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내려서 밥 먹어라!”
전에 숲에서 자신을 끌고 온 여자가 마차를 세운 뒤 문을 열고 소리쳤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차 안이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먼저 내려가려는 사람들이 뒤엉켜 소란스러워졌다.
“시끄러워! 닥치고 한 놈씩 내려오라고!”
기다란 몽둥이를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는 여자의 태도에 움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을 손으로 꼭 막은 뒤에 천천히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소리오닌 님! 저희도 얼른 내려요!”
“으응!”
희은은 자신의 손을 이끄는 세리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아까까지는 분명히 속이 안 좋았는데, 꽤나 오랫동안 공복 상태였던 건지 밥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위장이 신나게 꼬르륵 거리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좁은 공터에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그리고 쇠로 만든 그릇에 식사를 배급받았다.
그렇게 받아 온 음식은 한 끼 식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약해보였다.
수저로 몇 번을 휘저어 봐도 미지근한 물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채소 몇 개가 둥둥 떠 있을 뿐. 단백질은커녕 탄수화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밥이야?”
희은이 어이없는 얼굴로 세리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그녀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은 세리가 국물을 후루룩 마신 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어제까지는 그냥 맹물만 줬는데, 오늘은 스프도 만들어 주고! 바론에 가까워지기는 했나 봐요! 소리오닌 님도 감격하셨죠?”
내가 물어본 건 이런 뉘앙스가 아니었는데……. 어쩐지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허겁지겁 먹고 있더라니…….
그동안 물 밖에 안 줬던 거야? 옆에서 생글거리는 세리의 얼굴에 어쩔 수 없이 마주 웃어준 희은이 조심스럽게 국물을 떠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생각보다 간간하니 먹을 만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릇에 담긴 스프를 열심히 먹고 있을 때였다.
“아악!”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공터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지? 이 목소리는 아까 자신을 내팽개쳤던 여자의 것이 아닌가?
먹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은 희은이 놀란 표정으로 세리를 쳐다봤다.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세리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 어머나, 소리오닌 님! 저기 저 여자가 말에서 떨어졌나 봐요!”
“응?”
세리가 가리킨 곳을 보니, 정말로 말에서 떨어진 게 맞는지 발목을 감싼 여자가 꼼짝도 못한 채 주저앉아있었다.
그 여자의 옆으로 많은 부하들이 다가갔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놈의 오지랖! 발목을 감싼 여자를 보자마자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하는 걸 느낀 희은이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렇지만 환자를 본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앉았다 일어나는 것도 힘들만큼 풍성한 드레스를 부여잡고 겨우 일어난 희은이 빠른 걸음으로 그 여자의 일행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뒤에서는 세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희은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디 좀 봐요.”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는 희은을 저지한 여자가 신음을 참으며 그녀를 째려보았다.
“감히, 천한 초크센의…… 공녀가…… 으윽. 어디다…… 손을 대는 거……야?!”
“하아.”
자신을 향한 악의가 가득한 눈길을 한 번 마주친 희은이 훅! 입 바람으로 앞머리를 날린 뒤 여자를 마주 째려보기 시작했다.
‘내가 병원에서 일할 때 너보다 더한 진상들한테도 져 본 적이 없거든?!’
속으로 중얼거린 희은은 여자의 발목을 살펴본 뒤 일부러 제일 아플 것이 분명한 곳을 손으로 꾸욱, 눌렀다.
“으악! 뭐하는 짓이야?”
“여기. 말에서 떨어지면서 여기가 다친 거 같네요. 혹시 부목으로 댈만한 거 없나요?”
여자의 비명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희은이 어느새 가득 몰려들어 그들을 보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녀의 말에 고개만 설레설레 젓는 그들의 모습에 얕은 한숨을 내쉰 희은이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이 발목으로는 말을 타는 건 무리니까 마차에 앉아서 같이 가시죠.”
“뭐? 이년이 미쳤나! 감히 누구보고 저런 마차에 타라는 거야?!”
이 여자가 진짜! 어디서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자신의 제안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여자를 보던 희은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미 퉁퉁 부어오르고 있는 발목으로 장시간 말을 타는 건 힘들 텐데. 붕대도 없고 부목도 없고……. 어쩌지? 잠깐, 어? 그거다!
“세리! 혹시 이 근처에 끈적끈적한 성질을 가진 뭔가가 있어?”
“……끈적끈적한 거요?”
소리오닌의 돌발 행동을 차마 말리지는 못하고 그녀의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세리는, 난데없이 끈적이를 찾는 주인의 행동에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반문했다.
“응, 뭐든 좋아!”
“어…… 아, 저기. 저 식물을 꺾으면 안에서 끈적끈적한 즙이 나와요!”
희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세리가 곧 뭔가를 떠올리고 공터 근처에 나 있는 풀을 가리켰다. 세리가 가리킨 곳에는 검붉은 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좋아, 그럼 그것 좀 가지러 같이 가자.”
세리의 말을 들은 희은은 불편한 옷차림을 다시 추스르며 끈적거리는 즙이 나온다는 풀을 마구 꺾기 시작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저 공녀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좀 정신이 이상해졌나?
기이한 행동을 하는 두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느라 말릴 생각도 못한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됐다!”
품안에 가득 풀을 채워 온 희은이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짓고는 다짜고짜 자신의 치맛단을 찢었다.
으응?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던 사람들은, 그 다음에는 또 무슨 해괴한 짓을 할까 슬슬 궁금한 표정으로 모여들어 희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희은은 찢어 놓은 치맛단에 끈적거리는 즙을 꼼꼼하게 발랐다. 생각보다 점성이 강해 다행히 그녀가 생각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즙을 바르는 작업을 끝낸 희은이 아직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여자의 발목의 복숭아뼈 아래부터 종아리까지 치맛단을 주욱, 붙였다.
갑자기 느껴지는 차갑고 끈적거리는 감촉에 여자는 희은을 밀어내려했다. 그러나 여자의 팔을 탁 소리가 나게 쳐낸 희은은 그녀의 발목 주위에 마저 치맛단을 둘렀다.
“소……소리오닌 님, 대체 뭘 하신 거예요?”
“아아, 다친 발목에 부목을 대신해서 천으로 지지해 준 거야. 근육을 둘러서 감쌌으니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고.”
세리의 질문에 일부러 자신을 째려보는 그 여자를 힐끗 바라보며 크게 대답한 희은이 당당한 걸음으로 마차를 향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딴 천 쪼가리로 무슨! 여자는 콧방귀를 꼈다.
만약 희은의 장담과 달리 자신의 발이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주 크게 혼내주겠다는 생각으로 슬쩍 발에 힘을 줬다.
“이럴 수가?”
아직 발목에 통증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발을 디딜 때 힘이 들어가 일어날 수 있었다!
그저 천 쪼가리 몇 장 붙인 것뿐인데 이렇게 가뿐하게 걸을 수 있다고?
여자는 경악에 찬 눈으로 세리와 함께 마차 위로 올라가는 공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
“근데, 세리. 여기는 힐 마법 같은 건 없어?”
희은은 여전히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밀려오는 멀미를 참으며 옆에 앉은 세리에게 물어봤다.
대부분 이런 세계는 힐 마법이 있지 않나? 왜 다들 아파서 쩔쩔매는 거야?
“소리오닌 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 고급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들은 왕궁에만 상주하잖아요! 오늘따라 자꾸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
“어, 어어. 그렇지? 바론은 우리랑 다른가, 해서 물어봤어!”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세리의 시선을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그 뒤로 별말 없이 바깥 풍경만 보고 달리기를 또 한나절. 뜨거웠던 해가 들어가고 슬슬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밥 먹어라!”
저녁식사를 주려고 하는지 마차가 멈춘 뒤, 포로들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안의 사람들은 점심때처럼 손바닥만 한 공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차례차례 스프를 받아 자리로 돌아온 사람들을 본 희은도 세리와 같이 스프를 받기 위해 커다란 냄비 앞으로 다가갔다.
“흠. 정말로 발목이 한결 낫더군. 자! 받아라!”
스프를 배식하던 여자가 희은의 그릇에 고기 한 덩어리를 툭 넣어줬다. 생각지도 못한 친절에 희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를 쳐다봤다.
희은의 시선에 옆으로 고개를 돌려 킁, 코를 한 번 훌쩍인 여자가 손을 휘저으며 얼른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름 귀여운 감사 인사를 받은 희은이 세리와 함께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특식이 분명한 고기를 혹시 다른 사람에게 뺏길세라 얼른 스프를 먹어 치웠다.
크으. 역시 남의 살이 들어가야 든든하지! 희은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마차에 올라 쪼그려 앉아서 잠이 들었다. 이세계에 떨어진 첫날밤이 조용히 지나고 있었다.
***
“소리오닌 님, 이제 내일이면 바론에 도착한대요!”
잠자리가 불편해 여기저기 쑤시는 몸을 스트레칭하던 희은에게 세리가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얘기했다.
여행 가는 것이 아닌데도 새로운 곳에 간다는 자체가 설레는 듯한 세리의 태도에 희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좋아? 난 잘 모르겠다.”
“그럼요! 물론 좋은 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바론의 수도인 페이론도 저희 초크센의 수도보다 4배는 더 크고, 왕성도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크고요. 사시사철 선선하고 햇빛이 좋아서 여름만 되면 쪄죽을 것 같은 초크센이랑은 비교가 안 된다던데요?”
“음, 그래? 그래봤자 우리는 갇혀 지낸다며……?”
갇혀 지내면 햇빛이고 수도 구경이고 다 물 건너간 거 아닌가?
세리의 말에 초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솔직히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희은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