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테오도라 프란츠 & 라엘 란슬롯
테오도라 황녀가 제1황위계승자로 임명된 후 10년 후의 일이었다. 황제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레오나르도 프란츠 3세는 파격적인 말을 내뱉는다.
“정말이지 이 따위 자리는 이제 지긋지긋해. 나도 이제 좀 편하게 쉬고 싶다고.”
물론 그가 갑자기 미쳐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테오도라 황녀는 그쯤 제1황위계승자로서의 기반을 탄탄히 다진 상태였다. 지난 10년간 보여 준 능력으로 여인이 어찌 황제가 되느냐는 불만들도 사라진 후였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십시오. 제가 아버님의 뒤를 이어 이 제국을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제국력 577년, 테오도라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황좌에 오르게 되었다. 그녀의 나이 마흔이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황제이며 성군으로 손꼽히는 테오도라 프란츠 1세, 그리고 그녀가 사랑한 남편 라엘 란슬롯에 관한 기록이다.
* * *
테오도라는 모시는 이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부지런한 황제였다.
테오도라는 동이 트기도 전에 눈을 떴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그녀의 곁에서 잠들어 있던 라엘이 졸린 눈을 힘겹게 떴다.
“벌써 아침인가요?”
“아직 새벽입니다. 더 자도록 해요.”
그러나 테오도라의 다정한 말에도 라엘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이 남아 있는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가는 하늘빛 머리카락이 살랑대는 새하얀 얼굴은 무척이나 고왔다.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까지 어우러진 모습은 마치 새벽의 요정 같이 아름다웠다.
그는 눈썹을 내리며 부끄러운 듯 말했다.
“오늘도 폐하보다 늦게 일어나 버렸네요.”
그 말에 테오도라는 웃었다.
“나와 같이 일어날 필요는 없다고 했잖습니까.”
“저는 폐하의 남편인걸요. 그럴 수는 없지요. 세숫물을 준비시키도록 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라엘은 팔을 뻗어 천장에 길게 늘어진 종을 울렸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방 밖의 시종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방에 들어선 시종들은 따스한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라엘의 눈빛에 시종들은 대야와 수건만 침대맡에 두고 방을 나갔다.
라엘은 능숙한 손길로 따스한 물에 수건을 넣어 꾹 짰다. 적당한 물기와 온기를 머금은 수건을 가지고 온 그는 테오도라의 얼굴을 세심하게 닦아 주기 시작했다.
테오도라는 얌전히 앉아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6개월 전, 그녀가 황제에 즉위한 후에야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무려 20년 이상의 약혼 기간을 거쳐 하게 된 결혼이었다.
부부가 된 이후로 매일 아침 라엘은 손수 테오도라의 얼굴을 씻겨 주었다. 이런 일까지 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테오도라에게 라엘은 조용히 말했다.
—폐하는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세요. 저는 폐하의 남편이자 군신이고요. 제가 살펴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에요.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제가 결심한 일에는 절대 물러섬이 없는 라엘 이었기에 테오도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좀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지.’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받아 온 시중이건만, 그가 해 주는 느낌은 또 달랐다.
이마부터 코끝, 입술까지 이어지는 그 손길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마치 아기가 된 기분이랄까. 결국 테오도라는 귀 끝이 조금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아침식사를 끝낸 후, 황의를 입는 것도 라엘이 거들어 주었다.
그는 테오도라의 어깨 위로 황금 사자의 문양이 위엄 있게 수놓아진 망토를 걸쳐 주었다. 테오도라는 브로치로 망토를 고정해 주는 라엘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라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요.”
그 말에 라엘은 부끄러운 과거를 들킨 듯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때는 제가 많이 작았죠.”
그 말에 테오도라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가슴께를 톡톡 쳤다.
“여기까지 왔어요, 키가. 그런데 지금은…….”
테오도라는 고개를 올려 다시 라엘과 시선을 마주쳤다. 어느새 그는 그녀가 조금 고개를 올려야 할 정도로 훤칠한 사내가 되었다.
“많이 컸군요.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는데.”
“아주 열심히 노력했으니까요.”
라엘은 물처럼 우유를 마시고, 치즈와 고기가 역할 때까지 먹었다는 일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다 됐습니다.”
망토를 완벽하게 정리한 라엘이 내리깐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황금실로 수놓아진 진남색 드레스와 망토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절제된 우아함이 있었고, 황실의 순혈을 의미하는 진한 금빛의 눈동자는 위엄이 넘쳐흘렀다.
밤하늘과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 위로 반짝이는 황금의 왕관은 눈이 부시도록 빛이 났다.
제국 최초로 황제가 된 여인. 그녀가 황제가 된 지는 이제 고작 6개월이었지만 많은 이들은 그녀가 명실공히 제국의 역사 속에 남을 성군이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라엘은 이따금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새로 맞춘 의복이 정말 잘 어울려요. 아주 멋집니다.”
소년 같은 얼굴로 내뱉는 순수한 감탄의 말에 테오도라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부터 질릴 정도로 듣는 경탄의 말이었건만 그가 저런 말을 할 때면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 올라가고 아이처럼 으스대고 싶어졌다.
테오도라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요. 오늘은 꽤나 까다로운 이들을 상대해야 하니까요. 그들의 눈에도 그리 보이면 좋을 텐데요.”
오늘은 그녀가 긴급하게 주최한 귀족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제국을 떠받드는 주요 가문의 귀족들이 모두 모였고, 그들은 하나같이 녹록치 않은 이들이었다.
라엘이 눈썹을 내리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되십니까?”
그 말에 테오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요.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하늘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런 걱정스러운 표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그들의 황제예요. 이번에도 원하는 것을 모두 받아 낼 겁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누구라도 그 말을 믿게 만들 것 같았다.
라엘은 멍하니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그의 이마 위로 입을 맞추었다.
눈을 감은 라엘의 풍성한 속눈썹이 작게 떨렸다. 처음 그녀와 키스했던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누군가 심장을 콩콩콩 두들기는 것 같은 기분 좋은 떨림.
천천히 눈을 뜬 라엘은 금빛 눈동자에 테오도라를 담으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황제 폐하.”
테오도라는 바람처럼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 * *
회의장에는 제국의 수많은 귀족이 모여 있었다. 아직 회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회의장은 무척 소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영지를 가진 영주들만 모아 회의를 연 것일까요.”
오늘의 귀족 회의는 정기적인 자리가 아니라 황제가 긴급하게 소집한 회의였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들을 불러 모은 것인지 많은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서 계시면 좋았을 텐데요. 저하라면 확실한 답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한 귀족이 혀를 쯧쯧 차며 아쉬운 얼굴을 했다.
늘 귀족과 황제의 중간에 서서 교두보 역할을 하던 에스테반 공작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는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모든 권한을 최측근 가신에게 위임을 하고 샐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 버렸다.
누군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런 회의가 있을 줄 알았다면 저도 진작 떠나 버렸을 텐데요.”
그 말은 아주 실없는 농담이 아니었다.
테오도라 황제가 주최하는 회의는 귀족들에게 꽤나 곤욕스러운 자리였던 것이다. 황제는 생각지도 못한 안건을 내밀기 일쑤였고, 끝없는 토론을 유도했으며, 완벽한 결론이 날 때까지 회의를 끝내지 않았다. 밤을 새운 경우도 허다했다.
그것은 제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귀족이라도 피하고 싶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벌써부터 두통이 밀려드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바라건대 오늘 회의는 부디 문제없이 끝났으면 좋겠군요.”
그때였다. 우렁찬 시종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께서 납시옵니다.”
그 말에 웅성거리던 이들이 말을 멈추고 회의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여러 명의 기사와 시종을 등 뒤로 대동한 제국의 24대 황제 테오도라 프란츠가 등장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허리를 곧게 편 그녀는 위엄이 넘치는 걸음걸이로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름답고 우아한 황제를 향해 귀족들은 머리를 숙였다.
테오도라가 황제가 된 지는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황위계승자로 있던 10년간 수많은 활약을 보여 주었다.
수많은 나라와 전략적인 국교를 맺었고, 귀족 간의 계파 싸움을 중재하기도 하였으며, 해적이 출몰하는 지역으로 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녀가 해적을 말끔히 소탕하는 순간 여인은 절대 황위계승자가 될 수 없다고 소리치던 이들도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테오도라는 명실공히 인정받는 이 나라의 황제였다.
‘그러나 황제라고 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
단상 위의 황금 의자에 앉은 테오도라가 내리깐 눈으로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그들은 이 제국의 힘 있는 귀족이었다. 자신의 영지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는 이들이다.
아무리 이 제국의 황제라 해도 그들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해내야 해.’
테오도라는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드시오.”
그녀의 목소리에 귀족들이 고개를 들었다.
“긴급한 황명이었음에도 이렇게 빠짐없이 참석해 주어 기쁘군. 다들 이렇게 부른 이유가 궁금할 테니 인사는 짧게 생략하고 바로 본론을 말하도록 하지. 이렇게 공들을 모이라고 한 이유는…….”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귀족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테오도라가 말을 이었다.
“올여름 제국 전체에 비가 오지 않아 각 영지의 농작물이 잘 자라지 못했네. 그러니 다가오는 가을에도 수확물이 크게 줄어들 거요. 그대들도 힘들겠지만 가장 힘든 것은 직접 땅을 경작하며 살아가는 농노들이지. 그러니 올해에 한해 각 영지의 농노들에게 받는 공물을 줄여 주었으면 하네.”
그 말에 귀족들이 눈을 부릅떴다. 순식간에 회의장의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황제를 정중하게 맞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제 영역을 침범당한 것에 분노한 권력자들만이 남았다.
숨이 막힐 만큼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 테오도라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황제가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고 한들,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었다. 영지의 관리는 영주의 고유 권한이었고, 그곳의 농노에게 받는 공물 또한 황제는 손댈 수 없는 것이다.
“감히 폐하께 한 말씀 올립니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 손을 든 것은 동부에 거대한 영지를 가진 렉스터 후작이었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해도 영주가 관리하는 영지에 대해 왈가불가하시는 것은 명백한 월권행위십니다. 이는 저희 귀족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는 것입니까?”
불쾌감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호전적인 말투였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그 말에 조금도 분노를 내비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그렇지 않네. 내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 모른다고 말하지 말게. 공의 말처럼 아무리 황제라 해도 영주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는 것이지. 나는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오. 이것은 나의 부탁이오.”
부탁. 그 단어에 형형한 시선을 보내던 이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호기롭게 눈을 마주치고 있던 렉스터 후작마저도 잠시 숨을 멈출 정도였다.
눈앞의 여인은 이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황제였다. 그런 존재가 ‘부탁’이라니. 해괴하다 느낄 만큼 적절치 않은 단어였다.
그러나 정작 그런 충격적인 말을 입에 담은 테오도라의 얼굴은 태연했다.
‘분노가 조금은 수그러든 것 같군.’
그들은 자존심이 센 대귀족들이다. 분노가 서린 상태의 그들이 매섭게 그녀를 몰아친다면 테오도라는 제 말을 온전히 전달하기 힘들 터였다.
그러나 방금 전 말로 다행히도 그들의 분노가 한풀 꺾였다. 이 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일방적인 부탁으로만 끝나진 않을 것이오. 나의 부탁을 들어준 자에게는 확실히 답례를 하도록 하지.”
‘답례’라는 말에 귀족들의 눈이 번뜩였다. 이내 그들의 눈빛은 아주 냉철한 사업가의 눈이 되었다. 그들은 과연 황제가 내밀 답례가 무엇일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각 귀족에게 부과된 세납의 의무? 아니면 외국의 무역 독점권?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줄 수 있는 달콤한 선물은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역시나. 이번에도 테오도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농노에게 받는 공물을 줄인 영지에는 도서관을 하나씩 지어 주도록 하겠네.”
“도, 도서관이요?”
누군가 황당한 말투로 되물었다. 테오도라의 엄한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래. 국고가 아닌 사유 재산으로 지어 주는 것이라 아주 대단하게는 지어 주지 못하겠지만, 괜찮은 책을 선별하여 채워 주겠네. 이후에도 관리가 잘되는 곳에는 틈틈이 새 책을 보내 줄 테니 시간이 지나면 아주 그럴싸한 장소가 될 걸세. 공들과 영지민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거야.”
“……설마 평민들도 입장이 가능한 겁니까?”
그 말에 테오도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한 것 아닌가.”
천진하다 느껴질 정도로 의심 없는 얼굴에 회의장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방금 전 같은 분노로 인한 것이 아니라 황당함으로 인한 정적이었다.
제지 기술과 활자 기술이 발달하였다고 해도 아직까지 책은 비싼 물품이었다. 책의 주 구매층은 귀족이었고, 평민들은 평생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는 이들이 허다했다.
도서관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귀족들이나 사제들을 위한 특수한 장소였다.
평민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이라니. 그런 괴상한 것은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결국 다시 한번 렉스터 후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 평민들에게 책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기술을 팔아 사는 이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에게 책은 필요 없는 종이 쪼가리일 뿐 아무 의미도 없을 겁니다.”
테오도라는 그 말에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금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후작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감히 황제의 의견을 반박한 것에 대해 분노하신 것일까.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테오도라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귀족들인 그대들의 생각이지.”
“……!”
“그들은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읽을 기회가 없는 것뿐이라네. 글을 배웠다고 해도 값비싼 책을 접할 기회가 없으니까. 내 장담하지. 도서관을 여는 순간 많은 이들이 그곳을 제집처럼 점령하고 탐욕스럽게 책을 읽어 나갈 거야.”
확신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렇습니까,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렉스터가 말했다.
“설령 폐하의 말씀대로라고 해도 저희를 위한 선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그대들에게도 이 선물은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 책은 때로는 마법 같은 일들을 일으키지. 평범한 농사꾼이 되어야 할 소년이 땅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가 될 수 있고, 평범한 아낙네가 되어야 할 소녀는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될 수도 있지. 그렇게 그들이 유능한 인재가 된다면 공들의 영지는 자연스럽게 부강해질 걸세.”
테오도라가 씨익 웃었다. 그녀가 회의장에 들어와 처음 보여 주는 미소였다.
“안 그런가?”
“…….”
렉스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황제를 향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는 테오도라는 귀족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처음과는 달리 그들의 얼굴은 꽤나 다양해졌다.
누군가는 납득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고민하는 얼굴이었으며, 누군가는 여전히 분노가 서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흔들렸다는 데 의미가 있는 법이지.’
이미 흐름은 테오도라에게 넘어온 상태였다.
“나는 내 말만이 최고라고 고집 피울 생각은 없다. 그러니…….”
테오도라는 자세를 바로 잡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지. 나는 그대들을 설득하고, 그대들은 나를 설득하는 거야. 그렇게 하다 보면 서로 간에 납득되는 최선의 답이 나오게 되겠지.”
그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허억’ 하고 신음을 내뱉는 이도 있었다.
그들이 가장 끔찍해했던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 * *
라엘은 깔끔하게 정돈된 침실을 한 번 더 정리했다. 폭신한 이불 위를 쓸고, 베개도 잘 정리해 두었다. 그 후 바르샤산 향초를 꺼내어 침대 맡에 피웠다. 이내 은은한 향이 방 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좋은 향이야.’
샐리가 선물해 준 향초의 향을 맡으며 라엘은 눈을 감았다.
회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어두운 밤이 되도록 회의실 문이 열리지 않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는 지금 그들과 치열한 설전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조용히 문이 열리고 테오도라가 방으로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 있는 라엘을 본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잠들어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조용히 들어온 건데…….”
그 말에 라엘이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폐하께서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먼저 잠들었을 리가요.”
그 말에 테오도라가 피식 웃더니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내심 날 기다려 주길 바랐거든.”
그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피곤함이 잔뜩 어려 있었다.
“결과가 좋지 않았나요?”
라엘의 말에 테오도라가 대답했다.
“괜찮았습니다. 다만 완벽하게 결론이 난 것은 아니죠. 내 의견에 동의한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어요. 내일까지 회의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라엘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의의 결과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다. 내일 또 그녀가 힘겹게 사투를 벌일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테오도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 쉬고 싶군요.”
그렇게 말하며 테오도라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옆에 라엘이 누웠다.
침대 위에서 금빛 눈동자와 금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라엘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늘 강인했던 그녀가 작은 꽃잎처럼 날아와 그의 품에 안겼다.
“좋은 향기가 나는군.”
테오도라의 말에 라엘이 빙긋이 웃었다.
“바르샤의 향초를 피워 두었거든요.”
“그 향을 말한 게 아닌데.”
쿡쿡 웃은 테오도라는 그의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아주 좋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쌔액 하고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고단하셨던 모양이야.’
라엘은 눈을 내리깔며 잠이 든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잠이 든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의 위엄이 사라져 있었다.
아주 평범한, 평범한 여인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 제국의 황제였다. 단 한시도 편안하게 쉬지 않는 거대한 나라의 주인.
그녀는 오늘도 하루 종일 귀족들과 전쟁을 벌이고 왔다.
황금의 자리에 홀로 앉아, 당당하고 고독하게.
마음 같아서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의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회의는 어디까지나 황제와 영주들의 자리였고 그는 이름뿐인 공작의 작위를 가졌을 뿐이니까.
테오도라가 황제로 즉위하며 라엘은 명예 공작의 작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명예로운 작위일 뿐 실질적인 힘은 없었다.
그리고 라엘은 그것에 만족했다.
황제의 남편에게는 그 정도의 작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괜히 높은 작위를 가져 복잡한 말이 나오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는 더 큰 권력을 쥐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힘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내 라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강하다. 다른 이에게 보호받길 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라엘은 테오도라를 품에 안고 지친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
다음 날 회의가 이어졌다. 귀족들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퀭한 얼굴로 회의실로 들어섰다. 커다란 회의실 문은 그들을 집어 삼키듯 쿵 하고 닫혀 버렸다.
또 다시 치열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그사이 라엘은 자신의 방에서 준비를 했다. 살랑대는 하늘빛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늘어뜨리고 물빛의 브로치가 달린 하얀 정복을 입었다.
그의 단장을 도운 시종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고운 모습이었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그 말에 라엘이 우아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가만히 앉아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생각이었다.
렉스터 후작 부인이 주최하는 티파티는 화려했다. 향긋한 최고급 차와 다기, 화사하게 핀 꽃에서는 진한 향기가 났다. 근래 들어 더욱 세가 높아진 렉스터가의 위용이 그대로 느껴지는 연회였다.
그 위용과는 달리 연회의 주최자인 렉스터 부인의 얼굴은 무척이나 앳되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귀부인은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부채를 살랑거렸다.
“요즘 가뭄이 정말 심각해요. 수도는 물론 동부에 있는 저희 영지에도 비가 오지 않아 큰일이랍니다.”
그 말에 다른 여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렉스터 부인과 친분이 깊은 이들로 대부분 이제 막 귀부인이 된 어린 여인들이었다.
“남부도 마찬가지예요. 이 정도로 비가 오지 않은 건 정말 몇 년 만인 것 같아요.”
가장 관심이 높은 주제는 올해의 극심한 가뭄이었다. 몇 달째 비가 내리지 않아 제국 전체는 메말랐고, 그 여파는 귀족들이라 해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좋지 않은 상황인 것은 맞았지만 귀족들이 아주 심각하게 머리를 맞대야 할 정도로 큰 사건도 아니었다.
전염병이 돈 것도 아니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린 귀부인들의 대화는 이내 아주 소소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요즘 같은 날씨에는 바르샤 오일이 최고죠. 피부에 듬뿍 바르고 마사지를 해 주면 좋답니다.”
“추천해 줄 만한 제품이 있나요?”
그때 렉스터 부인에게 집사가 다가왔다. 집사가 그녀에게 몇 마디를 속삭이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놀란 기색을 겨우 숨기며 입을 열었다.
“어서 안으로 모시도록 해.”
“알겠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현 황제의 남편인 라엘 란슬롯이었다.
그가 등장하는 순간 연회장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린 귀부인들의 심장을 흔들어 놓을 만큼 고운 외양을 하고 있었다.
보기 드문 하늘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땋아 내리고 새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마치 숲의 요정 같았다. 청량한 향이 뿜어져 나올 만큼 청아하고 우아했다.
렉스터 부인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그가 한발 더 빨랐다. 그녀의 앞에 선 라엘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렉스터 후작 부인, 갑자기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손한 인사에 렉스터 부인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신지요?”
“일전에 황실에 좋은 차를 선물해 주셨지 않습니까. 그 보답으로 저도 찻잎을 가져왔답니다. 남부에서 즐겨 마시는 과일로 만든 찻잎이에요.”
그 말에 렉스터 부인이 어머나, 하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저 의례적으로 보냈던 선물에 대한 보답을 이런 식으로 돌려받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엘에게 직접 선물을 건네받은 렉스터 부인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괜찮으시면 차 한잔하고 가시겠어요?”
그 말에 라엘의 눈이 커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래도 될까요?”
라엘의 말에 렉스터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괜찮으시죠, 부인들?”
“그럼요!”
여인들은 귀부인의 품위도 잊고 재빨리 대답했다.
귀부인과 황제의 남편. 불편한 관계라며 거절하기에 그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라엘은 렉스터 부인이 마련해 준 자리에 앉은 뒤 여인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에르방스 부인.”
“안녕하세요.”
“오늘도 드레스가 멋지시네요, 벨리타 부인.”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그럼요. 이전에 연회에서 뵈었잖아요.”
잠시 후 라엘이 눈을 크게 떴다.
“카모라 님도 이곳에 계셨군요.”
카모라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일자로 떨어지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카모라가 빙긋이 웃었다.
“일하러 왔어요. 지금은 잠시 쉬는 중이고요.”
그 말에 라엘이 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빙그르 웃었다.
“늘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참 멋지세요.”
그 미소에 카모라와 여인들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어머머머.’
라엘은 에스테반 공작처럼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다. 리오넬 후작처럼 선이 반듯한 미남도 아니었다.
그러나 라엘은 그들에게는 없는 청량하고 맑은 느낌이 있었다. 화려한 수도의 사교계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분위기였다.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그런 묘한 매력이랄까.’
카모라는 음흉한 얼굴로 웃었다. 그 미소에 잠시 흠칫한 라엘은 표정을 가다듬고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신 중이었나요?”
렉스터 부인이 재빨리 나서서 말했다.
“가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 말에 라엘이 눈을 크게 뜨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그렇군요. 어린 부인들께서 정말 대단하시네요.”
반짝이는 눈빛에 렉스터 후작 부인과 여인들은 눈을 깜빡였다.
‘저 반응은 뭐지?’
그저 흉악한 날씨에 대한 걱정을 토로했던 것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인들의 당황스러운 심경과 달리 라엘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을 이었다.
“란슬롯 후작 부인이신 어머니께서도 그러셨거든요. 이렇게 극심한 날이 계속되면 친분이 있는 부인들을 모으셨어요. 아래에 있는 이들은 몇 십 배나 힘겨울 테니 그들을 챙겨 주어야 한다며 부인들과 많은 대화를 하셨답니다.”
“…….”
‘부인들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계셨던 거지요?’라는 시선에 여인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요. 우리는 전혀 그런 말 따위 하지 않고 있었는데요. 날씨가 건조하니 어떤 오일을 바르면 좋을까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라고 대답하기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눈빛에 너무 큰 감탄이 어려 있었다.
결국 렉스터 후작 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 대답에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여인들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렉스터 후작 부인은 ‘흠흠’ 하고 조그맣게 헛기침을 하며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음,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돕는 것이 좋을까요?”
그러나 방금 전까지 그 비슷한 고민도 하지 않았던 여인들에게 마땅한 방법이 생각날 리가. 말을 잊어버린 여인들 사이로 라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러 가지 의견을 주고받고 계시던 중이었다면 저도 한마디 의견을 드려도 될까요?”
그 말에 렉스터 후작 부인이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가요?”
“사실 가뭄이 심해 영지 수확에 타격을 입어 귀부인들도 사정이 좋지 않으실 테지요? 그런 상황에서 따로 돈을 모으거나 하는 일은 부담스러우실 테고요.”
라엘은 찬찬히 시선을 돌려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 귀부인들께서 안 쓰는 물건들을 모아 보는 건 어떨까요?”
“……안 쓰는 물건이요?
“네. 유행이 지난 드레스나 지금은 읽지 않는 책, 새것을 구입하여 창고로 치운 장식품들 같은 것들이요.”
그녀들은 이제 막 대귀족의 안주인이 된 여인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에게 필요 없어진 물건은 차고 넘칠 정도였다.
결혼 전에 입었던 커다란 리본이 달린 드레스, 저택을 새로 꾸미며 치운 커튼, 장식장, 시계 등 창고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렉스터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물건을 모아 봤자 도움이 될까요?”
“그럼요. 귀부인들이 가지고 계시는 물건은 기본적으로 품질이 좋은 최고급품이니까요. 상인에게 팔면 좋은 값을 쳐줄 거예요. 그 금액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 주면 되는 것이고요.”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필요 없는 물건도 없애고, 성금도 모을 수 있으니 너무나 좋은 방법이었다.
괜찮은 것 같다며 눈빛을 주고받는 여인들을 향해 라엘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일이 잘 끝나면 부인들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실 거예요.”
“……존경이요?”
“지금 같은 힘든 상황 속에서 다른 이들을 돕는 이들은 많지 않으니까요. 부인들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테지요.”
그 말에 여인들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칭찬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순수하기도 했고, 야망으로 가득한 여인처럼 탐욕스럽기도 했다.
그녀들은 위세 높은 가문의 안주인이었지만 아직 어렸다. 아직 제 위치를 온전히 다진 것도 아니었고, 평가될 것도 거의 없었다.
그런 여인들에게 ‘사람들의 존경’이라는 것은 꽤나 그럴듯한 보상이었다.
“그럼 우리 한번 물건을 모아 볼까요?”
렉스터 후작 부인의 말에 여인들이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찬성이에요.”
여인들은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떤 물건들을 모을 수 있는지, 그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대화는 아주 시원시원하게 진행되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엄청난 결론이 나왔다.
렉스터 후작 부인을 주축으로 자선 연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쓰지 않는 물건들을 기부받는 연회는 지금껏 제국에 없었던 일이었다.
렉스터 부인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두고 보세요. 이 자선 연회는 이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연회가 될 거예요. 이 렉스터가 그렇게 만들어 보이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라엘은 렉스터가를 나섰다. 일을 마친 카모라도 함께였다.
그와 나란히 걷던 카모라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정말 놀랐어요. 그저 순진한 분이신 줄만 알았는데 어린 부인들을 다루는 방법이 제법이던걸요?”
그 말에 라엘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표가 났나요?”
“아니요. 아주 자연스러웠어요. 과연 샐리에게 수업을 받은 보람이 있던걸요?”
그 말에 라엘이 안도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샐리가 여행을 떠나기 전, 라엘은 그녀를 찾아가 아주 은밀한 수업을 받았다. 바로 십수 년간 사교계의 정점을 지키고 있는 그녀의 비법. 즉 귀족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이었다.
절대로 오만하게 명령하지 마세요. 비굴하게 부탁하지도 마세요. 그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무능한 것을 경멸하는 이들이에요.
쉽게 힘에 굴복하지도 않고, 쉽게 마음이 약해지지도 않는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에요. 그 속에 있는 욕망을 찾아내어 유혹하세요.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이랍니다.
샐리의 말대로였다.
라엘이 오늘 렉스터 후작 부인을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가 어린 귀부인들과 모임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온 것이었다.
카모라가 길을 걸으며 말했다.
“렉스터 후작 부인은 아직 어리고, 먼 곳에서 시집을 와 수도의 사교계에 아직 제대로 된 입지도 없죠. 그래서 그녀는 빠른 시일 내에 명성을 쌓고 싶어 해요.”
그런 그녀에게 라엘이 제시한 방법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귀족들은 평민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평민은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날씨가 가물어 그들이 밥을 굶고 쓰러져 가도 그것은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명성은 다르다. 이런 흉흉한 시기에 그들을 돕는다면 분명 그녀를 향한 존경과 칭송이 따라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기반이 약한 렉스터 후작 부인에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어린 렉스터 후작 부인이 그런 식으로 치고 나간다면 다른 귀부인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겠죠. 자선 연회가 성공한다면 수많은 여인이 그 일에 뛰어들 거예요. 평민들을 돕는 자애로운 귀족 여인이 유행처럼 번지겠죠.”
카모라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의도가 불순하든 뭐든, 가난한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란슬롯 공?”
카모라의 말에 라엘은 조용히 웃었다. 제국이 낳은 천재 디자이너. 그 실력만큼 머리도 영특하다더니 정말이었다. 제 모든 속을 다 들여다보는 여인의 말에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카모라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조용히 황성에 계시던 분이 이런 일을 하시다니 놀랐어요. 가뭄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이 무척 걱정되셨나 보죠?”
걱정. 물론 그 말도 맞았다.
라엘은 평범한 귀족가의 공자에서 황제의 남편이 되었다. 황제의 옆자리에 앉아 제국을 바라보니 그들의 모습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비쩍 마른 몸으로 쭈그려 앉아 있는 이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 귀족들에게 험한 대접을 받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났다. 누더기 옷을 입고 구걸하는 이를 보면 제 탓인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나서서 행동한 것은 온전히 그들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라엘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를 위해서였어요. 그분은 귀족들이 먼저 나서서 가난한 이들을 지켜 주는 세상이 되길 바라시거든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기뻐할 테지.
누구보다 환하게.
그 시원한 미소를 떠올리자 심장 한편이 찌르르 울렸다.
라엘은 카모라와 눈을 마주치며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연회도 열고 제대로 사교계에 참석해 볼까 해요. 저는 황실의 안주인이니까요. 귀부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겠죠.”
카모라가 그 말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는 거예요?”
라엘에 대한 평판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내 덕분에 팔자가 늘어졌다며 악의적인 조롱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사내로 태어나 제대로 된 권력도 잡지 못하고 산다며 무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가 적극적으로 사교계에 발을 내딛는다면 그 비난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자존심 높은 귀족 남성으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일 터였다.
그러나 라엘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는 황제 폐하의 남편이니까요. 그분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싶어요.”
“…….”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본 카모라는 이내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도 참, 운도 좋으시지. 어디서 이런 남편을 얻으셨지?”
“네에?”
“내게도 이런 남자가 있다면 당장에 납치해 왔을 텐데. 아, 부러워!”
다 큰 성인 남성에게 귀엽다는 칭찬은 어색한 것이었다. 잔뜩 당황한 라엘을 향해 카모라는 까르르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 * *
같은 시간 황성의 회의장. 귀족들의 얼굴에는 지독한 피곤이 어려 있었지만 테오도라의 얼굴에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테오도라가 입을 열었다.
“서로 간에 할 말은 충분히 다 나눈 것 같으니 여기서 토론은 마무리 짓고 이제 결정을 내도록 하지.”
그때 누군가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그새 수척해진 렉스터 후작이었다.
“폐하, 마지막 발언을 허락해 주십시오.”
“말해 보시오.”
그는 쉬어 버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제국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십니다.”
“위험하다?”
테오도라가 턱을 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가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공물을 줄여 달라고 하셨지만 과연 농노들도 그렇게 이해를 할까요?”
대답이 없는 테오도라를 향해 렉스터가 날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그 맛을 본 농노들은 앞으로 내내 잔머리를 굴릴 겁니다. 비가 안 왔다고, 비가 많이 왔다고, 전염병이 돌았다고, 별의별 이유를 들어가며 공물을 조금만 내기 위해 별별 말을 지어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손을 쓰기 힘든 상황이 와버릴 테지요. 그러니 아예 그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고, 아주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말에 조용한 회의장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의 말이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었다. 그 분위기를 느낀 렉스터는 주먹에 힘을 쥐었다.
황제는 어디까지나 이 일은 명령이 아니니 각 귀족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했다. 그렇다고 제 맘대로 결정을 했다간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흐름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 렉스터의 말은 많은 귀족들의 공감을 얻었다. 황제의 제안에 반하는 이들이 많다면, 중립이나 황제 측에 있는 이들도 쉽게 그녀의 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희열에 차 있던 렉스터는 스산한 목소리에 뻣뻣하게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렉스터 공. 공은 백성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렉스터는 마른침을 삼키며 황좌에 앉은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회의 내내 온화함을 잃지 않고 있던 그녀가 얼음보다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은 백성들을 마당에서 키우는 개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그, 그게 무슨…….”
“아니면 머리엔 든 것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테오도라가 내뿜는 흉흉한 분위기에 렉스터는 이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백성은 관리해야 될 대상이 아니라 이 나라를 떠받치는 존재요! 공들의 명예로운 이름과 번쩍이는 황금들이 누구의 노력 덕분에 쌓이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테오도라의 금빛 눈동자에 불꽃이 일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가 분노한 사자처럼 소리쳤다.
“또 한 번 이런 식으로 짐의 백성들을 기만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테오도라는 위압적인 얼굴로 렉스터를 노려보았다. 렉스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 시선을 피했다. 누구에게도 겁먹은 적이 없던 그였건만 도저히 그 시선을 받을 자신이 없었다.
테오도라는 뜸을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이 흐름을 온전히 이어 가야 했다.
“이제 정말 회의의 최종적인 결론을 내겠소. 각 영지를 다스리는 공들의 생각을 말씀해 주시오. 물론 내 의견에 반대한다고 해도 어떠한 불이익도 없으리라 약속하지. 다만…….”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아주 끈질긴 구석이 있지. 반대하는 이들을 수십 번씩 찾아가 설득하고 또 설득할 것이오. 나와 돈독한 사이가 되고 싶다면 얼마든지 반대해도 좋겠지.”
그 말에 귀족들이 신음을 흘렸다.
* * *
시종의 전언도 없이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테오도라였다. 회의장에서의 모습 그대로 왕관과 황의를 걸치고 방에 들어선 그녀가 라엘을 향해 소리쳤다.
“드디어 귀족들의 대답을 받아냈습니다! 전원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정말이요?”
라엘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테오도라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것은 아주 좋은 선례가 될 거예요.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는 아니니까요. 이 일을 발판 삼아 수확량에 따라 공물의 양을 조절하는 법률을 만들 겁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농노들은 흉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떠드는 테오도라의 말을 라엘은 웃으며 들어 주었다. 오늘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 떠들어 대던 테오도라가 아, 하고 소리치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제멋대로 들어와서는 괜한 말을 떠들어 대고 말았군요.”
테오도라는 속내를 남에게 잘 이야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생각은 귀여운 케이크나 예쁜 드레스가 아니라, 제국을 얼마나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남에게 쉽게 이야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예민하고 어렵고 재미없는 주제였다.
‘그런데 왜 당신 앞에만 서면…….’
테오도라는 라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던 세상 어느 것보다 즐거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눈을 빛내곤 했다.
그런 그를 향해 테오도라는 어느새 수많은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누군가가 들었다면 비웃었을 아주 유치한 꿈까지, 모두.
조금 민망하다는 얼굴로 서 있는 테오도라를 향해 라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저는 폐하께서 그런 말들을 해 주실 때마다 정말 즐거워요.”
맑은 목소리가 테오도라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라엘이 손을 뻗어 테오도라의 머리 위에 있던 황금의 관으로 손을 뻗었다. 이내 묵직하게 그녀를 내리눌렀던 황금의 관이 사라졌다.
라엘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틀어 올린 머리도 풀어 내렸다.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이 밤하늘처럼 찰랑거렸다. 그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라엘은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 수고했어요, 테오도라.”
그 한마디에 테오도라는 며칠 동안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가볍고 따뜻한 온기로 충만해졌다.
늘 생각한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내 곁에 있을까.
테오도라는 벅찬 얼굴로 그를 껴안았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그가 사랑스러웠다.
* * *
제국의 최전성기를 열었다고 칭송받는 테오도라 프란츠 황제는 위대한 업적을 여러 개 남겼다.
가장 큰 업적은 제국의 모든 이들에게 두루두루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제국 전역에 신분에 상관없이 이용할 수 있는 아카데미와 도서관을 설립했다. 이것은 제국민의 전체적인 역량을 끌어올리는 근간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철저한 능력제로 사람을 뽑아 인재를 등용시켰다. 그래서 이 시기는 인재의 황금기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이 무렵 제국에서는 예술, 수학, 과학, 문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걸출한 인물들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짓눌려 있던 여성의 권위를 향상시켰다. 그동안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작위 계승, 가문의 유산 상속을 법적으로 제도화시켰다.
그로 인해 그녀는 귀족 여인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는데, 그 지지는 그녀가 황제로서 안정된 권력을 가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많은 귀족 남성들이 그 법에 반발했다. 그녀는 특유의 사교성으로 그들의 불만을 상쇄시켰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과 함께 말을 타고 검을 나누고 술을 마셨다. 그들은 평생 황제와 반목했을지언정 개인적으로는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녀만큼 유명한 인물이 바로 그녀보다 여덟 살 어린 남편 라엘 란슬롯이다.
그는 직접 황제의 식사부터 의복까지 살뜰히 챙기며 그녀를 보좌했다.
또한 그는 제국 최초로 본격적인 사교 활동을 시작한 남성이기도 했다. 그는 직접 티파티를 주최하기도 하고, 여인들의 파티에도 활발하게 참석하여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였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늘 함께였다. 황성에서, 휴양지에서, 타국에서, 두 사람은 늘 다정했다.
그 모습은 많은 사람을 설레게 하여 두 사람의 사랑을 찬미하는 수많은 예술 작품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의 마지막은 예술처럼 비극적이었다.
라엘이 병으로 황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만 것이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라엘이 말했다.
“당신에게 많은 것을 해 주지 못해 늘 미안했어요. 그래서 당신의 마지막 순간은 꼭 지켜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해 주지 못하고 가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테오도라는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는…… 나는 당신의 여자라서 행복했으니까.”
그 말에 라엘은 두 눈을 휘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소년처럼 맑은 미소가 머물렀다.
그는 메마른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나의 사랑스러운 폐하.”
그 순간 툭 하고 그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처음 보는 황제의 눈물이었다.
그렇게 라엘은 그녀를 두고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과 함께 황제는 모든 업무를 멈추었다. 많은 이들이 황제의 부재를 걱정하기 시작할 때쯤 그녀는 다시 황금의 관을 쓰고 나타났다. 라엘의 장례식이 끝난 지 이 주일만의 일이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 자국은 보이지 않았으나 금빛 눈동자에는 보는 이가 마음 아플 만큼 처연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처음으로 나를 위해 사치를 하고자 하네.”
황제는 돈을 쓰는 데 아주 까다로웠다. 황실의 국고는 물론 사유 재산 또한 사사로이 쓰는 일이 없었다. 늘 합리적이고 꼭 필요한 곳에만 돈을 썼다.
그런 황제가 자신의 돈으로 황성 안에 작은 신전을 지었다. 하늘빛 돌을 모아 만든 신전은 라엘의 묘였다.
황제는 자주 그곳을 찾았다. 황금의관의 무게감이 힘겨울 때, 사무치는 그리움에 휩싸였을 때 그곳을 찾아 위로를 받았다.
그 후로도 황제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제국은 부강해지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전례 없는 제국의 전성기였다.
그렇게 이십 년이 지난 후, 황제의 불꽃같았던 생명이 꺼지는 순간이 다가왔다. 제국의 모든 것을 가진 위대한 황제는 그제야 홀가분한 듯 웃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끝났군. 나는 훌륭한 황제였나?”
그녀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수많은 이들은 차마 아무 대답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입을 막는 것이 전부였다.
그 모습을 보고 황제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대답은 그가 해 줄 테니까.”
황제는 눈을 감았다. 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테오도라 프란츠가 생을 마감했다.
황제의 시신은 라엘의 옆에 묻혔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영혼은 이제 영생을 함께할 터였다.
두 사람이 묻힌 하늘빛 신전에는 생전 황제가 했던 말이 새겨졌다.
나는 단 하나의 태양이 제국을 이끌어 가길 바라지 않는다.
내가 꿈꾸는 제국은 수많은 별들, 나무와 꽃, 잡초와 작은 돌이 함께 이끌어 가는 곳.
그리고 나의 곁에는 늘 그대가 있겠지.
라엘, 나의 아름다운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