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00)

010.

“이게 뭡니까……?”

바임은 에리한이 건네 준 종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보면 몰라? 쇼핑 목록.”

“아니, 그게 아니라. 왕자님 정말 이런 게 필요하신 겁니까?”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은 바임이 에리한에게 다시 한번 확인 차 물었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 없이 빤히 바라보는 주군의 얼굴을 본 바임은 움찔했다.

아, 왕자님께서는 두 번 물어보는 거 싫어하는데……. 너무 놀라서 깜빡했네. 

“죄송합니다.”

“어서 갔다 와.”

“네. 다녀오겠습니다.”

또 다른 불똥이 튈까 봐 재빨리 나가는 바임의 뒷모습을 본 에리한이 집무실 의자에 몸을 기댔다.

우선 린셀에게 말을 해놨으니, 이미 내 말이 어머니께 전달되었겠지? 왕비가 어떤 치사한 수를 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녀라면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차하면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숨겨 버리면 되지, 뭐.

그나저나 오랜만에 나가는 시장이라 자신도 잘 모르는 것투성이인데. 이따 바임이 오면 지도가 있는지 물어봐야겠군. 

그의 생각을 읽은 걸까, 바임은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물건을 가득 들고 돌아왔다. 그가 내민 것들을 본 에리한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렸다.

“왕자님. 혹시 이걸 다 왕자님이 사용하시려는……?”

“응.”

나름 철저한 건지 이제는 그냥 즐기는 건지 알 수 없는 왕자의 태도에 바임이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왕자님. 가발이랑 안경이라뇨! 대체 어느 왕족이 이런 우스꽝스러운 걸 쓴단 말입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이 얼굴 그대로 가면 다들 왕자라는 걸 알아볼 게 뻔한데.”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러게 왜 처음부터 왕자라고 밝히지 않았냐고! 입은 있지만 차마 주군에게 대놓고 말할  수 없는 바임은 답답한 가슴만 툭툭 칠 뿐이었다. 

바임의 속이 문드러지든 말든 우선 그녀를 만나러 갈 생각에 들뜬 에리한은 물건을 챙겨 방을 나섰다. 

“아! 오늘은 뭐 새로 들어온 선물은 없나?”

“아, 있습니다. 근데 린셀 공주님께서 가지고 싶다고 했던 건데…….”

“괜찮아. 걔는 가지고 싶은 게 하루에도 서른여덟 개는 넘게 생기니까.”

자신의 동생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대강 대답한 에리한은 서둘러 선물이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바임은 에리한을 얼른 뒤쫓아 가서 금빛 박스를 찾아 내밀었다.

“이건가?”

“네, 남쪽 지방에서 올라온 건데. 특이하게 바닷속에 있는 산호를 짠 실로 만든 리본이라 합니다. 붉은 빛이 오묘하게 빛나서 요즘 사교계에서는 리본은커녕 작은 꽃 장식조차 구하지도 못할 정도로 인기라고 합니다.”

구구절절 이어지는 바임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에리한이 박스를 들고 성 밖으로 향했다.

오늘은 소리오닌과 무도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사러 가기로 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집 밖을 나서는 거니까 최대한 즐거운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소리오닌의 집을 향해 가는 에리한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더 경쾌해 보였다.

***

“소리오닌 님!”

이제는 자신의 집인 양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 온 에리한이 소리오닌의 이름을 불렀다.

“에리한 님, 어서 오세요! 어, 근데, 머리가……?”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던 소리오닌은 에리한의 목소리에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가발이에요. 어울립니까?”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본 에리한은 자신도 어색한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태양처럼 빛나던 금발 머리는 어느새 칠흑 같은 밤처럼 까만색으로 변해 있었다.

가발이라니…… 여기에도 가발이 있구나. 역시 얼굴이 잘생기니까 머리색이 문제가 안 되네.

“잘 어울려요. 근데 웬 가발이에요?”

“사실 오늘 일하다 말고 몰래 나온 거라, 돌아다니다 들키면 큰일이거든요. 그래서 가발 좀 써 봤습니다. 이렇게 안경까지 쓰면…… 저인지 잘 모르겠죠?”

“네. 진짜 다른 사람 같아요! 오늘은 어디 나가려고요?”

근데 왜 우리 집에 와서 저런 얘기를 하는 거지? 가발 자랑하러 왔나? 뜬금없는 그의 방문에 고개를 갸웃한 소리오닌이 에리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오늘 무도회 준비하러 저와 같이 가 주셨으면 합니다.”

“……네?”

전에 분명히 알아서 준비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맘대로 나갈 수가 없는 몸이라니까요! 소리오닌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에리한 님,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맘대로 나갈 수가 없답니다. 저 앞에 병사들 보이죠? 제가 여기서 나가는 순간 저는 병사들한테 붙잡혀서 감옥으로 간다고 들었어요.”

“아, 병사들…….”

“네! 병사들이요!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에리한 님이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는 뭔 일 있을까봐 얼마나 쫄았다고요!”

소근소근, 뭐가 그리 중요한 이야기인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하는 소리오닌이었다.

쫄았다니. 그녀의 참으로 친근한 단어 선택에 결국 에리한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무도회는 특별한 이벤트니까요. 상관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와아, 에리한 님! 상사한테 예쁨 받는가 봐요?”

에리한의 말에 그제야 집을 나선다는 게 실감이 난 소리오닌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떨어지자마자 몇날 며칠 마차에 갇혀서 구르고, 바론에 도착해서는 고시원보다 작은 집에 갇혀 있고. 아……. 진짜 생각해 보니 서러운 시간들이었구나…….

소리오닌은 억울하고 초라했던 지난날을 생각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외출일 수도 있지만, 드디어 이 집을 나갈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나갈 수 있다는 말에 소리오닌의 볼이 상기되기 시작하자, 에리한은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

“에스코트 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죠.”

아, 아아! 이게 그거구나. 만화책에서만 봤던 공주님 손잡기!

소리오닌은 자신의 손보다 하얗고 예쁜 에리한의 손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리고 떨리는 걸음을 옮겨 울타리 밖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에리한이 한 말이 정말인지 그동안 자신의 집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눈앞에서 그녀가 시내를 향해 걸어가는 데도 아무런 저지를 하지 않았다.

혹시나 잡힐까 봐 긴장 됐던 마음이 놓이자 소리오닌은 짧게 한숨을 쉬고 본격적으로 거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광장으로 가는 거리 곳곳에 집들과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유럽과 비슷한 느낌의 건물들이었다. 이 풍경을 보는 소리오닌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와아, 진짜 예쁘네요!”

“음…… 초크센과 많이 다릅니까? 건물은 다 같은 양식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이는 바론이나 초크센이 속한 대륙 문화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집들이었다. 하지만 소리오닌은 꼭 이런 건물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에리한이 의아함을 가득 담아 물었다. 그의 물음에 순간 합, 입을 다문 소리오닌이 머뭇거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하…… 하하! 제가 초크센에서도 집에만 있다 보니까, 통 사람 사는 데를 안 가 봤어요.”

“아아, 그렇군요. 오늘 즐겁게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들어도 참 어설픈 변명을 듣고서도 에리한은 의심조차 안 한다.

엄청 순진하네. 이래가지고 왕궁에서 어떻게 일하는 거래? 하긴 그러니까 혼날까 봐 가발도 쓰고 왔겠지.

정말 순진한 게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소리오닌은 어리버리한 신입을 보는 부장님 같은 눈길로 에리한을 한 번 쭉 훑어봤다.

“어머, 소리오닌 님.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애기는 괜찮은가요?”

“그럼요! 소리오닌 님 덕분에 잘 뛰어놀고 있어요!”

광장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소리오닌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녀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지만, 동네 주민들 사이에서는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다섯 발자국을 떼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감사 인사를 건네 왔다. 그때마다 웃으며 마주 인사하는 소리오닌을 보는 에리한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흠, 공녀님은 인기가 많네요. 역시 그 치유 능력 때문입니까?”

“능력이라기보다는…… 그냥 몸에 대해서 공부 좀 했던 거예요.”

“공부요? 초크센에서는 공작가에서 그런 것도 배웁니까?”

음…… 모른다. 자신은 초크센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뭘 배우는지 알게 뭔가…….

그래도 이 상황을 넘기려면 그냥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녀의 고갯짓을 본 에리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랬군요. 그래도 소리오닌 님은 공부가 아닌 다른 특별한 능력으로 고쳐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거 아닌데…….”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는 소리오닌의 말을 마지막으로 번화가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에리한은 그녀의 정체를 추리하느라, 소리오닌은 말을 더 꺼냈다가 밑천이 드러날까 봐 조심하느라 침묵을 택했다.

어느 순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빽빽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소리오닌과 에리한은 바론의 수도에서 제일 유명한 시장에 도착했다.

“어머, 저거 마법이에요? 우와아!”

길가에 모자 하나를 놓고 그 앞에서 꽃송이를 띄우며 쇼를 하는 사람들이 소리오닌의 눈에 띄었다. 하늘 위를 수놓는 색색의 꽃들이 너무 예뻐서 한참 구경하고 있었다.

“네, 아주 간단한 부유 마법입니다. 혹시 이런 것도 처음 보시는 겁니까?”

“네…… 니요! 그냥 꽃이 예뻐서! 매일 채소만 보다 보니까…….”

또 실수했다! 난생 처음 보는 마법에, 자신이 소리오닌이 됐다는 걸 깜빡하고 너무 티 나게 좋아했네. 에리한의 말에 뜨끔한 소리오닌이 재빨리 변명했다.

이번에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리한이, 여전히 마법에 눈을 못 떼고 있는 소리오닌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응? 왜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네?”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흠, 헛기침을 하고 주머니에서 금색 박스를 꺼내는 에리한을 보는 소리오닌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을 본 에리한은 박스에서 빨간 리본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게 주문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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