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00)

005.

시간이 정말 더럽게 안 갔다. 그도 그럴게 컴퓨터가 있나, 핸드폰이 있나, 하다못해 얇은 책 한 권조차 없다.

이 공간에 있는 거라고는 옷장에 들어 있는 평범한 원피스 몇 벌과 최소한의 주방도구가 끝이었다.

처음에는 뭘 먹어야 하는지도 몰라서 집 앞 텃밭에 나 있는 풀들을 뜯어서 조금씩 먹어봐야 했다.

다행히 텃밭은 먹을 수 있는 것들만 심어져 있었는지 배가 아프다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먹어도 되는 걸 알게 된 뒤에도 한꺼번에 다 먹으면 채소가 없어질까 봐 아껴 먹다보니 요즘은 강제로 다이어트 중이었다. 

“공녀님! 저 손가락 좀 봐주세요!”

“아……”

오늘도 텃밭에서 채소를 뽑고 있는데, 어딘가가 아픈 마을 사람들이 소리오닌의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곳에는 초크센에서 끌려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론의 주민들도 곳곳에 같이 어울려 있었는데, 어쩌다 소문이 났는지 그녀에게 용한 재주가 있다는 걸 안 주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달려왔다.

지루한 일상에서 유일하게 다른 사람과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라 사람들이 오는 게 좋긴 했지만, 자신은 의사도 아닌데 이러다 사기죄로 끌려갈까 봐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음…… 이렇게, 이런 식으로 고정해 두면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며칠간은 움직이면 안돼요!”

“아아! 감사합니다! 저기……. 이건 제가 혹시 몰라서 챙겨 온 거예요, 공녀님 드세요.”

자유로운 다른 쪽 손으로 주머니를 뒤진 마을 주민이 감자와 비슷하게 생긴 채소를 내밀었다.

주민의 답례에 반색을 한 소리오닌이 예의상 거절하는 것도 없이 그가 내민 채소를 덥석 받아들었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가는 마을 사람에게 살랑 손을 흔든 소리오닌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앗싸! 오늘은 감자다!”

그녀가 사기꾼으로 잡혀갈까 봐 겁내면서도 마을 사람들을 돌보는 걸 멈추지 않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이 가져다주는 음식들. 대부분 채소나 빵 같은 것들이었지만, 운이 좋으면 가끔 고기도 가져다주고는 했다.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서 감자를 끓는 물에 넣어 삶은 뒤 으깨고, 오이와 비슷한 생김새의 채소를 가져와 잘게 썰어 넣었다. 초간단 감자 샐러드 완성!

물 한 컵과 감자 샐러드, 마당에서 따 온 풀떼기. 참으로 검소한 식사였다. 그래도 굶기만 하던 초반에 비하면 괜찮지, 뭐……. 긍정적인 마음으로!

“잘 먹겠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허공에 대고 인사를 한 소리오닌이 본격적으로 샐러드를 퍼먹으려고 할 때였다.

“뮤뭄!”

소리오닌의 집에 있는 유일한 창으로 은색의 짐승이 훌쩍 튀어 올라왔다.

그녀는 창문에 앉아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짐승을 보고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야옹아!”

소리오닌이 창에 앉아 있는 짐승을 향해 이리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짐승이 용케 그녀의 부름을 알아들었는지 은색의 유연한 몸을 한 번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다음 소리오닌에게 다가왔다.

야옹이라 불리는 짐승은 며칠 전부터 가끔 그녀의 집으로 놀러오는 친구였다.

얼마나 영특한지 첫 만남 때부터 그녀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겉모습은 한국에서 봤던 고양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털색깔이나 눈동자 색이 판이하게 달랐다.

짐승이 지나가는 길은 은색의 털 때문에 눈부시게 빛났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붉은 루비처럼 반짝였다.

“야옹아, 오늘은 너 주려고 빵도 좀 남겨놨어.”

그래봤자 소리오닌에게는 고양이보다 좀 더 예쁘게 생긴 똑똑한 야옹이일 뿐이었지만.

부엌 찬장에 넣어뒀던 빵을 하나 가져 온 소리오닌이 끝을 조금 떼어서 야옹이의 앞에 놓았다.

야옹이는 자신한테 주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듯, 붉은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먹어도 된다는 뜻으로 야옹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소리오닌은 자신도 빵을 조금 떼어 먹었다.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본 야옹이는 그제야 빵에 입을 댔다.

“우리 야옹이는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왜 아무도 안 데려가는 걸까? 혹시 다른 야옹이들은 금빛으로 빛나? 은빛은 인기 없어?”

소리오닌이 자신의 옆에서 조용히 빵을 먹고 있는 야옹이를 쓰다듬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동네에 와서 야옹이 외의 동물을 본 적이 없으니…… 비교를 할 수가 없다.

자신의 눈에는 이렇게 예쁜 야옹이지만 의외로 인기가 없을지도…….

“야옹아.”

“뮤?”

“야옹, 해 봐. 야옹!”

“먀아무우.”

하하핫! 자신이 내뱉는 실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따라해 주는 게 너무 귀여웠다. 소리오닌은 야옹이를 안아들고 얼굴을 비볐다. 야옹이도 그녀가 들이대는 게 싫지는 않은지 그릉거리면서도 발톱을 세우지는 않았다. 

한국이었다면 당장 집에서 키울 텐데. 여기에서는 자신도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이라, 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가끔 밥이나 챙겨주는 걸로 만족해야지. 이제 자신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야옹이를 쓰다듬는 소리오닌의 손길에 애정이 가득했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과 야옹이가 주는 따스한 온기에 취한 소리오닌도 어느새 식탁에 엎드려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여긴가?”

에리한이 작은 마당이 딸린 집 앞에 서서 물었다.

아무리 속국이 되어버려서 끌려왔다지만, 공녀로 지냈던 사람이 이런 곳에 있으려면 자존심이 많이 상했겠군.

딱 보기에도 후줄근한 집의 외향에 에리한의 한 쪽 눈썹이 찌푸려졌다.

“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여기가 그 용한 재주가 있다는 공녀의 집이 맞습니다.”

“흠……. 다들 물러가라.”

급하게 왕성 밖을 향한 에리한을 따라 줄줄이 뒤쫓던 병사들이 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왕성 근처라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자신의 명령에도 주춤거리며 움직일 생각을 안 하고 있는 병사들을 노려본 에리한이 말했다.

“지금 내가 다른 나라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어찌 상관의 명령에 아직도 굼벵이처럼 꾸물대고 있는 거지?”

낮게 울리는 에리한의 목소리에 흠칫한 병사들은 경례를 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오닌의 집에서 멀어져 갔다.

“응? 너는 안 가?”

“네? 저도 가야 합니까?”

왜 너는 여기에 서 있냐는 듯한 에리한의 눈빛에 바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응, 너도 가.”

“왕자님 혼자서만 만나 보시려는 겁니까?”

“잘 알고 있군. 어서 가거라. 정 못 떨어지겠으면 저기 눈에 안 띄는 곳에서 기다려.”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어대는 에리한을 본 바임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그가 가리킨 곳에 가서 섰다.

만에 하나 그 공녀가 에리한 님이 바론의 왕자인 걸 알아보고 얼굴이라도 할퀴면 어쩌려고.

바임이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걸 느낀 에리한은 고개를 저었다. 저 걱정 보따리…….

흠, 우선 노크를 하는 건가? 평소 대부분 문을 마차로 통과하는 커다란 성이나 저택만 왔다 갔다 했던 터라, 평범한 집에 오는 건 처음인 에리한은 울타리를 넘은 뒤 문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똑똑.

조용한 집 주위를 울려 퍼지는 소리. 자신이 노크해 놓고도 살짝 놀란 에리한이 순간 뒷걸음질을 칠 뻔 했다. 

그러나 자신의 노크 소리를 못 들었는지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나오지 앉았다.

음? 그녀를 볼 생각에 긴장했던 에리한은 막상 그녀가 나오지 않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왜 안 나오지?

탕탕!

이번에는 좀 더 힘을 담아 문을 두드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침묵……. 으응? 뭐지? 의문이 담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 에리한이 한 번 더 힘을 줘서 문을 두드리려고 할 때였다.

“누구세요?”

드디어 집 안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난 소리오닌이 하품을 크게 한 다음에 문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야옹이는 일어나 나가 버렸는지 식탁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텅 빈 식탁을 한 번 쳐다본 소리오닌은 오늘 따라 자신을 찾는 마을 사람들이 많다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어……?”

당연히 아픈 곳을 감싸고 있는 마을 주민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숲에서 본 남자였다.

밝은 금발, 커다란 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만큼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그의 방문에 소리오닌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놀란 소리오닌에 반해 에리한은 문이 열리며 나온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뒤 더욱 활짝 미소 지었다.

하지만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나온 그녀의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수척해져 있었다. 감색 원피스를 입었고, 약간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는 차분하게 묶어 내렸다.

동그랬던 얼굴도 야위어 보였다. 허나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초록빛 눈동자는 여전히 반짝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에리한이 긴장한 게 분명한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놀라서 멍하니 그의 얼굴만 바라보던 소리오닌이 다시 한번 이어지는 에리한의 인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안녕하세요? 혹시 저 기억나세요? 제가 어깨 치료해 드렸었는데!”

“물론입니다. 그 덕분에 당신을 빨리 찾을 수 있었어요.”

“네? 아, 일부러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소리오닌은 자신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슬쩍 웃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그의 미모에 또다시 감탄했다.

진짜 잘생겼네, 이 청년. 근데 나를 왜 찾았지……? 헉…… 설마……?

“어, 혹시 제가 뭔가 잘못해서…… 잡혀 가는 건가요……?”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그동안 야매로 치료를 해 주고 받아 챙겼던 음식들이 소리오닌의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결국 사기꾼으로 소문났구나! 그게 아니면 그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을 거라 생각한 소리오닌은 이번에는 진짜로 감옥에 가게 될까 봐 덜덜 떨었다.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녀 덕분에 에리한은 이야기가 어째서 그렇게 튀었는지 난감해졌다.

여기까지 찾아온 건 누가 봐도 감사의 인사를 한다거나, 호감을 표현하고자 한다는 표명이 아닌가……?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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