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6
샐리 & 카시스
딸랑.
문에 달린 귀여운 종소리와 함께 엄청난 위압감을 가진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짙은 남색 정장을 입고 은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남자의 얼굴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슈아드렌의 사장 폴은 멍하니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이성이 돌아온 얼굴로 소리쳤다.
“어서 오십시오, 에스테반 공작 저하!”
제국의 귀족 중 가장 위세가 드높다는 에스테반 공작가의 가주, 카시스였다. 마음먹으면 제국의 반을 가질 수도 있다는 그가 원한 것은 무척 소박했다.
“케이크는?”
카시스의 말에 폴이 상기된 얼굴로 준비해 둔 케이크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슈아드렌의 가을 시즌 신상 케이크 ‘추억은 달콤달콤씁쓸해’ 입니다!”
여전히 해괴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난해한 이름과는 달리 케이크의 생김새는 무척 훌륭했다. 잘 구워진 빵 위로 진홍빛 무화과가 오른 케이크는 무척 고급스럽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과연 올 시즌, 사교계에서 엄청난 유행이 된 디저트였다. 워낙에 인기가 좋아 이 케이크를 사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였다.
기다림 끝에 케이크를 손에 든 이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황홀한 눈빛을 했다. 그러나 케이크를 받아 든 카시스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차분하기만 한 그의 모습에 작은 실망감을 느끼며 폴은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저, 공작 저하.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소문이라니?”
“공작 저하와 데임 샐리께서 올해 결혼하신다는 이야기요.”
그 말에 카시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대번에 불쾌감이 올라왔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지?”
“요즘 귀부인들 사이에서 나도는 소문입니다. 카모라 님께서 순백색의 미카도산 실크를 구매하셨다고요. 게다가 앞으로 몇 달간 드레스 주문도 받지 않으신다고 공표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순백색 미카도산 실크는 주로 웨딩드레스를 만들 때 쓰는 최고급 원단이었다. 게다가 늘 일에 미쳐 있는 카모라가 몇 달이나 주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혹시 데임 샐리의 웨딩드레스를?!’이라는 말이 나돌 수밖에.
카시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작은 일들을 엮어 소문을 만들어 내려고 용쓰는군.”
“그럼 역시 헛소문이라는 말입니까?”
“그래.”
단호한 대답에 폴은 왜인지 제가 다 아쉬운 얼굴을 했다. 카시스는 어깨가 축 처진 그를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카시스와 샐리가 공식적으로 연인이 된 지 어느덧 3년. 수도의 귀족 중에는 에스테반 공작과 데임 샐리가 연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 속에 있었다. 결혼이라는 서약이 익숙한 귀족들의 세계에서 ‘연인’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무척 신기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두 사람에 관한 말을 나누었다.
샐리와 카시스의 사이가 조금만 냉랭해 보여도 곧바로 헤어졌다는 말이 나왔고, 두 사람이 여느 때보다 다정해 보이면 이제 정말 결혼을 하려다 보다 하고 설레발을 쳤다.
특히나 후자의 경우는 해가 갈수록 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나이 많은 원로 귀족 중에는 카시스에게 대놓고 결혼은 도대체 언제 하느냐고 물어 오는 이까지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바람과 달리 두 사람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샐리가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에스테반 공작인 그조차 한 수 접을 정도로.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고, 그 모든 일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었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그녀에게 결혼은 부담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래서 나도 그 말을 꺼내지 않고 있건만 왜 저렇게 시끄럽게 구는 것인지.’
카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크를 든 카시스가 향한 곳은 수도의 외곽에 있는 샐리의 집이었다. 대출금을 다 갚아 완전히 그녀의 소유가 된 작은 집. 이제는 거대한 에스테반 저택보다도 익숙해진 집이다.
‘그녀도 소문을 들었겠지.’
슈아드렌의 사장보다 사교계의 소문에 빠른 그녀가 그 말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그런 소문이 한두 번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 왔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였다.
카시스가 사 온 무화과 케이크를 행복하게 우물거리며 샐리가 내뱉은 말은 카모라의 웨딩드레스는 물론, 결혼의 ‘결’ 자와도 관계없는 말이었다.
“저 드디어 요한 아카데미의 출입증을 받았어요!”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카시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성 요한 아카데미. 그곳은 제국의 명문 귀족가의 자제들만 들어가는 제국 최고의 고등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나 드높은 이름만큼이나 폐쇄적이어서 아카데미 관계자가 아닌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했다. 특히나 여인의 출입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샐리는 수개월에 걸쳐 아카데미의 교장에게 부탁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드디어 아카데미에 와도 좋다는 방문 허가증이 도착한 것이다!
샐리가 성 요한 아카데미의 문양이 찍힌 봉투를 흔들며 아이 같은 얼굴로 말했다.
“꼭 가 보고 싶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보람이 있네요.”
샐리는 최근 테오도라와 함께 엄청난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바로 여인을 위한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여인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 없는 이 제국에서는 파격적인 계획이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알스의 아카데미를 다닌 테오도라와 달리 샐리는 정식 교육 기관에 다닌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업을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최근 제국의 수많은 교육기관을 방문하고 있었다.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는 어떤 곳일까요? 정말 기대돼요.”
그러나 미소가 가득한 샐리와 달리 카시스의 얼굴은 미묘했다. 입을 꾹 다문 아름다운 얼굴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샐리는 눈썹을 내리며 코를 찡긋거렸다.
“또 그런 표정.”
“무슨 표정.”
“내가 도와줄 수 있었는데, 하는 표정이요.”
샐리의 말에 카시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일부는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성 요한 아카데미의 담벼락이 높다고 해도 에스테반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아니었다. 에스테반 공작이 원한다면 어느 때고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그래 왔듯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감정이 날 선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진짜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카시스가 방문 허가증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문 날짜가 내일이군.”
“그런데요?”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물은 샐리에게 그가 말했다.
“내일은 국무 회의가 있어.”
그 말이 그녀가 아, 하고 눈을 크게 떴다.
국무 회의는 황제와 관료, 제국의 대귀족들이 모여 나랏일을 논하는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에스테반 공작인 그가 절대 빠질 수 없는.
샐리가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지 못하는 것이 신경 쓰이는 거라면 괜찮아요. 어차피 혼자 갈 생각이었거든요.”
그 말에 카시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혼자 갈 생각이라고?”
“그럼요. 어차피 허가증도 제게만 나온 것인걸요. 동반자는 허가되지 않았어요.”
시원하게 대답하는 샐리의 모습에 카시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 얼굴은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잠시 후 그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 출신으로 고백하건대 그곳에 있는 것들은 결코 성실한 학생들 따위가 아니야. 학생의 탈을 쓴 늑대들이지.”
“……네?”
눈을 동그랗게 뜬 샐리를 향해 카시스는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놈들은 노골적이고 추잡한 시선으로 널 바라볼 거야. 그런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혼자 가겠다고?”
의외의 말에 샐리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샐리가 똑 부러지는 말투로 대꾸했다.
“제가 지금 가는 곳은 성 요한 아카데미예요.”
“그래.”
“흉악한 범죄자들이 갇힌 감옥이 아니고요.”
“그놈들이나, 그놈들이나.”
툭 내뱉는 목소리에는 진한 환멸이 어려 있었다. 샐리는 새삼스럽게 굳은 얼굴의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아카데미에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카시스가 평범하지 않은 아카데미 생활을 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던 남자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들은 마치 전설 속 인물을 마주한 것처럼 황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카시스는 그 눈빛이 질린다는 듯 무시하기 일쑤였고.
‘물론 어떤 걱정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명문가의 귀족이라 해도, 피가 들끓는 십 대의 소년이었다. 그런 자들을 모아 놓은 곳이니 평범한 분위기는 아닐 터였다.
젊은 여자를 향해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관심이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고작 그런 이유로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그런 시선이 무서웠다면 아카데미에 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샐리는 방문 허가증을 두 손에 쥐며 그를 바라보았다.
“잘 대처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의 눈빛이 너무도 다부져 카시스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알고 있다. 그녀에게 이런 걱정이 필요 없다는 것을. 그녀는 늑대 같은 놈들 사이에서도 절대 기죽지 않을 것이다.
기죽기는커녕 짐승 놈들을 아주 능숙하게 조련할 여인이었다.
그러나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그것은 그녀의 능력에 대한 걱정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불쾌감이었다.
‘그런 놈들 앞에 그녀가 있다는 자체가 싫어!’
그러나 그 정도 이유로 그녀를 가지 말라고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에게 꼭 필요한 일인 것도 알고 있고, 이 정도로 반응할 일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탐탁지 않은 마음은 영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불만과 걱정은 대번에 밖으로 튀어나왔다.
입술을 꾹 깨물고 시선을 돌린 카시스의 모습에 샐리는 눈썹을 내렸다. 한 발짝 그의 곁으로 다가간 샐리는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두 손으로 그의 두 뺨을 어루만졌다. 3년 새에 더더욱 아름다워진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카시스.”
“…….”
“카시스 에스테반.”
“……왜.”
남색 눈동자에는 작은 원망이 어려 있었다.
그 눈빛이 꼭 집에 혼자 두고 나갈 때의 캬 같아서 샐리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남자 도대체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그의 연인이 된 지 3년. 그는 이제는 이렇게 삐질 줄도 안다. 그 점이 샐리의 심장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샐리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 위에 입 맞추었다. 그의 입술 위로 그녀의 입술이 쪽, 쪽, 부딪혔다.
마치 장난을 치는 어린 새처럼.
입술 위에 닿는 그녀의 입술은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그 감촉만으로 꽁하였던 마음이 풀어질 만큼.
어느새 카시스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풀어져 있었다. 그의 남색 눈동자에는 뜨거운 정염이 들끓기 시작했다.
샐리의 가는 허리를 안은 카시스는 이제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조금 전과는 온도부터 다른 키스였다. 들어온 혀는 저돌적으로 그녀의 혀를 거칠게 감아올렸다.
“아…….”
샐리는 저도 모르게 들뜬 신음을 내뱉었다. 열기에 휩싸여 눈을 감으려던 샐리는 번뜩 눈을 떴다.
‘아니, 아니지.’
여기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와 보내는 밤은 너무나 달콤하고 농염했다. 연인이 된 지 3년이 흘렀어도 날을 샐 만큼.
그것이 문제였다.
샐리는 힘겹게 카시스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했다.
“안 돼요. 내일 당신, 중요한 회의가 있잖아요.”
카시스는 그 말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체력이 좋았다. 아무리 정열적인 밤을 보낸다 한들 다음 날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
그리고 장담하건대, 그녀는 그보다도 체력이 좋았다. 카시스가 나른하게 침대에 쓰러져 있을 때조차 그녀는 늘 먼저 일어나 서류를 보지 않았던가.
그 눈빛을 읽은 샐리가 흠, 하고 작은 헛기침을 했다. 자그마치 연애한 지가 3년이었다. 그런 일로 내숭(?)을 떨 시기는 아니었다.
샐리가 미간을 모으며 새침하게 말했다.
“국무 회의에 하루 지난 구겨진 옷을 입고 갈 생각이에요?”
그는 품위와 우아함의 상징인 에스테반 공작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단장을 하고 회의장에 가야만 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샐리의 집에서는 불가능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가 매일같이 에스테반 저택으로 돌아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시스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동이 트기 전에 저택에 돌아가서 준비하면 돼.”
“그럼 너무 힘들잖아요.”
그녀의 말에 카시스가 사나운 눈빛으로 말했다.
“여기에서 멈추는 게 더 힘든 일이야.”
샐리의 말보다 그의 입술이 빨랐다. 그는 재빨리 샐리의 오른쪽 귀를 깨물었다. 예민한 귓가에 파고드는 혀에 샐리는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
잠시 후 샐리는 결국 그의 목을 두 팔로 껴안고 말았다. 도저히 그의 유혹을 참을 수 없었다.
* * *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샐리는 눈을 떴다. 카시스가 단단한 어깨 위로 새하얀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카시스가 그녀를 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더 자. 피곤하잖아.”
그의 말대로였다.
불꽃처럼 뜨거운 밤은 온몸이 충족될 만큼 행복했으나 여파는 컸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몸은 노곤하기만 했다. 이대로 온종일 뒹굴고 싶을 만큼.
샐리는 살짝 졸음이 어린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이었다.
두 사람의 수면 시간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썹을 내렸다.
“당신이야말로 피곤해서 어떡해요.”
그녀의 말에 카시스는 피식 웃었다.
“괜한 걱정을 하는군. 당신에게 일만 없었다면 아침 해가 틀 때까지 멈추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이야기하며 카시스는 샐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살짝 주름이 진 셔츠를 입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그의 모습은 평소와는 아주 달랐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잘 다녀와. 늑대 놈들을 조심하고.”
샐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성 요한 아카데미 앞에 마차가 섰다. 샐리는 우아한 동작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짙은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는 화려한 장식도 없고 목까지 덮는 디자인이었다. 괜한 시선을 모으지 않기 위해 차려입은 소박한 복장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카데미에 발을 들이는 순간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아카데미의 한복판에 나타난 여인을 힐끗거리며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이곳에서 거의 볼일이 없었던 여인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나이는 12세부터 18세까지. 이성에 한창 관심이 많은 나이의 소년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시선이 어마어마하네. 보통의 귀족 여인이었다면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바닥에서 눈도 떼지 못하겠는걸.’
꽃처럼 키워지는 귀족 여인은 이렇게 많은 사내에게 둘러싸일 일이 거의 없다. 저런 눈빛 속에 홀로 선다면 수줍음을 넘어 모멸감까지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뒷골목에서 험하게 자란 샐리야.’
뒷골목에서는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놈들이 천지였다. 저 정도 흘낏대는 시선은 그다지 신경 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샐리는 태연한 얼굴로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도리어 소년들이 흠칫거리며 눈을 피했다. 샐리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그들을 살펴보았다.
소년들은 끝자락이 길게 내려온 검정색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새하얀 셔츠 위로는 까만 리본을 단정하게 매달고 있었다. 성 요한 아카데미의 교복이었다.
‘그도 저런 교복을 입었겠지.’
새삼 카시스의 아카데미 시절 모습이 궁금해졌다. 검정색 연미복을 입은 소년 카시스라.
상상만 해도 가슴에 설레었다.
‘같이 오지 않은 게 조금 아쉽긴 하네.’
아카데미를 거닐며 자연스럽게 그의 학창시절에 대해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에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녀에게 이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듯이.
‘놀러 온 게 아니잖아.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샐리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교장실이었다. 샐리와 인사를 나눈 교장이 아카데미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마치고 말했다.
“아카데미는 무척 넓습니다. 혼자서 둘러보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 안내해 줄 학생을 뽑았습니다.”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년의 모습에 샐리의 눈이 커졌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커다란 갈색 눈동자, 아직 아이 같은 앳된 모습이 여실히 남아 있는 소년은 바로 에이미의 동생이자 로렌스가의 막내아들인 제레미 로렌스였다.
“제레미?!”
“샐리 님?!”
두 사람은 마치 피를 나눈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포옹했다. 샐리의 두 손을 맞잡은 제레미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손님을 안내해 달라는 지시를 받고 온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손님이 샐리 님일 줄이야. 정말 기뻐요!”
“그러게요. 제레미를 만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나도 정말 기뻐요.”
제레미가 제 가슴을 툭툭 두들겼다.
“저만 따라오세요. 제가 아카데미 구석구석 꼼꼼히 소개해 드릴게요!”
제레미의 힘찬 목소리에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는 공언한 대로 샐리에게 아카데미의 곳곳을 안내했다.
제국 최고의 교육 기관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아카데미는 넓고 다양한 시설을 자랑했다.
수백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 강당, 매월 연주회가 열린다는 콘서트홀, 잘 관리된 승마장, 평소에는 학생들이 식사하고 연말에는 파티가 열린다는 연회홀.
수만 권의 책들이 꽂혀 있는 3층 높이의 거대한 도서관까지.
샐리는 감탄을 내뱉었다.
‘아카데미는 이런 곳이었구나.’
상상보다 더 멋있고 대단했다. 이런 곳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니 상상만 해도 설렐 정도였다.
교정이 무척 넓어서 한 바퀴를 도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해가 지고 노을이 내려앉을 때쯤에야 교실이 모여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교실을 가장 마지막 코스로 잡은 것은 샐리의 생각이었다. 수업하는 학생들에게 괜한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수업이 끝난 건물은 조용했다. 사람이 거의 없는 드높은 건물은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고, 복도에는 수많은 작품이 늘어서 있었다.
그림부터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 글귀가 쓰여 있는 책자까지.
제레미가 말했다.
“성 요한 아카데미에서는 예술 수업도 무척 중요시하거든요. 단순히 감상에 그치지 않고 예술 작품을 만드는 활동이 많아요. 그중 훌륭한 작품은 이렇게 복도에 걸어 놓고요.”
“그렇군요.”
샐리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작품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훌륭한 작품만 모아 놓았다더니 정말이었다.
‘대단해. 학생 수준이 아니잖아.’
미술관에서 보았던 것만큼 수준 높은 작품들이었다.
찬찬히 작품을 살펴본 샐리의 시선이 작품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는 작품명과 그린 이의 이름, 제국력이 적혀져 있었다.
“굉장히 오래전의 작품도 많네요.”
“성 요한 아카데미가 예술만큼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역사거든요. 오래된 작품일수록 더 가치가 깊어진다고 생각해요. 역사를 지키는 것이 곧 현재를 지키는 것이며…… 헉, 역사 숙제!”
제레미가 눈을 크게 뜨고는 입을 막았다.
“역사 숙제 제출이 오늘까지였는데 깜빡 잊고 있었네.”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진 제레미가 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잠시만 다녀와도 될까요? 잽싸게 숙제만 제출하고 올게요.”
“그럼요.”
샐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복도를 구경하는 것만으로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복도를 쭉 거니는 것이니 따로 안내도 필요치 않았고.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제레미가 빠른 걸음으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샐리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쩜 저렇게 귀엽지.’
그녀가 보았던 귀족 영애 중 에이미가 가장 귀여웠다면, 제레미는 가장 귀여운 귀족 영식이었다. 귀족 특유의 오만함과 도도함은 조금도 없고 봄볕처럼 따스하고 사랑스러웠다.
‘너무나 귀여운 집안이라니까.’
새삼스럽게 로렌스 가문의 마법 같은 매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샐리는 쿡쿡 웃으며 다시 걸음을 내디뎌 복도의 작품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런 샐리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멈추었다.
“이건…….”
샐리는 커다래진 눈으로 그림 앞에 섰다.
그림은 한 소년을 담은 인물화였다. 검정색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환한 햇빛 아래 서 있는 은빛 머리카락의 소년.
샐리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카시스?”
그녀가 아는 그와는 아주 달랐다. 그림 속의 소년은 단단한 사내의 느낌보다는 여린 소녀의 느낌이 들었다.
긴 은발 머리카락이 찰랑거렸고, 새하얀 얼굴은 젖살이 남아 동그랬다. 긴 속눈썹을 내리깐 눈매, 그 안의 짙푸른 눈동자는 밤하늘같이 반짝였다.
소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수줍게 웃고 있었다. 보는 이의 얼굴이 빨개질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는 절대 남 앞에서 이런 식으로 웃지 않는다. 그가 풀어진 미소를 짓는 것은 샐리의 앞뿐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더더욱 고독하고 적막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이런 미소를 지었다고?’
더 놀라운 것은 액자 아래에 걸려 있는 작품명이었다.
“……천사의 미소, 라니.”
엄청난 제목만큼 그림에는 화가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색을 겹겹이 쌓은 그림에서는 모델에 대한 화가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샐리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도대체 아카데미 시절을 어떻게 보낸 거야, 이 남자.’
그때 샐리의 등 뒤로 몇 개의 그림자가 덮쳐 왔다. 그 인기척에 반응하기 전에 능글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아카데미에 레이디라니, 정말 보기 드문 손님이군요. 안내인도 없이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연극이라도 하듯이 과장되고 경박한 말투였다. 연이어 낄낄거리는 다른 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곳은 온통 사내들뿐이라 레이디 혼자 다니기 무서울 텐데요. 저희랑 함께 가시죠. 아주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순식간에 샐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그들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엄청 도도하신 레이디인걸.”
“그러게. 신사의 매너를 거절하는 것은 레이디의 겸양이 아닌데 말이야.”
명백한 희롱이었다.
샐리는 이러한 분위기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질이 안 좋은 사내들은 이런 식으로 여자 하나를 두고 낄낄거리곤 했다.
곤란해하는 여인의 모습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카데미까지 와서 이런 저급한 놈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제야 카시스가 말한 ‘늑대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 것 같았다.
“안내는 필요 없으니 그냥 지나가시죠.”
그리고 그런 짐승들은 무시한다고 곱게 지나가지 않는다. 단호하게 거절했건만 소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샐리를 향해 한 발짝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지 말고 얼굴 보고 인사라도 하시죠.”
소년이 샐리의 팔목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으로 그의 손을 세차게 내리쳤다. 작은 비명을 내지른 소년은 힉 하고 놀랐다.
등을 돌린 샐리가 스산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아니, 그저 미인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풀어 헤친 붉은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는 너무나 강렬했다.
“아……. 어…….”
소년들은 눈을 깜빡이며 말을 더듬었다. 샐리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소년들은 품행이 그리 단정해 보이지 않았다. 반항이라도 하듯 셔츠 깃을 열고 타이도 매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우아한 학생보다는 뒷골목의 건달 같은 모습이었다.
“분명 됐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대들의 귓구멍은 꽁꽁 막힌 모양이죠?”
내리깐 금빛 눈동자가 주는 위압감에 소년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가운데에 있던 한 소년이 표정을 바로 잡았다.
장식도 없는 수수한 옷을 입은 여자였다. 화려한 보석도 보이지 않았다. 귀족이라 해도 그리 대단한 집안의 여인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제가 두려워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한순간이나마 움찔한 것이 창피해 소년은 일부러 험악한 눈빛을 했다. 그는 사나운 얼굴로 위협하듯 말했다.
“레이디가 말버릇이 무척 험하시군요.”
그 말에 샐리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명백한 비웃음에 소년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샐리는 붉은 입술을 벌려 말했다.
“험하다고?”
“……!”
샐리는 걸음을 내디뎌 소년들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코끝을 스미는 향기에 소년들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러나 그들의 황홀한 얼굴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귓가에 들린 서늘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혼자 있는 여자를 둘러싸고 낄낄거리는 짓이 더더욱 험악하고 저급한 짓이란다, 철없는 양아치들아.”
샐리는 구두 굽으로 소년의 발등을 콱 찍어 버렸다.
“아악!”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예상치 못한 공격은 너무나 매섭고 고통스러웠다. 신발을 붙잡고 험악하게 소리 지르던 소년이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이 계집이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벨리타 백작가가 무섭지도 않으냐!”
“어머나. 먼저 말해 줘서 다행이네. 어떻게 이름을 실토하게 할지 고민이었는데.”
“뭐?!”
샐리는 빙그르르 웃었다.
“벨리타 백작 부인께는 방금 네 행동을 잘 말해 주도록 할게. 공부하라고 보낸 아들이 여자나 희롱하고 있는 것을 알면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어쩌겠니. 알 것은 아시고 혼낼 것은 혼내셔야지.”
소년의 눈빛이 흔들렸다.
고개를 치켜뜬 여인의 얼굴은 오만했다. 그 얼굴은 벨리타라는 이름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말투로 보아선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것은 자신들인 것 같았다.
뭔가 잘못됐다.
소년들은 혼란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 여자 도대체 뭐야?’
그러나 바로 나오는 이름이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명문가의 젊은 여인 중 저런 외양을 가진 여인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소년들의 눈이 커졌다.
장미꽃처럼 붉은 머리카락, 선명한 금빛 눈동자, 놀랄 만큼 화려한 미인.
“설마…… 데임 샐리?”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린 소년을 향해 샐리는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
그 미소가 뜻하는 바를 깨달은 소년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엄격한 아카데미 기숙사에 처박혀 사는 소년들이라도 모를 리 없는 이름이었다.
데임 샐리.
평민이 받는 명예 귀족 작위인 데임이란 작위는 하찮은 것이다. 그래서 귀족들은 데임을 무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샐리는 달랐다.
그녀는 에스테반 공작의 연인이며 황제의 신임을 받는 테오도라 황녀의 최측근 가신이었다. 게다가 수년간 사교계의 정점에 선 여인이 아닌가.
웬만한 명문가의 여인보다도 큰 힘을 가진, 절대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여인이었다.
소년들은 순식간에 파리해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소년들이 그녀를 향해 필사적인 얼굴로 외쳤다.
“자, 잠시만요! 방금 전은 절대 나쁜 의도로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렇게 쉽게 사과할 일은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죠. 여자가 싫다는 건 정말 싫다는 것이고, 싫다는 여자를 건드리는 것은 아주 고약한 일이랍니다. 그 점을 잊지 마세요.”
“데, 데임 샐리!”
그토록 능글맞았던 표정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소년들은 마치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샐리는 한마디 말로 소년들의 애달픈 목소리를 무시했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아요. 또 제가 싫다는 행동을 하려는 건가요?”
소년들은 그 말에 헉하고 입을 다물었다. 샐리는 돌처럼 굳은 소년들을 지나쳐 도도한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소년들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차마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더 이상 그녀의 심기를 거슬렸다가 어떤 보복이 따라올지 겁났기 때문이다.
샐리는 그들에게서 멀어져 모퉁이를 돌다 눈을 크게 떴다. 마치 그녀를 기다리듯 서 있는 낯익은 얼굴에 놀라 소리쳤다.
“카시스!”
노을빛을 등진 아름다운 얼굴은 바로 카시스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샐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회의가 한창 진행될 시간이잖아요.”
“중요한 건 다 해결하고 왔어. 나머지는 내가 없어도 상관없는 부분이고.”
그 말에 샐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럴 리가 없다. 제국의 대귀족과 황제가 참석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중요한 일은 절대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온 거야. 내게 중요한 건 너니까.”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답한 카시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샐리의 등 뒤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샐리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봤어요?”
“그래.”
“어디서부터?”
“네가 구두 굽으로 저 짐승 놈의 발등을 찍는 장면부터.”
“아…….”
샐리는 할 말을 잃고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큰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그가 걱정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으니 눈치가 보였다.
카시스가 냉기가 서린 눈동자로 말했다.
“감히 네게 그런 짓을 한 놈들에게 벌이 너무 약해.”
“약하지 않아요. 구두 굽이 끝까지 들어갈 만큼 세게 눌렀는걸요. 발등이 퉁퉁 부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걸요?”
그러나 카시스의 얼굴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웠다.
“저런 놈들은 다리 사이를 가격했어야지. 아니, 저런 놈들의 다리 사이에 네 몸이 조금이라도 닿는다고 생각하니 불쾌하군. 그냥 북쪽으로 징병을 보내 버릴까.”
서늘하게 나오는 목소리는 진심인 것 같았다. 샐리는 평소와는 달리 그런 식으로 과격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라나는 새싹을 곧게 키우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제대로 큰 벌을 당하고 나면 다시는 여자를 함부로 놀릴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대로 하세요.”
샐리는 새침하게 말하며 카시스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맞닿은 그녀의 체온에 그제야 카시스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아카데미 구경은 잘했나?”
“네. 제레미가 잘 안내해 주었어요.”
“아아.”
“당신이 교장에게 말해서 미리 제레미 님을 지목해 놓은 거죠?”
수많은 학생 중에 제레미가 안내인으로 선택될 확률이 얼마가 될까. 그것보다는 카시스가 미리 손을 썼을 확률이 높았다.
역시나 정답이었다.
카시스가 부정하지 않고 말했다.
“괜한 놈이 널 안내하는 꼴을 어떻게 보란 말이야.”
샐리를 보는 사내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황홀해하거나 한눈에 반하거나 설레어하거나 호감에 가득 차거나 이따금 선연한 욕망에 번들거리거나. 그에게는 모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었다.
그런 의미로 제레미는 이 아카데미에서 카시스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소년이었다.
샐리는 피식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
“아직 못 가 본 곳이 있는데 안내해 주시겠어요?”
“물론.”
샐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교실이요.”
빈 교실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나타난 교실을 바라보며 샐리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느낌을 받았다.
샐리는 설레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한 발짝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런 곳이군요.”
한쪽 벽면에 있는 창문에서 샛노란 노을이 비치고 있었다. 노을빛을 받은 교실은 무척 따뜻한 느낌이었다.
나무로 만든 커다란 칠판, 그 앞으로 쪼르르 세워진 나무 책상과 의자들.
명문가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라기에 더 화려한 공간이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소박했다.
“……의자에 앉아 봐도 되겠죠?”
샐리가 카시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카시스는 그 모습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늘 당당하고 대담한 그녀가 처음 온 공간에 어색해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럼.”
카시스가 대답하자마자 샐리는 창가의 의자를 빼 앉았다. 곧게 허리를 펴 보니 저 앞에 놓인 교단이 보였다.
“저앞에서 교수가 강의를 하는 거죠?”
“그래, 오전부터 저녁까지. 매시간 과목이 바뀔 때마다 교수도 바뀌어.”
“어떤 과목들을 알려 주나요?”
“아주 다양해. 인문학, 문학, 종교, 수학, 외국어, 미술과 음악까지. 일주일에 한 번은 화술과 예법 같은 귀족 전용 수업도 받고.”
샐리는 책상에 턱을 괴고는 상상을 해 보았다.
교탁 위에는 다양한 교수가 서서 저마다 제 지식을 열성적으로 전파할 것이다. 그 앞에 앉은 학생들은 눈을 빛내며 그에게 집중하겠지.
샐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음. 하지만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은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걸.’
이내 그녀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도 음악은 재미있을 거야. 미술도 배워 보고 싶어. 그쪽은 좀 재능이 있는 편이니 성적이 꽤 좋지 않을까?’
교수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칭찬받는 자신을 상상해 보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카시스는 그런 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 너머로 지는 노을이 그녀의 위로 비추고 있었다. 오렌지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름답군.’
심장이 저리듯이 두근거렸다.
어느덧 그녀의 연인이 된 지 삼 년이나 지났건만 어째서 그녀는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것일까. 어째서 매번 시선을 빼앗아 버리는 것일까.
그녀가 이토록 눈부시고 아름답게 보일 때마다 카시스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사랑스러움, 벅차오르는 애정, 들끓는 욕정, 나만이 보고 싶은 독점욕.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그녀는 늘 연인에게 최선을 다했다. 공적인 일에는 엄격했으나 모든 것에서 그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작은 불안감이 있었다.
두 사람은 연인이었다. 작은 싸움으로 인해 영원한 이별을 맞이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감정이 아니면 이어져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점이 카시스의 마음을 이따금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을 속마음이었다.
그때 샐리가 눈을 떴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카시스의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면 이따금 그녀가 제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곤 했다.
물론 제 착각이었다. 샐리는 해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당신의 아카데미 생활은 어땠어요?”
“……나의 아카데미 생활?”
의외의 질문에 카시스가 되물었다. 샐리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궁금해요.”
“늘 똑같았어. 수석을 차지해야 하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했지. 남과 함께 모여 사는 기숙사 생활도 곤욕이었고.”
“그래요? 그 그림에서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던걸요.”
그림이라는 말에 카시스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설마, 하는 얼굴로 입을 벌린 그를 향해 샐리가 말했다.
“‘천사의 미소’ 말이에요.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던걸요.”
“……!”
그 순간 카시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마치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일을 그녀가 안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엄청난 비밀을 들킨 것처럼 경악한 얼굴을 한 카시스에게 샐리가 말을 이었다.
“힘들기만 했다면 그런 표정을 지을 리 없잖아요. 즐거운 적도 있었던 거죠?”
카시스는 낭패라는 듯 두 손으로 이마를 짚다가 작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조금은.”
아무리 엄격한 아카데미지만 결국은 동년배의 소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귀족이라는 이름도 잊고 순수하게 그 순간을 즐길 때도 많았다.
네 개의 팀으로 나뉘어 경기한 크리켓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악독하기로 소문난 교수가 지나가는 길에 가짜 뱀을 놓는 장난을 쳤을 때, 하인을 통해 몰래 반입한 음식을 다 같이 먹으며 낄낄거렸을 때.
적어도 에스테반 저택에 있을 때보다는 즐거운 일이 많았다.
“그만큼 이상한 놈들도 많았지만 말이야.”
몇몇 학생들이 부담스러울 만큼 징그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그들은 마치 카시스가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 천사의 미소라는 그림을 그린 녀석도 그중 하나였어. 매일같이 쫓아다니며 모델을 해 달라고 조르더니, 결국은 제멋대로 그런 그림을 그려 버렸지.”
카시스가 낮은 목소리로 이를 갈며 말했다. 샐리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샐리가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나도 당신과 함께 아카데미에 다녔다면 좋았을 텐데요. 분명 아주 즐거웠을 거예요.”
카시스가 그 말에 툭하니 말을 내뱉었다.
“설마. 이 교실에 당신 같은 여자가 있었다면 내가 너무 힘들었을 거야.”
단 일 초도 존 적 없고, 딴 짓도 한 적 없는, 늘 수업에만 몰두했던 소년 카시스는 분명 시선을 빼앗겨 버렸을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눈을 빛내는 소녀를 보지 않을 수가.
그녀가 신경 쓰여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느라 잠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깨달았겠지.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하고.
성인이 된 지금도 이렇게 자신을 흔드는데, 불완전했던 그 시절엔 얼마나 흔들렸을지 상상만 해도 두려울 정도였다.
카시스는 샐리의 앞에 다가갔다. 책상에 앉은 샐리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카시스가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오는 아름다운 얼굴에 샐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내 그녀의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쿵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샐리는 이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천천히 눈을 뜬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아쉬운걸요. 나만 그때의 당신을 모르잖아요.”
“지금의 나를 알잖아. 누구보다 잘.”
그 말에 샐리가 빙그르르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에서 쌉싸름한 가을의 향기가 났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저기요, 카시스.”
“응?”
“우리 결혼할까요?”
“…….”
예상치 못한 말에 카시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그가 말했다.
“왜?”
설마 제 감정이 표가 나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괜찮다고 말할 셈이었다.
결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주 간절한 바람은 아니었다. 절대 자신을 위해서 무리한 선택을 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기다리는 게 신경 쓰이는 거라면 그런 생각하지 마.”
“그런 것 아니에요.”
샐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카시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당혹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녀는 남색 눈동자를 마주 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늦은 밤, 당신을 당신의 집으로 보내는 것이 싫어요.”
“…….”
“아침에 눈을 떠서 당신이 없는 순간도 너무 싫어요. 무엇보다…… 미래의 당신을 온전히 가지고 싶어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내 곁에 두고 싶단 말이에요.”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눈빛은 소중한 보물을 눈앞에 둔 고양이보다도 탐욕스러웠다. 결혼해 주지 않는다고 하면 날카로운 발톱으로 공격할 것처럼 도도하기도 했다.
카시스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샐리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아무리 그녀라도 청혼하는 건 대단히 긴장되는 일이었다.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초조해졌다.
그녀가 살짝 눈꼬리를 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결혼하고 싶은 이유가 너무 제멋대로라 싫어요?”
“설마.”
카시스가 손을 뻗어 붉은 머리카락을 입에 맞추었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기뻐. 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아카데미 때의 소년 시절보다 더, 그녀가 본 어느 순간보다 아름다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