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00)

020.

자신의 남편과 이른 티타임을 즐기던 왕비는 거친 숨을 내쉬며 들어오는 아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띄웠다. 

그럼 그렇지. 언제쯤 알고 달려오나 싶었다. 

“아, 에리한.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도이첸이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진 에리한을 보며 의아한 듯한 얼굴로 물었다. 왕의 물음에 간단히 그들에게 인사를 한 에리한이 왕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님. 진짜 여인 혼자의 몸으로 사브만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흠, 뭐 그냥 평범한 인간도 아니고 능력이 뛰어나다하니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어서 부탁한 거다. 그리고 소리오닌 양도 거절하지 않았고.”

“무슨……! 분명히 어머니께서 허락할 수밖에 없게끔 얘기 하셨겠죠.”

에리한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왕비에게 싸늘하게 대꾸했다.

“내가? 어미를 이렇게 의심하는 거니? 속상하구나.”

“됐습니다. 어서 그 말씀이나 취소하시죠.”

“이미 며칠 전에 사브만에 전령을 미리 보냈어. 취소할 수 없다.”

왕비의 무책임한 태도에 크게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 에리한을 멈추게 한 왕이 싱긋 웃었다. 

모자의 신경전을 모르쇠로 방관하던 왕이 갑자기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왕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소리오닌 양이 사브만으로 간다고?”

“……아직 아닙니다.”

왕의 물음에 에리한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소리오닌은 며칠 후면 사브만으로 가게 될 거다.”

에리한은 자신의 대답에 얄밉게 끼어드는 왕비를 노려봤다. 아주 철저하게 준비했나 보군. 어떻게든 그녀를 보내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주먹을 꼭 쥔 채로 열심히 생각하는 에리한을 힐끗 쳐다본 왕이 크게 박수를 쳤다.

“그거 잘됐구만! 나도 에리한을 사브만으로 보낼 일이 생겼는데. 같이 다녀오면 되겠어!”

“……네?”

생각지도 못했던 왕의 갑작스런 제안에 깜짝 놀란 왕비와 에리한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무슨……?”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왕비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허리를 폈다. 그리고 왕이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미소를 그대로 돌려줬다. 분명히 사브만과는 이제까지 왕이 직접 교류하는 일은 없었다. 나를 당황하게 하려고 급하게 꺼낸 말이겠지.

왕비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본 왕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은 오랫동안 성 안을 가득 채워 왕비의 얼굴이 굳어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에리한을 사브만에 보낼 일이 무엇인가요?”

왕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왕을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사브만의 왕에게 전할 물건이 있소.”

그녀의 물음에 왕은 마주쳐 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입술 끝만 올려 웃으며 답했다. 

“그 정도라면 에리한이 아닌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지 않습니까?”

겨우 물건 배달을 위해 아들을 그 먼 곳으로 보낼 생각을 하다니……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닌가? 왕이 자신이 하는 일이 끼어든 게 못마땅한 왕비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이웃의 왕에게 보내는 건데 아무나 보낼 수는 없지.”

“하지만, 사브만으로 가는 시간이 너무 깁니다. 그리고 가는 동안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소리오닌 양이랑 같이 보내려는 게 아니겠소? 왕비가 말했듯이 소리오닌 양의 능력이 좋다하니, 에리한도 안심할 수 있을 거요.”

도이첸은 방금 전 왕비가 에리한에게 한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왕의 말에 순간 어깨를 움찔한 왕비는 그 앞에서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왕비의 당황한 얼굴을 본 에리한은 씨익 미소를 짓고 왕을 향해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바마마, 제가 꼭 잘 전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럼 슬슬 떠날 준비를 하거라. 곧 다시 부르마.”

왕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자신의 할 말만 한 왕이 에리한을 내보냈다. 그의 말에 깊게 고개를 숙인 에리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왕비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에리한이 사라진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어째서 그 초크센의 공녀를 도와주는 것인가요? 정말 에리한과 그 여자를 이어주기라도 할 생각이십니까?”

“허허, 나는 정말 에리한에게 맡길 일이 생각났던 것뿐이라오. 그러는 왕비야말로 사내도 혼자서는 가기 힘든 길을 그 공녀 혼자 보내려는 속셈이 무엇이오?”

바락 짜증을 내며 말하는 왕비를 능글맞은 웃음을 진 채로 쳐다보던 왕이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그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속셈이라니요? 저는 정말 린셀의 혼인이 축복 받기를 원해서 한 선택입니다.”

“흐음. 뭐, 그렇다고 합시다. 더 말해봤자 서로한테 좋은 소리는 안 나오겠군. 그럼 나 먼저 일어서겠소.”

“…….”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왕비를 곁눈질로 훑어 본 왕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부들거리며 빨간 입술을 꾹 깨문 왕비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찻잔을 거칠게 쓸어 버렸다.

쨍그랑! 향긋한 향기를 뿜는 찻잎과 다과들이 바닥으로 쏟아지고 깨진 유리컵의 파편이 여기저기 튀었다.

밖에 서 있던 시녀들이 안에서 나는 큰 소리에 놀라 뛰어 들어왔다. 그녀들은 왕비의 눈에 가득한 살기에 눌려 재빨리 청소를 시작했다. 

급하게 방을 정리하는 시녀들을 본 왕비는 그중 눈에 익은 한 명을 불러냈다.

“민츠. 이리 오렴.”

“……네, 네! 부르셨나요. 왕비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란 민츠는 후다닥 왕비의 앞에 가서 섰다. 겁에 질린 밝은 갈색 눈동자가 차마 왕비를 향하지 못하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왕비는 민츠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한숨을 쉬었다.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부들부들 떨어대는 꼴이라니……. 바임만 아니었다면 당장 내쫓았을 텐데.

답답하지만 민츠를 데리고 있는 이유. 에리한의 신임을 받고 있는 바임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한 인질이었다.

“오라버니에게 오늘 오후 내 방으로 오라고 전해라.”

“네! 아,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이는 왕비의 전언에 민츠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민츠의 대답을 들은 왕비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툭, 친 다음 자신이 엉망으로 만든 방을 한 번 훑어봤다.

“카펫에 얼룩이 졌으니, 오늘 안으로 다 바꿔 놓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아랫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그 방에 있던 누구도 왕비에게 따질 수 없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목이 잘린 사람이 한두 명이었던가.

***

똑똑.

“소리오닌 님!”

소리오닌은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밖에서 들리는 에리한의 목소리에 얼른 일어났다.

“에리한 님! 안녕하세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이렇게 일찍 온 적은 없었는데, 어쩐 일이지?

평소보다 이른 그의 방문에 소리오닌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아침 햇살에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 모습에 에리한이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선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소리오닌은 서둘러 에리한을 집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에리한이 준 찻잎을, 에리한이 준 찻잔에 우리기 시작했다. 곧 적당히 우러난 차를 에리한이 주었던 쿠키와 함께 내온 소리오닌은 문득, 자신이 참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신은 여기서 나갈 수 가 없는 처지라 어디서 뭘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에리한에게 차려준 것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에리한이 선물한 것들이라 대접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러나 에리한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맙다는 말을 하고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저…… 에리한 님.”

“네?”

“사실은 제가 고백할 게 있어요.”

“고, 고백이요?”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볼을 살짝 붉힌 소리오닌의 모습에 에리한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고백이라니, 이렇게 갑자기? 그녀의 갑작스런 말에 놀란 에리한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오닌을 쳐다봤다. 그러나 소리오닌이 꺼내놓은 ‘고백’은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네, 전에 에리한 님이 왕비님의 부탁을 거절하라고 한 적 있으셨잖아요. 근데 제가 그 말을 깜빡하고 홀라당 승낙하고 말았지 뭐예요.”

“아, 그거요.”

30초 만에 평온을 찾은 심장박동을 느끼며 에리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에리한의 모습에 소리오닌이 그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왕비님의 부탁이 알고 보니까 좀 많이 어렵더라고요. 왜 그때는 에리한 님의 말씀이 안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일찍 왔습니다.”

푹,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는 소리오닌에게 얼굴을 굳힌 에리한이 대답했다. 평소 언제나 미소를 짓는 그의 굳은 얼굴을 본 소리오닌은 다시 한번 멍청한 자신을 탓해야 했다.

“왕비님께 들으셨어요? 근데 사브만이 대체 어디인지……. 저 혼자 잘 찾아갈 수 있을까요?”

“소리오닌 님, 정말로 혼자 갈 생각이셨습니까?”

“그럼 누구랑 같이 가나요?”

왕비와 만난 건 자신 혼자인데. 그때 다른 사람이랑 같이 가라고 했었나? 기억에 전혀 없는 말을 들은 소리오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자란 게 티 나는 말과 행동이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혼자 찾아갈 생각을 한단 말인가! 순간 이렇게 순진한 소리오닌을 꼬여낸 왕비의 얼굴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에리한이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피면서 얘기했다. 

“저랑 같이 가시죠.”

“네? 에리한 님이랑요?”

자신의 말에 놀란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이 차분히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아버님께서 사브만에 보낼 물건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귀한 물건이라 아무나 보낼 수는 없기에 제가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어, 얼마나 귀한 물건이기에 왕자님이 직접 가시나요?”

“글쎄요, 저도 아직 못 봐서…….”

아마 포크 한 개라도 명분은 충분할 것이다. 자신이 사브만에 가는 진짜 이유는 물건 배달이 아니니까.

분명히 중간에 소리오닌을 없애거나, 아예 사브만에서 못 돌아오게 할 만한 계획을 짜고 있었겠지.

좀 더 조심했었더라면 사브만까지 가는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았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최대한 그녀를 안전하게 지키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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