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28)

15. 왕자의 아내

황후가 복귀하자마자 황성에 또 한 번 큰 사건이 터졌다. 바로 제1황자인 존이 황성의 한 시녀와 깊은 사이였다는 것을 들킨 일이었다.

조금 이른 나이이긴 했지만 열여섯의 사내가 여인과 밤을 보낸 것은 아주 큰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녀가 한 말이 문제였다.

—황자님의 아기를 가졌어요.

그 말에 황성은 물론 온 사교계가 난리가 났다. 존은 황태자가 될지도 모르는 제국의 제1황자였다. 그런 그가 약혼녀도 아닌 시녀와 밤을 보내고 아기까지 가지다니.

그건 황실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도 모자라 황자의 자리를 우습게 여긴 행동이었다.

황제는 크게 분노했다. 존을 지지했던 세력마저 크게 실망했다.

샬롯은 어떻게든 황제와 그들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론은 좋지 않았다. 아마 이 일로 존은 지지 세력을 크게 잃을 것이다.

“샬롯 부인이 큰일을 해 주는군요.”

샐리의 장난스러운 말에 테오도라가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늘 내게 많은 것을 해 주지.”

그 말은 진심이었다. 샬롯이 찻잔에 독을 탔기에 테오도라는 알스로 유학을 가 황제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그녀가 자신만큼 바보 같은 아들을 낳아 주었다는 것이다.

샐리는 차를 마시며 물었다.

“생각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황후가 돌아오고, 제1황자인 존의 여론이 좋지 않았다. 이때야말로 테오도라가 나설 기회였다.

이럴 때 테오도라가 제 능력을 보여 준다면 많은 이들이 그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바르샤 왕국에 대해 알고 있나?”

“조금은요.”

뜨거운 태양과 사막의 나라, 바르샤. 워낙에 폐쇄적인 나라라 제국과 정식 교역을 하지 않았음에도 제국에서 바르샤산 물건은 무척 인기가 좋았다.

질 좋은 향유와 기름, 섬세하게 수놓은 자수는 암암리에 건너와 엄청난 금액으로 거래되곤 했다.

“저도 바르샤산 오일을 사용하고 있어요. 향이 정말 좋답니다. 정식으로 수입되어 오면 훨씬 구하기가 쉬울 텐데 아쉬울 따름이에요.”

“그리고 또 무엇을 알지?”

“음. 바르샤 사람들은 아주 열성적으로 신을 섬긴다는 것이요. 집집마다 자신이 믿는 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하던걸요. 얼마나 신앙심이 강한지 사내들은 처음 만난 여인에게 청혼을 하는 경우도 많데요. 한눈에 반한 여인은 신이 맺어 주신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한다는군요.”

“별걸 다 알고 있군.”

“여인들의 수다를 우습게보면 안 되어요. 도서관만큼 많은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지식의 장인걸요.”

그 귀여운 대답에 테오도라는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군. 하지만 그 대단한 지식의 장에 아직 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겠지. 바로 바르샤 왕국의 열세 번째 왕자인 카샴 왕자가 제국인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소식 말이야.”

툭 던지듯 내뱉은 테오도라의 말에 샐리의 눈이 커졌다.

바르샤 왕국의 사람은 좀처럼 나라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고, 외국인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바르샤인과 제국인이 결혼 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거의 없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평민끼리도 그러한데 제국인이 바르샤의 왕족과 결혼하다니 엄청난 사건이었다.

“세상에. 그런 엄청난 일이 어째서 알려지지 않았죠?”

“바르샤의 첩자에게서 들어온 극비 정보니까. 바르샤 내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 많지 않다고 해. 왕자가 그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 하거든.”

그 말에 샐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아내의 정체를 숨기려는 걸까요?”

“글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왕자의 아내가 외국인이면 자국민들의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을까 봐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고, 괜한 안줏거리가 되는 것이 싫어 그러는 것일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샐리가 아, 하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우리 제국에게 꽤 좋은 기회가 왔다는 거야.”

오랫동안 제국은 바르샤와 정식 교역을 맺기를 원했다. 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약재부터 귀족들이 선호하는 사치품까지 바르샤에는 제국이 눈독 들일 만한 매력적인 물건들이 많았다.

그러나 바르샤는 쉽게 그 문을 개방해 주지 않았다. 현재 제국에 들어와 있는 바르샤 물건들은 모두 상인에게 웃돈을 주어 힘들게 구해 온 물건들이었다.

그런 바르샤의 왕실에 제국의 여인이 입성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그녀를 연결점으로 삼아 바르샤 왕실과 긴밀한 인연을 맺는다면 두 나라의 교역을 트는 일도 가능했다.

“아바마마께서 왕자의 아내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잘되진 않을 거야.”

“어째서죠?”

“감이라고 해 두지.”

테오도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이 아바마마의 골칫덩어리가 될 때가 바로 내가 나설 기회가 될 거야.”

그 말을 하는 테오도라는 빛이 났다. 숲속에서 말을 타고 달릴 때와도 연회장에서 드레스를 입고 웃었던 모습과도 전혀 다른 반짝거림이었다.

* * *

테오도라가 예견한 일은 며칠 후에 일어났다. 황성에 황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여인을 만나지도 못하고 되돌아왔단 말이오!”

“요, 용서하시옵소서.”

황제의 명을 받고 은밀하게 바르샤로 향했던 대신은 고개를 한껏 조아렸다. 그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다급히 말을 이었다.

“카샴 왕자께서 직접 거절하셨습니다. 아내에게 이런 물건은 필요 없으니 가지고 돌아가라고요. 그럼 왕자님의 아내가 된 분께 인사라도 드릴 수 없냐고 여쭈어 보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이마를 감싸 쥐고는 대신의 앞에 놓인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황금의 조각상, 아름다운 보석들이 담긴 상아 상자, 하나같이 눈이 돌아갈 만큼 귀한 것들이었다. 그것도 제국 황제가 보냈다는 인장이 찍힌.

그러나 그것들은 가야 할 이에게 가지도 못하고 모두 되돌아와 버렸다.

“고작 사막 나라의 열세 번째 왕자 따위가!”

황제는 분노한 얼굴로 이를 으득거렸다. 그러나 정작 왕자는 황제의 분노를 조금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너무나 먼 바르샤에 있었으니까.

‘하아. 빌어먹을 바르샤!’

황제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쳐들어가 바르샤 왕의 목에 칼을 겨누고 강제로 바르샤의 문을 열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의 시대. 제국민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힘이 아니라 머리를 써 바르샤의 문을 열어야 한다.

황제는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감쌌다. 황제는 무인이었다. 이런 섬세한 정치적인 영역은 정말이지 쥐약이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후가 입을 열었다.

“테오도라에게 한번 그 일을 맡겨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황제가 조금 놀란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테오도라가 요즘 제 일을 돕고 있습니다. 따로 알려 주지 않아도 열을 알더군요. 영특한 아이이니 분명 좋은 수가 있을 겁니다.”

“테오도라의 총명함이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건 외교의 영역이오. 이 어려운 걸 그 아이가 해낼 수 있겠소?”

“그거야 멀리 봤을 때의 이야기지요. 어디까지나 첫 시작은 왕자의 부인이라는 여인과 인연을 맺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같은 성별인 테오도라가 오히려 그 일에 적합할지도 모릅니다.”

꽤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테오도라를 불렀다. 대강의 상황을 설명한 후 황제가 물었다.

“네가 한번 이 일을 맡아 보겠느냐? 멀리 갈 것도 없다. 그저 왕자의 부인이라는 여인과 인연의 물꼬를 틀면 된다. 그 후에는 나와 외교대신들이 일을 진행할 것이다.”

“예. 해 보겠습니다.”

테오도라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테오도라는 단순히 여인과 만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인을 다리 삼아 바르샤 왕자와 만나고, 그 왕자를 설득하여 바르샤 왕과 접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테오도라의 이름으로 제국과 바르샤와의 정식 교역을 따내는 것. 그것이 그녀의 큰 그림이었다.

* * *

테오도라는 함께 갈 수행원으로 샐리를 지목했다. 샐리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뜨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정치나 외교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해요. 저를 데려가도 별 이득이 없을 거예요.”

제아무리 제국 사교계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하나 샐리는 고작 글을 깨우친 것이 전부인 밑바닥 출신의 여인이었다.

테오도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사교계의 여인들과 친분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라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이 일은 너의 힘이 꼭 필요한 일이야. 이 일의 요점은 여인과 친분을 쌓는 거니까. 그 일에 그대보다 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지?”

그러니까 꼭 같이 가야 한다는 테오도라의 열성적인 설득에 결국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샐리는 자기 마음대로 어딜 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샐리는 카시스와의 계약에 묶여 있는 상황이었고, 그녀의 운신에 대한 결정권은 카시스가 쥐고 있었다.

이 일은 처음에 이야기했던 그의 총애 받는 애첩이 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샐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와 함께 바르샤를 다녀와도 될까요? 2주 정도로 길게 걸리진 않을 거예요.”

“…….”

그 말에 책에서 시선을 뗀 카시스가 샐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탐탁지 않음을 눈치챈 샐리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황녀 저하께서 제 힘이 필요한 일이 있다고 하셔서요. 황녀 저하를 조금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어요.”

카시스는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 그를 설득할 이유가 부족하단 말이었다. 샐리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를 도와 조금이라도 공을 세우면 사교계에서 제 입지가 오르는 데도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럼 마님의 입지도 더 줄어들 테고요.”

“그리고?”

“바르샤에서 겪고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저하께 말해 드릴 수 있겠죠. 아시다시피 바르샤는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세 번이나 같은 말이 계속되자 샐리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래서 샐리는 새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가고 싶어요! 전 이 제국을 떠나 본 적이 없는걸요! 사막도 직접 눈으로 보고 싶고, 이국의 음식도 먹어 보고 싶고, 그렇게 예쁘다는 바르샤의 드레스도 입어 보고 싶다고요.”

“그 이유가 가장 마음에 드는군.”

“……진심이세요?”

샐리가 황당하단 얼굴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흠, 하고 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해.”

그 말에 삐친 고양이처럼 가늘어진 샐리의 눈이 커졌다. 샐리는 아이처럼 두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환하게 웃은 샐리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나와 떨어진다는 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가 보군.’

카시스는 저도 모르게 든 유치한 생각에 흠칫했다.

다 큰 성인이니 당연하지. 그녀 말대로 고작 2주가 아닌가. 그런데 왜 자꾸 입술이 튀어나오는 것인지.

카시스는 그녀에게 들킬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음 날부터 샐리는 무척 바빴다. 당장 삼 일 후가 출발이니 준비할 시간이 무척 촉박했다. 일단은 짐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먼 길을 가야 하니 짐이 너무 많으면 힘들어. 그러니 최대한 짐은 적게 챙길 거야.”

“알겠습니다.”

샐리의 짐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기로 한 데이지가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드레스는 어떻게 할까요?”

“가벼운 실내용 드레스로 한 벌만 챙겨 넣으렴.”

바르샤는 더운 나라였다. 아무리 시원한 여름 드레스를 챙겨 간다고 해도 제국의 드레스로는 버티기 힘들 게 분명하다.

‘그리고 기껏 바르샤까지 간거니 바르샤의 드레스를 입어야지.’

샐리는 바르샤에서 옷을 구입해 입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드레스는 많이 챙겨 갈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이 드레스는 챙겨 가시는 게 어때요?”

데이지가 아쉬운 얼굴로 드레스 한 벌을 손에 들었다. 모슬린 원단으로 만든 여름 드레스는 어느 드레스 숍에서 올 여름에 입어 달라고 보내온 것이다.

“무척 예쁘실 거예요.”

“……그럼 챙겨 갈까?”

“네! 그러세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파이어 귀걸이 세트는 꼭 챙겨 가셔야 해요. 시원한 색상이 더운 날씨에는 딱이잖아요.”

“루비 귀걸이가 더 뜨거운 사막과 잘 어울리지 않니?”

“그럼 둘 다 챙길까요?”

“그래.”

결국 짐 꾸리는 일을 모두 끝냈을 때는 커다란 가방이 열 개나 쌓여 있었다.

“……좀 많은 것 같지 않니?”

샐리의 말에 데이지도 반박하지 못했다. 보통의 귀족 여인이 여행할 때보다는 적었지만 그래도 역시 많은 양이었다.

“하지만 다 필요한 물건들인걸요. 아무리 고민해 봐도 두고 갈 수 있는 물건이 없어요.”

데이지의 진지한 목소리에 샐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결국 엄청난 고민 끝에 모자와 구두를 몇 개 빼 가방을 한 개 줄였다.

짐을 뺀 빈 가방에는 어느새 캬가 들어가 있었다. 제 집처럼 가방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캬를 보며 데이지가 풋 하고 웃었다.

“샐리 님과 함께 여행을 가고 싶나 봐요.”

그 말에 샐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안 돼.”

마음 같아선 함께 가고 싶었지만 혹시나 여행길에 캬를 잊어버리면 큰일이었다.

캬를 온전히 챙길 만한 여유가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샐리는 캬를 두고 가기로 했다.

“너는 집을 지키렴, 캬.”

그러나 캬는 고개를 휙 돌리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도 나오지 않으려고 해서 결국 샐리는 캬를 가방 안에 그대로 두고 소파 위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몇 권의 책들이 놓여 있었다. 카시스가 구해다 준 바르샤에 관련된 책이었다. 어느 정도 짐을 챙겼으니 남은 시간은 바르샤에 관한 공부를 할 셈이었다.

“캬릉.”

제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자 심심해진 모양인지 캬는 제 발로 가방에서 나와 샐리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샐리는 빙긋이 웃으며 캬를 쓰다듬으며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책에는 바르샤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 예절이나 종교적인 부분은 아주 중요해서 꼼꼼히 읽어 둘 생각이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샐리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저 사막의 아름다운 왕국인 줄 알았던 바르샤는 생각보다 다채롭고 재미있는 나라였다.

카시스가 방문을 열 때까지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 자신이 온 것도 모르고 책을 읽는 모습에 카시스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집중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금빛 눈동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가는 모습이 꼭 장난감을 쫒는 고양이 같기도 했다.

조금 후 샐리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을 머금은 샐리의 시선에 은빛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그제야 샐리는 책을 내리고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어머.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에.”

“오신지도 몰랐어요.”

카시스의 시선이 샐리의 손에 들린 책에 닿았다.

“책이 꽤 재미있나 보지?”

“네. 확실히 제국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네요.”

“그런가.”

그 말에 샐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읽은 것들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여행에 대한 설레는 마음이 그녀를 흥분시킨 듯했다.

“바르샤에서는 친밀한 사람의 귓불에 키스를 하는 문화가 있데요. ‘내 목소리를 들어주세요.’라는 의미라고 해요. 귀엽지 않아요?”

“……그거 이성에게도 적용되는 인사인가.”

“아마도요?”

“…….”

그 순간 카시스의 얼굴이 무척이나 스산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웬 남자가 샐리의 귓불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모습이 상상됐기 때문이다.

“별 끔찍한 인사가 다 있군.”

“네?”

“아니야.”

카시스는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생각했다.

‘에반에게 당장 귀걸이를 구해 오라고 해야겠군. 커다랗고 뾰족뾰족 가시가 돋아나는 아주 날카로운 귀걸이를. 그런 것을 차고 다니면 차마 귓가에 가까이 올 생각은 하지도 못하겠지.’

그 생각을 모르는 샐리가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바르샤에 살았더라면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저 귓가가 무척 예민하거든요.”

“그런가?”

이건 좀 흥미가 돋는 이야기였다. 카시스가 눈을 빛내자 샐리가 민망한 듯 한쪽 귀를 매만졌다.

“특히 오른쪽 귀가 쥐약이에요. 제 손은 괜찮은데 다른 사람 손이 닿으면…… 으!”

샐리가 새삼 그 느낌이 생각난 듯 바르르 몸을 떨었다.

“누군가의 손이 닿았었나 보지?”

“그거야…….”

‘당신이요.’라고 말할 뻔한 것을 겨우 막았다.

과거의 그가 샐리의 귓가를 깨물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비명을 내질렀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싶어 샐리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한데.’라며 카시스가 말을 하기 전에 샐리가 재빨리 말을 꺼냈다.

“신을 사랑하는 바르샤국 사람들은 신과 닮은 외모를 가진 사람을 최고로 친데요. 하인두라고 하는 신이 있는데 배가 불록 나오고 머리까지 벗겨지고 털이 가슴에 수북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 신을 섬기는 여인들은 그렇게 생긴 사내를 최고의 미남이라고 생각한대요. 덕분에 저자는 평생 받아 본 적 없는 열렬한 구애를 받았다고 적혀 있었어요. 그 때문에 바르샤에서 평생 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고요. 정말 재미있죠?”

너무 상세한 설명 덕분에 작가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에 그려졌다. 흉측한(?) 몰골에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 후 샐리의 바르샤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바르샤 사람들은 점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점성술사를 귀하게 대접한데요. 점성술사가 인연이 아니라고 하면 정해진 결혼을 파혼하는 일까지 있대요.”

뒤이어 생각났다는 듯 샐리가 말을 덧붙였다.

“바르샤는 결혼에 무척 자유로워서 다부다처제라고 해요. 한 명의 남자가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은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하네요. 바르샤의 최고 미녀로 손꼽히는 아샬라는 실제로 열 명의 남편을 가지고 있었대요.”

카시스는 기본적으로 그런 소소한 호기심이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딱히 관심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조잘거리는 샐리의 모습을 보는 것이 꽤 즐거워 턱을 괴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작 하루 새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군.”

“그럼요. 바르샤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 물어보세요.”

콧대를 살짝 들어 장난스럽게 말하는 샐리를 향해 카시스가 말했다.

“바르샤의 여인들은 모두 미인이라고 하던데 정말인가?”

“…….”

샐리는 굳은 얼굴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의 에스테반 공작이 저런 말을 하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한 카시스의 얼굴은 너무나 진지해 샐리는 기가 찼다.

하여간. 아무리 얼음 같은 남자도 남자라 이거지?

평온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말투가 새침하게 튀어 나갔다.

“세상 어느 곳에 모든 사람이 미인인 곳이 있겠어요? 누군가 지어 낸 이야기죠. 제가 아는 건 이것뿐이에요. 바르샤의 여인들은 골격이 작아 허리가 가늘다는 것과 진한 커피색 피부를 가졌다는 사실이요.”

“아하.”

“그렇게 궁금하면 저하께서 직접 가서 보시면 되잖아요.”

샐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능청스럽게 말을 받아치는 카시스가 얄미워 톡 쏘듯 쏘아 붙였다. 그 모습에 카시스가 설핏 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군. 나는 내일 수도를 떠나야 하거든.”

“네?”

갑작스러운 말에 샐리가 눈을 크게 떴다.

“영지에 급한 일이 생겨서 다녀와야 해.”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아무리 빨라도 3일은 걸릴 거야.”

샐리가 떠나는 날은 삼 일 후였다. 즉, 그가 아무리 빨리 돌아온다 해도 샐리가 떠난 후라는 것이다.

“네가 떠나는 날 배웅은 나가지 못할 것 같군.”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든 감정에 샐리는 당황스러웠다. 이 감정은 분명 아쉬움이었다. 그에 대한 선을 분명히 그은 것은 자신이었는데 어째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가당치 않은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며 샐리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전 괜찮아요. 누군가의 배웅이 필요한 나이도 아닌걸요.”

“……그런가.”

“그럼요.”

방긋이 웃는 샐리를 빤히 바라보던 카시스가 말했다.

“오늘 밤이 지나면 한동안 보지 못하겠군.”

“그러네요.”

그렇게 말하는 샐리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해 보여 카시스는 조금 씁쓸해졌다.

이전에도 그녀는 바르샤에 다녀오는 것은 겨우 2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려 2주였다.

아직 그녀는 떠나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가슴이 갑갑해 올 만큼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표현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마음을 표현하면 그녀는 다시 멀어질지도 모른다. 카시스는 더 이상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셈이었다.

다음 날 샐리가 일어나 별채를 나왔을 때 카시스는 이미 저택을 떠난 후였다. 에반의 말로는 동이 트기도 전에 떠났다고 했다.

‘그렇게 일찍 출발하는 거면 미리 알려 주면 좋았을 텐데.’

청명한 아침 햇빛 아래 샐리는 황망한 시선으로 한자리에 서 있었다. 갸앙? 하고 샐리의 품에 있던 캬가 귀를 쫑긋거렸다. 무슨 일이 있냐는 듯이.

“아무것도 아냐. 이만 들어가자.”

샐리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 * *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어느새 삼 일 밤이 지나고 바르샤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바르샤로 떠나는 것은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할 예정이야. 그렇게 하면 실패를 해도 타격이 없고 성과를 이룬다면 몇 배로 충격적인 소식이 될 테지.

테오도라의 말에 따라 샐리는 대외적으로는 나랏일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여행을 다녀온다고 말해 둔 터였다.

이 길이 단순한 여행이 될지, 성공적인 임무가 될지는 가 봐야 아는 일이었다.

이른 아침, 별채는 분주했다. 샐리의 여행길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마차에 탄 샐리는 창문 틈으로 별채의 2층 방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따라 나오려던 캬를 간식과 향수가 묻은 천으로 겨우 달래어 놓고 온 길이었다.

마차 바깥에 서 있는 에반을 향해 샐리가 말했다.

“캬를 잘 보살펴 주세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부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에반의 인사와 함께 이내 마차가 출발했다.

샐리가 향한 곳은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마리나 항구였다. 크고 작은 수많은 배들이 모여 있는 마리나 항구는 먼 길을 떠나는 많은 이들로 북적였다.

샐리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주목받아 보았자 좋을 것이 없는 여행길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심플한 진남색의 드레스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써 얼굴을 가렸다.

테오도라를 만나기로 한 복작이는 카페 앞에 들어서자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샐리.”

고개를 올린 샐리는 눈을 크게 떴다. 평소에도 종종 드레스는 불편하다고 이야기하던 테오도라는 아예 드레스를 벗어 버렸다.

그녀는 흰색 셔츠에 긴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올려 묶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얼핏 보면 항구에서 일하는 곱상한 소년 같았다.

눈을 깜빡이는 샐리를 향해 테오도라가 웃으며 말했다.

“모처럼 비공식 일정으로 가는 길이잖아. 보는 눈도 없으니 이참에 입고 싶은 대로 입었어. 어때?”

그 말에 샐리는 살포시 웃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넉살 좋게 대답하는 테오도라를 향해 샐리가 물었다.

“그런데 혼자 움직이고 계신 건 아니시죠?”

테오도라는 제국의 황녀였다. 그녀의 주변에는 늘 무장을 한 호위 기사들이 있었다.

아무리 비밀리에 떠나는 여행이라고 해도 타국으로 떠나는 여행길이니 더더욱 안전을 유의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이지. 호위 기사들은 위장하여 주변에 대기한 상태니 안심해.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마법처럼 나타날 거야.”

그 말에 샐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세하게 살펴보니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숨어 있던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테오도라의 곁을 지키던 기사들이었다.

주변에 잠복한 그들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허리에 검만 둘렀을 뿐 기사라기보다는 그저 힘 좀 쓰는 평범한 사내들처럼 보였다.

“변장한 모습이 무척 자연스럽네요.”

“내 기사들이잖나. 한두 번 해 본 잠행이 아니지.”

그 말에 샐리는 쿡쿡 웃었다. 과연 테오도라다운 대답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좀 쉬고 가도록 하지.”

“네. 그렇게 해요.”

두 사람은 카페의 바깥에 놓여 있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무릇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이 기분 좋은 긴장감이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주문한 샐리는 설레는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항구에 와 본 것이 처음인 샐리는 항구의 모습은 무척 신기했다.

“정말 사람이 많네요. 게다가 모두 무척 바빠 보여요.”

“먼 길을 떠나는 여행객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까. 난 그래서 항구의 모습이 좋아. 정신없고 시끄럽고 재미있거든.”

테오도라의 말대로였다. 우아하게 부채를 흔들며 곧게 허리를 뻗어야 하는 사교계와는 전혀 다른 생동감이 느껴졌다.

두 손에 가방을 들고 다급히 배에 오르는 자,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 하인을 뒤로 대동하여 걷는 노신사, 그리고…… 카시스 에스테반 공작.

“……?!”

샐리는 제가 본 것이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는 카시스가 맞았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눈을 내리깐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은 지독히도 이질적이었다.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바라볼 정도였다.

그러나 카시스는 그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릴 뿐이었다. 잠시 후 샐리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눈을 조금 크게 뜬 카시스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샐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샐리는 그때까지도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시스가 의자에 앉아 있는 샐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야 찾았군.”

그 낮은 목소리에 그제야 샐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여기에 오신 거예요?!”

분명 그는 저택을 떠나기 전 적어도 3일은 지나야 수도로 돌아온다고 했었다. 그랬던 그가 이런 한낮에, 에스테반 저택도 아닌 마리나 항구에 와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카시스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어. 아직 배가 출발하기 전일 것 같아 항구에 들러 본 건데 만나서 다행이군.”

“…….”

얼핏 들으면 이상한 점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샐리는 그의 영지에서 수도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는 거리임을 알았다.

이런 이른 아침에 항구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밤새 말을 달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안 샐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그의 손목에 있던 팔찌를 빼 샐리에게 내밀었다. 그가 매일 차고 다니는 검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팔찌였다.

보통의 사파이어보다 진한 심해의 색을 가진 사파이어는 무척 신비로운 느낌이 났다.

“이것을 가져가도록 해.”

“네?”

갑작스러운 선물에 샐리가 당황하자 카시스가 말을 이었다.

“이 팔찌는 에스테반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야. 주인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 영험한 기운을 가진 팔찌니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는 말에 샐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샐리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카시스는 은빛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카시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가는 팔목에 팔찌를 둘렀다. 샐리는 그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카시스는 샐리보다 키가 컸기에 그를 이런 식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과 길게 내리깔긴 속눈썹. 조각처럼 완벽한 그의 이목구비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었다.

그는 체온이 낮아 땀을 잘 흘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저토록 땀을 흘릴 정도면 서둘러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에 샐리는 가슴 한편이 메어졌다.

찰랑거리며 팔찌가 연결되자 카시스는 시선을 올려 샐리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샐리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카시스는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건 선물이 아니니 안심해. 그저 빌려주는 것뿐이니까.”

“……알겠어요.”

그가 말한 의미를 알아챈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샐리가 그의 선물을 거절하겠다고 말한 이후에 어떤 선물도 주지 않았다.

카시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돌아와서 내게 돌려줘. 아주 귀한 보물이니 누구의 손도 빌리지 말고 직접.”

짓궂은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그 눈빛은 조금도 농담 같지 않아 샐리의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떨려 왔다. 샐리는 그 떨림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력석을 동력으로 하는 거대한 배는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로질렀다. 배는 1등석부터 3등석까지 좌석이 나뉘어져 있었다.

테오도라는 일부러 귀족들이 모여 있는 1등석이 아니라 평민들이 있는 3등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다.

셔츠에 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테오도라를 무척 아름답게 생긴 사내로 알았다.

어떤 여인은 추파를 던지기도 하고, 어떤 여인은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수줍어했다. 어떤 사내는 그녀를 시기했고, 어떤 사내는 그녀를 무척 호쾌한 친구로 생각했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어.”

평민들과 뒤섞여 카드게임을 하고 있던 테오도라가 시원하게 웃으며 외쳤다. “으아악!” 하고 한 사내가 울부짖었다.

“왜 또 네가 이긴 거야?! 너 속임수라도 쓴 거 아니야?!”

“아닌 건 자네도 알지? 이건 실력이야.”

테오도라는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며 사내에게 말했다.

“자, 그럼 벌칙을 행하게.”

봐 달라고 해도 전혀 봐주지 않을 것 같은 테오도라의 얼굴에 사내는 끔찍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어. 편지를 쓰면 되잖아, 이 잔인한 놈!”

이로써 사내는 아내에게 편지 열 장을 쓰게 되었다. 카드 게임 덕분에 무뚝뚝하고 투박한 그가 인생에 다시없을 로맨티시스트가 된 셈이었다. 그걸 안 주변의 여인들은 쿡쿡 웃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샐리도 살포시 웃었다. 그 모습에 슬며시 샐리를 바라보고 있던 사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샐리는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미인은 표가 나는 법이었다.

모자 아래에 숨겨진 미모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아름다운 미남자와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미인. 두 사람은 3등석에서 가장 유명한 2인조였다.

샐리는 바람을 맞으며 떠나온 길을 바라보았다. 배를 탄 지 어느새 이틀. 제국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카시스는 여전히 바빴다. 하루라도 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업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같은 파벌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과 만나고, 에스테반가의 중요한 일들이 정리된 서류를 하나하나 확인하여 처리했다.

그렇게 일을 하고 나니 어느새 어두운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택에 들어선 카시스는 밤하늘 아래로 보이는 별채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발걸음이 별채를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샐리의 방이었다. 매일매일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어두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

사람의 온기도 불빛도 없는 방은 낯설었다. 아름다운 문양이 그려진 카펫도, 창문에 달려 있는 새하얀 커튼도 그대로였다.

그녀만이 없을 뿐인데 방은 마치 오랜 시간 사람이 오지 않았던 것처럼 쓸쓸하고 추워 보였다. 남아 있는 그녀의 잔향만이 그의 공허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이제 겨우 이틀이군.’

아직 기다릴 날이 많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러니 중증이었다. 카시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방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발치에 따뜻한 것이 닿아 내려다보니 은빛 여우였다. 캬라고 이름을 붙인 이 여우는 늘 얄미울 정도로 샐리의 품에만 꼭 안겨 있었다.

카시스가 오거나 말거나 신경도 쓴 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카시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뭐냐.”

낯선 행동에 카시스는 여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달라붙은 여우를 무시하고 발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컁.

여우는 앞발을 들어 카시스의 다리를 붙잡았다. 마치 저도 데려가 달라는 몸놀림이었다. 그제야 카시스는 여우가 자신과 함께 방을 나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도 그녀가 없는 방에 혼자 있기는 싫은 모양이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카시스는 여우를 품에 안았다. 캬는 평소와는 달리 얌전히 카시스의 품에 안겨들었다.

여우와 함께 방에 돌아온 카시스를 보고 에반의 눈이 커졌다. 그가 아는 주인은 저런 식으로 동물을 꼭 껴안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시스가 그 시선을 알아채고 변명하듯 말했다.

“이 녀석이 먼저 다가오기에 데리고 온 거야.”

캬는 방을 둘러보더니 가벼운 몸놀림으로 카시스의 품에서 폴짝 빠져 나왔다.

작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마치 합격이라는 듯 캬릉 짖고는 의자 위로 올라가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에반이 말했다.

“이곳이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워낙에 향에 까다로워서 싫은 향이 나면 나가고 싶어 하거든요.”

“귀족 같은 여우로군.”

짐승 주제에 쓸데없이 예민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식사를 준비해 줘. 이 녀석의 것도.”

“……알겠습니다.”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주인은 여우와 친해질 생각 같았다.

‘하긴. 캬는 워낙에 귀여우니까.’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깜찍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그토록 냉정한 주인님마저 귀여운 생물체에게 마음이 흔들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신기했다.

그러나 에반의 생각과 달리 카시스는 귀여운 외모에 현혹되어 캬를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작은 동물과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기다리는 것 같은 캬의 모습이 자신과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고난을 겪는 동료라고 할까.

작은 여우에게 동료애를 느끼다니. 스스로의 생각이 참 우스웠지만 정말로 그랬다.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캬가 턱을 치켜들며 “캬!”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피차 외로운데 잘 지내보자고.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배는 바르샤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제국과는 다른, 숨이 턱 막힐 만큼 뜨거운 기온이 느껴졌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저 높이 떠오른 태양. 하늘 높이 솟아오른 나무와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들이 이질적인 사막의 나라였다.

“배로 오니 정말 빨리 도착하네요.”

고작 3일 만에 도착한 전혀 다른 세상에 샐리가 신기한 듯 말했다. 테오도라도 주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육로는 무척 멀지만 항로는 아니야. 마치 신이 매끄럽게 길을 만들어 준 것처럼 뱃길이 원만해서 이토록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거지. 이러니 제국이 바르샤를 포기할 수 있나.”

최고급품의 물건과 희귀한 약초들, 그것을 수월하게 옮길 수 있는 바닷길까지. 바르샤는 제국에게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교역국이었다.

배에서 내린 이들은 입국 사무소를 거쳐 신분을 확인받아야만 한다. 샐리와 테오도라도 정식 사절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 여행객들과 같이 줄을 섰다.

“바르샤의 입국 허가는 까다롭기로 유명하지. 공인받은 신분증과 함께 바르샤인의 도장이 찍힌 확인서가 꼭 필요해.”

“바르샤인의 도장이요?”

“그래. 바르샤인은 바르샤인을 가장 신뢰하거든. 제아무리 높은 신분이라 하더라도 바르샤인의 도장이 없다면 입국을 할 수 없어. 그래서 바르샤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바르샤인과의 인맥이 가장 중요하지. 제 이름을 걸고 신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니 웬만한 친분이 있지 않는 한 이 도장을 쉽게 찍어 주지 않아.”

테오도라는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종이에는 이국적인 문양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매서운 눈빛으로 서류를 받아 든 심사관은 도장을 확인하더니 이내 얼굴이 바뀌었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이펜 가문의 손님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바르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심사관은 인사를 하며 입국 허가서에 인장을 찍어 주었다. 앞서 있던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질문도 하고,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면 짐도 다 펼쳐 보라고 했는데 그런 절차도 없었다.

생각보다 간편히 끝난 입국에 샐리가 눈을 깜빡이자 테오도라가 속삭였다.

“도장을 찍어 준 이가 누구냐에 따라 입국 속도도 달라진다고 하더니 정말이군.”

“그렇군요. 방금 전 반응을 보니 네이펜 가문이라는 곳이 무척 명문가인 가 봐요.”

“바르샤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가문이라고 하기에 당연히 허풍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아시는 분이신데요?”

“알스의 아카데미에서 만난 친구야. 바르샤에서 가장 발이 넓다는 네이펜 가문의 아들이지. 바르샤에 있는 동안은 그의 집에서 묵게 될 거야.”

그때였다.

“테오!”

사내치고는 조금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친 사람은 소년 같이 앳된 느낌이 드는 날씬한 체형의 사내였다.

커피색 피부에 갸름한 턱, 날카로운 눈매 아래로 풍성한 속눈썹을 가진 전형적인 바르샤인의 모습을 한 그는 밝은 표정으로 테오도라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테오 맞지?”

“맞아.”

“세상에. 못 본 사이에 결국 남자가 된 거야? 와. 너무 잘 어울려서 위화감이 전혀 없어.”

그 말에 테오도라가 피식 웃었다.

“너야말로 여전히 말이 많구나, 샤샤. 그 수다는 갈수록 느는 것 같군.”

“과묵한 곰보다는 낫지 않냐.”

샤샤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테오도라는 주먹으로 그의 주먹을 톡 쳤다.

“마중 나와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일이 잘되면 내게 한몫 떼어 주겠다고 한 말이나 잊지 말라고.”

“물론이지.”

테오도라는 그렇게 말하며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함께 가는 일행이 있다고 했었지? 인사해.”

테오도라의 뒤편에 있던 샐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샐리는 처음 만나는 이국의 사내를 향해 빙긋이 미소 지었다.

샤샤는 방금 전 장난기 가득했던 얼굴을 지우고는 멍하니 샐리를 바라보았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샐리라고 합니다.”

목소리조차 너무도 달콤해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 같다고 샤샤는 생각했다.

아아, 신이시여. 제 운명의 여인을 보내 주셨군요.

“저는 네이펜 가문의 삼남, 샤샤라고 합니다. 부디 제…….”

샤샤가 황홀한 눈으로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청혼이라면 그만둬. 그녀는 상대가 있으니까.”

“……!”

테오도라는 너무나 야박하게 샤샤의 사랑을 막았다. 샤샤는 차마 내뱉지도 못한 말을 도로 삼켜야 했다.

청혼이란 말에 샐리는 당황했다. 방금 만난 사이가 아니던가. ‘황녀 저하께서 농담을 하신 거겠지.’ 하고 생각한 것도 잠시 차마 입도 다물지 못하고 굳어 버린 샤샤의 얼굴이 보였다.

샤샤가 충격받은 얼굴로 횡설수설 물었다.

“그, 그렇습니까? 상대가 있으신 겁니까?”

그 진위야 어찌 되었건 지금 샐리는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샤샤는 신음을 삼켰다.

“아아, 그렇지.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서 혼자일 리 없지.”

그 모습을 본 테오도라가 샤샤의 등을 치며 크게 웃었다.

“어쩜 그렇게 변한 게 없어. 아카데미에서도 툭하면 신이 보낸 운명의 상대라며 청혼을 하고 다니더니.”

바르샤는 부모가 자식의 상대를 결정해 주지 않는다. 남자가 자신의 짝이 될 여인을 찾아 청혼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아카데미 재학 시절 샤샤의 별명은 ‘지치지 않는 청혼자’였다.

미인이라서, 착해서, 똑똑해서, 그날 같은 메뉴를 식당에서 먹어서, 자신의 짐을 들어주어서 같은 하찮은 이유로 어찌나 한눈에 잘 반하는지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청혼을 했다.

여인들은 까르르 웃으며 거절했다.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는 여인도 있었다. 실연(?)당한 그를 위로했던 일도 여러 번이었던 테오도라가 말을 이었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걸 알려 줄까?”

“뭔데.”

“그녀의 상대는 바로 에스테반 공작이야.”

“……!”

그 이름에 샤샤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리 폐쇄적인 바르샤인 이라고 하나, 국외 정세에 조금이라도 신경 쓰는 자라면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알스로 유학까지 다녀온 샤샤는 더더욱 그랬다.

에스테반 공작가. 거대한 제국을 받치는 가장 큰 가문. 공작가가 마음먹고 날뛴다면 철옹성 같은 제국을 뒤흔드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것을 안 샤샤는 히익 하고는 입을 막았다.

“나 아직 아무 말 안 했어.”

“그래. 다행히도 말이지.”

바르샤의 사내들은 호전적이었다. 상대가 있는 여인을 건든다는 건 곧 여인의 사내에게 결투를 청하는 일과 같았다.

실제로 여인을 사이에 두고 검을 겨루다 평생 남을 상처를 가지게 된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샤샤는 그런 폭력적인 방법은 질색이었다. 무엇보다 제국의 에스테반 공작과 힘을 겨룰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래서 샤샤는 아주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정리한 샤샤가 정중하게 샐리를 향해 인사했다.

“샤샤 네이펜이라고 합니다. 네이펜 가문의 삼남이며, 테오도라와는 알스에서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입니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샐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세 사람은 샤샤의 저택으로 가기 전 항구의 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시장은 바르샤인들과 외국인이 섞여 무척 복작거렸다. 바르샤인들은 속이 살짝 비치는 모슬린 원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은 모두 알록달록한 진한 색상으로 염색되어 있어 아주 화사했다.

바르샤인은 액세서리도 무척 좋아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온몸에 달고 있는 장식구들이 찰랑이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진한 향기가 거리를 가득 메웠고, 색이 선명한 꽃잎들이 나풀거렸다.

아름다운 피리 소리와 경쾌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장은 활력이 넘쳤다. 샐리가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폐쇄적인 곳이라고 하더니 전혀 그렇지 않은걸요?”

“정확히 말하면 폐쇄적인 것은 바르샤 왕족이야. 그들도 자신들의 물건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줄 알기 때문에 항구에서의 민간 거래는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지. 덕분에 항구는 외국인도 많고 무척 활기 차. 상인들의 물건 거래도 활발하고.”

그 말처럼 수많은 외국인들이 바르샤 물건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바르샤 상인과 가격을 협상하는 이들도 많이 보였다.

“제국에 들어온 바르샤국의 물건들이 이곳에서 사들인 물건이었군요.”

“맞아. 그러나 어디까지나 정식 교역이 아닌 암거래이기 때문에 부르는 것이 값이지. 제국으로서는 과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

대답하는 테오도라의 얼굴은 꽤 진지했다.

사치품이야 제값에서 더 치러도 큰일은 아니었으나, 치료에 필요한 바르샤산 약재 같은 경우는 그 문제가 시급했다.

지금은 그 값이 너무 비싸 평민들은 아파도 약재를 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게다가 정식 교역으로 구입된 것이 아니라 품질이 확인되지 않은 가짜 약초를 사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러한 상황이니 정식교역을 통해 제대로 된 물건을 제값에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제국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래가 될 터였다.

그러나 바르샤 왕은 답답할 만큼 보수적이고 변화를 싫어했다. 그는 이제껏 제국에서 청한 만남을 모두 거부했다.

테오도라는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그러니 더더욱 카샴 왕자의 협력이 꼭 필요해. 왕자가 힘을 써 준다면 바르샤 왕과 만날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거야.’

황제가 직접 보낸 선물도 물린 그였다. 그는 제국 황족들과 인연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때였다.

“으아악!”

커다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시장 한편에서 소동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사람들이 우르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 사내가 있었다. 한 사내는 바닥에 쓰러져 겁에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고 그 앞에는 한 남자가 검을 들고 차가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갈색 피부에 날렵한 얼굴.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남자는 눈에 띄는 미남자였다.

그러나 잔혹함이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는 너무나 섬뜩하여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감탄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검을 든 남자는 붉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감히 내 것을 훔치려 하다니 베짱이 좋구나.”

“요, 용서하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두터운 팔뚝에 검상을 입은 사내가 울부짖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검을 든 남자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싫어.”

“……!”

“너 같은 도둑놈도 바르샤의 율법은 알고 있겠지. 나의 손을 빼앗으려 하는 자의 손발을 빼앗으리라, 나의 몸을 빼앗으려 하는 자의 전신을 빼앗으리라, 나의 심장을 빼앗으려 하는 자의 영혼을 빼앗으리라.”

바르샤인들은 제 물건에 손대는 이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 물건을 건드린 이에 대해서는 재판 없이 직접 처벌도 가능했다.

“감히 내 것을 탐내었으니 네 냄새나는 목숨 정도는 내놔야 할 거다.”

남자는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꺄아악!”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샐리는 끔찍한 광경에 입을 막았다.

사내의 손등에 검이 박혔다. 사내는 엄청난 고통에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남자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박혀 있던 검을 뺐다. 그 순간 새빨간 피가 솟구쳤다. 샐리는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으악! 으아아아악! 으흑!”

사내는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손을 잡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무심하게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네 목을 잘라 놓아야 했지만 봐준 것이니 감사히 여겨라.”

사내는 눈을 내리깔고 검을 칼집에 넣었다.

남자가 걸음을 내딛는 순간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숨을 멈추고 뒷걸음을 쳤다. 명백한 두려움이 담긴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샐리는 긴장한 얼굴로 꿀꺽 침을 삼켰다. 매처럼 매서운 눈빛을 가진 사내의 기운은 평범하지 않았다.

카시스가 서늘하고 얼음 같은 분위기를 가졌다면 저 사내는 불꽃처럼 난폭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사라지는 남자를 보며 테오도라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청나군. 바르샤인들은 모두 저토록 호전적인 건가?”

샤샤가 대답했다.

“대체로 그런 편이긴 하지만 저분은 더 특별하시지.”

“저 남자를 알아?”

테오도라의 물음에 샤샤가 대답했다.

“그럼. 저분이 바로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바르샤의 열세 번째 왕자, 카샴 왕자님이셔.”

“……!”

샐리와 테오도라의 눈이 커졌다.

* * *

바르샤에서 가장 넓은 인맥을 가졌다는 상단, 네이펜 가문의 저택답게 저택 안은 아주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복도에 장식되어 있는 등불과 장식품은 하나하나 아름답게 세공되어 있었다. 저택 곳곳에 있는, 잎이 커다랗고 진한 녹색 나무들도 인상적이었다.

저택에 도착한 샐리는 몸을 씻고 샤샤가 준비해 놓은 바르샤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르샤의 드레스는 제국의 드레스와는 전혀 달랐다. 풍성한 페티코트도 허리를 졸라매는 코르셋도 필요 없었다.

피부가 살짝 비치는 얇은 모슬린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는 무척 시원하고 아름다웠다.

“식사는 정자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옷을 다 갈아입으셨으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샐리는 하녀를 따라나섰다.

정자는 작은 연못 한가운데에 만들어져 있었다. 잔잔한 연못 위의 정자는 운치 있었다.

정자에 드리워진 얇은 천을 올리며 들어서니 테오도라와 샤샤가 먼저 자리해 있었다. 편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이 샐리를 바라보았다.

“오셨습니까.”

샐리를 본 샤샤의 눈이 커졌다. 하늘거리는 노란빛의 드레스를 입은 샐리의 모습이 제국의 옷을 입었을 때와는 또 달랐기 때문이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의 옆구리를 테오도라가 찔렀다.

“샤샤, 반하는 건 곤란하다고 했을 텐데.”

“그런 거 아냐. 단지 좀 놀라서 그런 거지.”

“새삼스럽게 뭘 놀라나.”

“바르샤 옷을 입은 샐리님의 모습이 꼭 여신 세레나 같단 말이야.”

샤샤의 얼굴은 소년처럼 조금 붉어져 있었다.

“여신 세레나요?”

샐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니 샤샤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네. 바르샤에 수많은 신이 있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중 세레나는 불과 정염의 여신이십니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세상 누구보다 고혹적인 자태로 사내들을 호령한다는 여신이시죠.”

그 말에 샐리가 눈을 크게 떴다. 미인이라든가 아름답다는 칭찬은 여러 번 들어 보았으나 여신을 닮았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보았기 때문이다.

바르샤인들의 신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는 것은 책을 봐 알고 있었다. 신과 닮았다는 말은 그들에 있어 엄청난 칭찬을 한 셈이었기에 샐리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네요.”

샐리의 미소를 보는 순간 샤샤는 크흡 하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정말 여신 세레나의 화신이 아닐까!

그녀가 시키는 대로 조종당하고 싶고, 하라는 대로 하고 싶은 이상한 감정이 들끓어 올라 샤샤는 힘겹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테오도라는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었다.

샐리가 자리에 앉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카샴 왕자에 대한 이야기부터 들려줘.”

테오도라의 말에 샤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샤의 왕에게는 다섯 명의 왕비와 열 명의 애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열세 명의 아들과 열두 명의 딸들이 있는데 카샴은 다섯 번째 첩이 낳은 막내 왕자였다.

열세 번째 왕자이니 왕위와는 이미 거리가 멀었다. 귀족들처럼 신경 써야 할 영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막중한 의무나 기대 없이, 부유한 상인의 아들처럼 자유롭게 컸다.

그는 수많은 아들 사이에서 제법 왕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느지막이 가진 막내아들이라는 점과 더불어 뛰어난 검술 실력 덕분이었다.

왕자는 모든 전장을 쫓아다니며 엄청난 활약을 했다. 그의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권력욕이 없어 왕의 자리나 과한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왕자의 성격은 무척 잔혹하고 난폭했다. 그는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도 너무 쉽게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는 자, 자신을 속이는 자, 자신을 화나게 하는 자.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보는 덕분에 그는 엄청난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곱게 돈 미치광이’라는 별명이었다.

미치광이라는 말 앞에 ‘곱게’라는 말이 붙은 것은 그가 철저하게 자신을 건든 사람만 베었기 때문이다.

그를 건드는 이들 중에는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건달, 도둑, 산적, 야심가, 사기꾼, 아첨꾼……. 일부에서는 왕자가 쓰레기를 치워 준다며 박수를 칠 정도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왕의 총애를 받는 왕자였다 해도 큰 벌을 받았으리라.

그러던 중 큰 사건이 일어났다. 술에 취해 싸움이 붙은 카샴은 상대의 손목을 베어 버렸다. 힘줄이 끊긴 상대는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자는 세 번째 왕비의 남동생이었다. 왕비는 분노했고 카샴 왕자에게 큰 벌을 내려야 한다고 왕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 없었던 왕은 카샴에게 잠시 나라를 떠나 있으라는 벌을 내렸다.

나라를 떠나 몇 년간 고생하고 오면 철이 좀 들겠지.

그러나 그 생각은 너무나 안일한 것이다. 바르샤로 돌아온 카샴은 제국인 아내를 데리고 왔다.

바르샤의 왕자가 외국인 아내라니!

반성을 하라고 내보냈더니 더한 사고를 친 카샴 왕자에게 바르샤 왕은 분노했다.

당장 여자를 내쫓으라고 왕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카샴 왕자는 서슬 퍼런 아버지의 말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싫습니다!

그렇게 왕궁을 나온 카샴 왕자가 신혼 저택을 마련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말하자면 왕의 뜻을 거스르고 가출을 한 셈이었다.

샤샤의 말을 들은 테오도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하군.’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카샴 왕자를 통해 바르샤 왕을 만나 협상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카샴 왕자는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까다로운 자가 분명했다. 설득도, 뇌물도, 협박도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게다가 왕자는 지금 왕을 피해 사랑의 도피를 한 셈이었다. 그가 과연 이런 분위기 속에 바르샤 왕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줄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역시 왕자를 움직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키를 가진 건 그의 부인이었다.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샐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왕자님의 부인은 어떤 분이신가요?”

샤샤가 대답했다.

“그분의 이름과 신분에 대해선 알고 계시죠?”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샤로 오기 전 테오도라로부터 들어 여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알고 있었다.

이름은 마리아, 제국 남부에 있는 아주 영세한 자작가의 외동딸.

그러나 자작가는 몇 년 전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고향을 떠났기에 더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알아낸 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면 부인께서는 사교 모임은커녕 저택에서 거의 나오지 않거든요. 저택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고요. 아마 그분의 얼굴을 아는 것은 카샴 왕자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뿐일 겁니다.

그 말에 샐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건 좀 평범한 상황이 아니지 않나요? 무슨 죄수도 아니고 꼭 저택에 갇혀 있는 것 같잖아요.”

“그게…… 사실 카샴 왕자님께서 엄청난 의처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인과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해코지를 당했다는 이들도 많고요.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부인이 스스로 저택을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그 말에 샐리가 굳은 얼굴로 신음을 내뱉었다.

오늘 본 카샴 왕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도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늑대 같은 눈빛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것에 손댔다고는 하나 인간의 손에 검을 쑤셔 박는 모습은 전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자라면 저런 미친 행동을 한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곱게 돌았다 해도 미치광이는 미치광이였다. 저런 사내의 곁에 여인을 홀로 두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여인과 만나는 것이 좋겠어요.”

“한시라도 빨리 여인과 만나는 것이 좋겠어.”

샐리와 테오도라가 동시에 말을 했다. 그 말에 샤샤가 눈을 크게 뜨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어떻게요?”

카샴 왕자의 저택은 손님의 방문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입이 무거운 하녀들만이 저택을 오고갈 뿐이었다.

“그건 생각해 봐야죠.”

“그건 생각해 봐야지.”

이번에도 두 사람이 함께 대답했다. 샤샤는 마치 서커스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 에스테반의 저택.

카시스의 등 뒤에서 잠이 들었던 캬는 비몽사몽한 얼굴로 깨어나 카시스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으음.”

따뜻하고 보드라운 것이 파고들자 카시스는 본능적으로 캬를 품에 안아 들었다. 캬를 품에 안은 카시스가 중얼거렸다.

“……어서 돌아와.”

은빛 남자와 은빛 수컷은 그렇게 침대 위에 뒤엉켰다.

* * *

다음 날 테오도라는 정중히 편지를 써 카샴 왕자의 저택에 보냈다. 샐리가 입을 열었다.

“카샴 왕자님께서 방문을 허락해 주실까요?”

“해 주지 않겠지.”

테오도라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선물도 무시했으니 황녀의 편지 따위에 별다른 반응이 없을 것이다.

그를 설득하기 위한 운을 띄운 것일 뿐 그의 대답을 기대하고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때 얼굴이 창백해진 샤샤가 달려와 소리쳤다.

“테오!”

“무슨 일이기에 그래?”

“카, 카샴 왕자님께서 방문하셨어! 너를 보고 싶다고!”

“……!”

그 말에 샐리와 테오도라의 눈이 커졌다. 철저하게 무시하리라 생각했던 그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 답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혹여나 그가 돌아갈까 두 사람은 빠른 발걸음으로 응접실을 향했다.

응접실에 발을 내딛자마자 엄청난 위압감이 두 사람의 온몸을 짓눌렀다. 바르샤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에는 카샴이 앉아 있었다.

근육질의 단단한 몸매가 드러난 새까만 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을 찬 그의 눈빛은 매서웠다.

제국의 황녀를 만나러 온 것인지 동물을 사냥하러 온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 기운이 얼마나 흉악한지 그 옆에서 차를 따르고 있는 하녀가 오들오들 떨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그의 기에 짓눌릴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웃으며 카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국의 황녀, 테오도라 프란츠입니다.”

“바르샤 왕국의 카샴.”

짧은 대답이 끝이었다. 그는 그녀가 내민 손을 무시했다. 테오도라는 놀라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무례한 자에게는 익숙했다. 특히 이 왕자에게는 더더욱 예의 같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카샴은 찬바람이 일 듯한 서늘한 얼굴로 테오도라를 보며 말했다.

“그래. 나와 아내를 만나고 싶다고?”

그의 짧은 말에 테오도라의 옆에 서 있던 샤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아무리 그가 미치광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제멋대로지만 일국의 황녀에게 반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샤샤의 얼굴은 이제 새파랗게 질렸다. 카샴도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자신의 무례에 저런 식으로 반응하는 이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바르샤의 왕자가 제국의 여인과 평생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제국으로서도 무척 기쁜 일이지. 그러니 카샴 왕자와 부인께 축하 인사를 전하고 싶어.”

“하. 축하 인사라.”

카샴은 독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제국 황족이 할 법한 교활한 거짓말이었다. 축하 인사는 무슨. 분명 순진한 제 아내를 이용해 바르샤에서 수작을 부리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지난번에 왔던 황제의 사자에게도 말한 것 같은데. 나와 아내는 제국 황실 따위와 인연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지만 왕자의 부인은 제국의 귀족 여인. 즉,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 가문의 여인이라는 말이지. 군신의 관계에서 결혼을 축하해 주는 것도, 결혼을 축하받는 것도 당연한 덕목이야.”

부드러운 눈빛, 유려한 말투. 누구나 그 말에 납득할 이야기였다. 그러나 카샴은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난 그따위 것 몰라.”

카샴은 내뱉듯 툭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따위 이유로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내 집에 오는 것은 더더욱 허락하지 않겠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좀 제정신이 아니거든. 애꿎은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이 말을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카샴이 붉은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서늘하게 웃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 말에 그의 뒤에 서 있던 샤샤는 기절할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바르샤의 왕자이며 공인된 광인이긴 하지만 그는 왕자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여인은 제국의 황녀였다. 그 황녀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것도 모자라 협박이라니.

바르샤가 제아무리 부강한 나라라고 하나 제국이 정말 마음먹고 침략해 온다면 버틸 수 없다.

샤샤와 달리 정작 그 말을 들은 테오도라의 얼굴은 고요했다. 소문대로 흉악한 광인이었다. 그러나 예상 범위 안이었다.

고작 몇 마디 말로 아내를 만나게 해 줄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황제의 선물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왕자의 생각은 잘 이해했어.”

“…….”

카샴은 잘 다듬어진 눈썹을 찡그렸다. 평상시라면 그의 서슬 퍼런 말 한마디에 상대는 다리가 풀려 벌벌 겁을 먹었어야 하는데 눈앞의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위협이 먹힌 건지 아닌 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위협은 여기까지.

아직 아무 짓도 안 한 이에게 검을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바르샤의 미치광이라고 하나 지키는 선이 있었다.

‘협박을 해 두었으니 내 말을 지키지 않을 때 본때를 보여 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카샴은 한 번 더 테오도라를 스산하게 노려보고는 그녀를 지나쳤다. 인사 따윈 할 생각이 없었다.

카샴은 테오도라의 뒤에 서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황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여인이었다.

‘시녀인가.’

그러나 단순히 시녀라고 하기엔 여인은 과하게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 웬만한 사내들은 모두 홀릴 만큼 매혹적인 외모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뿐. 그에게는 아무 의미도 될 수 없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샴이 사라진 응접실에 남은 테오도라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차를 들이켰다. 대화는 너무 빨리 끝났고 일방적이었다.

“역시 정공법은 먹히지 않네요.”

그녀의 등 뒤에서 서 있던 샐리가 테오도라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 생각보다 반응이 격해서 좀 놀라긴 했지만 말이야.”

이렇게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게다가 황녀에게 검을 운운하며 협박까지 하다니.

“저하께서 부인과 만나는 게 정말 싫은 모양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는 테오도라를 향해 샐리가 아쉬운 듯 말했다.

“주인이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할 수 없죠.”

샐리가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주인 몰래 들어가 부인을 만나는 수밖에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샤샤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모두가 잠든 새벽 남몰래 벽을 타고 들어간다는 말은 아니겠죠? 카샴 왕자님의 저택 보안은 철저합니다. 여인 둘이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그 말에 샐리가 쿡 하고 웃었다.

“알고 있어요. 제대로 문을 열고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이 허락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샤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바르샤는 공공 목욕탕이 무척 발달되어 있었다. 물이 샘솟는 오아시스 주변에 수로를 연결한 공공 목욕탕이 마을마다 하나씩 있었다.

물론 귀족들은 이런 공공 목욕탕에 오는 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곳은 온전히 평민들의 세계였다.

하루하루 고된 일상을 보낸 여인들은 목욕탕에 와 몸을 씻으며 수다를 떠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수많은 여인이 모인 목욕탕은 휴식 장소임과 동시에 사교의 장소였으며 많은 정보가 오가는 곳이었다.

“마을에 여신 세레나를 닮은 점성술사가 나타났다면서요?”

“맞아요. 세레나처럼 고혹적인 외모에 색이 진한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요.”

강한 햇빛을 평생 받는 바르샤 여인들의 머리카락은 보통 색이 연했기에 선명한 붉은색 머리카락은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세레나는 바르샤의 수많은 신 중에서도 요염한 미모로 손꼽히는 여신이었다.

그런 여신을 닮았다니 도대체 어떤 외모를 가진 여인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여신과 닮은 것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용하다던데요? 마음이 가는 저택에 들러 길흉을 점쳐 준다는데 집주인이 하지도 않은 말을 다 알아맞힌대요. 다가올 좋은 일은 점쳐 주고 흉한 기운은 없애 준다고 하네요.”

“게다가 복채로 돈도 요구하지 않는데요. 그저 맑은 물 한잔이면 된다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적어도 사기꾼은 아닌가 보네요.”

“게다가 그 여인을 모시는 시종이 그렇게 잘생겼다면서요? 여인처럼 곱상하면서도 눈빛에 총기가 어린 보기 드문 미남자래요. 매너까지 좋아서 그 도도한 샤르나 가문의 아가씨도 그 시종에게 마음을 빼앗겼대요.”

“어머! 정말요?”

열성적으로 두 사람에 관해 이야기를 쏟아 내는 여인들의 뒤편으로 한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녀들은 바로 카샴 왕자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이었다. 카샴 왕자를 모실 만큼 입이 무거운 그녀들은 늘 과묵했다.

이런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저택의 일을 내뱉는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두 귀가 뚫려 있으니 듣는 것은 자유였다.

“얼마나 잘생겼기에 저렇게 난리지. 주인님보다 잘생겼을까?”

“주인님은 미남이시긴 하지만 성격이 좀…… 무서우시잖아. 얼굴이 성격에 가려진다고 할까.”

그 말에 여인들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주인인데도 기운이 너무 흉흉해서 제대로 그 얼굴을 볼일이 거의 없었다.

혹여 눈이 마주친다 해도 광속으로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으니, 그 외모에 대해 감탄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저렇게 유명하단 얘길 들으니 궁금하긴 하네. 우리 저택에도 한 번 와 주면 좋으련만.”

“오면 뭘 해. 주인님께서 잘도 문을 열라고 허락해 주시겠다.”

“잠시 점성술사가 들리는 건데 허락받을 게 뭐 있어. 잠시 점만 봐 달라고 하고 내보내면 되지.”

카샴 왕자가 현재 사는 저택은 어디까지나 왕의 분노를 피해 마련한 곳이었다. 성이나 직위가 높은 귀족들의 대저택 같은 위용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좀 사는 부유한 이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지나가다 대문을 두들기는 이들도 많았다.

물건을 사달라고 하는 보따리 상인부터 구걸하는 거지, 집안을 장식할 꽃을 파는 소녀. 그들이 문을 두들길 때마다 주인께 확인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하녀들도 어느 정도 제 뜻으로 문을 열어줄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샐리가 노린 바였다.

샐리는 여신 세레나의 특징을 살려 외양을 꾸몄다. 색이 진한 금빛 모슬린 원단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아주 길게 눈초리를 그렸다.

이마 위에 붉은 꽃모양까지 그려 넣으니 그 자태가 정말 여신이 현신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내의 복장을 한 테오도라가 있었다. 이것은 테오도라가 낸 아이디어였다. 샐리의 계획을 들은 테오도라는 웃으며 말했다.

“이편이 더 잘 먹혀.”

그녀의 말대로였다. 감탄이 나올 만큼 요염한 분위기를 가진 신비로운 점성술사와 미모의 남자 시종.

여인들의 마음을 뒤흔들 것들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그저 몇 명의 점을 봐 줬을 뿐인데 소문은 온 마을에 빠르게 퍼졌다.

물론 샐리가 갑자기 신의 말씀을 들어 영험한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샤샤가 알려 준 정보와 샐리의 눈치가 어우러져 만든 그럴듯한 말이었다.

“아가씨께서는 요즘 혼사를 앞두고 걱정이 많으시군요.”

“네, 맞아요!”

여인이 눈을 크게 뜨며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이 댁의 아가씨가 혼인을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샤샤에게서 넌지시 들은 터였다.

샐리는 여인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저 평범한 미소였는데도 바르샤에서는 보기 드문 붉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 때문인지 무척 신비로워 보였다.

“너무 깊은 걱정 때문에 안 좋은 기운이 모여 버렸어요. 아가씨의 어깨 위로 묵직하고 새까만 기운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이네요. 제가 그것을 없애도록 할게요. 잠시나마 아가씨의 마음을 풀어 줄 거예요.”

샐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여인의 몸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물론 마법의 주문 따위는 아니었다. 대륙 공용어와는 전혀 다른 제국 뒷골목에서 쓰는 은어들을 모아 만든 말이었다.

그러나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니 그 말들은 마치 신비로운 주문처럼 들렸다.

무엇보다 여인은 점점 몸이 나른해지며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인은 어느새 편안한 얼굴로 누워 샐리에게 몸을 맡겼다.

‘예전에 배웠던 마사지를 이렇게 써먹는구나.’

마사지는 샐리가 전생에 배웠던 기술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배운 마사지는 무척 효과적이었다.

근육이 뭉친 곳을 찾아 살살 풀어 주니 누구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사지가 끝난 여인은 처음과는 달리 후련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거웠던 몸이 정말 가벼워졌어요. 점성술사님 덕분에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 풀린 모양이에요.”

“다행입니다.”

여인이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그 말에 옆에 있던 테오도라가 나섰다.

“저희 아가씨께서는 보답을 바라고 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저 깨끗한 물 한잔으로 마음을 표현해 주시면 됩니다.”

선이 고운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여인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진 여인이 사라진 후 샐리와 테오도라의 눈이 마주쳤다.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이 아주 짓궂은 고양이처럼 웃었다.

샐리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어느 정도 소문이 난 것 같죠?”

“충분히.”

항구가 있는 도시는 컸지만 부유한 저택이 몰려 있는 곳은 한정되었다. 고작 며칠 새에 이 근방에 샐리와 테오도라의 소문이 쫙 깔렸다.

자신의 집으로 와 점을 봐 달라는 이들도 많아졌을 정도이니 분명 카샴 왕자의 하녀들도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럼 이제 가장 만나고 싶었던 분을 찾아가 볼까요, 잘생긴 시종님?”

“좋은 생각입니다, 신비로운 점성술사님.”

* * *

카샴 왕자의 저택. 저택의 문에 달린 종소리가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손님이 왔다는 표시였다.

미리 찾아온다고 이야기 들은 손님이 없었기에 하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찾아온 손님을 본 순간 하녀가 어머나, 하고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찰랑대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그 옆의 중성적인 매력의 고운 미남자. 소문 속의 두 사람이 틀림없었다.

“저택에 서린 기운이 심상치 않아 들르게 되었습니다. 잠시 집을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여신 세레나를 닮은 아름다운 여인의 말은 조금도 거짓 같지 않았다. 만약 다른 저택이었다면 당장에 문을 열어 주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은 카샴 왕자의 저택이었다.

왕자는 몇 번이고 손님을 함부로 들이지 말라고 엄하게 말했던 터였다. 그래서 하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주인님이 집에 계시지 않아 함부로 문을 열어 드릴 수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살펴보아야 해요.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하지만…….”

하녀는 난처한 얼굴로 선뜻 대답해 주지 않았다. 샐리는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말했다.

“혹시 이 저택에 다른 분과 다른 기운을 가진 분이 계신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예를 들어 바르샤인이 아닌 분이 계신지 여쭤보는 겁니다. 그분 근처에 안 좋은 기운이 어려 있어요. 지금 그 기운을 걷어 두지 않으면 앞으로 그분께 큰 재앙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하녀가 눈을 크게 떴다. 점성술사가 말하는 이는 분명 마님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새하얀 피부를 가진 제국 여인. 그러나 마님은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고 하녀들도 철저히 사실을 숨겼기에 이 마을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점성술사는 진짜구나!’

그 능력을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저 말을 들으니 더더욱 믿음이 갔다. 그래서 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세요. 마님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아 올게요.”

잠시 후 다시 돌아온 하녀가 말했다.

“큰 소리 날 것도 없이 금방 끝나는 일이겠죠?”

“그럼요. 주문을 외워 그분께 드리운 흉악한 기운만 없애 드리면 됩니다.”

재차 확인까지 받고 나서야 하녀는 문을 열었다.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샐리와 테오도라는 시선을 교환했다. 드디어 카샴 왕자의 저택에 들어선 것이다.

하녀를 따라 걸으며 샐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왕자가 돌아오면 어쩌지?’

오늘 이 시간대를 골라 이곳에 온 것은 왕자가 저택에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 일정이 변해 왕자가 돌아올지 몰랐다.

왕자는 테오도라를 알고 있으니 마주치기만 해도 모든 것이 자신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벌인 술수임을 깨달을 것이다.

늑대처럼 사나운 눈빛으로 사내의 손을 꿰뚫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 자가 기어코 자신의 협박을 무시한 이를 보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괜찮아. 그가 오기 전에 부인과 이야기를 잘 끝내면 돼.’

사실 그 부분을 잘해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귀족의 여인을 과연 잘 설득할 수 있을까? 여인은 테오도라와 자신의 편이 되어 줄까?

수많은 고민과 걱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샐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해내야만 했다.

“여기가 바로 마님의 방입니다.”

도착한 곳은 저택의 깊숙한 곳에 있는 방문 앞이었다.

하녀는 문을 똑똑 두들겼다.

“마님, 점성술사와 시종을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하녀가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연 순간이었다.

“지금 이게 뭣 하는 짓들이지?”

“……!”

등 뒤로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에 샐리는 심장이 저 바닥 밑으로 쿵 하고 떨어진 기분이었다.

샐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카샴 왕자가 서 있었다.

매섭게 올라간 눈매가 꼭 사냥감을 눈앞에 둔 늑대처럼 사나웠다. 그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샐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갑자기 마을에 붉은 머리를 한 여인이 설친다기에 혹시나 싶었지. 평범한 시녀는 아닌 것 같더라니 참으로 귀여운 술수를 쓰는군.”

샐리의 귓가에 샤샤의 말이 떠올랐다.

—카샴 왕자님은 잔인한 성정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거슬리는 자면 여자든, 아이든 상관하지 않고 피를 보는 분이죠. 자신의 위협을 무시했다는 걸 알면 제국의 황녀고 뭐고 검을 휘두를 겁니다. 그러니 절대 무리하지 말고 왕자님께서 오실 기미가 보이시면 피하셔야 합니다.

샤샤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몇 번이나 테오도라와 샐리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아무리 제국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여인들이라 한들 바르샤에서는 평범한 여인 두 명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호위 기사들은 저택 바깥에 있으니 바르샤 최고의 검사라는 그의 앞에서는 약하디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테오도라가 샐리를 지키듯 그녀의 앞에 섰다. 테오도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우리에게 검을 휘두를 생각인가?”

“못할 건 뭐지?”

“나를 조금이라도 건든다면 제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상관없어. 나는 내 저택을 무단으로 침입한 사기꾼들을 처리하는 것뿐이다.”

그 말이 정말인 듯 카샴은 검을 꺼내 들었다. 차랑. 차가운 쇠붙이가 스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났다. 그의 눈빛은 조금도 장난 같지 않았다.

‘안 돼.’

테오도라를 위험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제국의 황녀였으며 자신이 섬기는 대상이었다.

샐리가 빠른 걸음으로 테오도라의 앞으로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방 안에서 여리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샐리의 눈이 커졌다. 샐리는 크게 뜬 눈을 깜빡거리며 믿기지 않는 얼굴을 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저 닮은 목소리이겠거니 생각했다. 세상에는 목소리가 닮은 사람들도 종종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샐리는 당황한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발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내가 말했죠? 그런 식으로 아무에게나 검을 꺼내 들지 말라고요.”

놀라운 건 카샴의 반응이었다. 마치 마법이 풀린 것처럼 그는 황급히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놀랍게도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여자들이 널 만나기 위해 사기를 쳐서 그런 거야. 절대 그냥 검을 꺼낸 게 아니라고.”

“내게 무기를 들고 날뛴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설사 절 속였다고 해도 일단은 대화로 이야기를 해야죠.”

그 말에 카샴은 눈을 내리깔았다. 야생 늑대 같던 그가 잘 훈련된 개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샐리는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마주친 순간 숨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방 안에서 나온 여인은 고급스러운 바르샤의 드레스를 입은 부유한 귀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따스한 온기를 품은 갈색 눈동자와 시원스러운 표정은 그대로였다.

여인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샐리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내 여인의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커졌다. 여인의 놀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샐리?”

다정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샐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정을 추스르며 샐리가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라 아가씨.”

“샐리? 정말 샐리야?”

“네. 아가씨를 모시던 샐리가 맞아요.”

그 말에 사라는 달려가 샐리를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헤어진 것이 에스테반가의 저택 앞에서였다. 그때 샐리는 더러운 몰골을 한 하녀였고, 사라는 앞일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그것도 제국도 아닌 바르샤에서 만날 것이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정말 보고 싶었어! 어떻게 이곳에서 너를 만나지?! 이거 꿈이 아닌 거지? 응?”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치는 사라의 말에 샐리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어릴 것 같은 눈으로 빙긋이 웃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테오도라와 카샴은 당황한 눈으로 애틋한 얼굴로 껴안은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라의 방. 샐리와 사라는 단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사라가 샐리를 바라보았다.

하녀가 찾아와 여신 세레나를 닮은 점성술사를 닮은 여인이 찾아왔다고 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새하얀 피부에 붉은색 머리카락과 밝은 황금색 눈동자를 가졌다는 말에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차마 샐리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다만 샐리를 닮은 외양을 가졌다는 점성술사를 한번 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샐리라니.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사실 처음에 너를 보았을 땐 못 알아봤지 뭐야.”

그도 그럴 것이 사라가 알던 샐리의 모습은 지금과는 너무 달랐다. 헝클어진 새빨간 머리카락과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 넝마 같은 옷.

하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예쁜 소녀를 알았다. 제대로 꾸미면 누구보다 예쁘게 빛날.

그러나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혹적인 외모라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워지다니 정말 놀랐어. 그러니 에스테반 공작님도 네게 빠지셨겠지?”

“알고 계셨어요?”

“그럼. 그이에게 부탁해서 너에 대한 소식은 모두 전해 들었어. 네가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처음부터 그렇게 될 생각으로 내 대신 저하를 만나겠다고 한 거야?”

“……네. 맞아요.”

“그렇구나. 그랬었어.”

사라는 감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말로 놀랐어요. 그때 말씀하셨던 분이 카샴 왕자님이셨던 거예요?”

“그래. 날 데리러 오겠다고 했던 그 사람이 바르샤의 왕자였어. 무슨 동화도 아니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샐리를 에스테반 저택에 들여보내고 사라는 어두운 마음으로 가게로 돌아왔다. 에스테반 공작이 샐리를 선택했다는 말에 마담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눈을 부릅떴다.

“그게 아니면 에스테반 공작가 에서 저를 왜 돌려보냈겠어요. 믿지 못하겠으면 에스테반 공작 저에 사람이라 보내던가요.”

그 말에 마담은 이를 으득거리며 사라를 노려보았다. 마담은 내일 해가 뜨자마자 제대로 확인을 해볼 것이라며, 일하기 싫어 같잖은 수작을 벌인 것이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날 사라는 잠이 들 수 없었다. 자신을 대신해 저택에 들어간 샐리에 대한 걱정과 오지 않는 그를 향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방문이 똑똑 열렸다. 한숨도 자지 못한 사라는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혹시 샐리에게 문제가 생긴 걸까? 그럼 큰일인데.

마담이 언제고 한번 자신을 혼쭐내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만약 일이 잘못된 거라면 그 건을 빌미로 처참하게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든 사라의 눈이 커졌다. 그였다.

카샴.

아는 것은 이름뿐이었던, 그 남자.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향해 카샴이 다가왔다. 그를 향해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이거 꿈? 나 설마 깜빡 잠들어 버린 거야?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밤 느꼈던 그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을 마주친 카샴이 말했다.

“너무 늦게 왔지. 미안.”

그 말에 사라는 눈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흐엉, 하고 아이처럼 우는 사라를 카샴은 놀란 얼굴로 토닥여주었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감히 널 울린 거야?”

사라는 우느냐 그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흐느끼는 그녀를 토닥이며 그가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구인지 말해. 단칼에 죽여 줄 테니까.”

뭐?

잘못 들었나 싶어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카샴은 세상 더없이 부드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내 고국 바르샤로 가자. 그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줄게.”

사라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떠난다는 것에 아쉬워할 새도 없었다. 그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가 제 옆에 있는 것이 꿈처럼 황홀하고 행복했다.

바르샤로 가는 배에서 두 사람은 첫날밤을 보냈다. 그는 마치 수십 년을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탐욕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그녀 역시 근육이 덮인 탄탄한 그의 몸을 껴안으며 몇 번이나 절정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사라에게 성교는 늘 돈을 받고 해야 하는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줄은, 이렇게 눈물이 나올 만큼 황홀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사라는 그와 입을 맞추며 생각했다. 앞으로 이보다 더 자신을 뜨겁게 만들 사람은 평생 없을 거라고.

모든 것이 끝난 후, 사라는 나른한 얼굴로 그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이 얽혀 있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사라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어제 알았죠? 나, 당신이 처음이 아니에요.”

그는 물론 사라가 창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과 실제로 몸을 겪는 것은 달랐을 것이다.

그녀는 수줍은 처녀가 아니었다. 게다가 뜨거운 그의 품에 취해 이성을 잃고 끝없이 교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사라는 엄청난 후회가 밀려듦과 동시에 그가 그녀를 더럽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워졌다. 그러나 잠시 후 들린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카샴은 두 팔로 그녀를 끌어 올려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상관없어.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당신을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이니까.”

“……!”

그 말에 사라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그를 꼭 껴안았다. 카샴은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녀를 껴안았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에게는 조금의 원망이나 서운함도 없다. 그러나 그녀를 안았던 사내놈들에 대한 감정까지 정리한 것은 아니었다.

부하들에게 이미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이들의 명단을 조사시킨 후였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그녀를 품에 안았던 놈들은 얼마 후면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기분 좋은 듯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의 눈을 보며 사라가 쿡 하고 웃었다.

“그런데 당신, 진짜 정체가 뭐예요?”

사라는 그때까지도 그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연회장에서 그가 알려준 것은 바르샤에서 왔다는 것과 카샴이라는 이름뿐이었다.

그저 탄탄한 몸과 거친 손을 보고 그가 바르샤의 군인이 아닌가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가게 앞에 준비되어 있던 거대한 마차와 그를 정중하게 수행하는 이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귀한 자인지 모른다.

“설마 귀족이에요?”

그 말에 카샴은 피식 웃었다.

“비슷해.”

귀족이면 귀족이지 비슷한 건 또 뭘까. 귀족만큼 부유한 평민이라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라를 향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나 바르샤의 열세 번째 왕자야.”

“……!”

사라는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이들과 인연을 맺고 싶다는 욕심이나 야욕도 없었다.

적당히 돈 있는 상인이나 귀족의 첩이라도 된다면 팔자가 좀 편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것도 이국의 왕자라니…….’

솔직히 말하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지기에 이미 그녀는 그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라는 그를 끌어안고 말했다.

“저도 상관없어요. 제게도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렇게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사라는 제국의 영세한 가문의 영애, 마리아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리 왕위 계승과는 관계가 없다 해도 왕자는 왕자인걸. 그에 맞추려면 적어도 귀족은 되어야 구색이 맞으니 몰락한 자작가에게 가짜 이름을 산 거야. 그래서 나 이곳에서는 자작가의 딸 마리아야.”

아직도 그 우아한 이름이 어색하다는 듯 사라가 웃었다. 그제야 샐리는 카시스가 아무리 그녀의 행방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 먼 바르샤에서 가짜 신분까지 만들며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었으니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왕자님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저희와 아가씨를 만나지 못하게 하신 건가요? 제국 사람과 친분을 맺으면 그 신분이 가짜라는 것이 들통날까 봐요?”

“맞아. 황실에서 나온 사람과 만나면 내가 귀족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게 뻔하잖아. 자연스럽게 내 진짜 정체를 들킬 위험도 커질 테고 말이야.”

사라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들이 데려온 아내가 제국인이라 국왕 폐하와 어머님께서 무척 화가 나신 상태거든. 안 그래도 외국인이라 마땅치 않아 하시는데 귀족도 아닌 평민, 그것도 창부였다는 걸 알아봐. 분명 평생 아들 얼굴은 보시지도 않을 거야. 그럴 순 없는 노릇이잖니.”

“…….”

그제야 샐리는 사라가 저택에 숨어 살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왕자가 가둔 것이 아니라 사라가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 왕자가 난처해질 것을 걱정해서.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샐리가 사라의 손을 맞잡았다. 여전히 그녀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녀의 마음처럼.

“저와 황녀 저하께서 이곳까지 온 건 정말 신이 인도하신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가씨께서 바르샤에서 누구보다 당당한 왕자의 아내가 될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그 말에 사라의 눈이 커졌다.

* * *

카샴 왕자의 저택에 있는 테이블에는 네 사람이 모여 앉아 있었다. 카샴과 사라, 테오도라, 샐리였다.

카샴이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내 아내에게 누구도 무시 못 할 신분을 만들어주겠다고?”

“그래.”

테오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제국의 제1황녀야. 제1황녀가 신분을 증명해 주고, 친분을 과시한다면 그 누가 그녀를 의심할 수 있을까. 고작 한미한 자작가의 영애가 아니라, 제국의 황족과 깊은 인연을 가진 여인이라고 하면 바르샤의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제국이 주는 이름이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황실과 개인적인 친분을 나눌 만큼 대단한 여인이라면,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데려온 여인이 외국인에 볼품없는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고 성내던 황제의 마음조차 풀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걸 맨입으로 해 준다는 건 아닐 텐데. 원하는 게 뭐지?”

“당신의 친구라는 신분으로 왕궁에 잠시 머무르게 해 줘.”

“고작 그뿐?”

“그래.”

카샴은 그 대답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눈앞의 여인은 결코 만만한 이가 아니었다. 자신이 검을 뽑았을 때조차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여인이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노리는 것이 확실했다. 그의 아내가 진짜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그녀에게 엄청난 기회일 터였다.

그것을 약점 삼아 자신에게 더한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국왕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거나, 자신의 계획에 협력해달라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카샴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테오도라를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찰싹. 그의 등을 친 사라가 눈을 흘기며 소리쳤다.

“그런 식으로 눈을 치켜 올리지 말라고 했죠.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요?”

“……버릇이 되어서 그만.”

그 말에 대번에 카샴은 눈에 힘을 풀고 어색한 얼굴로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라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바르샤의 제일가는 미치광이 검사가 여린 여인에게 제압당한다는 말을 누가 믿을까. 자신도 보지 않았더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테오도라는 애써 웃음을 감추며 말했다.

“의심할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정말로 그뿐이니까. 어차피 지금 국왕 폐하를 만나 보았자 그분께서는 내 얘기 따위 듣지 않으실 테지. 그런 의미 없는 자리 따위는 내게 필요 없어.”

폐쇄적인 바르샤의 국왕. 그는 제국의 황족에게 어떤 관심도 없었다. 굳이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왕자의 힘을 빌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나 보았자 귀찮아하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테오도라는 알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그를 만나기보다는 왕궁에서 지내면서 그를 공략할 완벽한 계획을 짜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카샴은 미심쩍은 눈으로 테오도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그 말에 샐리는 눈을 빛내며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환희에 찬 눈빛을 교환했다.

드디어 바르샤의 국왕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기쁜 것은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사라도 환히 웃으며 자신의 남편을 껴안았다.

“고마워요, 여보.”

어차피 그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기에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포근한 아내의 품속에 파묻힌 카샴은 헤실 웃었다.

* * *

카샴은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아내와 함께 찾아뵙고 싶다는 편지였다.

그렇게 화를 내긴 했지만 내심 국왕도 막내아들이 보고 싶었던 터라 바로 답장이 왔다.

[그러든가.]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답장에 카샴은 이를 으득거렸지만 사라는 이 정도 답장을 보내신 것을 보니 마음이 조금 풀리신 것 같다고 기뻐했다.

즐거워하는 사라를 보고 카샴은 더 이상 화내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바르샤 왕에게 갈 날이 정해졌다. 테오도라와 샤샤도 동행하기로 했다. 함께 가자는 말에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황녀 저하께서 제게 기대했던 일은 끝마쳤어요. 왕을 만나 협상하는 영역은 제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이만 제국으로 돌아갈게요.”

그 말에 테오도라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샐리를 잡지는 않았다.

너무 오래 두 사람이 같이 사교계를 떠나 있는 것은 좋지 않을뿐더러 혼자 있을 어머니도 신경 쓰였다. 그래서 샐리의 일정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샐리는 사라를 찾아갔다. 오늘은 샐리와 함께 자고 싶다는 사라의 말에 카샴은 세상 누구보다 절망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사라는 아주 단호히 말했다.

“동생이 다시 먼 곳으로 떠난다는데 당연히 같이 자야죠.”

동생. 그 말이 어쩐지 마음에 남아 샐리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샐리와 사라는 나풀거리는 잠옷을 입고 한 침대 위에 편히 누웠다. 테이블 위에는 잔향만 남은 바르샤산 빈 술병들이 놓여 있었다.

마지막 술을 비우며 사라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바르샤 술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질 않아. 역시 술은 제국의 술이 최고야. 달콤하고 진하고, 잘 취하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샐리의 말에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키득키득 웃었다. 샐리가 사라의 하녀였던 시절, 아주 가끔 사라는 샐리와 함께 술을 마셨다.

기분이 좋아진 손님이 값비싼 술을 통째로 선물로 주고 갔을 때였다. 거절할 줄 알았던 어린 하녀는 의외로 선뜻 술잔을 받았다.

샐리는 술을 아주 잘 마셨다. 주량이 센 사라에게는 아주 좋은 술친구였다. 술에 취해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기분 좋은 취기에 사라는 빙그르르 웃으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샐리, 공작님께서는 잘해 주시니?”

그 말에 샐리의 가슴 한편이 살짝 아려 왔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많은 것이 생각나는 것일까.

그와 함께 가서 먹었던 슈아드렌의 달콤한 케이크, 자신을 위해서 분노했던 모습, 그답지 않게 환하게 웃던 얼굴, 꼭 돌아오라며 팔찌를 채워 주던 모습.

그의 모습이 터진 강물처럼 생각나 샐리는 당황스러웠다. 샐리는 애써 그 감정을 마무리하며 눈썹을 내려 웃었다.

“……네.”

“그렇구나. 다행이다.”

환하게 웃는 사라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다. 예전에도 아름다웠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빛이 났다.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샐리는 안심이 되었다.

“행복해 보이세요.”

그 말에 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응. 아주 많이 행복해. 그 사람 덕분에.”

사라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이에 대한 소문은 알고 있니?”

“곱게 미친 분이라는 말이요?”

“푸훗. 그 별명은 좀 귀엽네. 내가 들은 별명은 더 굉장한데. 미친 광인, 피의 살육자, 전쟁의 악귀. 얼마나 엄청난 줄 몰라. 누가 들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 악마랑 결혼한 줄 알 거야.”

사라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나에겐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거든. 정말 철저하게 감췄어. 그래서 나는 그 별명을 이해하지 못했어. 누군가 그를 시기해서 악질적인 별명을 붙였다고 생각했지.”

그런 그의 별명이 진짜라는 것을 안 것은 바르샤로 온 지 두 달이 지나서였다.

새벽녘 사라는 잠에서 깼다. 함께 침대 위에서 잠들었던 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갔지, 하고 그를 찾아 저택을 헤매다 그를 발견했다.

늦은 시간 그는 어딜 다녀온 건지 외출복을 걸치고 있었다. 어두운 방에서 등불을 켜 놓고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건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피 묻은 검을 천으로 닦아 내고 있었다. 사라는 그 모습을 보고는 놀라 입을 막았다.

“도대체 그 핏자국은 뭐냐고 물어보니까 대답을 안 하더라.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꾸 말을 안 하기에 나를 속인다면 앞으로 당신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니까 그제야 말을 해 주었어.”

사라는 그날 낮에 부랑자 한 명과 작은 다툼을 벌였다. 돈을 구걸하는 부랑아를 그냥 지나친 사라에게 그가 욕설을 내뱉은 것이다. 사라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지만, 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샴은 자신의 아내에게 그런 모욕을 한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죽이고 싶었지만 내가 싫어할까 봐 그러진 못했대. 그저 조금 혼내 주었다고 말하는데 새삼 그가 너무 무서웠어. 어쨌건 그런 이유로 사람에게 칼을 휘두른 거잖아.”

그런 사라의 불편한 감정이 전달된 것이었을까. 카샴은 아이처럼 필사적인 얼굴로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 하지 않을 거라고, 바뀌겠다고. 절절하게 비는 그 모습은 그녀가 자신을 미워할까 봐 겁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처음 만났던 날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나더라.”

나는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고개를 내젓는 사라에게 카샴은 말했다.

―첫눈에 반한 여인은 신이 정해 주는 운명의 상대야. 내게는 오직 당신뿐이야.

그 말은 사라의 가슴에 박혀 따스하게 번져 나갔다.

“나 사실 그 일을 시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날 예뻐해서 첩으로 거둬 가는 남자는 있을지언정, 많은 남자를 만난 여자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주는 남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니었어.”

사라는 배시시 웃었다.

“내 진짜 모습을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더라.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를 싫어할 수 있겠니. 오히려 진짜 모습을 아니까 더더욱 그 사람과 가까워진 느낌이 들더라고. 그가 내숭을 떨었을 때는 내게 뭔가 숨기는 것 같아서 내내 마음이 불안했거든.”

사라는 두 볼을 감싸며 말했다.

“툭하면 검을 휘두르는 미치광이 검사한테 끌리다니 나 좀 변태 같나?”

그 말에 샐리는 웃었다.

“전혀요.”

그 후로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라가 바르샤에 와서 있었던 일들, 제국에서 샐리가 겪었던 수많은 일들.

특히 사라는 샐리가 곤란했던 상황을 이야기할 때마다 정말 분하다는 듯 화를 냈다.

“하여간 그놈의 귀족 년들. 잘난 것도 없으면서 평민이라고 무시하지! 서로 신분장 떼고 머리채를 잡아 봐야 뒷골목 출신이 무서운 줄 알지.”

사라의 반응에 샐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어린아이가 무슨 일만 터지면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르는지 알 것 같았다.

사라가 걸걸하게 욕을 해 줄 때마다 막힌 속이 쑥 뚫리는 기분이랄까. 사라의 욕설은 엘리제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정점을 찍었다.

“와, 세상에 그런 년이 있어? 그년이야말로 곱게 미친년이네. 내 남편보다 사악한 것 같아!”

이른 새벽 샐리는 눈을 떴다. 옆 침대에서 곤하게 잠이 든 사라가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그마안……. 더 이상은 아…… 안…….”

두 볼이 살짝 붉어진 얼굴과 앙탈 섞인 목소리에 무슨 의민지 대번에 알아챘다.

카샴 왕자는 낮에는 아주 제 말을 잘 들어주지만, 밤에는 돌변하여 제 말을 조금도 들어주지 않고 달려든다며 투덜거렸던 사라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뜨거운 신혼이네.’

샐리는 풋 하고 웃으며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이 뜨거운 나라를 떠나기 때문일까.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샐리는 창가의 테라스에 팔을 걸치고는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햇빛이 비치는 새벽하늘은 보랏빛과 하늘빛의 묘한 경계에 있었다.

그 하늘 아래로 흙으로 만든 네모난 건물들이 보였다. 잎이 넓고 키가 큰 초록 나무와 마을 중앙의 오아시스도 보였다.

벌써 며칠을 지냈던 곳이건만 이런 시간에 홀로 깨어 보니 어쩐지 처음 와 보는 세계인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오랜 시간 꾹꾹 눌러 왔던, 잊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새어 나오는 것은.

“나는 내 진짜 모습을 당신에게 조금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어.”

전생의 샐리는 그에게 절대 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뒷골목 출신의 미천한 여자. 남자에게 몸을 파는 창부. 그 모습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 주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래서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말투를 흉내 내고, 취향이 아닌 드레스를 입었다.

때로는 거짓말도 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척,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척. 진짜 모습을 숨겼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어느 날 그가 이마를 감싸며 짜증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네 진짜 모습을 모르겠어.

남자를 유혹하고, 돈을 벌기 위해 웃음을 파는…… 당신을 사랑하는 여자예요.

자신이 생각해도 끔찍한 설명이라 샐리는 그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게 우리 사이에 중요한가요?

그 말에 어째서 그는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지었을까. 그건 지금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때도 지금도 샐리는 그에게 진짜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그가 아는 샐리는 진짜 샐리가 아니다. 우아한 미소를 짓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그녀는 신중히 다듬어진 것이었다.

내면에 있는, 불꽃처럼 뜨겁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진면모를 그가 알아챈다면 그녀는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을 터였다.

그건 재앙 같은 그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둘렀던 껍데기가 깨졌다는 것이니까.

그녀가 두른 껍데기는 아직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종종 두텁게 덧대어 바른 껍데기가 깨질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샐리는 그것이 너무나 불안했다.

같은 시간, 함께 목욕을 마친 카시스와 캬는 샐리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주인 없는 빈방에 들어오는 것은 무척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이 자꾸 졸라 대니까.’

캬는 틈만 나면 낑낑거리며 샐리의 방으로 가자고 졸라 댔다. 물론 이 방에 들어온 것이 오로지 캬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카시스는 애써 모든 탓을 작은 동물에게 돌렸다.

카시스는 캬를 안고 창가에 서 있었다. 캬는 새까만 눈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나 어린 여우의 눈에는 그저 새까만 밤하늘만 보일 뿐이었다.

카시스는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넋 놓고 창가를 보는 일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이런 행동은 아주 비효율적이며 쓸모없는 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샐리가 바르샤로 떠난 후 그는 이따금 이렇게 멍하니 밤하늘을 보곤 했다.

도대체 뭘 보냐고, 재미없으니 놀아달라고 캬릉거리는 작은 여우를 쓰다듬으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군.”

아주 많이.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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