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00)

004.

역시나 희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리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털어낸 세리가 다시 조잘거렸다.

“그……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설마 지하 감옥에 가둘까요? 소리오닌 님은 그래도 공녀니까 그렇게 가혹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야 알 수 없지만요……. 그래도 바론은 사브만 같이 잔인무도한 나라는 아니라고 들었어요. 소리오닌 님, 괜찮을 거예요!”

“으, 으응. 그래? 그럼 세리도 괜찮을 거야! 나랑 같이 있으면 돼.”

억지로 웃어 보이는 세리에게 같이 맞장구 쳐 준 희은은 아직 풀리지 않은 근육을 이완시키기 위해 스트레칭을 계속 했다. 

“근데 소리오닌 님, 뭐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운동이라뇨?”

“응? 이게 무슨 운동이야. 스트레칭이라고, 근육을 풀어주는 거지!”

희은은 오른쪽 팔을 마저 돌리며 세리의 물음에 답했다. 그녀의 답에 또 묘한 표정을 짓는 세리를 보며 희은은 순간 자신이 잘못 말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찌뿌둥했는걸!

“소리오닌 님, 그런 식으로 몸을 움직이는 건 천박해 보인다고 하셨잖아요…….”

“으응? 아, 내가 그랬지? 근데, 너무 쪼그려 있었더니! 역시 몸을 움직이는 게 좋은 거 같아. 내가 했던 말들은 잊어버려!”

“흐음, 그렇구나. 그럼 저도 소리오닌 님이랑 같이 할까요?”

“그럴래?”

“네!”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하는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는 세리와 함께 한바탕 스트레칭을 끝냈다.

풍선 같은 치마를 입고 움직이는 두 사람을 주위에서 둘을 빤히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뭐, 이 동네는 이런 것도 없나? 아침을 먹기 전 상쾌하게 스트레칭을 마치고 공터에 앉아 있을 때였다.

“저기…… 공녀님.”

“네? 저요?”

어떤 늙은 남자가 다리를 절뚝이며 희은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부르는 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자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갑자기 울먹이면서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제……제가 원래 무릎이 안 좋았는데, 마차에 쪼그려서 너무 오래 오다보니 종아리까지 너무 아픕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 그걸 왜 저한테……?”

“어제 관리인의 발목을 고쳐주는 걸 봤습니다! 저도 고쳐주세요!”

바닥에 주저앉으며 소리치는 남자의 행동에 멈칫한 희은이 볼을 긁으며 멋쩍은 얼굴로 일어났다. 음……. 어쩔 수 없지. 어디가 아픈지나 봐야겠다.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아 자신의 무릎을 잡는 공녀를 본 남자는 믿을 수 없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어도 뺨 한 대는 맞을 각오로 말했는데, 별 말없이 자신의 상태를 봐주다니! 내가 그동안 공녀님을 오해했었구나! 

“어디가 많이 아픈 거예요?”

“이…… 이쪽 다리가……”

“음…… 여기부터 여기까지, 이렇게 아픈 거 맞나요?”

“마, 맞습니다!”

희은이 남자의 바지를 걷은 후 슬개골 옆 라인을 따라 손가락으로 그으며 내려갔다.

딱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이 아팠던 남자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흐음.”

“고…… 고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제 다리를 못 쓰게 되는 겁니까?!”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너무 오래 쪼그려 앉아서 근육이 굳은 것 같아요.”

심각한 표정의 남자를 안심시킨 희은이 평소 자신이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하듯이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 이 뼈에 붙어 있는 근육이에요. 만져지시죠? 이게 이런 식으로 발목이랑 이어져 있어요. 이 근육이 굳으면 종아리부터 발목까지 통증이 이어진답니다.”

“어……. 어어! 어떻게…….”

“네?”

“어떻게 근육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아시는 겁니까?! 혹시 제 근육이 보이십니까?! 투시를 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친절한 설명을 듣던 남자가 갑자기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으응? 뭐? 투시……? 근육설명 하다가 난데없는 소리를 들은 희은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아, 아니에요! 투시라니, 그런 거 아닙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희은이 얼른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이미 그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는 경외심이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붙어있던 세리조차 그녀의 말을 그냥 변명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소리오닌 님. 이런 능력이 있으셨으면서…… 왜 매번 그렇게 주치의를 쥐 잡듯이 하셨어요.”

“으응? 어, 아니야, 세리. 이건 그러니까…….”

“제가 그동안 소리오닌 님을 오해했었나 봐요! 그러고 보니 저도 어깨가 아픈데……. 제 어깨 근육도 보실 수 있으세요?”

자신의 눈앞으로 어깨를 들이미는 세리를 본 희은이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여기는 아직 기본적인 해부학도 없나 보구나.

아침에 일어난 잠깐의 소동이 있은 후로 희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그동안은 좀 엮이기 싫어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언제 말을 걸까 타이밍을 찾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음, 그럴 만도 한가? 대한민국에 있을 때도 지인들이 자신만 보면 여기저기 아프다고 난리였다. 하물며 기본적인 의학도 발달하지 않은 세계에서 내가 얼마나 신기해 보이겠어. 

희은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봐줘야겠다, 맘먹었다. 거기다 다행히도 마차 안에 오래 있던 사람들은 근육과 관절이 좋지 않아서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바론에 도착할 때 즘에 희은은 같이 온 모든 사람들에게 용한 능력이 있는 공녀님으로 통하게 되었다.

자신이 원하는 별명은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매번 고기도 먹고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니 나쁘지는 않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스스로가 참 긍정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며칠을 잤다 깼다 반복해도 자신은 여전히 낯선 곳에 뚝 떨어진 소리오닌인 걸.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살아보는 거다! 

***

“문을 열어라! 초크센 국에서 왔다!”

자신이 갇혀있는 마차를 포함한 총 다섯 대의 마차를 통솔하는 남자의 외침에 커다란 성문이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소……소리오닌 님. 이제 진짜 바론 국이예요. 우리 괜찮겠죠?”

어제까지만 해도 신난다고 말했던 세리는 막상 웅장한 성문을 바라보자 겁이 나는지 희은의 팔을 꽉 붙잡아왔다.

희은은 말없이 덜덜 떨리는 세리의 손을 쓰다듬어줬다. 그러나, 희은 역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어 침만 꼴깍 삼킬 뿐이었다.

“내려라!”

마차의 문이 열리자, 그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보다 더 빡빡하게 갑옷을 갖춰 입은 병사들이 사방을 감싸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더 살벌한 분위기에 초크센에서 끌려온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이게 끝인가?”

“네! 나머지 국민들은 초크센에 남겨뒀습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귀족들과 관련된 사람들뿐입니다!”

“흐음. 그렇구만. 우선 좀 나눠 봐!”

제일 위에 있는 통솔자인 듯한 사람의 말에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은도 곧 세리와 떨어져 몇 명 되지 않는 귀족들의 옆에 서게 됐다. 

세리와 비슷한 신분의 귀족들의 하인이었던 사람들은 바로 성으로 끌려가게 됐고, 성 앞의 뜰에는 희은을 포함한 귀족들만 남게 되었다.

같이 남아 있는 귀족들은 밥 먹을 때 가끔씩 보던 사람들이었지만, 서로 다른 마차에 태워져 왔기 때문에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당장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도 뭐라 조언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너. 이름이 뭐냐?”

앞서 명령을 내렸던 통솔자가 희은의 앞으로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아! 소, 소리오닌입니다.”

“흠? 이게 그 소문의 소리오닌인가?”

희은에 대해 뭔가를 들었던 것이 있는지 한껏 비웃음을 지은 남자가 그녀를 한번 쳐다본 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휴우…….”

당장 머리채라도 휘어 잡힐까 봐 잔뜩 긴장했던 희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섭다. 무슨 민속촌 체험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야……. 무장한 병사에게 인질처럼 끌려 다니다니…….

잘 살아보자고 결심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상황일 게 뭐람……. 옆에서 재잘거리던 세리도 어디론가 끌려가고, 이제 온전히 혼자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근데. 에리한 님은 어디 계십니까? 에리한 님께 보고를 해야 하는데, 안 나오셨습니까?” 

“아, 포크힌의 영지에서 사냥을 하시다가 가벼운 부상을 입으셨다고 하는군. 곧 오실거야. 그 전에는 내가 최종 결정권자다.”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던 남자와 그의 부하가 얘기를 이어갔다. 그들의 대화 속에 나온 이름을 들은 포로들은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몸을 움찔거렸다.

물론 희은은 전혀 알 수 없는 대화에 멍하니 바닥만 쳐다봤을 뿐이고.

“우선 이것들을 뒤 쪽 마을에 가둬 두도록 해! 그래도 초크센의 귀족이었으니 대놓고 감옥에 가둘 수는 없지.”

몽땅 감옥으로 보낼 수 없는 게 맘에 안 드는지 남자는 짧게 혀를 차고 옆에 있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마을로 보내라는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아왔다.

희은 역시 다짜고짜 감옥으로 보내 버리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깨의 힘을 뺐다. 

***

“자, 너는 여기다. 이 울타리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어. 우리 병사들이 저기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희은을 작은 집 마당으로 밀어 넣은 남자가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쫙, 서 있는 병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겁을 주듯 말하는 그를 본 희은이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혹시나 희은이 도망칠까 싶어 말한 거겠지만, 그녀는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 해도 나갈 생각이 없었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나갔다가 어떤 봉변을 당하려고……. 절대 안 되지! 

이왕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한 거 최대한 안전하게 있어야 한다는 목표를 정한 희은이 주먹을 꾹 쥔 채 집의 문을 열었다.

순순히 집 안으로 들어가는 공녀를 본 남자가 몸을 돌려 마을을 벗어났다.

소문으로는 엄청 고집 센 공녀라고 하던데, 생각보다 고분고분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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