 페릴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사라진 쪽을 보던 페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오빠라니…….”
페릴은 형제만 5명이었고, 지금은 남자가 많기로 유명한 기사단에 속해 있었다. 지금까지 남자들만 상대하던 페릴에게 ‘오빠!’ 라는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리오닌 같은 여동생이 있는 것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는 오빠라는 말에 한없이 아쉬움이 느껴질 만큼.
***
에리한의 기분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말할 게 있다고 해서 왔더니, 백작은 같은 내용만 무한 반복 중이었다.
“왕자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흠흠! 물론 사논도 참 좋은 곳이지만, 이왕이면 저 같이 유능한 인재는 왕자님이 계신 수도에서 근무하는 것이…….”
“그만.”
에리한이 차갑게 파논 백작의 말을 끊었다.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저 말을 한 번만 더 들으면 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을 던져 버릴 것 같았다.
에리한의 굳은 얼굴을 눈치챈 백작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싸늘하게 적막이 흐르는 방에서 에리한은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뗐다.
“우선 내가 급하게 가야할 곳이 있으니, 말 몇 마리만 주겠습니까?”
“네? 넵, 물론입니다, 왕자님. 혈통이 좋은 명마들이 많으니 맘껏 고르십시오!”
“알겠습니다.”
에리한은 할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더 이상 파논 백작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왕자님!”
백작은 방을 나서려는 에리한을 급하게 불렀다. 아직 그에게서 이렇다 할 대답을 듣지 못해 초조해졌다. 그의 부름에 에리한이 멈춰서는 게 보이자, 얼른 말을 이었다.
“부디 제게 대답을 해 주십시오!”
“흠…… 파논 백작. 수도로 오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네, 네! 불러만 주신다면 열과 성을 다하여 왕자님을 보필할 수 있습니다!”
에리한의 물음에 백작은 볼살이 떨릴 만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논 백작의 능력이 좋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에?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하하하!”
에리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난데없는 그의 칭찬에 파논 백작도 맘을 놓으며 따라 웃었다.
백작의 커다란 웃음소리를 듣던 에리한이 순식간에 정색을 하며 말했다.
“매년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5천만 베론이나 빼돌릴 만큼 말입니다.”
“!”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어…… 어떻게 알았지? 이중, 삼중으로 장부를 바꿔나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하얗게 질려서 돌덩이처럼 변한 백작을 본 에리한이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그렇게 얼굴에 다 티를 내셔서 큰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파논 백작은 수도에서 일하기에는 좀 무리인 듯싶습니다.”
“와…… 왕자님, 왕자님! 아닙니다! 세금을 빼돌리다뇨! 그, 그렇지 않습니다!”
백작이 뒤늦게 부정하며 에리한에게 매달렸다. 그에게 사정하는 백작의 얼굴에서 기름 같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자신의 팔을 꼭 붙잡은 백작의 손을 탁 소리가 나게 쳐낸 에리한이 말했다.
“이번 횡령. 비밀로 해 드릴까요?”
“네? 저, 저는…… 그런 적이 없습……!”
“백작. 아니라고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제가 증거도 없이 말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흐, 흐으…… 왕자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비밀로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