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00)

006.

“아, 그런 일로 온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감사 인사를 하러……. 그날 당신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에리한이 여전히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소리오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잡혀가는 건 아니구나. 그러고 보니 그때 자신이 정신없이 끌려가느라 그에게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던 것이 생각났다.

“제가 바론으로 끌려가는 도중이라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요.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나 봐요.”

“아, 아닙니다. 무사하면 됐죠. 혹시 제가 없을 때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나 걱정했었습니다.”

미안함이 가득 담긴 그녀의 얼굴을 본 에리한은 싱긋 웃으며 괜찮다는 대답을 했다. 상냥한 그의 대답에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말한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어깨를 유심히 쳐다봤다.

“근데, 어깨는 괜찮으세요? 시간이 좀 지나서 나아지기는 했을 텐데…… 그래도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죠?”

에리한의 어깨는 이미 예전에 다 나아서 지금은 사냥도 나갈 만큼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괜찮다고 하면 이 대화가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눈치를 보던 에리한이 갑자기 눈썹을 찌푸리면서 왼쪽 어깨를 잡은 뒤 얘기했다.

“사실은…… 그때 다친 어깨가 아직 낫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말요? 어쩐다? 제가 한 번 더 봐 드릴까요?”

걸렸다! 그녀의 앞에서 아픈 척을 하자마자,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은 속으로 씨익, 웃음 지었다.

물론 겉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아픈 사람인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찡그린 잘생긴 얼굴을 본 소리오닌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분명히 어깨는 잘 맞춰준 것 같은데, 아직까지 아프단 말이야? 그래서 나를 그렇게 찾아 다녔구나.

그가 그토록 자신을 열심히 찾았던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거 같았다. 

“저기…… 근데 어깨를 보려면 의자에 앉아야 할 것 같은데. 제가 지금 볼모로 잡혀 온 거라서요. 혹시 저희 집에 들어 오셔도 괜찮으신가요?”

그동안 마을 사람들도 집 안에는 들어온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자신의 집에 맘대로 들어왔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에 머뭇거리며 말하는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이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별 일 없을 거예요.”

“그런가요? 제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몰라요. 이해해 주세요.”

“괜찮습니다. 그럼 집으로 들어갈까요?”

내가 왕자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뒷말은 속으로 삼킨 에리한은 아직도 미심쩍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리오닌을 지나쳐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이 동네 사람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소리오닌 역시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 그를 따라 문을 닫으며 들어갔다. 

소리오닌의 집 문이 닫힌 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두 사람을 본 바임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아니, 왕자님은 대체 뭐하시는 거지? 곧 쓰러질 것 같은 집에 들어가시면서 웬 싱글벙글? 세상에…… 얼굴에 홍조야, 저거?

현재 그 많은 왕가의 핏줄 중에서도 제일 짙은 피를 타고 났다는 이유로 평생을 떠받들어지며 자라온 왕자였다.

이제 곧 성인식을 할 나이인 그가 바론의 지배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덕에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해본 적 없고, 자신의 맘에 안 들면 깽판 치는 게 특기인 사람이. 

대체 뭐 때문에 그저 볼모로 끌려온 게 분명한 그녀에게 집착하는 걸까?

어깨 한 번 고쳐준 걸로 저런 태도가 나온다면, 왕자의 아픈 곳을 수십 번 고쳐준 자신은 이미 왕자가 업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왕자의 요상한 태도는 범인인 내가 이해할 수 없으니 넘어가고, 우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그 집으로 가 봐야겠다.

나무 뒤에 숨겼던 몸을 일으켜 소리오닌의 집으로 향한 바임은 그녀의 집 창문 아래에 자리를 잡고 그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

“아, 우선 여기 앉으세요.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그가 들어온 것뿐인데 집안이 꽉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하긴 그의 키만 해도 190 가까이 되는 거 같은데. 이 거실은 소리오닌의 걸음으로 다섯 발자국밖에 안 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조그만 집이지만 다행히 식탁 의자가 두 개라서 한 명이 서 있어야 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소리오닌의 집을 한번 둘러본 에리한은 부드러운 어투로 그녀의 권유를 거절했다.

평소 최상의 상태인 찻잎과 장인이 직접 만든 잔으로만 티타임을 즐겼던 그가 이런 곳에서 차를 마실 리가 없었다. 

“아니에요, 그래도 손님으로 오셨는데……. 아, 여기 있다. 이걸 말려서 우려먹으니까 나름 괜찮더라고요.”

그의 완곡한 거절을 빈말로 알아들은 소리오닌이 얼마 전 텃밭에서 따와서 말려놓았던 꽃 몇 송이를 끓는 물에 넣어서 내왔다.

국화 비슷하게 생긴 꽃이었는데, 역시나 맛도 국화와 비슷해서 소리오닌은 종종 먹고 있었다.

자신이 됐다고 하는데도 굳이 차를 대접하는 그녀를 본 에리한이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이거 먹고 배탈 나는 거 아니야? 아니, 저 투박한 컵은 대체……. 소리오닌이 내온 차는 그의 미적 감각으로는 당장 쓰레기통으로 처박아 둘만큼 최악이었지만, 그녀의 앞에서는 최대한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받아 들어야 했다. 

“음……. 맛이 참 독특하네요. 날 것 그대로 씹어 먹는 느낌……?”

“하핫! 그런가요? 꽃 향이 좋지 않아요?”

그가 한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은 소리오닌은 평생 공작가에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그러고 나서는 사발처럼 생긴 컵에 들은 뜨거운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처음 만났을 당시 자신의 허벅지를 우악스럽게 누를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묘하게 대장부 같은 여자다.

내숭 없고 말투도 전혀 고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텐데 전혀 모르는 듯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또 봐도 참 재미있는 여자야. 흐음……. 그럼 언제까지 모르는 척을 하는지 볼까?

“아, 참. 내 정신 좀 봐! 어깨 아프다고 하셨죠? 어떻게 아파요?”

“음, 그러니까……,”

어깨가 아파서 온 사람을 데리고 한가하게 티타임을 즐겼다는 걸 깨달은 소리오닌이 얼른 일어나서 에리한의 옆에 섰다.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그녀에게 에리한은 사실 전혀 아프지 않은 어깨의 통증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난감해졌다.

그가 자신의 어깨만 만지작거리며 말을 못하고 있자, 소리오닌은 또 다짜고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숙녀의 예법이라고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듯한 그녀의 행동에 에리한은 그녀가 정말 공녀가 맞는 건지 다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올릴 때 아파요? 아니면 옆으로?”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리오닌은 어깨 진단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에리한의 어깨를 이리 저리 돌려가며 아픈 곳이 있는지 확인하기를 몇 번.

소리오닌이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에리한의 뺨에 살짝 닿았다. 그녀의 머리카락 때문인가, 에리한은 갑자기 가슴께가 간질간질한 것 같았다. 

“흠. 아……. 그, 그렇게 하면 아픕니다.”

에라, 모르겠다. 그녀를 찾아 온 이유가 통증 때문이었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아무데서나 아프다고 말해야 했다.

에리한의 입에서 툭 튀어 나온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소리오닌이 자리를 옮겨 그의 정면에 선 채로 얘기했다.

“벗어 봐요.”

“네……?”

벗으라니? 순간 그녀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거라 생각한 에리한이 멍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벗으라고요. 그 옷. 제대로 보려면 맨살 나와야 해요.”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상체를 검지로 가리키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외간 남자의 맨살을 보려 하다니. 뭐야……. 지금 나에게 대놓고 관심 있다고 하는 건가? 

웬만큼 저돌적인 여자들이 아닌 이상 대놓고 옷을 벗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 바론에서.

거기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한 예법 투성이인 왕가에서 자란 에리한에게 그녀의 말은 상당히 대담한 유혹으로 들려왔다. 

뭐,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지. 자신이 언제 옷을 벗나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을 느낀 에리한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에리한의 반응 덕분에 소리오닌 역시 민망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하루에 수십 명의 맨살을 봐 왔다. 근육을 자세히 보려면 당연히 옷을 벗어야 하는 건데.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괜히 나도 부끄러워지게……. 

귀 끝이 빨개져서 옷을 벗는 에리한을 본 소리오닌도 작게 헛기침을 한 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 정도면 됐습니까?”

서로 어디다 눈을 둬야할지 모를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옷을 다 벗은 에리한이 소리오닌을 부르며 말했다.

에리한의 말에 바닥을 보던 소리오닌도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상의를 탈의한 그의 상체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운동을 꽤나 열심히 하는지 온몸이 자잘한 근육들로 탄탄해 보였다.

와아, 몸 진짜 예쁘네!

속으로 짧게 감탄을 내뱉은 소리오닌이 본격적으로 그의 어깨를 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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