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아, 제가요? 에리한 님, 괜찮을까요? 괜히 실수할까 봐…….”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한 소리오닌이 에리한을 보며 의견을 물었다.
이 나라의 예절도 제대로 모르는데, 무턱대고 왕비와 얘기하다가 그 앞에서 실수하면 에리한까지 혼날까 봐 무서웠다.
에리한 역시 아직은 왕비와 그녀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아,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소리오닌의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본 카일은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소리오닌 님은 초크센에서 오셨으니까, 실수할 수 있는 건 충분히 이해해 주실 겁니다. 그리고 왕자님의 어깨도 고쳐주셨다 들었는데, 너무 감사한 마음에 부르시는 거니까 걱정 마세요.”
아들인 에리한의 어깨를 고쳐 줘서 감사 인사를 한다는데 소리오닌은 그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사실 별 거 아니었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엄청 신기해 하니까……. 왕비라고 다르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잠깐만…….”
“감사합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소리오닌의 수락이 크게 웃음을 지은 카일이 그녀를 데리고 단상 쪽으로 걸어갔다.
자신이 말릴 새도 없이 그녀를 데려가는 카일의 모습에 얼굴을 굳힌 에리한도 얼른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전하. 왕비님. 소리오닌 알몬느 양입니다. 왕자님의 어깨를 고쳐 주신 분입니다.”
“안녕하세요. 소리오닌 알몬느입니다.”
카일의 소개가 끝나자 소리오닌은 얼른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는 소리오닌의 모습에 왕비의 눈썹이 아주 잠깐 꿈틀했다 다시 돌아왔다.
“그래, 반가워요. 우리 에리한의 어깨를 고쳐줬다고?”
소리오닌을 보며 호기심이 가득한 웃음을 지은 왕이 먼저 말을 걸었다. 소리오닌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자신의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있는 왕을 올려다봤다.
밝은 금발 머리와 보랏빛이 나는 파란 눈, 나이가 있음에도 탄탄해 보이는 체형까지. 에리한의 20년 후를 보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소리오닌의 눈에 호감이 가득 차올랐다.
“네. 하지만 제가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인체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허허, 공작가의 여인이 인체에 대한 지식이라. 거 참 흥미로운 일이구만.”
바론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나라들의 귀족가 자제들은 남자들은 대부분 학문과 검술 등 학문을 많이 배우는 편이었다. 그에 비해 여자들은 학문보다는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기 위한 것들을 배우는 게 정석이었다.
초크센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그곳에 살면서, 거기다 공작 집안이면 더더욱 철저하게 배움에 대해 구분을 했을 텐데……. 그녀의 대답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제대로 된 예의범절은 배우지 못했나 봅니다.”
차갑게 울리는 왕비의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에 툭, 끼어들었다. 갑자기 들리는 가시 돋친 말에 소리오닌은 고개를 돌려 왕비를 쳐다봤다.
하얀 얼굴에 장미보다 빨간 입술, 밝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에 붉은 머리를 빈틈없이 올린 왕비는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어 스스로의 모습을 더 빛내고 있었다.
근데 저 얼굴은 왠지 아까 자신의 뺨을 때렸던 여자와 너무 비슷한데……. 영, 기분이 찜찜해. 분명히 에리한의 어머니라고 했는데 어쩜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까? 속으로 의문을 느낀 소리오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왕비. 손님에게 무슨 말이오! 지금은 당신이 더 예의가 없구려.”
“지금 제게 예의가 없다 하셨습니까? 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왕비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은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정작 왕이 나서서 소리오닌을 옹호하고 있었다.
평소 이래도 저래도 아무 반응이 없던 도이첸이 대놓고 소리오닌의 편을 들자, 마리딘은 어이없는 눈으로 자신의 남편을 째려봤다.
큰소리도 내지 않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괜히 민망해진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별 감흥 없이 부모를 보고 있던 에리한은 자신의 팔을 건드리는 소리오닌의 부름에 그녀를 내려다봤다.
“저기…… 저 때문에 싸우시는 거 맞죠……?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말려요?”
“저러다 말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래도…….”
별 일 아니라는 듯한 에리한의 반응에도 계속해서 둘의 눈치를 보던 소리오닌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소리오닌이 낸 소리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만 노려보다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리한을 고쳐준 것에 대해 무엇이든 말을 해 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왕비는 소리오닌을 뚫어지게 쳐다만 볼 뿐 한동안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결국 왕비의 태도에 답답해진 소리오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왕비님……. 저에게 하실 말씀은 이제 없으신 건가요……?”
“아니.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여기서 멍하게 있느니 얼른 가서 먹다 만 음식들을 먹고 싶었던 소리오닌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왕비의 말에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대놓고 시무룩한 얼굴을 한 소리오닌을 보고 속으로 기가 막힌 웃음을 낸 왕비는 천천히 붉은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했던 말은 무례했어요. 미안합니다. 그나저나 소문대로 능력이 좋은가 궁금하네요?”
왕비는 왕과 대화할 때 살벌했던 표정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순식간에 변하는 표정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소리오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는 소문처럼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까 말했다시피 공부를 좀 더 했을 뿐입니다.”
“공부도 스스로 찾아서 했을 테니 그것 또한 자신의 능력이지요.”
“아……. 네…….”
칭찬인지 아닌지 애매한 그녀의 말에 소리오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소리오닌 양에게 부탁을 좀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이요?”
왕비는 소리오닌을 보며 더욱 더 화려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부탁? 무슨? 왕비의 말에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왕과 왕자, 그리고 소리오닌의 눈길까지 한꺼번에 받은 왕비는 과장되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렇고…… 제가 조만간 정식으로 초대할게요.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하죠.”
“……네.”
소리오닌의 대답을 들은 왕비는 싱긋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볼일은 끝났다는 듯 힐끗 무도회장을 한번 둘러본 뒤 인사도 없이 왕비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하만 백작과 카일이 그녀의 뒤를 따라 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왕비님!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저 여자에게 부탁이라뇨?!”
“별 거 아닙니다. 그저 얼른 제 눈앞에서 없애 버리기 위한 거죠.”
“네? 아니, 그 잠깐 사이에 뭔가 계획을 세우신 겁니까?”
슬며시 웃음을 머금고 얘기하는 왕비를 본 자하만 백작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자세한 건 아니지만, 대강 생각해 놓은 건 있습니다.”
“하하하! 역시 우리 마리딘 왕비님입니다! 저는 전적으로 왕비님께 맡기겠습니다!”
자신의 사촌동생을 자랑스러운 눈으로 본 자하만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왕비는 발걸음을 멈춘 뒤 자하만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언제 웃었냐는 듯 백작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위나에게 다시는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전해 두세요. 그래봤자 저희에게 이득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나이가 몇인데 그런 상스러운 짓을…….”
“큼. 흠흠! 네, 죄송합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위나의 행동을 비난하는 왕비의 말에 자하만 백작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였다.
왕비 마리딘은 그런 자하만 백작을 못마땅한 얼굴로 다시 한번 쳐다본 뒤 그녀의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싸늘한 분위기를 형성해 놓고 들어가 버린 왕비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왕비의 성격이 좀 예민한 편이니 이해해 주게나.”
도이첸이 오랜 침묵을 뚫고 소리오닌에게 양해의 말을 건넸다. 그의 말에 괜찮다고 웃어 보였지만, 소리오닌은 이제 정말로 무도회를 즐기고 싶었다.
한창 발가락을 움찔거리던 그는 다시 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흠, 근데 소리오닌 양. 정말로 아픈 곳을 잘 고치는 능력이 있는 건가?”
“……네?”
“아니, 내가 전에 사냥을 다녀 온 뒤로 손목이 좀 불편해 가지고…….”
소리오닌이 돌아가고자 준비하는 걸 본 왕이 얼른 그녀를 불러 세워 자신의 손목을 보이며 얘기했다.
하아…… 여기는 병원 같은 기관이 아예 없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이제 그만 밥 좀 제대로 먹고 싶다!’ 소리치고 싶었지만, 에리한의 아버지이자 바론의 왕이 한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일반 국민 나부랭이가 어떻게 싫다고 하겠어.
“아버님. 이제 그만 보내주시죠. 소리오닌 님은 아직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습니다.”
“흠…… 아니, 내가 하루 종일 붙잡겠다는 게 아니라…… 손목 한 번만…… 안 되나?”
에리한에게 한 소리를 들은 왕이 소리오닌의 눈치를 보며 슬쩍 손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 나라의 왕답지 않은 귀여운 행동이었다. 피식, 웃음을 지은 소리오닌은 도이첸이 앉아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
아무리 치료를 위해서라지만, 아무리 자신의 아버지라지만, 소리오닌이 다른 남자의 손을 잡는 모습을 본 에리한은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점점 굳어가는 표정의 에리한과 반대로 소리오닌은 왕의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관절과 근육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방금 전보다 훨씬 좋아진 손목의 움직임에 왕은 입을 귀에 걸듯이 좋아했다.
무도회장 안의 사람들 역시 황금빛 드레스를 입고 왕의 옆에서 신성한 치료를 행하고 있는 소리오닌을 보며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저기 전하도 엄청 만족스러운 얼굴이시잖아. 대체 어떤 능력이길래? 궁금해!
사람들은 점점 더 궁금해지는 그녀의 능력과 더불어 자신들도 그녀에게 치료를 받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