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그의 말을 들은 소리오닌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예! 그래도 에리한은 이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니까 지도도 잘 보고 맛집도 알고 있겠지?
“에리한 님이 같이 가 주신다면 저는 정말 정말 좋죠!”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다시 다정한 웃음을 지은 에리한은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처음 보는 이세계의 구성이 그려진 지도에 소리오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기 가운데가 바론, 그 위쪽으로 위치한 이곳이 사브만입니다.”
에리한은 길고 하얀 손가락을 지도 중간에서 위쪽으로 옮기며 설명했다.
서로 붙어 있는 여러 나라가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바론과 사브만의 크기가 가장 컸다. 바론은 중부의 대부분을, 사브만은 북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구에 있는 나라들과 전혀 다른 땅덩어리들의 모습에 소리오닌은 자세히 지도를 살펴봤다.
미간이 찡그려질 만큼 집중해서 지도를 보는 소리오닌을 흘끗 곁눈질 한 에리한이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근처 나라의 위치 정도야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뭘 그리 신기하게 보는 건지.
소리오닌은 안 그래도 낯선 나라들뿐인데, 복잡하게 엉켜 있는 지도까지 분석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당장 이 울타리 밖을 나가본 게 손에 꼽을 만큼 적었던 터라 동서남북조차 모르는 터였다. 그녀는 에리한과 같이 가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음, 그러면 이렇게 숲으로 가는 게 제일 빠르겠네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바론 주위의 숲은 웬만하면 모든 곳에 위험 등급의 몬스터가 나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에엑, 몬스터요?!”
에리한의 말에 깜짝 놀란 소리오닌 재빨리 숲이 그려져 있는 부분에서 손을 뗐다. 에리한과 함께 가는 게 아니라 혼자 갔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빨리 간답시고 숲을 가로질렀을 생각을 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또르르 흘렀다.
얼굴이 하얘진 소리오닌의 반응을 본 에리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처음 저와 만났던 숲도 바론의 변두리 숲이죠. 그때 제가 다친 건 그 숲에 사는 몬스터인 하로곤 때문이었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숲으로 가는 건 안 되겠네요…….”
“네. 그래서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여기 도시들을 통과해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에리한이 바론과 사브만이 이어진 길 중간 중간 동그라미로 표시해 둔 곳을 가리켰다.
“여기 도시들을 통해서 가면 안전한가요?”
“대부분 그렇습니다. 여기 이 ‘포레즈’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다행히 대여섯 개나 되는 도시들 중에 한군데만 조심하면 된다고 하니 맘이 놓였다.
그래, 여행 가는 거라 생각하면 될 거야! 혼자 간다면 시작부터 게임 오버였겠지만 든든한 에리한이 있으니까.
소리오닌은 에리한을 보며 아빠 미소를 지었다. 순간 소리오닌의 얼굴에서 연륜이 묻어나는 미소를 느낀 에리한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봤다.
“에리한 님.”
“네.”
“제가 정말로 잘해 드릴게요!”
뭘 잘해 준다는 거야? 또다시 훅, 치고 들어오는 소리오닌 덕분에 에리한의 귀끝이 빨개졌다.
“어디 쑤시고 아픈 데 있으면 다 말해 주세요! 하루 만에 다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아, 아아……. 네.”
그러나 소리오닌은 에리한에게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약조할 뿐이었다. 의도치 않게 에리한을 들었다 놨다 한 소리오닌은 그의 마음도 모른 채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럼 소리오닌 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준비할 게 많을 테니.”
“네, 알겠습니다! 저는 따로 준비할 게 없을까요?”
“괜찮습니다. 제가 다 준비하겠습니다.”
에리한은 지도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만 마치고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뒤에 떠날지는 모르지만, 빠른 시간 내에 다녀오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해 최대한 빨리 준비를 하려했다.
“저…… 근데 정말 저희 둘만 가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기본적인 시종들은 있어야 할 테니까요.”
“그런가요? 그러면, 혹시 세리랑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전에 제가 얘기했었는데, 기억나세요?”
“물론입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해요!”
역시 왕자님이 가는 건데 둘만 가는 건 좀 초라하다 생각했어! 그럼 여러 사람들이랑 가는 거면 세리가 같이 가는 것도 괜찮겠지? 소리오닌은 세리와 꼭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으로 돌아가는 에리한을 문 앞까지 배웅한 소리오닌은 본격적으로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리 에리한 님이 전부 준비하겠다고 했어도, 챙길 게 있을 텐데. 아, 맞다!
뭐가 필요할까 골똘히 생각하던 순간 뭔가가 떠오른 그녀는 구석에 위치한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몇 벌 없는 원피스를 찢는 게 좀 아깝기는 했지만 소리오닌은 혹시 모를 부상에 대비해서 응급처치함을 만들기로 했다.
치마밑단을 찢어서 붕대로 쓰고, 앞마당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중에 튼튼한 걸 챙겨서 깨끗이 씻어 놨다.
세리와 함께 뜯었던 풀은 그녀의 집 근처에는 없었기에 가는 길에 보이면 뜯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아! 이 정도면 급할 때 쓸 만하겠지?”
어느새 식탁을 가득 채운 준비물들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
바임은 에리한이 홀연히 사라진 집무실에서 혼자 일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깜짝 놀라 그 공녀한테 달려갔겠지.
린셀과 헤어진 뒤에 에리한을 만나지 못한 바임은 아직 돌아오진 않은 그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빠!”
그때 살짝 열려 있는 집무실의 문 틈 사이로 민츠의 얼굴이 쏙 나타났다. 주근깨가 가득한 동생의 귀여운 얼굴을 본 바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둘만 남은 후 두 사람은 누구보다 돈독하게 지내왔다. 둘 다 운 좋게 궁에서 일하게 되면서 하루 몇 번씩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민츠,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으응, 저기…… 왕비님이 오빠 좀 데려오라고 하셨어.”
“지금?”
“응. 바빠?”
자신이 왕비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걸 아는 민츠는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민츠의 표정을 본 바임은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게 무슨 죄라고…….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며 문 밖에 서 있던 동생을 데리고 정원을 가로질러 왕비궁으로 향했다.
“왕비님이 다른 말은 안 하셨고?”
“응. 근데 오늘도 화나셨는지 방 안에 있던 물건을 다 깨트리셨어. 예쁜 찻잔도 있었는데 아깝지 뭐야!”
“찻잔? 깨진 거 치우다가 다치진 않았어?”
“괜찮아! 위험한 건 언니들이 다 해 줬어.”
바임은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민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멈춰 서서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오빠 혼자 갈게. 볼 일 봐.”
“우움, 알았어. 그럼 나 가 볼게!”
고개를 끄덕인 민츠는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식당 쪽으로 뛰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본 바임은 짧게 한숨을 쉰 뒤 안으로 들어갔다.
똑똑.
노크를 한 뒤 왕비의 방으로 들어 간 바임은 방을 한 번 둘러봤다. 저번에 왔을 때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에 바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왕비는 그녀의 방을 매주 값비싸고 귀한 장식품들을 바꿔가며 꾸며 놓았다. 하지만 바임은 단 한 번도 부럽다거나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왕비의 번쩍번쩍한 방에서 제일 화려하게 빛나는 건 역시 아름다운 얼굴을 한 왕비였다.
그녀는 금빛 장식이 된 풍성한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커다란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바임은 오늘도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혹시 에리한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들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침 일찍 운동할 때 이후로 에리한의 얼굴을 보지 못한 바임이 왕비에게 되물었다.
“아직 못 들었나보군. 어쩌다 보니 에리한도 그 공녀와 함께 사브만으로 가게 되었다.”
“네? 왕자님이 바론을 떠나신다고요?”
“뭐, 이미 결정난 일이니 그걸 알려 주기 위해 부른 건 아니고. 너도 함께 가서 틈나는 대로 그 공녀를 없애도록 해.”
“……!”
소름 돋는 명령을 내린 왕비의 얼굴은 마치 오늘 점심은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하지만 민츠가 이곳에 있는 이상, 바임은 무턱대고 왕비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방을 빠져나왔다.
바임은 왕비의 방에서 나와 조용한 복도를 홀로 걸으며 생각했다. 점점 더 악독해지는 왕비의 요구는 자신이 허용하기에는 선을 넘은 것 같다고…… 우선 에리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임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에 돌아왔다. 어느 새 돌아온 에리한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한 님.”
“아, 바임. 어딜 다녀오는 거야? 일하던 것도 다 내버려두고.”
“에리한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바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에리한은 그가 할 말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에리한이 자리를 비운 그새를 못 참고 왕비가 바임을 불렀던 것이 분명한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흠, 혹시 사브만에 가는 일 때문인가?”
“……네. 왕비님께서 저에게 소리오닌 님을 없앨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에리한 님. 저는 소리오닌 님을 해칠 수는 없습니다. 에리한 님을 믿고 따를 테니 저와 동생이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주십시오!”
에리한은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며 애원하는 바임의 모습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왕비에게서 등 돌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사람을 죽이는 건 너무했지. 짧은 생각을 마친 에리한은 바임에게 오늘 생각해 낸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가 린셀 님을 설득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네가 좀 더 빨리 린셀이랑 결혼했으면 제일 좋았을 테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차선책을 생각해야하지 않겠어?”
“……그렇군요…….”
에리한의 제안을 수긍한 바임은 빠른 시일 내에 린셀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왕자님이 그 공녀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모두 다 행복해지는 일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