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00)

014.

“잠깐만요,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닙니다!”

소리오닌은 구름떼같이 몰려든 사람들에게 그런 게 아니라고 재빨리 변명을 했다. 하지만 소리오닌이 여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이미 저들끼리의 온갖 허황된 소문이 진실이었다.

내가 미쳐. 이게 뭐야, 대체! 어느새 자신들이 아픈 곳을 내보이며 고쳐달라고 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소리오닌은 얼굴만 하얗게 질려 그들을 피해 뒷걸음치고 있었다. 

결국 홀의 중앙에서부터 밀리고 밀려 뒤로 물러나던 소리오닌의 등이 툭, 무언가에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소리오닌은 자신이 어떤 여자와 부딪혔다는 걸 깨닫고 얼른 사과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과에도 아무 말 없이 소리오닌을 노려보는 여자의 눈빛에 알 수 없는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생각보다 세게 부딪혔나? 아휴, 그러니까 왜 다들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자신만 괜한 봉변을 당하는 것 같아 눈앞에 몰려든 사람들을 살짝 째려볼 때였다. 

“소리오닌 알몬느?”

“네?”

방금 부딪힌 여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이 사람도 나를 알고 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흥, 망한 나라 공녀 주제에 그래도 왕자님한테 잘 보이고 싶었나 보네?”

뭐…… 뭐야, 이 어이없는 여자는? 

핑크색 드레스에 붉은 머리칼을 가진 미녀가 다짜고짜 악의가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한쪽 입술만 삐죽 올린 채 소리오닌을 쳐다보았다.

소리오닌을 향해 몰려든 사람들은 그녀의 앞에 있는 여자가 위나 자하만인 걸 알게 되자 다시 웅성거리며 그 둘을 둘러쌌다.

뭐야? 위나 자하만이잖아? 어머, 어머, 웬일이야! 위나 자하만이 왕자비 자리를 노리고 왔다고 들었는데…….

아까보다 더 흥미진진한 상황에 사람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버둥 쳐 봤자, 너는 평생 그 집에 갇혀 있을 테니 일찌감치 꿈 깨.”

“저기요.”

“뭐, ‘저기요’?”

“그래요, 너. 내가 너 이름은 모르니까요. 근데 아까부터 자꾸 뭐라는 거예요?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다짜고짜 반말에다, 인격 모독이야?”

바론의 속국이 되어 볼모로 끌려왔다고 들었는데……. 뭘 믿고 저렇게 고개 빳빳이 든 채로 위나 자하만에게 대드는지.

소리오닌의 행동에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헉! 소리가 나왔다.

당연히 자신에게 한마디 뻥긋하지도 못할 거라 생각한 위나도 소리오닌의 뻔뻔한 대꾸에 할 말을 잃었다.

소리오닌이 왕자가 자신에게 빠져 있다는 걸 믿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하는 생각에 속이 더 부글부글 끓었다. 

“지금 네가 왕자님 믿고 나한테 이러는 건가 본데, 넌 내 말 한마디면 이 세상에서 없어질 수도 있는 거 몰라? 사람을 잘 보고 대들어야지?”

위나는 검지로 소리오닌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비웃었다. 

“하…….”

소리오닌은 이어지는 여자의 유치한 대꾸에 어이없는 웃음만 흘렸다. 이 삼류 드라마에 나오는 못된 여자 단골 멘트는 뭐니?

거기다…… 어째 돌아가는 게 에리한이랑 엮인 거 같은데? 

위나는 소리오닌이 내뱉는 한숨 소리를 듣고 드디어 상황파악이 되었나 싶어 완전히 쐐기를 박기 위해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

“이제 네 주제를 알았으면 좀 꺼질래? 네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무도회 질 떨어지니까……. 이왕이면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도 좋고.”

“싫은데? 내가 왜? 웃기고 있네, 정말.”

딱 봐도 못된 말만 골라 하는 게 어디 엄청난 부잣집 아가씨 같은데. 어디서 사람 면전에 대놓고 사라지라니 꺼지라니 하는 거야?

소리오닌이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소리오닌 앞에 바짝 붙어 있던 위나의 귀에는 소리오닌의 중얼거림이 똑똑히 들렸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난 뒤 소리오닌 역시 위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봤다.

짜악! 

결국 머리끝까지 화가 난 위나가 그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헉……. 그 순간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무도회장에는 사람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누가 봐도 위나의 행동이 너무했다 싶었지만 바론에서 제일 가는 세력가, 자하만 백작이 애지중지하는 딸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생처음 뺨을 맞은 소리오닌도 처음에는 당황해 그녀를 쳐다만 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마음에 속에서부터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니, 나도 나름 곱게 자랐거든? 엄마한테도 안 맞아 본 뺨을! 아오!

어떡하지, 머리채를 잡을까? 같이 한 대 때려 줄까? 고민하던 소리오닌의 눈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진 것을 봤는지 급하게 달려오는 에리한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저거다!

“에리한 님!”

위나를 째려보던 소리오닌이 갑자기 얼굴을 바꿔 에리한의 이름을 부르고 달려갔다.

혹시나 자신이 뺨을 때리는 걸 들켰을까 봐 당황한 위나가 소리오닌을 뒤따라갔다. 

“소리오닌 님!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모두들 저의 능력을 궁금해 하셔서…….”

“아아, 다들 소리오닌 님의 소문을 들었나 봅니다.”

피식, 웃으면서 소리오닌에게 대답한 에리한이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는 걸 본 위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위나를 힐끗 쳐다본 소리오닌은 갑자기 에리한의 어깨를 잡고 주물렀다.

으응? 아무렇지도 않게 에리한을 주무르는 소리오닌을 본 홀 안의 사람들은 다들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돌렸다.

평소 소리오닌이 자신의 어깨를 많이 봐주는지라 이 정도 스킨십은 서로 아무렇지도 않은 에리한과 소리오닌만 편안한 표정이었다.

위나 자하만도 에리한의 앞이라 큰소리는 못 낸 채 소리오닌만 째려보고 있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이런 세계에 저런 아가씨라면 짝사랑 상대에게 대놓고 이런 스킨십은 못하겠지. 어떠냐, 부럽냐?

“에리한 님, 다음에 제가 더 만져 드려야겠어요.”

“아. 감사합니다. 역시 소리오닌 님의 손길은 천국을 맛보는 것 같죠.”

그들의 대화는 지극히 건전한 어깨 근육에 대한 내용이었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주어가 빠진 채였다.

큼, 흠흠! 소리오닌은 둘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내는 헛기침 소리에 속으로 큭큭 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들 틈에서 위나가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흠…… 어디 더 해 볼까? 소리오닌은 위나의 눈을 피하지 않고 손을 위로 향했다. 

다쳤던 어깨를 봐주다가 갑자기 자신의 목을 살살 쓰다듬는 소리오닌의 손길에 순간 에리한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에리한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리오닌은 위나를 이겼다는 성취감에 휩싸여, 에리한의 몸에서 손을 떼어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저…… 소리오닌 님? 이제 그만 손 좀 떼 주시죠.”

“앗! 아팠어요?”

“아뇨, 아픈 건 아니고…….”

아프기는, 오히려 너무 간지러워서 못 견딜 거 같아 그렇지. 에리한은 자신이 대놓고 말하면 소리오닌이 사람들 앞에서 민망해질까 봐 일부러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 에리한의 배려가 사람들의 오해를 더 부추기는지도 모르고.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누가 봐도 친밀하고 끈적끈적해 보이는 두 사람을 노려보던 위나 자하만은 결국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소리오닌 님이 이겼네. 어머, 어떡해? 근데 좀 꼬시다, 그치? 위나가 벗어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에리한을 가운데 둔 여자들의 승부에 대해 평을 내리느라 바빴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은 소리오닌은 얼른 상황을 수습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은 이 무도회가 끝나면 다시 집에 틀어박혀야 할 신세. 이런 말들은 알아서 수그러질 거라 생각했다.

에리한 역시 어머니의 집안사람들을 어느 정도 견제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솔직히 소리오닌을 향한 자신의 마음에 좀 진지해질까 싶기도 하고…….

눈이 부신 황금빛 드레스를 입고 자신이 준 리본을 맨 그녀를 보는 에리한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

“아니, 저게 무슨…… 천한 것들이나 하는 짓을!”

단상 위에서 소리오닌이 에리한을 쓰다듬고 있는 걸 본 왕비는 주먹을 꽉 쥐고 읊조렸다. 그래도 초크센의 공녀였다고 들었는데, 저런 천박한 몸짓이라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왕비는 자신을 만류하는 왕의 말을 무시하고 시종장을 시켜 소리오닌을 불러들였다.

소리오닌은 위나가 자신의 눈앞에서 없어진 다음에야 신나게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맛있는 음식과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옆에서 자상하게 챙겨주는 에리한까지. 이런 무도회라면 매일 와서 즐기고 싶을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소리오닌 님, 에리한 님.”

무도회를 위해 준비된 최고급 음식들을 음미하며 먹고 있는 소리오닌의 앞에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걸어와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또 누구지? 또다시 나타난 의문의 인물에 소리오닌은 눈이 동그래져서 에리한을 쳐다봤다.

에리한은 이 상황만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는 왕비궁의 시종장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무도회 좀 즐기려고 하면 왜 자꾸 이런 묘한 분위기가 되는 거야?! 분명히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말도 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한과 나이 많은 남자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둘의 사이에서 과일 접시를 들고 서 있는 소리오닌만이 눈을 굴리며 둘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흠, 소리오닌 님. 저는 에리한 왕자님의 어머니이시자, 바론의 왕비이신 마리딘 보힌 님의 시종장 카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소리오닌 알몬느라고 합니다.”

인자한 미소와 함께 정중한 인사를 건네는 카일에게 소리오닌도 자신의 치마를 살짝 들어 인사를 했다.

그녀가 카일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한다는 사실이 맘에 안 들었던 에리한은 그 옆에서 불퉁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카일은 왕자를 힐끗 쳐다보았다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여자 때문에 때나 지었을 그런 표정도 짓는다, 이건가? 딱히 예쁘다거나 성적인 매력은 전혀 없어 보이는데. 그 신비한 능력에 매료된 걸지도…….

여전히 과일 접시를 포기 못하고 꼭 붙들고 있는 소리오닌을 본 카일이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소리오닌 님. 왕비님께서 소리오닌 님에 대해서 매우 궁금해 하신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왕비님과 잠시 담소를 나눠 주실 수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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