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25/28)

외전4

엘리제 버렛

제국의 수도 외곽에 위치한 감옥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돌을 쌓아 만든 담벼락은 드높았고 그 위에는 무시무시한 쇠창살이 꽂혀 있었다.

몇몇 개의 창살에는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감옥을 탈출하려고 했던 이들의 시체를 매달며 남은 자국이라고 했다.

죄수들을 원활히 감시하기 위해 나무들을 모두 베어 버려 황량하기 그지없는 터에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싸늘했다.

비쩍 마른 얼굴을 한 죄수들의 신음과 고통이 가득한 곳. 그곳의 작은 방 한 칸에 그녀가 있었다.

한때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었던 여인,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이름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한 여인.

엘리제.

그녀가 이 감옥에 들어온 지 5년.

그녀는 처음 감옥에 들어오며 받은 색이 바랜 낡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제대로 관리받지 못한 피부는 거칠어졌고 추위를 견디지 못한 손톱은 갈라져 있었다. 햇빛을 받으면 아름답게 반짝이던 금빛 머리카락도 푸석해졌다.

과거의 아름다움이 많이 사라지긴 했으나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식사 시간이다.”

투박한 목소리와 함께 흉악한 인상의 간수가 방 안에 들어왔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간수는 눈을 크게 뜨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슬쩍 돌려 버렸다.

죄수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데 익숙한 그임에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건 불편했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한때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했던 공작 부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거가 어떻든 이곳에서 그녀는 일개 죄수일 뿐이었다.

뭐랄까. 그것은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보통 이곳에 들어온 이들의 모습은 비슷했다.

절망감과 슬픔, 분노, 혹은 두려움.

그러나 이 감옥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엘리제에게는 그런 감정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쾌쾌하고 작은 방에 갇힌 지 5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늘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를 곧게 펴고 우아한 귀부인처럼 작은 방에 앉아 있었다.

그 이질적인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했다.

‘젠장. 죄수 따위에게 별생각을 다 하는군.’

결국 간수는 욕설을 내뱉으며 황급히 방을 나가 버렸다. 엘리제는 무감정한 얼굴로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음식이 담긴 나무 식판이 놓여 있었다. 식판 위에는 딱딱하게 굳은 빵과 묽은 수프가 들려 있었다.

맛은 없는 주제에 향은 고약했다. 최악이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끔찍한 식사였다. 그럼에도 엘리제는 더러운 나무 스푼을 떠 음식을 입에 넣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엘리제는 내리깐 눈으로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열 발자국도 채 걷지 못하는 작은 방, 한낮에 한 줌의 햇볕이 겨우 들어오는 창, 있는 것이라고는 삐걱거리는 낡은 의자 하나와 짚을 엮어 만든 매트리스뿐이었다.

황금과 꽃으로 꾸며진 방에 살던 그녀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이 끔찍함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하거나 미치는 이들까지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엘리제 자신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이곳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그녀를 거슬리게 하는 것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여인도, 오만한 귀족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사내도, 아무것도.

그것이 엘리제에게 난생처음으로 어떠한 해방감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얼굴에는 그녀답지 않은 평온함이 맴돌고 있었다.

죄수들은 하루에 한 번 감옥 바깥으로 나와 잠시 햇볕을 쐬는 시간이 허락되었다. 엘리제도 독방에서 나와 사람이 없는 한편에 앉아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곧게 허리를 펴고 우아하게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죄수들은 그녀를 힐끗 쳐다볼 뿐 차마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곁은 늘 조용했다.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음침한 영혼은 오랜만에 보는걸. 밤하늘보다 새까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야.”

기묘할 정도로 높은 목소리였다.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엘리제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곱슬머리를 한 여인이었다. 보통보다 흰자가 넓은 눈에 긴 목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신이 길게 그려져 있었다.

빛바랜 죄수복을 입어 비슷비슷해 보이는 여인들 속에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튀었다. 그래서 엘리제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사람에게 저주를 건 마녀. 저주로 같은 마을 청년을 죽인 죄로 곧 죽을 사형수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여인은 흐음, 하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엘리제의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무릎을 꿇어 엘리제의 파란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언니, 아주 재미있는 인생을 살았구나? 전부 다 가짜, 가짜, 가짜네.”

“……!”

그 말에 엘리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여인은 킥, 하고 웃더니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 삶을 살던 사람이 이런 끔찍한 곳에서 진짜 자신을 찾다니. 이것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고약하다고 해야 할지.”

여인은 엘리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언니는 여기가 천국 같은 곳이겠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유를 속박하는 한 뼘도 안 되는 공간이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되는 대로 지껄이는 미친 여자의 말 따위 더 이상 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그녀를 스산하게 노려본 엘리제가 당장 사라지라고 내뱉으려는 순간이었다.

여인은 가는 입술을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잖아, 엘리제 버렛.”

그 이름에 엘리제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버린 그녀의 첫 이름이었다.

* * *

동부 지방의 한 마을. 버렛가는 마을에서 제법 큰 상단을 운영하는 부유한 상인 집안이었다.

바람도 불지 않던 새벽녘. 버렛가에 한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 아주 예뻤다.

진주알같이 뽀얀 얼굴, 유리구슬처럼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 금사로 만든 것 같은 금빛 머리카락.

마치 하늘에 있는 아기 천사가 내려온 것 같은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정말, 정말 예쁜 아가요.”

아기의 아버지인 버렛은 작은 아기를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침대에 누워 있던 버렛 부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산을 감내하고 낳은 것이 후회되지 않을 만큼 어여쁜 아가였다.

버렛 부부는 아기의 이름을 엘리제라고 지었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천사의 이름이었다.

아기는 이름처럼 아름답게 자랐다.

버렛 부부는 매일매일 감탄을 내뱉었다.

“우리 딸이지만 정말 예뻐요.”

버렛가에서 일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만큼 고운 분은 처음 봐요. 아가씨는 분명 엄청난 미인으로 크실 거예요.”

버렛가의 아름다운 아이는 금세 유명해져서 마을에서 엘리제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저기 봐요. 버렛가의 작은 아가씨네요.”

“세상에.”

엘리제가 어머니와 함께 거리를 걸을 때면 모두가 인형처럼 아름다운 어린 소녀를 향해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럴 때면 엘리제는 작은 코를 오만하게 세우며 입꼬리를 올렸다.

엘리제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공주님이라고 생각했다.

일곱 살,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조나단 자작님께서 따님의 놀이 동무를 찾으신다고 하더구나. 엘리제 너도 함께 가지 않겠니?”

어린 엘리제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놀이 동무라.’

엘리제에게도 두 명의 놀이 동무가 있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늘 엘리제가 하고 싶은 놀이를 함께해 주었다. 그들은 늘 엘리제와 노는 것이 너무나 즐거운 듯 웃었다. 그걸 생각하면 놀이 동무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다른 이도 아닌 ‘자작’이었다. 지금까지 엘리제는 귀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로 귀족은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존재가 궁금했다.

그래서 엘리제는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린 딸의 대답에 버렛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착하구나, 내 딸. 그럼 자작님께 갈 준비를 하자꾸나.”

버렛은 크게 기뻐하며 엘리제에게 화려한 드레스와 새 구두를 사 주었다. 엘리제는 기쁜 얼굴로 선물을 받아 들었다.

‘역시 착한 것은 좋아.’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잘 들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기뻐하며 좋은 선물을 사 주셨다. 엘리제는 그래서 착한 아이라는 말이 좋았다.

‘자작님의 앞에서도 착한 아이가 되어야지.’

그럼 분명 엘리제는 자작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공주님이 될 것이다.

* * *

며칠 후 엘리제가 아버지와 함께 길을 나섰다. 조나단 자작의 저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리본이 달린 분홍색 드레스와 반짝이는 새 구두, 금빛 머리카락을 곱게 빗은 엘리제는 사랑스러웠다.

버렛은 자신의 손을 잡고 걷는 어린 딸을 향해 말했다.

“엘리제, 자작가의 아가씨와 놀이 동무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야. 그러니 잘해 내야 한다.”

엘리제는 지금까지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었다. 그저 빙긋이 웃는 것만으로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이 갖는 무게감을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엘리제는 아버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알겠어요.”

해사하게 웃는 딸을 바라보며 버렛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엘리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심란함이 어려 있었다.

조나단 자작은 버렛 상단의 가장 큰 뒷배였다. 버렛은 조나단 자작을 통해 소개받은 다른 귀족들에게 물건을 팔아 큰 이득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조나단 자작이 경쟁 업체의 사장과 자주 만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자작이 그쪽으로 넘어가 버리면 귀한 귀족과의 연줄이 끊기게 되고 상단은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데리고 온 이가 바로 딸 엘리제였다.

엘리제는 사랑스럽고 어여쁜 아이였다. 분명 조나단 자작도, 아가씨도 엘리제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자작의 마음이 다시 자신 쪽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속을 알 리 없는 엘리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작가의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제는 작게 중얼거렸다.

“……별것도 없네.”

자작가의 저택이라 해서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실망스러울 정도로 볼품없었다.

비록 평민이었으나 버렛가는 부유한 가문이었다. 저택은 컸고 잘 가꾸어진 정원과 화려한 장신구들이 가득했다. 그에 비하면 오래된 자작가의 저택은 낡고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그 실망감은 자작 부부를 마주친 순간 극에 달했다.

‘이게 귀족이라고?’

자작은 키도 작고 체구도 왜소했다. 그 옆에 서 있는 부인도 화려하게 꾸미긴 하였으나 절대 미인이라 평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관인 것은 그들의 가운데 서 있던 딸이었다.

넙적한 얼굴에 작은 눈, 머리카락을 묶은 커다란 리본과 레이스 달린 붉은색 드레스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단 듯 형편없는 외모였다.

‘귀족이라더니 별것 없잖아. 오히려 나와 아버지가 더…….’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려던 찰나 였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당당하던 아버지가 그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자작 부부와 딸은 오만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목을 뻣뻣이 들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엘리제의 커다란 눈이 흔들렸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허리를 편 아버지의 얼굴에는 어색할 만큼 과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딸의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버렛은 살랑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의 놀이 상대를 구한다고 하여 딸아이도 함께 왔습니다.”

그 말에 부부의 가운데에 있던 어린 소녀가 눈을 빛냈다. 소녀는 마치 새 장난감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엘리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버렛이 가만히 서 있는 엘리제를 향해 말했다.

“뭐 하니, 엘리제. 아가씨께 인사를 하지 않고.”

“…….”

집을 떠나기 전 몇 번이나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자작 부부와 백작의 딸을 만나면 정중히 인사를 하라고. 아무리 어린 나이의 엘리제라도 예의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때는 귀족들이 헉 소리가 날 만큼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을 때다.

이런 볼품없는 자들에게 허리를 숙이라니.

“엘리제.”

다그치는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엘리제는 입을 열었다.

“싫어요.”

그 말에 버렛의 눈이 커졌다. 자작 부부와 그 딸도 마찬가지였다.

“전 이만 돌아갈래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하녀라도 보듯이 자신을 보는 저들의 시선도 불쾌했고, 어린 제가 느낄 만큼 아첨하는 아버지도 보기 싫었다.

‘아버지는 늘 내편이야.’

아무리 그들이 귀족이라고 해도 자신이 싫다고 하면 그러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아이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엘리제! 버릇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

당황한 얼굴을 한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엘리제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눈빛은 전에 없이 절박하고 초조해 보였다. 엘리제는 저 눈빛을 알고 있었다.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들이 뭔가 큰 실수를 했을 때 보였던 얼굴이었다. 윗사람에게 혼이 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겁을 잔뜩 먹은 얼굴.

‘뭐야, 저런 얼굴.’

엘리제는 처음 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엄청난 거부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어린 딸의 기분을 알 리 없는 버렛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귀족 앞에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엄청난 죄였다.

자작과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물론, 귀족기만죄로 큰 벌을 당할 수도 있다.

“자작님 내외와 아가씨께 어서 잘못했다고 말씀드려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엘리제가 싫다고 말하려던 찰나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엘리제의 작은 머리통을 내리눌렀다.

“……!”

엘리제는 고개를 들려 했으나 아버지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엘리제의 머리 위로 아버지의 비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아직 어려 저지른 잘못이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 말에 쯧, 하고 혀를 찬 자작이 오만하게 말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교육이 많이 필요해 보이는군.”

“그러게요.”

자작 부인도 한심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둘 사이에 있던 어린 소녀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뭘 몰라서 그런 거잖아요. 전 이 애가 마음에 들어요.”

“……!”

그 순간 엘리제는 참을 수 없는 경멸감이 밀려들어왔다. 그것은 더러운 오물이 손에 닿았을 때보다 혐오스럽고 끔찍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자신은 이 세상 최고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이 아니었다. 그저 자작 부부와 그 딸 앞에 짓밟힌 벌레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날 작지만 완벽했던 엘리제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 * *

그날 이후 엘리제는 더 이상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를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이 사람은 약하고 비굴해.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었다. 어린 딸의 변화를 눈치챈 버렛은 그날의 일을 후회했지만 늦어버렸다.

그가 아무리 자상하게 말을 걸고 반짝이는 선물을 사 주어도 엘리제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관심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엘리제는 그 사건 이후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온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은 모래알보다 작은 존재였음을.

이 커다란 세상에는 계급이란 것이 존재했고 가장 고귀한 것은 황족과 귀족. 평민인 엘리제는 그 아래를 떠받치는 벌레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예쁜 드레스도, 아름다운 외모도 평민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귀족이 되어야 해.’

그러나 귀족은 태생부터 타고나야 했다. 귀족과 결혼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직 어린 엘리제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엘리제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다.

한 여인이 버렛가를 찾아왔다. 매서운 인상의 여인은 버렛 부부에게 말했다.

“프로이텐 백작 부부께서 이 댁의 딸을 양녀로 삼길 원하십니다.”

“……!”

버렛 부부가 그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멀쩡히 잘 키우고 있는 딸을 양녀로 달라니 황당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냥 데리고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즘 버렛 상단은 귀족 손님을 이어 주는 이가 없어 힘들다지요?”

몇 년 전 조나단 자작과의 연이 끊어져 버린 후 상단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빚이 쌓이고 쌓여 남은 것은 이 저택뿐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귀족과 연을 이어야 했지만 작은 도시의 장사치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인이 말했다.

“프로이텐 백작님께서 상단의 황금 줄이 되어 주실 겁니다.”

그 말에 버렛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프로이텐 백작가는 동부 지역의 꽤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가세가 몰락한 지 오래라 아주 부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귀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가 마음먹고 도와준다면 상단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버렛은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요 몇 년간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도 없었지만 소중한 딸이다. 아무리 이름 높은 귀족이라도 ‘네네’ 하며 딸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이들이 어린 딸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 마음을 읽은 듯 여인이 이어 말했다.

“우려하실 것은 없습니다. 백작 부부께서는 따님을 교양과 예법을 제대로 배운 아름다운 레이디로 키워 주실 테니까요.”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은 버렛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자식이 없는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는 종종 아름다운 용모의 평민을 양녀로 데려가는 일이 있었다. 아들이 아닌 딸을 데리고 가는 이유는 명백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족가의 영애로 키운 후 결혼이란 명목으로 팔아먹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돈을 내는 이들에게.

버렛은 끔찍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문을 연 버렛은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문 앞에는 이제 막 열두 살이 된 아름다운 딸이 서 있었다.

엘리제는 빤히 버렛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 것은 아주 오랜만이라 버렛은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방금 한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그렇다면 걱정 말라고, 아버지는 절대 너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정하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나를 보내 주세요.”

“……뭐?!”

“나는 프로이텐 백작가에 가고 싶어요.”

그 말에 버렛과 아내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버렛이 소리쳤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놀러가는 것이 아니야. 양녀가 된다는 건 이곳을 떠나 백작 부부의 딸이 된다는 거다. 앞으로 이 버렛가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거라고!”

그 순간 엘리제가 웃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천사 같은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니까 가고 싶다는 거예요.”

“……!”

버렛 부부는 무거운 망치에라도 맞은 것 같은 얼굴로 어린 딸을 바라보았다.

엘리제는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버렛이란 성이 싫어요. 평생을 벌레처럼 살아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나비처럼 살 거예요.”

버렛 부부는 그 모습에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들은 엘리제의 부모였다. 조금씩은 느끼고 있었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딸에게 보통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음을.

딸은 천사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곤 했으나, 그것은 단순히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그들을 껴안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거나, 그들이 보고 싶다며 우는 일이 없었다.

아기 고양이를 보고 귀엽다고 말한 적도,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며 시무룩해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질적이고 기괴한 모습이 지금 가장 크게 와 닿았다.

“그러니 나를 프로이텐으로 보내 주실 거죠?”

미소 지은 엘리제의 새파란 눈동자는 섬뜩할 만큼 맑고 선명했다. 그 눈빛에는 어떠한 처연함이나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태어나고 자랐던 이 버렛가와 부모와 헤어지는 것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부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며칠의 고민 끝에 부부는 엘리제를 프로이텐 가문에 양녀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허망한 눈빛을 한 부인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우리가 더 이상 그 애에게 뭘 해 줄 수 있죠?”

* * *

며칠 후 프로이텐 백작 가문의 마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엘리제가 챙긴 짐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선물해 주었던 수많은 물건을 제 방에 그대로 두고 갔다. 그 모습이 마치 모든 것을 버리고 가겠다는 것 같아 부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며칠 새 홀쭉해진 부부의 얼굴과는 달리 엘리제의 얼굴은 밝았다. 두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고 파란 눈동자는 반짝였다.

오랜만에 보는 설레어하는 딸의 모습에 부부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럼에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다. 부부는 눈물이 어린 얼굴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백작님의 말씀 잘 듣고 건강히 잘 지내렴. 밥도 잘 챙겨 먹고, 잠도 잘 자고…….”

결국 버렛 부인은 딸의 작은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언제라도 힘들면 다시 이곳으로 오렴. 엄마 아빠는 늘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엘리제는 빙긋이 웃었다.

“안녕히 계세요.”

“……!”

해맑은 인사에 부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름다운 딸은 이제 다시는 이곳에 찾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

평생 버렛가의 이름을 잊고 살아갈 테지.

참담함과 비참함, 슬픔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마차는 저 멀리 떠나기 시작했다.

“프로이텐가에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목소리에 엘리제는 마차에서 내렸다.

엘리제는 걸음을 내딛으며 저택을 눈에 담았다. 일전에 보았던 조나단 자작가의 저택보다는 크고 화려해서 더 귀족다웠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들어가십시오.”

엘리제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한 방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40대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앉아 있었다. 심드렁한 얼굴을 한 백작과 오만하게 눈을 내리깐 백작 부인이었다.

엘리제는 과거의 사건에 감사했다. 그때의 일 덕분에 엘리제는 그들을 섣불리 평가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들은 프로이텐 백작 부부.

고귀한 귀족이다.

머리를 숙일 만한 가치가 있는 이들이었다.

엘리제는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엘리제라고 합니다.”

부부는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여 그 인사를 받았다. 백작 부인이 힐끗 어린 소녀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과연. 소문난 미모라더니 그 말대로구나. 아주 만족스러워.”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해사하게 웃었다. 보는 이의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어여쁜 미소였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눈썹을 찡그리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부족한 것투성이야.”

“…….”

“걷는 것도, 인사하는 것도 영 엉망이더구나. 방금도 그래. 귀족 영애는 그리 풀어진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니란다.”

엘리제는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지그시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눈을 마주친 백작 부인이 말을 내뱉었다.

“끈기는 있어 보이는구나.”

백작 부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너는 앞으로 우리의 딸이 될 거야. 프로이텐 백작가의 외동딸이 되는 거지. 우리는 네게 많은 것을 해 줄 거다. 예법, 화술, 춤. 귀족 영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누구보다 아름답게 가꾸어 주마.”

열두 살의 엘리제는 그들의 의도를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의 말이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는 것은 알았다.

엘리제는 청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른스러운 대답에 백작 부인은 흡족한 듯 웃었다.

그렇게 엘리제 버렛은 엘리제 프로이텐 백작 영애가 되었다.

* * *

프로이텐 백작가의 저택. 갓 스무 살이 된 젊은 하녀 한 명이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이름은 마사. 며칠 전 프로이텐 백작가에 들어온 신참 하녀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엘리제 아가씨, 마님께서 함께 차를 마시자고 하셨습니다.”

잠시 후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 말에 크게 눈을 뜬 마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 들어선 마사는 멍하니 서서 방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백작가의 하나뿐인 영애.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 최고급 사파이어보다 선명한 새파란 눈동자, 이제 막 피어나는 꽃 같은 싱그러움이 더해져 그녀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백작가로 온 첫날, 이 아름다운 소녀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러나 마사의 그런 눈빛이 익숙한 듯 엘리제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머리와 옷매무새를 봐주렴.”

그 말에 마사는 화들짝 놀랐다. 본디 아가씨를 꾸미는 일은 직속 하녀가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직속 하녀가 일을 그만두었지.’

엘리제의 직속 하녀는 며칠을 시름시름 앓는가 싶더니 결국 저택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두어 버린 터라 아직 새 직속 하녀가 정해지질 않았다. 오늘 오후까진 이 아름다운 아가씨를 모실 하녀가 정해질 것이다.

주인 아가씨를 모시는 일은 하녀들 사이에서 무척 인기가 좋아, 저택 내에서 어느 정도 힘을 가진 하녀가 하기 마련이었다.

마사 같이 경험도 없고 세력도 없는 하녀는 꿈도 못 꿀 자리였다.

“단장을 할 줄 모르면 다른 하녀를 불러와.”

엘리제의 말에 마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해 드릴게요.”

쓸데없는 겸손으로 아름다운 아가씨를 꾸며 주는 기회를 놓칠 만큼 마사는 둔하지 않았다.

황급히 엘리제의 등 뒤에 선 마사는 감탄을 내뱉었다.

‘세상에. 진짜 금실 같아.’

손에 닿은 금빛 머리카락의 감촉이 비단보다 부드러웠다. 머리카락을 빗을 때마다 은은히 풍겨 나오는 비누 향도 좋았다.

“다 됐습니다.”

마사의 목소리에 엘리제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곱게 빗긴 금빛 머리카락과 주름 하나하나까지 모양을 잡은 드레스는 완벽했다.

엘리제가 만족스러운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손재주가 꽤 좋구나.”

그 말에 마사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사는 흥분되는 마음을 겨우 다독이며 말했다.

“그럼 가시지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디뎠다. 허리를 곧게 펴고 걷는 모습조차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상상하던 귀족 아가씨를 그대로 그려 넣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마사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보다가 은근슬쩍 그녀의 곁을 따라갔다. 다행히 엘리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사에게 계속 시중을 맡길 모양이었다.

생각지 못한 횡재에 마사는 기뻐하며 엘리제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에는 프로이텐 백작 부인이 앉아 있었다. 백작 부인은 얼굴이 익지 않은 하녀를 힐끗 보더니 이내 엘리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늘 그래 왔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엘리제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냉정한 평가였다.

눈앞의 소녀가 프로이텐 가문에 어울리나, 어울리지 않느냐 하는.

잠시 후 백작 부인은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앉으렴, 엘리제.”

합격이라는 뜻이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머리카락 색을 빼고는 두 사람의 외양은 닮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얼핏 한 모녀처럼 보였다. 그것은 두 사람의 눈빛에 서린 일그러진 욕망 때문일 것이다.

백작 부인은 찻잔을 손에 들며 말했다.

“드디어 며칠 후면 너의 데뷔탕트 구나.”

“네.”

“그곳에서 누구보다 가장 완벽한 모습이어야 한다.”

그 말에 엘리제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 지역의 귀족 영애들이 모이는 데뷔탕트에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 외모, 예법, 화술, 성품, 모든 부분에 걸친 엄격한 심사를 통해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을 뽑는 것이다.

‘아르케’라고 불리는 이것에 뽑히는 것은 여인들에게 굉장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사교계를 이끌어갈 최고의 숙녀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아르케에 뽑힌 여인은 최고의 신붓감으로 대우받았다. 그것이 백작 부인이 지금껏 엘리제를 누구와도 약혼시키지 않고 기다린 이유였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지.’

백작 부인은 새삼스럽게 지난 5년의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프로이텐 백작가의 자금 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리를 하여 엘리제에게 많은 것을 제공했다.

예법, 화술, 교양, 춤, 각 분야에서 유명한 선생을 찾아 붙여 주었고, 최고급 화장품으로 매일 엘리제의 외모를 관리해 주었다.

다행히 엘리제는 그들이 투자할 가치가 있는 아이였다.

원래도 아름다운 아이였지만, 제대로 관리를 받은 엘리제의 미모와 우아함은 날로 대단해졌다. 백작과 백작 부인마저 이따금 그녀를 향해 감탄을 내뱉을 정도로.

내일 엘리제가 아르케가 되면 본격적으로 결혼 시장에 그녀를 내놓을 것이다. 수많은 가문이 그녀를 탐낼 테고, 백작 부인은 고르고 골라 가문에 가장 많은 것을 주는 이에게 엘리제를 시집보낼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프로이텐 가문의 가세가 단번에 올라가는 것도 가능했다. 백작 부인은 희열에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기대하고 있으마.”

그 미소는 결코 딸에게 보낼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었다. 원하는 성과를 기대하는 얼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섬세하고 여린 보통의 소녀였다면 두렵거나 슬퍼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제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백작 부인의 저런 면이 마음에 들었다.

가식이 없고 목표가 확고했다. 자신과의 관계를 거추장스럽게 포장하지도 않았다.

‘날 교육시키는 데 지독할 만큼 엄격하긴 하지만 그건 내게도 나쁜 것은 아니니까.’

최상의 교육만큼 늘 엄격한 평가가 이어졌다. 그 기대에 맞추기 위해 엘리제는 몸이 아픈 날도 쉬지 않고 수업에 임했다.

고되기는 했으나 견디지 못할 만큼 힘겨운 것은 아니었다.

백작 부인과 그녀의 목표가 어느 정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아르케가 되어 훌륭한 귀족 가문으로 시집을 가면 일평생 고귀한 귀족으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엘리제가 그토록 고대하던 삶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 * *

며칠 후, 데뷔탕트가 열렸다. 늘 그래 왔듯 동부의 가장 큰 귀족인 렉스터 후작 부인의 저택에 연회장이 마련되었다.

올해 성년이 된 여인들이 연회장에 속속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은 수십 번을 연습한 미소를 짓고, 귀부인처럼 우아하게 걸었다. 그럼에도 아직 앳된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는 여인들은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한 여인이 등장했다.

프로이텐 백작가의 영애, 엘리제였다.

“세상에.”

많은 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미 이 지역 귀족들 사이에 엘리제는 유명 인사였다. 프로이텐 백작 부부가 먼 친척에게서 거두었다는 양녀.

누군가는 거짓말이라며 평민의 딸을 사 온 것이 분명하다고 했지만 그 말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어떤 명화 속의 귀부인도 그녀처럼 아름답진 못할 거예요.”

누군가 내뱉은 찬사처럼 엘리제는 이상적인 귀족 영애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색이 연한 하늘빛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보다 아름다웠다.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걷는 자태는 누구보다 우아했다.

물론 모든 시선이 호의적이고 감탄이 섞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함께 데뷔탕트를 치루는 영애들은 더더욱 그랬다.

그녀들의 시선에는 분노와 질투, 원망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엘리제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즐겁네.’

그들의 눈빛이 매서울수록 그녀는 즐거웠다. 그것은 그녀들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증거니까.

다른 이들도 아닌 그 고귀한 ‘귀족’들이 말이다.

“엘리제, 오늘 정말 아름답네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제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화사한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여인은 올리비아 샤론. 샤론 백작가의 둘째딸이었다.

“감사합니다, 샤론 영애.”

“올리비아라고 불러주세요, 엘리제. 나는 엘리제와 편하게 이름을 부르고 싶다고 했잖아요.”

올리비아가 해사하게 웃으며 엘리제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엘리제는 그 말에 눈썹을 내리며 곤란한 듯 웃었다.

“이제 데뷔탕트를 치루는 귀족 영애의 이름을 어떻게 함부로 부르겠어요. 그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그 말에 올리비아는 잔뜩 아쉬운 얼굴을 했다.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한 모양이에요. 엘리제에게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조금 더 노력해야겠네요.”

“…….”

엘리제는 조용히 웃음으로 대답했다. 평소 같았으면 유려하게 대화를 이어갔겠지만 올리비아의 앞에서는 이상하게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제의 마음을 모르는 올리비아는 맑은 눈으로 다른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데뷔탕트는 과연 다르네요. 다들 평소보다 아름다워요. 라넷 영애의 흰 드레스는 하얀 백조처럼 우아하고, 세실리아 영애의 새까만 머리카락도 아주 멋져요.”

어느새 수많은 여인들이 올리비아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올리비아의 칭찬에 여인들은 수줍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도 서로를 향해 적의를 불태우던 그들의 눈빛에는 순수한 호의만이 담겨 있었다.

늘 그랬다. 그녀가 등장하면 도도하고 오만한 귀족 영애들이 마치 순한 양처럼 변해서는 미소 지었다. 엘리제는 몽글몽글해진 이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거슬리는 여자긴 하지만 그뿐이야.’

올리비아는 미인이었고 꽤 우아한 몸가짐을 하긴 했으나 엘리제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엘리제는 가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올해의 아르케는 나야.’

그리고 그것은 그녀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 연회장에 있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엘리제의 옆에 서 있던 프로이텐 백작 부인은 누구보다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연회를 즐겼다.

시간이 흘러 연회의 막바지가 다가왔다. 연회의 주최자인 렉스터 후작 부인이 나타났다.

“영애들이 성년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부디 오늘 보여 준 모습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교계를 이끌어 주길 바랍니다.”

한번 말을 멈춘 후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연회를 마치기 전, 올해의 아르케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귀족 영애들이 긴장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최고의 숙녀로 상징되는 아르케. 그것은 동부의 귀족 영애라면 한번쯤 꿈꿔 보는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엘리제도, 프로이텐 백작 부인도 눈을 빛내며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후작 부인의 입이 열렸다.

“올해의 아르케는 바로…….”

음악 소리도 멈춘 고요한 공간에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샤론 백작가의 영애, 올리비아입니다.”

그 말에 많은 이들의 얼굴에 수많은 감정이 드러났다. 놀란 이도 있고, 기뻐하는 있고, 아쉬워하는 이도 있었다.

정작 이름이 호명된 올리비아는 생각지도 못한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올리비아! 축하해요!”

누군가의 축하 인사에 정신을 차린 올리비아의 얼굴이 수줍게 달아올랐다. 이내 수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여인들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던 올리비아는 엘리제와 눈을 마주치자 민망한 듯 눈썹을 내렸다.

“부끄럽네요. 나보다 엘리제가 훨씬 우아하고 아름다운 숙녀인데 말이에요.”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마치 엘리제의 이름을 빼앗은 것처럼 미안해했다.

엘리제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빙긋이 웃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입을 열 수 없는 이유가 확실했다. 입을 여는 순간 험악한 욕설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엘리제의 가녀린 몸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감정을 표내지 않고 억누르는 것만으로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렉스터 후작 부인! 이 결과에 이의를 재기합니다.”

엘리제의 옆에 서 있던 프로이텐 백작 부인이었다. 형형한 그녀의 눈빛에는 이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감정이 여실히 담겨 있었다.

렉스터 후작 부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케는 수많은 가문이 탐내는 이름이었다. 탐탁지 않은 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나타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연회의 주최자는 더더욱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평가에 임해야 했다.

“무엇이죠?”

“샤론 영애가 아르케로 임명된 합당한 이유를 들려주십시오!”

“기본에 충실하게 평가했을 뿐입니다. 샤론 영애는 예법, 화술, 외양 모든 것이 훌륭합니다.”

프로이텐 백작 부인은 그 말에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모든 부분에 있어 나의 딸이 더 훌륭하지 않습니까?!”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진실이기도 했다. 올리비아는 훌륭한 숙녀였지만 엘리제와 비교하면 부족했다. 후작 부인도 크게 부정하지는 않았다.

“프로이텐 영애도 물론 훌륭한 숙녀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한 가지 없는 것이 있더군요.”

후작 부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바로 성품입니다.”

“……뭐라고요?!”

후작 부인은 시선을 돌려 백작 부인의 옆에 서 있는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레이디에게는 많은 것들이 요구되지요. 많은 이를 아우르는 성품 또한 매우 중요함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텐 영애에게는 조금도 그것이 보이지 않더군요.”

아름다운 숙녀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얼굴은 무표정했다. 속상함도 당황스러움도 조금도 내비치지 않은 얼굴은 어딘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아르케가 되지 못한 이유였다.

후작 부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스한 심성을 가지지 않은 숙녀는 아르케가 될 수 없습니다.”

* * *

“심성은 무슨! 귀족 영애에게 그런 것 따위가 언제부터 중요했다고!”

프로이텐 백작 부인은 평소의 점잖은 모습도 잊고 소리쳤다. 그녀의 앞에 선 하녀들은 손가락도 까닥하지 못하고 바짝 몸을 웅크렸다.

두려운 얼굴로 어떻게 마님을 달래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 사이에서 마사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엘리제 아가씨는 괜찮으실까?’

연회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작 부인은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저택의 하녀들이 모두 불려 나와 그녀의 분노를 받는 사이 엘리제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속상한 건 아가씨일 텐데.’

하녀들도 오늘 연회장에서 있었던 소식을 들었다. 마사도 그 소식을 듣고 분통이 터졌다.

많은 귀족 아가씨를 본 것은 아니지만 엘리제는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가 최고의 숙녀가 되지 못하다니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결국 마사는 용기를 내어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백작 부인은 하녀 한 명이 빠져 나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방을 나온 마사는 황급히 2층에 있는 아가씨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슬프게 울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아가씨, 하녀 마사입니다. 괜찮으신지요.”

노크를 해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가씨.”

초조한 목소리로 여러 번 노크를 하자 방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들어와.”

평소와는 달리 축 처진 목소리였다. 마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마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늘 깨끗이 정돈되어 있던 엘리제의 방은 엉망이었다. 침대는 헝클어져 있고, 장신구들은 모두 깨져 나뒹굴었다.

방 한가운데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엘리제를 향해 마사는 ‘아, 어’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이내 마사가 황급히 문을 닫았다. 이런 광경을 누가 보고 괜한 소문이라도 내면 큰일이었다.

“제가 금방 치울게요.”

마사는 몸을 움직여 난장판이 되어 있는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조각난 유리 조각을 치우며 마사가 주절주절 말했다.

“마음이 상하실 만해요. 다른 아가씨가 아르케가 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요.”

“…….”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아 마사는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아가씨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하녀들과 떠들어 대었던 말들이 생각났다.

“샤론가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 댁의 아가씨가 수도의 힘 있는 후작가와 약혼이 진행 중이래요. 아직 유명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분명 그 때문에 그분이 아르케로 뽑힌 거예요.”

생각지 못한 말에 무표정했던 엘리제의 눈빛에 작은 광채가 돌아왔다.

성품이니 뭐니 하는 가식적인 것보다 훨씬 그럴듯한 이유였다. 고작 한마디 말일 뿐인데 엘리제의 분노가 조금 사그라졌다.

엘리제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얼마 전 자신의 시중을 들어 준 것이 그녀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그 말에 마사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사라고 합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여신에게 선택이라도 받은 것처럼 감격에 차 있었다. 그 점도 꽤 마음에 들었다.

“마사.”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마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아가씨.”

“내 직속 하녀, 왜 일을 그만뒀는지 아니?”

갑작스러운 물음에 마사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병환이 생겨 떠났다고…….”

“병이 아니야.”

엘리제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내게 맞아서 떠난 거지.”

“……!”

“나라고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잖아. 마음에 안 드는 이들도 있고, 짜증이 날 때도 있지. 그런데 아름다운 백작 영애는 섣불리 화를 내면 안 되잖니.”

엘리제의 새파란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띠고 마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어쩔 수 있니. 누군가에게 그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그런데 그토록 절절하게 나를 모신다고 하더니만 결국 도망치듯 저택을 떠나 버리더구나.”

마사는 그 말이 쉽게 이해가지 않아 멍하니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때? 너는 나의 분노를 받아 줄 수 있겠니?”

“……저, 저는…….”

마사의 본능이 소리쳤다.

도망쳐. 도망쳐야 해.

아무리 모시는 저택의 아가씨라고 해도 이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것들이 마사를 몰아 붙였다.

저 아름다운 아가씨를 곁에서 모실 수 있다는 기쁨, 고귀한 자에게 인정받았다는 뿌듯함.

결국 마사는 정신을 현혹당한 사람처럼 엘리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엘리제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엘리제는 두 눈을 휘며 해사하게 웃었다.

마치 사람을 현혹하는 악마처럼 아름답게.

마사는 상의를 살짝 내려 등을 내밀었다. 이내 매끈한 등 위로 엘리제의 손톱이 파고들었다.

“……!”

생경한 아픔에 마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손톱은 마치 장미 가시처럼 날카롭고 매서웠다.

손톱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실 같은 자국이 남았다. 상처에서는 가는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수백 번의 상처를 내고 나서야 엘리제는 손을 멈추었다. 엘리제는 마사의 등을 바라보았다.

핏방울이 맺힌 붉은 상처가 가득한 등. 두려움과 아픔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으나 단 한 번도 피하지 않았다.

그 점이 엘리제를 흡족하게 했다.

“마사.”

그 목소리에 마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나를 봐.”

마사는 천천히 뒤돌아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살짝 어린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실려 있었지만, 선망의 빛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변덕스럽게 선택한 하녀였지만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이 계집을 꽤 오래 데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엘리제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널 내 직속 하녀로 삼을 거야.”

“네, 네.”

엉망이 된 얼굴로 마사가 기쁜 듯 대답했다. 엘리제는 스산하게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네게 첫 임무를 줄게. 샤론가에 아는 하녀가 있다 했지? 그 하녀에게 돈을 쥐여 주고 일을 하나 맡기렴.”

“무슨 일을 맡기면 될까요?”

“올리비아의 구두 안에 독이 묻은 유리 조각을 하나 넣으라고 해. 발을 다치면 당분간 사교계에 나오지 못할 테지.”

아르케의 이름이 잊힐 때야 그녀는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마사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내리깐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동부 지방에서 프로이텐 백작가의 이름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뿐이었다. 더 이상 명망도, 위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케라는 이름이 필요한 것이었는데…….’

아르케라는 이름이 없는 그녀는 별 볼 일 없는 백작가의 영애일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위세 높은 귀족 가문에서 청혼을 해 오진 않을 것이다. 그저 그런 가문의 형편없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

그러나 엘리제는 그런 귀족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았다.

오만한 귀족들의 위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싶다. 귀족 중의 귀족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쭙잖은 이름으로는 안 됐다.

보다 강대하고 위대한 이름이어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엘리제는 눈썹을 찡그렸다.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은 그녀의 편이었던 것일까. 다시 한번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은빛 머리카락의 남자는 우아한 몸짓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프로이텐 영애. 백작 부부께 피아노 수업을 부탁받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에스테반이라고 합니다.”

엘리제의 파란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이 났다.

에스테반.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고 우아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가진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아침 햇빛보다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엘리제 프로이텐이라고 합니다.”

프로이텐이라는 이름은 이제 지겹고 초라하기만 했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이름을 가질 생각이었다.

* * *

돌로 만든 감독 앞에는 초라한 몰골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마사였다.

마사의 모습은 처참했다. 교도소에서의 고된 복역으로 등은 굽고, 온몸과 얼굴에는 끔찍한 화상까지 입었다. 교도소에서 난 불을 끄다 입은 화상이었다.

끔찍한 상처의 대가로 마사는 처음 받았던 형량보다 일찍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마사는 마음 깊이 이 행운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 덕에 이렇게 그분을 모시러 나올 수 있었으니까.

끼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온 여인을 보는 순간 마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사는 오래도록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불렀다.

“마님!”

엘리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세월의 풍파는 잔인했다. 그토록 아름답고 싱그러웠던 미모는 사라지고 어딘가 오싹한 분위기의 피폐한 중년 여인만 남았다.

그럼에도 마사의 눈빛은 과거와 같이 황홀했다. 그녀의 눈에 엘리제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걸음걸이도 우아했고, 새파란 눈동자의 광채는 선명했다.

“그것은 가지고 왔니?”

엘리제의 첫 말은 그뿐이었다. 마사의 일그러진 얼굴에 대한 물음도, 짧은 안부의 인사도 없었다. 그러나 마사는 그것이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사는 보물처럼 껴안고 있던 것을 꺼냈다.

칠흑 같은 새까만 드레스는 바로 20년도 더 전에 카모라가 만들어 준 드레스였다.

엘리제는 내리깐 눈으로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긴 세월이 흘러 조금 낡기는 했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금 유행하는 드레스의 디자인은 알지 못하지만 이런 고풍스러움은 세월을 타지 않을 것이다.

엘리제는 흡족한 눈빛으로 드레스를 매만졌다.

“마님,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마사의 말에 엘리제의 시선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제국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교도소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푸르른 나무와 아름다운 꽃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엘리제의 눈빛에는 조금의 감탄도 스며들어 있지 않았다.

엘리제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칼리도 왕국으로 가자.”

칼리도라는 말에 마사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였다.

그곳은 차갑고 시린 겨울의 나라. 특히나 칼리도의 왕은 무척이나 잔인하고 포악하여 매일같이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런 곳을 왜…….”

중얼거리는 마사의 목소리에 엘리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10년 전, 엘리제 버렛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던 여인은 말했다.

—이곳을 나가게 되면 언니는 한 번 더 운명을 선택할 기회를 얻을 거야. 이 제국을 선택하면 언니는 엘리제로 살 수 있어. 화려하진 않겠지만 평온하겠지.

여인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을 선택하면 언니는 다시 엘리제라는 이름을 잊게 될 거야. 대신 아주 고귀한 이름을 가지게 돼. 어둠보다 새까만 다이아몬드 왕관을 쓰고…… 갈기갈기 찢겨 처참하게 죽을 거야.

그 말에 엘리제는 피식 웃었었다.

—가장 고귀한 이름인가.

엘리제는 그 예언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검은 다이아몬드가 상징하는 곳은 칼리도 왕국. 왕관이 상징하는 것은 희대의 폭군이라고 하는 미친 왕을 지칭하는 것일 터였다.

‘그따위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이 제국에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이제 이 아름다운 곳에 조금의 애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자.”

빛을 등진 엘리제가 어둠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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