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마지막 무도회
벨라도나 사건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황성의 정기 연회가 열렸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정비해야 한다는 게 황후의 생각이었다.
황후가 일일이 초대장을 써 여인들에게 보냈다. 그 마음을 안 여인들이 빠지지 않고 연회에 참석했다. 덕분에 예상과 달리 연회장은 많은 이들이 찾아와 성황을 이루었다.
그중에는 샐리도 있었다. 샐리가 등장하는 순간 수많은 이들이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그녀는 진남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께에는 황금의 사자와 독수리가 세공된 펜던트가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명예로운 귀족의 상징이었다.
“어서 와, 데임 샐리.”
테오도라가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샐리는 테오도라와 함께 황후의 앞에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연회장의 가장 높은 단상 위에 앉아 있는 황후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어서 오거라. 널 초대하게 되어 기쁘구나. 모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하거라.”
샐리는 정중한 인사로 대답했다.
황후와 짧은 인사를 마친 샐리는 테오도라와 함께 연회장을 걸었다. 두 사람이 걷는 곳마다 수많은 여인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인기가 대단하구나.”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골든리아가 샐리를 보며 웃었다.
“샐리 님, 펜던트가 정말이지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꼭 샐리 님을 위해 디자인된 것만 같다고 할까.
“맞아요. 마치 엄마 배 속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잘 어울려요.”
후작 영애 삼총사가 황홀한 눈빛으로 얼굴을 붉히며 아기 새처럼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어머나, 카모라의 드레스를 입고 왔네요? 역시 샐리에게는 그 드레스가 가장 잘 어울려요.”
로즈마리는 부채를 살랑이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샐리, 오랜만이네요.”
“여보, 조심히 걸어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여보, 카페인이 들어간 차는 안 됩니다.”
“좀! 시끄러워요!”
마가렛은 험악한 눈으로 남편을 향해 소리 질렀다. 갑작스러운 짜증에도 리오넬의 얼굴에 서린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마가렛을 호위하듯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배 속 아기가 놀랍니다. 조심해야죠.”
그 모습을 보고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린 것은 멜리사였다. 그녀는 샐리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여인들만 참석하는 게 일반적인 정기 연회까지 따라올 줄이야.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그러게요.”
“제국의 제일가는 바람둥이였던 라이온 리오넬 후작, 아내 바보에서 아기 바보의 길로 들어서다! 흉흉한 소식만 가득한 와중에 꽤 훈훈한 소식이 되겠죠?”
샐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 님!”
낭랑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여인은 바로 에이미였다. 평소에는 정기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에이미도 오늘은 어머니와 함께 참석했다.
“잠시 와 보세요.”
에이미는 두 볼을 붉게 물들이며 샐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샐리를 향해 에이미가 품속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에이미가 좋아하는 도트 무늬의 리본이 앙증맞게 달린 초대장이 한 장 들어 있었다.
동글동글한 귀여운 글씨로 에이미 로렌스, 알렉스 아프리모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제가 직접 만든 청첩장이에요. 가문의 이름으로 발송하는 청첩장은 점잖게 만들었지만 제 친구들에게 주는 청첩장은 제 자유니까요.”
에이미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결혼식 날짜는 내년 봄이에요. 샐리 님이 꼭 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는 에이미를 향해 샐리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다시 수도로 돌아올 수 있을까?’
샐리의 현재 마음 상태로는 무척 힘든 일처럼 느껴졌다. 샐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눈을 한 귀여운 로렌스가의 여섯 번째 딸. 샐리가 사교계에서 처음 사귄 친구이며, 늘 곁에 있어 주었던 따스한 사람.
샐리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에이미 님, 저 며칠 후에 수도를 떠나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말에 에이미의 커다란 눈이 흔들렸다.
에이미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전생의 이야기는 너무 길고 슬펐다. 기쁜 일을 앞둔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샐리는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더 이상 에스테반 공작의 곁에 있기 힘들어 그를 떠날 것이라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에이미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요? 에스테반 공작 저하와 싸우셨어요?”
“아니요.”
“그럼 더 이상 에스테반 공작 저하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건가요?”
에이미의 떨리는 목소리에 샐리는 씁쓸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대답에 에이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아 그를 떠난다고 하면 이토록 마음이 아프진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며 그 사람을 떠나야 한다니.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로운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에이미는 샐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늘 당당하게 빛이 났던 아름다운 여인은 톡 하고 손을 대면 터져 버릴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에이미는 샐리의 아픔을 처음으로 마주 본 느낌이 들었다.
“에이미 님?”
“아, 미안해요.”
에이미는 당황한 얼굴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냈다. 그녀를 향해 샐리가 손수건을 건넸다.
에이미가 받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는가 싶더니 이내 여린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샐리는 그 모습이 가슴 아파 에이미의 작은 어깨를 껴안아 주었다. 에이미는 그녀의 품에서 아이처럼 흐느끼며 말했다.
“미안해요, 정말. 내가 샐리 님을 위로해 주어야 하는데…….”
에이미는 울었다. 마치 샐리를 대신해서 우는 것처럼. 그 모습에 얼마나 따스한 위로를 받았는지 알까.
샐리는 에이미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 괜찮아지면 에이미 님의 결혼식 때 꼭 가도록 할게요.”
“무, 무리해서 오지 않아도 돼요! 제가 알렉스 님과 함께 샐리 님이 있는 곳으로 갈 테니까요!”
씩씩한 말에 샐리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어느덧 그녀의 눈가에도 눈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연회장 안으로 두 사람이 돌아왔다. 샐리는 에이미를 의자까지 데려가 앉혀 주었다.
에이미는 팅팅 부은 눈으로 애써 웃었다.
“전 괜찮으니 가 보세요. 샐리 님을 찾는 분이 많으시잖아요.”
“그럼 다녀올게요.”
고개를 끄덕인 샐리는 여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황후가 손을 들어 연회의 마지막을 알렸다. 음악 소리가 잦아들고 여인들은 우아한 인사를 하며 연회장을 나섰다.
“정말 즐거운 연회였어요.”
“다음 연회 때 뵙지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샐리와 테오도라는 황후를 대신 하여 여인들에게 인사했다. 마지막 여인까지 정중하게 보낸 테오도라가 시선을 돌려 샐리를 바라보았다.
“에이미 영애에게는 오늘 이야기를 한 모양이더군.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어.”
“네. 말하고 말았어요.”
“다른 이들에게는?”
“따로 찾아가 말씀드려야죠. 괜한 말로 연회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 말에 테오도라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할 거야.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사교계를 뒤흔든 여인을 그리워하겠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까는 샐리를 향해 테오도라가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
그 순간 샐리의 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샐리는 입술을 깨물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황좌에 오르는 순간까지 함께 있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테오도라는 그 말에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런 얼굴을 하면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잖아.’
테오도라는 샐리가 어떤 이유로 떠나는 것인지 확실히는 알지 못했다. 다만 며칠 전 샐리는 자신을 찾아와 더 이상 먼 길을 함께 갈 수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설득도 해 보고, 부탁도 해 보았지만 샐리의 의지는 완강했다.
귀족들이 가득 앉아 있던 재판장에서도, 황태후의 호된 분노 앞에서도 늘 당당히 고개를 들었던 여인이 마치 도망치듯 떠나고 싶어 했다.
“뭐가 그렇게 그대를 힘든 게 한 것일까.”
“…….”
“다음에 만날 때는 꼭 말해 주길 바라.”
테오도라의 말에 샐리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며.
“저는 조금만 더 이곳에 있다 갈게요.”
“그리하도록 해.”
테오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일부러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스스로 마음을 다독일 시간을 줄 생각이었다.
‘너무 긴 시간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테오도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샐리에게서 몸을 돌렸다. 작별의 인사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샐리는 텅 빈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연회장은 고요했다.
수많은 선율이 어우러진 음악, 화사한 드레스를 펄럭이는 여인들, 부채 위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그 모든 것들이 아주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점잖게 걷는 이 소리가 누구인지 샐리는 알고 있었다.
샐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단장을 한 카시스 에스테반이 서 있었다.
새하얀 연회복을 입은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용한 연회 홀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와 함께 춤을 추시겠습니까.”
샐리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본 두 사람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무도 없는 홀에서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은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샐리는 그 어떤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그와 춤을 춘 것이 처음인 것을 깨달았다.
그의 옆에 있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어떤 안 좋은 말들을 들을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오로지 그만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짙은 사파이어를 닮은 남색 눈동자, 은실을 모은 것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 조각상 같은 아름다운 얼굴은 조금 슬퍼 보였다. 울 것 같기도 했다.
카시스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처럼 빛나는 금색 눈동자, 그 아래에 콕 하고 찍힌 작은 점, 흐트러진 장미꽃보다 붉은 머리카락, 선명한 붉은 입술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많은 말들이 하고 싶었지만, 반대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했지만, 반대로 어서 지나갔으면 했다.
서로의 모순된 마음만큼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을 지나쳤다.
춤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샐리가 그의 리드에 맞추어 우아하게 몸을 한 바퀴 돌린 후 그에게 돌아왔다.
가까이 마주 댄 서로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진한 남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샐리는 도망치듯 그에게서 벗어났다.
샐리가 카시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춤은 여기까지예요.”
“…….”
“저의 연회도 여기까지죠.”
“…….”
“지금까지 함께해 주어서 감사했어요.”
샐리는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인사였다.
카시스는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 있는 여인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눈물이 새어 나올 만큼.
그래서 더더욱 그녀를 보내 주어야 했다. 카시스는 허리를 숙여 우아하게 인사했다.
“나야말로. 당신과 함께하는 동안 무척 행복했습니다.”
“…….”
샐리는 흔들리는 눈빛을 애써 바로잡으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화려하게 빛나던 에스테반 공작의 가짜 애첩 샐리. 그녀의 무도회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 *
며칠 후, 별채 앞에는 짐을 실은 마차가 서 있었다. 마차 앞에 선 샐리는 기어이 배웅 나온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두 눈이 토끼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샐리는 데이지의 손을 맞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네게 많은 보살핌을 받았는데 더 잘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무슨 소리세요. 하녀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많은 것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는걸요. 정말, 정말 많이 기뻤어요.”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방을 나서는 자신에게 샐리는 늘 오늘도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달콤한 디저트가 나오면 꼭 데이지의 것을 하나 더 챙겨 주었고, 한가로운 날이면 함께 산책을 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또 다시 눈물이 왈칵 나온 데이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샐리는 그런 데이지를 꼭 안아 주었다.
정말로 착한 아이였다. 데이지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별채가 편하게 느껴지진 않았으리라.
데이지가 눈물이 멈출 때까지 토닥여 준 샐리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에반이었다. 에반은 눈썹을 내리며 애써 미소 짓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한결같이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봐 주었던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에반이 제게 얼마나 힘이 되어 줬는지 모를 거예요.”
“영광스러운 일이군요.”
그는 에스테반 저택의 집사였다. 모시는 이의 의사를 존중하여 최대한 그 일을 돕는 것이 그의 역할.
그래서 에반은 하고 싶은 수많은 아쉬운 말을 뒤로 숨겼다. 저택을 떠나는 그녀의 안부를 빌어 주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자상한 말에 샐리가 두 눈을 휘며 웃었다.
“에반도요.”
그리고 샐리의 시선이 마지막에 닿은 곳은 카시스였다.
평소처럼 완벽한 복장을 한 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귀족적인 자태였지만 아름다운 얼굴에 서린 처연한 눈빛에 샐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는 샐리에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릴게.”
그 순간 쿵, 하고 샐리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심장이 조이듯 아팠다. 그럼에도 샐리는 그 모든 것을 숨기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갈게요.”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 * *
샐리가 수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보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바르샤의 일과 벨라도나 사건으로 테오도라의 위세가 어마어마하게 커진 시점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한 샐리의 권위도 드높아져 웬만한 귀족들도 그녀를 쉽게 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엘리제의 몰락까지.
모두가 샐리가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자리에 앉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교계의 정점, 에스테반 공작 부인.
제국의 여자라면 누구나 탐낼 자리였다.
그러나 샐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놓고 사라졌다. 그 사실은 많은 이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와 샐리의 사이가 벌어진 걸까요?”
“그것밖에는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서 전 부인과 이혼을 하기 위해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세상에. 그럼 두 사람의 사이가 가짜라는 말이에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두 사람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중에는 사실인 것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를 가장 잘 알고 있을 에스테반 공작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샐리가 없었던 것처럼 그녀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은 여전했고, 서늘한 말투도 똑같았다.
그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격한 업무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은 새벽까지 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삼사 일씩 잠도 자지 않고 밤새 일을 하는 날도 많았다.
“주인님, 제발 들어가 주무십시오. 벌써 이틀째 주무시지 않으셨잖습니까.”
에반이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말했다.
“아직 서류 확인이 끝나지 않았어.”
카시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라면 주인의 말을 거스르지 않을 에반이었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얼마 전에도 무리를 하셔서 쓰러지지 않으셨습니까. 바란 님께서 제대로 쉬지 않으면 정말 큰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괜찮아.”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에반은 그답지 않게 울컥해 소리쳤다.
“그러다가 정말 잘못되시면 어쩌시려고요. 이대로 샐리 님을 못 보셔도 좋습니까?”
그 말에 서류를 읽어 내리던 카시스의 시선이 멈추었다. 에반은 헉, 하고 입을 막았지만 이미 말이 튀어 나간 후였다.
에반은 샐리가 떠난 이후로 한 번도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카시스가 미친 듯이 일에 빠진 것이 누구 때문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에게서는 스산한 분노나 지독한 낭패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에반은 용기를 내어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샐리 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원하신다면 당장 샐리 님을 만나러 가십시오. 지금 당장이라도요.”
늘 조심스러운 에반이 저런 식으로 격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라 카시스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저 충성스러운 집사는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는 주인이 꽤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에반의 말처럼 카시스가 쉽게 그녀에게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샐리는 카시스에게 자신의 행선지를 숨기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쫓아오지 마세요.’
그것은 그녀의 부탁이었고, 시험이었다. 카시스는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녀가 다가와도 괜찮다고 손짓을 해 줄 때까지. 혹은 자신의 앞에 다시 나타나 줄 때까지.
‘그때가 되기 전에 쓰러지는 것은 곤란하지.’
그래서 카시스는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좀 쉬도록 하지.”
그제야 에반이 안도한 얼굴로 카시스를 방으로 안내했다.
카시스는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몸은 그에게 오랜만의 수면을 선사했다.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무척이나 애처로워 보였다.
내리깐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파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카시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를 본 그녀의 눈이 커지는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다시 등장한 여인은 카시스가 잘 아는 샐리였다. 샐리는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그녀와는 달리 너무나 환한 미소였다.
카시스는 그 모습에 마음 깊이 안도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미소는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금빛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처절한 원망이며 격렬한 미움이었다.
그 순간 카시스가 눈을 떴다. 어느새 베개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아, 하아.”
카시스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잡았다. 그녀가 떠난 이후로 꾸는 꿈들은 그에게 전에 없던 혼란을 불어 넣었다.
꿈속에서 그는 그녀를 울게 만들고, 그녀를 분노하게 했다. 그는 늘 그녀에게 죄인이었다. 그가 곁에 있으면 그녀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보고 싶어.”
카시스는 괴로운 목소리를 내뱉으며 눈가를 가렸다.
“정말 보고 싶어.”
카시스는 깨달았다. 자신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사랑 앞에서는 그도 끔찍할 정도로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 부드러운 몸을 껴안고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녀가 싫다고 고개를 내저어도 그 손을 잡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녀의 곁에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강렬한 충동을 힘겹게 억눌렀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기다려야 했다. 그것이 그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 * *
휘이잉.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산맥 위에는 사계절 내내 녹지 않는 새하얀 눈이 그 자리를 지켰다. 키가 큰 겨울나무의 마른 가지 사이에도 흰 서리가 어려 있었다.
새하얀 세상 속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린 여인과 눈밭을 뒹구는 은빛 여우가 있었다.
도톰한 털모자를 깊게 눌러쓴 샐리가 숨을 내쉬었다. 머리 위로 햇빛이 비치는 한낮이었건만 입가로 차가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악명 높은 북부의 추위는 과연 대단했다. 폐 속까지 꽁꽁 얼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샐리는 이 추위가 싫지 않았다. 서린 바람은 그녀의 심장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산책을 마친 샐리가 향한 곳은 산맥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성이었다. 그곳은 북부의 경계를 지키는 유서 깊은 스완느 공작가의 보금자리였으며 현재 샐리가 잠시 몸을 맡기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성문을 열고 들어온 샐리는 치맛자락 위에 쌓인 눈을 털어 냈다.
“또 산맥을 올라갔다 온 건가요?”
허스키한 목소리에 샐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차가운 인상의 여인은 이 성의 안주인인 로잔나 스완느 공작 부인이며…….
“네. 공기가 정말 좋던걸요. 다음엔 함께 가요, 로즈 부인.”
시크릿 로즈의 제작자인 ‘로즈’이기도 했다. 해맑은 샐리의 말에 로즈는 끔찍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거절할게요. 난 추운 산길을 걷는 악취미 같은 건 없거든요.”
샐리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가 보았다면 친절하지 못한 대답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아주 솔직한 것뿐이었다. 게다가 까칠하고 서릿발처럼 차갑다고 소문난 스완느 공작 부인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모습도 있었다.
“어서 가 봐, 캬. 부인께서 네게 주기 위해 장난감을 가지고 오셨잖니.”
샐리가 캬의 커다란 귀에 속삭였다. 캬는 크릉, 하고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로즈를 바라보았다.
로즈의 손에는 향주머니가 대롱대롱 달려 있는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샐리의 조언을 받아 만든 장난감으로 막대기를 흔들면 향주머니에서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캬가 코를 킁킁거리며 슬그머니 로즈의 앞에 다가왔다. 로즈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손에 쥔 장난감을 조금씩 흔들어 보았다.
코를 찡긋거리던 캬는 향기가 마음에 든 듯 앞발을 들어 향주머니에 달려들었다.
‘캬! 캬!’거리며 앞발을 왕왕거리는 캬를 보는 로즈의 무표정한 얼굴엔 홍조가 살짝 어려 있었다.
샐리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수도를 떠나기 직전 샐리는 어디로 갈지 고민을 했다. 그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그때 로즈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멜리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샐리의 앞으로 직접 온 편지에는 로즈라는 가명이 아닌 로잔나 스완느 공작 부인이라는 이름이 정중하게 적혀 있었다.
샐리가 스완느 성에 도착했을 때 로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반가운 인사나 따스한 환대도 없었다. 로즈는 그저 오랜 친구가 놀러 온 듯 아주 무덤덤하게 샐리를 대했다.
그 점이 샐리를 안도하게 했다.
샐리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캬가 웬일로 로즈와 함께 노는 것에 집중하기에 샐리는 혼자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옷을 벗고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편지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에이미가 보낸 편지였다.
에이미는 샐리가 떠나는 날까지 슬피 울었다. 그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파 샐리는 그녀에게 자신의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얼마 후 에이미는 매일매일 편지를 보내왔다. 에이미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무척 소소했다.
결혼 준비를 도와주던 아빠가 눈물을 터뜨렸다든가, 넷째 언니가 낳은 조카가 너무 귀엽다는 것들이었다.
편지의 말미에는 늘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샐리는 좀 괜찮아졌나요?]
그녀의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샐리는 그 글귀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수도를 떠나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괜찮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심장이 찌르르 아파 왔다. 참을 수 없는 격한 그리움에 사무치기도 했다. 알고 있었다. 이 마음은 분명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를 향한 애정과 함께 튀어 나오는 감정은 미움이었다.
아무리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봐 주어도, 과거에 보여 주었던 싸늘한 눈빛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맑게 웃어 줄 때마다, 전생의 싸늘한 조소가 떠올라 심장이 쿵쾅거려 왔다.
그를 껴안아 주고 싶고, 키스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를 할퀴어 상처 주고 싶었다.
전생의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라고, 지금의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그 미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샐리는 그의 곁을 떠났다.
이런 추잡하고 진득한 미움을 가지고는 절대 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함께할수록 서로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그녀는 괴로운 얼굴로 손목에서 찰랑이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짙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팔찌는 일전에 바르샤로 떠나기 전 그가 그녀에게 준 것이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했다.
무릎을 꿇은 채 시선을 맞춘 그가 손목에 팔찌를 채워 주며 말했다.
—돌아와서 내게 돌려줘. 아주 귀한 보물이니 누구의 손도 빌리지 말고 직접.
그가 준 모든 것을 다 두고 떠나왔건만 이 작은 팔찌 하나는 그에게 돌려주지 않고 떠나왔다.
……실수는 아니었다.
샐리는 조심스럽게 팔찌를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 * *
샐리의 일과는 무척 한가로웠다. 자고 싶은 만큼 푹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아침을 먹었다. 그 후 캬와 함께 눈이 쌓인 산맥을 거닐거나 얼음이 언 호수를 구경했다.
북부의 경관은 듣던 것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워 그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랜만에 성 아래의 마을로 나갔다. 로즈를 대신하여 시크릿 로즈의 취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수도의 귀족들 사이에 한창 인기 있었던 점술사가 북부에 들렀다는 소식을 접수했어요. 수도를 한껏 뒤흔들었던 그 힘이 진짜인지, 알량한 사기꾼인지 궁금했던 차라 아주 힘들게 예약까지 했답니다.”
로즈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날짜에 딱 손님이 들이닥칠 줄이야.”
어디까지나 그녀의 본업은 스완느 성을 다스리는 공작 부인이었다. 공작가엔 손님이 방문하는 일이 잦았고, 하필이면 날이 겹치게 된 것이다.
“떠돌이 점술사라 이날을 놓치면 취재할 기회가 없을 텐데.”
속상해하는 그녀를 위해 샐리가 대신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신세 지고 있는 처지에 그 정도 일을 돕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점술사가 머무는 곳은 작은 여관의 한 방이었다. 점술사가 정중하게 샐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액세서리를 온몸에 걸치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외양부터 무척 독특했다.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도 어딘가 신비롭게 느껴졌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걸?’
샐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준비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커튼을 쳐 어두컴컴한 방의 테이블 위에는 오묘한 빛을 띤 구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점술사가 구슬 앞에 앉아 샐리를 마주 보았다.
“제가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알 수 있나요?”
샐리의 말에 점술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 능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을 읽는 것입니다. 손님의 주변에 서린 불행의 기운이나, 축복의 기운을 미리 감지하여 미리 알려 드리는 것이죠.”
차분하며 신뢰가 가는 말투였다.
‘과연. 저러니 수도의 귀족 여인들에게 인기를 끌었겠지.’
까다로운 귀족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눈앞에 있는 여인의 능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떠나 꽤 사람을 홀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점술사가 기이한 것을 알아챈 듯 가느다래진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가 한 말은 샐리의 심장을 철렁이게 만들었다.
“손님은 생의 기회를 한 번 더 부여받으셨군요.”
“……!”
점술사는 진한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죽음의 세계에 한 번 들어섰던 영혼이 다시 생을 부여받는 것은 이 세계의 법을 깨부수는 행위. 어떻게 그런 신비로운 일이 일어난 거죠?”
그것은 샐리가 묻고 싶은 것이다. 죽음이 다가왔다고 생각하고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열여섯 살로 돌아온 후였다.
샐리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점술사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방금과는 아예 달라졌다. 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찾으려는 듯 두 손을 허공에 손짓했다.
잠시 후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토록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은…….”
그 시선이 향한 곳은 샐리의 손목에 달려 있는 팔찌였다.
“이 팔찌로군요. 그것에 실려 있는 신비로운 힘이 손님을 이 세계로 다시 불러온 것이 틀림없어요.”
그 말에 샐리의 두 눈이 흔들렸다.
‘……뭐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향해 점술사가 말했다.
“팔찌에 장식된 사파이어는 아주 강한 마력이 입혀진 보석입니다.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의 마력이라면 그 어떤 기적도 일으킬 수 있지요.”
그러고 보니 그가 그녀에게 이 팔찌를 주었을 때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소원을 이루어 주는 팔찌라고.
그때 샐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답지 않은 농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농담이 아니었단 말이야?’
점술사는 혼란에 빠진 샐리를 바라보더니 차분히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팔찌의 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신 모양이군요. 아마 누군가 팔찌를 향해 당신이 돌아오기를 아주 간절히 바랐을 겁니다. 사람의 간절한 마음은 마법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동력이니까 말입니다.”
“……!”
이 팔찌는 원래 그의 팔찌였다. 누군가 이 팔찌에 소원을 빌었다면 ‘그’밖에 없다.
그래서 샐리는 더더욱 점술사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샐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나를 무시했어요. 조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요. 그런 사람이 나를 위해 그런 소원을 빌었을 리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던 점술사가 말했다.
“손님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온전한 진실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그 말에 샐리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랑을 모르는 차가운 에스테반 공작. 자신의 감정을 무시했고, 경멸한 남자.
그래서 죽음의 문턱에 닿는 순간까지 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는 그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맹세할 만큼.
그런데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니. 그토록 매몰차게 군 남자에게 다른 감정이 있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혼란스러운 샐리의 귓가에 점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지 못했던 진실을 알고 싶으십니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시간을 돌려 사람을 되살릴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진 팔찌입니다. 강하게 염원한다면 또 한 번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요.”
“…….”
샐리는 그의 진심이 사무치게 궁금했다. 지나간 감정에 얽매인 자신이 미련스럽게 보인다 해도, 그녀는 아주 간절했다.
점술사의 말에 따라 샐리는 팔찌를 풀어 두 손안에 넣고는 눈을 감았다. 점술사는 그 옆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듯한 모습으로 두 손을 모은 샐리는 속으로 같은 말을 수십 번 외쳤다.
알려 줘, 그의 진실을.
알려 줘, 그의 비밀을.
제발 내게 알려 줘.
내가 모르는 우리의 이야기를.
그 순간 팔찌에 달린 짙푸른 사파이어에서 파란 광채가 일어났다. 마치 그녀의 마음에 반응하듯이.
* * *
새까만 밤이었다. 먹구름이 달을 가려 달빛조차 없는 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악몽 같은 밤.
망토도 두르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려온 카시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샐리!”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달려 나가는 구두와 옷 위로 질척한 진흙이 튀었지만 그런 것들은 조금도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샐리는 바짝 메마른 몸으로 볼품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핏기 없는 새하얀 얼굴은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카시스는 바들바들 떨며 그녀의 몸을 품에 껴안았다. 비를 맞아 젖은 그녀의 몸은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다.
“샐리.”
“…….”
“샐리.”
“…….”
그러나 아무리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아도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작은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아니, 죽은 것이다.
사실은 그녀를 품에 안은 순간 알고 있었다. 카시스는 무너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 니야, 아니야.”
그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카시스는 고개를 흔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품속에는 그토록 찾던 그녀가 있었다. 너무나 그리웠던 그녀의 얼굴은 메말라 광대가 튀어나오고, 입술은 비쩍 말랐다.
누구도 그녀를 사교계에서 화려하게 빛나던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의 눈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카시스의 남색 눈동자에 눈물이 한 줄기 새어 나왔다. 툭, 하고 그녀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카시스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사랑해.”
그의 첫 고백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그녀는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그의 곁에서 웃을 수 없었다.
앞으로 영원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숨이 멈추어 버렸다. 눈동자도 깜빡이지 않았다. 마치 모든 생체기능이 망가져 버린 것 같았다.
카시스는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물 밖을 빠져나온 물고기처럼 숨을 쉬지 못해 죽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가겠어.”
그녀의 곁에서 함께.
그는 생기가 사라진 눈동자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호신용 검을 빼내었다. 검은 짧지만 제 목숨을 끊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때 그의 시선이 손목에서 반짝이는 짙푸른 보석에 닿았다.
에스테반 공작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팔찌였다. 수백 년 전 세상을 뒤흔들었다는 마법사가 만든 팔찌.
그 팔찌는 기적 같은 일을 해낼 만한 신비로운 힘이 숨어져 있다고 했다.
전전대 에스테반 공작은 어린 카시스에게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대가가 필요하다고 하지. 돈 같은 것들이 아니라 마음이나 영혼 같은 영적인 것들 말이다. 그래서 에스테반은 한 번도 이 보물을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마음이나 영혼이 힘의 대가라니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카시스는 그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왜일까. 삶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 새파란 빛을 은은하게 내뿜는 팔찌가 신비로워 보였다.
죽어 있던 남색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서슬 퍼런 눈동자는 광기와 간절함이 뒤섞여 아주 오묘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네가 정말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를 다시 돌려줘.”
그는 검을 휘둘렀다.
“내 영혼 같은 건 얼마든지 줄 테니까.”
그 순간 날카로운 검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샐리는 눈을 깜빡였다.
온몸을 차갑게 적셨던 빗방울은 없었다. 새까만 밤도 아니었다.
보라색 눈동자의 점술사와 촛불이 일렁이는 이곳은 현실이었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 샐리의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날 경멸한 게 아니었어요.”
“…….”
“날 싫어하지 않았어.”
“…….”
“……그도 날 사랑했어요.”
샐리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처연하기만 한 울음은 아니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처럼 기쁘고 슬픈, 아주 기묘한 울음소리였다.
* * *
유난히 매서웠던 겨울바람 속에 따스한 봄바람이 스며들었다. 그사이 수도의 사교계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테오도라가 바르샤와 정식 교역을 맺기 위해 떠난 사이 사교계를 안정시킨 것은 황후였다.
황후는 오랜 시간 떠나 있던 시간을 채우려는 듯 사교계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황후의 적극적인 모습에 겁을 먹었다. 황태후를 매섭게 몰락시킨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후는 그 일 이후로 절대 사사로운 감정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없었다. 엄하지만 부드러웠고, 무뚝뚝했지만 이따금 보이는 미소는 진심이었다.
또한 그녀는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자신의 파벌을 만들어 사교계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제 막 사교계에 첫 발을 내딛는 영애들을 아주 살뜰하게 챙겨 주었다. 마치 자신이 딸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을 해 주는 듯이.
이내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황후를 존경하게 되었다.
카모라는 바르샤에서 돌아와 에이미의 웨딩드레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드레스를 만들어 주겠다며 쉬지 않고 바느질을 하는 카모라의 입에 에이미가 달콤한 케이크를 넣어 주었다.
에이미는 힐끗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어지럽게 쌓인 수십 장의 종이에는 아름답고 독특한 드레스가 그려져 있었다.
카모라가 바르샤에서 배워 온 자수가 수놓아진 에이미의 웨딩드레스는 사교계를 뒤흔들 것이다. 에이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한테는 너무 과한데.’
물론 과한 것은 과한 것이고 기쁜 것은 기쁜 것이다. 상기된 얼굴로 에이미는 카모라의 입 안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더 넣어 주었다.
벨라도나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귀족들도 조용해졌다. 귀족에게 이럴 수는 없다며 시끄럽게 굴던 이들도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침묵했다. 엘리제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제는 찾아오는 이들의 면회를 모두 거절했기에 최근의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명, 샬롯만은 예외였다. 처음에는 아들을 위해 얌전히 있는 듯하던 그녀는 때때로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란을 일으켰다.
그녀가 또 간수 한 명의 머리채를 붙잡고 싸움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황제는 이마를 내리눌렀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황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 기운의 반의반만이라도 카시스에게 주면 좋을 텐데.’
황제가 그런 걱정을 할 정도로 카시스의 얼굴은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늘 일에 파묻혀 긴 시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얼굴은 이전과는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도도하고 고고해 보였다면 지금은 어딘가 보는 이를 애달프게 만들었다.
“주인님!”
에반의 목소리에 서류를 넘기던 카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늘 차분하던 에반의 얼굴에 다급함이 묻어 있어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에반이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매우 좋지 않은 일이 터졌을 때뿐이다. 예상대로 에반에게 흘러나온 말은 평범한 내용이 아니었다.
“로즈 부인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에반은 카시스의 앞에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새하얀 봉투에는 ‘로즈’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카시스가 이 편지를 받아 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샐리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봉투가 한 장 도착했다. ‘로즈’라는 가명으로 보내온 봉투에는 아주 짧은 편지가 한 줄 적혀 있었다.
[샐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후 한 달에 한 번씩 편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늘 내용은 샐리가 잘 지내고 있다는 한 줄의 글귀가 다였다.
그 짧은 글귀에 카시스는 위로받았다. 그녀는 그가 잡을 수 없는 먼 곳에 가 있지 않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그를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최근 로즈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 며칠 전. 시기상 아직 다음 편지가 도착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카시스는 불안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이전과는 달리 편지에는 제법 긴 글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편지의 첫 줄을 보는 순간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샐리에게 일이 좀 생겼어요. 얼마 전 산맥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져 조금 다쳤답니다.]
카시스가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당장 말을 준비해! 북부에 갈 것이다!”
에스테반 저택을 나온 카시스는 쉬지 않고 달렸다. 그가 향한 곳은 북부의 스완느 공작성이었다.
차가운 겨울과 눈의 성,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곳.
수도에서 북부까지 가려면 열흘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북부의 스완느 공작령에 도착했다.
며칠째 쉬지 않고 달려온 카시스의 얼굴은 파리해져 있었다. 내내 말을 타고 달려와 온몸의 근육이 당겨 고통스러웠다. 지친 말이 ‘히잉’ 하고 작은 울음소리를 냈지만 도저히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카시스는 이 엄청난 불안감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세상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지독한 두려움, 무서움.
‘안 돼. 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보내지 않을 거야!’
그러나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더 이상 빠르게 말을 몰 수 없었다. 관문을 지나 들어선 도시의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 복작거렸기 때문이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마차나 말은 지나가기도 힘을 정도였다.
‘이래서 관문의 병사가 말을 두고 가는 게 나을 거라고 한 거군.’
눈썹을 찡그리며 마을 뒤쪽으로 보이는 새하얀 성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가면 그녀가 있는데 마음대로 달려갈 수가 없으니 속이 터졌다.
결국 그는 말에서 내렸다. 이런 인파 속에서 말을 모느니 걷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다. 고삐를 잡고 걷던 그의 시야에 선명한 붉은색 머리카락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카시스는 마치 지독한 버릇처럼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수많은 인파 속에 한 여인이 걷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찰랑였던 붉은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땋아 길게 늘어뜨렸고,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장식이 거의 없는 소박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의 그녀는 북부의 평범한 아가씨 같았다.
그래서 카시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역시 그녀가 맞았다.
“샐리?”
그의 입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그녀는 듣지 못한 듯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사라질까 두려워 카시스는 그녀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샐리!”
커다란 목소리에 많은 이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샐리와 카시스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카시스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를 만났다는 기쁨과 다쳤다는 그녀를 향한 걱정.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선연한 원망이 생각났다.
왜 찾아왔냐고 화를 내면 어떡하지.
‘아직도 날 미워한다고 하면…….’
식은땀이 난 주먹을 꾹 쥔 그를 빤히 바라보던 샐리가 말했다.
“……그러니까, 음. 저를 아시는 분이죠?”
“……!”
카시스는 마치 아주 무거운 흉기로 머리를 가격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당황스러움에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는 카시스를 향해 샐리가 눈썹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며칠 전에 머리를 좀 다쳤거든요. 그 쇼크로 기억이 조금 날아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제 상태가 좀 평범하지는 않아요.”
“…….”
믿기지 않는 말에 카시스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물었다.
“괜찮은 겁니까?”
“네. 다행히 다른 곳은 아주 멀쩡해요.”
샐리는 배시시 웃었다.
그 말대로 그녀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복숭앗빛의 두 뺨과 반짝이는 눈빛은 수도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굳어 버린 카시스를 향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카시스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이런 질문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카시스입니다.”
“와. 멋진 이름이네요, 카시스.”
빙긋이 웃으며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가 카시스의 귓가를 크게 울렸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아무런 미움도 없었다. 처음 보는 이를 향한 순수한 호기심만 있을 뿐이었다.
“차림새를 보니 외지에서 오셨나 보네요. 봄축제를 구경하러 오셨나요?”
“봄축제…….”
카시스는 그제야 왜 이렇게 거리가 복잡한지 깨달았다. 봄꽃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이 시기는 북부의 가장 큰 축제인 봄축제가 열리는 시기였다.
그제야 그의 눈에 거리의 풍경이 제대로 보였다. 곳곳에 아기자기한 봄꽃이 장식되어 있었고, 수많은 이들이 화사한 모습으로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외지인으로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특히 미혼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무척 상기된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여인들에게 말을 거는 사내들도 눈에 띄었다.
카시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본 샐리가 쿡 하고 웃으며 말했다.
“축제 기간 동안만큼은 원하는 이성에게 말을 걸어도 무례한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면 자유롭게 파트너 신청을 한답니다. 호감이 간다면 함께 축제를 구경하기도 하고요. 그게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기도 하죠. 그래서 봄축제는 구애의 축제라고도 불리기도 해요.”
그 말에 카시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카시스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꼼꼼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많은 이들이 이쪽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나 몇몇 사내들은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카시스가 사라지는 순간 당장에라도 그녀를 향해 다가올 것 같았다.
‘이 늑대 같은 놈들이!’
카시스가 냉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사내들이 그 기세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지만 거기까지였다.
겁에 질린 것이 뻔한데도 그들은 쉽사리 그녀에게서 멀어질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카시스의 눈빛에 힘겹게 맞서는 이들도 있었다. 카시스는 그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흉악해진 그의 분위기에 샐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장이라도 이 흉악한 축제에서 도망가자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에게 그럴 권한은 없었으니까.
결국 그가 꺼낸 말은 아주 정중한 부탁이었다.
“저는 어떠십니까.”
“네?”
카시스는 곧게 허리를 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내리깐 남색 눈동자와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당신의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샐리는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몰골이 조금 엉망이긴 했지만 누구나 시선을 줄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정중하게 구애를 하니 어느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그녀가 고양이처럼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좋아요.”
샐리는 그의 손 위로 손을 포개었다.
두 사람이 함께 거리를 거닐자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섬세한 선을 가진 수려한 남자와 붉은 머리카락의 화려한 여인. 북부에서 보기 드문 느낌의 미남미녀가 나란히 서서 걸으니 눈에 띌 수밖에.
대부분 아름다운 두 남녀를 향해 순수한 감탄의 눈빛을 보냈지만 아닌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카시스와 샐리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기도 했다. 마치 사랑의 연적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 엄청난 시선에 샐리가 카시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들 우리를 보고 있네요.”
“당신이 미인이니까요.”
그 말에 샐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내 귓가까지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톡 쏘듯 말했다.
“보기보다 부끄러운 말을 잘하시네요.”
그래도 그 말이 아주 싫지는 않은 듯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래서 카시스의 눈도 부드럽게 휘었다.
북부의 겨울이 끔찍할 만큼 길었기에 더더욱 봄을 맞는 축제는 성대하고 활기가 넘쳤다.
북부의 요정으로 변신하여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아이들, 수줍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세상 끔찍한 얼굴로 물건을 파는 상인까지.
수도의 축제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아이 같은 얼굴로 거리를 구경하던 샐리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빛냈다.
“잠깐만요.”
이내 돌아온 그녀를 본 순간 카시스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뽀얀 솜사탕이 그녀의 양손에 하나씩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마력석을 이용해 만들기에 이런 축제날에만 볼 수 있는 귀한 디저트이기도 했다.
샐리가 천진한 얼굴로 솜사탕 하나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선물이에요. 정말 귀엽죠?”
귀엽기는커녕 카시스에게는 아주 무시무시한 악마의 숨결을 모아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해맑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는 그녀가 건넨 악마의 숨결, 아니 솜사탕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마치 제가 가져온 물건을 칭찬받고 싶어 하는 고양이처럼 그를 향해 눈을 빛냈다.
결국 카시스는 그 눈빛을 이길 수 없어 솜사탕을 한 입, ‘앙’ 하고 물었다.
이내 그의 눈이 커졌다. 이건 예상외였다. 그래, 예상보다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달았다.
‘이건 암살용이 아니라 고문용이군.’
그렇게 생각될 만큼 지독한 단맛이었다. 카시스는 입을 틀어막고 눈을 내리깔았다. 파르르 속눈썹을 떠는 그를 보며 샐리는 당황했다.
“미안해요. 달콤한 걸 싫어하는지 몰랐어요.”
“괜…… 찮습니다.”
“거짓말. 지금 얼굴이 얼마나 힘들어 보이는데요.”
샐리가 속상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저 때문에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어요. 돌려주세요.”
그러나 카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몇 번이나 달래도 고개를 내젓는 카시스를 향해 샐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시네요.”
“기껏 받은 선물인데 되돌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카시스는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눈이 조금 커진 샐리는 곤란한 듯 웃어 버렸다.
“먹지도 못하면서. 집에 가져가서 유리관이라도 씌워 두려고요?”
“좋은 생각이군요.”
그 말투가 너무나 진지해 샐리는 결국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저토록 진중한 얼굴이라면 유리관을 씌우는 것도 모자라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준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이건 어때요?”
샐리는 다 먹어 버린 그녀의 빈 막대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제 몫의 솜사탕을 다 먹어서 당신의 손에 들린 솜사탕이 너무너무 탐이 나거든요.”
그녀는 그의 앞에 마주서서 말했다.
“한 입만 주세요.”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카시스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입가로 솜사탕을 가져다 대었다. 이내 앙, 하고 동그랗게 입을 벌린 그녀가 솜사탕을 한 입 가득 삼켰다. 샐리가 어린 소녀처럼 웃으며 말했다.
“달콤한 구름을 입에 문 것 같아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카시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꼭 껴안을 뻔했다.
‘이 악마 같은 솜 덩어리보다 당신이 더 위험해.’
그는 힘겹게 그 말을 삼켰다.
솜사탕을 해결한 후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수많은 좌판이 쭉 늘어선 곳이었다. 샐리는 눈을 빛내며 좌판 위의 물건들을 구경했다.
색이 고운 돌로 만든 반지, 색실로 꼰 팔찌, 봄꽃을 말려 만든 유리병.
하나하나 꼼꼼히 구경하던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반짝이는 머리핀을 파는 곳이었다.
그녀는 한 머리핀을 바라보고는 감탄을 내뱉었다. 작은 유리알이 장미 모양으로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는 머리핀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마음에 드십니까?”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카시스가 묻자 샐리가 머리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햇빛에 비쳐 반짝반짝 하잖아요. 정말 너무 예뻐요.”
카시스는 그 모습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반짝이는 것에 눈을 떼지 못하는 아기 고양이 같군.’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상인을 향해 말했다.
“숙녀분께서 보고 있는 장미꽃핀을 주게.”
그녀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는 값을 지불했다. 두 눈을 깜빡이는 샐리를 향해 그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까 받은 솜사탕의 보답입니다. 그러니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받아 주시면 좋겠군요.”
그녀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카시스는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언젠가 그녀가 차가운 눈빛으로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 관계일 뿐이죠. 그러니 저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제게 부담이 될 뿐이에요.
그녀는 선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기억에도 없는 남자의 선물 따윈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마워요.”
샐리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그의 손에 있던 핀을 건네받았다. 그녀가 머리핀을 머리 위로 올리고는 두 볼을 수줍게 물들이며 웃었다.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카시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카시스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잘 어울립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거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광장에 자리 잡은 악단이 우아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봄축제의 하이라이트, 봄의 왈츠가 시작되었다.
많은 이들이 광장에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귀족들처럼 제대로 배운 춤은 아니었다. 현란한 스텝이나 손놀림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두 손을 마주 잡고 스텝을 맞추면 그만이었다. 화려한 기교는 없었지만 어딘가 보는 이의 심장이 간질거리는 춤이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샐리도 카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함께 춰요.”
카시스는 춤추는 것을 싫어했다. 귀족의 교양이니 어쩔 수 없이 배웠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런 거리에서 많은 이들과 뒤섞여 추는 춤은 더더욱 그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좋습니다.”
그녀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카시스는 그녀와 손을 잡고 광장으로 섞여 들어갔다.
화려한 외모의 두 사람이 광장에 들어서자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내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서로를 향해 맞절을 한 두 사람의 모습이 우아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손을 잡은 두 사람이 물 흐르듯 유려한 스텝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남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샐리가 말했다.
“춤을 잘 추시네요.”
“아주 엄한 선생에게 배웠으니까요.”
“선생을 싫어했나 보죠?”
“어찌나 깐깐한지 스텝 하나를 틀리면 반나절을 잔소리하던 분이었습니다. 좋아할 수 있을 리가.”
그 말에 샐리가 눈썹을 내리며 쿡쿡 웃었다.
“그래도 그 덕에 이렇게 멋진 춤을 출 수 있게 되었잖아요. 당신이 리드를 잘해 주어서 춤추기가 아주 편한걸요.”
그 말에 카시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생애 처음으로 깐깐한 댄스 선생에게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봄바람에 흘러온 연한 비누 향은 그녀의 향기였다.
카시스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석양에 물든 그녀는 아주 행복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맑은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카시스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어떡하지.’
아주 잠깐 욕심을 부릴 생각이었다. 그녀는 잠시 기억을 잃었을 뿐 여전히 자신을 용서한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 척 기억을 잃은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은 그녀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카시스는 오늘이 지나면 다시 그녀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다시 그녀를 떠날 수 있을까? 그녀가 없는 곳에서 다시 그녀를 기다릴 수 있을까?’
지독한 이기심이라도 좋으니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처럼 아름답게 웃는 그녀의 곁에서.
에스테반이 아닌 카시스로.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용서를 받아야 했다.
카시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샐리의 발걸음도 멈추었다. 모두가 춤을 추는 속에서 가만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시간조차 멈춘 것만 같았다.
“카시스?”
“…….”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녀가 안타까운 얼굴로 손을 올렸다. 이내 그의 볼에 닿은 그녀의 손이 그를 위로하듯 어루만졌다.
“꼭 울 것처럼…….”
“…….”
그 따스한 체온에 그의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조금 후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난 당신과 이렇게 다정하게 춤을 출 수 있는 사이가 아닙니다.”
카시스는 사실 그녀가 왜 그토록 자신을 미워하는지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깊은 원망이 가득한 눈빛이, 한순간 지나간 선명한 꿈이, 그리고 그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정체 모를 아픔이 그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너는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당신은 나를 무척 미워하고 증오하죠. 나는 당신 앞에서 죄인인 사람입니다.”
“…….”
샐리의 눈이 커졌다. 남색 눈동자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기도 했고, 스스로에 대한 원망의 눈물이기도 했으며, 그녀를 향한 갈망의 눈물이기도 했다.
카시스는 아직까지 그의 얼굴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상처를 줘서 미안.”
“…….”
흐느낌이 어려 있는 그 사과는, 다 큰 성인 남자의 세련된 사과가 아니라 서툰 아이의 절절한 외침 같았다.
샐리는 굳은 얼굴로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그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카시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을에 비친 금빛 눈동자는 방금과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었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자신을 기억해 냈다면 저런 눈빛으로 바라볼 리가 없다. 그래서 카시스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따사로운 눈빛은 여전했다.
커다래진 남색 눈동자를 향해 샐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을 잊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그럼 왜…….”
“사실은 이렇게 당신과 만나고 싶었으니까.”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녀가 말했다.
“에스테반 공작이라는 이름도, 미천한 여자라는 위치 따윈 잊고, 그저 평범한 남자와 여자로.”
“…….”
“카시스와 샐리로.”
“…….”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샐리의 목소리는 이제 물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미안해요. 당신을 속여 화가 났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
카시스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를 품에 안은 다부진 손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져 샐리는 눈을 꼭 감았다.
카시스가 애달픈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럼 이제 나를 원망하지 않아?”
“네.”
“이제 네 옆에 있어도 돼?”
“네.”
“너를 사랑해도 돼?”
샐리가 그를 껴안으며 말했다.
“……네.”
사랑한다는 말과 뜨거운 입술이 맞닿은 것은 동시였다. 카시스는 어느 것 하나 나중으로 미룰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첫 키스였다. 샐리는 이 입맞춤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너무 커 귓가까지 쿵쿵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해요, 카시스.”
그녀의 고백이 처음으로 그에게 온전히 닿는 순간이었다. 그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물이 어린 얼굴로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거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그 자리에 있었다. 더 이상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그렇게.
먼저 입을 뗀 것은 샐리였다.
“밤새 이렇게 서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이만 가요, 우리.”
우리라는 말에 카시스의 심장이 간지러웠다.
“어디로?”
샐리는 눈썹을 내리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북부에서 갈 곳은 한 곳뿐이다.
“스완느 공작성으로 가요.”
로즈는 밤늦게 도착한 두 사람을 차분하게 맞이했다. 카시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언짢은 기색이라든가 놀란 기색도 없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먼 길을 오셔서 피곤하시겠군요. 잠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들어가 쉬시죠.”
그러고는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캬는 내 방에서 잠들었으니 신경 쓰지 말고 오붓한 시간 보내도록 하세요.”
“……!”
그 말에 샐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카시스의 얼굴에는 화색이 맴돌았다.
로즈가 미리 마련해 놓은 카시스의 잠자리는 아주 파격적이었다. 그녀는 따로 방을 마련하지 않고 샐리의 방에 그가 쓸 베개와 이불을 세팅해 놓았다.
“마님. 아무리 그래도 결혼도 안 한 성인 두 분인데 너무 남세스럽지 않나요.”
로즈를 모시는 최측근 하녀가 민망한 얼굴로 물었다. 침대 위에서 잠이 든 캬를 쓰다듬으며 로즈가 대답했다.
“방을 따로 마련해 보았자 쓰지도 않을걸. 왜 쓸데없이 일을 두 번 하니.”
그 말에 하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로즈는 내리깐 눈매로 말을 이었다.
“고용인들에게 그 방 근처는 가지 않도록 주의나 잘 주렴. 아침에도 시중들러 들어갈 필요 없이 식사만 문 앞에 두라고 전하고.”
방에 들어선 샐리는 속으로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늘 혼자 쓰던 그녀의 침대 위에는 이불 하나와 베게 하나가 더 놓여 있었다.
‘세상에. 로즈 부인.’
그 의미가 너무나 직접적이어서 샐리의 귀 끝까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자신보다 당혹스러워 할 줄 알았던 카시스의 반응은 의외로 무던했다. 그는 꽤나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과연. 현명한 부인이군.”
그 말에 샐리가 눈을 깜빡였다.
‘이 남자. 뭔가 좀 변하지 않았어?’
샐리의 마음속을 알 리 없는 카시스는 시선을 돌려 방 안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흔적은 많지 않았다. 소박한 드레스 몇 벌과 테이블 위에 놓은 화장품 몇 개.
“짐이 거의 없군.”
“저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일 뿐이니까요.”
그 말에 카시스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곳을 떠나면 어디로 가려고 했어?”
샐리는 피식 웃었다. 그의 말투는 꼭 나를 떠나 이곳보다 더 먼 곳으로 가려던 것이냐고 원망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샐리는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 생각이었다. 그를 향한 미움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면 그 미움을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그 미움 따윈 상관없을 만큼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 때까지.
그리고 그 후에는…….
“당신에게 가려고 했어요.”
달콤한 목소리에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샐리는 조금 쑥스러운 듯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정말이에요. 당신이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카시스는 샐리에게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샐리는 눈을 감았다.
이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닿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을 음미하듯 쪽쪽거리더니 이내 뜨겁고 부드러운 혀가 밀려 들어왔다.
“하아…….”
샐리의 벌어진 입 사이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전생의 그와는 전혀 다른 입맞춤이었다. 그때는 주체 못 하는 강렬한 욕망뿐이었다면 지금은 조심스러운 배려가 느껴졌다.
마치 샐리가 싫어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한 느낌. 그러면서도 제 욕망을 어찌하지 못해 혀를 세차게 감아올렸다.
그 간극이 샐리를 흥분시켰다. 그의 혀가, 입안이 아닌 뱃속을 휘젓는 느낌이었다.
맞닿은 입이 떼어졌을 때는 서로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후였다. 어느새 두 사람의 몸은 침대 위로 쓰러져 있었다.
샐리는 베개 위로 새빨간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 채 카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매혹적이라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 뻔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의지로 한 자락 이성을 잡았다. 힘겨운 얼굴로 눈을 내리깐 그가 내뱉은 말은 의외의 것이다.
“씻고 올게.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꼴이 엉망이야.”
그는 아무래도 그 점이 무척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의 귓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결국 샐리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 눈에 선연한 욕망이 가득한 채로 저런 말을 하다니. 과연 그답다고 해야 할까.
그녀가 고양이 같은 눈을 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같이 씻을까요?”
“……!”
그 말에 카시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당황스러움은 잠시였다.
“꺅!”
샐리가 작은 비명을 내뱉었다. 그가 두 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카시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은 생각이야.”
뽀얀 수증기가 욕실 안을 가득했다. 카시스는 샐리를 욕조 위에 앉힌 후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얀 셔츠를 입은 카시스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등을 조이고 있는 끈을 풀었다.
여자의 드레스가 이토록 벗기기 힘든 것인 줄은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꽉 조여진 끈을 하나하나 푸는 것은 꽤 인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끈이 다 풀린 후에야 그녀의 몸에 꼭 붙어 있던 옷이 느슨해졌다. 카시스는 천천히 옷을 내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풍만하고 새하얀 가슴에 카시스의 손이 멈추었다.
잠시 후 카시스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의 손길은 아까보다 더 조급해 보였다. 그는 그녀의 허리춤에 멈춰있던 드레스를 단번에 그녀의 발끝까지 끌어당겼다.
욕조 위에 걸터앉은 샐리는 온전한 알몸이 되었다. 두 볼이 살짝 붉어진 샐리가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몸을 가리거나 도망가진 않았다. 마치 그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싶다는 듯이.
카시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간이 꽤 길었다.
그래서 샐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해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아무 생각도 안 나.”
그 말에 샐리가 눈썹을 내리며 쿡하고 웃었다.
“그건 곤란한데.”
그 미소가 너무나 예뻤다.
카시스는 마치 영혼이라도 빼앗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현신한 여신을 만난 것 같은 황홀한 눈빛이었다.
잠시 후 그가 몸을 움직였다. 샐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그가 입을 맞출 것이라는 예상은 틀렸다.
카시스가 그녀를 번쩍 안아 욕조 안에 넣어 버렸기 때문이다.
풍덩. 뜨거운 물속에 들어간 샐리는 눈을 깜빡였다.
“뭐, 뭐예요?”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욕조 바깥에 앉아 옷깃을 팔꿈치까지 걷어붙이고 있었다. 마치 목욕시중을 드는 사람처럼.
“씻겨 줄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샐리는 놀라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같이 씻자고 한 건 자신이었지만 이런 전개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시중을 드는 것보다 받는 것에 훨씬 익숙한 에스테반 공작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는 꽤 능숙하게 붉은 머리카락을 감겨 주기 시작했다. 그 손길은 마치 아기를 씻기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어느새 샐리는 나른한 얼굴로 욕조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깨끗이 씻긴 카시스는 두 손에 비누를 비벼 거품을 냈다.
샐리는 반쯤 감은 눈으로 생각했다.
‘장미꽃 향이네.’
진한 장미향을 머금은 그의 손이 처음 닿은 곳은 그녀의 손이었다. 비누 거품이 난 그의 손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조물거리자 샐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간지러워요.”
이내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따라 부드럽게 올라왔다. 능숙하게 움직이던 그가 손을 잠시 멈추었다. 샐리도 웃음을 멈추고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물에 반쯤 잠겨 있는 그녀의 가슴이었다. 부드럽고 풍만한 살덩이 위로 분홍빛 유두가 봉긋하게 튀어나온 모습은 고혹적이며 외설적이었다.
남색 눈동자에는 방금까지는 없던 열기가 어른거렸다. 카시스는 마른 입술에 침을 한번 삼키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동그란 가슴 위로 닿았다. 샐리는 짜릿한 감각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애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담백했다. 그는 제 손안에 들어온 유방을 제멋대로 쥐락펴락하지도 않았고, 젖꼭지를 짓궂게 잡아당기지도 않았다.
비누 거품이 묻은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일까.
샐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을 이렇게 뜨겁게 만들어 놓고도 그의 얼굴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이 얄미워 샐리가 손을 뻗어 그의 셔츠깃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샐리가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씻겨 주기만 할 건데요?”
“그럼?”
순진한 물음에 샐리는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주친 눈빛에 작은 원망은 눈독이듯 사라졌다.
차분한 얼굴과 달리 그의 남색 눈동자에는 질척한 욕구가 서려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필사적으로 참는 사냥개처럼.
주인이 허락한 순간 그는 본능뿐인 짐승이 되어 달려들 것이다. 그 점이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샐리가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해요. 당신이 진짜 하고 싶은 대로.”
그 순간 그가 변했다. 지극히 정중했던 남자는 사라지고 본능에 젖은 흉악한 수컷만 남았다.
카시스는 그대로 그녀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흉포한 입맞춤이었다.
그의 혀는 마치 그녀의 혀를 뽑아버릴 것처럼 거칠게 감겼다.
춥, 추읍.
타액이 뒤섞이는 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 그의 키스는 너무나 집요해서 숨을 쉴 여유도 주지 않았다.
“하아.”
그가 입을 뗐을 때야 샐리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샐리는 열기에 휩싸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단추를 잡아 뜯듯 셔츠를 벗고 바지를 벗어 내렸다. 에스테반공작의 우아함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순식간에 그를 감싼 옷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나체가 드러났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하고 섬세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은 마치 신이 만든 예술품 같았다.
그러나 그 몸을 오래 감상할 수는 없었다. 그가 그녀를 덮치듯 욕조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첨벙. 급작스럽게 늘어난 무게에 가득 차 있던 욕조의 물이 넘쳐흘렀다. 출렁이는 물살 속에서 그는 그녀의 오른쪽 귀를 깨물었다.
“꺄앗!”
샐리가 작은 비명을 내뱉었다. 그녀의 귓불을 깨문 채로 그가 말했다.
“늘 궁금했어. 이곳에 입을 맞추면 넌 어떤 소리를 낼까.”
그는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그녀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귀에서 시작된 자극이 심장까지 짜릿하게 느껴져 샐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귓볼을 할짝이던 혀가 뾰족하게 세워져 귓구멍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흣!”
강렬한 자극에 샐리는 비명을 내지르며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나 그녀의 다리 사이에 들어앉은 그의 몸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 그만…….”
예민한 곳만 만져대니 미칠 것 같았다. 샐리는 결국 고개를 내저으며 힝,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그제야 카시스의 혀가 그녀의 귓가에서 내려왔다. 그의 혀는 긴 뒷목을 타고 내려와 동그란 가슴 위에 안착했다.
그는 봉긋한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하앙!”
이미 한차례 그의 손길이 닿아 예민해진 곳이었기에 자극은 더더욱 생생했다. 그녀의 입에서 주체할 수 없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마치 맛있는 과육이라도 먹듯이 그녀의 가슴을 쉴 새 없이 빨았다.
젖꼭지가 바짝 섰다. 샐리는 허리를 뒤틀며 그가 주는 쾌감에 몸을 맡겼다.
잠시 후 샐리의 눈이 커졌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어루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그의 몸 때문에 다리가 한껏 벌어져 있던 자세였다. 그의 손은 너무나 쉽게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어 여린 속살 위에 닿았다.
샐리의 금빛 눈동자가 흥분으로 떨렸다.
“아……!”
붉은 음모 사이에 숨어 있던 여린 살이 흥분으로 벌렁거렸다. 그의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안을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긴 손가락은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부드러운 점막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여린 속살이 쑤셔지는 쾌감에 샐리는 나른한 고양이 같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으응…… 좋아.”
어느새 그녀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껴안고 그의 다리 위에서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귓가를 파고드는 그녀의 목소리에 카시스는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꼿꼿하게 선 젖꼭지가 가슴에 닿아 그를 흥분시켰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질 안이 움찔하며 조여드는 게 느껴졌다.
카시스는 손가락을 길게 뻗어 안쪽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깊숙한 곳의 내벽에 손끝이 닿았다고 느낀 순간 샐리가 허리를 튕기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흥!”
방금 전의 기분 좋은 신음과는 전혀 다른 음이었다. 카시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질 안의 손가락을 거세게 움직였다. 찌걱이는 소리와 함께 물살이 참방거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뜨거운 물이 안쪽으로 스며들어 자극을 배가시켰다.
“흐읏! 아…… 아앙!”
잠시 후 샐리가 허리를 뒤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에 욕조의 물과는 다른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분출한 것이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샐리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카시스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진짜 하고 싶은 건 아직 못 했어.”
그 말에 샐리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잔뜩 예민해진 질구 위로 무언가가 느껴졌다. 성난 것처럼 꼿꼿이 선 그의 성기였다.
샐리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는 이제 막 사정을 끝낸 후였다. 여운이 다 가시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몸으로는 첫 경험이잖아.’
자극이 얼마나 강렬할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두려움마저 일었다.
그러나 싫다는 말을 나오지 않았다. 두려운 만큼 선연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샐리는 살짝 다리를 벌렸다. 흥분으로 부어오른 도톰한 질구가 살며시 벌어졌다. 당장이라도 들어오라는 것처럼.
야릇한 광경에 카시스는 힘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이미 그는 한계였다.
그는 움찔거리는 질구 안으로 성기의 머리 부분을 박아 넣었다.
“하읏!”
생경한 자극에 샐리는 신음을 내뱉었다. 마치 뜨거운 인두가 생살에 닿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카시스도 마찬가지였다.
“크읏.”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고작 성기 끝이 들어갔을 뿐인데 자극이 너무 셌다. 그 부드러움만으로 사정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본능은 고작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움직여 그녀의 질 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첫 진입과 달리 안을 파고드는 건 수월치 않았다. 그녀의 안은 너무 좁았다.
‘역시 이 몸은 처음이구나.’
샐리는 생경한 고통에 숨을 들이마셨다. 남자에 익숙했던 전생과 달리 지금의 몸은 침입자에 익숙지 않았다.
성기의 끝만 들어와 콕콕 쑤시니 감질맛이 났다. 거대한 것이 어서 들어와 몸을 꿰뚫어지길 바랐다.
샐리는 숨을 들이마시며 다리를 벌렸다. 근육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질 안이 넓어졌다. 그의 성기가 천천히, 인내심 있게 질 안을 파고들었다.
조금 후,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그의 성기 끝이 닿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숨을 멈추었다. 찌릿한 것이 몸을 가르듯 스쳐 지나갔다.
“끝까지 다 들어갔어.”
카시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요.”
어느새 샐리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카시스의 눈썹을 찡그렸다.
“아파?”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고 욕망으로 눈이 번뜩이는 주제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가 귀여웠다.
샐리는 질 안을 가득 채운 이물감을 느끼며 속삭였다.
“움직여 줘요.”
“……!”
그 순간 질 속에 있던 성기가 조금 더 부풀어 올랐다. 거대해진 성기는 마치 금방이라도 사정을 할 것처럼 움찔거리며 질벽을 두들겼다.
“으읏.”
생생한 느낌에 샐리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의 성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성기를 살짝 바깥으로 뽑아내었다 다시 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을 몇 번을 반복하자 그곳은 능숙하게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찌걱이는 소리와 함께 맞닿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푸웃. 푹. 푸욱.
욕조에 차 있는 물 때문에 성기가 파고드는 소리는 더욱 컸다.
“아앙! 읍! 아앗!”
뿌연 욕조에 샐리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속 안이 꽉 조여와 카시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소중히 하고 싶다. 아프지 않게, 기분 좋게 대해 주고 싶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달리 육체는 이미 자신의 제어를 벗어나 있었다.
마치 그녀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릴 것처럼 그의 성기가 세차게 움직였다. 성난 소처럼 허리가 움직였다.
이윽고 한계까지 자극당한 성기가 뜨거운 것을 분출했다. 격한 쾌감이 두 사람의 몸을 관통했다.
“흐읍!”
“아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넓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사정은 길었다.
뜨거운 것이 안을 채우는 느낌에 샐리는 몸을 움찔거렸다.
“하아, 하아.”
샐리는 두 팔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방금 전까지 성난 소처럼 움직이던 그가 얌전히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땀에 젖은 피부가 맞닿자, 펄떡이는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샐리는 고개를 숙여 어깨에 기댄 카시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친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은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빨개진 눈매와 풀린 눈매가 야릇했다.
샐리가 땀에 젖은 은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엄청 좋았어요.”
“……!”
그 순간 모든 것을 쏟아낸 듯 나른해져있던 남색 눈동자에 선연한 욕망에 서렸다. 그가 말했다.
“나도.”
아직 빼지 않고 있던 성기가 다시 우람해진 것이 느껴져 샐리는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결국 그 상태로 한 번 더 사랑을 나누었다. 두 사람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에는 욕조의 물이 다 식은 후였다.
샐리는 결국 그에게 안겨서 나와야만 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카시스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물속에 오래 있는 바람에 퉁퉁 부어 버린 손가락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쪽쪽거리는 모습에 샐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허벅지에 닿아있던 그의 성기가 다시금 불끈해 있었기 때문이다. 샐리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그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했지?”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야릇함과 순진함이 반반씩 뒤섞인 아름다운 얼굴에 샐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처럼 수줍은 첫날밤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샐리도 그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그가 열정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가 열 번째 파정을 하고, 열한 번째 그곳을 세웠을 때 샐리는 기절하듯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는 속으로 세상 사람들이 모를 사실을 내뱉었다.
‘에스테반의 대단함은 바로 이곳에 있어!’
* * *
샐리가 눈을 뜬 것은 새벽녘이었다. 천천히 뜬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카시스의 얼굴이었다.
그의 눈빛은 흉포한 짐승 같던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선연한 욕망을 쏟아낸 그의 남색 눈동자는 고요하고 차분했다.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로 샐리가 그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
“너무 예뻐서.”
“…….”
“눈, 코, 입, 머리카락.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어.”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진지한 목소리였다. 샐리는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무슨 말이야?”
“당신과 내가 보냈던 또 다른 첫날밤이요.”
그 말에 카시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샐리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이 말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것인지.
그러나 샐리는 그를 다시 만나면 그가 모르는 과거의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한 차였다. 두 사람의 첫날밤에 대해 그녀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그랬을 거야.”
그의 목소리에 샐리는 눈을 크게 떴다.
“확실하게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어렴풋이 어떤 느낌 같은 것이 내 안에 남아 있어. 잘라진 기억의 조각처럼 짧은 순간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칠 때도 있지.”
카시스는 샐리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날 넌 봄꽃 같은 분홍빛 드레스를 입었던가.”
샐리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낡은 사진첩을 뒤지듯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너무 예뻐서 놀랐어.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너무 어색하고 어이가 없어서 일부러 냉정하게 널 대했지.”
그러나 두 눈을 휘며 웃는 그녀를 보는 순간 이성이 허물어져 버렸다. 그는 짐승처럼 그녀를 안았다.
그는 그 순간의 감정이 떠오른 듯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그때의 감정은 선명히 기억나. 깊은 죄책감, 짙은 후회, 그럼에도 당신을 다시 안고 싶은 욕망.”
“…….”
“너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인지 알았어.”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묵직한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샐리의 손을 잡아 손가락 하나하나를 얽었다.
“그토록 상처를 줬는데도 널 포기할 수 없었어.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끈질기게 기다리면 언젠가는 네 옆에 설 수 있으리란 생각을 포기하지 못했지.”
그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내리깐 그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 말은 마치 평생 그녀의 곁에 있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녀에게 수없이 심장이 휘둘릴 것이라는 고백처럼도 들렸다. 샐리는 심장이 조여 오는 기분을 느끼며 그를 마주 보았다.
“괜찮아요.”
“…….”
진한 남색 눈동자가 커지는 순간 샐리는 맞잡은 그의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그가 했던 것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게.
“나도 그럴 셈이니까.”
카시스는 그 말에 입술을 꾹 깨물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훅 들어오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샐리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 더 말했다.
“사랑해.”
샐리는 차근차근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던 카시스는 점점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나란 놈은 쓰레기보다 못한 놈이군.”
그답지 않게 자책하는 모습에 샐리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잘해 준 것도 많아요. 원하는 것은 뭐든지 사 주었거든요. 보석도 사 주고, 드레스도 사 주고. 저는 또 그게 당신의 사랑인 줄 알고 맘껏 사 댔고요. 당신은 그 모습을 보고 역시 사치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요.”
“…….”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카시스는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괴로운 얼굴로 ‘이 멍청한 놈!’, ‘모자란 자식!’이라며 수많은 욕설을 또 다른 자신에게 내뱉어야 했다.
어느새 샐리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마치 자신을 괴롭힌 못된 남자아이를 이르듯 그에게 상처받았던 순간의 이야기를 쫑알쫑알 이야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순간을 말할 때만큼은 분위기가 달랐다. 그녀는 떨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 위해 당신은 목숨을 바쳐 소원을 빌었어요.”
샐리는 아직까지도 그 일을 알았던 순간을 생각하면 심장이 철렁거린다. 몰랐던 그의 사랑을 알아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그런 식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너무나 두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마음과는 달리 카시스는 다행스러운 듯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특한 짓을 했군.”
그 말에 샐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기특한 짓이라뇨. 당신이 그렇게 죽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아무리 내가 죽었다고 해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자기 목숨을 함부로 끊으면…….”
“그냥 둬도 어차피 죽었을 거야.”
“…….”
“네가 죽었으니까.”
카시스는 아주 당연한 말을 하듯 태연하게 말을 내뱉었다.
“당연히 죽을 목숨으로 너를 살릴 수 있다면 내게는 손해 볼 것이 없지.”
샐리는 속으로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마 또 같은 상황이 오면 소원을 빌 것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런 일은 이제 사양이야.’
물론 전생처럼 허망하게 삶을 마감할 생각도 없지만, 그를 그런 식으로 보낼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샐리는 눈초리를 치켜뜨며 말했다.
“팔찌는 내가 가지고 있을게요.”
그 말에 카시스가 고운 미간을 모았다. 저런 위험한 물건을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마뜩지 않았다.
“그 팔찌는 선물이 아니라고 했잖아. 내게 돌아와 되돌려 달라고 말했을 텐데?”
“싫어요.”
샐리는 아이처럼 고개를 휙 돌렸다.
“샐리.”
카시스는 그녀의 이름을 말하며 손을 뻗었지만 샐리는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으고는 바짝 웅크렸다.
그녀가 저런 식으로 나오면 그가 빼앗을 재간이 없다. 게다가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를 보니 그녀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결국 카시스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틈을 봐 빼앗아야겠군.’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샐리는 절대 이 팔찌를 그에게 되돌려줄 생각이 없으니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샐리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한 팔로 얼굴을 기댄 그가 따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빛 속에 찰랑이는 은빛 머리카락, 진한 남색 눈동자는 푸른색 사파이어처럼 영롱했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더할 바 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왜 과거에는 그의 사랑만 그토록 갈구했을까, 왜 그만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이번에야말로 그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를 사랑해 주고 싶었다.
그는 평생 모를 그녀의 결심이었다.
“이리 와 봐요, 카시스.”
샐리는 방긋이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카시스는 순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을 품에 안은 샐리의 턱 끝에 살랑대는 은빛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예쁜 은색 실뭉치.”
“…….”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지칭에 카시스가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많이 사랑해 줄게.”
그런 말은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 * *
결국 두 사람이 방을 나온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에게 로즈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실 말씀이 무척 많으셨나 보군요.”
샐리와 카시스는 붉어진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캬와 카시스의 재회도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카시스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던 캬는 멈칫하더니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캬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카시스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캬아아아!”
샐리가 없는 동안 꽤 굳건해졌던 은빛 동맹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세 사람의 식사 시간은 꽤 시끄러웠다. 카시스는 캬의 공격을 받으며 식사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날 무렵 샐리가 로즈에게 말했다.
“그동안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수도로 돌아가려고 해요.”
로즈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러나 감사의 말은 필요 없어요.”
‘우린 친구니까요.’라는 말이 나올 줄 알고 샐리의 가슴은 미리 뭉클해졌다. 그러나 로즈에게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나의 호의는 꽤 비싸답니다, 샐리. 고작 말 한마디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깜빡이는 샐리에게 로즈가 말했다.
“내 호의가 정말 고맙다면 시크릿 로즈의 정보원이 되어 주세요.”
“……!”
“물론 공짜로 일을 해 달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시크릿 로즈는 전달해 주는 정보의 급에 따라 금액을 지급하고 있어요. 필요에 따라서는 취재를 위한 비용도 지원이 되고요. 그리고 북부에 놀러 오면 스완느 공작성에서 얼마간 머무를 수 있는 혜택도 제공되죠.”
로즈는 연보랏빛 눈동자를 내리깔며 우아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꽤 좋은 조건 아닌가요?”
결국 샐리는 눈썹을 내리며 웃고 말았다. 샐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로즈에게 말했다.
“가장 큰 혜택은 왜 말씀하지 않으세요?”
“……그게 무슨 말이죠?”
“부인의 진짜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요.”
그 말에 로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샐리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황성의 크리스털 홀이 열렸다. 바르샤에서 돌아온 테오도라를 위해 열린 연회였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바르샤와의 정식 교역을 성공시켰다. 황제는 대대적으로 그 업적을 치하했다.
그녀는 이제 평범한 황녀가 아니었다. 다시 일어난 황후의 친딸이었으며, 황실의 유일한 순혈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황제에게 신뢰까지 받았으니 그녀의 권력은 고작 황녀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테오도라를 축하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제국을 호령한다는 대단한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대화를 나누던 테오도라가 눈을 크게 떴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부채를 살랑이며 이야기를 나누던 여인들도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회장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장미보다 새빨간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다이아몬드가 섬세하게 수놓아진 남색의 드레스는 밤의 별빛처럼 반짝였다. 고양이를 닮은 금빛 눈동자가 선연하게 빛났다. 가슴께에는 황금 사자와 독수리가 세공된 화려한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당당한 걸음으로 테오도라 앞에 섰다. 테오도라를 향해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인사했다.
“귀국을 축하드립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
테오도라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돌아왔군, 샐리.”
“네.”
샐리는 고개를 들어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조명에 반사된 두 여인의 금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이번에는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 아니라, 데임 샐리로 저하를 돕겠어요.”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녀가 말했다.
“저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설 그날까지.”
당찬 목소리였다.
테오도라는 환하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를 연상시키는 싱그러운 바람과도 같은 미소였다.
“든든하군, 정말.”
제국 사교계에 샐리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샐리의 갑작스러운 귀환만이 아니었다. 연회가 끝날 무렵 에스테반 공작이 연회장 안에 나타났다.
많은 이들이 숨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에스테반 공작이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샐리의 앞이었다. 그가 앉아 있는 샐리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데리러 왔어.”
샐리는 부채를 살랑거리며 곤란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 말이 앙큼한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회의를 빨리 끝내 버리면 다른 귀족들에게서 불만이 나올지도 몰라요. 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할 에스테반 공작이 체면도 잊고 행동한다고요.”
“상관없어.”
그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대답하며 샐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 말에 샐리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는 조금 변했다. 더 이상 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샐리는 그의 변한 모습이 더 좋았다.
샐리는 그의 손 위에 손을 얹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
“그러게.”
테오도라가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부인들.”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여인들은 입도 다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는 빙긋이 웃으며 카시스의 팔짱을 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카시스의 얼굴에도 연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보는 이마저 얼굴에 열이 오를 만큼 다정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 연회장은 난리가 났다.
“세상에. 결국 에스테반 공작 저하와 데임 샐리가 다시 만났군요. 그러니 그녀가 돌아온 거예요.”
“역시 사랑싸움만큼 덧없는 게 없다니까요.”
“그럼 이번에야말로 데임 샐리가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되는 건가요?”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얼마인데…….”
“어머나. 공작 저하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셨잖아요. 곧 소식이 들려올걸요?”
많은 이들이 두 사람에 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이, 마차 안의 두 사람은 진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마차의 문을 닫자마자 그가 이성을 잃은 것처럼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혀는 마치 그녀의 혀를 뽑아버릴 것처럼 거칠게 감겨왔다. 숨을 쉬기도 힘들 만큼 거친 입맞춤이었다.
“……시스.”
힘겹게 목소리를 내어 보았지만 제대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샐리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속삭였다.
“내 집으로 가요.”
* * *
샐리의 집은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마련되어 있었다. 에스테반 저택으로 돌아오라는 카시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샐리가 대출을 받아 마련한 곳이다.
크기는 작았지만 예쁜 소파와 작은 액자가 걸려 있는 방은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방 크기에 비교하면 침대는 컸다. 퀸 사이즈의 침대 위에는 두 사람이 뒤엉켜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샐리와 그녀의 위를 덮친 카시스였다.
카시스는 유두를 입안에 품고는 혀로 할짝거렸다.
“흐읏.”
샐리는 야릇한 쾌감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고작 몸에 달린 살 덩어리를 만지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일까.
“아흑!”
그가 단단해진 젖꼭지를 살짝 물어 잡아당긴 순간 샐리는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비누향이 나는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손끝에 닿았다. 그러나 은색 실 뭉치는 바로 그녀의 손을 빠져나갔다.
카시스는 입술이 그녀의 가슴 아래로 내려갔다. 군살 하나 없는 잘록한 허리와 배, 살이 오른 허벅지까지. 그의 혀가 맨살에 닿을 때마다 샐리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응.”
그녀의 무릎에 입을 맞추던 카시스는 허리를 세워 앉아 그녀의 다리 한쪽을 들었다.
매끈한 종아리에 입을 맞추나 싶더니 이내 그의 혀가 발끝까지 닿았다.
“아!”
발가락에서 시작된 강렬한 자극에 샐리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그의 애무는 끝나지 않았다.
다시 올라온 그의 혀가 향한 곳은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이었다.
그의 혀가 닿기도 전에 그녀의 질은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잔뜩 흥분한 암컷의 향이 그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카시스는 그 향에 유혹당한 수컷처럼 그녀의 안에 코를 박았다. 샐리는 결국 눈물 어린 눈으로 소리 질렀다.
“싫어!”
그 말에 카시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샐리가 히잉, 하고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넣어 줘!”
살짝 갈라진 목소리에는 이미 한 조각의 이성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카시스도 마찬가지였다.
카시스는 그녀의 향기로운 속살에서 입을 떼고 괴로울 정도로 선 성기를 가져다 대었다.
“흐읍!”
두툼하고 단단한 것이 질구에 닿는 느낌에 샐리가 눈을 크게 떴다. 별다른 전희나 준비는 필요 없었다. 흥분할 대로 흥분한 그녀는 단번에 그의 것을 빨아 삼켰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숨을 멈추었다. 하나로 연결된 순간의 쾌감은 언제나 황홀했다.
잠시 후 그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녀가 흠뻑 젖었다 한들 초반은 힘들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러나 그 결심은 두 번을 못 가 날아가고 말았다. 그녀의 안은 너무나 부드럽고 뜨거웠다. 그의 것을 꽈악 조여 오는 속살은 결코 그에게 일말의 배려도 허용하지 않았다.
“하앙! 으읏, 하앗!”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단단히 선 그의 성기가 그녀의 내벽을 자극해왔다. 중력에 의해 눌려 있던 그녀의 가슴마저 위아래로 세차게 움직였다.
푸웃, 푹 하고 질척한 소리가 결합된 부분에서 선명히 새어 나왔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카시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그 말에 샐리의 질이 한계까지 수축했다. 이내 그의 뜨거운 정액이 깊숙한 곳에 분출됐다. 선연한 느낌에 샐리는 다리를 오므리고 파르르 떨었다.
그가 사정하는 순간이 좋았다. 그녀의 가장 안쪽,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을 그가 침범한 느낌이 좋았다.
“하아.”
숨을 내쉰 카시스가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도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의 체향이 섞인 땀내가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운을 느끼는 것도 잠시. 아직 안에 들어와 있던 그의 것이 다시 커진 것이 느껴져 샐리는 눈썹을 내리며 웃고 말았다.
밤은 길었다.
그와 함께하는 밤은 더더욱.
* * *
아침 햇빛에 눈을 뜬 샐리가 그를 흔들었다.
“일어나요.”
“…….”
“일어나요, 카시스.”
미동도 없는 카시스를 향해 그녀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새가 부리를 쪼듯 쪽, 쪽 입술을 맞추자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감겨진 눈꺼풀이 올라가더니 그의 진한 남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깨끗한 귓불에는 언젠가 그녀가 준 새파란 귀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방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낼 때면 종종 귀걸이를 하고 왔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샐리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너무 금욕적이라고 해야 하나. 색정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심장에 안 좋아.’
샐리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그에게 말했다.
“오늘 귀족 회의가 있다면서요. 어서 에스테반 저택으로 돌아가 준비를 해야죠.”
그 말에 카시스는 눈을 찡그렸다.
‘망할 귀족 회의. 미뤄 버릴까.’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이는 중요한 회의였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그는 재빨리 대답해야 했다.
“알았어, 준비할게.”
그녀는 침대 안에서는 아주 정열적이었지만, 공적인 일이 걸릴 때는 아주 엄격했다. 그래서 카시스는 또다시 그녀를 품에 안고 침대를 뒹굴고 싶다는 생각을 힘겹게 접어야 했다.
‘게다가 삼 일 내내 쉬지 않았으니.’
그녀도 무척 피로할 것이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참을 필요가 있었다.
카시스가 탄탄한 몸 위로 흰색 셔츠를 걸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캬는?”
“또 옆집에 갔어요.”
캬는 이사 오자마자 옆옆집 새까만 고양이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여우와 고양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로 막기에 두 동물의 감정은 너무나 돈독했다.
샐리가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결혼을 시켜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너무 좋아서 떨어지기 힘들면 그편이 낫지.”
그러나 진심이 담긴 그 말이 무색하게 그녀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뜨거운 찻잔을 들이켜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가운을 걸친 그녀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쌓여 있는 종이 중 하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또 의뢰인가?”
“네. 내년에 데뷔탕트를 치르는 미란다 후작가의 영애가 수업을 받고 싶다고 하네요.”
사교계에 돌아온 샐리는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사교계의 전반적인 지식을 가르쳐 주는 수업이었다. 고객은 주로 귀족 여인들이었지만, 사교계에 들어오고 싶은 평민 여인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무척 좋았다. 많은 이들이 샐리에게 수업을 의뢰해 왔다.
샐리는 밝게 미소 지으며 카시스에게 말했다.
“자금을 좀 더 모으면 제대로 된 아카데미를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 사업이 잘되어 여유가 생기면 당신에게도 멋진 선물을 해 줄게요.”
맑은 얼굴에 카시스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에스테반 공작에게 멋진 선물이라.
‘아니, 내가 받고 싶은 건…….’
“결혼식이요.”
“……?!”
그 말에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샐리가 빙긋이 웃으며 카시스에게 다가왔다.
“며칠 후에 있는 결혼식, 잊지 않았죠?”
카시스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의 손목에 반짝이는 저 팔찌가 또다시 그의 소원을 이루어 준 것일까? 자신도 몰랐던 결혼식이 언제야 잡힌 것일까.
그러나 이내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의 얼굴을 한없이 붉게 만들었다.
“당신과 함께 간다고 하니까 에이미 님이 무척 기뻐했어요. 결혼식 날이 정말 기대돼요.”
카시스는 결국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버리고 말았다.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 * *
완연한 봄날, 로렌스가의 저택이 북적거렸다.
두 남녀의 화합을 의미하는 꽃이 곳곳에 장식되었고, 정원에는 새하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사내와 여인들은 멋지게 치장을 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에이미 로렌스와 알렉스 아프리모의 결혼식이었다.
가세가 드높아진 로렌스 자작가의 막내딸의 결혼식이었지만 결혼식은 무척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손님들도 많지 않았다.
결혼의 주인공인 두 사람의 뜻에 따라 아주 가까운 가족과 친한 친구만 불렀기 때문이다.
“로렌스 자작, 드디어 막내딸까지 결혼을 하는군요. 축하합니다.”
“로렌스 자작 부인, 사위가 정말 자상해 보이네요.”
그래서 들어서는 손님은 하나같이 진심 어린 축하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인상 좋은 로렌스 자작부부와,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다섯 딸들이 환한 웃음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신부 대기실은 에이미의 방에 마련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곱게 단장을 한 에이미가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그중에는 후작 영애 삼총사도 있었다.
“에이미 영애, 정말 아름다워요!”
“한 떨기 백합처럼 청초하네요.”
“신혼여행은 어디로 간다고 하셨죠?”
아직 혼기가 차지 않은 그녀들은 자신의 친구가 결혼을 한다는 것에 꽤 흥분한 듯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세 영애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던 에이미의 눈이 커졌다. 키가 훤칠한 두 여인이 방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붉은 머리카락을 화사하게 늘어뜨린 샐리와 새까만 머리를 시원하게 묶은 테오도라였다.
두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후작 영애 셋을 포함한 방에 있던 여인들 모두가 꺄악, 하고 소녀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 소리에 웃음으로 화답하며 두 사람은 에이미의 앞으로 다가갔다.
“정말 예뻐요, 에이미 님.”
“결혼 축하합니다, 에이미 영애.”
두 사람의 인사에 에이미는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으아아. 이건 너무 하잖아요.’
결혼식 날 아침의 그녀에게는 너무 큰 공격이었다.
‘나는 새 신부다. 나는 곧 사랑하는 알렉스와 결혼을 한다. 내 심장은 알렉스의 것이다.’
자신을 채찍질하듯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에이미를 보며 테오도라는 쿡쿡 웃었다.
‘정말 귀여운 영애란 말이야.’
샐리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오늘 그녀는 정말 예뻤다. 평상시보다 공을 들여 화장한 얼굴도 맑고 고왔지만,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카모라가 만든 새하얀 웨딩 드레스였다.
에이미의 취향에 맞추어 섬세하게 만든 리본으로 장식된 드레스는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드레스가 정말 아름답네요. 에이미 님께 정말 잘 어울려요.”
그 말에 에이미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렇죠?! 디자인도 정말 예쁘지만 눈속임 효과가 정말 엄청나요. 이 드레스를 입으면 꼭 제가 엄청난 미인이 된 것 같다니까요.”
카모라의 드레스는 마법처럼 에이미의 체형을 커버했다. 그녀의 여린 어깨를 강조하고, 늘 신경 쓰였던 살짝 통통한 팔뚝도 볼레로로 가려 주어 가늘어 보이게 만들었다.
결국 결혼식 날까지 헤어질 수 없었던 귀여운 뱃살도 허리에 묶은 리본으로 교묘하게 가려 주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에이미는 심하게 감격하여 눈물을 쏟을 뻔했다.
“역시 카모라 님은 세기의 대천재예요! 그런 분께 웨딩드레스를 받다니 정말 제 생애 가장 큰 선물이에요. 이런 멋진 선물을 받게 해 주어서 고마워요, 샐리 님.”
샐리는 그 모습이 귀여워 웃었다.
카모라가 에이미의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준 것은 일전에 샐리에게 카모라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꼬드길 때 한 약속 때문이었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카모라가 옷을 만들어 주는 세 번째 조건, 그것을 이제는 명확히 안다.
‘그녀의 마음에 들 것.’
이토록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 준 것은 에이미를 향한 애정일 것이다.
“그런데 카모라 님이 보이지 않으시네요?”
“실은 요 며칠 내내 밤을 새서 웨딩드레스를 손보셨거든요. 오늘 아침까지 제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와주시고는 결국…… 기절하시고 말았어요.”
“저런.”
샐리는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에이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제 방 침대에 누워 세상모르게 코를 골고 계시답니다.”
참으로 카모라다운 이야기였다.
그 후로도 많은 손님들이 방으로 찾아왔다. 샐리는 예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에이미의 곁에 있어 주기로 했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샐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었다. 신부 대기실은 대대로 남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금남의 구역이라는 것이다.
꺄르르거리며 에이미를 보러 신부대기실을 찾은 여인들은 눈을 크게 떴다.
신부 대기실 문 앞에는 에스테반 공작이 오만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여인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허리를 꼿꼿이 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에, 에이미 로렌스 영애를 만나러 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주 정중히 용건까지 밝혔다. 카시스는 고개를 숙여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그것마저도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그는 직접 문까지 열어 주었다.
예상치 못한 과분한 대접을 받게 된 여인들은 입을 벌린 채 신부 대기실로 들어갔다.
하객들은 놀란 얼굴로 수군거렸다.
오늘의 새 신부는 무려 카모라에게 웨딩드레스를 선물받고,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테오도라 황녀가 손님으로 왔으며,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인 샐리의 친한 친구이며, 그 대단한 에스테반 공작을 신부 대기실의 문지기로 삼는 여인이었다.
“에이미 영애는 사교계 생활도 거의 하지 않고 얌전히 지냈다고 알고 있는데 인맥이 어마어마하네요.”
“그녀는 로렌스 집안의 딸이잖아요. 로렌스의 마법이 발휘된 것 아닐까요?”
“과연.”
그 말에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에이미, 무서운 여자.”
본의 아니게 제국에서 가장 어마 무시한 신부가 된 에이미였다.
예식이 시작되었다. 많은 이들이 정원에 마련된 새하얀 의자에 앉아 박수를 쳤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함께 새 신랑과 새 신부가 웨딩 로드를 걸어 들어왔다. 잔뜩 긴장한 모습의 두 남녀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하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꿀이 떨어지네. 둘 다 아주 입꼬리가 귀까지 걸려 있어.”
에이미의 둘째 언니인 마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약혼한 지 6년 만에 결혼을 하는 거잖아. 그럴 만하지.”
감격스러운 얼굴로 두 손을 모으고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이는 셋째 언니인 베아트리스.
“그래. 스물여섯 살 신부라니 너무 오래 기다렸어. 에이미도 하루 빨리 요런 귀여운 아가를 낳아야 하는데.”
안고 있는 아기를 토닥이며 말하는 이는 넷째 언니 메리.
“어머머. 운다, 울어. 새 신랑이 울어!”
소란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이는 다섯째 언니 엘리스였다. 복작거리는 네 명의 자매들을 바라보며 첫째 언니인 조세핀이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하렴. 중요한 순간이잖니.”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네 명의 자매들은 입을 꾹 다물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에이미와 알렉스는 사랑의 서약을 하고 있었다.
“에이미 로렌스는 평생 알렉스 아프리모를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에이미가 힘차게 대답했다.
“알렉스 아프리모는 평생 에이미 로렌스를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눈물이 고인 알렉스의 대답은 힘찼다.
그 장면을 빤히 바라보며 조세핀이 중얼거렸다.
“그 맹세, 지키지 않으면 로렌스를 적으로 돌리게 될 거예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무시무시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나란히 앉은 네 명의 자매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들의 옆에 앉아 있던 남편들은 새로운 가족인 알렉스가 부디 막내 처제인 에이미를 행복하게 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 못할지도 몰라.’
먼저 온 로렌스의 사위로서 그 말은 차차 해 주기로 했다.
예식의 마지막은 신부가 부케를 던지는 이벤트였다. 부케를 받을 사람은 바로…….
“저요! 저요! 제가 부케를 받기로 했답니다!”
소란스럽게 등장한 이는 카모라였다. 어느 틈에 나타난 카모라가 새빨간 드레스를 휘날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던질게요.”
“네. 힘껏 던져 주세요!”
에이미가 방긋이 웃으며 부케를 힘차게 던졌다.
……너무 힘차서 문제였다.
“어머. 어머. 어머나?!”
게다가 카모라는 운동신경이 형편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폴짝 뛰어 보아도 바닥에서 거의 뛰어오르지 못했다. 결국 에이미의 손을 벗어난 부케는 그녀를 지나쳐 갔다.
“힉.”
에이미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부케가 향한 곳은 이벤트를 지켜보고 있던 샐리…… 의 옆에 있던 카시스였다.
엄청난 정적 속에서 카시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손 위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장미꽃에 도트 무늬의 커다란 리본이 달려있는 끔찍할 만큼 사랑스러운 모양의 부케였다.
“…….”
얼음처럼 굳어 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테오도라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테오도라가 환한 얼굴로 박수를 치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
얼빠진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카모라도 뒤늦게 신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축하해요, 공작 저하!”
부케를 받은 이에게는 축복을 담아 박수를 치는 것이 예의였다. 그제야 많은 사람들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얼굴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해괴한 분위기 속에 눈썹을 찡그린 카시스를 바라보며 샐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잘 어울리는데요?”
그 말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부케를 카모라에게 주었을 것이다. 카시스는 부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예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되었다. 정원에 세팅된 연회장이 손님들로 복작거렸다. 보통 귀족가의 결혼식은 아주 점잖게 치르기 마련이지만 이날은 아니었다. 카모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에요!”
카모라는 빨개진 얼굴로 와인 잔을 들이켰다. 이내 술에 취한 그녀의 술주정이 발동되었다. 그녀의 술주정은 사람들을 품에 안아 사이즈를 잰다는 것이다.
게다가 귀신 같이 미인만 골라 그런 몹쓸 짓을 했다.
품위라고는 없는 술주정임에도 많은 이들이 그녀가 자신의 앞에 다가와 주기를 바랐다. 카모라는 술이 깨면 무례에 대한 사과로 껴안은 이들에게 옷을 선물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모라는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달려들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 내가 만든 드레스를 입어 주세요오오오!”
“이 미친 여자!”
카시스는 정말이지 질린다는 얼굴로 달려드는 그녀를 밀쳐 냈다. 그러나 카모라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한편 알렉스는 내리 여섯 번을 춤 춰야 했다. 에이미를 포함한 다섯 언니들과 춤을 춰야 했기 때문이다.
에이미를 닮은 동그란 얼굴을 한 여인들은 하나같이 방긋이 웃으며 험한 협박을 했다.
“에이미를 울리면 용서치 않을 거예요.”
그러나 알렉스는 과연 로렌스가의 여섯 번째 딸을 가질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그럼요! 에이미를 꼭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그는 아내의 언니들에게 아주 힘차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연회장의 모두가 다 들을 정도였다.
샐리도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행복하고 즐겁고 정신없는 결혼식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샐리.”
부드러운 음성에 샐리가 고개를 들었다. 조세핀이었다. 샐리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웨일스 후작 부인.”
“오늘만큼은 에이미의 언니인걸요. 조세핀이라고 편하게 불러요.”
그 말에 샐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하겠습니다, 조세핀.”
조세핀은 빙그르 미소 지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왔어요. 테오도라 황녀 저하를 옆에서 잘 보필해 주었다지요? 그리고 에이미도 샐리에게 많은 애정을 받았다고 알고 있어요. 두 사람의 친구로서, 언니로서 큰 고마움을 느껴요.”
“아닙니다. 저야 말로 두 사람의 친구로서 한 일일 뿐인걸요.”
샐리의 대답에 조세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샐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무엇이지요?
“머지않아 알스로 한번 가 볼 생각이에요. 그때가 되면 제게 알스의 사교계를 소개시켜 주시겠어요?”
그 말에 조세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제국의 여인들은 도도하고 오만했다.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의 사교계에 있는 이들이 굳이 작은 나라의 사교계에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조세핀의 의아한 시선에 샐리가 말을 이었다.
“요즘 느낀 것이 있어요. 넓은 세상을 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 제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을요. 그래서 좀 더 많은 곳을 다녀 볼 생각이에요. 알스의 사교계는 제국보다 훨씬 자유롭고 평민들이 함께할 만큼 개방적이라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그곳에서는 제국에서와는 다른 것을 배울 수 있을 테지요.”
조세핀은 샐리를 마주 보았다.
조세핀이 샐리를 본 것은 약 일 년 전이었다. 그때 그녀의 영특한 금빛 눈동자에 숨어 있던 것은 불안함이었다.
그러나 지금 샐리의 눈빛에는 그런 것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당차고 생기가 넘쳤다.
조세핀에게는 아주 낯익은 눈빛이었다. 홀로 유학을 와 외로움에 지쳤으리라 생각했던 테오도라가 보여 주었던 그 눈빛과 꼭 닮아 있었다.
‘과연. 친구는 닮는다더니.’
조세핀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네요. 언제든 알스를 방문하면 날 찾아오세요.”
“감사합니다.”
샐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조세핀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보조개가 쏙 들어간 그 미소는 소녀처럼 귀여웠다.
조세핀이 그런 미소를 지을 때면 그녀의 남편 웨일스 후작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아내를 향해 말하곤 했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웃으며 무언가 말할 때는 마법처럼 그 말이 이루어진다고.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샐리, 당신은 앞으로 더욱더 성장할 거예요. 그 모습이 정말 기대가 되네요.”
그 말은 마치 마법처럼 따스하게 샐리를 감싸 안았다. 정말 그 말대로 될 것 같다는 따스한 용기가 샘솟았다.
샐리는 그녀의 응원에 미소로 대답했다.
* * *
해가 질 무렵에야 카시스와 샐리는 로렌스 저택을 빠져 나왔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샐리의 집이었다.
“정말이지 유쾌한 결혼식이었어요. 그렇죠?”
그 말에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 미…… 아니, 무례한 여자만 아니었다면.”
그 말에 샐리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샐리는 침대에 앉아 있는 그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었다.
“피곤해요. 아무것도 하기 싫어.”
“에스테반 저택으로 갈걸 그랬나.”
“그곳은 싫어요. 둘만 있고 싶은걸.”
카시스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고용인들의 완벽한 케어를 받는 거대한 저택보다 그녀의 작은 방에 자주 오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로지 둘만 있는 것이 좋았다. 작은 침대에 서로의 몸이 뒤엉키는 것이 좋고, 서로의 심장 소리가 쿵쾅거리는 순간이 좋았다.
그의 서늘한 체온을 느끼며 눈을 내리깐 샐리의 시선에 새하얀 장미꽃 부케가 보였다.
그토록 정신없는 와중에도 부케는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도트 무늬의 왕 리본까지 완벽한 모습으로 잘 달려 있었다.
“누군가에게 주고 올 줄 알았는데 잘 챙겨 왔네요.”
가볍게 한 말이었는데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부케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하지.”
그 말에 샐리의 눈이 커졌다.
신부의 부케에는 사랑의 여신의 축복이 담겨져 있어, 그 부케를 받은 이는 머지않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앳된 소녀들이나 이제 막 결혼을 앞두는 여인들이 복숭아처럼 얼굴을 붉히며 하는 이야기일 뿐, 다 큰 성인 남자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이 팔찌의 전설도 믿고 목숨을 바쳤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샐리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에스테반 공작의 비밀. 그에게는 아이처럼 맹목적으로 사람을 따르고 마법을 믿는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
‘좀 위험한 거 아니야?’
제국에서 가장 위엄 있는 에스테반 공작이건만 물가에 내놓은 아이보다 불안해 보였다.
누군가 안 좋은 기운을 없애 주겠다고 하면 그 뒤를 쫑쫑 따라갈 것만 같다고 할까. 절대 그런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진지하게 말해 주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샐리를 향해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케의 축복이 내게도 올까?”
그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너와 결혼하고 싶어.”
샤라락. 작은 창 사이로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어왔다.
노을빛으로 물든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가 들고 있는 새하얀 부케에서 향긋한 꽃향기가 퍼졌다. 너무나 달콤해서 그 향기는 사람을 현혹시킬 것 같았다.
샐리는 ‘좋아요.’라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작게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샐리는 마음 깊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감정과 별개로 그와 결혼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나면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설레고, 서로의 사소한 관계를 질투하고, 헤어짐이 아쉬운, 그런 뜨거운 연애가 좋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샐리와 카시스로서 함께 손을 마주 잡고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싫어요.”
흔들리는 카시스의 눈을 바라보며 샐리가 속삭였다.
“지금은요.”
“…….”
“나는 미래를 확신하지 못해요. 머지않아 생각이 바뀌어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할지도 몰라요. 계속 연애를 하고 싶을지도 모르고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계속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제는 이 아름다운 남자를, 따스한 품을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샐리는 부케를 든 그의 손을 들어 입을 맞추며 말했다.
“맹세할게요. 내가 청혼을 한다면 그 상대는 오로지 당신뿐이라는 것을요.”
너무나 잔혹하고 매정한 말을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할까.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기다릴게.”
“…….”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십 년이라도, 이십 년이라도, 아니, 평생이라도.”
기다리는 것은 자신 있었다.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뜬 샐리는 이내 꺄악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더 이상 못 참아.”
그가 그녀의 가는 허리를 손으로 받쳐 침대 위로 눕히며 입을 맞췄다. 맞닿은 곳부터 온몸의 열이 뜨겁게 올라왔다. 샐리는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그의 목을 껴안았다.
몸을 맞댄 두 사람의 아래로 새하얀 부케가 떨어졌다.
* * *
“카, 시스.”
샐리가 헐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에 매달려 있던 땀방울이 툭 하고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의 얼굴은 사람들이 아는 에스테반 공작과는 전혀 달랐다.
매서운 눈매는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있었고, 살짝 깨문 입에서는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쳐 왔다. 그가 연한 미소를 띠며 속삭였다.
“네 안, 너무 좋아.”
섹시한 목소리에 샐리의 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녀의 깊은 곳에 그의 것이 쏟아졌다.
“흐읏.”
그와 동시에 그녀도 절정을 맞이했다. 샐리는 그의 허리를 감았던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극한까지 끌어올려진 쾌감 때문일까. 졸음이 밀려들었다.
“샐리.”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샐리는 눈이 감겨 왔다.
“샐리.”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녀는 그의 품속에서 잠이 들었다.
그날 샐리는 꿈을 꾸었다.
예쁜 집이었다. 지붕은 선명한 주황색이었고, 녹색 잔디가 깔린 정원은 작지만 예뻤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정원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샐리와 카시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은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 웃었다.
듣는 이조차 웃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웃음소리였다.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조잘거리던 아이는 잠시 후 고개를 꾸벅이며 잠이 들었다. 카시스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아이를 품에 안더니 작은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그에게서 아주 작은 소리의 자장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의 두 사람이 너무나 아름다워 샐리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도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따뜻한 햇볕 때문일까, 그의 속삭이는 듯한 자장가 때문일까.
잠이 솔솔 밀려들었다.
샐리가 스르르 눈을 떴을 때는 다시 현실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집이었고 작은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잠든 그의 체온이 느껴질 뿐이었다.
‘결혼이라.’
샐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어제 그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샐리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곤히 잠이 든 아름다운 얼굴은 아이처럼 맑았다.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간질거려왔다.
매일매일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고 싶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그를 독점하고 싶었다. 그에게 독점당하고 싶었다.
그녀의 증상은 더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빨리 당신에게 청혼을 해 버릴지도…….”
그때 스르르 그의 눈이 떠졌다. 잠이 덜 깬 것인지 나른하게 눈을 뜬 그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자신의 말을 들어 버렸나 했지만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아기를 재우는 것처럼 품에 안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직 아침이야.”
“…….”
“자.”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저녁에 열리는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연회에 참석하려면 일어나 단장을 해야 했다.
로즈 부인에게 최근 사교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편지도 써야 했고, 테오도라와 아카데미 설립에 관한 회의도 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청량한 향과 시원한 체온이 너무나 편안했다.
‘오늘은 조금 게으름 피우지 뭐.’
결국 샐리는 눈을 감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쿵쿵. 그의 가슴에 닿은 귓가에 그의 심장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지극히 평온하고 평화로운, 평범한 아침이었다.
가짜 애첩의 화려한 일상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