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 사브만으로 출발하는 날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그 사이 에리한은 왕에게 물건을 전달받았고, 세리는 에리한의 부탁으로 소리오닌과 함께 떠나게 되었다.
“소리오닌 님! 이 정도면 될까요?”
“응, 응. 와아, 진짜 많다. 좋아! 여기 병에다 담자.”
세리가 가져온 많은 양의 끈적이 풀을 본 소리오닌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게 있어야 테이핑하는 맛이 나지! 전에 마을 주민이 잼을 넣어 줬던 유리병을 안 버리고 놔뒀던 소리오닌은 그 안에 끈적이 액을 가득 채워 넣었다.
전에 만들어서 깨끗하게 세탁해 두었던 붕대와, 부목 대신 쓰일 나뭇가지, 테이핑할 때 필요한 끈적이 풀.
응급 용품으로 나름 괜찮은 구성에 소리오닌은 고개를 끄덕이며 콧노래를 불렀다.
“뮤우?”
언제 들어왔는지 소리오닌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본 야옹이가 작게 소리를 냈다. 그 울음소리를 들은 소리오닌이 창틀에 앉아 있는 야옹이를 재빨리 안아 들었다.
“야옹아! 너 배웅온 거야?”
“먀먀먀!”
소리오닌은 야옹이의 귀여운 엉덩이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녀의 손길에 간드러지는 울음소리를 내던 야옹이가 구석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보는 세리와 눈이 마주쳤다.
“헉, 사, 사르그……?”
“먓?”
야옹이의 빨간 눈동자를 본 세리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겨우 말을 내뱉었다. 부엌에서 여행 준비하다가 갑자기 돌처럼 굳어 버린 세리를 본 소리오닌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세리, 너도 야옹이 알아?”
“야, 야옹이는 모르는데……. 소리오닌 님이 안고 있는 게 사르그인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꺄악!”
“앗, 깜짝이야. 갑자기 왜 소리를 질러?”
세리는 소리오닌의 질문에 빽, 소리를 지른 다음 흥분해서 빨개진 얼굴을 하고 발을 동동 거렸다. 그녀의 심상치 않은 반응이 야옹이 때문이라는 걸 눈치챈 소리오닌이 야옹이를 세리의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댔다.
움찔! 야옹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세리는 어깨를 크게 움츠렸다.
“소, 소리오닌 님! 사르그를 그렇게 막 다루시면 어떡해요!”
“사르그? 야옹이 원래 이름이 사르그야?”
“네? 왜 그러세요! 초크센에 있을 때 소리오닌 님이 매일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셨잖아요.”
대체 갖고 싶은 게 왜 이리 많았던 거니, 과거의 나야.
또다시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세리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은 소리오닌이 야옹이를 고쳐 안고 살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그러게! 어쩌다 보니 바론에 와서 사, 사르……그를 만났지 뭐야?”
“그냥 사르그도 아니고, 붉은 눈이잖아요! 웬 일이야!”
“…….”
야옹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소리오닌은 세리가 하는 말에 맞장구 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붉은 눈이라서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멍한 표정으로 세리를 쳐다봤다.
야옹이는 코 앞에서 큰 소리를 내는 세리가 맘에 안 드는 듯 고개를 돌려 소리오닌의 품으로 얼굴을 숨겨 버렸다.
야옹이의 행동에 그제야 입을 다문 세리가 신기한 듯 손가락으로 야옹이의 정수리를 콕, 아주 살짝 찔러 봤다.
“먀앗!”
세리가 건드린 건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야옹이가 바로 짜증을 냈다. 그 모습이 귀여웠던 소리오닌은 크큭 웃으며 야옹이의 등에 얼굴을 부비기 시작했다.
세리는 자신이 손가락만 대도 짜증내던 야옹이가 소리오닌은 등에 뺨을 비벼도 가만히 있는 것이 얄미워 입술을 삐죽였다.
“세리, 이해해 줘. 내가 처음으로 챙겨줘서 야옹이가 이러는 걸지도 몰라. 올 때마다 밥 줬거든.”
“그래요? 사르그는 웬만하면 숲 밖으로 안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엄청 신기하네요.”
“음, 그럼 잠깐 마실 나왔나 봐. 자주 오는 건 아니고 가끔씩 오는 거 보니까, 원래는 숲에서 사는구나.”
야옹이에 대한 정보를 얻은 소리오닌은 자신이 여행에 가 있는 동안 야옹이가 혼자 심심해할까 봐 또다시 걱정이 되었다. 야옹이 데려가면 안 되겠지?
“야옹아, 난 다녀올 동안 혼자 잘 놀고 있을 수 있어?”
“뮤우우.”
“흠……. 아! 데려가고 싶다!”
소리오닌이 야옹이를 데려갈까 말까 심각한 내적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야옹이는 그녀의 품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그러고 나서는 힐끗 뒤돌아 본 뒤, 들어왔던 창틀을 통해 다시 숲 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미련 없이 나가 버린 야옹이의 뒷모습을 쳐다본 소리오닌은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셨다.
“역시 사르그라 그런지, 자기주장이 확실하네요. 가기 싫다는 거겠죠?”
“아마도……? 근데 나 왜 차인 느낌인 드는 거지?”
“그러게요. 차가운 녀석.”
휑한 창틀 앞에 두 사람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Chapter 2.
여행을 간다는 설렘에 한숨도 못 잔 소리오닌은 일찍부터 마당에 나와 에리한과 세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고 있는 가방을 열어 사브만국에 전해 줄 편지를 제대로 챙겨 놓았나, 다시 한번 체크하기도 했다.
소리오닌은 편지와 함께 다른 것들도 곱게 잘 놓인 가방을 보면서 씨익 웃음을 지었다.
“바람도 좋고, 가방도 빵빵하고. 여행가기 딱, 좋은 날이구만!”
새파란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본 소리오닌이 곧 세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게 팔을 휘저으며 뛰어 온 세리는 단숨에 소리오닌의 앞에 섰다.
“소리오닌 님! 많이 기다리셨어요? 이제 진짜 떠나는 거죠? 저 어제 너무 설레서 한 숨도 못 잤어요.”
“그치? 사실 나도 잠 못 잤어. 너무 떨린다!”
손을 맞잡은 채 발을 동동거리며 신나하는 두 사람을 본 에리한이 소리오닌에게 인사했다.
“소리오닌 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에리한 님. 좋은 아침이에요! 날이 좋아서 다행이죠? 근데…… 저기 두 분도 같이 가는 건가요?”
에리한의 인사에 대답한 소리오닌이 그의 뒤에 서 있는 두 남자를 보면서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에리한이 그들을 소개했다.
“바임이라고 합니다. 아마 몇 번 보셨을 겁니다. 제가 제일 신임하고 있는 신하입니다.”
바임은 에리한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고개를 살짝 숙여 소리오닌에게 인사했다.
소리오닌도 마주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인사가 끝난 뒤 둘은 눈을 마주쳤지만 서로 어색한 눈빛만 오고 갔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리고, 여기 이 친구는 황실 1기사단의 부단장인 페릴입니다. 생긴 건 이렇게 보여도 엄청난 실력자입니다. 아마 웬만한 병사 열댓 명보다 페릴 한 사람이 더 나을 겁니다.”
페릴을 가리킨 에리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소개에 쑥스러운 웃음을 지은 페릴이 소리오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페릴 구잔므입니다. 왕자님과 소리오닌 님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 커다랗게 소리치는 페릴의 인사에 소리오닌도 덩달아 씩씩하게 답했다.
구불구불 베이비 파마를 한 것 같은 페릴의 머리카락은 밝은 핑크색이었고, 동그란 두 눈동자는 은은한 회색빛이었다. 또한, 그는 에리한이나 바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어려보이고 순해 보이는 얼굴로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될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그럼 다 모였으니 출발해 볼까요? 우선 처음 지나갈 도시는 ‘사몬’ 입니다. 여기서 멀지 않으니 천천히 걸어서 가겠습니다.”
에리한의 설명에 세리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걸 본 에리한의 눈길이 세리에게 닿았다.
“저, 왕자님! 그래도 왕자님이 가시는 건데……. 마차나 다른 호위들은 없는 건가요?”
“사람이 많아봤자 관리하기 힘들 뿐이야. 그리고 어차피 사몬에 도착한 후에는 질리도록 마차를 탈 테니, 그 전에는 잠시 걸으면서 좋은 날씨를 즐기는 것도 좋지.”
“네에.”
명쾌하게 이해가 가는 설명은 아니었지만, 세리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의 표정을 본 에리한은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물론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마차나 말을 이용하는 게 맞았다. 거기에 많은 호위들이 알게 모르게 따라오는 게 정상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믿을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이 필요했다. 궁에서 지원해주는 것들은 믿을 수 없었다.
복잡한 생각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에리한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길을 가다 자신의 뒤를 따라 걷는 소리오닌을 힐끗 쳐다본 에리한이 걸음을 늦춰 그녀의 옆에 섰다.
“소리오닌 님, 가방이 무거워 보이는데 제가 들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아니에요, 안 무거워요! 중요한 것도 들었고 제 짐이니 제가 들어야지요. 그런데 에리한 님은 어떤 걸 가져가세요?”
그가 사브만으로 가져가는 게 궁금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소리오닌의 물음에 에리한은 뒤에 있는 바임을 한 번 쳐다봤다. 그의 시선에 바임 또한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아버님이 주신 것만 받아왔을 뿐,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아아, 그렇구나. 하긴 중요한 선물일 테니까, 먼저 열어볼 수는 없죠!”
자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소리오닌을 보며 에리한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를 따라가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 낸 이유니까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소리오닌에게 스스로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천천히 걷기를 두세 시간, 슬슬 복잡한 바론의 중심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것 같은 기분에 소리오닌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소리오닌 님, 이것 좀 보셔요! 너무 예쁘죠?”
“어머, 그러네?”
한참 걷던 걸음을 멈춰 선 세리가 길가에 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소리오닌이 시선을 돌려 꽃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연한 핑크빛의 꽃잎이 동그랗게 모인 꽃이 여러 송이 풍성하게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