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00)

023.

“초크센에서는 못 보던 꽃인데! 이름이 뭘까요?”

세리의 물음에 소리오닌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냐고 묻는 듯한 눈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는 그녀들 앞으로 페릴이 후다닥 튀어 나왔다. 

“네, 그 꽃의 이름은 로베린입니다. 바론에서만 피는 꽃이고 꽃의 종류는 핑크색, 빨간색, 흰색이 있습니다. 로베린의 꽃말은 매력입니다.”

단지 이름만 궁금했을 뿐인데 페릴은 그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술술 말해 주었다. 그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벙찐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어…… 감사합니다. 페릴 님. 로베린, 이름도 예쁘네요. 그치, 세리?”

“네? 아, 네! 감사합니다, 페릴 님.”

얼른 표정을 풀고 감사 인사를 한 소리오닌은 송이채로 떨어져 있는 몇 개의 로베린을 발견했다.

그녀는 한국에 있을 때 떨어진 벚꽃을 가져다 귀에 꽂았던 게 생각났다. 떨어진 로베린 꽃송이를 후후, 불어 흙을 털어내고 자신과 세리의 귀에 꽂았다. 

“어때요? 예뻐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리한에게 얼굴을 들이민 소리오닌이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훅,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에 움찔한 에리한이 곧 사르르 눈을 접어 웃고는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로베린보다 더 예쁘십니다.”

“하하하, 역시!”

에리한의 칭찬에 장난스럽게 웃은 소리오닌은 세리와 함께 꺄르르 웃으며 세 남자를 앞서서 걸어갔다. 그녀들의 모습을 본 바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어린 아이들도 안 하는 행동을 하시는군요.”

“왜, 보기 좋지 않아? 웬만한 영애들은 이런 식으로 걸어가라고 하면 울고불고 절대 못 걷는다고 난리일 텐데, 긍정적이고 씩씩하시구만!”

바임이 맘에 안 든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의 옆에 서 있던 페릴이 재빨리 반박했다.

동갑인 두 사람은 궁에 있을 때부터 서로 의견이 안 맞는 일이 많았는데, 이런 것까지 반대라니.

말을 마치고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동시에 미간을 좁혀 인상을 썼다.

***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걷기를 서너 시간. 소리오닌과 일행들은 해가 지기 전 간신히 사몬에 도착했다. 

“여기부터 사몬입니다. 사몬에서는 파논 백작의 저택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길가에 꽂혀 있는 표지판을 확인한 바임이 흘러내린 안경을 올려 쓰면서 얘기했다. 그의 말에 다들 피곤한 몸 이곳저곳을 두드리며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소리오닌 님,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으응, 괜찮아. 세리는?”

“저도 괜찮답니다! 그래도 오늘 안에 도착해서 다행이죠?”

서로 몸 상태를 체크하면서 벽돌로 되어 있는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에리한 님, 이쪽입니다!”

에리한을 부르는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그들의 앞 쪽에서 환한 불빛을 비추는 무리들이 보였다. 어떻게 알고 마중 나왔는지 사람들은 예의를 갖춰 입은 채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에리한이 그들에게 손을 들어 답하자, 그 중 제일 앞에 있던 남자가 남산만한 덩치를 뒤뚱거리며 뛰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사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왕자님!”

엄청난 뱃살 때문에 제대로 숙여지지 않는 상체를 억지로 굽힌 남자가 싱글싱글 웃으며 에리한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마중까지 나오다니. 고맙소, 파논 백작.”

“무슨 소리이십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왕자님이 오신다는 말을 전해들은 후부터 언제 오시려나 항상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리한에게 딱 달라붙어서 말하는 파논 백작의 얼굴은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어느새 땀이 맺혀가고 있었다. 그에 더해 백작의 집으로 가는 내내 옆에서 들리는 파논 백작의 부담스러운 숨소리에 에리한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백작의 저택은 수도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의 세력가답게 화려하고 웅장했다. 전체적으로 청색과 은색을 많이 활용한 저택 곳곳에는 커다란 조각상과 미술작품들이 놓여 있었다. 

현관을 지나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백작의 부인과 자식들 모두 다 나와서 에리한과 일행을 맞이했다. 

“저희 집에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왕자님!”

“감사합니다!”

파논 백작부인의 인사에 맞춰서 줄줄이 늘어선 자식들 또한 왕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를 받은 에리한은 우선 피곤한 몸을 쉬게 해 줄 방을 부탁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파논 백작은 미리 준비해 놓은 1층과 2층의 방들을 안내했다.

1층에 위치한 제일 큰 방은 에리한이, 그 옆방은 바임이 지내기로 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2층의 방을 배정 받았다. 한 시간 뒤에 백작가의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하기로 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소리오닌은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을 올라가면 정면으로 보이는 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침대와 작은 협탁이 보였다. 만족한 그녀는 풀썩 소리가 나게 침대 위에 누웠다.

“흐, 우리 집 침대랑 비교가 안 되네. 오늘 밤에 꿀잠 자겠다!”

소리오닌은 몇 바퀴를 굴러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넓은 침대가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만 다닐 수 있다면 2주 동안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짝 뻐근해진 무릎을 주물렀다.

똑똑.

한참 무릎을 주무르고 있던 소리오닌의 방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서둘러 대답을 하고 얼른 걷어 올렸던 치마를 내린 뒤 소리오닌이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에리한이 서 있었다.

“소리오닌 님, 방은 편하십니까?”

“에리한 님! 네, 너무 좋아요. 에리한 님은 잘 쉬고 계신가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에리한은 어느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자신을 걱정해 2층까지 올라와 준 에리한에게 웃어 보인 소리오닌은 먼저 그의 몸 상태를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은 에리한이 잠시 뒤에 보자고 말한 다음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어? 왕자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언제 씻고 나왔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복도를 지나던 페릴이 에리한을 발견하고 물어왔다. 

페릴의 옷차림을 한 번 훑어 본 에리한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느슨하게 풀려 있는 상의 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 골반이 살짝 보일만큼 편하게 내려 입은 바지.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 생활한 페릴에게는 씻고 난 후에 입는 당연한 옷차림이었겠지만, 에리한은 상당히 신경 쓰였다.

아직 문을 닫지 않지 않은 소리오닌의 시선이 페릴에게 닿았다. 그러자 에리한은 재빨리 그녀의 앞에 서서 소리오닌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페릴.”

“네?”

“옷…… 좀 단정히 입지?”

“헛? 네, 죄송합니다! 당장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페릴은 단정치 못한 옷차림이 왕자의 눈에 거슬렸다는 생각에 후다닥 방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지적에 당황한 얼굴을 하고 사라지는 페릴을 보니 그제야 좀 꼴사나웠다는 생각이 든 에리한이었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보던 소리오닌은 대체 언제 문을 닫아야 하는지 타이밍을 찾는 중이었다. 

***

파논 백작이 에리한 일행을 위해 준비한 저녁식사는 온통 고기뿐이었다. 커다란 식탁 가운데에 야채 샐러드 한 접시만 놓여 있을 뿐,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남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처음에 소리오닌은 눈을 반짝이면서 신나게 고기를 먹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느끼함이 더해져서 마지막에는 꾸역꾸역 입 안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식당에 둘러앉은 다른 사람들도 느끼한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파논 백작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두는 음료수만 홀짝이게 되었다.

“왕자님, 음식은 어떠십니까? 제가 특별히 육즙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고기들로 준비했습니다.”

“음, 이렇게 과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됐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왕자님께는 최상급의 음식을 푸짐하게 드려야지요!”

파논 백작이 입 안에 고기를 한가득 넣고 말했다. 그를 보는 에리한의 얼굴이 슬슬 굳어가기 시작했다. 에리한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바임이 재빨리 파논 백작을 말렸다. 

“백작님, 식사는 대강 끝난 것 같고, 왕자님께서 피곤하시니 이만 자리를 옮길까 합니다.”

“흠…… 그런가? 하긴 바론에서부터 걸어 오셨을 테니. 다른 자세한 얘기는 내일 아침에 해야겠구만.”

아직 포크를 놓지 않은 파논 백작은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에 반해 에리한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식당을 나가 버렸다. 에리한이 나가 버리자, 눈치를 보며 앉아 있던 소리오닌과 세리도 얼른 식당을 빠져나왔다. 

“휴우, 제가 고기를 잘 안 먹어서 그런가. 속이 안 좋아요.”

“나도 그래. 아니, 어떻게 빵도 하나 없이 고기만 놓고 먹으라는 건지…….”

“그렇죠! 나중에는 씹는 것도 힘들었다니까요!”

세리랑 같이 투덜거리며 2층으로 올라온 소리오닌은 방에서 쉬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를 몇 분, 아까 먹은 저녁이 단단히 체한 것 같았다. 이곳에는 소화제도 따로 없는 것 같으니 밖에 나가서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면 나아질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시간이라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내려온 소리오닌은 현관문을 열고 저택의 앞 쪽에 있는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정원에는 아까 길에서 봤던 로베린이 가득 피어 있었다. 페릴의 말대로 흰색과 빨간색 등 여러 색으로 피어 있는 로베린은 핑크색만 모여 있었을 때보다 훨씬 예뻤다. 소리오닌이 정신없이 로베린을 보고 있을 때였다. 

“소리오닌 님?”

그녀의 뒤에서 에리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늦은 시간에 자신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왔을 거라 생각 못한 소리오닌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에리한 님? 이 시간에 어떻게 나오셨어요?”

“속이 좀 안 좋아서 바람 좀 쐬려고 나왔습니다. 소리오닌 님은요?”

“저도 저녁 먹은 게 소화가 안 되는 거 같아서…….”

“그렇습니까? 역시 저녁으로 먹은 음식들이 좀 과했군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뜻을 나타낸 소리오닌이었다. 

“손이 아프십니까?”

자신의 옆에 서서 검지와 엄지 사이를 꾹꾹 누르는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이 물었다. 그의 물음에 누르는 동작을 멈춘 소리오닌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손이 아픈 건 아니고요, 여기를 누르면 속 안 좋은 게 가라앉는다는 말이 있어서요. 열심히 누르는 중이었어요.”

“네? 그런 얘기가 있습니까?”

“네, 에리한 님도 한 번 해 보세요. 효과 있다니까요!”

그녀가 말한 내용을 처음 듣는 듯한 에리한의 반응에 소리오닌은 그의 눈앞에서 손을 움직여보였다. 소리오닌을 보고 따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동작이라 손등을 어색하게 문지르기만 하고 있었다. 

“아니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요!”

그가 하는 게 답답해 보였던지 소리오닌은 직접 에리한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자신의 손등에 닿자 에리한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런 에리한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소리오닌은 계속해서 손등을 꾹꾹 누르는 중이었다.

에리한은 그녀의 동그란 이마와 긴 속눈썹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살짝 입 맞췄다. 충동적으로 행동한 에리한이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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