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은빛 여우
“세상에. 아름다워라!”
카모라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푹신한 담요 위에 나른하게 누워 있는 은빛 여우였다.
아름다운 외양을 가졌다는 소문답게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털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커다란 귀는 귀여웠으며 새까만 눈동자는 흑요석처럼 반들반들했다. 어느 귀족보다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어쩜,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죠?!”
카모라는 황홀한 눈빛으로 여우를 바라보았다.
에스테반 공작이 황성의 숲에서 은빛 여우를 잡았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카모라는 그 소문을 듣자마자 샐리를 찾아왔다. 그녀는 은빛 여우의 엄청난 팬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리 와 보세요, 여우님. 여기 여우님이 좋아할 만한 최고급 간식을 가져왔어요.”
카모라는 소고기를 구워 말린 마른고기를 내밀며 살랑였다. 그러나 그녀의 애타는 목소리가 무색하게 여우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카모라는 좌절했다.
“어떻게 이 간식을 보고도 저토록 오만하게 반응할 수 있죠?! 이게 얼마나 맛있는 건데!”
작업에 지쳐 쓰러진 카모라를 그 냄새만으로 일으켜 세우는 마성의 음식이었다.
그러나 여우는 카모라의 외침이 시끄러운 듯 큰 귀를 쫑긋하더니 샐리의 품을 파고 들어가 버렸다. 카모라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새 여우를 길들인 거예요?”
샐리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숲속에서 잡았을 때부터 그랬어요. 제 앞에서는 경계심을 풀고 다가오더라고요.”
“이 여우 수컷이에요?”
여우 주제에 미인을 알아보는 거냐는 카모라를 향해 샐리가 차분히 대답했다.
“수컷은 맞지만 그런 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해 이 아이가 좋아하는 건 제 향이거든요.”
“향이요?”
“네. 알아보니 은빛 여우는 향에 아주 민감한 동물이라고 해요. 향에 대한 호불호가 무척 강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향에는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해요.”
“어머머, 그래서 샐리의 향에 뿅 갔다고요?”
카모라는 정말이지 기가 찬 눈빛으로 여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야 어찌 되었건 여우는 편안한 얼굴로 샐리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갸르릉, 소리를 내는 것이 정말로 저 품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카모라가 말을 내뱉었다.
“누구랑 똑같네.”
“네?”
“햇살에 반짝이는 은빛 털하며, 샐리를 제외한 사람에게 새침한 반응하며. 누군가와 꼭 닮았잖아요.”
그 말에 샐리는 그녀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카모라는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공작 저하께서 사냥한 동물을 여인에게 준 건 이번이 처음인 거 알아요? 그래서 사교계는 지금 난리가 났어요. 사내가 여인에게 사냥한 동물을 준다는 건 여인에 대한 구애의 표시니까요. 게다가 그 동물이 평범한 동물도 아닌 은빛 여우라니 여인들의 마음을 자극할 만하죠.”
덕분에 여인들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에스테반 공작의 이름을 불렀고, 귀족 사내들은 은빛 여우를 꼭 잡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이 작은 여우 한 마리가 사교계를 들썩이게 만든 것이다.
샐리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저하의 총애는 너무나 대단해서 저를 늘 감동시킨답니다.”
“호호호. 그럴 만하죠. 저라도 은빛 여우를 주며 구애한다면 당장에 결혼해 버릴지도 몰라요.”
카모라는 그렇게 말하며 은빛 여우를 향해 다시 한번 마른 고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카모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샐리의 미소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미소 띤 얼굴 위로 샐리의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치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것처럼.
그날 새벽, 샐리는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지었던 화사한 미소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것은 폭신한 담요 위에 누워 있는 여우였다.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은빛 여우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카시스의 말대로였다. 그가 자신에게 준 은빛 여우는 그 무엇보다 그의 총애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고,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해 주었다. 그럼에도 샐리는 그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샐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의 선물에, 그의 미소에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다.
아직 그 파문은 크지 않았다. 전생에 그를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감정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의 아주 작은 감정이었다.
단순히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 생긴 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샐리는 용납할 수 없었다.
‘내게 그런 것은 필요 없어. 조금도.’
그때 샐리의 다리에 폭신하고 부들거리는 것이 닿았다. 어느새 보금자리를 빠져 나온 여우가 샐리의 다리 밑에 와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왜 안 자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샐리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여우를 안아 무릎 위에 놓았다.
여우는 갸릉거리며 샐리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털의 촉감과 따스한 온기가 샐리를 기분 좋게 했다.
그러나 그 기분 좋은 느낌과는 달리 샐리의 얼굴은 씁쓸해 보였다.
* * *
다음 날 샐리는 드레스 룸을 열었다. 드레스 룸에는 화려한 드레스와 구두, 보석이 가득했다. 샐리는 한 벌의 드레스를 여러 차례 입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짧은 기간 동안 사교계에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사교계 생활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드레스 룸에 걸려 있는 드레스와 구두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샐리는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여인이 되었고, 화려한 외양으로 주목받았다. 그걸로 이 사치스러운 물건들은 제 의무를 다한 셈이었다.
‘더 이상 가지고 있을 이유는 없어.’
특히 한 번 입고 더 이상 꺼내지 않는 드레스는 더더욱 그랬다. 샐리는 찬찬히 드레스를 살펴보았다.
반짝이는 금색 드레스는 엘리제의 생일 파티 때 입은 드레스였다. 회귀한 후로 처음 입는 드레스라 정말 고민하며 골랐었다. 지금 봐도 마음에 쏙 드는 드레스지만 다시 입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이대로 드레스 룸에 처박아 두었다가는 값비싼 쓰레기가 될 터였다. 몇 벌의 드레스를 옷장에서 뺀 샐리가 말했다.
“데이지, 이 드레스들은 상자에 잘 넣어 줘.”
며칠 후 샐리는 외출 준비를 했다. 귀부인들은 대체로 하녀에게 화장을 맡기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샐리는 직접 화장을 했다.
처음에 데이지는 샐리가 시중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샐리가 화장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샐리의 손길은 아주 능숙했다. 부드러운 파우더를 몇 번 얼굴에 두드리니 피부가 맑게 정돈되었고, 내리깐 눈썹 위로 붓이 지나쳤을 뿐인데 눈매가 그윽해졌다.
웬만한 전문가보다 훌륭한 솜씨니 하녀에게 화장을 맡길 필요가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시네요. 뭐랄까, 좀 더 고혹적이세요.”
데이지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 말처럼 오늘의 샐리는 평소보다 화장을 진하게 했다. 진한 눈매와 붉은 입술이 아름다우면서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오늘 갈 곳은 그럴 필요가 있거든.”
샐리는 붉은 입술로 대답했다.
검푸른 드레스에 양산을 손에 든 샐리는 고고하게 턱을 올리고 별채를 나섰다. 오늘 그녀가 향한 곳은 조금 특별한 곳이었다.
큰 거리에 줄줄이 서 있는 화려한 건물의 드레스 숍 뒤편으로 제대로 간판도 없는 한 가게.
이곳은 전생의 샐리가 전생에도 종종 애용하던 곳이었다. 간판도 없는 비밀스러운 가게였지만 내부는 무척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점원은 굽혔던 허리를 펼 생각도 못하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인을 보는 순간 직원은 감탄을 내뱉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걸음을 내디딘 여인은 괜스레 가슴이 콩닥일 만큼 요염한 얼굴이었다.
“보냈던 드레스가 팔렸다고 해서 왔어요. ‘S’라는 이름으로 보냈는데요.”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가게의 정체는 중고 드레스 숍이었다. 다른 중고 드레스 숍과는 다른 특징이 몇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최고급의 물건만 취급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가게를 이용하는 회원을 까다롭게 관리하여 누가 어떤 물건을 팔았는지에 대해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실상 최고가의 드레스를 팔 만한 이들은 대부분 귀족이었기에 그들의 품위를 지켜 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실제로 직원은 샐리의 정체에 대해 묻지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샐리를 대했다.
“얼마에 팔렸지요?”
샐리가 가장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1000골드에 판매되었습니다.”
드레스 숍에서 최신 유행의 드레스를 몇 벌은 구입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러나 샐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흐음. 생각만큼 좋은 금액은 아니군요.”
마치 혼나는 것 같은 느낌에 직원은 황급히 말했다.
“디자인이 세련되어 구매하고자 하는 분들은 많았는데 사이즈가 도저히 맞질 않아서 구매자를 구하기가 꽤 힘들었습니다.”
직원은 드레스를 입어 보았던 여인들을 떠올렸다. 가슴이 헐렁하거나 허리가 꽉 끼거나 길이가 너무 남거나.
결국은 수선을 따로 해 주기로 하고 겨우 팔았던 참이었다. 도대체 이런 옷을 누가 입었는지 궁금했는데 눈앞의 여인을 보고 납득했다.
“수선비를 제외한 가격입니다. 노력하여 판 금액이니 믿어 주십시오.”
딱히 직원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는데 직원은 안 해도 될 말까지 했다.
‘역시 이렇게 꾸미고 오기를 잘했네.’
오늘의 꾸밈새는 귀부인들을 대하기에는 너무 강렬하지만 이곳에 올 때는 딱이었다.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돈은 바로 받을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이곳의 장점은 아주 빠른 거래였다. 구입과 판매에 대한 모든 거래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수수료 10%를 뗀 금액입니다. 확인해 보세요.”
1000골드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화폐의 최고 단위인 솔라두스 금화로 받았는데도 작은 주머니가 가득 찰 정도였다. 금액을 확인한 샐리는 금화 주머니를 가방에 넣고 말했다.
“수고했어요.”
샐리의 도도한 목소리에 직원은 허리를 숙였다.
“좋은 물건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든 팔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보내 주십시오.”
저택으로 돌아와 마차의 문을 연 샐리의 눈이 커졌다. 햇빛을 등지고 카시스가 별채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웬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돌아오셨어요?”
“그런 날도 있는 거야. 나라고 늘 한밤까지 일할 순 없지.”
그렇게 말하며 카시스는 자연스럽게 마차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샐리는 난감한 얼굴로 그 손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 위에 손을 얹고 마차를 내려왔다.
카시스는 자연스럽게 샐리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얌전히 누워 있던 여우가 샐리를 향해 안겨 들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군. 널 너무 좋아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카시스의 시선은 오묘했다. 어딘가 뿌듯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 불쾌해 보이기도 했다. 샐리는 그 모습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하, 저 오늘 드레스가 팔렸다고 해서 다녀오는 길이에요.”
그 말에 카시스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기어코 판 건가.”
“그러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며칠 전 샐리는 카시스에게 말했다.
—입지 않는 드레스를 정리하는 것이 좋겠어요. 유행이 지나면 제값을 받기도 힘드니까요.
비록 지금은 입지 않는다 해도 하나같이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드레스였다. 그래서 카시스는 그 말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굳이 그래야 하나?
—괜히 묵혀 두어 보았자 낭비인걸요. 전 사치는 좋아하는 편이지만 낭비는 아주 싫어해요.
단호한 그 말에 카시스는 입을 다물었다. 어찌 되었건 드레스는 그녀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그 드레스는 모두 너에게 준 것이야. 그러니 네 마음대로 하도록 해.
그 말을 한 것이 고작 며칠 전인데 결국 드레스를 판 모양이었다. 어딘가 아쉬운 마음에 들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다니 관여할 사항이 아니었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을 다문 카시스를 향해 샐리가 비단 주머니를 내밀었다.
“여기 오늘 받은 대금이에요. 중고가치고는 제법 잘 받아 왔어요.”
“이걸 왜 내게 주는 거지?”
“저하의 돈으로 산 드레스잖아요. 그러니 저하께 드리는 게 당연하죠.”
“……네게 주는 것이라고 말했잖아.”
“저도 분명 말씀드렸어요. 제가 그것들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요.”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샐리와 눈을 마주친 카시스는 가슴이 철렁했다.
고요한 저 눈빛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 보았던 그녀의 눈빛이었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것이 그 앞을 가로막는 듯한, 조금의 감정도 담기지 않는 그 눈빛.
‘어째서?’
카시스는 혼란스러워졌다.
왜 그녀의 눈빛이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일까.
자신을 향해 곤란한 듯 눈을 내리깔거나 새침하게 눈을 흘기기도 했던 그녀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이어진 샐리의 말에 그는 그 답을 깨달았다.
“저는 저하의 진짜 애첩이 아니에요. 우리는 철저하게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 관계일 뿐이죠. 그러니 저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제게 부담이 될 뿐이에요.”
그녀가 그은 선을 그가 넘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도 새삼스레 그의 가슴을 쾅, 치는 것 같은 날 선 말이었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카시스가 힘겹게 대답했다.
“우리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는 세차게 흔들린 자신의 마음이 표 나지 않게 필사적으로 애쓰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네가 말했잖아. 주인과 고용인들과의 관계에서도 계약한 대가만이 아니라 소소한 보상이 있는 편이 좋다고. 적어도 너와 나의 관계는 보통의 고용인들보다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나?”
샐리는 굳은 얼굴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보통의 고용인들보다는 가까운 사이라고?’
샐리는 그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전생의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휘둘렸는지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샐리는 두려웠다. 또다시 그에게 감정을 가지게 될까 봐. 죽을 만큼 괴롭기만 했던 그 마음을 샐리는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마음은 조금도 모른 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샐리는 냉소 어린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늘 모든 게 쉽네요.”
그 말에 무표정했던 카시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샐리가 말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 앞으로도 저는 저하께 받은 드레스와 보석으로 누구보다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할 거예요. 에스테반 공작의 아름다운 애첩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거기까지예요. 저는 앞으로 그 이상의 선물은 받지 않을 거예요. 그럴 이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카시스는 샐리를 바라보았다. 검푸른 드레스를 입고 푸른 사파이어 귀걸이를 한, 무척이나 화사하게 꾸민 여인이 눈앞에 있었다.
흔히들 여인이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에게는 설렘이나 낭만 따위의 감정은 단 한 톨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언제나 불꽃처럼 화려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만큼은 그녀가 얼음처럼 냉랭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이건 가져가세요.”
다시 한번 분명히 선을 긋듯 샐리가 말했다.
카시스는 숨이 막히는 기분으로 눈앞의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받고 싶지 않았다.
정말 싫다면 늘 그래 왔듯이 명령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만큼은, 그런 말은.
“……그래. 그렇게 하지.”
지독히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카시스는 주머니를 손에 잡았다.
찰랑. 속에 가득 찬 금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주머니는 너무나 묵직했다. 지금 그의 마음처럼.
* * *
단둘이 있을 때 카시스와 샐리는 수다스럽게 떠들어 대지는 않았어도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곤 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샐리는 짧은 인사만 한 후 시선을 돌렸고, 카시스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둘 사이를 맴돌았지만 정작 두 사람의 표정은 아주 평화로웠다. 그 속이 어찌 되었건 겉으론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에반이 샐리의 방에 찾아와 말했다.
“주인님께서 오늘은 샐리 님의 방에 들르지 않으시니 기다리지 말라고 전하셨습니다.”
그 말에 샐리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의 애첩이 된 후로 그가 샐리의 방을 찾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샐리의 표정을 본 에반이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밤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 그리 말씀하신 겁니다.”
“알아요. 바쁘신 분이잖아요.”
샐리의 말에 에반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결국 그날 카시스는 샐리의 방에 오지 않았다.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던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아무리 총애하는 애첩처럼 보이기 위해서라고 해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온 것은 과했어. 이게 맞는 거야. 내가 말한 대로 그도 적당한 선을 긋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 한편이 서운한 것은 어째서일까.
샐리는 정돈되지 않는 감정을 꾹 눌러 담으며 침대로 향했다. 담요 위에 누워 있던 여우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침대 위로 따라 올라왔다.
“너는 네 자리에서 자라고 했지.”
샐리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여우는 그 말을 들은 척도 않았다. 품으로 파고드는 여우를 보며 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너도 그에게 돌려줬어야 했는데.’
너무 과한 선물. 그중에는 이 여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저러나 신기할 만큼 자신을 따르는 여우를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샐리의 심란한 마음도 모르고 여우가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샐리는 부드러운 은빛 털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끄응, 끄응.
‘무슨 소리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든 샐리가 눈을 크게 떴다. 품에 안겨 있는 여우가 괴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세상에!”
샐리는 황급히 여우를 만졌다. 거친 숨을 내쉬는 여우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신음만 내뱉었다.
샐리는 놀라 여우를 안아 들었다. 축 처진 작은 몸을 안은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너무 늦은 새벽이라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급히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생각했다.
‘그래. 에반을 찾아가자. 집사인 그라면 동물을 다룰 수 있는 하인들을 알고 있을 거야.’
그러나 어째서일까.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신음 소리에 정신이 혼란스러웠던 탓일까?
머릿속으로는 분명 에반에게 가려고 생각했건만 샐리는 어느새 카시스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쾅쾅쾅.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있던 카시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리 다급한 일이 생겼더라도 이런 늦은 밤 공작의 방을 대차게 두들기는 일은 무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저하!”
다급한 목소리에 카시스는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샐리의 목소리였다. 카시스는 몸단장을 할 새도 없이 문을 열었다.
어두운 복도에 샐리가 잠옷을 입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평소의 차분한 얼굴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축 늘어진 여우가 안겨 있었다.
“분명 잠들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샐리는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목소리를 떨었다. 카시스는 여우를 받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신중한 얼굴로 작은 몸 이곳저곳을 만졌다. 샐리는 바들거리는 두 손을 맞잡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귀족인 동시에 제국의 군인이었다. 말을 다루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에 아주 기본적인 짐승의 특성은 알고 있었다.
‘배가 볼록한 걸 보니 속이 좋지 않은 거군.’
카시스는 여우를 안아 그 배를 꾹 눌렀다. 여우는 불편한지 버둥거렸지만 카시스는 그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을 그리 누르자 켁, 하고 여우의 긴 주둥이에서 토사물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여우의 거친 숨이 편안해졌다. 카시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언가 잘못 먹어 체했던 모양이야. 걸려있던 것을 토해 냈으니 이제 괜찮을 거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얼마나 긴장했는지 다리에 힘이 풀린 샐리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카시스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마주쳤다.
“괜찮아?”
이런 식으로 그와 가까이 눈을 마주친 것은 자비스 사건 때 이후 처음이었다. 당황한 마음에 샐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스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 네가 내 방에 있기에 적합한 시간은 아닌 것 같군.”
그 말에 샐리의 얼굴이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새삼스럽게 이곳이 그의 방인 것을 깨달았다.
에반에게 갔어야 했다. 고작 이런 일로 이런 시간에 그의 방에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
두 사람 간의 ‘계급’을 따지면 무엄한 일이었고, 두 사람 간의 ‘사이’를 따지면 무례한 일이었다.
엄밀히 이 일을 따지자면 샐리는 그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셈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민망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일로 찾아와 죄송하다고 말하려는 참이었다.
카시스가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이런 늦은 밤에 너와 단둘이 있는 건 좀 곤란해.”
낮은 목소리에 샐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카시스는 조금도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빤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데려다줄게.”
그의 손을 바라보며 샐리는 눈을 깜빡였다.
“화내시지 않는 건가요?”
“내가 왜?”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저하의 방을 찾아왔으니까요. 그것도 고작 이런 일로.”
“고작이 아니잖아. 큰일이었어.”
“…….”
그 말에 샐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랬다. 그녀에게는 무척 큰일이었다. 그래도 그가 저렇게 말해 줄지는 몰랐다.
“오히려…….”
카시스는 샐리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내 방으로 찾아와 줘서 기쁘군. 꽤 많이.”
“…….”
어쩐지 다시금 얼굴에 열이 오르는 말이었다. 카시스의 눈빛에 샐리는 그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한 손에 등불을 든 카시스는 다른 한 손으로 샐리의 손을 잡고 걸었다. 샐리는 품에 여우를 조심스레 안고 그를 따랐다.
조금 전 일어났던 소란이 거짓말인 것처럼 복도는 불빛 하나 없이 어둡고 조용했다.
샐리는 카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의 곧은 등을 보고 걷고 있자니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품에 안은 여우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왜인지 눈물이 핑 하고 돌 것 같았다.
조용한 복도에 샐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우의 이름을 지어 주질 않았어요.”
“그랬나.”
“여우 또한 저하께 받은 과한 선물이니 다시 돌려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
샐리는 본래 동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동물 한 마리에 마음을 주고 울어 본 적 없는 그녀였기에 여우가 제 품을 떠나도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오늘, 금방이라도 생명이 끊어질 것 같은 여우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 마음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토록 사랑스럽게 파고드는 동물에게 결국 자신은 마음 한편을 주고 말았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정을 주고 말았나 봐요.”
그 말에 카시스가 중얼거렸다.
“……나와 같군.”
“네?”
나지막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샐리가 물었다. 그러나 카시스는 일부러 다른 말을 꺼냈다.
“여우는 보석이나 드레스 같은 선물과는 전혀 다르잖아. 사람을 알아보고 따르는 짐승이니까. 그토록 너를 따르는 아이니 힘들지 않다면 키워 주었으면 좋겠어.”
“…….”
“여우를 잡은 사람으로서 하는 부탁이야.”
부탁이라니. 오만한 에스테반 공작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샐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카시스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샐리의 방 앞이었다. 카시스는 문을 열어 주었다. 샐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떼었다. 맞잡았던 따스했던 온기가 떼어지고 두 사람은 마주섰다. 카시스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어서 자도록 해.”
다정한 목소리였다. 샐리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저하도요.”
방으로 들어가려던 샐리는 다시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여우의 이름은 ‘캬’라고 지을게요. 기분이 좋으면 그런 소리를 내거든요.”
갑작스런 말에 카시스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샐리는 톡 쏘듯 말을 이었다.
“저하의 부탁을 들어드리겠다는 말이에요.”
그 말에 카시스는 연한 웃음을 터뜨렸다. 여우는 뭐가 좋은지 갸르릉거리며 샐리의 품속에서 몸을 비비적거렸다.
* * *
샐리가 카시스에게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주었던 다음 날, 카시스는 꽤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말에 카시스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리오넬 후작을 바라보았다. 리오넬이 손가락으로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카시스가 저런 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새 이 제국에 무슨 큰일이 난 건가 싶어 리오넬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카시스는 리오넬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은 ‘마가렛의 개’라며 놀림당하고 있는 그는 한때 제국 사교계에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여인의 마음을 알고 싶으면 리오넬에게 가라고 할 만큼 여인의 속마음을 잘 알기로 유명한 그였다.
조금 후 카시스가 입을 열었다.
“여자가 남자의 선물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은 무슨 의미지?”
그 말에 리오넬의 눈이 커졌다. 그토록 심각한 표정을 짓는 이유가 여자 때문이란 말인가. 아니지, 무릇 사내에게는 여자만큼 큰 고민이 없는 법이었다.
카시스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리오넬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간단히 말씀드리죠. 귀찮으니 꺼지라는 이야기입니다.”
“……!”
그 말에 카시스의 눈이 흔들렸다. 리오넬도 자신의 대답이 무자비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리오넬은 연애 상담에 관해서만큼은 돌려 말할 생각이 없었다.
사내들이란 제대로 말해 주지 않으면 어떤 착각을 할지 모르는 종족이었으니까. 그래서 리오넬은 가르치듯 엄하게 말했다.
“저하, 여인이 그렇게 말할 때는 절대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됩니다. 왜 선물을 받지 않느냐고 묻지도 마시고, 더 좋은 선물을 주며 어떻게든 회유하려 들지도 마십시오. 그래 보았자 여인의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러기는커녕 자칫하면 여인이 떠나 버릴지도 모릅니다.”
“……!”
그 말에 카시스는 아까보다 더 충격적인 얼굴을 했다. 리오넬이 한 말들은 그가 밤새 생각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더 좋은 선물, 더 귀한 선물을 준다면 샐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떠나 버린다니.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던 어린 시절조차 누군가가 제 곁을 떠난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낀 적 없는 카시스로서는 매우 낯선 감정이었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자신을 떠난다는 말에 그의 심장이 바닥에 내려앉듯 철렁거렸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땀이 차오르는 주먹을 꾹 쥐며 카시스가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
“아주 쉽고도 어려운 방법입니다. 더 이상 진득하게 굴지 마세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이 아주 쿨하게 대하면 됩니다.”
그의 말에 따라 카시스는 그날부터 샐리에게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책을 읽을 뿐이었다.
식사는 했는지, 사교계에 별다른 일은 없는지, 무슨 말이라도 나누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그를 더 초조하게 한 것은 그를 따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샐리였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 카시스는 그녀가 이러다가 정말 자신을 완전히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오늘 카시스는 그녀의 방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녀와 좀 더 거리를 두어야 했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느새 그녀의 방문 앞까지 갔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이대로 방문을 열고 그녀를 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미소를 보고 싶었다. 자신을 보지 않는다면 콧대가 고운 옆모습이라도, 풀어헤친 붉은 머리카락이라도, 긴 속눈썹이 팔랑이는 금빛 눈동자라도.
하지만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엄청난 의지로 그 손을 멈추었다.
리오넬의 말이 맞았다. 그가 다가가자 그녀는 방어막을 쳤다. 이 마음을 더 이상 보인다면 그녀는 정말로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싫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지 못해도, 이야기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해도, 뭐라도 좋으니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결국 카시스는 몸을 돌려 그곳을 나왔다.
“보고 싶어.”
누구에게도 말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 * *
사교계에 혜성처럼 엄청난 스타가 나타났다.
이름은 캬, 성별은 수컷, 추정 나이 한 살.
아직 어린 은빛 여우의 인기는 대단했다. 꼭 한번 여우를 보고 싶다는 여인들의 요청에 샐리는 종종 티파티에 은빛 여우를 데리고 갔다.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여인들까지 빠져들 만큼 여우는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은빛 털과 흑요석 같이 빛나는 커다란 새까만 눈동자. 거기에 샐리의 보살핌이 더해져 포동포동 살도 오르니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세상에. 정말 예뻐요.”
“털은 또 얼마나 부드럽다고요. 손이 녹는 기분이에요.”
“꺄아. 귀 쫑긋하는 거 봐요. 귀여워라.”
캬의 주변을 둘러싼 여인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자신이 칭찬받는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아 샐리는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쩜 이렇게 순하죠? 한번 안아 봐도 되나요?”
한 여인이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에 샐리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음. 그런데 성격이 조금 까다로워서 사람을 좀 가린답니다.”
샐리의 말대로 캬는 아주 순했지만 사람을 가렸다. 캬는 다른 이들의 품에는 가지 않았다.
아무리 다정하게 말을 걸어도 여우는 휙 하니 고개를 돌리고는 샐리의 품에만 안겨 있을 뿐이었다.
“그 정도 도도함은 갖추어야 사교계를 정복할 수 있는 법이지.”
테오도라는 그렇게 말하며 막대를 흔들었다. 긴 막대의 끝에는 향낭주머니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캬는 주머니를 잡으려고 갸르릉거리며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테오도라는 그 모습을 보며 쿡쿡거렸다.
“아. 이 녀석은 정말 귀여워.”
그 모습을 보며 샐리는 미소 지었다. 샐리가 차를 따르며 물었다.
“요즘 황성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똑같아. 아바마마께서는 정무를 보시느라 다른 것엔 무관심하시고, 어마마마는 여전히 성에서 나오지 않고 계시지. 특별한 사건이라면 며칠 전 내가 할마마마와 또 한바탕 언성을 높였다는 정도일까.”
테오도라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샐리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황후가 병에 걸려 쓰러진 후 황실의 안살림은 모두 현 황제의 친어머니인 칼리아 황태후가 도맡았다.
황후의 권한이 고스란히 황태후에게 넘어간 셈이니 그 위세가 대단했다. 황제를 제외한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테오도라가 제국으로 돌아온 온 후 상황이 달라졌다. 테오도라는 황태후가 가져간 황후의 권한을 돌려받기를 바랐다.
한번 들어온 권력을 ‘그러마.’ 하고 놓을 호인이 어디 있을까. 결국 테오도라와 황태후의 갈등은 점차 커져 가고 있었다.
“황태후 마마께서 레이첼 황녀를 예뻐한다는 건 유명하잖아요. 그걸 보면 손녀에게 정을 주시는 분이실 텐데 저하께는 왜 그렇게 모지신지 모르겠네요.”
샐리의 말에 테오도라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내가 황후의 유일한 자식이기 때문일 테지.”
긴 시간을 기다려 태어난 황후의 아이는 딸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아쉬워했지만 그중에서 황태후의 실망이 가장 컸다.
황태후는 갓 태어난 테오도라를 보며 아들이었어야 했다며 혀를 쯧쯧거렸다.
처음부터 고까운 손녀이니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은 게 당연했다. 황태후는 테오도라에게 유독 엄했고 매정했다.
그런 자신과 달리 레이첼은 아무런 실망감 없이 얻은 손녀였으니 애정의 온도가 다를 만했다.
드러난 차별에 한없이 서운했던 감정도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테오도라는 이제 와 황태후의 예쁨 따위는 욕심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황실 안주인의 권한이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황성의 내부부터 제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순순히 주지 않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 어떻게든 할마마마에게서 그 힘을 빼앗아 오는 수밖에.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시간을 들이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야.”
샐리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께서 건강하셨다면 쉽게 가지실 힘이었을 텐데.’
테오도라는 태연히 말하긴 했지만 황태후를 상대로 싸우는 건 쉽지 않을 일이 분명했다.
“어라, 이 녀석 보게. 웬일로 나에게 안기는 거지?”
테오도라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늘 튕기기 바빴던 도도한 캬가 자신의 품에 안겨 들었기 때문이다.
“황녀 저하께서 방금 가져가신 향수 때문이에요. 요즘 그 향기에 푹 빠져 있거든요.”
“아하, 이 녀석 코가 무척 예민했지? 앞으로 이 향수를 매일 뿌려야겠는걸.”
캬의 볼록한 배에 얼굴을 부비는 테오도라의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샐리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혹시 황후 폐하께서도 동물을 좋아하시나요?”
“싫어하진 않으셨던 것 같아.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의 방에 작은 새가 있었거든. 워낙 성품이 조용하신 분이니 동물을 벗 삼아 말을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몸이 쇠약해진 후부터는 동물도 일절 키우지 않으시지만.”
“……그럼 여우는 어떨까요?”
“뭐?”
“이 아이, 황후 폐하께 데리고 가면 조금은 귀여워해 주지 않으실까요?”
그 말에 테오도라의 눈이 커졌다. 샐리의 의도를 대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테오도라는 제 품에 안긴 여우를 바라보았다. 귀한 동물이었고, 누구라도 마음을 녹일 만큼 사랑스러운 생김새였다. 테오도라가 새삼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동물을 벗 삼아 마음의 병을 이겨 낸 이들도 있다 했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황후 폐하께 조금의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테오도라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 있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병이 심해져 앓아누운 어머니는 사람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수발을 드는 시녀만이 그 곁을 지키고 매일 저녁 테오도라가 찾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외롭지 않을 리 없다. 이 은빛 여우의 보드라운 털을 매만진다면, 이 작은 녀석의 체온이 손에 닿는다면 조금은 그 마음이 위로되지 않을까.
“좋은 생각 같아.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도록 하지.”
그 말에 샐리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며칠 후 테오도라에게 연락이 왔다. 황후가 샐리의 방문을 허락했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황후가 황후궁의 문을 닫은 10년 동안 가족 외에 손님을 맞은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샐리는 일부러 차분한 진녹색 드레스를 골랐다. 아주 어둡지도 않고 아주 밝지도 않은. 그러나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특별한 날이었기에 오늘은 캬도 꾸미기로 했다.
“캬!”
캬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으르릉거렸으나 주인의 손길은 가차 없었다. 이내 새하얀 여우의 목에 황후가 좋아한다는 진녹색 리본이 살랑였다.
“오늘 가는 곳은 네가 아주 예뻐 보여야 하는 곳이란 말이야. 조금만 참아 주렴.”
그렇게 말하며 캬를 쓰다듬었다. 샐리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린 듯 얌전해진 캬를 바구니 안에 넣고 황성으로 향했다.
“어서 와.”
테오도라가 직접 샐리를 마중 나왔다. 샐리는 가슴 위로 손을 얹으며 말했다.
“벌써 몇 번째 황성에 왔지만 황후궁에 가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되네요.”
“아름다운 곳이야. 조금 적막하긴 하지만.”
테오도라는 그렇게 말하며 샐리를 황후궁으로 안내했다. 제국의 황성은 무척 넓었다. 건물만 해도 여러 개였는데 황제의 방과 황후의 방은 아예 건물이 달랐다.
황후궁은 여신이 다스리는 성이란 이름처럼 화사하고 아름답게 꾸며졌다.
새하얀 대리석마다 화려한 꽃들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고, 천장에 달린 마력석은 아름답게 세공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섬세한 문양이 조각된 창틀마다 환한 햇빛이 반짝였고, 매일 아침 새로 장식되는 생화는 향긋했다.
그러나.
“어머니, 테오도라예요. 들어가겠습니다.”
성의 가장 끝 쪽에 있는 황후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방은 무척 어두웠다. 커다란 창은 두터운 커튼이 가리고 있어 햇볕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런 향도, 소리도 없는 공간은 사람의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 한편에 있는 커다란 침대. 그 안에 황후가 기대어 앉아 있었다.
황후는 샐리를 보자마자 눈썹을 찡그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서린 그 감정을 읽고 샐리는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테오도라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기어이 손님을 데려왔구나. 내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잖니.”
작은 목소리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허리를 숙여 황후와 눈을 마주치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번 한 번만이에요. 오래 있지도 않을게요. 불편하시면 바로 돌아갈 테니 인사라도 받아 주세요.”
“…….”
황후는 그 말에 피곤이 가득한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마음이 병든 그녀라도 딸이 저토록 간절히 부탁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후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고 인사를 하거라.”
그제야 샐리는 한껏 숙였던 고개를 들어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답게 황후는 진한 밤색의 머리카락과 선명한 황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홀쭉한 얼굴은 초췌하였으나 내리깐 눈매는 우아했다. 샐리는 황후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으며 말했다.
“제국의 가장 고귀하신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샐리라고 하옵니다.”
“그래.”
황후의 대답은 짧았다. 자신의 딸과 어떤 관계인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녀는 조금도 대화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샐리는 슬쩍 시선을 돌려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폐하께 인사드리고 싶은 아이가 또 있는데 부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황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봐도 이 자리에 사람은 샐리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라니? 미약하게 새어 나온 궁금함에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열었다. 그 순간 쏙, 하고 은빛 여우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
황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정말 놀랐다. 새까맣고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황후와 눈이 마주친 은빛 여우는 갸릉거리더니 폴짝 하고 바구니 밖으로 나왔다.
샐리는 여우를 안아 들며 황후의 앞에 섰다.
“캬, 인사드리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이란다.”
샐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캬는 코를 실룩거릴 뿐이었다.
여긴 어디야. 무슨 냄새지?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모습에 샐리는 살며시 캬의 목을 눌러 고개를 숙였다.
“자, 어서.”
“캬릉!”
억지로 인사를 마친 캬는 ‘이제 됐지?’ 하는 얼굴로 샐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황후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성의 은빛 여우로군.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인데 어떻게 그대가 데리고 있지?”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서 사냥하신 것을 제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아아.”
황후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칩거한 지 10년. 현재의 에스테반 공작을 본 것도 오래전이었다.
마지막에 보았을 때는 소년이었지만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여인에게 사냥한 동물을 선물해 줄 만큼.
그때였다.
“캬아아!”
캬가 아기 같은 소리를 내며 샐리의 품에서 버둥대었다. 샐리가 곤란한 표정으로 “안 돼.”라고 말해도 캬는 앞다리를 바동거리며 그 품을 벗어나려 했다.
“왜 그런 거지?”
그 모습을 보며 황후가 묻자 샐리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이 아이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곧 진정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놔주어라.”
황후의 말에 샐리와 테오도라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황후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문이 다 닫혀 있는데 그 작은 짐승이 간다면 어딜 가겠느냐. 그래 보았자 이 방뿐이지. 그 정도 자유도 허락해 주지 않으면 너무 가엽지 않느냐.”
그 말에 샐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캬를 손에서 놓았다. 샐리의 품에서 나온 캬는 신난 듯 방 안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커튼을 벅벅 긁기도 하고, 의자에 올라가기도 하고, 테이블에 올라가 장식품을 건들기도 했다.
어느새 세 사람은 정신없는 여우의 모습을 눈으로 쫓기 시작했다.
“컁!”
뭣도 모르고 건드린 장식품이 빙글빙글 돌며 반짝이자 무서워 뒷걸음질 치는 캬의 모습에 테오도라가 먼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쿡.”
샐리도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지친 눈빛이긴 했지만 그 시선은 여우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조금은 희망이 있는 걸까.’
샐리는 황후 폐하가 이 시간을 조금이나마 즐겁게 생각하길 간절히 바랐다.
시녀가 준비해 준 차 한 잔을 마시고 샐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에도 침대에 기대어 있는 황후의 얼굴에는 진득한 피로가 서려 있었다.
“귀한 차를 대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차에 대한 보답으로 부족하나마 선물을 하나 준비하였으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황후도 이 만남이 곧 끝날 것을 알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간 쇠약해진 몸은 이제 그 체력이 다했다. 샐리도 테오도라도 내보내고 눈을 감고 싶었다.
샐리가 건넨 상자를 빤히 바라본 황후는 느릿한 손놀림으로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주 부드러운 면으로 만든 손수건이었다.
황후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아주 섬세하게 수놓아진 손수건을 꺼내드는 순간이었다.
“캬르릉.”
샐리의 품에 안겨 있던 캬가 코를 찡긋하더니 눈을 빛내며 황후의 곁으로 뛰어들었다. 차마 샐리가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황후는 놀란 눈으로 제 품에 뛰어든 작은 여우를 바라보았다. 여우는 감히 자신이 올라탄 이가 누구인지 신경 쓰지 않았다.
킁킁거리며 황후의 손에 다가간 캬는 황후의 손에 제 몸을 비볐다. 기분이 좋은 듯 갸르릉 소리를 내는 여우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세상 어느 것보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앙상한 황후의 손에 생생히 느껴졌다.
“…….”
황후는 말없이 여우를 바라보았다. 샐리도, 테오도라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후에야 샐리가 한걸음 내디뎠다.
“캬, 이리 오렴.”
싫어. 캬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고개를 내젓고는 황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서.”
이어진 말에 캬가 힝, 하고 샐리를 바라보더니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와 캬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여우의 눈동자는 무척 크고 새까맸다.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보석으로 만들어 넣은 것처럼 예뻤다. 황후는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말을 내뱉었다.
“귀엽구나.”
칭찬을 알아들은 것일까. 캬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 황후가 설핏 웃었다.
샐리와 테오도라는 그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너무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지만 분명 황후가 보인 첫 미소였다.
들어간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테오도라와 샐리는 황후궁을 나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테오도라는 자신을 싫다고 밀어내는 캬를 억지로 안아 얼굴을 비볐다.
“장해. 정말 장하다, 캬.”
그토록 기뻐하는 테오도라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샐리도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머니께서 웃는 얼굴을 본 게 얼마 만인지. 이 녀석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거야.”
“조금은 희망이 있다는 거겠죠?”
“그럼!”
황후는 작별 인사를 하는 샐리에게 다음에 오라거나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캬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아쉬움이 절절히 묻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기로 소문난 은빛 여우의 털은 엄청난 중독성이 있었다.
‘한 번도 만지지 못한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만진 사람은 없지.’
황후도 분명 또 한번 그 털의 감촉을 느끼고 싶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황후가 다음 방문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이 녀석 사람을 지독히 가리잖아. 어떻게 처음 보는 어머니의 품에 타이밍 좋게 안겨 들었지?”
테오도라가 샐리의 품으로 돌아간 캬를 보며 말했다. 샐리가 그 말에 눈썹을 곱게 휘며 웃었다.
“황후 폐하가 좋았던 거겠죠.”
순수한 대답과 달리 반짝이는 샐리의 눈빛이 오묘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테오도라가 허, 하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손수건이로군!”
샐리는 말없이 웃었다. 애초에 이 만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이는 샐리가 아니라 캬였다.
그래서 샐리는 작은 계략을 준비했다. 황후 폐하께 드리는 손수건에 캬가 요즘 빠져 있는 향수를 뿌려 놓은 것이다.
테오도라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놀랍다는 눈빛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절묘했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어머니께서도 거부감이 들지 않으셨을 거야.”
아마 억지로 캬를 안기려고 했다면 그녀는 분명 거부했을 것이다. 샐리는 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캬가 황후 폐하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아무리 좋아하는 향기라도 이 아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가지 않으니까요.”
“그런가.”
테오도라는 기쁜 얼굴로 캬를 바라보았다. 긴 시간 웃음을 잃어버렸던 어머니였다.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짓게 한 이 작은 동물이 주체 못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프란츠 황실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네게는 꼭 예쁜 짝을 찾아 주마.”
신성한 황실의 맹세를 알 리 없는 캬는 ‘하아암’ 하고 팔자 좋게 하품을 했다. 그 모습에 샐리와 테오도라는 웃고 말았다.
그 후로 샐리는 캬와 함께 종종 황후궁에 들렀다. 처음에는 차 한 잔 마시고 떠났던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한 시간, 두 시간. 늘어난 시간만큼 황후의 얼굴도 조금씩 편해졌다.
함께 있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것은 아니었다. 주로 캬가 방을 헤집고, 까불고, 침대에 누워 있는 황후의 곁으로 가 그 품에 작은 몸을 안기는 것이 다였다.
여느 때처럼 황후의 배 위에 누워 갸르릉거리는 캬를 보며 샐리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제대로 예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구나. 감히 황후 폐하의 위에 올라앉다니 아주 무엄하기 짝이 없어.”
진지한 목소리에 황후가 말했다.
“괜찮으니 그냥 두어라.”
그 말에 샐리는 민망한 듯 미소 짓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황후는 그런 샐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테오도라에게 설명을 들어 처음부터 그 정체는 알고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며 테오도라가 사교계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는 여인. 과연 그 말대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경계가 갔다. 황후는 이제 사교계의 여인들 따위 질색이었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얼굴로, 누구보다 독한 말을 내뱉는 것이 그녀들이었다. 겉으로는 웃으며 속으로는 칼날을 가는 일도 허다했다.
저 아름다운 여인은 속으로 어떤 더러운 마음을 품고 날 찾은 것일까.
‘나에겐 더 이상 줄 것도, 빼앗길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처음 마음을 연 것은 보드라운 털을 가진 여우 때문이다. 손끝에 닿은 그 부드러운 감촉이 자꾸 생각나 두 번째 방문을 허락했다.
작은 여우는 다 죽어 가는 제 모습이 두렵지도 않은지 자꾸 품에 파고들었다. 그 체온이 생각나 세 번째 방문을 허락했다.
그리고 네 번째, 다섯 번째. 샐리의 방문이 이어졌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듣기 좋은 달콤한 말도, 어설픈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들어와 차 한 잔을 하고 다시 돌아갈 뿐이었다.
“내가 무섭지 않느냐.”
낮은 목소리에 샐리가 고개를 들었다. 침대 위에 기대어 캬를 쓰다듬고 있는 황후의 모습이 보였다. 황후는 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다 죽어 가는 황후, 정신이 붕괴되는 병을 앓고 있다, 미쳐 날뛰어 방 안의 모든 것을 깨부수기도 한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음습하여 보는 이가 다 오싹해진다. 별 해괴한 말을 다 들었을 것 아니냐.”
그것은 황후를 견제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악질적인 소문이었다. 아직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황후였기에 믿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경박한 여인들 사이에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로 쓰이곤 했다.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들, 그저 소문이 아닙니까.”
황후의 스산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소문이 아니라 하면 어쩔 것이냐.”
“…….”
파리한 눈매로 황후가 말을 이었다.
“아예 없는 말은 아니다. 아니, 속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더한 짓도 했겠지.”
마음의 병을 얻은 세월이 10년. 처음부터 이토록 죽은 자처럼 보낸 것은 아니었다.
병을 이기려 노력도 해 보고, 이런 병이 온 것이 원망스러워 짜증도 부렸다. 병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다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황제, 황태후, 재상, 시녀, 하녀.
‘나 자신까지도.’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 어서 나으셔야 합니다.
밝게 웃는 어린 딸을 두고 그럴 순 없어 황후는 아예 마음을 닫았다.
차라리 마음을 죽여 버리자.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말자. 그 편이 시체 같은 자신의 몸을 건사하는 방법이었고, 어린 딸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못나고 약한 어미였지만 제 손으로 목숨을 끊어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길 수는 없었다.
깊은 바닷속처럼 차갑고 고요한 황후의 눈동자 속에 있는 마음을 샐리는 읽었다.
샐리는 그 눈동자를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이전 생의 끝자락, 거울 속에서 보았던 자신의 눈동자였다.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으실 만큼 고통스러우셨던 것이겠죠.”
“…….”
“그래도 이렇게 버티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무척 강한 분이십니다.”
“……!”
그 말에 황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알아챈 것 같은 말투였기 때문이다. 샐리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전 그리하지 못했어요.”
그 말에 황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샐리를 바라보았다.
샐리는 차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그랬다. 병자의 몰골을 한 황후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동정하지도 않고 침착한 모습.
적어도 그 모습은 연기나 가면이 아니었다. 지금의 눈빛을 보고 그것을 더더욱 확신했다.
“설마 너도…….”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느냐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황후는 말을 흐렸다.
황후의 눈빛에 샐리는 그저 웃었다. 화사한 얼굴에 어린 미소는 아름답기 그지없었지만 어쩐지 처연해 보였다.
* * *
황후궁의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고 여전히 황후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테오도라가 아닌 다른 이가 종종 그 옆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샐리는 황후가 기댄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황후의 품에는 늘 사랑스러운 은빛 여우가 있었다.
황후는 절대 먼저 캬에게 손대지 않았다. 캬가 자신의 품에 다가와 제 손에 머리를 비빈 후에야 작은 몸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럴 때 캬는 ‘갸릉’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캬는 제 마음이 내키면 황후의 손에 있다가, 또 제 마음이 변하면 황후의 곁을 떠나 방을 헤집었다.
그런 캬의 모습을 보는 황후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지엄한 황성인지도 모르고 아주 제멋대로군.”
누군가 들었다면 헉 하고 놀랐을 말이었지만 샐리는 담담히 그 목소리를 들었다.
황후가 캬를 꾸짖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 저 작은 짐승을 조금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테오도라는 사교계에서 어떻지?”
황후는 이따금 테오도라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때마다 샐리는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여인들에게도 남자들에게도 아주 인기가 좋으십니다. 워낙에 영특하시고 다정하시니 따르는 이가 많아요.”
“그중에 테오도라를 흠모하는 남자들도 있느냐?”
무릇 결혼 적령기의 딸을 둔 어머니의 관심이 그런 것이리라. 속으로 웃으며 샐리가 말했다.
“많습니다.”
“……애써 거짓말할 필요 없다. 내 딸이지만 사내들에게 인기가 있는 여인은 아닌 걸 안다.”
“정말입니다. 실은 일전에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어느 백작 영식께 데이트 신청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말에 가라앉아 있던 황후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의 눈과는 전혀 다른 눈이었다.
“백작 영식께서는 엄청난 각오를 하고 황녀 저하께 말을 거신 것 같았습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황녀 저하께 함께 말을 타자고 하시더군요. 자기 가문 소유의 좋은 승마장이 있다면서요.”
“그래서?”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그 데이트를 승낙하셨습니다.”
테오도라는 자신에 대한 사사로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황후는 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읽은 샐리가 이어 말했다.
“약속한 날, 황녀 저하께서 친한 영식들과 휘하의 호위 기사들을 모두 끌고 승마장으로 가셨습니다.”
“뭐?”
“그날 수많은 사내들이 한데 모여 격렬한 승마를 즐겼다고 하더군요. 황녀 저하는 정말 잘 만든 승마장이라며 또 초대해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영식께서는 그 후 연회에 나오지 않으셨어요.”
“허어.”
황후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참으로 테오도라다운 이야기였다.
“어릴 때도 그리 사내들에게 호탕하고 담백하더니 조금도 변하질 않았구나.”
“어린 시절에도 그런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래.”
황후는 테오도라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입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 후로 종종 샐리는 황후와 테오도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후는 테오도라의 어린 시절을, 샐리는 테오도라의 최근 모습을 서로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기에 어머니께서 입을 여신 거지?”
자신 외에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어머니를 본 것이 오랜만이라 테오도라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샐리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화사하게 웃었다.
“비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