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세 명의 에스테반
온 제국이 뒤흔들렸다.
사교계에서 가장 자애롭다고 소문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귀부인들과 함께 금지된 약물인 벨라도나를 했다는 엄청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귀족 사회를 뒤흔든 역대 최악, 최고의 스캔들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에 발행되었던 시크릿 로즈 덕분에 벨라도나는 뜨거운 감자였다.
거기에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이름까지 곁들여지니 그 충격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모여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순진한 귀부인들이 뭘 몰라 실수를 했다고 조용히 넘어가면 될 일을 왜 이렇게 크게 키우는지 모르겠군요. 황녀 저하께서는 귀족의 품위를 지켜 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공의 말은 이상하군요. 그런 식의 논리를 펴니 자꾸 귀족들이 벨라도나에 손을 대는 겁니다. 제대로 벌을 주어야 무서운지 알고 그 끔찍한 것에 손을 대지 않죠.”
귀족들이 암암리에 벨라도나를 한 건 어제 오늘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처음이었다.
테오도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귀족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너무 강하게 나가는 것 아니냐. 귀족들의 반발이 거셀 거다.”
황제의 말에 테오도라가 대답했다.
“저는 지금 귀족들과 알력 싸움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제국을 좀먹는 악습을 뿌리 뽑자는 것이죠. 그런 제게 반발을 한다는 건, 벨라도나를 옹호하는 것. 제대로 된 귀족이라면 그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테오도라는 결코 의심만으로 사람을 잡아가지 않았다. 그녀가 잡아들이는 이들은 빼도 박도 못할 현행범이나 증거가 나온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왜 잡아가느냐고 따져 물을 만큼 뻔뻔한 이는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벨라도나를 즐기는 현장을 들켜 끌려 나왔고, 많은 양의 벨라도나가 몰수되었다.
그중에는 샬롯도 있었다.
“감히 누구의 방을 뒤지는 거야! 고얀 놈들!”
샬롯이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황성 밖에 마련되어 있는 샬롯의 개인 저택에서 엄청난 양의 벨라도나가 발견되었다. 벨라도나를 만드는 원재료와 함께.
“아, 아냐. 난 모르는 일이야! 누군가 날 모함하기 위해 넣어 둔 거라고!”
샬롯은 소리쳤지만 그 이야기를 믿는 이들은 없었다. 그녀는 그 즉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토록 많은 귀족과 황족이 감옥에 수감된 일은 제국의 긴 역사 속에도 드문 일이었다.
* * *
잡혀 온 귀족들의 죄를 묻는 재판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린 것은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재판이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재판장에 몰려들었다.
엘리제는 그녀와 함께 벨라도나를 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홉 명의 여인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은 신음을 삼켰다.
장식이 없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핀 하나로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가련했다.
“역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 누군가의 모함이 아닐까요?”
귀족들은 아직도 정숙하기로 소문난 그녀의 죄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재판이 진행되며 산산이 사라지고 말았다.
검정색 법의를 걸친 테오도라가 매섭게 여인들을 몰아붙였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연회에서 벨라도나를 한 적이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해괴한 소리를 하시네요. 전 그런 것을 본 적도 없어요.”
여인들은 모두 사교계에 오랜 시간 몸담았던 이들이었다. 뻔뻔하게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내젓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여인들이 자신의 죄를 잡아뗄 정도로 대범한 것은 아니었다.
한창 조사가 진행되는 도중 한 여인이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괴로운 얼굴로 소리쳤다.
“전 정말 억울해요! 정말 하기 싫었는데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권하니 어쩔 수가 없었어요. 벨라도나를 하지 않으면 모임에서 쫓아낼 것 같은 분위기였단 말이에요!”
그 말에 한 여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부인,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이제 거짓말은 그만하고 솔직히 이야기해요. 매일 조마조마하며 사는 것도 지치니까.”
그때부터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을 탔다. 저런 증언이 나온 상황에서 벨라도나를 하지 않았다고 잡아떼 보았자 벌만 가중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엘리제를 탓했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아니었다면 전 평생 그런 것은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울음을 터뜨리며 절절하게 외치는 여인도 있었다.
재판이 끝날 무렵 아홉 명의 여인 중 일곱 명이 죄를 시인했다. 나머지 두 명은 여전히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지만 그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엄청난 소란 속에서 엘리제만이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테오도라가 말했다.
“아홉 명의 여인 중 일곱 명이 벨라도나를 한 것을 시인했어. 그리고 그녀들의 증언은 모두 한결같군.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주도로 벨라도나를 했다. 즉, 그대는 불법인 벨라도나를 소유하고 유통까지 한 셈이군.”
내내 조용히 있던 엘리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섬뜩한 안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수많은 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막았다. 자신들이 아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인 내게 어떤 처벌을 내리실 셈이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오만했다. 감히 그따위 일로 에스테반 공작 부인에게 손댈 것이냐는 의미가 여실히 담겨 있었다.
아무리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공작 부인이라지만, 그녀는 에스테반의 안주인이었다. 그녀를 가혹하게 처벌한다면 에스테반 휘하의 가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테오도라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무척 큰 착각을 하고 있군. 귀족의 작위는 죄에 대한 벌을 사면받기 위한 게 아니야. 아니, 국가의 특혜를 받는 위치이니 오히려 그 죄를 엄히 물어야지.”
테오도라는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벨라도나는 국가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약물. 그것을 불법적으로 모여 즐긴 죄는 매우 크다. 하여,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내린다.”
그 말에 여인들이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은 정말 안 했다고 끝까지 고개를 내젓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그 소란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엘리제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벨라도나를 소유하고, 유통하여 모임을 주도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죄는 더 큰 바, 5년의 형을 내린다.”
모여든 관중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웬만한 중죄를 짓지 않는 한 귀족이 형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공작 부인 정도의 직위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테오도라의 판결은 예상 보다 훨씬 엄했다.
그것은 즉 이미 감옥에 갇힌 많은 이들에게도 자비를 내리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세상에. 그럼 지금 감옥에 붙잡혀간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겠죠. 그사이 세력의 판도가 아예 바뀌어 버릴 테고요.”
그들의 관심은 이미 재판석에 선 여인들이 아닌, 이 판결이 자신들의 세계에 어떤 변화를 끼칠지에 쏠려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사라진 곳에서 엘리제는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사교계의 정점에 있던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 * *
그 뒤로도 많은 재판이 이어졌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만큼 이목을 끌었던 샬롯 백작 부인의 재판은 아주 대단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고분고분하게 재판에 임했다. 벨라도나가 그렇게 위험한 약물인지 몰랐다느니, 돈이 너무 궁해 어쩔 수 없었다느니, 변명을 늘어놓으며 거짓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테오도라가 그녀를 향해 5년의 형을 내리자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욕설을 내뱉었다.
“처음부터 네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이 되바라진 것이 감히 나를 감옥에 보내?! 나는 차기 황제의 어미가 될 사람이야!”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황제는 정말이지 질린다는 얼굴로 눈가를 덮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군.”
황제가 지금껏 샬롯의 오만방자함을 그냥 둔 것은 그녀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존 황자의 위치를 지켜 주기 위해서였다.
어리석기는 했으나 어찌 되었건 제국의 제1황자였다. 급작스럽게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시 황제의 자리를 이어 받을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 황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유사시에 내 자리를 이어받을 놈이 꼭 존일 필요는 없잖아.’
애초에 황제의 자리에 앉히기에는 너무 능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테오도라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굳이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테오도라.”
“네.”
황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영민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바르샤와의 정식 교역을 따낸 이후 테오도라는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르고 있던 껍질을 벗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선연한 야욕이 깃든 눈동자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결코 입 밖으로 황권을 입에 담지 않았다.
황제는 그 점이 마음이 들었다.
“샬롯에게 전하거라. 그녀가 감옥에 가 있는 5년간 존의 황위계승권을 박탈하겠다고.”
그 말에 테오도라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이 났다.
“그사이 샬롯과 존의 행동을 보고 황위계승권의 복권을 생각해 보겠다. 이정도 벌이면 아무리 그녀라도 얌전히 벌을 받겠지.”
“그리하겠습니다.”
테오도라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그녀의 두 주먹이 쥐어진 것을 황제는 놓치지 않았다.
5년. 테오도라가 내보이기 시작한 야심과 능력이 진짜라면 존을 제치고 제국의 후계자가 되기에 적지 않은 시간이리라.
* * *
밤이 내려앉은 에스테반 저택은 적막이 감돌았다.
평소에도 조용한 편이었지만 안주인인 엘리제가 죄인이 된 후에는 그 분위기가 더 심해져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처럼 스산해졌다.
그것은 샐리의 별채도 마찬가지였다. 잠이 든 캬의 숨소리가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한 곳에서 샐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오늘도 오지 않는구나.’
카시스가 별채에 오지 않은 것은 엘리제가 감옥에 갇힌 이후부터였다.
한동안 일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그녀의 주변을 맴돌더니 그는 다시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저택을 비우기 시작했다. 저택에 아예 들어오지 않는 일도 빈번했다.
에반의 말로는 그가 엘리제의 일과, 벨라도나 사건에 관련된 귀족의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고 했지만 오로지 그 이유 때문일까.
샐리는 괴로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떴다.
엘리제는 공식적인 죄인이 되었다. 그것은 곧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 이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가 이혼 서류를 접수하면 엘리제의 동의 없이도 법원은 도장을 찍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샐리는 그의 곁에 있을 이유가 없게 된다. 두 사람의 계약은 종료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샐리는 아직 에스테반 저택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기도 힘든걸.’
샐리도 그 말이 바보 같은 변명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주 저택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새벽녘 도둑고양이처럼 살포시 저택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에반에게 부탁하면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려 줄 것이다. 새벽에라도 그를 찾아가 당장에라도 말하면 그만이었다.
이제 나는 떠나갈 것이라고.
그러나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샐리는 저택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그를 탓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바보 같으니.’
스스로의 미련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샐리 님!”
그때 문을 열고 데이지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니?”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그 말에 샐리의 눈이 커졌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요 며칠 에스테반 저택을 찾아오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한밤중의 손님이라니.
샐리의 의아한 눈빛에 데이지가 말을 이었다.
“다니엘 에스테반 도련님께서 오셨어요. 에스테반가의 혈족이자 주인님의 사촌이시죠. 내려가 보시겠어요?”
샐리는 이 저택의 안주인이 아니었다. 방 한 칸을 빌려 묵고 있는 애첩일 뿐이었다.
아무리 저택의 주인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손님을 맞을 의무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이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 내가 손님을 맞을게.”
샐리는 가볍게 단장을 하고 별채를 벗어나 본채의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 있는 남자를 본 샐리의 눈이 커졌다.
나무로 만든 휠체어에 앉은 남자는 병약해 보였다. 선이 가는 얼굴빛은 파리했고 몸도 무척 가늘었다.
병색이 짙어 아름다움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은빛 머리카락과 짙푸른 눈동자는 카시스와 무척 닮은 모습이었다.
‘확실히 그와 같은 에스테반이구나.’
샐리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저택의 주인이 자리를 비워 제가 손님을 맞으러 내려왔습니다. 샐리 라고 합니다.”
그 말에 그의 남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기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당신이?
심상치 않은 반응에 샐리가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다급히 문을 열고 등장한 이는 카시스였다.
샐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늘 얼음처럼 단정했던 그의 얼굴은 마치 아이처럼 허물어져 있었다. 일그러진 눈썹과 꽉 깨문 입술이 수많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향한 것은 그녀가 아닌 다니엘 에스테반이었다.
카시스가 괴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형.”
형. 그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샐리는 멍하니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후 다니엘은 울컥하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날 형이라고 불러 주는구나, 내 동생.”
* * *
작은 창 사이로 달빛이 들어오는 감옥 안에는 엘리제가 있었다. 그녀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를 우대받아 독방에 가두어져 있었다.
그녀의 서슬 퍼런 눈빛이 달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을 이딴 곳에 가두어?!’
엘리제는 이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분노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그녀는 누구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는 이 좁고 냄새나는 곳에 갇혀 있었다.
하루에 세 번 간수가 가져오는 음식들은 끔찍하게 형편없어 조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그중에서 엘리제를 가장 끔찍하게 한 것은 이런 곳에서 5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대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죄인의 낙인이 찍히면 쌍방 동의 없이도 이혼이 가능했다. 분명 이 틈을 타 카시스는 그녀에게서 에스테반의 이름을 가져갈 것이 분명했다.
‘아무도 내게서 에스테반의 이름을 빼앗을 수 없어.’
엘리제는 이따위 자그만 일로 그 이름을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법이 엄하다고 한들 에스테반 공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
제국의 법원은 귀족들에게 형을 집행할 권한이 있다. 현재 테오도라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에스테반 공작의 힘에 비한다면 아주 미약한 것이다. 에스테반 공작이 진심으로 원한다면 제국의 법이나 일개 황녀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그 공작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엘리제의 눈빛은 스산하다 못해 기이하게 번뜩였다.
그녀는 머리를 풀어헤쳤다. 화려한 머리 장식은 모두 빼앗겨 버렸지만 머리를 틀어 올리기 위한 머리핀 하나가 남아 있었다. 엘리제는 머리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흑요석으로 만든 머리핀이 산산조각 나 흩뿌려졌다. 그녀는 바닥을 찬찬히 살펴 조각 하나를 손에 잡았다.
달빛에 번뜩이는 조각은 날카로웠다.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자칫하면 눈을 뜨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것은 지금 그녀에게 아무 상관없었다. 이대로 에스테반의 이름을 빼앗기고 평생 감옥에서 썩어 가느니 그편이 나으니까.
엘리제는 주저 없이 조각을 들고 손목 위를 그어 버렸다.
식사를 가지고 왔던 간수가 비명을 지른 것은 잠시 후였다.
간수가 헐레벌떡 감옥 안에 들어왔을 때 엘리제는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는 손목에서는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누가 여기로 좀 와 봐!”
간수가 소리를 지르자 작은 방 안으로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귓가를 울리는 소란스러움을 느끼며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 * *
엘리제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쾌쾌한 감옥 안이 아니라 익숙한 그녀의 방이었다.
붕대가 감긴 손목은 훌륭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아무리 상처를 입었다지만 그녀는 죄인이었다. 고작 그 정도 상처를 입었다고 죄인을 풀어 주진 않는다.
그녀를 빼내 준 것은 손목의 시큰거리는 상처가 아니라 눈앞의 남자일 것이다.
“역시.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어.”
엘리제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엔 아무 감정도 어려 있지 않았다. 엘리제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날 또 그따위 감옥에 넣으면 이번에는 제대로 손목을 그어 버릴 거야.”
명백한 협박이었다.
엘리제는 자신을 끔찍하게 경멸하는 저 남자에게 이 협박이 얼마나 잘 들어 먹힐지 알고 있었다.
‘이제 좀 알아먹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제가 눈을 감으려던 순간 카시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 착각을 하고 있군. 널 여기까지 데려온 건 배려 따위가 아니야. 널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지.”
“뭐?”
엘리제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카시스는 그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내일이면 넌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그리고 곧 이혼이 완료되었다는 서류가 도착할 거다. 그때가 되면 너와의 지긋지긋한 인연도 끝이야.”
그 말에 엘리제의 표정이 사납게 바뀌었다. 그녀는 이제 가면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진짜 내가 죽어 버리는 걸 보고 싶어 그래? 그 사람이 내 시체를 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 사람,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죽어 버릴지도…….”
엘리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 때문이다.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는 창백한 남자를 보는 순간 엘리제는 차갑게 굳어 버렸다.
그 사람, 다니엘이었다.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부릅뜬 엘리제를 향해 그가 말했다.
“이제 그만해요, 엘리제.”
작은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단호함이 느껴졌다.
“당신은 이제 카시스의 영혼을 쥐고 흔들 수 없어요. 더 이상 나는 당신의 인질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 말에 엘리제의 파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마치 그녀를 안전하게 잡아 주었던 끈이 제멋대로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다니엘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그만 온전한 죗값을 받고 돌아와요. 아름답고 순수한 엘리제 프로이텐으로.”
그녀가 3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엘리제는 섬뜩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싫어! 또 그따위 이름으로 돌아가라고?”
한때 그녀를 설레게 했던 백작가의 이름은 이제 초라해 보일 따름이었다.
“나는 엘리제 에스테반이야!”
“…….”
“제국의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엘리제 에스테반이라고!”
다니엘은 엘리제와 오래 얼굴을 맞대진 못했다. 분노에 찬 엘리제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엘리제는 그가 나가는 순간까지도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것이라고 소리쳤다.
카시스가 다니엘의 휠체어를 끌어 방 밖으로 나왔다. 그는 다니엘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아?”
“겨우 이 정도에 어떻게 될 만큼 약하진 않아. 처음 보는 그녀의 본모습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다니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카시스는 안심이 되지 않는 듯 다시 한번 말했다.
“바란을 저택에 대기시켜 놨어. 혹시 모르니 진찰을 받도록 해.”
그 말에 다니엘은 눈썹을 내리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됐다고 해 보았자 괜한 실랑이만 벌이게 될 테지.’
결국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카시스는 안도한 얼굴을 했다.
샐리는 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사촌 형을 대했다.
평소라면 고용인들에게 맡기고 말았을 일까지 직접 세심하게 신경 써 주었다.
병약해 보이긴 하지만 다 큰 남자가 아닌가. 그런 남자가 당장이라도 어떻게 될 것처럼 조마조마해하는 얼굴이라니.
‘도대체 저 남자가 뭐기에?’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솟았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엘리제가 깨어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렴풋이 세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샐리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며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렸다.
카시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다니엘은 저 멀리 사라지는 샐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 * *
그날 밤, 샐리의 방문 너머로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카시스인가 했다. 그러나 그의 노크 소리는 저렇게 조심스럽지 않다.
이내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다니엘 에스테반입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가 왜 나를 찾아왔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샐리는 이내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그녀의 대답에 이어 다니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던 카시스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와 함께 온 시종이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샐리 님과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시종을 내보내도 괜찮을까요?”
그 말에 샐리는 조금 당황했다. 귀족 남성에게 이토록 정중한 말을 들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미천한 출신의 계집인 걸 알 텐데.’
그는 조금도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그에 대한 경계를 조금 풀어지게 했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니엘은 선하게 웃으며 시종에게 눈짓했다. 시종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별채의 방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다니엘이 샐리를 바라보며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어젯밤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다니엘 에스테반, 카시스의 사촌이며 에스테반가의 방계 가문인 에스테반 백작가의 후계입니다.”
“샐리입니다. 저하의 첩으로 이곳에 지내고 있어요.”
샐리는 간단하게 자신을 설명했다. 그 말에 다니엘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첩이로군요.”
그의 얼굴은 씁쓸해 보였다.
‘사이가 돈독한 사촌 동생이 나 같은 여자를 첩으로 둔 것이 거슬리는 거야?’
과거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주 본 다니엘의 눈빛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경멸감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그의 눈빛은 차라리 죄책감에 가까웠다.
“샐리 님은 카시스와 엘리제가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 아십니까?”
“에스테반가와 프로이텐가 두 가문에서 주도한 정략혼이라고 알고 있어요. 황실에서도 그 결혼을 무척 지지했고요.”
“표면적으로 알려진 이야기군요. 그 안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는 듣지 못하셨습니까?”
샐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레이첼 황녀 저하의 거짓말이 두 사람의 결혼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말에 다니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알고 계시는군요.”
“제가 아는 건 거기까지예요. 레이첼 황녀 저하께서 어떤 거짓말을 한 건지는 몰라요.”
다니엘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샐리 님은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십니까? 아무리 가문과 황실의 압박이 있었다 해도, 황녀의 거짓말이 있었다 해도, 에스테반 공작인 카시스가 그 결혼을 완강히 거부한다면 혼사는 이루어질 수 없었어요.”
샐리는 정적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왜 아니었을까. 그녀는 늘 카시스의 결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방금 들은 말대로였다. 그가 정말 엘리제를 싫어했다면 그는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은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원치 않는 결혼을 했는지 늘 궁금했다.
그래서 전생의 샐리는 그가 사실은 엘리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엄청난 상상까지 하곤 했다.
다니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내리깔린 남색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는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카시스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한 것은 저 때문입니다.”
“……!”
* * *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을 향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에스테반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겠어.”
그들은 그 이름에 대한 절대적인 부러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카시스는 단 한 번도 그 이름에 만족감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그림자도 보기 힘들었다. 에스테반의 이름을 가진 부부는 무척이나 바빴고, 아이에게 신경 쓸 겨를 같은 건 없었다.
유모가 있긴 했지만 그녀마저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에 짓눌려 아이를 아이처럼 대하지 못했다. 그녀는 카시스를 신줏단지 모시듯 귀하게만 대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나 애정 어린 잔소리 같은 것은 그의 기억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조금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제가 에스테반의 친구가 될 수 있겠냐며 또래들은 그의 발밑에 고개를 조아렸다.
언제나, 어디를 가도 에스테반이라는 이름만 들려왔다. 그의 발아래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정작 그와 눈을 마주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린 카시스의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는 그 묵직한 고통의 정체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카시스가 다니엘을 만난 것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수도에 일이 있다며 에스테반 백작 부부가 찾아왔다. 에스테반 공작과 같은 성을 가진 백작가는 에스테반 공작과 핏줄이 이어진 방계 가문이었다.
부부는 아들과 함께 왔다. 카시스 보다 여덟 살 많은 열네 살의 다니엘 에스테반이었다.
카시스를 닮은 은빛 머리카락과 남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봄빛처럼 온화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늘 딱딱하고 오만한 귀족들만 보아 왔던 카시스에게 그런 그의 분위기는 무척 신기하게 다가왔다.
다니엘은 카시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반가워, 카시스.”
에스테반 공작 부부를 제외하면 아무런 호칭도 없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카시스는 커다래진 눈을 깜빡였다.
다니엘은 그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눈을 휘며 작은 손을 맞잡았다.
“우리 함께 놀까?”
그날 두 사람은 함께 손을 맞잡고 저택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카시스는 사람의 손이 이토록 따뜻한 것임을 처음 알았다. 타인과 나누는 대화가 이렇게 소소하고 편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따스해지고 행복했다.
며칠 후, 다니엘이 다시 떠날 날이 되었다. 다니엘은 백작부부와 함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 서 있는 카시스가 보였다.
카시스는 두 손을 뒤로 잡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늘 귀족의 품위를 지켰던 평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고개를 갸웃 거린 다니엘이 카시스에게 다가와 눈을 마주쳤다.
“왜 그래, 카시스? 내게 할 말이 있니?”
잠시 후 카시스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동그란 눈을 가진 어린아이가 아무리 진지한 얼굴을 해 봐야 너무 귀여울 뿐이었지만.
“……형이라고 불러도 돼?”
그 말에 다니엘의 눈이 커졌다. 그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카시스를 와락 껴안았다. 다니엘은 부드러운 뺨에 얼굴을 부비며 속삭였다.
“당연하지, 내 동생.”
동생. 그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카시스의 심장을 찌르르 울렸다. 돌처럼 굳어 있는 그 곳이 따스한 온기로 감싸이는 기분이었다.
카시스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 후로 매년 에스테반 저택을 찾아 왔다. 그가 찾아오는 날은 늘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날리는 봄날이었다.
초록의 들판에서 카시스가 물었다.
“형은 왜 봄에만 와?”
“형은 몸이 많이 아프거든. 특히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집을 나오는 것도 힘들어.”
카시스가 흐음,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형은 나보다 약하네. 난 눈이 하얗게 내린 날에도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하는데.”
그 말에 다니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대단한걸. 역시 내 동생이야.”
그 말에 카시스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자신에게 저런 식의 칭찬을 해주는 사람은 형뿐이었다. 익숙지 않은 말은 늘 심장을 간지럽혔다.
싫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따스한 봄빛 속에서 다니엘은 카시스에게 많은 말들을 했다.
“카시스, 이렇게 햇살이 좋은 날에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건 아깝잖아. 함께 소풍을 다녀오자.”
“카시스, 얼굴이 좀 빨간 데 몸이 안 좋은 것 아니니?”
“푸핫, 너 정말 예쁘구나. 봄꽃이 아주 잘 어울려.”
아주 사소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어린 카시스의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가 곁에 있을 때면 카시스는 평범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카시스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고독하지. 카시스.”
휘날리는 꽃바람 속에 다니엘은 어린 동생을 품에 안고 속삭였다.
“시간이 흐르면 분명 네 외로움을 알아줄 사람이 나타날 거야.”
“그런 사람, 필요 없어.”
카시스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시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다니엘은 마음 아픈 얼굴을 했다.
“그렇게 말하면 못 써.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분명 네가 먼저 다가가고 싶어 어쩔 줄을 몰라 할걸. 그때가 되면 네가 먼저 말해 보렴. 에스테반이 아닌 카시스란 이름을 불러 달라고 말이야.”
카시스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지금껏 카시스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고 싶은 적도, 부모님과 다니엘을 제외한 사람에게 제 이름을 부르게 하고 싶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어.”
그럼에도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못할 말이었지만, 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여 주는 말은 다 맞는 말 같았다.
다니엘은 어두웠던 카시스의 세상을 밝게 해 준 한 줄기 빛이었다.
* * *
몇 해가 흘러 카시스는 열두 살이 되었다. 늘 차분했던 카시스의 얼굴이 드물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은 다니엘이 도착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형이 오면 새로 배운 시를 들려줘야지.’
다니엘은 카시스가 시를 낭독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카시스의 맑은 목소리가 아름다운 문장과 잘 어울린다며 늘 환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어려운 외국어로 된 시를 읊을 때야 살짝 미소가 어리는 부모님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몇 번이고 연습한 시를 중얼거리던 카시스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니엘 도련님께서 왜 자꾸 에스테반 저택에 오시는 걸까?”
다니엘의 이름에 카시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하루아침에 이곳에서 쫓겨나신 분이 무슨 생각이신지 몰라.”
“……!”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카시스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카시스는 숨을 죽이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가갔다. 하녀들 몇 명이 커다란 테이블을 앞에 두고 잡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린 도련님이 문 앞에 와있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카시스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에스테반 공작 부부는 결혼 후 몇 년간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수많은 가문을 거느린 공작 부부에게 후계자의 부재는 불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작 부부는 방계 가문에서 한 아이를 에스테반 공작가로 데려왔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다니엘 에스테반이었다.
다니엘은 무척 성실했다. 어린아이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고된 수업을 조금의 요행 없이 임했다.
공작 부부에게도 예의도 발랐다. 친 부모가 보고 싶다고 찡찡거리지도 않았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마음이 강했다. 많은 이들이 그가 에스테반 공작가의 후계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니엘이 저택에 온 지 2년이 되던 해 공작 부인이 임신을 했다. 10개월을 꽉 채워 태어난 아기는 튼튼한 사내아이였다.
공작부부는 아기의 탄생을 기뻐하는 한편 다니엘의 안위에 대해 고민했다. ‘진짜’ 에스테반 공작의 후계자가 태어난 이상 그의 존재는 더 이상 불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
에스테반 공작가는 대단한 명성만큼 적도 많았다. 그 명성을 시기하거나 이권 싸움에 개입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따금 아주 저열한 수를 쓰기도 했다.
달이 뜨지 않은 어두운 밤, 에스테반 저택에 침입한 괴한이 그러했다. 괴한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에스테반 저택의 가장 안쪽 방에 도착했다. 괴한은 문 앞을 지키던 병사를 순식간에 죽이고 방 안에 들어섰다.
포근하게 꾸며진 아기 방이었다. 아기 침대 옆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유모로 보이는 여인과 어린아이였다.
괴한은 단 번에 달려가 여인의 몸을 꿰뚫었다. 여인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괴한은 몸을 돌려 아기를 바라보았다. 보석이 박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기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괴한이 곤히 잠든 아기에게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안 돼!
괴한의 눈이 커졌다. 너무 어려 상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작은 아이가 자객의 다리를 붙잡은 것이다.
괴한이 다리를 거칠게 휘둘렀지만 아이는 필사적으로 버티며 그의 다리를 꽉 깨물었다. 예상치 못했던 고통에 괴한의 몸이 휘청거리며 침대를 치자 아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번쩍 눈을 뜬 아기가 엄청난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는 아기를 품에 안고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처음 계획대로 수면제를 먹일 여유도 없었다.
일차적인 목적은 납치였다. 그러나 그게 되지 않는다면 죽여야 했다.
괴한이 눈이 짐승처럼 번뜩였다. 그가 아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시스!
바닥에 나뒹굴었던 아이가 달려들어 아기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아이의 작은 몸에 괴한의 검이 스쳐 지나갔다. 단말마 같은 아이의 비명이 울려 퍼진 것과 무장한 병사들이 방 안으로 들어찬 것은 동시였다.
괴한은 저주 같은 말을 내뱉고는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괴한이 노렸던 아기는 기적적으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괴한의 검에 찔린 다니엘은 치명상을 입었다. 검에 묻어 있던 독이 문제였다.
다니엘은 독에 침식당해 며칠을 사경을 헤매다 깨어났다. 의사는 아이의 내장이 모두 망가져 버렸다고 했다. 앞으로 절대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조금만 춥거나 더워도 몸이 견딜 수 없을 테니 극도로 조심을 해야 한다고.
에스테반 공작이 다니엘을 찾아왔다.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아이를 향해 공작이 말했다.
—너는 네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네 친부모에게 작위를 주고 따뜻한 곳에 거처를 새로 마련해 줄 테니 그곳에서 편히 살거라.
그 말에 흐릿한 다니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다니엘은 지난 3년간 자신의 보살펴 주었던 공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다니엘은 비쩍 마른 얼굴로 에스테반 저택을 떠났다.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하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정말 주인님이 무섭더라. 제 친자식을 지켜 준 도련님께 어쩜 그렇게 매정하신지.”
“주인님이야 원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냉정한 분이시잖아. 나는 다니엘 도련님이 더 이해가안 가. 카시스 도련님 때문에 몸도 망가지고, 에스테반의 후계자 자리도 빼앗긴 거잖아. 내가 다니엘 도련님이었으면 카시스 도련님이 미워서 쳐다보기도 싫었을 텐데.”
그녀의 마지막 말이 쿵, 하고 어린 카시스의 심장을 내리눌렀다. 카시스는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형이 에스테반의 후계자로 길러졌다고?’
그래서 형이 에스테반의 이름의 무게를 그토록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테반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아 놓고는, 자신을 그 꼴로 만들어 놓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형이라며 달라붙는 내가 얼마나…….’
늘 자신을 부드럽게 바라보던 눈빛아래에 실은 깊은 원망이 숨어 있으리라 생각하니 서글펐다. 이제야 진실을 알았냐며 그의 눈빛이 바뀔 것을 생각하니 무서웠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생경한 두려움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카시스는 묵직하게 감겨 오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카시스가 있는 곳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기지였다. 드넓은 에스테반 저택의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커다란 고목나무. 나무가 해가 비치지 않는 곳에 있어 사람들의 방문이 뜸했다.
속이 빈 나무 기둥 속에 작은 몸을 숨기면 아무도 그를 찾지 못했다. 저택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집사조차도.
‘분명 그랬을 텐데…….’
카시스의 작은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의 앞에 다니엘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잘 잤니, 카시스?”
“……여긴 어떻게 알았어?”
그 말에 다니엘은 쿡쿡 웃었다.
“왜 모르겠어. 여긴 나의 비밀기지였는데.”
“…….”
그 말에 카시스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녀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실이었던 것이다.
카시스의 작은 몸에서 다시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작은 얼굴에 서린 괴로움에 다니엘이 눈썹을 내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카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모님은 절대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에스테반 공작의 후계자는 타인의 앞에서 절대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미안해.”
“뭐?”
“혀, 형의 자리를 빼앗아서 미안해.”
“…….”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카시스는 엉망이 된 얼굴로 흐느꼈다.
“나, 나 때문에 형을 다치게 해서 미안해.”
카시스는 늘 ‘미안’하다는 사과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배워 왔다. 그런 말 한마디보다는 적절한 보상을 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지만 형에게 어떤 보상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카시스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말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카시스를 다니엘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다니엘이 한 발짝 카시스에게 다가왔다.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작은 몸을 품에 안은 다니엘이 속삭였다.
“뭔가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네.”
“…….”
“난 한 번도 에스테반 후계자 자리가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리고 너 때문에 다친 것이 아니야. 너를 지키기 위해 다친 것이지.”
다니엘이 빙그르르 웃었다.
“나는 막 태어난 동생이 너무 예뻤거든. 매일 네 방을 찾아갈 만큼. 그래서 그날 밤, 널 지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
어떻게 이 사람은 이렇게 따뜻하고 강할까. 이렇게 부드럽게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카시스는 결국 다니엘의 품 안에서 엉엉 울어 버렸다.
그날 카시스는 빨갛게 부르튼 눈으로 맹세했다.
“내가 에스테반 공작이 되면 형의 소원을 들어줄게. 그게 무엇이든지.”
어린 동생의 맹세에 다니엘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 * *
카시스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에스테반 공작 부부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대대적인 장례식이 치러졌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을 찾아왔다. 그 앞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에스테반 공작이 있었다.
장례식 내내 카시스는 똑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우아하고, 정중한 태도로 손님을 맞이했다. 그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는 에스테반 공작이었으니까.
창백한 안색으로 달려온 다니엘은 그 모습을 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니엘은 카시스를 와락 껴안고는 소리 내어 울었다. 스물이 넘은 귀족 청년이 품위도 잃어버리고 아이처럼 아주 서럽게.
그러나 카시스는 그 울음이 조금도 부끄럽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가슴 한편이 뜨겁게 울렁거렸다.
그 옛날처럼 그의 품속에서 울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기에 자신은 너무 컸다. 장성한 에스테반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카시스는 힘겹게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카시스는 갑작스럽게 에스테반 공작이 된 후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성년도 되지 않은 에스테반 공작의 위치는 불안했다. 방계 가문의 가주들과 휘하의 가신들이 어떻게든 이 젊은 공작의 기를 꺾어 놓으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린 시절 부터 완벽하게 훈련된 카시스에게도 꽤 고달픈 일이었다. 그런 카시스를 위로해 준 것은 다니엘이 보내 온 편지였다.
거리가 멀어 자주 오갈 수 없는 다니엘은 카시스에게 곧잘 편지를 보내곤 했다. 편지의 내용은 소소했다.
카시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 다니엘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편지에는 한 여인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프로이텐 백작가에 찾아갔어. 백작 부부가 딸에게 수도에서 유행하는 피아노 곡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했거든.
나 정말 놀랐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존재하다니. 엘리제 프로이텐. 이름도 꼭 숲의 여신 같지 않니?]
[어떡하지, 카시스?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으면 심장이 쿵쾅거려. 제대로 피아노를 가르칠 수가 정도로.]
얼마 후에는 온 편지가 엘리제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엘리제를 향한 다니엘의 감정은 깊어지고 있었다. 글씨로만 보아도 그 감정이 온전히 느껴질 정도였다.
몇 개월 후 기쁨이 한껏 어린 다니엘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녀가 내 교제 신청을 받아 주었어.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가 아니니까 당분간 비밀 연애를 하기로 했어. 너무 기뻐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아.]
편지 가득 절절한 마음이 한가득 느껴졌다.
카시스도 그 감정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건가.’
카시스는 여인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지만, 사내가 이토록 한 여인에게 빠져 있는 상태를 그런 단어로 지칭한다는 것은 알았다.
카시스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쓰는 낯선 단어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의 편지를 받아 보며 조금 궁금해졌다.
‘그건 도대체 어떤 감정일까.’
세상을 막 배워 가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마음 한 편에 사랑에 대한 호기심이 퍼져 나갔다.
* * *
매해 봄이 돼서야 찾아왔던 다니엘이 흰 눈이 내리는 겨울, 에스테반 공작 저택을 찾아왔다.
늘 혼자였던 다니엘의 곁에는 한 여인이 함께 있었다.
여인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흩날리는 레몬빛 머리카락, 백옥보다 뽀얀 피부, 금빛 속눈썹 사이로 반짝이는 새파란 눈동자.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사교계에서 수많은 여인을 보았던 카시스조차 인정할 만큼.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 인사드립니다. 프로이텐 백작가의 딸, 엘리제 프로이텐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카시스 에스테반입니다.”
그녀는 고작 지방의 작은 백작가의 영애. 카시스는 거대한 에스테반 공작가의 주인. 그 지위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 났지만 카시스는 그녀를 정중히 맞이했다.
그녀가 다니엘의 소중한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엘리제는 그를 향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제 곤란한 상황을 듣고 선뜻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카시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동부의 작은 백작가의 영애인 엘리제가 수도까지 온 이유는 바로 며칠 후 열리는 신년회 때문이다.
일정한 작위 이상의 여인들이 초대되는 그곳에 프로이텐 백작 부인도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지독한 감기에 걸린 프로이텐 백작 부인은 딸인 엘리제를 대신 보내기로 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다니엘이 엘리제와 함께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백작 부부는 선생님에게 그런 폐를 끼칠 수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지만 다니엘은 젊은 영애 혼자 수도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설득했다.
수도에 있는 에스테반 공작가에 묵으면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는 말과 함께.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백작 부부는 눈을 빛내며 허락했다.
물론 카시스는 다니엘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다. 방 하나 빌려주는 것쯤은 그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니엘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카시스와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소중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어쩐지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때 카시스가 다니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부가 너무 창백한데. 괜찮아?”
많이 건강해지긴 했지만 다니엘의 몸은 여전히 약했다. 찬바람을 쐬면 금세 기침이 심해지기에 그는 이런 추운 날 바깥을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동부에서 수도까지의 긴 여행길 같은 것은 더더욱 무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늘 에스테반의 저택에도 봄에만 오지 않았던가.
다니엘은 작게 새어 나오는 기침을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아주 좋아.”
그러나 카시스의 걱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방을 정리해 두었으니 쉬도록 해. 하고 싶은 말들은 식사 시간에 해도 충분하니까.”
그 말에 다니엘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여덟 살 어린 동생은 마치 어린 새를 돌보듯 자신을 살뜰히 챙기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카시스가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자신뿐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렇게 할게.”
사실 엘리제의 앞이라 최대한 표 내지 않았지만 지독히 피곤하긴 했다. 몸은 무거웠고 열도 조금 오르는 것 같았다.
괜히 무리를 해서 두 사람의 걱정을 사느니 조금 쉬고 나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니엘이 엘리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도 방에서 쉬겠어요?”
“저는 괜찮아요. 마차에서 내내 앉아 왔더니 좀 답답하네요. 저택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요.”
그렇게 말한 엘리제의 눈빛이 향한 곳은 카시스였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 가득 그가 담겼다. 그녀는 카시스를 향해 두 눈을 휘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꽃이 피어나듯 화사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본 카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집사를 불러 안내를 부탁하도록 하죠.”
“……네. 그리해 주시면 감사하죠.”
엘리제는 조금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시스는 다시 다니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색이 더 안 좋아졌어. 어서 방으로 가자.”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방을 나가기 전 엘리제에게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조금 후에 봐요, 내 사랑.”
엘리제는 연인을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두 남자가 사라진 방에는 엘리제 홀로 남았다. 어느새 앨리제의 얼굴에 어려 있던 봄꽃처럼 화사했던 미소가 사라졌다.
엘리제는 방금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와는 전혀 다르다더니 정말 다르잖아.’
다니엘은 사촌인 에스테반 공작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와는 달리 건강하고, 마음이 굳센 아주 멋진 남자라고.
그 말대로였다. 아니, 그에게 들은 말 이상이었다.
직접 본 카시스 에스테반은 아주 잘 세공된 최상급의 보석 같았다.
누구의 시선이라도 가져갈 만큼 선명한 빛깔을 가진, 아주 공들여 깎아 만든 다이아몬드.
엘리제는 중얼거렸다.
“저런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다니면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부러워할까?”
* * *
추운 겨울 길을 나섰던 것이 무리였던지 다니엘은 결국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도 낫기는커녕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증상은 심해졌다.
다니엘은 고열로 붉어진 얼굴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엘리제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다니엘은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요, 엘리제. 신년회에는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죠.”
엘리제는 눈을 내리깔며 씁쓸히 웃었다. 그 모습에 다니엘의 심장이 아프게 조여 왔다.
좀 더 건강한 몸이었다면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다니엘은 엘리제가 이 신년회를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고 있었다. 제국의 가장 큰 연회인 신년회는 지방 백작가의 딸인 그녀에게는 꿈같은 자리였다.
그 자리를 위해 프로이텐 백작 부부는 안 좋은 재정에도 그녀를 위한 화려한 드레스를 만들어 주지 않았던가.
‘귀족 영애가 혼자 가면 시선이 좋지 않을 텐데.’
몸이 좋지 않아 사교계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다니엘이지만 그 정도는 알았다.
보통 귀족 여인들은 연회에 혼자 참석하지 않는다. 여인을 에스코트하는 사내가 누구인지에 따라 여인들의 서열이 정해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 혼자 가면 무척 외로울 거야.’
엘리제는 수도에 온 것이 처음이라 마땅히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고고한 귀족들이 모인다는 연회에 홀로 서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왔다.
그녀에게 특별한 추억이 될 신년회가 그런 식으로 망쳐지는 것을 다니엘은 바라지 않았다.
카시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나보고 그녀를 에스코트해 달라고?”
“그래.”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모은 카시스의 얼굴은 영 내키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니엘은 쓰게 웃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가뜩이나 연회를 좋아하지도 않는 카시스에게 처음 만난 형의 연인을 에스코트 해달라고 하는 부탁은 썩 즐거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자신의 알량한 욕심이었다.
“정말 안 되겠니? 이게 내 소원이라고 해도?”
다니엘의 말에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오래전 어린 카시스가 다니엘에게 맹세했던 것이었다.
에스테반 공작이 되면 어떤 것이든 형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다니엘이 원한다면 카시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줄 수 있었다. 수백 캐럿이 쏟아지는 다이아몬드 광산도, 수도의 가장 좋은 땅에 위치한 대저택도, 모든 것을.
‘그런 것을 고작 이런 것에 쓰려고 하다니.’
카시스는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는 조금도 장난 같지 않았다. 결국 카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카시스!”
“대신 소원은 무효야. 이런 건 소원으로 치지 않아.”
그 말에 다니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동생은 어린 날 맹세했던 소원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럴 때 잽싸게 들어주고 끝내면 편할걸.’
물론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은 법이었으니까.
동생의 마음에 다니엘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카시스.”
* * *
신년회 당일. 엘리제는 거울 속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여인은 아름다웠다. 뽀얀 뺨과 파란 눈동자. 황금으로 만든 것처럼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까지.
그러나 엘리제는 그 모습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촌스러운 드레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동부에서 맞춰 가지고 온 드레스였다. 재정이 힘든 프로이텐 백작가로서는 꽤나 무리해서 맞춘 최고급 드레스였다.
그러나 요 며칠 수도의 거리를 거닌 엘리제는 이 드레스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깨달았다.
수도의 최고급 드레스숍에 걸린 드레스들과 비교해 보니 10년은 유행이 뒤쳐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볼품없는 보석.’
귀걸이와 목걸이도 마찬가지였다. 귀걸이는 어머니인 프로이텐 백작 부인이 쓰던 것이고 목걸이는 다니엘이 신년회를 위해 선물해 준 것이다.
푸른빛의 보석은 색이 진한 최고급이었지만 화려하진 않았다. 그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리라.
‘하여간 어리석은 사람이야. 내가 그렇게 신년회를 기다린 것을 알았으면 알아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어야지. 이런 볼품없는 목걸이 따위나 주다니.’
다니엘은 여자에게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모른다. 그는 끔찍할 정도로 순수했다.
그는 아직도 연인 사이에 가장 큰 선물은 가장 처음 피어난 꽃이나,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엘리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목걸이를 바라보더니 다시 거울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박한 평가와는 달리, 그녀가 촌스럽다고 평한 그 모든 것들이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청아한 외모 덕분이었다.
‘뭐, 아주 나쁘진 않지.’
엘리제는 부채를 손에 들며 일어섰다.
‘게다가 오늘 날 꾸며 줄 최고의 보석은 따로 있으니까.’
엘리제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화려한 마차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새하얀 정장에 브로치로 장식된 예복을 입고 그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엘리제의 최고의 보석. 그것은 바로 카시스 에스테반이었다.
‘다니엘의 병약한 몸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다니엘의 열은 결국 떨어지지 않았고, 카시스는 그녀에게 에스코트를 해 주겠다고 했다.
다니엘의 병은 짜증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따금 이런 식으로 생각지 못한 도움을 주곤 했다.
카시스는 엘리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제는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황성은 화려하게 치장된 귀족들로 가득 찼다.
밝은 얼굴로 인사를 나누던 이들이 말을 멈춘 것은 두 남녀가 등장한 후였다.
이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이자, 사교계 여인들의 가슴을 애타게 만드는 젊은 에스테반 공작이었다.
오늘도 그는 아름다웠다. 새하얀 예복을 입고 은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
시선을 끈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여인을 본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웅성거렸다.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의 미모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에스테반 공작과 비견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저 여인은 누구죠?”
게다가 늘 혼자 등장했던 에스테반 공작이 여인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 아름다운 숙녀는 누군가.”
궁금함을 참지 못한 황제가 축사를 마치자마자 내려와 물었다. 엘리제는 황제의 앞에 고개를 숙여 우아하게 인사했다.
“고귀하신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프로이텐 백작가의 딸, 엘리제 프로이텐이라고 합니다.”
프로이텐? 황제가 눈썹을 찡그렸다.
엘리제는 황제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았다. 황제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미미한 가문이기 때문이리라.
황제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웃었다.
“익숙한 가문의 이름은 아니지만 카시스와 함께 올 정도면 대단한 가문의 영애겠지.”
“그런 것 아닙니다.”
카시스는 서늘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황제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엘리제는 그런 황제를 향해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동부에 터를 두고 있는 작은 가문입니다. 영지는 크지 않지만 유서 깊은 곳이랍니다.”
“그렇군. 프로이텐이라. 내 꼭 기억하겠네.”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카시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방의 그저 그런 백작가에서 홀로 올라온 영애라면, 수도 사교계의 위압감에 몸이 움츠러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군다나 황제의 앞이라니 긴장감으로 바들바들 떨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엘리제에게는 그런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일상인 듯 편안해 보였다. 그 점이 카시스에게는 조금 의외였다.
‘역시 형이 괜한 걱정을 한 거야.’
떠나오기 전 침대에 누운 다니엘은 카시스에게 말했다.
—그녀가 긴장하지 않게 네가 신경 써 줘.
카시스로서는 마뜩지 않은 부탁까지 했다.
‘그녀와 첫 춤까지 함께 춰 달라고 부탁하다니.’
카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에 나와 여인과 춤추는 일은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으나, 이미 한 약속이니 물릴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음악이 시작되자 카시스가 엘리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함께 춤을 추시겠습니까.”
엘리제는 빙긋이 웃었다. 황제마저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싱그러운 미소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시스의 손 위로 손을 얹었다.
조금 후 두 사람이 홀 가운데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들이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두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그곳만 다른 세계를 펼쳐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춤을 잘 추시는군요.”
엘리제가 카시스를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카시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영애의 실력도 훌륭합니다.”
그 말에 엘리제는 수줍은듯 미소 지었다.
음악이 끝나고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명화의 한 장면 같은 우아한 모습이었다.
카시스가 엘리제에게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괜찮으시겠지요?”
“네. 그럼요.”
엘리제는 웃으며 대답했다. 카시스가 그녀의 곁을 떠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많은 이들이 엘리제를 향해 다가왔다.
“처음 뵙습니다. 리오넬 후작가의 라이언 리오넬입니다.”
“반가워요. 마르시아 후작가의 소피아라고 해요.”
그중에는 꿈속의 공주님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다가온 어린 황녀 레이첼도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엘리제를 둘러쌌다.
엘리제에게 이처럼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이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는 늘 모든 이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만큼 그녀의 기분이 들뜬 것은 처음이었다. 눈앞의 이들은 지금까지 그녀를 둘러싼 이들과는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화려한 옷, 기품 있는 몸짓, 제국의 누구라도 알 만한 엄청난 가문들. 하나같이 허투루 볼 수 없는 대단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누구 하나 엘리제를 무시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을 대하듯 정중하게 그녀를 대했다.
그 점이 엘리제를 환희에 차게 만들었다.
연회가 끝나고 카시스와 엘리제는 함께 마차를 탔다.
“수도의 연회는 어떠셨습니까.”
카시스가 마주 앉은 엘리제를 향해 형식적인 질문을 던졌다. 엘리제는 두 눈을 휘며 웃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다행이군요.”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에 번뜩인 빛을 보지 못했다.
‘가지고 싶어.’
눈앞의 남자는 엘리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한 다이아몬드였다. 지금껏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어설픈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진짜’ 다이아몬드.
황성에 들어서는 순간 받은 수많은 시선.
동경, 부러움, 시기, 절망.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가문의 사람들이 보내는 그 시선들은 엘리제를 무척 흥분시켰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벅찬 감정에 두 손이 파르르 떨려올 정도였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까. 카시스는 자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많은 사내들의 눈빛을 풀어지게 만든 미소에도 무덤덤했다.
정중하게 대해주고는 있었지만 그건 결코 그녀에 대한 호의가 아니었다.
‘다니엘. 그 때문일 테지.’
그가 아니었다면 저 차가운 남자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다니엘만이 얼음 같은 남자를 움직이는 존재였다.
그 순간 엘리제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엘리제는 천천히 그를 옭아맬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며칠 후 몸이 나아진 다니엘은 엘리제와 함께 에스테반 저택을 떠났다.
엘리제가 수도에 남긴 잔향은 무척이나 짙었다. 약혼녀가 정해지지 않은 젊은 에스테반 공작은 그 존재만으로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그런 그와 함께 나타난 아름다운 백작 영애. 모든 것이 귀족들의 흥미를 가지기에 충분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카시스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물어본 이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카시스는 짧게 대답했다.
“그녀와는 조금의 친분도 없네. 아는 이의 부탁을 받아 에스코트한 것뿐이야.”
굳이 다니엘과 엘리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것은 아직 비밀이었다. 괜한 말을 꺼내 두 사람을 화제에 오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아직 혼전인 엘리제에게는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사교계의 뒤편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말이 끊이지 않았다.
냉정하기로 소문난 에스테반 공작이 누군가의 부탁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영애를 에스코트 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순수하게 믿을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그렇게 카시스와 엘리제에 대한 이야기가 봄날의 씨앗처럼 퍼져 나갔다.
그러던 중 엘리제가 다시 에스테반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환한 보름달이 뜬 밤의 일이었다.
“기별도 없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프로이텐 영애.”
카시스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찬바람을 맞은 그녀의 두 볼은 발갛게 얼어 있었고, 두툼한 털망토를 둘렀음에도 가녀린 몸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혹시 다니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녀가 자신을 찾아올 일은 다니엘뿐이라 카시스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도대체 왜 그런 모습으로…….”
“에스테반 공작 저하. 당신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어요.”
“……!”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엘리제는 그의 앞에 다가가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마음에 품게 되었단 말이에요.”
눈가에 눈물이 어린 여인의 고백은 절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카시스는 그 고백을 듣는 순간 온 몸의 피가 다 식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기쁨이나 흥분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얼음보다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영애도 오늘 밤의 일을 잊으십시오.”
“에스테반 공작 저하!”
엘리제는 간절한 얼굴로 카시스의 손을 잡았지만 카시스는 세차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를 지나치며 카시스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니엘을 배신하지 마십시오.”
깊은 원망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카시스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더 이상 그녀를 마주 보았다가는 지독한 말들을 쏟아 버릴 것 같았다.
엘리제는 쫓겨나듯 에스테반 저택을 나왔다. 엘리제는 시간이 늦었으니 하룻밤 묶고 가면 안되냐고 간절히 부탁했지만 카시스는 그녀에게 작은 여지마저 주고 싶지 않아했다.
엘리제는 마차를 타고 에스테반 저택을 나섰다. 그녀가 떠나는 순간까지도 에스테반 저택의 고용인들은 침묵했다. 카시스가 괜한 소문이 나지 않게 단단히 주의를 준 모양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에스테반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입이 무거워보였다. 젊은 공작이 완벽하게 통솔하는 그곳의 고용인들은 쉽게 엘리제에 대한 말을 떠들어대지 않을 것이다.
‘바보 같은 사람. 그것만으로 소문이 안 날것이라고 생각 하는 거야?’
말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어나가는 법이다.
엘리제는 프로이텐 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가 향한 곳은 수도 근교에 있는 레이첼 황녀의 별장이었다.
신년회때 만난 레이첼 황녀는 엘리제를 무척 좋아했다. 엘리제가 동부로 돌아간 후에도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엘리제가 그토록 유치한 친구 놀음을 한 것은 이 날을 위해서였다.
엘리제는 별장의 문을 똑똑 두들겼다. 레이첼이 튀어 나와 그녀를 맞이 했다.
“엘리제, 어떻게 되었어요?!”
레이첼은 오늘밤 엘리제가 에스테반 공작가에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에게 마음을 전하러 간다고 말했던 엘리제의 얼굴에 얼마나 설렜던지.
그러나 레이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망토를 두른 엘리제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너무나 슬픈 얼굴로. 너무나 가련한 모습으로.
“엘, 엘리제!”
레이첼은 창백해진 얼굴로 엘리제를 끌어안았다. 엘리제는 그 품에서 소리도 내지 않고 흐느꼈다.
레이첼은 제가 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이 사랑스러운 여인이 우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너무 아파왔다. 한편으로는 친구를 상처 준 남자에 대한 원망이 올라왔다.
레이첼이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내가 어떻게든 당신을 도와줄게요. 그러니 울지 말아요.”
* * *
황태후는 착잡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얼굴이 헬슥해진 레이첼이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오늘 또 식사를 물렸다면서.”
“먹고 싶지 않아요.”
레이첼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얼굴에 황태후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황제의 어머니이자, 드높은 권력을 가진 황태후였다. 그러나 엄한 그녀도 약해지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손녀인 레이첼이었다.
레이첼은 벌써 며칠이나 식사를 물렸다. 며칠 새 살이 쪽 빠져 얼굴이 퀭해진 레이첼을 바라보며 황태후가 말했다.
“레이첼.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
얼마 전부터 레이첼은 황태후를 조르기 시작했다. 에스테반 공작과 프로이텐 영애의 결혼을 중매해달라는 것이었다. 황태후는 그 말을 거절했다.
레이첼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저를 위해서는 뭐든지 해주실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녀의 말대로 레이첼에 대한 황태후의 사랑은 각별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손녀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 부탁만큼은 들어줄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귀족의 혼사는 쉬운 것 것이 아니야. 가문과 가문의 격이 맞아야하며, 혼사를 치름으로서 얻어지는 이득이 있어야지.”
에스테반 공작가에 비하면 프로이텐 백작가는 감히 겨주어서도 안될 미미한 가문이었다. 제 아무리 황태후라고 해도 그런 혼사를 밀어붙일 순 없었다.
황태후가 중얼거렸다.
“아니면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던가.”
그 말에 초췌한 레이첼의 눈이 번뜩였다.
15살.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황태후의 곁에서 보고자란 것이 많았다. 아무리 그녀라도 귀족의 세계에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할머니. 에스테반 공작과 엘리제가 아주 특별한 사이라고 하면요?”
“그게 무슨 말이니?”
“얼마 전 보름달이 뜬 밤, 엘리제가 에스테반 저택에서 하룻밤까지 보내고 왔어요. 그것이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는 명분이 될 수는 없나요?”
충격적인 말에 황태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리 귀족들이 문란하게 논다고 해도 그것은 들키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 결혼도 하지 않은 두 남녀가 함께 밤을 보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게 정말이니?”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날 밤, 에스테반 저택에서 쫓겨난 엘리제가 묶은 곳은 레이첼의 별장이었다. 그리고 사실을 아는 것은 레이첼과 엘리제 두 사람 뿐이었다.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숨긴다면 진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레이첼은 흔들리는 눈빛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고말고요. 한번 조사해보세요. 엘리제가 에스테반 저택에 간 것을 본 사람이 분명 있을 거예요.”
이건 나의 친구를 위해서야.
맹목적인 애정이 순진한 소녀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순간이었다.
황태후는 보름날 밤에 엘리제가 에스테반 저택에 갔다는 말이 맞는지 확인했다.
프로이텐 백작 부부로부터 그날 밤 엘리제가 외박을 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모두 사실이었다.
황태후는 카시스를 찾아가 프로이텐 백작가와의 혼례를 주선했다.
“제국의 대귀족 에스테반 공작가를 이끄는 주인이라면, 함께 밤을 보낸 여인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녀와 나는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에스테반 공작이나 되는 분이 그런 뻔뻔한 거짓말을 하시다니요. 제가 모두 확인해 보았습니다!”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더 이상 무례한 말을 듣고 싶지 않군요. 이만 돌아가십시오.”
그 기세가 어찌나 서늘한지 황태후의 등 뒤로 오한이 서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택을 나온 황태후는 에스테반가의 몇몇 가신들을 찾아갔다. 새파랗게 젊은 에스테반 공작을 마땅치 않아 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황태후의 결혼 주선을 찬성했다. 새파랗게 어린 공작이 한미한 백작가의 영애를 부인으로 맞는 것은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공작의 권위는 추락하고, 공작 부인의 힘에 기대어 더 큰 권력을 잡는 것도 불가능 할 것이다.
에스테반가를 경계하는 귀족 가문들과 엘리제의 부모인 프로이텐 백작부부까지 가세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에스테반 공작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순진한 영애를 농락하신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프로이텐 영애를 책임지십시오. 그것이 고귀한 에스테반 공작이 보여야 할 모범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론은 들끓었다. 자극적이며 추잡한 소문. 게다가 수많은 이권까지 개입되어 상황은 쉽게 사그라들 기미가보이지 않아 보였다.
생전 처음 겪는 피로함에 카시스가 머리를 쓸어내렸다.
‘일이 너무 커졌군.’
이런 일은 아무리 제국을 호령하는 에스테반 공작이라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괴로운 얼굴로 눈을 내리깐 카시스의 머릿속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환하게 웃고 있는 다니엘이었다. 그는 아마 이런 더러운 소문이 난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카시스가 다니엘의 주변 사람들의 입막음을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이런 썩은 내 나는 소문 따위 형은 알 필요가 없어.’
카시스는 자신의 선에서 이 일을 해결할 셈이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이 기세를 몰아 그를 압박했지만, 결국은 증거도 없이 떠들어대는 추잡한 스캔들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에스테반 이었다. 에스테반 공작이 싫다는 결혼을 강행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수도에 엄청난 폭풍이 휘몰아친 가운데 정작 주인공은 엘리제의 주위는 무척 조용했다.
몸이 좋지 않다며 찾아오는 모든 손님의 방문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많은 말들이 들려왔다.
누군가는 엘리제를 정숙하지 못하다고 비난했고, 누군가는 에스테반 공작에게 마음과 몸을 준 가련한 여인이 상처받아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며 동정했다.
‘어떻게 떠들어 대든 상관은 없지만…….’
엘리제는 내리깐 눈으로 찻잔을 들이켰다.
심플한 실내 드레스를 입은 엘리제의 얼굴은 꼭 큰 병에 걸린 사람처럼 초췌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생기를 잃고 가련해 보였다. 벌써 이 주째 물과 약간의 스프를 제외한 모든 음식을 물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백한 안색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꽤 편안해 보였다.
‘에스테반 공작. 나름대로 열심히 버티고 있는 모양이지만…….’
엘리제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는 버틸 수 없을걸. 당신을 무너지게 만들 사람을 보낼 테니까.’
“아가씨, 다니엘 에스테반 선생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마사의 목소리에 엘리제는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올렸다.
“들어오라고 하렴.”
마사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향하는 다니엘의 얼굴은 걱정이 가득했다.
“엘리제의 상태는 어떤가.”
“벌써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고 계셔서 좋지 않으십니다. 연약한 분이 저리하시니 혹여나 잘못되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큽니다.”
마사가 괴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다니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그는 사교계 생활을 하지 않았기에 부모님과 친한 친구들에게 큰 소식을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이 이번 일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말해 주지 않았다.
그가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마사가 보낸 편지 때문이었다. 마사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전하며 엘리제가 식음을 전폐하며 죽어 가고 있다고 전해 왔다.
‘말도 안 되는 소문에 그녀가 얼마나 놀랐을까.’
다니엘은 이 모든 것이 누군가 일부러 퍼뜨린 악질적인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년회에 함께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질투한 누군가나 에스테반 공작의 권력을 경계하는 이들이 만든 가짜 스캔들이 틀림없었다.
다니엘은 주머니 속에든 작은 상자를 꾹 잡았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할 셈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기지 말고 우리 사이를 공고하자고.
그러면 이 더러운 소문은 깨끗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고 엘리제와 눈을 마주친 순간 다니엘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엘리제?”
그는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늘 단정하게 빗겨져 있던 레몬빛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품위 있게 앉아 있던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싱그럽던 얼굴은 살이 빠져 초췌했고, 푸른 눈동자에는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심장이 꽉 조여 올 만큼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녀를 향해 걸음을 내디딜 수 없었다. 그녀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한마디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그를, 에스테반 공작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
다니엘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다니엘은 믿을 수 없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막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온 말이라고는 잔뜩 쉬어 버린 말 한마디뿐이었다.
“……거짓말.”
그러나 엘리제의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슬프고, 슬프고, 슬펐다.
다니엘은 다시 한번 힘겹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정말?”
도저히 목이 메어 더 이상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정말이지 괴로웠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두 다리가 벌벌 떨려왔다. 그럼에도 그는 필사적으로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순간마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 엘리제의 푸른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새어 나왔다.
“다니엘, 이제 그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나도, 그리고…….”
이어진 말에 다니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마치 숨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 * *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해 버릴 정도로 세찬 눈보라가 치는 날.
카시스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이 벌써 며칠째였다.
카시스는 피곤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에 없는 눈보라 속에 온 세상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속에서 어렴풋한 형체가 저택을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이 날씨에 누구지?’
생각지 못한 방문객에 카시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이 믿기지 않는 것을 본 듯 커졌다.
설마. 이런 날씨에 그가 이곳까지 올 리 없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그가 분명했다.
카시스는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갔다. 방문객은 에반의 부축을 받아 막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카시스가 소리쳤다.
“형!”
새하얀 눈이 온몸 위에 쌓인 다니엘이었다.
카시스는 그를 향해 따지고 싶었다. 도대체 왜 이런 날씨에 이곳을 찾아온 것이냐고. 그러나 카시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니엘이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바란이 찾아와 다니엘을 진찰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카시스에게 말했다.
“찬바람을 너무 맞으셨어요. 심장과 폐 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다리의 동상도 심각하고요. 치료를 해 두긴 했지만 후유증이 심하게 남으면 제대로 걷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대는 수도 제일의 의사야! 할 수 있는 치료가 있을 것 아닌가!”
카시스의 외침에 바란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오래 전에 상한 몸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무조건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목숨이 끊어지실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카시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바란은 그 모습에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다니엘 님께서 깨어나시면 불러 주십시오.”
바란이 나간 후 카시스는 굳은 얼굴로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혈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창백한 얼굴, 파랗게 언 입술, 기운 없이 늘어진 손끝, 붕대를 감은 다리까지. 겨울 길에 처참하게 목숨이 끊어진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카시스는 떨리는 손으로 다니엘의 코 아래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미약하지만 분명 숨을 내쉬고 있었다.
‘괜찮아. 아직 늦은 것은 아니야.’
이곳에서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면 따스한 남쪽 나라로 그를 보낼 것이다.
추위 한 자락도 없는 따스한 곳에서 편안히 요양을 한다면 괜찮아질 것이다. 다리도 후유증 없이 나아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럴 거야.’
카시스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평정을 가지려 했지만 마주 잡은 두 손은 자꾸만 떨려 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니엘이 눈을 떴다. 흐릿한 남색 눈동자가 기운 없이 깜빡였다. 카시스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형. 정신이 들어? 도대체 왜 이런 날씨에 이곳까지 온 거야! 몸에 얼마나 무리가…….”
“카시스.”
가는 목소리였다. 너무나 가늘어서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만큼.
잠시후 다니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가 널 사랑한대.”
그 말은 화살처럼 날아와 카시스에게 내리꽂혔다. 그녀는 결국 모든 것을 말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런 날씨에 날 찾아온 것이구나.’
카시스는 떨리는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마저 빼앗아간 내가 미운 것일까. 이번에야 말로 형은 나를 원망하게 된 것일까.
까마득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말한 것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너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야.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해 얼굴이 해쓱해지고, 입술은 메말랐어.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어 버릴지 몰라.”
다니엘이 비쩍 마른 입술로 말을 이었다.
“그녀도, 아이도.”
“……뭐?”
아주 무겁고 단단한 것으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카시스는 커다랗게 뜬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녀는 뱃속에 내 아이를 가지고 있어.”
다니엘은 그 날 들었던 엘리제의 말을 떠올렸다.
눈물이 어린 눈동자로 그녀가 말했다.
—이제 그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나도 그리고…… 이 아이도.
다니엘은 일그러진 얼굴로 카시스의 손을 맞잡았다.
“카시스, 부탁이야. 그녀를 네 아내로 맞이해줘.”
“……!”
“나 대신 그녀를, 내 아이를 행복하게 해줘.”
처절하며 절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옳은 답이 아니었다. 형이 사랑한 여자를, 형의 아이를 가졌다는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니. 그것은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결말이었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려는 순간 다니엘이 잔인한 말을 꺼냈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야.”
“……!”
그 말은 마법의 주문처럼 카시스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어린 날 형에게 주었던 이 선물은, 형을 향한 순수한 마음에 준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쓰라고 준 것이 아니었다. 이런 지독한 것을 바라길 원하지 않았다.
카시스는 허망한 눈으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죽은 사람보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초췌한 얼굴에 파란 눈동자만이 기괴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아주 필사적이고, 처절한, 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보여줄 법한 그런 것이었다.
바란이 한 말이 카시스의 귓가를 스쳤다.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목숨이 끊어지실 수도 있어요.
……만약 여기에서 형의 말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형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맹목적인 애정을 주는 사람이었다. 피도 이어지지 않는 갓난이 동생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큼.
그런 형이 사랑한 여자. 그 여자가 잘못된다면 형은 견딜 수 있을까?
아니.
형은 죽을 것이다. 처참한 모습으로 숨을 멈추겠지.
이번에야 말로 마음깊이 나를 원망하며.
카시스는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슬픔과 원망, 절망감이 뒤섞여 그를 괴롭혔다. 조금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던 다니엘의 흐린 눈동자에 빛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이 일은 잊고 치료를 받아. 외국에 형이 지낼 곳을 마련해 줄 테니까.”
카시스는 텅 버린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형. 이런 게 형이 말한 사랑이라면 난…… 사랑 따위 절대 하지 않을 거야.”
“……!”
온기를 잃은 남색 눈동자를 본 순간 다니엘은 소중한 동생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랑에 빠진 그는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므로.
그는 차마 동생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몇 개월 후, 온 수도를 뒤흔들었던 소문의 주인공인 에스테반 공작과 프로이텐 영애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황제가 주례를 보고, 제국의 고귀한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박수를 보내는 엄청난 결혼식이었다.
물론 모든 이들이 이 결혼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로이텐 가문이 너무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표하던 이들도 신부가 등장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엘리제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기에.
그 옆에 선 에스테반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새하얀 예복을 입은 카시스는 그녀가 아닌 다른 여인은 차마 옆에 설 수 없을 만큼 빛나고 있었다.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어우러진 부부였다. 누구도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결혼식장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반짝이는 조명 속에 카시스가 말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평생 외롭고 고독하겠지.”
그 말에 엘리제가 두 눈을 휘며 웃었다.
“상관없어요.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당신이란 사람이 아니라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이니까.”
카시스는 굳은 얼굴로 그녀와 얼굴을 바라보았다. 환한 얼굴로 미소 짓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 같았다.
그제야 카시스는 깨달았다.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엘리제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산을 했다. 그녀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 * *
다니엘은 샐리를 향해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구차한 변명이라는 건 알지만 카시스와 엘리제가 정말 좋은 부부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누구보다 따스한 그녀니까, 카시스의 외로움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그녀는 카시스를 품어 줄 만한 여인이 아니었죠.”
그것을 좀 더 일찍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다니엘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던 사랑의 열병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었다.
다니엘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직도, 그때 카시스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어요.”
—이런 게 형이 말한 사랑이라면 난…… 사랑 따위 절대 하지 않을 거야.
그 눈동자는 마치 어린아이가 배웠던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누군가가 온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가빠진 숨을 고르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당신을 사랑해요. 알고 있나요?”
“…….”
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바라보는 카시스의 눈빛을 보고 바로 알아챘어요.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본 적이 없는걸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
“너무 이기적인 사랑을 봐 버렸기에 그 애는 사랑이라는 것을 지독히 경멸했거든요.”
다니엘은 샐리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카시스가 감정을 표현하는 건 무척 느리고, 아주 서툴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기에 그 애의 사랑은 조금의 거짓 없는 진심이랍니다. 그 말을 당신께 꼭 하고 싶었어요.”
샐리는 입술을 꽉 다물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게 떨리는 긴 속눈썹이, 흔들리는 눈빛이, 그녀의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 * *
그날 밤, 샐리는 잠들 수 없었다. 다니엘이 했던 모든 말들이 비수가 되어 그녀를 꽂는 느낌이었다.
그런 일을 겪은 카시스가 불쌍했다. 안쓰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에 대한 미움이 커졌다.
‘그래서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거야?’
전생의 카시스는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리깐 눈빛은 경멸마저 감돌았다.
그 눈빛에 그녀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샐리는 끝없이 그에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샐리의 안에 가득 담긴 그 감정은 너무나 커서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아주 가끔 그는 경멸이 아닌 미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래서 샐리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 희망은 그의 말 한마디로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그는 괴로운 얼굴로 이마를 감싸며 말했다.
—난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줄 거야. 돈도, 보석도, 모든 것을. 그러니 이제 그런 말은 그만해.
그 순간 샐리는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깨달았다.
그 모든 말들이 그에게는 탐욕스러운 창부의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샐리는 그날 이후 그에게 절대 사랑한다 말하지 않았다. 차마 입 밖으로도 나가지 못한 그 감정은 점점 그녀의 안에 쌓여 곪아 갔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 자신의 사랑을 탐욕으로 치부하는 남자.
그의 옆에서 서서히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엘리제가 준 약 때문에 피부가 썩어 가지 않았어도, 그로 인해 생긴 병으로 목숨을 잃지 않았어도 그녀는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었어.”
꼭꼭 숨겨 두었던 전생의 고통이 다시 떠오르자 진득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와 재회하지 않았더라면 오래전 지나갔던 그런 감정 따위 정말로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늦어 버렸다. 눈을 감아도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잠이 오는 대신 격렬한 감정만이 그녀를 감쌌다. 마치 그의 진짜 애첩이었던 그때처럼.
‘아니, 또 그때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샐리는 눈을 떴다. 황금색 눈동자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익숙한 목소리에 카시스가 눈을 번뜩 뜨고는 몸을 일으켰다.
본래의 그라면 누군가를 맞을 때 매무새가 헝클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했다. 그러나 카시스는 그 모든 것을 생략하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
어두운 복도에는 샐리가 서 있었다. 잔뜩 가라앉은 샐리의 황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카시스는 아주 안 좋은 직감이 들었다.
도망가.
그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그보다 그녀가 빨랐다.
“우리 이제 이 계약을 끝내요.”
카시스는 한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샐리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엘리제는 죄인이 됐어요. 배우자의 죄는 어엿한 이혼 사유니 이제 저하가 원한다면 언제든 그녀와 이혼할 수 있죠.”
“…….”
“엘리제의 몰락으로 우리는 각각 원하는 것을 얻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카시스는 그녀가 할 말을 알고 있었다. 언제 그 말이 나올까 두려워 그녀를 피했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그러나 흔들리는 남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샐리는 말했다.
“난 떠날 거예요.”
“…….”
“내일이라도 당장.”
그 순간 카시스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온 머릿속이 뒤엉키고, 이성과 감정이 잔뜩 꼬여 버렸다.
번개가 번뜩이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아무도 없는 별채의 빈방이 생각났다. 그녀의 향기만 남아 있던 빈방.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하루도 편히 잠든 밤이 없었다.
제대로 넘어가는 음식이 없었다.
아무런 향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만 남기고 세상의 모든 것이 죽어 버린 느낌이었다.
“……또다시 나를 버릴 셈이야?”
“네?”
“이제 다시는 떠나보내지 않을 거야.”
카시스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 순간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그의 코끝에 감돌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의 체온이 닿은 온몸의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사랑해.”
“…….”
“너를 사랑해, 샐리.”
샐리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겨 그 말을 들었다.
카시스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처럼 끊임없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이내 그녀의 금빛 눈동자 아래로 한 줄기 눈물이 내렸다.
“……사랑이라고?”
그 목소리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억눌린 분노, 한탄, 원망.
그래서 카시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을 머금은 그녀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부모의 원수를 바라본다 해도 저런 눈빛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 그렇게 내가 이야기했을 때는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았잖아! 내가 그 마음 한 자락이라도 바랐을 때는 조금도 주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 사랑?!”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매섭게 카시스를 덮쳤다.
“왜?! 내가 이제 몸 팔던 여자가 아니라 달라 보여?! 아니면 그때와는 달리 당신에게 살랑거리지 않으니 탐이 나?!”
카시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는 것뿐이었다.
샐리는 그의 품속에서 이성을 잃은 것처럼 소리쳤다.
“당신이 미워!”
카시스는 그 말에 가슴이 아파 왔다.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듯 심장이 조여 왔다.
“정말 미워!”
그녀는 원망어린 말을 내뱉으며 그의 가슴을 두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카시스는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조금 후 그녀의 발버둥이 조금 잦아졌다. 그녀는 지친 듯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숨을 골랐다. 그가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해야 네게 용서를 받을 수 있지?”
눈물이 흐르는 눈을 내리깔며 샐리가 중얼거렸다.
“……날 보내 줘. 더 이상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카시스는 차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어,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늘 굳건했던 그의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 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 * *
한여름의 햇볕이 내리쬐는 에스테반 저택의 아침은 평온했다.
지저귀는 참새 소리와 함께 쓰윽 쓰윽 빗자루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하녀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복도를 거닐었다.
별채의 방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샐리와 카시스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얼굴은 아주 차분했다. 마치 어제의 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짐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드레스도 중고 숍에 넘겨야 하고, 보석도 값을 잘 쳐주는 곳에 팔아야 하니까요.”
“그래.”
“카모라 님의 드레스는 가져가도록 할게요. 그건 제가 선물 받은 거니까 괜찮죠?”
“물론이야.”
카시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되었다는 것을 알까. 그의 앞에 놓인 빵이 조금도 작아지지 않았다는 것은 알까.
심장이 찌릿하고 아파 와 샐리는 그것들을 보지 못한 것처럼 시선을 내렸다.
“엘리제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상처는 크지 않으니 오늘이라도 다시 감옥으로 보내질 거야.”
“그렇군요.”
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프를 입에 넣었다. 스프의 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샐리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방을 찾았다. 그녀는 죄인이었기에 황성의 병사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샐리를 알아본 병사들이 옆으로 비켜 주었다.
샐리는 잠시 멈춰 서서 문을 바라보았다.
크고 웅장하고 문이었다.
‘처음 이 문 앞에 섰을 때 얼마나 긴장을 했었는지.’
샐리는 아직도 이 문을 연 뒤 보았던 엘리제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샐리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커튼이 쳐져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방, 엘리제가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는 숨이 멎은 사람처럼 고요했다. 샐리는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엘리제.”
“…….”
샐리가 처음 내뱉은 그 이름은 무척 이질적으로 들렸다. 엘리제에게 마저도.
엘리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내 심해처럼 스산한 새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녀는 시선을 여전히 천장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왜 찾아왔니?”
스산한 목소리에는 샐리를 향한 원망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샐리는 그래서 그녀가 무서웠다.
그녀는 이따금 감정이 없는 인형 같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화내거나 기뻐하거나 애정을 주거나 하는 그런 감정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서 샐리는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아주 교묘히 숨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이 여자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구나.’
뒤틀려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결여된 것 같았다.
샐리는 미동 없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밉지 않나요?”
“미워.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
“네가 없으면 나는 영원히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었을 텐데.”
샐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다인가요?”
“그럼? 내가 너 따위에게 또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지?”
엘리제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선연한 분노 외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이 여자를 이기고 싶었을까.’
분명 첫 시작은 엘리제에 대한 미움이었다. 전생에 샐리를 무참히 밟았던 엘리제에 대한 선연한 원망.
그러나 이렇게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야 보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니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난 떠날 거예요.”
“…….”
그 말에 엘리제의 고운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샐리는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난 당신처럼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자리가 탐나지 않으니까.”
“…….”
샐리가 그 이름을 단 한순간도 탐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전생의 샐리는 엘리제가 너무나 부러웠고, 그녀가 있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자리에 앉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샐리에게 저 자리는 쉽게 가질 수 없는 독이 묻은 자리라는 것을.
샐리는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었다. 그녀가 카모라의 뮤즈라 해도, 테오도라 황녀의 친우라 해도, 제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데임이라고 해도.
샐리가 그 자리에 앉는 순간 수많은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샐리는 그것이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의 남자를 훔친 여자.
선명히 찍힌 낙인으로 인해 샐리는 모든 이에게 축복받는 신부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에스테반 공작의 옆이라면 더더욱.
‘어차피 이제 다시는 누군가의 옆자리에 있을 생각은 없지만.’
샐리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어젯밤 그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숨기고 숨겨 두었던 마음 한 자락까지 모두.
샐리는 정말이지 후련했다. 모든 것이 소모되어 버려서 이제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샐리는 엘리제를 향해 말을 이었다.
“당신도 그 무거운 가면을 벗어 보세요. 진짜 모습을 숨기지 않고 살면 조금 더 나은 삶이 될지 모르니까.”
“…….”
“내가 그랬거든.”
잠시 후 엘리제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천박한 계집이 잘난 척은.”
* * *
그날 엘리제는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엘리제는 몇 번의 재판을 더 받게 되었다.
일전에 벌어졌던 가짜 편지 사건의 주범이 그녀라는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그녀가 저질렀던 몇 개의 악행이 고발되었다. 대부분 귀족 가에서 일했던 하녀들에게서 나온 말들이었다.
하녀들은 엘리제에게 협박과 회유를 받아 그간 끔찍한 일을 해 왔다고 고백했다.
마사는 마님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자신이 저지른 짓이라고 울며 항의했지만 엘리제는 더 이상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악행을 알게 된 귀족들의 분노가 빗발쳤다. 그들은 그간 자신들을 속인 그녀를 힐난하고 원망했다.
엘리제의 형은 20년으로 늘어났다. 그녀는 그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모두 잃은 후에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최종 판결을 받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소름 끼칠 만큼 아름다웠다고 시크릿 로즈는 전했다.
엘리제의 이야기를 대대적으로 다룬 시크릿 로즈의 마지막 장에는 엘리제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엘리제가 감옥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화가를 불러 그리게 한 그림이었다.
초상화 속의 엘리제는 많은 이들이 아는 그녀와는 많이 달랐다.
감정 없는 눈동자, 꽉 다문 입술, 그리고 작은 보석이 촘촘히 세공된 칠흑 같은 새까만 드레스.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기괴하여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