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네. 크게 부담 가지실 건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초크센에서 많이 다녀 보셨겠군요. 저희 바론도 비슷할 테니 편한 마음으로 와주세요.”
“……정말 저도 갈 수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아직 시간은 좀 남았지만…… 와 주실 거죠? 옷이나 다른 것들은 제가 다 준비하겠습니다.”
소리오닌이 머뭇거리며 답을 망설이자, 상체를 벌떡 들어 올려 얼굴을 그녀에게 들이민 에리한이 깊은 눈망울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부탁했다.
으, 잘 생겼어. 이러면 뭐든 들어주고 싶잖아! 근데 무도회 가서 춤은 안 춰도 되겠지……? 그래 여기서 죽기 전에 왕궁 한 번 구경이나 해보자!
소리오닌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고갯짓을 본 에리한이 빨간 입술을 끌어올려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봐왔던 미소였지만 소리오닌은 늘 그의 미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새 소리오닌과 에리한은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갑자기 야옹이가, “뮤!” 큰 울음소리를 내며 식탁으로 뛰어올라 그 사이를 갈라놓기 전까지…….
갑작스런 야옹이의 등장에 깜짝 놀란 소리오닌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야옹이를 안아 들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던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속으로 짧게 혀를 찬 에리한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네. 다음에 봬요.”
소리오닌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온 에리한은 어느새 그를 따라나온 야옹이를 내려다봤다. 야옹이도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훽 소리가 날만큼 거칠게 등을 돌려 서로 갈 길을 향했다.
***
달그락 달그락.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커다란 식당에는 식기 움직이는 소리만 가득히 울리고 있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자와 공주. 끝이 없는 침묵. 그러나 평상시와 같은 분위기였기에 그 누구도 불편해 하지 않았다.
“왕자.”
오히려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듯한 물음이 더 불편했다. 지금처럼.
다 큰 자식이 둘이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장미처럼 화려한 얼굴의 여자였다.
새빨간 입술을 움직여 자신을 부르는 왕비를 힐끗 쳐다본 에리한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어머니.”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듭디다?”
“지금도 제 얼굴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별 것도 아닌 걸로 묻는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는 자신의 아들을 보는 왕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 애비를 똑 닮아서 능구렁이 같기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나요.”
“그럼요? 설마 아직도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시는 겁니까?”
이어지는 왕비와의 대화에 에리한이 대놓고 그녀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의 차가운 시선에 움찔한 왕비가 그런 게 아니라 들리는 소문에 대해 말하려 할 때였다.
“에리한. 어머니께 무슨 말버릇이냐.”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던 왕이 에리한에게 나지막히 경고를 보냈다. 물론 그에게는 경고가 아니라 이 거지같은 상황을 벗어나게 해 주는 신호탄이었지만.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 아니!”
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왕비에게 사과를 건넨 에리한은 서둘러 식당을 벗어났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온 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시간이었지만 제일 불편한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출생의 비밀이라거나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었지만, 그들은 왕실의 사람들답게 부부 사이에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서로를 견제하느라 바쁜 자신의 부모를 보기만 해도 속이 꼬여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식당을 나와 복도를 걷는 도중, 에리한은 소리오닌이 머무는 마을이 있는 방향의 창 옆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자신은 아직도 수도가 아닌 다른 영지를 전전하고 있었겠지.
아직도 진짜 정체가 뭔지 궁금한 소리오닌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라버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리한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따라왔는지 밝게 빛나는 금발 머리를 늘어뜨린 자신의 동생, 린셀이 그를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이 부르는 걸 들었으면서도 대답 한 번 안하는 오라버니를 본 린셀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진짜 내가 누나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오라버니!”
“……왜?”
두 번이나 더 부르고 나서야 겨우 그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그것도 한 글자.
순간 린셀의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하지만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린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그 소문 진짜인가요?”
“소문?”
“오라버니께 여자가 생겼다는 소문이 온 성에 파다하답니다!”
볼을 발갛게 붉힌 린셀이 커다란 눈까지 반짝이면서 에리한을 올려다봤다.
흐음, 이거였군. 아까 어머니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게. 린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니 어쩐지 초조해 보이던 왕비의 모습이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랬단 말이지. 뭐라 말할까 잠시 고민한 에리한은 아까 린셀이 보여줬던 사람 좋은 미소를 똑같이 그녀에게 돌려주며 답했다.
“그건 단순한 소문이 아니야. 난 그녀에게 푹 빠져 있지. 곧 내 성인식에 열릴 무도회에서 만나 볼 수 있을 거야.”
당연히 아니라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에리한의 입에서 상상도 못한 대답이 나오자 린셀이 꽥, 소리를 질렀다.
지금 자신의 오라버니 입에서 나온 말이 다 사실이란 말이야? 그 여자를 무도회까지 데려온다고?
자신의 대답에 눈이 빠질 정도로 놀란 린셀을 보았음에도, 에리한은 그녀에게 간다는 말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하지만 린셀은 에리한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사도 없이 사라진 오라버니였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기분 나빠할 때가 아니었다. 이 엄청난 소식을 얼른 어머니께 알려야했다.
왕비의 방으로 향하는 린셀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머니, 어머니!”
노크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린셀을 본 왕비, 마리딘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을 본 린셀은 순간 자신이 기본 예의도 차리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괜찮다는 걸로 합리화시켰다.
“이런. 공주님,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어머, 자하만 백작님! 여기에 계셨군요. 이런 예의 없는 모습을 보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들어올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자하만 백작이 왕비의 옆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허허 웃는 백작의 모습에 순간 얼굴이 빨개진 린셀이 급하게 사과를 건넸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제가 있어도 되는 이야기입니까?”
“물론이에요! 자하만 공녀에게도 알려야 할 얘기랍니다!”
린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둘째 딸 이름에 자하만 백작은 아까보다 더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왕비 또한 식당에서 듣지 못한 답이 나올 거라는 생각에 조용히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에리한 오라버니가 정말로 여자를 무도회에 데려온대요!”
자신에게 시선이 모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린셀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왕비와 자하만 백작 모두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거기다 그 여자한테 지금 푹 빠져 있다고 말했다니까요? 대체 누굴까요? 어쨌든 확실한 건 자하만 공녀가 아니라는 거죠!”
가느다란 팔을 둘러 팔짱을 낀 채 볼을 부풀린 린셀이 그녀의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어갔다.
왕비가 소리오닌 공녀에 대해 이렇게 빨리 알게 될 거라 예상치 못한 백작은 린셀의 발언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위나의 자리가 확실해진 후에 알았어야 했는데!
속으로 낭패 섞인 한숨을 흘린 자하만 백작이 왕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리딘 왕비도 에리한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는 꽤 놀라고 있는 중이였다.
우선 서둘러 린셀을 내보낸 두 사람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왕비님.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백작님. 어차피 에리한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 아이의 결혼은 저와 제 남편의 힘 싸움이지요. 걱정 마세요. 바론의 다음 왕비는 위나일 것입니다.”
마리딘은 자하만을 보며 싱긋 웃고는 간결한 결론을 내렸다. 자하만은 마리딘이 어렸을 때부터 그녀가 왕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힘써 준 사촌이었다.
이번 결혼만 자신의 생각대로 제대로 성사된다면 그에게 진 빚도 갚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가문에 대대로 크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의 결혼은 무조건 자하만 가문과 이어져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럼 저는 왕비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쇼.”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오라버니.”
자하만이 왕비에게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인사에 살짝 웃음을 지은 마리딘이 그를 배웅했다.
탁.
문이 닫히고 온전히 혼자 남은 마리딘은 새빨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의 배로 열 달을 품어 낳은 아들이었지만 자라면서 점점 남편만 쏙 빼닮아 가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외양뿐만 아니라 언젠가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잡아먹어 버릴 것 같은 그 눈빛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