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00)

016.

“오! 정말 몇 번 만져준 것뿐인데, 손목이 움직이기가 더 수월해졌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궁 안 마법사들의 힐도 그닥 효과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사냥하실 때 관절을 잘못 움직이신 것 같습니다. 근육과 관절을 좀 부드럽게 만들었어요.”

“호오? 정말 내 손목 안에 근육과 힘줄이 어떤 상태인지 보이는 건가?!”

소리오닌은 그런 게 아니라며 급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자신의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는 왕의 눈에는 그녀의 고갯짓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치료에 기분이 좋아진 왕이 호탕하게 웃으며 물었다.

“소리오닌 양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구만! 그래, 뭐 가지고 싶은 건 없으신가? 내 이렇게 만족스러운 치료를 받았으니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아버님, 선물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왕의 물음에 냉큼 대답을 한 건 소리오닌이 아닌 에리한이었다.

응? 나는 생각 좀 해 보려고 했는데, 왜 먼저 대답하고 그래?

자신의 대답을 가로 챈 에리한의 태도에 소리오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분명히 당황스런 그녀의 눈길을 느꼈을 텐데도 에리한은 시침을 떼고 말을 이어갔다. 

“소리오닌 님은 제가 알아서 잘 챙기고 있으니 걱정 마시죠. 이런 게 소리오닌 님을 더 귀찮고, 불편하게 하는 일입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먹듯 정확하게 말한 에리한은 입술을 올려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채로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흠. 그런가? 뭐, 그렇다면…… 앞으로도 소리오닌 양을 잘 챙겨 주도록 하거라.”

“네. 걱정 마십시오.”

에리한은 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못 박았다. 그리고 여전히 왕의 옆에 서 있는 소리오닌을 데리고 그곳을 벗어났다. 

“아,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즐기다 가게나!”

왕은 에리한에게 끌려가면서도 꾸벅 인사를 하는 소리오닌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조합인 두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왕은 슬쩍 뒤를 돌아보고 얘기했다.

“흠, 저 여자가 정말 초크센의 알몬느 공작 여식이 맞는 건가?”

“외모는 정확히 일치합니다. 1년 전에 봤던 모습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저 정도 능력을 가지고 왜 이제까지 아무 말도 없었지?”

“……그건……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두운 커튼 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 있던 장신의 남자, 네이드는 왕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왕비가 뭘 꾸미고 있는지도 최대한 빨리 알아보도록.”

“네. 알겠습니다.”

팔랑, 순식간에 네이드가 사라지면서 커튼이 흔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왕은 턱을 괸 채 무도회 홀을 한 번 슥,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의 무도회에서 왕자의 결혼 상대를 찾는 건 무리겠구만.

***

“소리오닌 님,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저의 부모님 두 분 다 민폐를 끼쳤네요.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왕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 에리한이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의 말에 손을 내저은 소리오닌은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두분 다 너무 예쁘고, 멋있으셔서 눈 호강 제대로 한 걸요!”

“역시, 소리오닌 님은 맘이 넓으십니다.”

에리한은 발랄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싱긋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음식과 무도회를 즐기려고 하던 찰나였다. 여기저기서 둘을 향해 수군거리는 소리에 그는 슬쩍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성인식을 맞아 왕자비를 정할 거라 생각한 무도회에 볼모로 잡혀 온 공녀를 데려 온 왕자나, 그를 따라와서 위나와 트러블을 일으킨 소리오닌이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은 먹잇감이긴 했다.

웬만하면 그들을 무시하고 음식을 담으려던 소리오닌도 사람들이 점점 주위를 둘러싸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선 뭔가를 결심한 듯 커다란 접시를 가져와 먹고 싶었던 음식을 한가득 쌓기 시작했다.

“뭐……하십니까?”

“잠시만요, 이거 하나만 더 담고요.”

얼핏 봐도 금방 쓰러질 만큼 아슬아슬하게 음식으로 탑을 쌓은 소리오닌은 마지막으로 체리 하나를 꼭대기에 예쁘게 올린 뒤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아직 그녀가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얼굴을 한 에리한을 본 소리오닌이 덥석,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

“가시죠, 왕자님! 이 왕궁에서 제일 한적하고 예쁜 곳으로 추천해 주세요!”

접시가 흔들리지 않게 고쳐 잡은 소리오닌은 에리한을 보며 얘기했다. 그제야 그녀가 한 행동을 이해한 에리한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아아, 알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제일 예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붙잡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무도회장을 벗어났다. 

“후아! 이제 좀 맘 편히 즐길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초대해 놓고 제대로 챙겨드리지도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근데 솔직히 저는 여기가 더 예쁘고 좋은 거 같은데요.”

에리한이 데리고 온 곳은 왕궁 뒤 쪽 끝에 있는 후원이었다. 왕궁 바로 뒤가 아니고, 찾아오는 길도 복잡해 일부러 후원까지 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왕궁 안의 정원이라 작은 분수와 유리 온실, 색색의 꽃들이 부족함 없이 위치해 있었다.

달빛이 쏟아지는 밤, 커다란 꽃나무 아래에 있는 테이블에 음식을 놓은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에리한의 찰랑이는 금발은 달빛만으로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과 같이 있는 듯한 느낌에 소리오닌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달빛 아래 그의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던 소리오닌은 방금 전 만났던 왕과 왕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역시 유전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다시 한번 유전자의 힘을 느끼는 소리오닌이었다.

그때,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에리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리오닌 님. 혹시 어머니께서 곤란한 부탁을 하신다면 괜찮으니 무조건 거절하세요.”

“음, 왜요?”

“흠, 저의 어머니이지만 좀…… 제멋대로인 경우도 있어서. 미리 말씀 드리는 겁니다.”

소리오닌에게 어머니를 욕하는 것 같아서 좀 찜찜했지만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니, 에리한은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아아, 네. 우선 왕비님이 정말로 부르신다면…… 잘 듣고 판단할게요.”

“네. 그리고 그 부탁을 저한테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근데 몬스터를 처치해 오라거나 그런 부탁은 아니겠죠?”

“……네? 무슨……. 크큭.”

소리오닌이 작은 목소리로 에리한에게 말했다. 그녀의 황당한 상상에 웃음이 터진 에리한은 주먹을 꼭 쥔 채 큰소리로 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 그런 부탁이 아닌가? 능력 얘기를 하기에……. 에리한의 빨개진 얼굴을 본 소리오닌은, 한국에서 봤던 판타지 소설의 내용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아무리 어머님이 안하무인이라 해도 여인에게 몬스터를 잡아오라는 부탁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 그렇군요. 하하, 제가 너무 멀리 갔네요.”

소리오닌은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매단 채 말하는 에리한에게 민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뒤로 딱히 할 말이 없어진 둘은 멀리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클래식은 잘 모르지만 잔잔히 들려오는 소리가 좋아 눈을 감고 발끝을 까딱거리던 소리오닌은, 박자에 맞춰 테이블 위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톡톡, 톡.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위치한 그녀의 분홍 손톱이 테이블 위를 유영하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보던 에리한은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움직이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에리한의 기다란 손가락도 천천히 움직였다.

점점 더 그녀의 손가락을 향해 다가간 에리한은 우연인 듯 아닌 듯 소리오닌의 손가락에 슬쩍 자신의 손가락을 부딪쳤다.

“?”

뭔가가 손가락에 부딪히는 느낌에 감고 있던 눈을 뜬 소리오닌이 어느새 자신의 손에 딱 붙어있는 에리한의 손을 쳐다봤다.

소리오닌의 의아한 표정을 본 에리한은 쑥스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무도회니까…… 춤을 추는 거죠. 여기 테이블이 무대, 이 손가락이 저와 소리오닌 님.”

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배시시 웃는 에리한을 본 소리오닌은 그를 따라 작게 웃음 지은 뒤,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요?”

소리오닌과 에리한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서로의 손가락을 장난스럽게 움직이며 키득거렸다. 

화려한 조명도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도 없는 오직 둘만의 무도회였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밤이었다. 

***

“에리한 님,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저 챙겨 주시느라 무도회를 못 즐겨서 어떡하죠?”

“아닙니다. 저도 평소의 무도회보다 오늘이 훨씬 즐거웠습니다.”

무도회가 파한 뒤 에리한과 소리오닌은 그녀의 집 앞까지 함께 동행했다. 오늘 후원에서 둘만의 무도회를 즐긴 두 사람은 훨씬 더 부드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소리오닌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급히 돌아서서 에리한을 불렀다.

“저…… 에리한 님, 부탁이 있어요!  저와 함께 왔던 포로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꼭 부탁드릴게요! 생사라도 알고 싶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그중에서도 ‘세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가 있으면 꼭 알려주세요!”

그동안은 에리한이 궁의 말단 직원인 줄로만 알아서 차마 못 물어봤었다. 하지만 그가 왕자라는 걸 알게 되자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세리의 안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급작스러운 부탁에도 싫은 기색 없이 알겠다 대답하는 에리한에게 싱긋 웃은 소리오닌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네.”

소리오닌이 살랑, 손을 흔든 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고 나서 얼마 후 집에 불이 켜지는 것까지 확인한 에리한은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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