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여인과 여인(1)
샐리는 제국으로 떠나는 배에 탔다. 돌아가는 길은 테오도라와 함께할 때와는 많이 달랐다.
혼자 식사를 하고, 혼자 잠이 들었다. 여인 혼자 가는 여행길이라 누군가 귀찮게 할까 싶어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사람들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누군가와 대화할 일도 거의 없었다.
샐리는 이런 식으로 오로지 혼자 지내는 것이 아주 오랜만인 것을 깨달았다.
하녀였던 시절에는 사람들과 벽을 쌓고 지냈기에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에스테반 저택에 들어간 후에는 아니었다.
저택에 들어설 때마다 에반이 자상한 미소로 마중을 나와 주었고, 방에서는 데이지가 곁에서 시중을 들어 주며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해가 질 무렵에는 카시스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항상 누군가와 같이 있었구나.’
샐리는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된 집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제대로 된 가족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샐리는 자신이 늘 혼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혼자가 되어 보니 주변에 늘 누군가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조용하고, 평온했다. 하지만…….
‘딱히 즐겁지도 않네.’
무엇보다 웃을 일이 없었다. 기분 좋게 웃었던 일이 마치 오래된 일 처럼 느껴졌다.
샐리는 갑판 위의 난간을 잡고 새까만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너무 넓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공허했다.
회귀 후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배가 마리나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에 내린 샐리는 숨을 들이마셨다.
진한 향이 배어 있는 바르샤와는 달리 제국의 공기는 청량했다. 뜨거웠던 열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따스한 봄바람이 기분 좋게 몸을 감싸 왔다.
‘드디어 돌아왔어.’
예정보다 일찍 바르샤에서 귀국하게 된 터라 카시스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았다.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샐리는 항구에 대기해 있는 사설 마차를 타고 에스테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달칵.
샐리는 별채의 방문을 열었다. 오랜 시간 주인이 없어 적막하리라 생각했던 방에는 은은한 등불이 켜져 있었다. 의자 아래로 튀어나온 긴 다리가 보였다.
샐리는 눈을 크게 뜨고 조심히 의자 가까이 다가갔다. 그곳에는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카시스가 있었다.
‘주인도 없는 빈방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사람.’
그답지 않은 행동에 황당했는데, 더 놀라운 건 그의 무릎 위에서 몸을 말고 잠들어 있는 캬의 모습이었다.
분명 바르샤로 떠나기 전에는 데면데면하던 사이였건만, 카시스의 품에 파고들어 있는 모습이 꽤나 편안해 보였다.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안 어울리게.’
조금만 기척이 나도 눈을 뜨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캬가 몸을 뒤척여도 깨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샐리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묘한 표정으로 카시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리깐 긴 속눈썹과 꽉 다물어진 입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늘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앞머리를 편안하게 내려서일까? 날카로운 평소와는 달리 앳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그의 이마를 덮고 있던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눈가에 닿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운지 그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 모습이 불편해 보여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려는 순간이었다.
마치 마법이 풀린 공주님처럼 그가 눈을 떴다. 갑자기 드러난 짙은 사파이어 색의 눈동자에 샐리는 당황했다. 카시스는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샐리?”
“네. 샐리예요.”
샐리가 어색한 미소로 인사한 순간, 카시스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샐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잡은 그는 목을 길게 뻗어 가까이 다가왔다. 샐리의 귓가에 그의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꺄악!”
샐리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으려는 순간, 카시스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 캬가 귀를 쫑긋 세우며 놀란 얼굴로 눈을 떴다.
샐리는 빨갛게 물든 귀를 가리며 소리쳤다.
“지, 지금 뭐 하신 거예요? 설마 아직 잠이 안 깨신 거예요?”
“아니.”
“그럼 왜 이런 짓을 하신 거예요!”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여 뾰족해진 샐리의 목소리에 카시스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가 지금까지 바르샤에서 지내다 왔으니 바르샤식으로 인사한 것뿐이야.”
그제야 샐리는 바르샤로 떠나기 전 그에게 말해 주었던 바르샤의 문화들을 떠올렸다. 그에게 알려 주었던 바르샤의 특이한 인사법이었다.
그러나 카시스는 다른 중요한 것은 기억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 인사는 두 사람 사이가 아주 친밀한 사이일 때나 하는 것이었다.
“저하, 그 인사는요, 우리 같은 사이가 아니라…….”
그때였다. 부드러운 감촉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캬가 샐리의 발치에 온몸을 비벼 대고 있었다.
안아 줘, 안아 줘.
그렇게 필사적으로 말하는데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샐리는 캬를 품에 안고는 쓰다듬었다.
“캬, 잘 있었니?”
캬는 ‘캬’ 하고 소리를 내며 샐리의 품에 파고들었다. 카시스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캬가 너를 무척 보고 싶어 했어.”
“……그랬어요?”
“그래. 저녁이면 항상 이 방에 오자고 조르더군. 네 향이 남아 있는 방에 있으면 안심이 되는 모양이야.”
“…….”
샐리는 조금 놀란 눈으로 품 안의 작은 동물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망울을 보자 어딘가 가슴 한편이 울컥해졌다.
얼마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매일 문을 열어도 보이지 않는 주인의 모습에 불안했을 것이다.
샐리는 캬를 꼬옥 안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캬.”
카시스는 그런 샐리를 빤히 바라보더니 나지막이 말을 내뱉었다.
“나도 기다렸어.”
잘못 들은 말인가 싶어 샐리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아주 연한 미소가 머무르고 있었다.
“어서 와.”
“…….”
그의 목소리가 샐리의 가슴 한편을 찌르르 간지럽혔다.
그 순간 샐리는 깨달았다. 어느새 이 별채의 방이 자신의 집이 되었음을.
하늘이 보이는 커다란 창과 매일매일 바뀌는 꽃 한 송이, 자신을 반겨 주는 사랑스러운 여우, 그리고 그.
무엇 하나 반갑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얼마 후면 이 모든 것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 해도, 지금만큼은 온전히 기뻐하고 싶었다. 그래서 샐리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네, 다녀왔어요.”
* * *
다음 날 아침 카시스는 별채의 방으로 향했다. 며칠 내내 조용하기만 했던 방문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시스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문을 열었다.
환한 햇빛 아래 샐리가 서 있었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카시스는 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샐리는 처음 보는 이국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르샤의 드레스였다.
흰 피부가 비치는 노란빛 드레스가 샐리의 몸 위에서 살랑거렸다. 제국의 드레스와는 달리 하늘거리는 옷 사이로 봉긋한 가슴이 드러나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저하?”
샐리의 말에 카시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이런 이른 시간에 자신의 방을 찾은 적이 없기에 샐리는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방을 찾아온 이유는 딱히 없었다. ‘네가 이곳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샐리의 앞에 서 있는 에반이 눈에 띄었다.
“에반이 자리에 없기에 찾아왔어.”
그 말에 에반이 어깨를 굳히며 긴장된 얼굴을 했다.
“샐리 님께서 잠시 들르라고 하셔서 자리를 비웠습니다. 시킬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일은 해결되었어. 그런데 무슨 일로 에반을 부른 거지?”
카시스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바르샤에서 가져온 선물을 전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샐리의 손에는 묵직한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샐리는 데이지에게 주머니를 건네며 말했다.
“데이지, 하녀들에게도 하나씩 잘 나누어 주렴.”
“네.”
데이지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카시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데이지의 머리에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나무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카시스가 말했다.
“고용인들의 선물을 챙겨 왔나?”
“그럼요. 늘 저를 위해서 고생하는 분들이잖아요.”
샐리는 바닥에 놓여 있던 바구니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건 에반이 챙겨 가세요. 남자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시면 되요.”
“알겠습니다.”
에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구니를 들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제법 큼직했던 바구니는 묵직했다. 도대체 무엇이냐는 에반의 눈빛에 샐리가 부드럽게 눈을 휘며 말했다.
“바르샤의 잎담배와 사탕이에요. 그리고 술 몇 병이요.”
술이라는 말에 에반이 눈을 크게 떴다.
“술이요?”
“네. 챙겨 오느라 애먹었어요.”
몸을 쓰는 일을 하는 하인들은 대부분 담배와 술을 즐겼다. 특히 술을 좋아했다. 그들에게 평소에 마셔 보지 못한 이국의 술만큼 매력적인 선물은 없을 터였다.
바구니 안에 들어 있는 가죽 병을 바라보며 에반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랜 시간 귀족가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어떤 귀부인에게도 이런 선물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하인들이 무척 좋아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에반이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인사했다. 그는 아까의 데이지처럼 환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늘 차분하던 에반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본 터라 카시스는 희한한 것을 본다는 얼굴을 했다.
문이 닫히고 방에는 카시스와 샐리 둘만 남았다. 닫힌 문에서 시선을 돌린 카시스는 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딘가 집요한 시선이 자신에게는 줄 것이 없냐고 말하는 것 같아 샐리는 쿡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하의 선물도 있어요. 잠시만요.”
그 말에 카시스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담요 위에서 바르샤산 마른 과일을 뜯어 먹고 있던 캬도 뭔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샐리를 바라보았다.
샐리가 카시스에게 건넨 것은 아주 작은 상자였다.
카시스는 본래 선물이란 것에 큰 기대감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원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눈앞에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이 작은 선물 상자는 그를 묘하게 설레게 했다.
“열어 보세요.”
샐리의 말에 카시스는 상자를 열었다. 카시스는 눈을 깜빡였다.
상자 안에는 검푸른 돌이 박힌 귀걸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귀걸이예요.”
그것은 카시스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선물의 정체를 되물은 것은 이런 귀걸이는 보통 남성에게 하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이 이런 액세서리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신관이나 점성술사 같은 특이한 직업에 국한되었다. 제국의 보통 남성은 이런 귀걸이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샐리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바르샤 남자들은 꾸미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귀걸이, 목걸이, 반지. 여자들 못지않게 화려하게 꾸미고 다녀요. 남자들이 그렇게 화사하게 꾸민 것은 처음 보았는데 아주 멋지더라고요.”
“……그렇군.”
카시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샐리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으을 터뜨렸다.
그가 좋아할 선물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검푸른 돌이 그의 눈동자와 너무 닮아서 충동적으로 사 버리고 말았다. 무릇 선물은 받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골라야 한다는 샐리의 지론에 맞지 않는 선물이었다.
샐리는 뻔뻔스럽게 생각했다.
이미 샀는데 어쩌라고.
다른 사람들에겐 굉장히 배려 넘치는 그녀는 그에게 종종 짓궂어지곤 했다. 지금 이 순간처럼.
“마음에 드세요?”
카시스는 잘 꾸미는 편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점잖은 제국 남자의 기준에서였다.
바르샤 남자들과 달리 제국의 남자들은 이런 액세서리를 하는 것을 경망스럽다고 생각했다.
우아하고 고결한 귀족인 그는 오죽할까. 화려한 귀걸이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말이 튀어 나왔다.
“해 줘.”
“네?”
“네가 준 선물이니까, 네가 직접 해줘.”
그 말에 장난스럽게 웃던 샐리의 얼굴이 바뀌었다. 샐리는 커다래진 눈을 깜빡거렸다. 이 반응은 예상외였다.
“이 귀걸이는 귀를 뚫어야 할 수 있어요.”
“그럼 뚫어 주면 되잖아.”
귀를 뚫은 곳은 평생 그 자국이 남는다. 이렇게 장난처럼 뚫을 게 아니었다. 하물며 귀족인 그라면 더더욱.
그래서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꼭 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고 싶어.”
그 목소리는 아주 진지했다. 그의 눈빛은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생각을 돌릴 마음도 없어 보였다.
샐리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괜한 장난을 쳤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금 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앉아 보세요.”
카시스는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샐리는 화장대 위로 가서 알코올과 손수건을 챙겨왔다. 알코올을 손수건에 묻혀 귀걸이의 침을 닦으며 샐리가 말했다.
“귀를 뚫으면 평생 그 자국이 사라지지 않는 것 아시죠?”
“그래.”
“그러니까 분명 후회하실 거예요.”
“그래도 상관없어.”
정말 이 남자,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울까.
샐리는 눈썹을 찡그리며 카시스의 옆에 섰다. 샐리는 그의 귓가를 덮은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흉터 하나 없는 깨끗한 귀가 드러났다.
귀를 뚫어 본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샐리 자신의 귀도 스스로 뚫었고, 하녀 시절부터 많은 여인들의 귀를 뚫어 주었다. 하지만 남자의 귀를 뚫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아프실 거예요.”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는 동그란 귓불에 귀걸이 침을 가져다 댄 후, 꾹 눌렀다. 뾰족한 침이 여린 살을 파고드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작업은 순식간에 끝났다.
새하얗고 매끈했던 그의 귀에 검푸른 귀걸이가 반짝였다.
“다 됐어요.”
“금방이군.”
카시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샐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금욕적인 분위기의 아름다운 얼굴에 귀걸이가 반짝이니 느낌이 아주 묘했다. 어딘가 사람의 욕망을 자극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무척 위험해 보였다.
“왜 그러지?”
정작 자신은 그것을 모르는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는 모습이라니. 샐리는 처음으로 눈앞의 남자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저하, 귀걸이는 밖에서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왜지?”
‘그 모습으로 밖에 나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진짜 이유를 마음속으로 대답하며 샐리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게 있어요. 제 말대로 하세요.”
“……그렇게 하지.”
카시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귀걸이를 찰랑이며 돌아다닐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신경 쓰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너야말로…….”
“네?”
카시스는 미간을 모아 샐리를 바라보았다.
흰 피부가 비치는 얇은 드레스는 샐리의 몸매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천 사이로 뽀얀 가슴과 매끈한 다리가 여지없이 드러난 모습은 색정적이었다. 아무 장식 없이 찰랑이는 붉은 머리카락과 치켜 올라간 눈매가 어우러져 더더욱.
자신이 이렇게 아찔해질 정도니 다른 사내들의 눈에는 어떨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바르샤 드레스는 절대 입고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
샐리가 왜냐고 묻기도 전에 카시스가 냉큼 말을 이었다.
“추워 보여. 아무리 날씨가 따뜻해졌다지만 그런 옷을 입고 다녔다가는 감기에 걸릴 것 같군.”
그 말에 샐리는 피식 웃었다.
“그건 그래요. 안 그래도 바깥에서 입고 다니기에는 노출이 심한 것 같아 방 안에서만 입으려고 했어요.”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방 안에서만, 종종…….”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만 아는 모종의 약속을 맺는 순간이었다.
* * *
여행의 노곤함을 푸는 것도 잠시,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친한 이들을 찾아가 여행을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해야 했다.
바르샤의 문양이 들어간 화려한 리본을 받은 에이미는 감동받은 얼굴로 샐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카모라에게는 바르샤에서 가장 이름 높은 디자이너가 만들었다는 브로치를 선물해 주었다. 그녀는 충격받은 얼굴로 브로치를 바라보다가 그날로 짐을 꾸려 바르샤로 떠나 버렸다.
그다음 간 곳은 황성이었다. 황후를 뵙는 건 오랜만이라 일부러 캬도 함께 데려갔다.
황후를 보자마자 캬는 ‘캬’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황후는 그런 캬를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샐리는 황후에게 선물을 건넸다.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바르샤의 향초랍니다. 침대맡에 피워 두시면 잠이 잘 오실 거예요.”
“고맙구나.”
테오도라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황후의 얼굴은 나쁘지 않았다.
“테오도라는 언제쯤 돌아올 생각이지?”
“바르샤 국왕을 만나 성과를 낼 때까지 머무를 예정이라 확신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혹시 일정이 길어지게 되면 편지를 보낼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답니다.”
그 말에 황후는 눈썹을 찡그렸다. 황제가 요구한 것은 이미 해냈으니 이만 돌아오면 될 것을 역시나 자신의 딸은 그 정도에서 만족할 셈이 아닌 모양이었다.
“바르샤 왕은 외부인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고작 황녀를 만나 주겠느냐.”
“영특하신 분이니 생각하신 바가 있으실 테죠.”
“테오도라를 믿고 있구나.”
황후의 말에 샐리는 미소로 답했다.
황성을 나온 샐리가 향한 곳은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저택이었다. 골든리아는 웃으며 샐리를 맞아 주었다. 샐리는 골든리아에게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열심히 고른 선물이랍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니 기대가 되는구나.”
골든리아는 미소 지으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샐리가 웃으며 말했다.
“부인께 잘 어울리는 달맞이꽃으로 만든 바르샤산 오일이랍니다.”
골든리아는 노란 빛이 나는 오일을 손등 위에 발라 보았다. 주름진 손 위에 오일이 매끄럽게 스며드니 건조했던 손이 이내 촉촉해졌다. 코끝을 감도는 향기도 아주 좋았다.
그 향을 기분 좋게 음미하던 골든리아는 이내 눈썹을 내리며 조금 민망한 얼굴을 했다.
“좋은 물건이다만 다 늙은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 아니냐.”
오일은 피부를 매끈하게 관리하기 위해 바르는 사치품이었다. 한창 때의 젊은 귀부인들이라면 모를까, 나이든 귀부인이 받을 법한 선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샐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무슨 말이냐는 얼굴을 했다.
“어머,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여자가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나이와 관계없는걸요.”
그 말에 골든리아는 못 말리겠다는 얼굴을 했다.
골든리아는 육십이 넘는 노인이었다. 젊은 시절 낳은 자식이 모두 성인이 되어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레이디라는 말보다는 할머니라는 말이 더 익숙한 나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도 아침마다 머리를 곱게 정돈하고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그녀는 자신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였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 이 깜찍한 여인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고맙다. 잘 쓰마.”
그 말에 샐리는 방긋이 웃었다.
골든리아가 따라 준 차를 마시며 샐리가 물었다.
“사교계에는 그동안 별일 없었나요?”
샐리가 사교계를 떠난 기간은 꽤 길었다. 그사이 사교계가 마냥 조용 했을 리 없었다. 예상대로 골든리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아주 큰일이 있었다. 바로 레이첼 황녀와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관계된 일이야.”
그 말에 샐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이야기는 며칠 전 황성에서 열린 연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황성의 정기 연회는 일정한 작위를 가진 여성들이 모여 친분을 나누는 자리였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조건이 되는 여인을 초대하는 자리기 때문에 파벌이나 친분에 상관없이 수많은 여인들이 모였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인 엘리제와 황녀인 레이첼도 자리했다. 두 사람은 가장 밝은 중앙 자리에 앉아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리제는 꽃보다 아름답게 미소 지었고, 레이첼은 환한 아침 햇살 같은 얼굴로 즐겁게 조잘거렸다. 그런 두 사람을 구석진 곳에서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샬롯 백작 부인이었다.
샬롯은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신기할 만큼 화가 쌓여 있었다. 곧 죽을 줄 알았던 황후가 병을 털고 일어난 것도 노여운데, 황자인 아들은 시녀와 사고를 쳐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아들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년의 배를 짓밟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존이 그녀를 막았다.
사랑하는 여자니 절대 건들지 말라고, 이 아기를 낳을 거라고 말하는 꼬락서니가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풋사랑에 빠져 제게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잊은 모양이었다.
그따위 여자와 자식은 황제가 되는 데 걸림돌만 되는 것을 모르고. 바보 같은 놈.
존이 제 자식이 맞는다며 소란을 피워 대자 황제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존을 황위 계승자로 추대하던 이들의 시선도 싸늘해졌다.
이대로라면 테오도라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어린 황자들에게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샬롯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힘든 그녀가 마음을 위로받을 곳은 엘리제뿐이었다.
그러나 샬롯은 엘리제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엘리제가 누누이 샬롯에게 한 말 때문이었다.
—제가 부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맞지만 우리의 사이는 부디 비밀로 해 주세요. 레이첼 황녀께서 아시면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엘리제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레이첼은 샬롯을 지독히도 싫어했으니 두 사람이 왕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좋을 것 하나도 없었다. 레이첼은 엘리제의 가장 든든한 뒷배였으니 더더욱.
그 정도 눈치는 있다고 걱정 말라고 대답하긴 했으나, 막상 시선도 주지 않는 엘리제를 보니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인 줄 알면서.’
엘리제가 정말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면 레이첼 황녀의 옆에서 웃을 게 아니라 자신의 곁에 다가와 위로를 해 줘야 했다.
결국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한 샬롯은 엘리제의 곁에 다가갔다.
샬롯이 다가오자 엘리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아름다운 얼굴은 가려져 버렸다. 그녀를 지키듯이 선 레이첼 때문이었다.
레이첼은 샬롯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시죠? 우리가 친밀히 말을 나눌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그 순간 샬롯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나이도 어린 것이 하는 말이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어린년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욕설을 내뱉고 싶었지만 그녀는 황녀였다.
존이 황좌에 오르면 저년부터 밞아 버려야지. 그리 생각하며 샬롯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황녀 저하에게 아는 척하러 온 것이 아니니 비켜 주시죠. 제가 인사하고 싶은 사람은 엘리제거든요.”
“……!”
샬롯과 엘리제는 결코 인사를 주고받을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더니 괜히 엘리제에게 집적거릴 셈인가 싶어 레이첼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인사까지 할 필요 있나요?”
그 말에 샬롯이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어머나. 친하지 않다고 누가 그래요? 황녀 저하만큼 나와 엘리제는 친밀한 사이랍니다. 요즘 엘리제가 얼마나 자주 나를 찾아왔는데요.”
“……뭐라고요?”
그 말에 레이첼은 눈을 크게 떴다. 레이첼의 뒤에 서 있던 엘리제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으나 샬롯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황녀 저하는 몰랐던 모양이죠? 두 분 우정이 그리 돈독해 보이더니 실은 영 아니었나 봅니다.”
샬롯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레이첼은 샬롯의 얄미운 말에 뭐라 하지도 못하고 몸을 돌렸다.
“그게 정말이에요, 엘리제?”
엘리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니라고,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 샬롯이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거짓말을 해 보았자 상황만 더 꼬일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나았다. 늘 그래 왔듯이 조금만 슬픈 표정을 지어 주면 레이첼은 마음을 풀 것이다.
“황녀 저하, 제 말을 들어 보세요.”
그러나 엘리제의 애처로운 목소리에도 레이첼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사실 레이첼도 엘리제가 샬롯을 찾아갔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그러나 레이첼은 그럴 리 없다며 무시했다. 그런 것을 이런 식으로 확인받을 줄 몰랐다.
“미안해요. 지금 엘리제의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에요.”
레이첼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연회장을 나가 버렸다.
“그 후로 연회장 분위기는 엉망이었어. 연회에서 가장 중심이 되었던 두 여인이 그렇게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지.”
골든리아 부인은 차분히 말을 했지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레이첼의 엘리제에 대한 호의와 애정은 유명했다.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레이첼이 엘리제에게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정말 많이 실망했다는 뜻이다.
골든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레이첼 황녀 저하는 아이같이 순수한 분이시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는 분이니 반대로 상대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무척 상처받으셨을 거다.”
그리고 눈치 빠른 사교계의 여인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엘리제가 샬롯 부인과 몰래 만나 친분을 다졌다. 그것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사이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샐리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스팅스 백작 부인과 비올렛 남작 부인에게서 초대장이 도착해 있던 것이군요. 저와 함께 테오도라 황녀 저하를 곁에서 모시고 싶다는 아주 절절한 편지와 함께요.”
두 사람은 엘리제의 열렬한 신봉자들이었다. 그녀들이 그런 연락을 해 왔다는 것은 엘리제와의 연을 끊겠다는 말이다.
골든리아는 그 말에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세력의 가장 큰 중심축이 되는 엘리제와 레이첼의 사이가 벌어졌으니 불안감을 느꼈을 거야.”
사교계에서 이런 일은 흔했다. 속해 있는 세력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여인들은 재빨리 다른 파벌로 자리를 옮기곤 했다.
그렇기에 사교계의 정점을 오랜 시간 지키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엘리제 마님은 얻은 것도 없이 잃은 것만 많게 되었군요.”
“샬롯 부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몰랐던 탓이지. 샬롯은 남의 사정을 생각하며 입을 다물 줄 아는 배려 따위는 모르는 여인이야.”
골든리아의 말이 맞았다. 엘리제는 영특한 머리를 믿고 자만했을 것이다. 샬롯 정도는 손 안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샬롯은 엘리제의 생각보다 훨씬 더 멍청하고 막무가내였다. 신신당부했을 비밀스러운 만남을 모두의 앞에서 폭로할 만큼.
그것을 몰랐던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실수였다.
골든리아 공작 부인과 이야기를 마친 샐리는 에스테반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샬롯이 벌인 파문이 어디까지 갈지에 대하여 곤히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샐리의 품에 안겨 있던 캬가 품을 빠져나가 제멋대로 길을 나서 버렸다.
“캬, 어디를 가니. 돌아오렴.”
샐리의 말이 무색하게 캬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폴짝거리며 달려갔다가 고개를 돌려 샐리를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다시 멀어졌다.
“캬.”
샐리는 난처한 얼굴로 캬를 쫒았다. 그렇게 걸어간 곳은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저택의 뒤편이었다. 이곳은 공작 부인의 전용 정원이 있는 곳이다.
에스테반 공작에게 저택의 모든 곳을 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받기는 했으나, 허락 없이 공작 부인의 공간에 들어섰다간 뒷말이 나올지도 몰랐다.
‘괜한 말을 듣기 전에 어서 돌아가자.’
샐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자신을 따라오던 그녀가 발을 멈추자 캬도 멈추어 섰다.
“돌아가자, 캬.”
단호한 목소리에 캬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서.”
샐리의 재촉에 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채고 너털거리는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다가온 캬를 품에 안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샬롯이라니! 내가 얼마나 그 마녀를 끔찍해하는지 알면서!”
익숙한 목소리는 분명 레이첼이었다. 샐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렸다.
“말씀드린 대로예요. 샬롯 부인의 처지가 안쓰러워 도움을 드리고 싶어 찾아간 것뿐이랍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그러니 부디 마음을 푸세요, 황녀 저하.”
엘리제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맑고 가녀려서 누구라도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엘리제의 자애로움을 사랑하는 레이첼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레이첼의 격양된 목소리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도 나를 위한다면 그래서는 안 됐어요. 나는 엘리제가 에스테반 공작과 결혼할 수 있도록 그토록 끔찍한 거짓말까지 했는데…….”
“레이첼, 그건!”
“그래요. 그 거짓말에 대해선 다시는 말도 꺼내지 않기로 약속했죠. 난 그 약속을 지켰어요. 에스테반 공작을 볼 때마다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끔찍한 죄책감에 사로잡혀도 오직 엘리제 당신을 위해서요.”
“…….”
“그런데 당신은 고작 샬롯 따위에게 품은 동정심 때문에 나를 상처 주었어요. 나는 그게 너무 화가 나요.”
“그건…….”
“더 이상 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이런 감정으로 대화를 더 나누어 봤자 감정만 상할 뿐이에요.”
“레이첼!”
“돌아갈게요.”
레이첼은 상처받은 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소리가 들려와 샐리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샐리는 빠른 걸음으로 별채로 향했다.
엘리제가 가진 힘의 많은 부분이 레이첼에게서 나왔다. 그런 레이첼이 엘리제를 멀리한다는 것은 샐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어떻게 이 기회를 살릴까 머리를 굴려야 하건만 다른 말이 신경 쓰였다.
‘그와 엘리제를 결혼시키기 위해서 끔찍한 거짓말을 했다고?’
카시스와 엘리제, 두 사람의 결혼이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강제적인 결혼이었으며 황실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황실을 움직이기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이 레이첼이다.
그러나 정확히 레이첼이 어떤 말로 황실을 움직였는지 샐리는 알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샐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신경 쓰지 말자.’
이 마음이 단순한 호기심이라면 문제없었다. 그에게 물어보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감정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강렬한 호기심은 과거에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집착과 애정이 뒤섞인 질척한 감정.
다시 그런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
왜 하필 이런 순간에 그를 만나게 되는 걸까.
샐리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별채 앞에 선 카시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오는 길인가 보군.”
먼저 입을 뗀 것은 카시스였다.
“네.”
샐리는 왜인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를 바라보면 당장에라도 그와 엘리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것 같았다.
카시스는 늘 똑바로 눈을 마주쳐 오던 그녀의 시선이 미묘하게 빗나가 있자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 있나?”
“아뇨. 아무 일도요.”
그 말에 카시스는 흠, 하고 눈썹을 추켜세웠다. 샐리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온 카시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훅, 하고 청량한 향기가 느껴졌다.
“……!”
다행히도 그는 고개를 숙인 채라 샐리의 당황한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샐리의 품에 안겨 있는 캬였다. 그가 캬를 보며 말했다.
“샐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캬!”
캬는 귀를 쫑긋하고는 힘차게 대답했다. 카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하면 못 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샐리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물에게 말을 거는 카시스 에스테반이라니.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카시스는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이 녀석, 사람 말을 제법 잘 알아듣더군.”
카시스는 다시 캬를 바라보며 말했다.
“샐리가 좋으냐?”
“캬!”
“샐리는 미인이지?”
“캬!”
캬는 신나게 대답했다. ‘캬캬’거리는 모습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음 말이 나오는 순간 캬의 표정이 변했다.
“샐리는 너보다 날 좋아해.”
“크르릉.”
캬는 날카로운 이를 악물고 카시스를 노려보았다. 여우의 기세는 제법 흉흉했다. 카시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 얼굴을 보더니 샐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
어째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자신의 몫인지. 샐리는 귓가까지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단순한 장난이었다. 그러니 대충 대답을 해 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는 캬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야. 캬가 제일 좋아.”
그 말에 캬는 ‘캬!’ 하고 소리를 쳤고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캬아!”
캬는 흥분한 듯 꼬리를 흔들며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손바닥을 핥는 캬에게 간지럽다며 웃는 샐리를 바라보는 카시스의 표정은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
역시 그녀는 웃는 모습이 예뻤다.
* * *
달도 가린 어두운 밤. 은은한 등불에 비친 엘리제의 얼굴은 모든 감정이 사라져 있었다. 감정이 사라진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 같은 기묘한 느낌이 났다.
“…….”
그녀의 손에는 핏자국이 선연한 회초리가 들려 있었다. 발아래에는 마사가 바들바들 떨며 등을 내놓고 있었다. 마른 등 위로 새빨간 자국이 여실했다.
핏기 없는 마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다. 엘리제가 회초리를 든 지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그만 나가 보라고 했을 텐데 아직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즉 주인의 분이 덜 풀렸다는 이야기였다.
엘리제는 핏방울이 맺힌 회초리로 손바닥을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기껏 황성까지 찾아갔건만 레이첼은 오늘도 엘리제의 알현을 거부했다. 마치 동굴로 숨어든 토끼처럼 황성에 콕 박혀 버렸다.
몸이 좋지 않아 만나기가 힘들다는 말을 전해 왔지만 뻔한 거짓말이 분명했다.
‘레이첼 주제에 감히…….’
레이첼은 늘 자신의 가장 편한 도구가 되었다. 엘리제가 울면 우는 대로, 웃으면 웃는 대로 정신없이 휘둘려서 늘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그런 레이첼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토록 꼬리를 흔들며 좋다고 다가왔을 때는 언제고, 샬롯과 조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저렇게 화내는 꼴이라니. 정말이지 그 행태가 괘씸했다.
엘리제는 레이첼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레이첼이 샬롯을 미워하는 것이 차라리 황성에서의 권력 싸움 같은 이유였다면 납득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몇 대 맞은 것이 뭐 어떻다는 거야?!’
정말이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그 따위 이유로 자신을 이렇게 대한다니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엘리제는 회초리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을 본 마사가 어깨를 움찔했지만 다행히 엘리제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늦은 밤, 공작 부인의 방문을 두들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엘리제의 시선에 마사는 황급히 일어나 옷을 여미고 방문을 열었다. 방 밖에 있는 여인은 하녀였다.
하녀는 마사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내 마사의 눈이 커졌다. 하녀를 내보낸 마사는 엘리제의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입을 열었다.
“황성에서 긴급한 소식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그 말에 엘리제가 고개를 들었다. 등불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었다. 마사가 말을 이었다.
“레이첼 황녀 저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꾀병이 아니었나?”
“요 며칠 몸이 좀 안 좋으셨던 건 사실이었나 봅니다. 그러다가 오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황성이 발칵 뒤집혔답니다.”
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 이건 또 예기치 못한 전개였다.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탓일까, 아니면 우연히 몸에 병이 들어선 것일까.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는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적어도 레이첼이 아픈 동안은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져 함께 있지 않는 거냐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으니까. 레이첼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엘리제가 턱을 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잘됐구나.”
* * *
샐리는 바란을 불렀다. 샐리 덕분에 제나 의료원에 매진하게 된 그는 에스테반 저택가의 주치의를 그만둔 후에도 샐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란은 황성의 의사는 아니었지만 수도에서 실력이 가장 좋다고 손꼽혔다. 레이첼의 증상이 악화되고 황성 의사들도 고개를 내젓자 그는 황제의 명으로 그녀를 진찰했다.
“레이첼 황녀 저하께서는 어떤가요.”
레이첼이 병에 걸려 쓰러졌다는 소식이 온 사교계에 퍼졌다. 그러나 그 병세가 얼마나 심한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바란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좋지 않아요. 열이 너무 오래가고 있습니다.”
레이첼이 걸린 병은 온몸에 붉은 두드러기가 튀어 나오는 피부병이었다. 전염성이 심한 병이라 레이첼의 방은 폐쇄되었다.
최소한의 사람만 출입하게 된 방에서 레이첼은 거친 숨을 내쉬며 끙끙 앓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열이 떨어진다 해도 흉이 심하게 가능성이 큽니다.”
그 말에 샐리는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방법이 없나요?”
“고약한 병이라 현재 제국의 약으로는 크게 효과를 보기 힘듭니다. 의사가 할 수 있는 건 몸을 차게 식혀 주는 것밖에는 없어요. 그 후에는 본인이 이겨내야 하죠.”
“흉터는요?”
“흉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는 병이 지나간 자리를 깨끗이 만들 수 있는 마법 따윈 부릴 수 없습니다. 피부에 좋은 약초를 발라 주는 수밖에는 없지요.”
냉정한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바란은 샐리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래서 바란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레이첼 황녀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 아니었나.’
사교계의 일이나 귀족 여인들의 관계 따위 조금도 관심 없는 바란이지만, 에스테반 공작 부인과 레이첼이 돈독한 사이인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샐리와 레이첼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을 것이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관계가 있나 싶어 바란은 묘한 얼굴로 말했다.
“나이도 젊고 건강한 분이니 이겨 낼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 말에 샐리가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녀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란이 돌아간 후 샐리는 생각에 잠겼다.
걱정이라니. 이 마음은 그런 애틋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샐리는 레이첼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엘리제의 곁에 있는 철없는 황녀일 뿐이었다. 그런 이에게 새삼 연민이나 걱정이 들 리는 없었다.
단지 샐리의 마음이 흔들린 건 먼 옛날의 자신과 레이첼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전생의 끝자락, 샐리는 병에 걸렸다. 손끝부터 서서히 썩어 들어가는 피부병이었다.
샐리는 지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부가 괴사하는 고통보다 끔찍했던 것은 추해져가는 겉모습이었다.
여인의 온몸에 흉이 진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 뒤로 오한이 돋고, 두 손이 바르르 떨려 왔다.
잠시 후 감정을 가라앉힌 샐리는 종이와 펜을 꺼내들었다. 바르샤에 있는 테오도라에게 쓰는 편지였다.
샬롯 때문에 벌어진 엘리제와 레이첼의 상황, 레이첼의 병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었다.
“그리고…….”
샐리는 편지의 끝자락에 부탁을 하나 했다. 바르샤에 레이첼의 병을 완화시켜 줄 만한 좋은 약초가 있는지 찾아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 * *
레이첼이 쓰러져 있는 시간 동안 황성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가장 큰 사건은 오랜 시간 황성을 관리하던 황태후의 불법 행위가 낱낱이 밝혀진 것이다.
황태후가 도망치듯 황성을 떠났음에도 황후는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황성에 남아 있던 황태후의 사람들은 모조리 잘려 나가거나 감옥에 들어갔다.
“이제 겨우 인사 비리에 관한 것을 파헤친 것뿐이야.”
황후는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은 앞으로 더 황태후를 몰아붙인다는 말이었다. 황후의 등장으로 황태후의 힘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무너져 갔다.
그리고 그 여파가 가장 크게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었다.
“…….”
엘리제는 눈을 내리깔고 도착한 초대장들을 바라보았다. 마사는 숨도 쉬지 못하고 초대장이 담긴 바구니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게 다라고?”
“네.”
마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리제에게는 매일 같이 수십 장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그것을 다 읽을 수 없어 마사가 신분이 높은 이들의 초대장만 골라 엘리제에게 가져다주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요 며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도착한 초대장은 예전의 반의반으로 줄어 버렸으니까.
엘리제는 싸늘한 얼굴로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초대장 수도 형편없지만 보내온 이들도 하나같이 쓰레기 같은 이름들뿐이었다.
엘리제를 모시지 못해 안달 내던 이름 높은 여인들의 이름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위를 주렴.”
마사는 엘리제에게 가위를 건넸다. 엘리제는 가위로 초대장을 갈기갈기 자르기 시작했다.
“괘씸한 것들.”
엘리제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엘리제의 뒷배는 레이첼이었고, 레이첼의 뒷배는 황태후였다. 그러니 황태후의 권력이 시들하자 엘리제를 멀리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애초에 여인들의 마음을 믿지도 않았으니 배신감은 느끼지 않았다. 다만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날 뿐이다.
‘감히 나를 무시해?’
그 늙은 노인이 사라졌다고 해도 자신은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었다. 이 사교계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고귀한 여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이내 모든 초대장은 종잇조각이 되어 나풀거렸지만 분은 풀리지 않았다.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엘리제가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올렸다. 마사가 말을 이었다.
“샬롯 백작 부인이십니다.”
그 이름에 엘리제의 눈빛에 파란 불꽃이 번뜩였다. 벌써 머릿속에서 몇 번을 찢어 죽일 만큼 미운 여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비밀을 지켜 주지 않은 덕에 레이첼과 사이가 틀어져 버리고 이런 곤란한 상황까지 온 것이 아닌가.
무시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애로운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할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또 그런 식으로 저와 아는 척을 하지 않게 단단히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응접실에는 샬롯이 차를 홀짝이며 앉아 있었다. 이따금 테이블을 두들기는 손은 조금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이내 응접실에 도착한 엘리제를 본 샬롯이 눈을 빛냈다.
“엘리제!”
“오셨군요.”
엘리제는 평소 같은 아름다운 미소를 띠고 샬롯에게 인사했다. 샬롯은 안심했다.
아무리 샬롯이라도 제가 한 실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엘리제가 크게 화내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조금도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래. 나는 제1황자의 어머니야. 고작 레이첼 같은 년 때문에 화낼 리가 없지.’
샬롯은 괜한 걱정을 했다며 엘리제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엘리제가 속으로 저 얄미운 입을 수십 번이나 가위로 찢은 것도 모르고.
샬롯은 흥미로운 소식을 전하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레이첼의 이야기는 들었죠?”
“네. 차도가 좋지 않다면서요. 정말이지 너무 마음이 아파요.”
엘리제는 애처롭게 눈을 내리깔았다.
“평소에 건강하셨던 분이 갑자기 왜 그런 병에 걸렸는지…….”
그 말에 샬롯이 풋, 하고 웃었다. 엘리제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은 찢어진 눈을 번뜩이며 한쪽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있었다.
“그 병, 너무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아시는 것이 있으신 건가요?”
엘리제의 말에 샬롯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최근에 하녀 중에 피부병에 걸려 그만둔 애가 있거든요. 그 애가 마셨던 물을 몰래 레이첼의 찻주전자에 넣어 봤죠. 고작 한 모금이었는데 곧바로 병에 걸릴 줄이야. 하여간 누굴 닮아 그렇게 허약한가 몰라요.”
샬롯은 얄밉게 눈썹을 올리며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냐며 동의를 구하는 표정이었다. 엘리제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리석은 여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이야.’
저런 짓을 저질러 놓고 농담하듯 쉽게 이야기하다니.
그 정도로 엘리제와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를 만큼 모자란 것인지 판단조차 되지 않았다.
“…….”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엘리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샬롯이 가까이 다가와 엘리제의 새하얀 두 손을 맞잡았다.
“엘리제,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
“레이첼 그것이 그 연회 이후로 엘리제에게 찬바람을 날렸다면서요? 그 계집은 한번 앙심을 품으면 평생 가는 성격이라 절대 마음을 풀지 않을 거예요. 그럼 괜히 그년의 눈치를 보느라 엘리제만 힘들 테죠. 그럴 바에는 사교계에서 치워 버리는 게 나아요. 아무리 둔한 년이라도 흉측한 흉터가 생기면 사교계에 나타날 생각은 안 하겠죠.”
피부병은 아무리 잘 이겨 내도 흉터가 생기기 쉬웠다. 재수 없어서 얼굴에 큰 흉이라도 지게 되면 사교계 생활은 아예 끝난 것과 같았다. 사교계에서 여자의 외적인 흠은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샬롯은 그런 끔찍한 말을 입에 담고도 빙긋 웃었다.
“어차피 황태후의 힘을 잃은 레이첼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잖아요? 그러니 이제 그년은 잊고 온전히 내 사람이 돼요, 엘리제.”
“…….”
엘리제도 레이첼이 썩은 줄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황태후라는 힘을 잃어버린 그녀의 손을 붙잡을 이유는 더 이상 없었다.
‘그렇다고 독 묻은 썩은 줄을 잡으라고?’
제1황자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황제의 총애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황후가 제자리를 찾아 황성에서의 입김도 약해졌다. 인망도 없었다. 그런 줄을 누가 잡는단 말인가.
그러나 샬롯의 얼굴은 기세등등했다. 그녀는 레이첼이 사라졌으니 엘리제가 자신의 곁에 올 것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저 순진함이라니.’
엘리제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물론 샬롯의 눈에 그 미소는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제게 레이첼 황녀 저하는 아주 소중한 분이세요. 그런 분을 다치게 하셨단 말씀이시군요.”
“……엘리제?”
샬롯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엘리제는 샬롯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마주쳤다.
“황녀에게 병을 옮긴 것은 중죄. 들키게 되면 아무리 제1황자의 친모라도 단두대에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죠.”
“……!”
“제가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게 된다면 말이에요.”
샬롯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우린 친구잖아요. 그래서 엘리제에게 말한 건데…….”
“친구였죠. 그런데 부인이 내게 그 말을 하는 순간 관계가 좀 달라졌어요.”
엘리제는 누구라도 감탄을 자아낼 만큼 청아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알겠나요, 샬롯?”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한데 오한이 서릴 만큼 섬뜩했다.
엘리제는 생각했다. 독이 묻은 줄을 붙잡을 마음은 없지만, 독이 묻은 노예라면 어떨까.
발밑에 두고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는 존재라면 독이든 뱀이든 뭐든 상관이 없었다.
* * *
레이첼 황녀의 병환으로 인해 사교계의 분위기는 무척 가라앉아 있었다. 연회는 대부분 조용한 분위기로 꾸며졌다.
부채를 살랑이며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샐리에게 다가온 사람은 멜리사 백작 부인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샐리.”
“그러게요. 북부에는 잘 다녀오셨나요?”
멜리사는 친구인 로즈를 보러 북부에 다녀온 참이었다. 멜리사는 질린다는 얼굴로 코끝을 찡그렸다.
“이제 곧 여름이니 북부가 춥지 않을 거란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었어요. 완전 초겨울 날씨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문에 서리까지 어렸다니까요.”
그 말에 샐리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로즈 부인은 잘 계시죠?”
“그럼요. 그렇게 깡마르고 예민한 애가 그 추운 곳에서 멀쩡한 걸 보면 참 신기해요.”
로즈 부인. 사교계의 여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문인 시크릿 로즈의 제작자였다.
그녀는 멜리사의 친한 친구이자 샐리와 종종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이기도 했다.
샐리에게도 진짜 이름과 직위를 밝히지 않은 상태여서 멜리사가 중간에서 두 사람의 편지를 전해 주고 있었다.
“참, 그 애가 샐리에게 편지를 보내왔어요. 내일이라도 저택에 들러 받아 가세요.”
멜리사의 말에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샐리, 그 이야기 알고 있어요?”
“무슨 이야기요?”
샐리가 귀를 쫑긋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교계의 소문난 이야기꾼인 멜리사는 샐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시크릿 로즈의 비밀을 공유한 이후부터 멜리사는 종종 은밀한 사교계 소식을 샐리에게 알려 주곤 했다.
멜리사는 샐리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에게 다시 사람이 몰리고 있다는 건 알죠?”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이 병환으로 쓰러진 이후 많은 이들이 엘리제를 주목했다. 엘리제의 명성의 반은 레이첼이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후였다.
예상대로 엘리제의 기세는 기울어졌다. 그녀가 여는 티파티에 여인들은 예전만큼 관심 갖지 않았고, 그녀에게 앞다투어 보냈던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엘리제에게 다시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엘리제가 여는 티파티에 다녀온 여인들은 세상에 없을 완벽한 파티였다고 극찬하며 또 가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
엘리제가 천사 같은 모습으로 처음 사교계에 등장했을 때보다도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멜리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연회에 어마어마한 돈을 들였다는군요.”
그 말에 샐리의 눈이 커졌다. 그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연회의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꾸민 것은 물론 엄청난 고가의 선물도 뿌리는 모양이에요. 덕분에 여인들이 아주 난리예요.”
사교계는 아이의 우정처럼 순수한 감정으로 친분이 유지되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여인들은 제 편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기 위해 수많은 무기를 사용했다. 그중 가장 효과적이고 쉬운 무기가 돈이었다.
그러나 엘리제는 지금껏 그 방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돈이 아니더라도 가진 것이 많은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미모와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라는 이름, 레이첼이라는 든든한 뒷배로 그녀는 사교계의 정점을 차지했다.
레이첼이 사라진 빈자리를 돈으로 채운다는 것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엘리제 마님께는 그럴 여유가 없으실 텐데요.”
샐리는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랄하게 말했다.
“맞아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은 돈이 없죠.”
모든 재산을 합치면 황실보다도 부유하다는 에스테반 공작가의 안주인이지만 엘리제는 그저 이름뿐인 빈껍데기 공작 부인이었다.
에스테반 공작은 그녀에게 안주인이 가져야 할 어떠한 권한도 주지 않았다.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위한 비용만 매달 지급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 돈은 아름답게 제 몸을 꾸밀 수 있을지언정 사교계에서 돈을 뿌릴 만한 액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친정 가문도 지방의 약소한 백작가에 불과하고요. 그러니 이상하다는 거예요. 갑자기 그만한 돈이 어디서 났을까요?”
멜리사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고 계실까?”
두 사람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샐리와 멜리사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내리깐 시선으로 보고 있는 여인은 샬롯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인사는?”
같은 직급을 가진 멜리사 백작 부인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샐리를 저격한 말이었다. 샐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백작 부인께 인사드립니다.”
“흐음.”
샬롯은 눈을 내리깔더니 샐리가 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멜리사를 훑어보더니 쿡 하고 웃었다.
“위즈더 부인, 어째 갈수록 풍만해지네요. 드레스가 들어가긴 해요?”
“뭐, 뭐라고요?”
모욕적인 말에 멜리사가 당황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샬롯의 독설은 잔인하게 이어졌다.
“이런 연회에 와서 수다 떨 시간에 산책이라도 좀 하세요. 명색이 귀부인인데 최소한의 관리는 해야죠.”
“……!”
아무리 성격이 활발하고 농담을 좋아하는 멜리사라도 외모에 관한 지적은 웃어넘기지 못했다.
멜리사는 눈을 부릅뜨고 샬롯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샬롯은 그런 눈빛에 기가 죽을 여인이 아니었다.
‘네가 어쩔 건데?’라는 시선으로 피식 웃는 샬롯에게는 무례를 저지른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미안함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 모습에 멜리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미친 여자는 상대하는 게 아니야.’
원래부터 만만한 여인들에게는 제멋대로 굴던 샬롯이었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괜히 말이 길어져 봤자 더더욱 속을 긁어 댈 것을 알았기에 상대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자리에 일어선 멜리사에게 샐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부인.”
“무례한 말에 상처받을 만큼 약하지 않으니 걱정 말아요. 다만 악취가 너무 고약하니 자리를 피해야겠네요.”
샐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멜리사와 함께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어딜 도망가?”
뱀처럼 스산한 샬롯의 목소리였다.
“너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나랑 말 한마디는 나누고 가야지?”
“…….”
샐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샬롯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멜리사가 손을 이끌었지만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멜리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저 멀리 사라졌다.
연회장의 구석진 테이블에는 샬롯과 샐리만 남았다.
샬롯은 샐리에게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팔을 꼬고는 오만하게 말했다.
“우리 요즘 자주 만나네. 그렇지?”
샬롯의 말대로 최근 두 사람은 연회장에서 자주 마주쳤다.
샬롯은 연회장에서 샐리와 마주칠 때마다 조용히 지나가지 않았다. 샐리와 친분이 두터워 보이는 여인을 골라 시비를 걸었다.
꼭 지금처럼.
차라리 폭력을 썼다거나 눈에 띄는 횡포를 부렸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말로 살살 여인들의 속을 긁어 대니 대항할 방도가 없었다.
대부분의 귀족 여인들은 그녀와 똑같이 품위를 버리고 저속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표적이 된 여인들은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어두워진 얼굴로 샐리의 곁을 떠나곤 했다.
샐리는 내리깐 눈으로 샬롯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제게 하세요. 괜한 분들을 건드리지 마시고요.”
“어머. 너를 잘못 건드렸다간 에스테반 공작한테 무슨 짓을 당하려고.”
샬롯은 영악했다. 차마 자신에게 보복할 능력이 없는 가문의 여인들만 건드렸다. 샬롯은 표정이 사라진 샐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왜? 쪼르르 달려가 내가 다른 여인들에게 말 몇 마디 한 걸 이르려고?”
대답하지 않는 샐리를 향해 샬롯은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어디 한번 그래 봐. 그 순간 네가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부인들을 찾아가 머리채를 잡고 날뛸 테니까. 다 늙은 골든리아? 공주병에 걸린 로즈마리? 못생긴 리오넬? 하나같이 품위를 입에 달고 사는 여자들이라 그런 일을 당하면 부끄러워 다시는 사교계에 얼굴도 못 내밀걸.”
그녀의 협박은 아주 치졸하고 유치했다. 그래서 더더욱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머리채를 잡고 날뛴다는 말을 여타의 범죄와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샬롯은 지금 자신의 무기를 아주 잘 이용하는 셈이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잃을 품위 따위는 없었다. 황제에게 돈을 받아쓰는 애인이었으니 에스테반 공작의 힘에 의해 흔들릴 가문의 사업 따위도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약점은 아들인 존 황자였으나 감히 황자를 건드릴 수 있는 이도 없었다. 그러니 어떤 의미로 그녀는 무적이었다.
샬롯의 협박은 이어졌다.
“계속 널 쫓아다닐 거야. 너랑 친하게 이야기하는 여인들이 보이면 오늘처럼 짓밟아 줄 거야.”
“…….”
“그게 싫으면 더 이상 사교계에 그 잘난 얼굴 들이밀지 말든가.”
샬롯은 험악한 눈빛으로 샐리를 노려보았다.
* * *
그날 밤. 연회에서 돌아온 샐리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향긋한 차향을 맡으니 마음이 점차 차분해졌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는데 아니었어. 역시 나를 노리고 연회에 온 것이었구나.’
오늘 샬롯과의 대화로 그녀의 목표는 명확해졌다. 바로 샐리였다.
‘왜? 테오도라 황녀 저하 때문에?’
그러나 그 이유 때문이라면 예전부터 이랬어야 했다. 이전까지 샬롯은 딱히 샐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샬롯에게 샐리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분노는 오로지 테오도라를 향했기 때문이다.
‘역시 엘리제 때문인가?’
샬롯이 정기 연회에서 엘리제와 친분이 있음을 밝힌 이후 그녀가 다시 엘리제와의 사이를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엘리제가 주최하는 티파티에 참석하는 일도 없었고, 두 사람이 서로 왕래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샐리의 눈에 그런 샬롯의 행동은 엘리제와의 사이를 감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샬롯은 레이첼과는 달라.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조심성 있는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닐 텐데.’
그녀는 포악하고 단순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엘리제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행동을 조심한다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때 샐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샬롯이 날 쫓아다니며 행패를 부린 시점과 엘리제의 연회가 달라진 시점이 너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아?’
샐리는 자신이 한 생각에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샬롯이 엘리제에게 돈을 주었다고?’
아무리 샬롯이 엘리제에게 호감이 있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샬롯은 절대 남에게 자신의 것을 줄 성품이 아니었다. 그것이 돈이라면 더더욱.
그러면 도대체 엘리제에게 자금을 대 준 사람은 누구일까.
이것은 샐리에게 꽤 중요한 문제였다. 엘리제를 도운 돈의 출처가 어딘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달그락.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샐리가 눈을 크게 떴다.
카시스가 찻주전자를 들고 그녀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샐리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들어온 것이 한 참 전이었다. 대충 눈인사는 했던 것 같은데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 그를 잊고 있었다.
“차, 더 마실 거지?”
샐리의 놀란 얼굴과 달리 카시스는 태연하게 물었다.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스는 샐리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익힌 것이 분명한 그의 손짓은 완벽했다. 쪼르르 물이 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채워지는 찻잔을 보고 나서야 샐리는 그가 내내 차를 따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도 아니고 자동으로 찻잔이 채워질 리 없지.’
샐리는 조금 멋쩍은 얼굴로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따스한 레몬차는 무척 달았다.
“꿀을 더 넣으셨어요?”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할 것이 많아 보여서.”
고민하는 것이 있으면 달콤한 것을 먹는 샐리의 버릇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를 빤히 바라보던 샐리가 말했다.
“저하, 마님께 엄청난 자금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혹시 짚이는 곳이 있으세요?”
그 말에 카시스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에스테반가에서 엘리제에게 매달 일정하게 지급되는 돈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자금이라고 할 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엘리제의 친정 가문은 그녀에게 돈을 보낼 만큼 여유가 있는 곳이 아니야.”
그것은 샐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것 같은 엘리제의 출신은 의외로 동부의 한 작은 백작가였다.
그래서 처음 엘리제가 에스테반 공작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여자의 가문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며 말이 많았다고 했다. 눈부신 미모의 엘리제가 나타난 순간 그 말은 쏙 들어갔지만.
“딸이 간절히 부탁한다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지 않았을까요?”
백작가가 마음먹는다면 큰돈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저택이나 땅을 저당 잡혀 돈을 빌리는 방법도 있었다.
카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백작 부부가 그녀에게 그런 정성을 쏟을 리 없으니까.”
“무슨 의미세요?”
카시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샐리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그녀는 프로이텐 백작 부부의 친딸이 아니야.”
“……!”
“피도 이어지지 않은 딸에게 그렇게까지 할 만큼 백작은 정이 많은 자가 아니지.”
샐리는 눈을 깜빡였다. 생각도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럼 마님의 친부모가 누구인데요?”
그 말에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글쎄.”
짧아진 말에 샐리는 그가 더 이상 엘리제에 관한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상의 것은 샐리가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쨌든 친부모도 자금을 대줄 만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구나.’
샐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알겠어요. 저하께서도 아는 바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럼 제가 마님의 자금원에 대해 조사를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필요한 건 없나.”
“믿을 만한 정보원을 소개해주세요.”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는 언제나처럼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샐리는 그가 편했다. 차를 홀짝이던 샐리가 중요한 것을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참, 그리고.”
그리고?
카시스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샐리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콤함이 부족해요. 꿀은 한 스푼 더 타 주시는 게 좋겠어요.”
카시스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레몬티 한 잔에 꿀은 네 스푼. 그에게는 잊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사실처럼 느껴졌다.
* * *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티파티가 열렸다. 열 명의 정원을 지켜 초대한 모습은 지금까지와 같았지만 티파티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이름 높은 장인이 만든 찻잔. 은과 금으로 장식된 다기는 반짝였고, 테이블에는 새하얀 글라디올러스(백합)가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일류 파티시에가 만든 형형색색의 디저트와 이국의 값비싼 과일이 놓여 있었다.
엘리제의 안목은 수준급이었다. 그저 비싼 물건들을 어울리지 않게 채워 놓은 천박한 부유함과는 그 격이 달랐다.
제국 최고의 것들을 절묘하게 모아 놓은 공간은 그 자체로 예술품 같았다.
여인들은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수없이 감탄을 내뱉었다. 어느 곳 하나 눈길을 사로잡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 찻잔, 그랑벨라가 만든 작품이네요.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문양을 새겼을까요.”
“꽃은 또 어떻게요. 이 계절에 이렇게 풍성하고 아름다운 글라디올러스는 처음 봐요.”
테이블의 맨 앞자리에 앉은 엘리제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엘리제의 손짓과 동시에 하녀들이 여인들의 곁에 다가왔다. 하녀들은 우아한 손놀림으로 여인들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엘리제가 여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스티산 홍차랍니다. 부인들을 위해 준비해 보았어요.”
그 말에 여인들이 눈을 크게 떴다. 차라고 다 같은 차가 아니었다. 차의 종류와 상태에 따라 등급이 천차만별이었다.
그중에서 에스티산 홍차는 가장 최고급으로 분류되는 차였다. 구하기도 무척 힘들어 찻잎의 가격이 금덩이와 같다는 말까지 돌았다.
그래서 아무리 부유한 귀부인이라도 이런 식으로 많은 이들에게 이 차를 내놓는 경우는 없었다. 보통은 혼자 즐기거나, 아주 친밀한 사람과 함께하는 티타임에만 등장하는 차였다.
“역시. 이름값을 하는군요.”
찻잔을 들이킨 마르시아 후작 부인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감미로운 향과 독특한 끝 맛이 보통의 홍차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렇죠?”
그녀의 말에 옆에 앉아 있는 오르카 후작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말이지 훌륭한 맛이에요.”
사실 오르카는 차 맛에 둔감해 이 차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잘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마시고 있는 차가 자신이 평소에 마시는 차보다 수십 배는 비싼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만큼 맛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명품은 취향을 뛰어넘어 사람을 현혹시키는 법이다. 엘리제는 그 모습을 흡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르카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요즘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티파티는 정말 놀랍네요. 이전과는 전혀 달라요.”
이전의 티파티도 부족한 파티는 아니었다. 아름다운 주최자와 이름 높은 여인들이 모여 품위가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악단과 찻잎은 조금도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너무 검소하셨던 거죠. 사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위치라면 이 정도 연회는 열어야 했어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공작가의 안주인인걸요.”
마르시아의 말에 여인들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수줍게 웃었다. 그런 엘리제를 향해 오르카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스팅스 백작 부인이 자기도 티파티에 초대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는 게 정말인가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엘리제의 대답에 여인들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웅성거렸다.
“몸이 아프다며 티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땐 언제고 지금 와서 오고 싶다니 속이 훤히 보이네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티파티가 대단하다고 소문이 나니 새삼 호기심이 동한 거겠죠.”
“정말 부끄러움도 모르는 분이예요.”
한마디씩 스팅스 백작 부인을 비난한 여인들은 엘리제에게 말했다.
“옛정에 마음이 약해져 초대장을 보내 주시면 절대 안 돼요. 스팅스 백작 부인은 우리를 배신한 사람이니까요.”
우리. 그 말에 엘리제는 속으로 조소했다.
눈앞의 여인들 중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그녀들은 앞서 엘리제의 품을 떠난 여인들보다 조금 신중했던 것뿐이다.
분명 속으로는 엘리제를 떠나야 할지 말지에 대하여 수많은 저울질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엘리제는 ‘우리’라는 말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물론 그것을 표낼 만큼 바보는 아니었기에 엘리제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제게는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 가장 소중한 걸요. 앞으로도 우리 서로를 아끼며 친하게 지내도록 해요.”
여인들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사교계에서 엘리제의 위치는 급격한 하락세를 겪었다. 샐리와 테오도라의 세가 치고 올라온 것도 모자라 레이첼 황녀와 사이가 벌어진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다.
이러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사교계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며 극단적인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엘리제는 다시 일어섰다. 황금으로 치장한 최고의 연회와 함께.
많은 여인들이 이전보다 열광적으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티파티에 초대받고 싶어 했고, 초대장을 받은 이들을 부러워했다. 그것은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의 자긍심이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연회를 자주 열어 주세요. 누구도 감히 에스테반 공작 부인에게 견줄 생각을 하지 못하게요.”
“맞아요. 이런 연회, 에스테반 부인이 아니면 누가 열 수 있겠어요.”
들뜬 분위기 속에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인들,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그 순간 화기애애했던 연회장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말을 한 이는 달리아 후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모인 여인들 중에서 가장 연상으로 중년에 접어든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눈썹을 내리며 심각한 얼굴로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레이첼 황녀 저하께서 아직도 병환으로 누워 계신 상태잖아요. 그런데 이런 연회를 계속 열자고 하다니요.”
달리아 후작 부인은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여인들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그 말은 여인들이 내심 신경 쓰였던 부분을 콕 찌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연회의 주최자이자 레이첼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엘리제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엘리제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마르시아가 먼저 날 선 목소리를 냈다.
“달리아 후작 부인, 참으로 이상한 말을 하시네요. 레이첼 황녀 저하의 병이 낫지 않아 저도 마음이 무척 아파요. 그렇다고 황녀 저하께서 완쾌하실 때까지 모든 사교계 활동을 끊으라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 우리만이라도 자중하자는 거예요. 다른 여인들은 몰라도 우리는 레이첼 황녀 저하와 돈독한 사이잖아요.”
“그게 그 말이잖아요.”
공격적인 말투에 달리아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여인들은 저마다 그녀에게 눈을 흘기며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귀족 여인에게 사교계는 남성의 일처럼 중요한 업무예요. 그런 중요한 일을 하지 말라 하니 정말 황당하네요.”
매서운 여인들의 반응에 달리아는 당황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여인들을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화려한 연회에 취한 그녀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점을 환기시킨 것뿐이었다.
모두를 위해 의견을 말한 것뿐인데 저런 식으로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달리아는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자애로운 엘리제는 자신을 도와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러나 그녀는 엘리제의 눈빛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늘 이런 일이 생기면 나서서 고운 목소리로 여인들을 중재하던 엘리제는 어딘가 스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엘리제는 달리아를 향해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부인들께서 마음이 상하신 모양이에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달리아 후작 부인?”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였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이 자리에서 사라지라는 말이었다.
달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엘리제의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실수가 아니었다.
엘리제의 야박한 말에도 달리아를 편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인들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리아는 그 순간 자신은 더 이상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시간 몸담아 왔던 모임에서 내쳐졌다는 사실도.
달리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달리아가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를 하는 순간까지 누구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
엘리제는 모두가 돌아간 연회장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 연회장을 바라보는 엘리제의 얼굴엔 아름다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여인들 앞에서 지었던 가면 같은 미소와는 전혀 다른, 황홀함마저 느껴지는 미소였다.
엘리제는 한낮에 있었던 연회를 떠올렸다. 사람도, 음악도, 차도, 제국의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최고의 것으로 가득 채웠다.
엘리제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꿈꾸어 왔던,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연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돈의 힘은 강했다. 여인들은 이전보다 노골적으로 엘리제에게 다가왔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엘리제는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 달리아 후작 부인도 일갈에 내쫓아 버렸다.
돈과 지위,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엘리제는 그런 여인을 위로하려 애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부족한 것이 채워지니 좋구나.”
엘리제는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래대로라면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되자마자 가져야 했던 것을 이제야 온전히 가지게 된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우습기도 했다. 그녀에게 부족했던 ‘부’를 채워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샬롯이었기 때문이다.
‘그 썩은 줄 같은 여자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이야.’
엘리제에게 섬뜩한 협박을 받은 샬롯이 겁에 질려 한 말이 시작이었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그 말에 엘리제는 어이가 없었다. 샬롯은 이미 오래전에 총애를 잃은 황제의 애인이었다. 게다가 친정은 한미한 자작 가문이었다.
제1황자의 친어머니란 이유로 황성에서 매달 어느 정도의 돈이 나오고,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고가의 선물을 보내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샬롯은 누가 보아도 돈을 운운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엘리제는 피식 웃었다.
—얼마를 줄 수 있는데요?
그 말이 샬롯의 자존심을 긁은 모양이었다. 샬롯은 자랑하듯 엘리제에게 자신이 가진 재산을 공개했다. 엘리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과는 달리 샬롯이 가진 재산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동산 같이 움직이기 힘든 재산이 아니라 바로바로 쓸 수 있는 현금이었다.
엘리제는 샬롯에게 돈을 받았다.
오만 골드. 최고급 드레스를 몇 벌이나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샬롯은 단순했다. 그걸로 끝날 줄 안 모양이었다.
꿀이 나오는 벌집을 발견했는데 그럴 리가 있나.
엘리제는 확실하게 샬롯의 약점을 잡았다. 샬롯의 계획을 도운 하녀들을 매수해 제 사람으로 만들었다. 언제든 자신의 말 한마디면 하녀들은 샬롯의 악행을 증언해 줄 것이다.
그 말에 샬롯은 소리를 질렀다.
—고작 하녀들의 말 따위 누가 믿어 준다고? 내가 안 했다고 말하면 그만이야!
—하녀들의 말은 무시당하겠지만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말이라면 어떨까요.
엘리제의 말에 샬롯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게 보여 준 진짜 모습이 어떻든 엘리제는 지금도 사교계에서 가장 자애롭다고 평가받는 여인이었다.
그에 반해 샬롯에 대한 평가는 형편없었다. 누구의 말을 믿어 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엘리제는 샬롯의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도 그토록 입지가 불안한데 친어머니가 죄인이 되면 존 황자 저하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황제 폐하께서는 그렇게 모질게 대하지 않으시겠지만 황후 폐하는 아닐 거예요. 황후 폐하께서 이를 기회로 존 황자를 황자의 자리에서 쫓아내실지도 모르죠.
그 말에 샬롯은 손바닥 안에 갇힌 벌레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존은 샬롯에게 이따위 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 후 샬롯이 가진 돈은 엘리제의 것이 되었다.
‘이 얼마나 쓸모 있는 줄인지.’
썩은 줄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은 누구보다 많은 것을 엘리제에게 주었다. 샬롯을 찾아간 것만큼 잘한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님.”
옆에 서 있던 마사의 목소리였다. 엘리제는 감았던 눈을 떴다. 마사가 말을 이었다.
“샬롯 백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엘리제는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으로 모시렴.”
샬롯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엘리제가 있는 정원에 들어섰다. 모든 것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기에 낮에 있었던 연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샬롯도 사치품에는 일가견이 있었기에 연회장 곳곳이 얼마나 값비싼 것들로 꾸며진 것인지 한눈에 알아챘다.
샬롯은 엘리제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 망토를 벗었다. 험악하게 인상을 쓴 얼굴이 드러났다.
“남의 돈을 뜯어가 이런 연회를 여니까 좋니?”
샬롯은 이제 정중한 말투 따윈 쓰지도 않았다. 서로 밑바닥까지 보인 차에 품위 따위 지킬 이유가 없었다.
엘리제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요.”
“웃겨.”
샬롯은 거칠게 말하며 차를 벌컥 들이켰다.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샬롯은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로 던졌다.
쿵. 묵직한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큼직한 주머니 안에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이 들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샬롯은 엘리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그 말에 엘리제는 부드럽게 두 눈을 휘며 웃었다.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 계집이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한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고.”
그 말에 샬롯은 입술을 짓이겼다. 엘리제가 건 조건은 바로 샐리를 사교계에서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샬롯은 샐리를 쫓아다니며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샐리 본인을 짓밟기에는 에스테반 공작의 분노가 신경 쓰여 대신 주변 사람을 사정없이 짓밟기 시작했다. 저보다 권력 높은 자를 상대할 때 샬롯이 이용했던 방법이었다.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면 사교계 생활이 엉망이 되어 버린 여인은 질린 얼굴로 사교계를 떠나곤 했다.
그러나 샐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쉽게 반응하지 않았다. 분노나 수치심은커녕 내리깐 금빛 눈동자로 이걸 어떻게 치워 버릴지 골똘히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년이 얼마나 독한지 아무리 친한 여자들을 건드려도 꼼짝도 안 한단 말이야! 주변에 있는 여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렇군요.”
엘리제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어차피 엘리제는 샬롯이 샐리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고작 그런 수로 샐리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면 자신이 여기까지 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샬롯을 조금이라도 더 써먹기 위해 내뱉은 말일 뿐이었다.
샬롯은 지금처럼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 주면 그만이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눈부신 황금을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그녀는 제 몫을 해낸 셈이다.
샬롯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엘리제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테이블의 모든 것을 내던질 듯한 얼굴이었다.
‘그건 좀 곤란하지.’
돈이야 문제가 되지 않지만 워낙에 귀한 물건들이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장 며칠 내로 또 연회를 열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사양이었다.
‘멍청한 여자를 조종하려면 채찍과 당근이 적절히 필요하기도 하고.’
채찍은 실컷 주었으니 이번엔 당근을 주기로 했다.
“그 시녀에게 선물을 하나 보냈어요.”
시녀라는 말에 샬롯의 눈이 번뜩였다. 자신의 아들인 존 황자와 몸을 섞어 임신을 한 여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선물이라니?”
“큰 선물은 아니에요. 곱게 핀 꽃을 하나 선물했을 뿐이에요. 부인께서 주신 약을 발라 보냈답니다.”
“……!”
그 말에 샬롯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샬롯은 약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것을 안 엘리제는 그녀에게 몇 개의 약을 받았다.
그중 한 약은 무향무취의 독이었다. 지속 기간도 무척 길어 꽃 같은 곳에 발라 두면 바람과 함께 약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그런 식으로 퍼진 독성은 너무나 미약하여 보통의 사람에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매사 조심해야 하는 임산부라면 어떨까.
샬롯이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년, 경계심이 심해서 아무 선물이나 받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지금껏 샬롯은 그녀에게 어떤 짓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제는 조금도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선물이라면 다르죠. 큰 영광이라며 침대 맡에 두고 잘 키우겠다는 답장까지 보내왔더군요.”
엘리제를 선망 어린 눈빛으로 보는 이는 귀족 여인들만이 아니다. 시녀는 그 화분의 꽃이 어떤 꽃인지도 모르고 다시없을 귀한 선물인 것처럼 가까이 두고 지낼 것이다.
엘리제는 친절히 한 번 더 말을 덧붙여 주었다.
“내 말을 잘 들으면 그녀에게 한 번 더 선물을 보내 줄게요. 이번엔 그녀의 입에 들어갈 만한 아주 달콤한 디저트로.”
물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독을 발라 준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샬롯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껏 그런 본성을 어떻게 숨기고 살았어?”
엘리제는 그 말을 무시했다. 저런 말에 굳이 대답해 줄 만큼 그녀는 친절하지 않았다.
“내가 이 말을 한 의미를 알겠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요. 한배를 탄 사이기도 하고요. 부인이 테오도라를 치워 버려야 하는 것처럼 나는 샐리를 치워 버려야 해요.”
엘리제는 눈을 내리깔고 샬롯을 노려보았다.
“그러니 돈을 가져오세요.”
엘리제의 스산한 눈빛 아래 청아한 목소리가 섬뜩하게 흘러 나왔다.
샬롯은 넋 나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협박당하는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어이가 없지만, 이럴 때의 엘리제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자애로운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가면을 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천사 같은 고운 이목구비 위로 차가운 눈빛을 내리깐 모습은 마치 타락한 천사 같았다.
조금 후 샬롯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샬롯을 향해 엘리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샬롯은 찻잔을 매만지다가 아이처럼 물었다.
“그럼 이제 레이첼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야?”
앞으로는 자신과 함께 갈 것이냐는 뉘앙스였다. 엘리제는 설핏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샬롯은 멍청한 지능과 사악한 성품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짓누르는 자에게 애정을 느끼는 고약한 취향까지 있는 것 같았다.
“글쎄요.”
짧은 대답에 샬롯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직 엘리제는 온전히 제 사람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년이 뭐라고!’
샬롯은 질투하는 어린애처럼 화가 난 얼굴로 레이첼에 대한 저주의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평생 쓰러져 있어야 해, 그년은!”
엘리제는 샬롯이 그런 말을 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우아한 손길로 향기로운 차를 들이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