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타락한 귀부인
며칠 후 황성에서 샐리의 작위 수여식이 열렸다. 작위 수여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황금 의자 위에 앉은 황제와 황후의 옆에 테오도라가 서 있었다. 샐리는 두 손을 모으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황제와 황후 앞에 선 샐리는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찬란한 햇빛이 샐리를 비추었다.
황제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샐리, 그대는 테오도라 황녀를 도와 바르샤의 문을 여는 데 그 힘을 보탰으며, 레이첼 황녀의 병환을 고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황성의 주인이자 두 황녀의 부모로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바, 데임의 작위를 하사한다.”
그녀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거라.”
황제의 말에 샐리는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손에는 황제의 문양인 황금 사자와 황후의 문양인 황금 독수리가 새겨진 화려한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두 가지의 문양이 다 들어갔다는 것은 황제와 황후, 두 존귀한 존재가 함께 주는 작위라는 의미였다.
샐리는 두 손으로 황제가 주는 펜던트를 받았다.
펜던트는 묵직했다. 실제로 그 무게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 펜던트에 실린 무게감이 그렇다는 것이다.
펜던트를 받아 든 샐리의 손이 살짝 떨려 왔다.
데임을 상징하는 이 펜던트는 샐리의 큰 보물이 되리라.
* * *
그날 저녁, 황성에서 연회가 열렸다. 테오도라가 샐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 연 연회였다.
어디까지나 테오도라가 여는 개인적인 연회였기에 소박하게 준비했다. ……그러려고 했다.
“사람이 자꾸 몰려드는군.”
테오도라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테오도라는 일부러 초대장을 돌리지 않았다. 공식적인 행사가 되면 많은 이들이 부담감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샐리의 데임 즉위를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오고 싶은 이들은 오라는 말을 전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결국 테오도라는 황후에게 부탁하여 연회 홀을 하나 더 개방해야 했다.
연회장에 들어선 여인들은 꽃다발을 내밀며 환하게 인사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샐리가 환한 얼굴로 여인들을 맞이했다.
“샐리 님, 정말, 정말 축하해요.”
눈가에 눈물이 어린 에이미가 기쁨이 묻어나는 얼굴로 샐리를 껴안았다.
후작 영애 삼총사도 황홀한 얼굴로 등장했다.
“샐리 님! 오늘의 모습은 밤에 피어나는 붉은 장미처럼 고혹적이세요!”
“아니, 바르샤산 붉은 루비처럼 영롱하신 걸요.”
“둘 다 틀렸어요.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샐리 님만큼 아름다울 순 없어요.”
마지막 말에 세 영애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에이미까지 가세하여 샐리에 대한 열띤 대화가 시작되었다.
샐리는 그녀들의 모습에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오늘도 그녀들의 대화 속에서 샐리는 이 세상에 다시없을 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축하해 주러 온 이들이 많구나.”
우아한 목소리로 나타난 이는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이제 막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영애가 서 있었다.
샐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골든리아가 말했다.
“내 셋째 손녀야. 같이 가고 싶다고 조르기에 함께 왔단다.”
보통의 연회와는 달리 누구든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자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영애는 샐리를 향해 우아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스티 골든리아 라고 해요.”
깜찍한 꼬마 숙녀의 인사에 샐리도 우아한 인사로 답했다.
“반갑습니다, 레스티 영애. 샐리라고 해요.”
레스티는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뎌 샐리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데임 샐리, 제 꽃다발을 받아 주세요.”
“고마워요.”
샐리는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벌써 몇 개의 꽃다발을 들고 있었던 터라 샐리는 꽃에 파묻힌 모습이 되었다. 알록달록한 꽃 사이로 샐리가 수줍게 웃었다.
“이렇게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에요.”
그 말에 골든리아가 웃었다.
“그럴 만한 일이지 않니.”
사실 명예 귀족 작위를 받는다는 자체는 아주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국가와 황실에 도움이 되는 활약을 한 이들에게 수여하기에, 남성들은 곧잘 나이트의 작위를 받곤 했다.
그러나 여성이 데임의 작위를 받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여성이 그 정도로 인정받을 만큼 활약할 일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아이도 데리고 온 거야. 어린아이들 사이에는 데임의 칭호를 받은 네가 영웅이라도 된 모양이야.”
그 말이 사실인 듯 레스티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레스티는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저도 나중에 크면 데임이 될 거예요!”
그 말에 샐리와 골든리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골든리아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레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 같은 공작 부인이 되고 싶다고 했잖니.”
“바뀌었어요. 데임이 훨씬 멋져 보이는걸요.”
복잡한 얼굴이 된 골든리아의 옆으로 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멋진 꿈이구나.”
테오도라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허리를 숙여 레스티와 눈을 마주쳤다.
“꿈을 가진다는 건 좋은 일이지. 이토록 눈빛이 또렷한 것을 보니 꼭 될 수 있을 거야.”
갑자기 나타난 멋진 여인의 말에 레스티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연회에 찾아온 손님들은 다양했다.
아이처럼 커다랗게 웃는 에이미와 점잖게 미소 짓는 그레이스 백작 부인, 생기발랄한 후작 영애 삼총사부터 백발의 지긋한 골든리아 공작 부인, 단아한 차오의 드레스를 입은 마가렛과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게 꾸민 로즈마리 백작 부인까지.
모두가 샐리와 친분을 자랑하는 여인들이었다.
샐리는 여인들과 온전히 기쁨을 나누었다. 와인 잔이 한두 잔 비워지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이었다. 대화를 나누던 샐리는 연회장 입구를 힐끗 쳐다보았다.
‘역시 오지 않는 건가.’
에반은 카시스에게 샐리가 데임이 되었다는 편지를 보냈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편지는 어젯밤 그에게 도착했을 것이다. 편지를 받고 바로 출발했다면 오늘 작위 수여식에 맞추어 도착할 수도 있었다.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굳이 올 이유는 없지.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고, 할 일도 무척 쌓여 있다고 했잖아.’
그럼에도 왜 자꾸 연회장의 입구를 바라보게 되는 것인지 스스로가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샐리, 한잔해요.”
다가온 이는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로즈마리 부인이었다. 흥이 오른 그녀에게는 달콤한 와인 향기가 나고 있었다. 샐리는 웃으며 그녀가 건넨 잔을 받았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와인을 목으로 넘기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는 이 느낌을 샐리는 알고 있었다.
‘설마…….’
샐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였다.
카시스 에스테반.
그가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새빨간 장미꽃을 든 채 그곳에 서 있었다.
행사 때 입는 새하얀 예복 위에는 에스테반 공작의 문양이 새겨진 브로치와 그에게 내려진 각종 훈장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허리에는 금으로 장식된 검까지 차고 있었다.
완벽한 모습을 갖춘 카시스 에스테반 공작의 모습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는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샐리에게 다가왔다. 한 발짝, 두 발짝 다가오는 그에게서 샐리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카시스는 무릎을 꿇어, 앉아 있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마치 레이디에게 구애하는 기사처럼.
“좀 늦었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그제야 샐리는 정신을 차렸다. 샐리는 당황한 얼굴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본 카시스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
그는 그녀에게 새빨간 장미꽃을 내밀었다. 진한 장미 향기가 훅 하고 코끝을 간지럽혔다.
“축하해, 데임 샐리.”
그 말에 샐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샐리는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장미꽃을 받아 든 샐리를 바라보며 카시스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꽃을 많이 받았군.”
그 말대로였다.
샐리의 주변에는 오늘 손님들에게 받은 꽃이 쌓여 있었다. 쌓여 있는 형형색색의 꽃들은 저마다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여, 그가 준 붉은 장미꽃마저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선물을 하나 더 하도록 하지.”
카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샐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연회장 한편에 자리한 악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카시스가 연주자들에게 몇 마디를 하자 그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피아노를 연주하던 이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그 빈자리로 카시스가 다가갔다.
카시스는 재킷 자락을 우아하게 뒤로 넘기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잠시 후 잘 다듬어진 긴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아름다운 선율이 연회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곡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달이 환한 이 밤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사람들은 마치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멋진 연주예요. 저런 멋진 선물을 받다니 정말 기쁘겠어요, 샐리.”
샐리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피아노를 치던 그의 눈빛이 샐리를 향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마주친 눈빛에 샐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
이내 그의 시선이 다시 피아노를 향했다. 반짝이는 선율 속에서 샐리는 왼쪽 가슴 위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콩콩. 심장이 뛰고 있었다.
새벽 늦게야 연회가 끝났다. 손님들은 하나같이 아쉬운 얼굴로 연회장을 떠났다. 샐리는 그들이 모두 돌아간 후에야 카시스와 함께 성을 나왔다.
마차에 올라타 등을 기대어 앉은 샐리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와 달리 손님들이 주는 술을 모두 받아 마신지라 취기가 제법 올랐기 때문이다.
카시스가 입을 열었다.
“잠시 바람을 좀 쐬고 갈까.”
샐리는 나른하게 풀린 눈을 깜빡였다. 술기운이 남아 있어 얼얼했다. 이대로 돌아가 잠이 드는 것보단 시원한 바람을 맞아 술을 좀 깨고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좋아요.”
마차가 선 곳은 에스테반 저택 근처에 있는 다리 옆이었다. 제국의 수도를 관통하는 테일강 위에 만들어진 다리는 야광 돌을 박아 넣어 한밤에도 반짝였다.
평소에는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시간이 늦어서인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샐리는 후,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시원한 여름 밤공기를 마시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등 뒤로 두 손을 맞잡고 걷기 시작했다. 작은 콧노래까지 들려왔다.
카시스는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살짝 풀어진 눈빛과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 붉어진 얼굴과 흐트러진 걸음걸이까지.
“즐거워 보이는군.”
“그럼요. 성도 없는 평민 샐리가 데임이 되었다고요. 얼마나 대단한 일이에요.”
환하게 웃는 샐리의 얼굴은 정말로 기뻐 보였다.
“작위를 그렇게 바라는 걸 알았다면 진즉 내가 줄걸 그랬군.”
공작에게도 황제처럼 작위를 내려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실제로 총애하는 애첩에게 작위를 내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샐리는 내리깐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건 제 능력이 아니라 오직 저하의 총애만으로 받는 거잖아요. 그런 이름으로는 오늘 같은 축하 인사는 절대 받을 수 없었을 거예요.”
전생의 샐리는 작위를 받진 않았지만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을 썼다. 샐리라는 이름은 감추고 에스테반 공작의 첩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성도 없는 이름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에스테반 공작의 이름은 볼 것 없는 그녀가 사교계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돼 주었다. 아무리 그녀를 천박한 출신이라고 숙덕거리는 여인들도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눈치를 슬슬 보며 조심했다.
그래서 샐리는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이 강대한 방패인 줄 알았다. 그 이름이 자신을 갉아먹는 독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깨달은 것은 어느 날 밤이었다.
드넓은 연회장, 화려한 선율, 아름다운 사람들. 그 속에 ‘샐리’는 없었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는 가짜 미소만 짓는 에스테반 공작의 첩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샐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대단한 이름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들어 버리는걸요. 그러니 제게 저하가 주는 이름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 말에 카시스의 걸음이 멈추었다. 샐리는 갑자기 멈춘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시스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그 말은 카시스가 마음 깊이 묻어 두었던 아주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고독하지. 카시스.
자신도 규정하지 못했던 감정을 이해해 주었던 단 한 사람.
‘그’는 어린 카시스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 주곤 했다.
—시간이 흐르면 네 외로움을 알아채는 사람이 나타날 거야. 그때가 되면 네가 먼저 말해 보렴. 에스테반이 아닌 카시스란 이름을 불러 달라고 말이야.
샐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빛 아래로 보이는 카시스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저토록 아이처럼 허물어진 것을 본 것은 처음이라 그녀는 무척 당황했다.
샐리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저하?”
“…….”
“왜 그러세요?”
혹시나 방금 전에 한 말 때문일까.
그러나 그 말은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에 자긍심을 갖고 있는 그를 조금 거슬리게 할망정 이 정도로 충격 받을 말은 아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의 고독도 이해한다면…….”
그는 마치 고백이라도 하듯 무척이나 절실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을 불러 줘.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샐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찌르르르. 조용한 적막 속에 풀벌레 소리만이 들려왔다.
평소라면 그런 말 따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달밤에 비친 그의 모습이 어딘가 너무 애처로웠다. 피아노를 치던 그의 눈빛이 생각났다. 온몸에 취기가 올라와 있었다.
실수를 할 만한 이유가 너무 많았다.
샐리는 천천히 붉은 입술을 열었다.
“카시스.”
“…….”
반응이 없어 샐리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카시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변했다. 마치 달의 여신이 변덕을 부려 길고 긴 저주를 풀어 준 것처럼.
새하얀 달빛 아래,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커다란 손에 가려진 그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움이 가득 느껴졌다.
이내 괴로워 보였던 그의 얼굴에, 만들어진 미소가 아닌 여린 미소가 퍼졌다. 아침의 소년처럼 맑은 미소였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좋아.”
“…….”
자신을 기이하게 바라보는 여인을 마주 보며 카시스는 생각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꽁꽁 숨겨 두었던 외로움을 알아챈 이가 나타났다.
그것이 그녀라 기뻤다.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다. 심장이 설레기 시작했다.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기 새가 날갯짓을 하듯이, 갓 태어난 사슴이 일어서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건…… 사랑이었다.
* * *
엘리제의 방, 그녀의 맞은편에는 오르카 후작 부인이 앉아 있었다. 오르카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엘리제는 빙긋이 웃었다.
“그렇군요. 부인들의 말을 전해 주어서 고마워요, 오르카 부인.”
오르카는 엘리제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제는 오르카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엘리제의 눈짓에 마사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오르카에게 건넸다.
주머니 안에 든 금화를 확인한 오르카의 눈빛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평소 온순한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엘리제는 그녀를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도박에 빠져 있어 제정신이 아니라더니 정말이로군.’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귀부인들 중에는 일상이 따분해 사치와 향락에 빠진 이들이 수두룩했으니까. 도박도 그 중 하나였다.
다만 오르카는 남편이 재정을 꽉 잡고 있어 도박을 할 자금이 궁한 형편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르카는 주머니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힌 후 엘리제의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뒤에서 모여 에스테반 공작 부인을 벗어날 의논을 했단 말이지.”
파란 눈동자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기이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오르카 앞에서 표 내지 않았던 분노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제는 잘 관리된 손톱으로 의자를 긁었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외모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래서 감정을 숨기고 미소 지으며 누구보다 완벽한 예법을 익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권위 있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여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되었다. 황녀와 역겨운 친구 놀음까지 했다.
그마저 흔들리자 엘리제는 돈을 썼다. 먼 옛날 황제의 총애를 받아 온갖 사치를 부렸다는 시모나에 비견해도 될 만큼 엄청난 금액이었다.
금가루를 뿌리고, 다이아몬드를 흩날렸다.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연회였다.
이제는 정말 완벽하게 여인들의 정점에 서게 될 줄 알았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또 자신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화가 났다.
그 분노가 엘리제에게 비틀린 방법을 떠올리게 했다.
“마사.”
“네.”
창백한 얼굴로 다리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던 마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랜 시간 엘리제를 모신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지금 얼마나 화가 난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서늘한지 회초리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엘리제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예상과 다른 말이었다.
“당장 샬롯을 불러와.”
그 말에 마사의 눈이 커졌다. 마사는 재빠르게 대답하며 방을 나섰다.
“웬일이야. 이 밤에 날 보자고 하고?”
엘리제의 방에 도착한 샬롯은 망토를 풀며 물었다. 샬롯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 엘리제를 보는 순간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
샬롯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섬뜩한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무심했던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
그 눈빛은 마치 피투성이 식량을 눈앞에 둔 잔혹한 사자 같기도 하고, 산 제물을 바라보는 악마 같기도 했다. 서슬 퍼런 욕망이 서려 있는 눈동자였다.
샬롯은 오한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왜 또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엘리제가 우아하게 손짓을 했다.
“내게 가까이 와 봐요. 할 말이 있으니까.”
평소라면 얌전히 그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샬롯은 홀린 듯 그녀 가까이 다가갔다.
엘리제가 소파에 거의 누운 듯 앉아 있었기에, 샬롯은 바닥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두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늘 보았던 얼굴임에도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보자 느낌이 또 날랐다. 푸르른 달빛에 비친 엘리제의 얼굴은 끔찍할 만큼 아름다웠다.
엘리제가 샬롯의 얼굴을 어루만지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의 자금원…… 벨라도나지?”
“……!”
그 말에 샬롯의 눈이 커졌다.
샬롯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늘 뻔뻔할 만큼 당당하던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엘리제의 눈빛은 너무나 흔들림이 없어서 샬롯은 무슨 당치도 않는 말이냐고 부정하지도 못했다. 엘리제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그럼!”
샬롯은 마취에서 깨어난 나비처럼 격렬한 목소리로 외쳤다.
벨라도나. 달콤한 향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지만, 중독성이 강해 제국에서 엄격히 금지한 약물 중 하나였다.
샬롯이 벨라도나를 만들게 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그 당시 샬롯은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자의 친모이자 황제의 애인이란 자리에 걸맞게 꾸미기 위해선 돈이 많이 들었다.
최고급 드레스, 최고급 보석, 모든 것이 최고여야만 했다. 그러나 황실에서 나오는 돈은 너무 적었다.
친정은 가난했고, 황제는 무심했다. 도움 받을 곳 없는 샬롯은 나날이 빚만 쌓여 갔다.
그때 베가가 다가와 은밀하게 속삭였다. 베가는 어둠의 세계에 몸담고 있는 자로 샬롯의 친구였다.
—벨라도나를 만들어 보면 어때? 네 실력 정도면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샬롯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말대로 약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샬롯에게 벨라도나를 만드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벨라도나를 만드는 일은 불법이기에 걸리는 즉시 큰 벌을 받는다.
베가가 다시 속삭였다.
—걸릴 리가 있어? 누가 황제의 애인이자 제1황자의 친모를 의심한다고.
그 말대로였다. 감히 샬롯을 의심하여 그녀의 공간을 수색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샬롯은 벨라도나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완성된 제품은 훌륭했다. 베가는 만족해하며 그것을 은밀하게 판매했다. 고객은 대부분 환락에 빠진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금액을 척척 지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샬롯의 비어 있던 금고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쌓여 갔다.
그것이 샬롯이 가진 돈의 비밀이었다.
그러나 샬롯은 내내 불안함을 느껴야 했다. 황자의 친모라는 여인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단순히 그녀만 잘못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1황자인 존은 황자의 자리마저 위협받을지 모른다.
샬롯의 불안한 눈빛을 읽은 엘리제는 두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걱정할 건 없어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이 일을 아는 건 당신과 나. 오직 둘뿐이야.”
그럼에도 샬롯의 눈빛에 어린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엘리제는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파르르 떠는 샬롯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러니…… 그것, 내게도 줘.”
* * *
샐리는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도 연회에 같이 가신다고요?”
“그래.”
완벽하게 단장을 한 카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샐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어제도 같이 가셨잖아요.”
아니, 어제가 뭐야. 삼 일 전에도, 또 그전에도 카시스는 샐리를 따라 연회에 참석했다.
부인들만 모이는 티파티에는 함께 마차를 타고 바래다주었고, 끝날 시간에 맞추어 저택 앞에서 기다렸다.
남성과 함께 동석할 수 있는 밤의 연회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단장을 하고는 별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꼭 오늘처럼.
‘정말 왜 저러는 거야.’
지금 와서 그와 함께 연회에 갈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간의 행보들로 두 사람의 사이가 애틋한 것은 충분히 소문이 났고, 그가 없어도 샐리를 무시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꼭 가야 할 중요한 연회인 것처럼 굴며 따라오곤 했다.
“오늘 가는 곳이 어딘지나 아세요?”
샐리의 엄한 목소리에 카시스는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도 그는 기억력이 좋았다. 그녀가 지나치며 했던 말을 다 기억할 만큼.
“로즈마리 백작가잖아. 에스테반 공작이 참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지.”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연회 장소는 그곳이 맞아요. 하지만 오늘 연회는 평범한 연회가 아니라고요. 그런데도 정말 따라오실 거예요?”
“그래.”
남색 눈동자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샐리는 질린 얼굴로 그를 보며 생각했다.
‘한번 창피를 당해 보면 그만하려나.’
의자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여인들은 샐리의 등장에 수다를 멈추었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샐리의 옆에 카시스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그녀들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하는 순간 여인들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레이디의 품위를 따지지도 못할 만큼 그의 인사는 강렬했다.
“샐리,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왜 공작 저하께서 이곳까지 오신 건지…….”
오늘 파티의 주최자인 로즈마리 백작 부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 연회에 꼭 참석하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왔어요.”
그 말에 로즈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서요?”
“네.”
샐리는 빙긋이 웃으며 카시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카시스의 얼굴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으나 살짝 모인 미간을 보니 그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오늘의 연회가 평범한 파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밤의 연회는 보통 엇비슷한 인원의 남성과 여성이 어울린다. 그러나 이 연회장에는 화사하게 꾸민 여인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야 상관없어요. 여러분도 괜찮으시죠?”
로즈마리 부인의 말에 모인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석자들의 의사를 확인한 로즈마리 부인은 카시스를 향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즈마리의 드레스 토론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
“…….”
그 말에 조금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남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로즈마리가 최근 열기 시작한 연회는 아주 파격적이었다. 차를 즐기는 티파티도 아니고, 춤을 추는 밤의 연회와도 달랐다.
드레스 토론회라는 말처럼, 새로 산 드레스를 서로에게 보여 주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연회장에는 화사한 드레스들이 걸려 있었다. 드레스를 사랑하는 참가자들이 가져온 것이다.
로즈마리가 드레스를 차례대로 간단하게 소개했고, 나머지 여인들은 드레스를 감상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이번에 마리에띠에서 구입한 연회용 드레스예요. 마리에띠에서는 몇 년간 시폰 드레스를 중점적으로 만들었는데 최근에 디자인이 바뀌었어요.”
“그러게요. 늘 보았던 가녀린 소녀 같은 느낌이 아니라 좀 더 무게감 있는 기품이 느껴지는 디자인이네요.”
“요즘은 이런 디자인이 유행하는 것 같아요. 황후 폐하와 테오도라 황녀 저하의 영향일까요?”
그녀들은 사교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패션을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대화는 심도 있고 잠시도 끊이지 않았다.
열정이 한가득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 카시스는 가장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드레스는 다 똑같아 보이는 그가 듣기에는 너무나 따분한 이야기들이었다.
여인들만 가득한 자리이니 불편할 법도 했다. 그럼에도 카시스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샐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샐리는 즐거워 보였다. 새 드레스가 나올 때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바라보기도 했다.
어떤 때는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어느 표정 하나, 어느 동작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여인들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드레스 토론회는 한참 후에야 끝났다. 돌아갈 차비를 한 샐리에게 다가온 로즈마리가 짓궂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샐리 덕분에 오늘의 연회가 엉망이 된 것 알아요?”
“네?”
로즈마리는 저쪽에서 샐리를 기다리는 카시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드레스를 봐야 하는데 다들 에스테반 공작 저하를 힐끗힐끗 보았잖아요.”
그 말에 샐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로즈마리는 장난처럼 말하긴 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오늘의 토론회는 평소보다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것을 안 샐리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죄송해요, 로즈마리 부인. 이런 자리인 줄 알면 바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저도 저하께서 끝까지 함께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 말에 로즈마리가 웃었다.
“영특한 당신이 정말 그걸 몰랐어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푹 빠져 있는데?”
“…….”
대수롭지 않게 한 그 말이 샐리의 가슴에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샐리는 애써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저쪽에서 기다리던 카시스가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진한 남색 눈동자가 보였다. 보석처럼 맑은 눈동자에는 그녀가 온전히 비치고 있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샐리의 얼굴에 카시스가 물었다.
“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샐리는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 * *
그날 밤, 샐리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저녁 식사까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카시스를 방에서 내보냈다.
동굴 속에 숨어 버린 작은 동물처럼 샐리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눈을 꾹 감아 보아도 그의 눈빛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의 눈빛이 그렇게 변해 버린 것은 그녀가 데임이 된 날 밤부터였다.
—카시스.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마법이 풀리듯이 그가 웃었다. 아주 먼 과거로 돌아가 소년이 되어 버린 것처럼.
그가 웃음을 멈추고 자신을 보았을 때 그는 달라져 있었다. 마치 그를 감싸고 있던 무언가가 깨진 것 같았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새도 그런 식으로 쳐다보진 않을 거야!’
아침이 되면 찾아와 인사를 하고, 그 많던 일을 어떻게 한 건지 샐리가 연회를 갈 때마다 함께 갈 것이라며 따라 나섰다.
저택으로 돌아온 후에는 샐리의 방에 들어와서는 내내 그녀를 바라보았다. 며칠째 손에 들고 있는 책이 한 장도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걸 그는 알까.
그래서 샐리는 그에게 더더욱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면 얼마나 기쁜 얼굴을 하는지 샐리가 다 부끄러울 정도였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정말.’
샐리는 정말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나 여과 없이 들어오는 그 눈빛을, 그 눈빛의 의미를.
‘……당신, 내게 빠져 있어?’
차마 사랑이라는 말은 쓸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니까.
그저 조금 특별한 애정일 뿐이리라. 잠깐 지나가는 변덕스러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 보아도 그의 감정은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전생에는 그토록 갈구했던 감정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샐리는 기도하듯 모은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모른 척하자.’
그의 감정 같은 건 눈치채지 못한 척, 보이지 않는 척 지나가 버리자.
데임의 작위를 받음으로써 샐리의 위치는 이전보다 훨씬 견고해졌다. 그와 달리 엘리제의 위치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그의 감정에 휘둘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 * *
어느덧 완연한 여름이 찾아왔다. 찬란한 햇살은 뜨겁게 세상을 비추었고, 살랑대며 불어오는 바람조차 뜨거웠다.
샐리는 별채의 작은 정원에 쳐진 그늘막 아래 앉아 있었다. 체온이 높은 그녀는 더위에 약했다. 이런 더운 날은 게으른 고양이가 된 것처럼 나른해지곤 했다.
얇은 모슬린 원단으로 만든 여름 드레스를 입고 부채를 살랑거렸지만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정말 덥구나.”
“그러게요.”
옆에 앉아 있는 데이지의 얼굴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날이 더워 오후에 열리는 티파티는 많이 줄었다. 그래서 요즘 샐리의 아침은 조금 여유로웠다.
그때 바스락, 하고 풀들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록이 우거진 풀들 사이로 나타난 것은 캬였다.
강한 햇살에 반사되어 캬의 은빛 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캬, 산책은 다 했니?”
평소라면 샐리의 품으로 안겨들었을 캬가 웬일로 얌전했다. 캬를 빤히 바라본 샐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캬가 웬 손수건을 입에 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샐리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뭘 물고 온 거야?”
그러나 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샐리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캬는 코를 킁킁거리며 기분 좋은 듯 손수건에 몸을 비볐다.
향기를 좋아하는 캬는 향수가 뿌려진 샐리의 손수건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주인 모를 손수건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캬의 앞에 다가갔다. 캬가 열심히 킁킁대는 손수건에는 분홍색 가루가 묻어 있었다.
샐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캬에게 말했다.
“캬, 주인이 있는 손수건을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면 못 써.”
그러나 캬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손수건에 미친 듯이 코를 비비적거렸다.
“캬.”
이번엔 좀 더 엄하게 말했건만 마찬가지였다. 안 되겠다 싶어 샐리가 손을 내민 순간이었다.
“캬릉!”
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샐리의 손을 할퀴었다. 샐리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캬를 바라보았다.
캬가 크르릉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캬의 이런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라 샐리는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데이지도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조금 할퀸 것뿐이야.”
다행히도 에반이 주기적으로 캬의 발톱을 깎아 주었기에 상처는 크지 않았다. 손등에 빨간 자국이 남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없어질 것 같았다.
“상처가 덧나기 전에 약을 바르는 게 좋겠어요.”
데이지가 걱정 어린 얼굴로 약상자를 손에 들고 왔다. 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 앞에 마주 앉은 데이지가 새하얀 손등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 주며 말했다.
“캬에게 저런 모습이 있다니 정말 놀랐어요.”
“나도 그래.”
아무리 순해도 역시 야생동물이라는 걸까. 그러나 맛있는 고기나 음식에도 관심이 없던 캬가 손수건 한 장에 저렇게 집착을 하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저 손수건이 뭐라고 저러는 거야.’
속상한 마음에 캬를 바라보았지만 캬는 샐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여전히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래서 저 녀석이 상처를 낸 것이라고?”
“네.”
샐리는 카시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날카로운 발톱에 긁힌 것이니 상처가 남고 말았다. 더운 여름이라 장갑으로 감추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샐리의 새하얀 손등에 난 새빨간 상처는 너무 잘 보였다. 카시스의 시선이 서늘해질 정도로.
“…….”
카시스는 위협적인 눈빛으로 캬를 바라보았다. 그 스산한 눈빛에 캬가 움찔거리며 샐리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샐리는 작은 여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애가 겁을 먹잖아요.”
“너를 다치게 했잖아!”
“그때만 잠시 그랬던 거예요. 조금 시간이 지나자 미안하다고 와서 제 손을 핥아 주었는걸요.”
샐리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카시스는 기가 찼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야박한 여인이건만 작은 여우에게는 너무나 자애롭지 않은가.
그러나 차마 그런 치졸한 말을 할 수가 없어 카시스는 그녀 몰래 캬를 한 번 더 노려보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카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가까이에 앉는 순간 샐리의 어깨가 움찔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샐리의 손등에 난 상처에 쏠렸기 때문이다.
“보여 줘, 손.”
“…….”
요즘 부쩍 말랑말랑하다 느낄 만큼 부드러웠던 그가 이런 식으로 날카로운 기색을 드러낸 것은 오랜만이라 샐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제 손 위에 올린 카시스가 고개를 숙여 하얀 손등에 난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샐리는 슬쩍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서린 표정은 한없이 심각하고 심란해 보였다.
누군가 보았다면 샐리가 목숨을 위협당할 만한 상처가 생겼다고 착각할 만큼.
그래서 샐리는 무척 곤욕스러웠다. 그의 이런 감정들은 모두 무시할 것이라고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 심장 한편이 쿵쿵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 되겠어.’
결국 샐리는 그의 손에서 제 손을 빼 버리고 말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살펴보지도 않았는데 왜 그러냐는 눈빛이었다.
샐리는 톡 쏘듯 말했다.
“가까이 붙어 있으니 더워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엉덩이를 저 옆으로 슬며시 빼기까지 했다. 카시스는 한 뼘은 멀어진 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샐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방금 전보다 가까워진 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에 남아 있는 샴푸 향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향기가 당혹스러워 샐리가 아예 일어서려는 순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카시스의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
커다래진 샐리의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내리깐 눈으로 카시스가 말했다.
“내 체온은 무척 차갑지. 그러니 시원할 텐데.”
“…….”
“그렇지 않아?”
그 말에 샐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마치 뜨거운 여름의 햇빛이 그를 피해 지나쳐 가는 것처럼 그의 손은 서늘했다.
손만이 아니었다. 긴 목, 귀 끝, 옷 안에 숨겨진 탄탄한 몸까지. 그의 온몸은 차가웠다.
그러나 매 순간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함께 밤을 보낼 때만큼은 그의 서늘한 몸도 뜨거운 열기를 띠곤 했다. 그 점이 샐리를 미치도록 흥분하게 만들곤 했다.
“샐리?”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카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샐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끔찍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런 일이 생각나는 거야.’
마음 깊이 묻어 두었던, 이제는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자꾸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끔찍한 기억만 떠오르는 게 아니라 잠시나마 그녀를 행복하게 했던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더 이상 날 휘두를 수 없어.’
샐리는 입술을 깨물고 카시스를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에 카시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샐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하, 제게 특별한 감정이 있으신가요?”
“……!”
그 말에 카시스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샐리는 그 눈빛에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있으신 거라면 더 이상 표 내지 마세요. 절대 말하지도 마세요. 우리 사이에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요.”
너무나 매정한 말이었다. 카시스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샐리를 바라보았다. 샐리가 그에게서 손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
낮은 목소리에 샐리는 숨이 멈추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주 힘겹게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 같기도 했고,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처럼 구슬프기도 했다.
샐리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그 순간 전 떠날 거예요.”
그 말에 카시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샐리는 그 눈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조금 후 등 뒤로 애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하지 않을게.”
“…….”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버림받은 아이 같은 애절한 목소리였다. 잘못했다고, 그러니 날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바라보면 그 시선을 무시하면 된다. 손을 잡으면 내치면 된다. 그런데 저런 목소리는 어떻게 피해야 하는 것일까.
샐리는 정말이지 울고 싶어졌다.
* * *
찬란한 햇빛 아래 녹음이 우거진 바깥과 달리 방은 어두웠다. 창문의 커튼을 모두 치고 방문까지 닫았다.
귀부인들의 곁에서 시중을 들어 주던 하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에는 차 세트와 디저트가 보기 좋게 세팅되어 있었지만, 누구도 마시지 않는 그것들은 마치 잘 만든 장식품처럼 느껴졌다.
적막하고 조용한 그곳에는 엘리제와 아름다운 귀부인들이 있었다.
여인들의 모습은 점잖게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던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누군가는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옆 사람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맨다리가 훤히 드러난 여인도 있었다.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듯 나른하게 풀어진 여인들의 모습은 묘한 분위기를 흘렸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엘리제만이 아름답고 우아한 공작 부인의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엘리제는 화려한 의자에 앉아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인들의 손에는 작은 접시가 쥐여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분홍색 가루가 담겨 있었다.
여인들은 가루에 코를 가져다 대고 꽃향기를 맡듯 음미했다. 이내 향기에 취한 여인들의 얼굴이 황홀해졌다. 마치 순수했던 소녀 시절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때였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방이 여느 성만큼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들어오렴.”
엘리제의 목소리에 문이 열리고 마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사는 풀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들을 지나쳐 엘리제에게 다가갔다.
마사의 귓속말을 들은 엘리제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 모습에 여인들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부인?”
엘리제가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오르카 후작 부인이 찾아왔다는군요. 티파티에 들여보내 달라고요.”
그 말에 여인들이 눈썹을 찡그렸다.
“규칙을 어긴 주제에 뻔뻔하게 다시 찾아오다니 놀랍네요.”
이 은밀한 티파티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첫째. 이 방의 비밀, 즉 벨라도나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둘째. 벨라도나를 절대 외부로 가져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 규칙을 깨고 오르카가 몰래 벨라도나를 가져간 사실이 발각되었다. 오르카는 그 즉시 멤버에서 제외되었다.
오르카는 초대장을 받지 못한 주제에 결국 이곳에까지 찾아와 초대를 구걸했다. 이 무슨 추태인지.
마르시아는 경멸 어린 얼굴을 했다.
“하여간 추잡한 년이야.”
귀부인이 입에 담기엔 거친 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쿡쿡 웃는 여인들도 있었다.
달콤한 향을 맡을 때면 기분이 붕 떠서 저런 말 따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허리를 꽉 조였던 코르셋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해방감이 여인들을 행복하게 했다.
“참석자들이 불쾌하시니 오늘 이 자리에는 참석하실 수 없다고 하렴.”
“알겠습니다.”
엘리제의 말에 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튼이 열린 방은 방금 전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화사한 티파티장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인들은 우아한 자태로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엘리제가 테이블 끝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방긋이 웃었다.
“오늘의 티파티는 어떠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녀의 말에 여인들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훌륭했어요, 부인.”
그녀들의 얼굴은 정말 흡족해 보였다.
“다음번 티파티는 언제 여실 계획인가요?”
누군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만이 아니라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여인도 간절한 눈빛으로 엘리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개처럼.
기분이 좋아진 엘리제는 천사처럼 맑은 얼굴로 웃었다.
“되도록 빨리 자리를 만들도록 하죠.”
애매한 그 말에 여인들은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부인께서 바쁘신 건 알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 주세요.”
엘리제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도 꼭 초대장을 보내 주셔야 해요?”
여인들은 혹시나 엘리제의 선택을 받지 못할까 봐 신신당부하며 사라졌다. 남몰래 값비싼 선물을 건네고 간 여인도 있었다.
엘리제는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서 쿡 하고 웃었다.
“멍청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의외의 재주를 가지고 있구나, 샬롯.”
엘리제가 슬쩍 벨라도나를 내밀었을 때 여인들은 기겁했다. 어떻게 이런 것을 하냐며 진저리를 쳤다. 공작 부인께서 어떻게 된 것 아니냐며 정색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엘리제는 그녀들을 설득했다.
—이건 귀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요. 제가 맡아 보니 부작용도 전혀 없고 그저 긴장만 완화시켜 줄 뿐이에요.
제아무리 엘리제에게서 멀어지려 했다지만 그녀를 동경하던 여인들이었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여인의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동했다.
게다가 조금 냄새를 맡는 것뿐이라면 큰일이 날까도 싶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벨라도나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늘 엄한 규칙에 얽매여 살았던 그녀들에게 그것은 꽤 매혹적인 일탈처럼 보였다.
—이번 한 번뿐이에요.
여인들은 그렇게 말하며 벨라도나를 코끝에 가져다 대었다.
샬롯이 특별히 만든 벨라도나의 효과는 엄청났다. 달콤한 향에 취한 여인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황홀감을 맛보았다. 그 후부터는 모두 엘리제의 뜻대로 되었다.
여인들은 잘 훈련된 개처럼 엘리제의 말을 따랐다. 태어나 처음 느낀 강렬한 자극에 그녀들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효과가 너무 좋아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벌을 좀 주면 정신을 차리겠지.’
엘리제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렴.”
“네.”
마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이내 엘리제의 앞에 오르카가 나타났다. 한낮에 도착해 해가 진 후에야 방에 들어왔으니 반나절 이상을 응접실에서 기다린 셈이었다.
오르카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분노한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르카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오르카는 파르르 손을 떨며 말했다.
“부인, 정말 잘못했어요. 그때는 제가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 봐요. 집에 돌아가면 자꾸 생각이 나서 그만 저도 모르게…….”
안쓰러울 정도로 애절한 목소리에도 엘리제는 무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도둑질하는 건 잘못된 일이죠.”
도둑질이라는 말에 오르카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나 변명할 말이 없었다.
엘리제 몰래 약을 빼돌렸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뭘 어떻게 하면 부인의 화가 풀리시겠어요?”
오르카가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처절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도 저런 눈빛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엘리제는 스산하게 웃었다.
“글쎄요. 뭐가 좋을까…….”
엘리제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의자를 톡톡 치며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이내 파란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빌면 화가 좀 풀릴지도.”
“……!”
오르카는 제가 무슨 말을 들었나 싶어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턱을 들어 올리고 시선을 내리깐 엘리제의 얼굴은 그녀가 아는 엘리제와는 전혀 달랐다.
서늘하고 무서웠다.
오만하고 악랄했다.
먼 옛날 온 대륙을 핏빛으로 물들였다는 미친 황제도 저런 눈빛을 하진 않을 것이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떤 오르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난 후작 부인이야. 그런 짓은 절대 못해.’
그러나 오르카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비처럼 유려하게 들어올린 엘리제의 손 위에 분홍색 가루가 든 접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오르카의 이성이 마비되었다.
그녀는 홀린 것처럼 엘리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 *
샐리는 오랜만에 테오도라의 서재로 찾아갔다. 테오도라는 샐리를 향해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데임 샐리.”
“지금 절 놀리시는 건가요?”
“설마.”
테오도라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주 앉은 샐리를 보고 그녀가 말했다.
“데임이 되니 어때? 세상이 달라지던가?”
“글쎄요.”
샐리는 찻잔을 들이켜며 말했다. 실상 데임이 되었다고 해서 샐리의 상황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데임은 명예로운 작위였지만 그뿐이었다. 돈이나 권력이 함께 따라오는 자리가 아니니 그것을 노리고 파리처럼 꼬이는 이들도 없었다.
굳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저 이제 황성의 정기 연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어요.”
평민인 샐리는 그동안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도 어엿한 귀족이었기에 초대장만 받으면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가 보게 되네요. 황후 폐하께서 제게도 초대장을 보내 주시겠죠?”
“물론이지.”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는 샐리를 보며 테오도라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데임이라는 작위가 네게는 고작 그 정도의 의미겠지만, 널 고깝게 보던 여인들에게는 아닐 거야. 귀족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던 이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테지.”
그녀들은 더 이상 샐리가 평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만한 시선을 주진 못할 것이다. 테오도라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테오도라는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두며 말했다.
“자,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 그래, 엘리제의 자금원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나?”
테오도라의 말에 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는 엘리제의 자금원을 추적했다. 돈을 써 사람을 푸니 의외로 쉽게 그 정체가 드러났다.
“역시 샬롯 백작 부인이었어요.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한 접선이 몇 번이나 있었더군요.”
“…….”
그 말에도 테오도라의 표정은 태연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이상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왜 샬롯 부인이 마님을 돕는 건지, 또 샬롯 부인은 어디서 그런 돈이 난 건지 하는 것들이요.”
테오도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계약이야 알 길이 없지만 샬롯의 돈의 출처는 짚이는 곳이 있군.”
동그랗게 눈을 뜬 샐리를 바라보며 테오도라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많은 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지. 그녀가 아주 솜씨 좋은 제약사라는 사실이야.”
테오도라가 그것을 안 것은 몇 년 전 샬롯의 독에 당할 뻔했을 때였다.
테오도라의 찻잔에 섞여 있던 독은 아무 색도, 향도 없었다. 굳은 얼굴로 찻잔을 들고 들어온 시녀를 추궁하지 않았더라면 필시 그 안에 독이 들어 있는 것을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의사에게 찾아갔을 때는 이미 차 속의 독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의사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독도 있다고 했다.
‘결국 증거가 없어 사건은 커지지 않고 마무리되었지.’
그때 이후 테오도라는 다른 것은 몰라도 약에 대해서만큼은 샬롯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샬롯이 약에 관해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샬롯이 그 사실을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오도라는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보석 하나를 사도 황성이 떠나가라 자랑하는 여인이 제 실력을 숨긴다는 것은 뻔하지. 떳떳한 곳에 그 실력을 쓰고 있지 않으니까.”
그리고 테오도라는 샬롯의 사치가 가능한 이유도 그 실력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샬롯 부인이 뭔가 안 좋은 것을 제조해 돈을 마련한다는 건가요?”
테오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독약 같은 것이요?”
테오도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독약의 판매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극단적으로 말해 아무 생각 없이 판 독약이 황제를 독살하게 되면 독을 제조한 자도 목숨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
아무리 겁이 없는 샬롯이라도 그런 리스크를 무릅쓰지 않을 것이다.
독약보다는 리스크가 없으며, 수요가 많고, 돈이 되는 것.
“독약보다는 벨라도나 같은 것이 더 가능성이 크지.”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샐리의 눈이 흔들렸다.
“아직 확신은 아니야. 단순한 의심이지.”
“……만약 저하의 말이 맞는다면 샬롯 백작 부인은 철저하게 무너질 거예요.”
단순히 무너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테오도라의 온화한 눈빛이 어느새 차가워져 있었다.
“무너지는 것 정도로는 부족하지. 벨라도나는 나라의 해악이야.”
그건 단순히 제가 낳은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패악을 부리거나, 귀족 여인들을 협박하는 수준을 벗어난 일이었다.
제국의 법률은 허가되지 않은 약물을 제조하는 것을 위법으로 분류했으나, 실제로 그 법에 경각심을 가진 이들은 많지 않았다.
법을 제정하고 만드는 귀족들부터가 따분함을 이유로 불법 약물을 즐기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더 이상 그 일을 안일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의 권위가 돌아오고, 아바마마께서도 날 인정하고 있으니 이 기세를 모아 샬롯을 조사해 볼 생각이야.”
“…….”
“현재 샬롯이 가장 활발히 교류하는 이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인 것 같군. 그러니 그녀에게서 그에 관련된 무언가가 나올지도 몰라. 유심히 그녀를 살펴보다가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 줘.”
황성에서 돌아오며 샐리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테오도라는 영민하고 시야가 넓었다. 그래서 늘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까지 앞서 보곤 했다.
‘벨라도나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확신할 정도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의심스러운 것이라.’
샐리는 찬찬히 엘리제의 최근 행보를 생각해 보았다.
샐리가 데임의 작위를 받은 이후 엘리제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연회를 열어 사람들을 끌어 모으리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티파티에는 열 명의 손님만 초대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야외에서 즐기던 연회가 실내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이면 모를까 지금 같은 더운 여름에는 조금 이상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에반을 불렀다.
“요즘 마님의 티파티에서 뭔가 이상한 점이 있나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아요.”
그 말에 에반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마님께서 여는 티파티 중간에 시중을 드는 하녀들을 모두 물리는 일이 자주 있다더군요.”
그건 딱히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아주 은밀한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에반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듯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오르카 후작 부인의 일도 있군요.”
“뭐지요?”
“얼마 전 손수건을 하나 떨어뜨리셨다고 찾아오셨어요. 저택 곳곳을 살펴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하니 불같이 화를 내시더군요.”
에반은 의아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귀중한 물건일 수 있으니 부인의 반응은 이해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마님께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시더군요. 찾게 되더라도 마님께는 이야기하지 말고 직접 전해 달라고요.”
그 말에 샐리의 눈이 커졌다.
“……그 손수건의 생김새는 어떻다고 하던가요?”
“평범한 하얀색 면 손수건이라고 하셨습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새 그림이 수놓아져 있고 손수건의 끝자락에 ‘for L·O’라는 이니셜이 수놓아져 있다고 하시더군요.”
말을 마친 에반은 샐리의 눈빛을 보고는 멈칫했다. 금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먹잇감을 찾아낸 고양이처럼.
별채의 방에 들어선 샐리는 반갑다고 인사해 오는 캬를 지나쳐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장 안에는 깨끗이 빨아 접어놓은 흰색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며칠 전 캬가 물어왔던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에는 새 그림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고 끝자락에도 ‘for L·O’라는 이니셜이 선명하게 박음질되어 있었다.
오르카 후작 부인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그 손수건이 분명했다.
‘평범한 손수건인데 왜 그렇게 절박하게 찾은 거지? 게다가 엘리제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너무나 이상했다. 차라리 돈이 든 주머니였다든가, 누군가 봐서는 안 될 편지가 들어간 봉투였다면 이해가 갔을 것이다.
“캬아.”
고개를 내려 보니 캬가 작게 으르릉거리며 샐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자신을 아는 척하지 않느냐는 눈빛이었다.
샐리는 캬를 안아 들었다. 샐리의 품에 안긴 캬가 코를 찡긋거렸다. 캬는 손수건에 코를 가져다 대더니 킁킁거렸다.
그러나 그날처럼 이성을 잃고 달려들진 않았다.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금세 흥미를 잃었다.
마치 캬를 그토록 흥분하게 했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처럼.
손수건 자체에 반응했던 거라면 이토록 얌전할 리가 없다. 캬는 애초에 식탐이 많지 않았다. 캬가 흥분하는 것은 예민한 후각을 자극할 때뿐이다.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졌지만, 캬가 막 물어왔을 때 손수건에는 분홍색 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역시 그 가루에 반응했던 거야.’
그 순간 마치 퍼즐처럼 모든 것들이 연결되었다.
벨라도나를 제조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샬롯은 엘리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엘리제가 귀부인들과 은밀한 티파티를 가지기 시작했다. 오르카 부인은 엘리제가 연 티파티에서 돌아가는 길에 손수건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 손수건을 발견한 캬는 이성을 잃고 흥분했다.
샐리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돼. 엘리제가 귀부인들과 함께 벨라도나를 했다고?”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짓을 할 만큼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 사람을 모을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 순간 테오도라의 말이 생각났다.
—데임이라는 작위는 널 고깝게 보던 여인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테지.
“……고작 그런 것에 흔들렸단 말이야?”
샐리가 제 남편의 애첩이 되었다고 했을 때도, 카모라의 뮤즈가 되었을 때도 엘리제는 침착했다. 그런 그녀가 샐리가 귀족이 되었다고 흔들리다니.
샐리는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 * *
엘리제가 샬롯이 만든 벨라도나를 귀부인들과 함께 즐기고 있다.
이러한 의심이 깔리자 모든 것이 수상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엘리제의 티파티에 찾아가 확인을 해 보고 싶었지만 워낙에 보안이 철저해 힘들었다. 어떻게 들어간다 해도 엘리제가 허술하게 약을 들킬 것 같지도 않았다.
샐리의 시선에 흰색 손수건이 닿았다.
‘이 손수건을 어떻게든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
아쉽게도 손수건은 세탁을 하여 모든 냄새가 지워졌다. 후각이 예민한 캬가 반응하지 않을 정도이니 손수건 자체가 어떤 증거가 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고 해서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
손수건의 주인 오르카만큼은, 이 손수건에 남은 죄의 흔적을 여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토록 필사적으로 손수건을 찾았던 것일 테고.
‘오르카 부인에게 손수건을 가져가서 자백을 받아 볼까?’
샐리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그렇게 쉽게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할 리 없었다.
게다가 이 모든 생각은 증거 없는 추론에 불과했다. 만에 하나 아무 잘못 없는 이를 의심한 것이라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엘리제와 그녀를 따르는 귀부인들을 해하기 위해 사악한 추문을 만들었다는 반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모든 것은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해.’
샐리는 손수건의 끝자락에 수놓아진 이니셜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귀족 여인들 사이에서는 친한 친구에게 손수건을 선물해 주는 것이 유행이었다.
아마도 ‘for L·O’는 라이라 오르카, 그녀의 이름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손수건일 것이다.
‘손수건에 수놓아진 새는 검은 백조. 흔한 소재는 아니야. 적어도 오르카 부인은 단번에 이 손수건을 알아보겠지.’
생각을 정리한 샐리는 손수건을 품에 안고 저택을 나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멜리사 부인의 저택이었다.
“어서 와요, 샐리.”
친절한 얼굴로 인사하는 멜리사를 향해 샐리가 말했다.
“오늘은 멜리사 부인이 아니라 시크릿 로즈의 정보원께 정보를 제보하기 위해 찾아왔어요.”
그 말에 멜리사가 눈을 크게 떴다. 멜리사는 자세를 고쳐 잡고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정보는 완벽하게 확인된 정보가 아니에요. 일방적인 저의 추론이에요. 하지만 저의 추론이 맞는다면 분명 시크릿 로즈는 엄청난 특종을 건지게 될 거예요.”
특종이란 말에 멜리사의 눈빛이 번쩍였다. 샐리는 가방 안에서 새하얀 손수건을 내밀었다.
* * *
붉은 석양이 질 무렵 샐리는 저택에 도착했다. 샐리는 마차에서 내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예민하게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그러나 날카로운 눈빛이 무색하게 마차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없네.’
그녀가 찾은 이는 바로 카시스였다. 최근의 그는 별채 앞에서 그녀를 맞는 일이 잦았다.
—마침 별채에 가려던 길이었는데 우연이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데이지가 샐리에게 비밀을 말해 주듯 속삭여 주었기 때문이다.
—주인님께서 저택에 돌아오시자마자 별채 앞에 서 계셨어요. 날씨가 더우니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시라고 해도 됐다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에반 님께서 무척 곤란해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샐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일전의 그 일 이후 그녀는 일부러 그에게 야박하게 굴었다. 톡 쏘듯 쌀쌀맞게 대하고 그와의 대화도 짧게 끝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샐리의 기분을 거스를까 조심해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곁을 맴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침, 점심, 저녁.
에스테반 공작에게 주어진 그 많은 업무들을 다 어디로 내팽개쳤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를 마주칠 때마다 샐리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늘 차분했던 감정이, 잘 정리되어 있던 이성이 잔뜩 꼬여 버리는 기분.
그래서 그녀는 그와 마주치는 순간이 싫었다.
‘오늘은 없어서 다행이다.’
그녀는 그가 보이지 않아 안도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문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버린 것은.
늘 그가 별채를 향해 걸어오는 길. 샐리는 그 길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저택에 도착한 카시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늦었군.’
실상 매일 해가 진 뒤 들어왔던 때와 비교하면 오늘의 귀가는 무척 일렀다. 그럼에도 그는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일 초도 아까워.’
그가 샐리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아침, 점심, 저녁, 그 사이사이에 잠시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에겐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카시스는 최대한 모든 일을 저택 내에서 처리하고 있었다. 오늘처럼 여의치 않게 외부에서 일을 처리해야 할 때는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곤 했다.
별채로 향할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오아시스를 향해 가는 나그네처럼 발걸음이 다급해져 갔다.
그러나 복도에서 한 그림자와 마주친 순간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의 온몸을 감싸던 온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얼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엘리제였다.
허울뿐인 관계라도 두 사람은 부부였다. 한 저택에 살고 있는 사이였으니 오늘처럼 마주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늘 그래 왔듯이 카시스의 얼굴에 경멸이 어렸다. 그가 그녀를 지나치려는 순간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내가 그렇게 싫어요?”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결코 엘리제와 말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을 무시하고 발을 내딛는 그를 향해 엘리제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런 천한 여자를 애첩으로 두는 쇼를 할 만큼?”
“……!”
결국 카시스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엘리제와 눈을 마주했다. 엘리제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모를 줄 알았어요? 당신이 아무리 별채의 경비에 신경을 쓴다 해도 모든 하녀들이 에스테반 공작에게 완벽하게 충성하는 건 아니죠. 당신은 그 계집과 제대로 된 하룻밤도 보낸 적이 없어요. 그렇죠?”
“……그래서?”
서늘한 목소리에 엘리제는 쿡 하고 웃었다.
“뭐, 크게 놀랍진 않았어요. 처음부터 당신이 날 쫓아내기 위해 그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을 알았으니까.”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시스를 바라보며 엘리제가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좀 더 제대로 된 걸 선택하지 그랬어요. 그 계집을 옆에 둔 이후로 에스테반 공작에 대한 평판이 얼마나 땅에 떨어졌는지 알아요?”
카시스도 알고 있었다.
감히 그의 앞에서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뒤에서는 하녀 출신의 여자에게 빠진 에스테반 공작을 조롱했다. 그에게 크게 실망하여 등을 돌린 이들도 많았다.
어느 순간부터 에스테반 공작을 표현하는 말에는 ‘고귀한’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지 않았다.
“상관없어.”
그 말에 엘리제는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저런. ‘그 사람’이 평판이 바닥이 된 당신을 보면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충격을 받아 또 쓰러져 버리면 어쩌려고요.”
그 말에 고요하기 그지없던 카시스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그가 한 발짝 발을 옮겨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가녀린 엘리제의 몸 위로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당장 그 입 닥쳐. 그렇지 않으면 그 가는 목을 당장 졸라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를 올려다보며 엘리제가 방긋이 웃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세요.”
“……!”
그는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엘리제는 정말이지 이 순간이 즐거워 참을 수 없었다.
‘제국에 무서울 것 없는 에스테반 공작이 나에게 꼼짝을 못하는 꼴이라니.’
엘리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그가 만든 그늘에서 나와 석양을 받는 그녀의 얼굴은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
카시스의 눈빛에 아직도 선연히 어려 있는 분노를 바라보며 엘리제는 조소했다.
‘나약한 사람.’
모든 이가 두려워한다는 에스테반 공작이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쉬운 상대였다. 무섭기는커녕 그녀가 아는 그의 진짜 모습은 한없이 그를 우습게 만들었다.
엘리제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카시스를 지나쳤다.
* * *
오르카는 지친 얼굴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젠장, 젠장, 젠장.’
그녀는 속으로 귀부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무리 욕을 해도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나를 다시 그 모임에 넣어 줄 건데!’
오늘도 엘리제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건만 그녀는 다음 모임의 초대장을 주지 않았다. 나른한 얼굴로 생각해 본다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기다림은 이제 한계였다. 오르카는 퀭해진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벨라도나를 맡은 날은 편히 잠들 수 있단 말이야.’
오르카는 결혼 이후 줄곧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남편은 무뚝뚝했고 사랑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후작 부인으로서 어울리게 된 사교계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지방의 그저 그런 백작가의 딸이었던 오르카에게는 버거운 상대들뿐이었다.
여인들을 대할 때마다 오르카는 겁이 난 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고개를 뻣뻣이 들어야만 했다.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언제부턴가 오르카는 갖은 유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도박을 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들은 그녀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벨라도나가 최고야.’
그녀는 멍한 얼굴로 달콤한 향을 떠올렸다.
어느새 엘리제에 대한 원망은 사라져 있었다.
‘아아. 어서 빨리 그 향을 맡고 싶어.’
오르카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으면 좋으련만. 그럼 당장 그 달콤한 향에 취해 버릴 텐데.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오르카는 큰 죄를 짓다 들킨 것처럼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니.”
“마님, 캐서린 시나몬 백작 부인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렴.”
이내 문이 열리고 캐서린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오르카의 오랜 친구였으며 외로움에 지친 그녀를 위로해 주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캐시,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라이! 너 도대체 요즘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캐서린의 말에 오르카는 황당한 얼굴을 했다. 캐서린은 오르카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종이를 들여다본 오르카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서체와 디자인. 사교계의 여인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시크릿 로즈였다.
눈동자를 굴리며 신문을 읽어 내려가는 오르카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해당 글은 ‘귀족들의 위험한 타락’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하는 기사였다.
신문은 귀족들 사이에 암암리에 돌고 있는 벨라도나에 관한 이야기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어떤 루트로 그것을 입수하고, 어떻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즐기는지.
[벨라도나의 음용이 의심되는 현장에 남은 한 귀부인의 손수건.
남아 있는 향은 향수일까, 벨라도나의 향일까.]
글의 끝자락에는 의미심장한 문구와 함께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오르카는 비명을 내질렀다.
실물이 눈앞에 놓인 것처럼 섬세하게 그려진 삽화는 한 장의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에는 익숙한 새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끝자락에는 오르카의 이니셜인 ‘for L·O’까지 선명히 적혀 있었다.
“이거 내가 너에게 만들어 준 손수건이잖아. 왜 이게 이런 곳에 나오는 건데!”
캐서린의 외침에 오르카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오르카가 묻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얼마 전 에스테반 저택에서 잃어버린 손수건이 분명했다.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 오르카는 거의 패닉 상태가 되었다.
신문을 잡고 바들바들 떠는 친구를 보며 캐서린은 작은 신음을 내쉬었다.
‘제멋대로 쓴 기사이거나 누명인 줄 알았더니!’
캐서린은 오르카가 남몰래 도박과 술을 즐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손을 댔을 줄이야.’
다른 것들과 달리 벨라도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범죄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 오르카를 더 탓해 보았자 늦은 일이었다.
캐서린은 오르카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쳤다.
“라이.”
오르카가 눈물이 어린 눈으로 말했다.
“어, 어떡하지, 캐시? 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
아무리 귀족들이 암암리에 문란하게 논다고 해도 죄는 죄. 들키는 순간 죄인이 되어 벌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겁이 많고 예민한 오르카에게 그것은 지독히 무서운 일이었다.
바들바들 떠는 친구를 다독이며 캐서린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기사를 잘 읽어 봐. 어느 곳에도 네 이름은 나오지 않았어. 무엇보다 이 손수건이 네 것인 걸 나 말고 누가 알아채겠어?”
아무리 귀부인들이 섬세하다지만 남의 손수건 모양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캐서린도 자신이 만들어 준 손수건이 아니었다면 오르카의 손수건인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괜한 걱정 마. 넌 이 손수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
그러나 캐서린의 말에도 오르카의 얼굴에 가득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시크릿 로즈의 여파는 컸다. 사교계 여인들 사이에 벨라도나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여인들은 심각한 얼굴로 귀족 사회에 경종을 올리는 기사였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오르카는 며칠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캐서린은 누구도 그 손수건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친구에게 받은 손수건이라고 자랑을 했단 말이야.’
눈썰미가 좋은 이들이라면 그림만 보고도 오르카의 손수건임을 기억해 낼지 모른다.
귀족 여인들 사이에 시크릿 로즈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신문에 대한 신뢰도도 꽤 높았다.
‘분명 내가 벨라도나를 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오르카가 떳떳했다면 가당치 않은 누명을 썼다고 여인들에게 먼저 불만을 토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은 죄가 있었다. 그것이 오르카를 끝없는 늪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온 하녀가 말했다.
“마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오르카의 얼굴은 시체처럼 퀭했다. 그녀의 침대 맡에는 몇 번이나 구겼다가 펴기를 반복해 너덜너덜해진 시크릿 로즈가 놓여 있었다.
“누구?”
“데임 샐리십니다.”
그 이름에 오르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여자가 도대체 왜 온 거지?!’
오르카와 샐리는 아무런 일면식도 없었다. 아니, 오르카는 엘리제의 파벌에 속해 있으니 적으로 분류해도 될 만한 사이였다. 결코 좋은 이유로 찾아오지 않았으리라.
“몸이 좋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해.”
오르카의 요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이런 상태로 샐리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전하러 나갔던 하녀가 다시 돌아왔다.
“샐리 님께서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며 꼭 마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싫다고 했잖아!”
“새가 수놓아진 손수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
그 말에 오르카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영문을 모르는 하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내 오르카의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내려간다고 해.”
요 며칠 기력이 쇠한 오르카는 제대로 단장을 할 수 없었다. 실내용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한 것이 다였다.
오르카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 응접실로 내려갔다. 응접실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화려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샐리는 오르카의 초췌한 모습을 빤히 눈에 담는가 싶더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르카 후작 부인께 인사드립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
의외로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에 놀랐지만 오르카는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녀들을 응접실에서 모두 물린 오르카가 불안한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조용한 적막 속에서 샐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새가 수놓아진 손수건에 새겨진 이니셜은 L·O. 라이라 오르카 후작 부인의 것이 맞죠?”
그 말에 오르카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모은 두 손마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손수건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저런 반응을 보일 리 없다. 샐리는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역시 그 가루는 벨라도나였구나.’
의심이 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는 오르카를 향해 샐리가 말했다.
“손수건에 분홍색 가루가 묻어 있더군요. 향을 맡아 보니 아무래도 보통 가루가 아닌 것 같아 조사 기관에 보내었어요. 며칠 내로 결과가 나올 거예요.”
“뭐?!”
그 말에 오르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물론 샐리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빨지 않았더라도 바닥에 흘린 손수건에 증거가 될 만큼 확실한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평소의 오르카였다면 그것을 눈치 채고 발뺌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크릿 로즈로 인해 극도로 예민해진 오르카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창백해진 그녀는 숨 쉬는 것마저 벅차 보였다.
“오르카 후작 부인, 손수건에서 불법적인 약물이 검출된다면 곧 조사가 시작될 거예요.”
“…….”
“특히 벨라도나에 대한 법은 더욱 엄격하죠. 최악의 경우 평생 감옥에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 말에 오르카가 끔찍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감옥이라니 싫어!’
초라한 몰골이 되어 햇빛도 비치지 않는 감옥에 갇힐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샐리는 금빛 눈동자를 선연히 빛내며 말했다.
“자수하세요, 부인.”
“……!”
“자수하게 되면 죄를 뉘우치고 있다는 점이 참작되어 큰 벌은 면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오르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샐리가 말을 덧붙였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하신 말씀이니 믿으세요. 그분이 이 사건을 조사하기로 하셨거든요.”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오르카가 테오도라를 찾아갔다. 테오도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맞았다.
다정하게 자신을 맞아 주는 테오도라를 보자 긴장이 풀린 오르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벨라도나의 향을 맡았어요. 정말, 정말 아주 조금이요.”
“누구에게 그것을 구했지?”
“그, 그건 잘 몰라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연회에서 받아서 한 것이었으니까요.”
그 말만으로 충분했다.
테오도라는 오르카의 말이 끝나자마자 준비시켰던 병사를 끌고 에스테반 저택으로 향했다. 병사들은 공작 부인의 방을 급습했다.
“감히 어딜 들어오는 겁니까!”
마사가 소리를 내지르며 그들을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들이닥친 병사들은 사정없이 방의 이곳저곳을 들추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죠?”
싸늘한 표정을 한 엘리제의 앞을 테오도라가 막아섰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귀부인들과 벨라도나를 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소.”
“……!”
그 말에 엘리제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미약해서 표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엘리제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고작 제보 하나 따위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방을 뒤지다니요. 에스테반의 이름을 우습게 보시는 건가요?”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증거를 은폐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이대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제국 귀족들의 분노를 온몸으로 맞으셔야 할 겁니다.”
서늘한 협박에도 테오도라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엘리제는 입을 꽉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괜찮아. 들키지 않을 거야.’
이럴 때를 대비하여 벨라도나를 아주 은밀한 곳에 숨겨 두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와도 그것을 찾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열린 문으로 샐리가 등장하는 순간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샐리의 품에는 은색 여우가 안겨 있었다.
샐리는 엘리제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여우의 커다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정신 못 차렸던 향을 찾아 줘, 캬.”
그 순간 캬가 샐리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코를 킁킁대며 온 방을 헤집던 캬가 어느 곳에서 멈추었다.
구석진 벽면 앞이었다. 캬는 그 앞에 서서 흥분한 소리를 내며 벽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테오도라가 다가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벽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라가 손바닥으로 벽을 쓸어내렸다. 아주 미약하지만 벽돌 하나가 다른 곳보다 튀어나와 있었다. 테오도라는 힘을 주어 벽돌을 잡아 뺐다.
단단하게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벽돌은 신기할 정도로 쉽게 떨어졌다. 벽돌이 빠진 곳에는 작은 밀실과 같은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
테오도라는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내 바스락거리는 무언가가 잡혔다. 드러난 그녀의 손에는 작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캬가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샐리가 캬를 덥석 안아 멀리 떨어트렸다.
“오늘 네 활약은 여기까지야.”
그 모습을 보고 씨익 웃은 테오도라가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를 열자마자 달콤한 향이 가득 퍼져 나왔다. 테오도라가 엘리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히도 찾았군. 그대의 벨라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