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8)

12. 어린 약혼자

샐리는 전에 없이 사교계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하는 곳이 너무 많았고, 챙길 이도 너무 많았다.

그러나 그전만큼 힘들지 않았던 것은 테오도라 덕분이었다. 감히 말하건대 테오도라는 샐리의 환상적인 파트너였다.

샐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데 유리처럼 섬세하다면 테오도라는 바람처럼 시원했다. 전혀 다른 성격만큼이나 그들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자연스럽게 커버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샐리가 가장 좋았던 것은 테오도라가 귀족 남성들을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샐리는 지금껏 귀족 남성과는 특별한 친분을 맺지 않았다. 말을 걸어오는 이들과 정중히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를 나누는 것이 다였다. 춤을 추자는 요청도 정중히 거절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가 에스테반 공작에게 푹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샐리는 너무 화려했고, 색기가 넘쳤다. 그런 자신을 알았기에 일부러 조심했다. 괜히 사내들에게 친절히 대했다가는 어떤 오해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유곽에서 일하는 하녀였다는 꼬리표까지 있기 때문에 조금의 오해도 커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교계가 여인들의 세계라고 해도 사내들의 마음을 얻는 것도 중요했다.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나누어야 했다. 샐리가 할 수 없었던 그 중요한 일을 테오도라가 해 주었다.

“젊은 영식들이 모두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 몰려 있네요.”

샐리의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소곤거렸다. 그 말처럼 테오도라는 수많은 귀족 사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보통 연회에서는 여인은 여인끼리, 사내는 사내끼리 모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저런 식으로 여인이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따금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도,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인이라는 비난을 듣거나 질투 어린 시선을 받곤 했다. 그러나 테오도라를 향해 그런 말을 내뱉는 이는 조금도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교태 섞인 표정이나 애교 섞인 목소리를 조금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와 사내들이 나누는 대화는 그런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알스에서는 국가가 물건의 가격을 매기지 않고 개개인에게 그 권리를 준단 말입니까?”

사내의 물음에 테오도라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알스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했지요. 개개인이 직접 시장의 가격을 조정하니 치열한 경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경쟁은 무엇보다 빠른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죠.”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 경제가 발전한 이유가 있었군요.”

테오도라는 세계 각국의 지식인과 정보가 보인다는 알스의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인재였다.

그런 그녀였으니 요즘 제국 귀족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보이는 알스의 최신 동향에 관해 술술 이야기가 나왔다.

그뿐 아니라 역사, 문화, 예술, 과학,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신지식에 목말라 있는 젊은 영식들에게 엄청난 인기였다.

“저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저토록 즐겁게 나누니 차마 질투도 못하겠어요.”

한 여인이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무릇 마음에 드는 영식을 독점하는 여인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이 들어야 정상이었건만, 테오도라와 영식들의 표정이 소년처럼 해맑아서 차마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요즘은 여인들이 아니라 젊은 영식들이 황녀 저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 오라버니도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연회에 오는지 물어온다니까요.”

한 여인의 말에 샐리는 두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런 면이 황녀 저하의 매력이시잖아요.”

그 말에 여인들은 두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과 당당히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 모습은 같은 여인이 봐도 멋있었기 때문이다.

샐리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테오도라의 사람이 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꿈을 이루시어 황좌에 앉으실 날은 아주 먼 훗날일 테지. 그때까지 그 옆에 있지는 못할 테지만…….’

테오도라가 자신에게 주는 수많은 것들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녀는 샐리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사교계를 함께 가는 전우이자 고민을 나눌 동료이며 매력을 느끼는 친구였다.

‘할 수 있는 한 오래 함께했으면 좋겠어.’

샐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그따위 계집애에게 뭘 그리 환장하는 거야! 이런 한심한 년놈들 같으니!”

샬롯은 귀부인의 체면 따윈 잊어버린 채 포악하게 소리를 질렀다.

요즘 그녀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테오도라의 달라진 위상을 그녀도 실감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샬롯을 모시는 시녀들만 곤욕이었다.

툭하면 날아오는 물건들 때문에 시녀들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물건을 던져도, 욕을 해도 샬롯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분노에 차오른 샬롯을 겨우 진정시킨 것은 한 시녀의 목소리였다.

“샬롯님. 에스테반 공작 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

샬롯에게 엘리제는 진정제 같은 역할이었다. 간간이 자신에게 들러 주는 엘리제 덕에 샬롯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샬롯은 다급한 발걸음으로 응접실을 향했다. 그곳에는 청초하기 그지없는 엘리제가 우아한 품새로 앉아 있었다.

“엘리제!”

샬롯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엘리제에게 달려갔다. 샬롯은 품위도 잊고 어린아이처럼 엘리제를 껴안았다. 엘리제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부인의 마음 알아요. 테오도라 황녀 저하와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많아져 속상하신 거죠?”

“속상한 정도가 아니에요. 아주 미칠 것 같아요. 어떻게 다들 그럴 수 있죠? 내 눈치를 살살 볼 때는 언제고 이제 와 황녀에게 몸을 비비다니요!”

“어리석음 때문에 훗날을 보지 못하는 거죠. 아무리 황녀 저하께서 순혈을 이어받았다고 하나 결국 황녀. 황제가 되실 분은 1황자 저하시고 황제의 어머니가 되실 분은 샬롯 부인인데 그것을 잊은 모양이에요.”

정말이지 너무나 다정하고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샬롯은 마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포악한 성정이라지만 샬롯도 사람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의 진심 어린 위로에 마음이 포근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겨우 감정을 진정시킨 샬롯은 엘리제가 사 온 초콜릿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녀는 분노를 표출하듯 초콜릿을 와그작 씹으며 말했다.

“흥. 이대로 그냥 있지는 않을 거예요. 감히 테오도라를 떠받드는 년들을 찾아가 당장에 혼을 내줄 거예요. 그럼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내게 돌아오겠죠. 어디 누가 이길지 한번 해 보자고요.”

샬롯은 흉흉한 눈빛으로 말했다. 싸움이라면 자신 있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다 죽어 가는 어미를 둔 어린 황녀라면 더더욱 그랬다.

자신이 나서면 상황이 변하리라 생각하는 오만한 얼굴을 엘리제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샬롯의 눈에 테오도라는 아직도 알스로 가기 전의 어린 소녀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제 멍청한 머리로는 상대도 할 수 없을 만큼 자란 것을 모르고.’

엘리제는 그 말을 입에 담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면 여인들은 더더욱 테오도라 황녀 저하의 쪽으로 붙어 버릴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라고요!”

샬롯이 감정적으로 소리쳤다. 자신이 하는 말이 다 맞는다고 맞장구 쳐줄 줄 알았던 엘리제가 저리 말하니 울컥한 모양이었다.

어린애 같은 모습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엘리제는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테오도라 황녀 저하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는 거예요. 실제로 황녀 저하께서 알스에 계셨을 때는 두 분 사이에 큰 문제가 없었잖아요. 두 분은 어차피 같은 곳에 공존할 수 없는 관계이니 멀리 떨어지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거예요.”

그 말에 샬롯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테오도라를 이 수도, 아니 제국 밖으로 떠나보내고 싶지만 그게 쉬운 일이던가.

돌아온 황녀의 경호는 엄격하여 알스에 보냈던 때처럼 겁을 주기도 쉽지 않았다.

“내가 가란다고 그 애가 가겠어요?”

“그냥 가라면 물론 가지 않으시겠죠. 그러니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되지요.”

샬롯은 그제야 엘리제에게 묘수가 있음을 눈치챘다.

“어떻게요? 무슨 좋은 수가 있는 거죠?”

재촉하는 샬롯을 향한 엘리제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를 결혼시키면 쉽게 해결되는 일이에요. 부인께서 그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세요.”

“뭐, 뭐라고?!”

샬롯은 충격받은 얼굴로 목소리를 떨었다. 엘리제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의 약혼자께서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에 터를 잡고 계시잖아요. 결혼을 하면 남편의 영지로 가는 것이 관례이니 자연스레 이 성을 떠나시게 될 테지요.”

“내가 왜 그년의 결혼을 반대하는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해?!”

흥분한 샬롯은 귀부인의 품격도 잊은 채 거친 말을 내뱉었다.

샬롯은 이 제국에서 누구보다 테오도라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테오도라가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는 순간, 그 아들은 자신의 아들인 존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샬롯은 최대한 테오도라가 결혼하지 못하게 방해할 셈이었다. 가능한 오래, 할 수 있다면 영원히.

“부인,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 보세요. 부인께서 너무 중요한 일이라 걱정이 과하신 것이에요. 테오도라 황녀께서 당장 결혼을 한다 해도 한동안 아기는 생기지 않아요. 황녀 저하의 약혼자이신 란슬롯 공자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이니까요.”

그랬다. 테오도라 황녀의 약혼자, 테오도라의 순혈을 지켜 줄 황족의 이름은 바로 라엘 란슬롯. 란슬롯 후작가의 셋째 아들이었다.

라엘과 테오도라가 지금껏 결혼을 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의 어린 나이 때문이다.

란슬롯 공자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세 살. 제대로 성년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이 칠 년, 테오도라와의 나이 차도 무려 여덟 살이었다.

아무리 나이를 따지지 않는 정략결혼이라지만 이 정도로 신랑이 어린 경우는 드물었다.

개인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제아무리 성장이 빠르다고 해도 사내가 제 구실을 할 만큼 크려면 적어도 열다섯은 되어야 했다.

그것을 이유로 샬롯과 존을 황태자로 미는 이들은 이 결혼을 끈질기게 반대해 왔던 터였다.

“란슬롯 공자는 또래보다 체구도 작고 몸이 약하다고 하죠. 그러니 더더욱 두 분 사이에 아기가 생기는 것은 나중의 일일 거예요.”

“하, 하지만…….”

“훗날 아기가 태어난다고 해도 어떤가요. 그때쯤이면 황자 저하께서 훌륭히 성장하여 늠름한 황태자가 되실 텐데요.”

“……!”

그 말에 샬롯의 눈빛이 흔들렸다. 꽤 그럴듯한 말이었다. 남들이야 어떻든 샬롯이 보기에 아들인 존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황자였다.

그녀는 황제가 존에게 정식으로 황태자 자리를 주지 않는 것이 황후의 눈치가 보여서라고 생각했다.

다 죽어 가는 황후의 세는 끈질기게 남아 있어서 그간 황실의 순혈을 강조하며 황태자 책봉을 반대했다.

그러나 조금 더 버티면 황후는 죽고, 자신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면 존은 누구보다 당당하게 어미를 뒤에 업고 황태자로서 발돋움할 수 있다. 샬롯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눈치채고 쐐기를 박았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도 이제 스물이 넘었어요. 황족의 여인치고는 결혼이 너무 늦었지요. 황후 폐하께서 병환 때문에 신경을 써 주지 못하고 계시니, 부인께서 넓은 아량으로 황녀 저하의 결혼을 진행해 주신다면 분명 많은 분들이 감동할 테죠. 특히 황제 폐하께서 더더욱 기뻐하실 거예요.”

황제. 황제의 애인인 그녀에게 그 이름은 절대적이었다. 하룻밤을 보내고 황자까지 낳았건만 황제는 늘 자신에게 무심했다.

그러나 황자만큼이나 샬롯의 가슴을 뒤흔드는 존재였다. 황제의 애인인 그녀에게 황제의 사랑은 늘 가지고 싶은 것이다.

“고민해 보세요. 저는 진심으로 부인과 황자 저하께서 행복하시기만을 바란답니다.”

샬롯의 손 위로 두 손을 얹고 말하는 엘리제의 얼굴은 정말이지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 * *

테오도라는 철이 들면서부터 황제 앞에서 소리 지르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황제는 자신의 앞에서 찡찡거리는 사람을 지독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눈썹을 찡그리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 말입니까?”

“그래, 결혼.”

황제는 자신과 똑 닮은 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제국의 황제에게는 머리 아픈 일이 무척 많았지만 그중 테오도라의 결혼은 가장 신경 쓰이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런 중요한 일을 지금껏 방치하고 있었던 것은 신랑의 나이가 어리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그것을 빌미로 반대하는 귀족들 때문이다.

평소라면 그런 개소리는 무시하고 결혼을 진행하였겠지만 누구도 아닌 테오도라의 결혼이었다.

제국의 제1황녀이며 고귀한 황실의 혈통을 가진 테오도라의 결혼. 황제는 조금의 잡음도 없기를 바랐다. 어차피 어린 약혼자가 나이가 들면 해결되는 문제니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샬롯이 찾아왔다.

—폐하, 하루라도 빨리 테오도라 황녀 저하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지? 아직 성년이 되기까지 한참 남은 영식과 결혼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그토록 반대할 때는 언제고.

—작년은 그랬지요. 열두 살은 너무 어린 나이잖아요. 그러나 이제 열세 살이 되었으니 제법 사내 티가 나지 않겠어요? 무엇보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의 나이가 너무 걸려요. 스물한 살에 아직 혼자라뇨. 황녀가 노처녀가 되는 모습을 보는 게 창피해 제가 한발 물러나기로 했답니다.

샬롯은 그녀답지 않게 자애롭게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코웃음이 나왔다.

황제는 샬롯을 잘 알고 있었다. 황자의 어미가 된 이후로 누구보다 표독스럽게 미래의 황태후 자리를 노린 그녀였다.

그런 여인이 자신의 황태후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테오도라를 위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토록 거슬려 했던 테오도라가 사교계에서 인기를 얻는 것이 못마땅하여 치우고 싶은 속셈일 테지.

정말이지 그 성정이 치졸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본심이 어쨌든 황제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샬롯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은 시끄럽게 떠드는 귀족 놈들의 입도 다물게 해 준다는 뜻이다.

언제 또 저 마음이 바뀌기 전에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 이 기회를 빌려 황제는 빛의 속도로 테오도라의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테오도라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황제도 테오도라가 요즘 얼마나 열심히 사교계 활동에 공을 들이는지 알고 있었다.

그로서도 늘 책만 보고 공부에만 빠져 있던 딸이 귀부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황후가 병약하여 제대로 사교계에 소개도 시켜 주지 못했건만 제 스스로 사교계에 안착하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다.

그래서 황제는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네가 노력한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사교계 활동은 꼭 수도에서만 해야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아니, 오히려 제대로 사교 생활을 즐기려면 황녀가 아닌 한 가문의 안주인이 되는 편이 낫지. 결혼과 동시에 네 남편에게는 명예 공작의 작위를 주마. 공작 부인이 되어 남부의 사교계를 이끌어 가는 것도 꽤 즐거울 거다.”

“…….”

그러나 테오도라는 차마 알겠다고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대로 순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했던 사교계 여인들의 마음을 잡는 일은 이제 막 흐름을 타고 있었다.

지금의 세력을 탄탄하게 잘 다져 놓으면 앞으로 황위로 가기 위한 든든한 뒷받침이 될 터였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황제는 테오도라의 어두운 얼굴이 그저 철없어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테오도라, 네게 지금 중요한 것은 여인들과 노닥거리는 일이냐, 프란츠 황가의 순혈을 잇는 것이냐.”

“……황가의 순혈을 잇는 것입니다.”

“다행히 잊지 않았구나. 그래, 황가의 혈통을 가진 네가 마냥 싫다고 결혼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야.”

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테오도라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녀였다. 황녀에게는 연애나 결혼의 자유 따윈 없었다.

황실의 혈통을 지키고 때때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타국의 왕과 정략결혼을 하는 일도 예사였다. 그것이 그토록 귀한 핏줄로 태어나 풍족하게 자란 대가였다.

하지만 테오도라는 그런 의무가 싫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내의 아내가 되어 후계를 낳는 것보다는, 스스로 칼을 차고 나가 싸우고 싶었다. 황금의 관을 쓰고 나라를 이끌고 싶었다.

“하지만 전…….”

테오도라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테오도라가 보여 준 총명함에도 그는 한 번도 자신의 딸이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졌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 없을 것이다.

평범한 제국의 사내라면, 아니 제국의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의 500년 역사 속에 여인이 황제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황제는 테오도라가 건강한 아들을 낳아 훌륭하게 키워 주길 바랐다. 영특한 어미를 닮는다면 그 아이는 제국의 차대 황제로 부족함이 없으리라.

테오도라의 밑으로 황자가 세 명이나 태어났건만 아직도 황태자를 임명하지 않은 것은 그 이유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황제가 되고 싶다는 말을 꺼내 보았자 황당한 농담이라고 웃어넘길 것이다. 결혼이 하기 싫어 무엄하게 황좌를 운운하냐며 역정을 낼지도 모른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테오도라가 그 말을 입에 담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결국 테오도라는 애달프게 벌렸던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가 이 결혼에 납득했다고 생각했다.

“혼사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란슬롯 후작 부부와 공자가 황성으로 오기로 했다. 그때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테오도라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 * *

그날 저녁, 카시스는 샐리에게 툭 내뱉었다.

“요즘은 테오도라 황녀에 관한 말을 하지 않는군.”

그 말에 샐리의 어깨가 움찔했다.

“내가 그때 그런 말을 해서인가.”

“그런 것 아니에요.”

샐리는 일부러 더 크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샐리는 요즘 카시스의 앞에서 테오도라에 관한 말을 일부러 하지 않고 있었다.

일전에 카시스가 질투 운운하며 어린애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당황스럽고, 어이없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가 귀여웠다. 말도 안 되는 감정이었다.

샐리는 그 감정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좀 더 신랄히 말하자면 싫었다.

한순간이라도 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이 싫어 일부러 묻어 두었다. 그것을 그가 눈치챌 줄은 몰랐다.

“그 말이 많이 불편했나 보군.”

“좀 놀랐을 뿐이에요.”

그의 말이 그토록 자신을 흔들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카시스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황녀에게 더 이상 질투를 안 하도록 노력해 보지.”

“…….”

“그러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마.”

무뚝뚝한 목소리였건만 느껴지는 감정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이런 게 싫다는 건데.’

샐리는 난감한 듯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주인의 허락을 기다리는 순한 개처럼.

그답지 않은 그 눈을 보자니 마음 한편이 또 스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아, 정말 모르겠다.

“알겠어요.”

결국 샐리는 백기를 들었다. 그녀의 대답에 그제야 카시스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어렸다.

그 표정에 샐리는 또다시 심장 한편이 간질거려 일부러 차를 벌컥 들이켰다. 찻잔에 있던 차를 한 입에 다 마시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그가 그렇게 말을 해 주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궁금했던 것을 묻지 못했을 것이다.

“저녁 늦게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 급보가 왔어요. 폐하께서 황녀 저하의 결혼을 추진하기로 하셨다고요. 란슬롯 후작 부부와 공자를 수도로 초대하셨다고 하네요.”

그러니 내일 당장 황성으로 오라는 전언은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의 약혼자는 어떤 분이신가요?”

샐리는 테오도라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남부에 있는 란슬롯 후작가의 셋째 아들이라는 거요. 그리고 황녀 저하와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테오도라와 여덟 살 차이 나는 어린 약혼자. 이 사실은 사교계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중요한 것은 모두 알고 있군.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단순한 약혼자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테오도라 황녀의 신랑감으로 키워진 존재지.”

란슬롯 후작가. 남부에 터를 잡은 이 가문은 대대로 황족과 결혼을 하여 황족의 피를 진하게 잇고 있었다.

후작가는 황족의 피를 잇는다는 자긍심이 드높았고 더불어 황족에 대한 충성심도 무척 깊었다.

그래서 그들은 셋째 아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들이 테오도라 황녀의 약혼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바람은 머지않아 이루어졌다. 테오도라가 열넷이 되었을 때, 여섯 살이었던 어린 아들은 황녀의 약혼자가 되었다.

이에 후작 부부가 너무 기뻐 일주일 동안 축제를 벌인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그토록 테오도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곳이 바로 란슬롯 후작가였다.

“란슬롯 후작가는 남부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지. 황실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도 유명하고, 영지는 크지 않지만 땅이 비옥하여 무척 부유해. 후에 황녀가 아기를 낳으면 란슬롯의 성이 아니라 황실의 성을 따른다는 서약까지 했으니 황녀의 결혼 상대로 이만한 곳은 없을 거야.”

그러니 황제가 여덟 살이란 나이 차에도 서슴없이 약혼을 시킨 것이다. 그러나 샐리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하지만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는 당장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으세요.”

그 말에 카시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 결혼에서 가장 얻을 것이 많은 여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그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혼이 하고 싶었다면 진작 했을 테지.”

카시스가 본 테오도라는 당차고 영민했다. 그런 여인이 샬롯 백작 부인을 비롯한 다른 귀족 세력들이 결혼을 반대한다고 해서 눈치를 보았을 리 없다. 본인이 정말 원했다면 진작 하고도 남았으리라.

무엇보다 현재 테오도라는 샐리와 함께 수도 사교계를 엄청난 기세로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본격적인 결혼 준비에 들어가면 지금처럼 사교계 활동을 할 수 없을뿐더러, 결혼 후에는 저 먼 남부 지방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렇다면 애써 일궈 놓은 수도 사교계의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건 샐리에게도 테오도라에게도 전혀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뭐 하나 쉬운 일이 없군.’

카시스는 샐리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샐리의 얼굴은 무척 심란해 보였다.

이 일은 제국에서 제일 존귀한 황녀의 혼사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귀족들을 상대하듯 힘으로 짓누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고민해 봐야겠군.’

카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샐리의 빈 찻잔 위로 진한 꿀을 듬뿍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주었다. 이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끔찍할 만큼 달콤한 향이 가득 퍼졌다.

샐리는 자연스럽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따라 준 것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꽤 재미있어 카시스는 몇 번이나 샐리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 * *

다음 날 샐리는 황급히 황성으로 향했다. 테오도라는 아주 난감한 얼굴로 샐리를 맞았다. 테오도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샐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도대체 샬롯 백작 부인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지금껏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저하의 결혼을 반대한 분이잖아요. 저하가 결혼을 하셔도 그녀는 조금도 얻을 게 없을 텐데요.”

“그런 것을 다 따지지 못할 만큼 내가 사교계 활동을 하는 모습이 거슬렸나 보지. 애초에 그녀는 생각이 깊은 사람은 아니니까.”

조금만 멀리 봐도 샬롯에게는 한 치의 득이 없는 이야기였다. 테오도라가 결혼을 하면 란슬롯 후작가의 위세를 등에 업게 될 뿐만 아니라, 저 먼 남부에서 누구의 방해 없이 아기를 낳아 키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아기가 아들이라면 테오도라는 더 이상 평범한 황녀가 아니게 된다. 이 제국에서 가장 정통성이 강한 황위 계승자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이었다.

테오도라에게 이 결혼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녀 본인이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만 없다면.

“황녀와 귀부인의 위치는 전혀 달라. 황녀에서 황제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미 남편의 성을 따른 귀부인의 위치에서 황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그래서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 되도록 오래 샬롯이 이 결혼을 막아 주길 바랐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샬롯은 모를 테지만 그녀의 어리석은 선택은 본의 아니게 테오도라에게도 아주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아바마마는 이 기회에 내 결혼을 밀어붙일 생각이셔. 올 가을이 오기 전에 내 결혼식을 치르실 생각이시더군.”

황제가 불같은 성정을 가진 것은 유명했다. 본디 황녀의 결혼이라고 하면 적어도 일 년은 준비해야 했지만 황제는 그리 여유롭게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토록 급하게 전언을 넣어 란슬롯 후작 부부를 부른 것일 터였다.

“폐하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 안 되나요?”

“그런 내색을 비춰 보았지만 엄하게 다그치시더군. 이제 내 나이가 스물이 넘었으니 철없는 어리광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야. 무엇보다 란슬롯 후작 부부가 크게 실망할 거야.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결혼이 성사되기만을 기다려 왔거든.”

그러니 그들이 혼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는 황제의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을지 눈에 선했다.

“아직 란슬롯가와 사이가 틀어져서는 안 돼.”

란슬롯 후작가는 테오도라의 어머니인 이사벨라 황후를 강력하게 지지해 주는 가문 중 하나였다.

테오도라가 그들을 실망시킨다면 황후는 큰 세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병약한 황후에게 그것은 너무나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 약혼이 틀어진다 해도 그건 테오도라가 자신의 세력을 어느 정도 갖춘 후여야 한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샐리가 입을 열었다.

“후작 부부보다 공자께서 먼저 도착하신다고 하셨죠?”

“그래.”

후작 부부는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 아들을 먼저 보냈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황제는 잘됐다며 테오도라에게 공자를 대접할 것을 명령했다.

곧 결혼을 하게 될 사이니 친밀해질 시간을 가져 보는 게 좋을 것이라는 황제의 말을 떠올리며 테오도라는 눈썹을 찡그렸다.

고작 열세 살짜리 어린 약혼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하면 더욱 머리가 복잡해지기만 했다. 그랬기에 이어진 샐리의 말은 테오도라를 무척 놀라게 했다.

“그럼 그분을 이용하면 어떨까요? 저하께서는 이 혼사를 싫다고 하실 수 없지만 아직 어린 공자는 아니잖아요. 그분은 나이가 무척 어리시니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당장의 결혼은 미룰 수 있을 거예요.”

그럴듯한 말이었다. 고작 열세 살이 된 소년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 제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결혼을 강행할 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어린 공자가 이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공자로 하여금 이 결혼이 하기 싫어지게 만들면 되니까요.”

“어떻게?”

테오도라는 이제 눈을 빛내며 샐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샐리는 고양이같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간단해요. 황녀 저하께서 아주 끔찍한 약혼녀가 되시면 된답니다.”

샐리는 사내에게 호감을 사는 방법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샐리는 그들이 알아서 자신을 떠나게 만들었다.

일부러 술을 많이 마시고 고약한 술주정을 한다거나 실수인 척 천박한 욕설을 입에 담기도 했다.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악취가 나는 나무를 옷 속에 숨기고 모른 척한 적도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인의 이미지를 와장창 깨 버리는 것. 아주 유치했지만 확실한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특히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는 귀족 여인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테오도라에게는 아주 적합한 방법이었다.

“어때. 이렇게 걸으면 되겠나?”

테오도라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뒷골목의 건달 같은 경박한 걸음걸이였다.

그녀의 예법 선생이 보았다면 기절했을 걸음걸이건만 샐리는 아주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직도 우아함이 걸음에 남아 있어요. 좀 더 어깨를 들썩이면 좋겠어요.”

“이렇게?”

테오도라는 다시 한번 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습에 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훌륭해요. 정말 끔찍한 걸음걸이에요.”

그 후로도 엄청난 대화들이 이어졌다.

“웃음소리도 좀 더 투박했으면 좋겠어요. 목소리 큰 아저씨 같은 느낌으로요.”

“어떤 느낌인 줄 알 것 같아. 마부 야곱이 그런 식으로 웃더군. 와인은 한 번에 다 마시는 편이 좋겠지.”

“무조건 그래야죠. 이왕이면 와인 한 병을 한 번에 다 마시면 더 좋을 거예요.”

만약 누군가 그 장면을 보았다면 황녀와 샐리가 미쳤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무척 열심이었다. 특히 테오도라는 어젯밤 내내 심각했던 얼굴이 무색할 만큼 신나 보였다.

* * *

며칠 후 테오도라는 황제와 함께 알현실에 앉아 있었다. 테오도라의 어린 약혼자인 라엘 란슬롯이 드디어 황성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문이 열리고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테오도라와 황제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또래보다 작고 여리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소년은 생각보다 더 작고 가늘었다.

하늘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모습은 소녀로 착각할 만큼 무척 고왔다. 라엘은 황실의 피를 증명하는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국에서 가장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란슬롯 후작가의 셋째, 라엘 란슬롯이라고 합니다.”

여린 외모와 어울리는 미성이었다.

“고개를 들거라.”

황제의 목소리에 라엘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황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놀란 기색이 녹아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

“네. 그렇습니다.”

“열셋이라더니 정말 작구나. 란슬롯 후작과는 아주 달라.”

황제의 솔직한 말에 라엘은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만큼 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노력을 한다는 거냐.”

“매일 아침 우유를 마시고 고기도 열심히 먹고 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고요.”

순수하기 그지없는 말에 황제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토록 열심히 하니 곧 클 테지.”

황제의 목소리는 어느새 꽤 부드러워졌다. 황제는 본디 타인에게 무심하고 냉정했다.

그런 그가 첫 만남에 호감을 가질 만큼 라엘은 사랑스러운 외모와 사근거리는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테오도라는 그 모습을 보며 내심 놀라고 있었다.

‘예상했던 모습과는 다르군.’

병약한 어린 소년이라기에 자신과 황제를 보는 순간 울음을 왈칵 터뜨리거나 바들바들 떨 줄 알았더니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위엄이 넘치는 황제와 눈을 마주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작고 여리다는 소문은 사실이었지만.’

숲속의 요정이 생각나는 저 고운 외모 때문에 소년은 더욱 가녀려 보였다. 테오도라는 그 점을 노릴 셈이었다.

“두 사람도 인사를 하거라. 약혼한 사이가 아니냐.”

황제의 말에 그제야 라엘의 시선이 테오도라를 향했다. 약혼한 지 7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 본 순간이었다.

두 손을 모으고 의자에 앉아 있는 테오도라는 기품이 흘러넘쳤다. 과연 황실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황녀다웠다.

라엘은 멍하니 테오도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손을 가슴 위로 올렸다.

황족에 대한 인사가 아닌 귀족 남성이 여인을 향해 하는 정중한 인사였다.

“처음 뵙습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 란슬롯 후작가의 아들, 라엘 란슬롯입니다.”

테오도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라엘의 커다란 눈이 점점 커졌다. 황족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아 풍채가 좋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너무 컸기 때문이다.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도 훨씬 컸다. 그도 그럴 것이 테오도라는 오늘 굽이 10㎝는 되는 어마어마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물론 고의적인 선택이었다.

“테오도라 프란츠입니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인사한 테오도라는 고개를 숙였다. 반대로 라엘은 고개를 한껏 올려 테오도라를 바라봐야만 했다.

워낙에 키 차이가 많이 나기에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본 황제의 시종 알프레도는 속으로 신음을 삼킬 정도였다. 끔찍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테오도라가 원한 것이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있다고 해도 약혼녀라는 여자가 이 정도로 크다면 당황스럽겠지.’

너무 큰 자신이 괴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어려도 사내라고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테오도라는 상관없었다. 이 작고 어린 약혼자가 한시라도 빨리 자신을 싫어할 수 있다면.

그러나 테오도라의 생각과는 달리 라엘은 눈매를 곱게 휘며 웃었다.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황녀 저하.”

“…….”

그 순수한 인사에 테오도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테오도라가 라엘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는 황성의 연회장에서 이루어졌다.

황제는 눈치 좋게(?) 빠진지라 긴 테이블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테오도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 덕분에 마음껏 훈련의 성과를 보일 수 있었으니까.

“메인요리를 한 그릇 더 가져다줘!”

테오도라는 일부러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시종은 빠른 손놀림으로 새 접시를 황녀의 앞에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송아지 스테이크가 테오도라의 앞에 놓인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테오도라는 큼직하게 썬 고기를 입 안 가득 넣고는 오물거렸다. 라엘은 고기를 썬 모습 그대로 멈추어 커다래진 눈으로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황녀 저하께서는 정말 잘 드시는군요.”

일반적으로 품위 있는 여인의 식사란 입을 작게 벌리고 새 모이만큼 아주 적은 양만 먹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눈에 테오도라의 모습이 얼마나 끔찍해 보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먹는 여인이 건강한 것이라며, 그런 아내를 맞아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빙그르 웃으며 내뱉은 그 해괴한 말에 테오도라는 컥 하고 목을 만졌다. 고기가 걸린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라엘이 눈썹을 내리며 물었다. 걱정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서는 불쾌함이나 경멸감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테오도라는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역시 강적이야.’

테오도라의 예상과는 달리 라엘은 단 한 번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저씨 같은 웃음소리를 냈더니 웃음이 호쾌하다며 칭찬했고, 와인 한 잔을 한 번에 비워 버렸더니 자신도 술을 잘 마시고 싶다며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로 라엘은 테오도라를 향해 무한한 호의를 보여 주었다.

그중에서 테오도라를 가장 당황하게 한 것은 라엘의 화술이었다.

“황녀 저하께서는 알스의 아카데미를 졸업하셨지요?”

“그래요.”

“졸업하기 무척 까다로운 곳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세요. 어떤 학문을 전공하셨는지요?”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렇군요. 알스의 정치와 경제는 제국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면서요?”

많은 대화를 하지 않으려 했던 테오도라였지만 그토록 눈을 빛내며 물어 오니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테오도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 열셋인 어린 그에게 잘 이해도 되지 않을 어려운 이야기가 분명했건만 라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다.

테오도라는 처음 본 화술이었다.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지식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서로가 관심 있는 화제가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라엘은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아기 강아지처럼 반응하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테오도라는 신나게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테오도라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테오도라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감쌌다. 이렇게 대화를 많이 할 생각도, 이렇게 오래 함께할 생각도 없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훌륭한 식사를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라엘은 해맑은 얼굴로 인사했다. 테오도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입에 맞았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나가도록 하죠.”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을 내뱉은 테오도라를 향해 라엘이 말했다.

“아, 잠시만요.”

“……?”

의자에서 일어난 라엘이 아직 앉아 있는 테오도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나란히 서 있을 때는 키 차이가 어마어마했던 둘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엘이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테오도라의 입가를 부드럽게 닦았다.

“소스가 입에 묻었습니다.”

“……!”

테오도라는 망치로 뒤통수를 쾅 하고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라엘은 테오도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여인에게 손을 내민다는 의미는 에스코트를 해 준다는 의미였다. 테오도라는 황당한 얼굴로 새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에스코트라니.’

누가 봐도 자신은 그가 에스코트할 사이즈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내밀어진 손을 무시하는 것은 너무나 큰 무례였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그의 새하얀 손 위에 손을 얹었다.

‘……!’

테오도라는 조금 놀랐다. 그저 부드럽고 작은 손이라 생각했던 손은 생각보다 컸다.

손이 큰 편인 테오도라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다. 부드럽긴 했으나 아이처럼 아주 말랑한 것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단단한 손바닥은 굳은살이 느껴졌다.

“……검을 배우는군요.”

“네. 아직 부족하지만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라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란슬롯가는 대대로 무인 집안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사내니 어린 나이부터 검을 배우는 것이 당연했다.

‘그저 어린애인 줄만 알았더니.’

테오도라는 새삼 그가 란슬롯가의 사내임을 깨달았다.

연회장을 나온 라엘이 테오도라에게 물었다.

“괜찮으면 같이 좀 걸으시겠어요?”

테오도라는 조금 고민했다. 원래의 목적대로라면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먼 곳에서 온 손님이었고 거절하기엔 커다란 눈동자가 꽤 애틋했다. 그래, 어린 시절 키웠던 강아지와 똑 닮은 눈동자였다.

‘놀아 주세요.’

여린 소년의 뒤로 커다란 꼬리가 살랑대는 착각까지 일었다. 결국 테오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로로 안내하지요.”

테오도라는 일부러 인적이 드문 산책로를 골랐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하얀 돌담길이 깔린 그곳은 작은 꽃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황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멋이 있는 곳이었다.

“예쁜 곳이네요.”

라엘은 반짝이는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테오도라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색이 연한 봄꽃 길을 걷는 여린 소년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때 휘잉 하고 바람이 불어왔다.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만큼 강한 바람이었다.

“에취!”

라엘이 두 손으로 입을 막고는 기침을 했다. 그제야 테오도라는 라엘의 옷이 너무 얇은 것을 깨달았다.

나름대로 챙겨 입는다고 노력한 모양이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남부 사람이었다.

남부는 사계절이 따뜻한 곳이었다. 이제 곧 봄이라는 제국이 이렇게 추울 줄 몰랐을 것이다.

테오도라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라엘에게 내밀었다.

“걸치세요.”

그 말에 라엘의 눈이 커졌다. 그는 두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두 볼이 다 발그레해졌는데.’

아무리 춥다고 해도 여인이 사내에게 자신의 옷을 건네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테오도라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왜냐면 그녀에게 라엘은 사내가 아니라 작은 동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테오도라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한 손님이 아프기라도 하면 제가 곤란합니다. 주변에 보는 눈도 없으니 받아요.”

“하지만 황녀 저하께서…….”

“전 지금 덥군요. 콧잔등의 땀, 안 보입니까?”

열이 많은 테오도라에게 오늘의 날씨는 더울 정도였다. 결국 라엘은 조심스럽게 테오도라의 망토를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라엘이 가느다란 미성으로 말했다. 망토를 걸친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식사 때와는 달리 라엘은 많은 말을 하진 않았다. 그래서 테오도라도 말없이 걸었다.

꽃향기가 묻어 있는 봄바람 때문이었을까. 조용했지만 어색하진 않았다. 아주 편한 분위기였다.

짧은 산책이 끝나고 테오도라는 라엘의 방까지 함께 가 주었다. 문 앞에 선 라엘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순수하기 그지없는 인사에 테오도라는 마음 한편이 찌릿했다. 양심이라는 것이 움찔거린 모양이었다.

자신도 즐거웠다고 웃어 주고 싶었지만 오늘의 컨셉은 어디까지나 무뚝뚝, 냉정함이었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배려라고 할 게 있나요. 손님을 대접하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테오도라의 단호한 목소리에 라엘의 여린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테오도라의 양심이 다시 죄여 왔지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먼 길을 와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쉬어요.”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이 열어 준 문을 향해 몸을 돌렸던 라엘은 걸음을 멈추고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저, 황녀 저하.”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테오도라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라엘은 한껏 올려다본 채였다. 라엘이 사르르 웃으며 말했다.

“제 약혼녀가 듣던 것보다 훨씬 멋진 분이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

테오도라는 오늘 이런 경험을 수차례나 했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느낌.

그중에서도 이번 타격이 가장 컸다. 거대한 쇠망치가 머리를 두들긴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라엘은 방 안으로 사라졌다. 한참이나 굳은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던 테오도라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건 아니야!’

콕콕 찔러 오던 양심이 이제는 아플 정도로 쿵쾅됐다. 테오도라는 인정했다. 작전은 실패했다.

그리고 실패한 작전보다 더 그녀를 괴롭게 한 것은 저토록 순수한 소년을 향해 추잡한 수를 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자신이 열네 살, 그의 나이가 고작 여섯 살 때 이루어진 약혼이었다. 그저 최적의 상대라는 이유만으로 만난 적도 없이 맺어진 상대.

어마어마한 나이 차이만큼이나 와 닿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라엘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라엘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나보다 더 이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아직 어린 약혼자라 해도 그는 테오도라와 인연을 맺은 상대였다. 그런 자에게 이런 장난 같은 수를 쓴다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테오도라는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그로 인해 그가 화를 낸다 해도, 후작 부부에게 그 사실이 알려져 분노를 사게 된다고 해도, 그게 약혼자인 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다.

* * *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

황제의 시종 알프레도가 말했다. 그의 말처럼 황제는 꽤 기분 좋아 보였다. 하루 일과 중 가장 싫어하는 귀족들의 상소를 읽는 시간임에도 콧노래를 살짝 부를 정도였다.

“사윗감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귀엽더군.”

황제는 큭큭 웃으며 말했다. 알프레도도 함께 그 자리에 있었기에 아까 보았던 라엘을 떠올렸다. 황제의 말처럼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 만한 맑고 고운 소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테오도라 황녀 저하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황제가 저렇게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내 나온 황제의 말에 알프레도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서 말인데. 귀여운 사윗감을 환영하는 뜻으로 사냥 놀이를 열도록 하지.”

황제는 사냥을 무척 좋아했다. 정무를 보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사냥을 할 기회를 노리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환영을 하고 싶으면 제대로 연회를 준비해 주면 될 텐데 뜬금없이 왜 사냥을 한다는 겁니까.’라는 말 대신 알프레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말씀이십니까.”

“이틀 후부터는 귀족 회의가 열리니 내일밖에 시간이 없잖나.”

알프레도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고작 반나절 만에 사냥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황제는 아주 성미가 급했고 하고자 하는 일은 해야 하는 성미였다. 그래서 알프레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초대장은 누구에게 보내면 되겠습니까.”

“당장 내일 열리는 사냥인데 누굴 제대로 초대할 수 있나. 그냥 오붓하게 가족들끼리 하지 뭐. 라엘도 이 기회에 황자들과 친해지면 좋을 거야.”

“그러면 직계 황족들만 모이는 것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에스테반 공작께는 어떻게 할까요.”

황제를 오랜 시간 보좌한 알프레도다운 질문이었다. 아무리 황족들만 모이는 가족 모임이라 해도 에스테반 공작에 관한 것은 체크해야 한다.

황제는 사냥을 할 때마다 늘 에스테반 공작에게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물론 에스테반 공작이 참석한 일은 거의 없었지만 황제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당연히 보내야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한 황제의 말에 알프레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눈을 내리깐 황제가 말을 이었다.

“카시스의 애첩도 초대하도록 해.”

“네?”

알프레도가 눈을 깜빡였다. 에스테반 공작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그 애첩을 초대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냥터에 부인이나 애인과 동참하는 경우는 많았으나 그것은 초대받은 이가 선택할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굳이 상대방의 초대장까지 챙겨 주는 것은 너무 극진한 행위였다.

“폐하께서 에스테반 공작 저하를 아끼시는 마음은 압니다만 너무 과한 배려십니다.”

알프레도의 말에 황제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 너는 너무 순진해. 이건 배려가 아니라 미끼를 던지는 거야.”

“네?”

“내 초대는 거절할 수 있지만, 귀애하는 애첩을 혼자 보낼 수 없을 거란 말이지.”

황제가 능글맞기 짝이 없는 얼굴로 웃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에반이 전해 준 초대장 때문이다.

“오늘 황제 폐하께서 보내오셨습니다.”

반짝이는 황금색 봉투는 위엄이 넘쳤지만 카시스는 싸늘히 말했다.

“버려.”

“네? 하지만 읽어 보시기라도 해야…….”

“보나마나 같이 사냥을 하자는 것이겠지.”

안 그래도 오늘 황성에서 그 말을 지겹도록 듣고 온 터였다. 그러나 카시스는 황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애초에 그는 사냥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황제의 놀음에 장단을 맞춰 줄 생각도 없었다.

“늘 하던 대로 처리해.”

버리라고 했던 말은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온 것이기에 카시스는 말을 정정했다.

황제의 초대장을 감히 그냥 버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렇게 도착한 초대장은 에반이 읽어 본 후 적당한 거절의 답장을 보내곤 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주인님.”

“……?”

카시스가 에반을 바라보았다. 에반은 눈썹을 내리며 곤란하단 얼굴로 말했다.

“도착한 초대장은 한 장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샐리 님께도 같은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

그 말에 카시스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오늘따라 덜 달라붙는다 싶더라니.’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오라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 사냥은 신년회가 아니었다. 샐리에게 꼭 필요한 자리도,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자리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녀도 굳이 그런 귀찮은 자리엔 가고 싶지 않을 테지. 내가 대신 거절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해야겠군.’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샐리의 방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는.

샐리가 고양이 같은 눈을 반짝이며 초대장을 보고 있었다. 카시스는 낮은 목소리로 신음을 내뱉었다.

이제는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으면 어떤 말을 할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폐하께서 초대장을 보내 주셨어요. 황성의 숲에서 사냥을 하실 거라고 하네요.”

“……갈 건가?”

“그럼요.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 폐하께서 초대하신 자리잖아요.”

카시스에게는 늘 애물단지 같은 초대장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샐리는 아주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권력자의 호의라고 무조건 기뻐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이 몇 번이고 보여 준 호의를 그토록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리 없다. 그래서 카시스는 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요즘 부쩍 튀어나오는 그 부글부글 끓는 듯한 감정, 질투였다.

“꽤 즐거워 보이는군. 황제가 초대장을 보낸 것이 그렇게 기쁜가.”

그의 낮은 목소리와 달리 샐리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셔서 그렇다기보다는 사냥이 꽤 기대가 되어서 그래요.”

“……뭐?”

“매일 똑같은 연회가 살짝 지루해졌었거든요. 하루쯤 이런 날을 보내면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아요. 황성의 사냥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 말에 카시스의 얼음 같던 얼굴이 사르르 풀어졌다.

“그렇군.”

그제야 그녀의 저 아이처럼 기대하는 얼굴이 이해가 갔다.

물론 카시스가 모르는 이유도 있었다. 그 자리에 테오도라의 약혼자인 란슬롯 공자가 온다는 것이다.

말로만 전해 들은 그 어린 소년을 직접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그것까지 솔직히 말할 필요는 없겠지.’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몰라 샐리는 일부러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사냥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귀족식 사냥과는 다른가요?”

“폐하의 사냥이라고 해도 특별한 건 없어. 오히려 소박하지. 황성에 있는 숲이라 규모도 작은 편이고, 하인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곳이라 위험한 동물도 없어. 다만 황제 폐하는 잡은 사냥감을 바로 해체하시니 그 장면이 여인에게는 좀 잔혹할 수도 있겠군.”

“그 정도로 겁쟁이는 아니에요.”

톡 쏘는 샐리의 말에 카시스는 피식 웃었다.

아무렴. 에스테반 공작 앞에서 저토록 당당할 수 있는 여인이 고작 그런 장면을 무서워 할 리가 없지. 그녀가 덜덜 떠는 장면 같은 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말은 탈 수 있나?”

기본적으로 사냥은 남자들의 문화였다. 남성들은 사냥을 하고 동행한 여인들은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다과를 즐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종종 활동적인 여인들은 말을 타고 남자를 따라다니며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

“아주 잘 타는 건 아니지만 숲길을 걷는 정도는 가능해요.”

그 말에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물어보면서도 사실 탈 줄 알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승마는 매우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종목이다. 귀족이라고 다 승마를 배우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일개 하녀였던 그녀가 말을 탈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뭐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카시스에게 보여 준 수많은 모습은 이미 일개 하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을 그만둔 지 오래였다.

“잘됐군. 그럼 나와 함께 다니도록 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거야.”

“저하도 가실 건가요?”

샐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눈썹을 찡그린 카시스를 향해 샐리가 말했다.

“그야 저하께서는 이런 사사로운 행사를 무척 싫어하시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안 가실 줄 알았어요.”

그녀의 말이 맞다. 이런 귀찮은 행사, 그것도 황제가 주최하는 행사 따위 몇 번을 열어도 사양이다. 그러나 카시스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말대로 황제 폐하께서 초대한 자리잖아. 매번 거절하는 것도 큰 무례지.”

“그건 그렇지만…….”

찝찝함이 어린 말투로 대답한 샐리는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정도를 지키는 귀족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에스테반 공작이라도 황제의 초대를 매번 이유 없이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다.

“혼자 가지 않아 잘됐네요. 귀부인들의 모임이라면 몰라도 황제 폐하가 있는 자리는 아무래도 조금 부담스러웠거든요.”

활짝 웃는 샐리의 얼굴은 정말이지 너무 예뻤다. 카시스는 황제에게 몇 번이나 거절했던 낮의 일 같은 건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사냥이 열렸다. 장소는 황성의 숲이었다. 황제의 유흥을 위해 만들어진 숲은 크기는 작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울창한 나무와 고운 흙길이 깔려 있어 보통의 숲보다 훨씬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황제가 이야기했던 대로 사냥은 소박하게 치러졌다.

숲에 모인 이들은 황제와 어린 쌍둥이 황자, 이 사냥을 주최하게 된 원인인 란슬롯 공자와 테오도라 황녀, 제1황자인 존과 샬롯 백작 부인, 그리고 에스테반 공작과 그의 애첩 샐리였다.

“어서 오게.”

황제는 카시스와 샐리를 기쁜 얼굴로 맞이했다. 카시스는 평소에 자주 입던 화사한 예복이 아닌 은실로 만들어진 사냥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 근사했다.

새하얀 백마를 타고 아름답게 세공 된 활을 든 모습이 꼭 전설 속에 나오는 기사 같았다.

그의 옆에는 그가 탄 말과 똑같이 생긴 백마를 탄 샐리가 있었다. 진한 자줏빛 드레스를 입고 외출용 모자를 쓴 샐리는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온 황제를 향해 약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 건 나 같은데.”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황제는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카시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별 의미는 없네. 그냥 그대가 온 게 기뻐서. 늘 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나.”

“오늘, 마침, 우연히도 시간이 났을 뿐입니다.”

선을 긋는 듯한 까칠한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항상 이렇게 마침, 우연히도 시간이 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샐리?”

황제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을 향하자 샐리는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대라도 앞으로 자주 와 주게.”

“어느 분의 초대를 거절하겠습니까. 언제든 초대장을 보내 주시면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샐리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그 말이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었다.

조금 후 샐리는 카시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께서 저하가 저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시는 걸 보니 저희의 연기가 제법인가 봐요.”

“……그런 것 같군.”

카시스는 샐리를 바라보지 않고 대답했다.

두 사람에게 인사를 마친 황제가 시선을 돌린 곳은 라엘이었다. 하늘빛 사냥복을 입은 라엘의 두 볼이 복숭아처럼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사냥은 좀 할 줄 아느냐?”

“아버지를 따라 몇 번 해 본 적은 있습니다만 아직 잘하지 못합니다.”

라엘은 수줍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직 키도 다 자라지 않는 열세 살이었다.

사냥이라고 해 봐야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구경한 것이 다였다. 오늘처럼 제대로 사냥 모임의 일원으로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열셋이면 사냥을 제대로 해 볼 나이지. 오늘 한번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거라.”

“예! 알겠습니다!”

황제의 말에 라엘은 야무지게 대답했다. 두 손으로 활을 꼭 잡고 대답하는 그 모습에 황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역시 이 녀석은 꽤 귀여워.’

황제는 라엘의 옆에서 말을 타고 있는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관리되고 있는 숲이라 해도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몸놀림이 편한 여성용 경장을 입고 활까지 챙겨 온 상태였다.

여인이 사냥터에 활을 가지고 나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테오도라의 활 솜씨를 아는 황제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장비를 잘 챙겨 왔구나. 공자가 위험하지 않게 신경 써 주거라.”

“그리하겠습니다.”

테오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지나간 후 테오도라는 샐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샐리는 그녀를 향해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듣던 대로 귀여운 소년이었다.

기분 좋았던 황제의 눈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첫째 아들인 존의 행색 때문이다. 그는 가벼운 사냥이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 무거운 쇠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 차림은 도대체 뭐냐. 어디 전쟁이라고 나가는 거냐?”

황제의 호통에 존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는 아버지를 대하는 게 어려웠다.

자신을 마냥 오냐오냐 해 주는 어머니와는 달리 엄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어버버하며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샬롯이 나와 말했다.

“제가 그리 입혔어요. 이 시기에는 동면에서 깬 뱀이 나오잖아요. 혹시 모르니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지요. 제국의 제1황자인 귀한 몸이 아닙니까.”

샬롯은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서 있는 테오도라를 사납게 흘겨보았다. 눈이 마주친 테오도라는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그 광경을 본 황제는 질린 얼굴을 했다. 저런 꼴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라 화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뭐. 마음대로 해.”

황제는 귀찮은 듯 말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려 다른 황자들에게 걸음을 옮겼다.

존의 배다른 동생인 쌍둥이 황자는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장난꾸러기들이었다. 손에는 장난감 같은 나무 활을 들고 있었다.

실상 아직 사냥은 하지 못하는 나이라 숲속을 원하는 만큼 뛰어 놀라고 데리고 온 것이다.

“너무 날뛰지 말고 조심해라.”

“그럼요!”

쌍둥이 황자가 동시에 대답했다.

어린 황자들과 안부를 나눈 황제는 입을 열었다.

“나와 카시스가 한 팀, 라엘과 테오도라가 한 팀, 존은 황자들과 한 팀으로 나누어 사냥을 하지.”

다 같이 몰려들어 사냥을 할 수는 없기에 주최자가 팀을 나누기 마련이었다.

황제는 사심을 가득 담아 팀을 나누었다. 그러나 샬롯이 표독스러운 얼굴로 불만을 재기했다.

“폐하, 제1황자 저하를 왜 다른 황자들과 묶으십니까?”

“존의 실력으로 나와 카시스의 속도를 따라올 수나 있겠나. 괜히 무리하느니 황자들과 함께 있는 편이 훨씬 낫지.”

“폐하께서 제1황자 저하의 승마 솜씨가 얼마나 늘었는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함께 가시면 분명 놀라실 겁니다.”

존이 운동신경이 없는 것은 황성의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눈썹을 찡그렸다.

‘아까부터 별 개뼈다귀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군.’

그러나 이어진 말은 꽤 그럴듯했다.

“그리고 제1황자 저하는 이제 열여섯입니다. 어린 황자들보다는 용맹하신 황제 폐하의 사냥 모습을 보는 게 훨씬 배울 것이 많지 않겠어요?”

황제는 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존이 잔뜩 굳은 모습으로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 예뻐하는 자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싫은 자식도 아니었다.

겁쟁이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 기회에 제대로 사냥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존은 나를 따라오거라.”

“네, 네!”

존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은 존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가늘게 찢어진 눈이 뱀처럼 이글거렸다.

“모처럼 온 기회이니 잘해 내야 한다. 황제 폐하께 네가 얼마나 용맹하고 영특한 사내인지 보여 줄 기회야. 네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여 황태자 자리를 주지 않으시는 것 아니니. 너의 용감한 모습을 본다면 분명 생각이 달라지실 거야.”

그녀의 말에 존은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새파란 하늘 아래 황제는 활을 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모두에게 사냥의 신 라오스의 가호가 있기를.”

샐리는 사냥에 따라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전생에 귀족 사내들의 사냥 모임에 몇 번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사내들은 샐리를 의식해 최선을 다해 말을 몰고 활을 쐈다. 그중에는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기사도 있었고 명사수라고 소문난 자도 있었다.

‘그들과는 실력의 급이 전혀 달라.’

황제의 실력은 그자들과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프란츠 황가의 호전적인 기질을 타고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정무보다는 전쟁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유명했다. 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단 말의 속도가 전혀 달랐다. 샐리는 아예 그를 쫓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짐을 들고 다니는 하인들 또한 차마 쫓아갈 수도 없어서 멀리 떨어져 그 뒤를 따라갔다.

흔히들 사냥 놀이에 쓰는 몰이꾼을 쓰지도 않았다. 황제는 직접 눈으로 표적을 확인하고 움직였다.

저 멀리 황제를 따라간 하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명중입니다!”

벌써 세 번째였다. 황제는 이내 엄청난 속도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의 뒤로 하인들이 운반해 온 사슴의 사체가 보였다. 사슴은 아주 컸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폐하. 레스릴 사슴 중에서 이렇게 큰 놈은 처음 봅니다.”

시종 알프레도의 말에 황제가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에 일러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라고 해. 황성의 모든 이들이 배부를 만큼 사슴을 잡아 올 테니.”

그의 호기로운 말에 하인들이 환호했다. 황제는 허풍을 떠는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맛볼 만큼 사냥을 해 올 것이 분명했다.

샐리는 그 모습을 놀라운 듯 바라보았다. 샐리와 눈이 마주친 황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 눈빛을 하면 곤란한데.”

“네?”

“카시스가 날 죽일 듯이 노려보거든.”

눈썹을 올리며 말하는 황제의 말에 샐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카시스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이 단정하기만 했다.

“폐하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샐리의 속삭임에 카시스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글쎄.”

그 모습을 멀리서 본 황제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카시스, 언제까지 그렇게 얌전히 있을 건가.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숲속의 사슴을 짐이 다 잡아 버릴 거야.”

“그러셔도 상관없습니다.”

카시스는 쌀쌀하게 말했다. 그는 황제와 함께 땀을 흘리며 동물을 쫓아다닐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그런 사냥법은 성미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그런 식의 사냥을 하면 샐리와 함께 다닐 수 없을 터였다.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까지 왔는데 가만히 있다 가실 수는 없잖아요.”

샐리는 카시스가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걸어 준 것을 알았기에 그리 말했다.

그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귀족 사내가 사냥을 나와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이 에스테반 공작이라면 더더욱.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니 걱정 마.”

짧게 대답한 카시스는 손짓을 했다. 뒤따라오던 하인이 그의 옆으로 재빨리 다가왔다.

하인의 손에는 두터운 가죽으로 덮인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카시스는 말 위에서 그것을 건네받았다.

카시스가 가죽을 제거하자 은색 새장이 나타났다. 새장 안에는 날카로운 눈매를 한 매가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가지고 있는 매는 박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팔목에 매 전용 토시를 낀 카시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든.”

그의 목소리에 매가 반응했다. 가만히 있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매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새장을 나왔다. 이내 날개를 접은 매는 카시스의 팔 위에 앉았다.

샐리는 넋 놓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말 위에 탄 은발의 미남이 한 손에 매를 올린 모습은 그림처럼 멋졌다.

샐리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숨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것 참. 에스테반가의 매 사냥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로군.”

황제가 꽤 재미있는 것을 본 듯 눈을 반짝였다. 에스테반가에서 대대로 키우는 매는 일반 매와 다른 특수한 종으로 매우 영특하기로 유명했다.

카시스는 황제를 향해 물었다.

“잡은 동물은 그게 어떤 동물이든 사냥한 자의 소유가 된다는 폐하의 사냥 규칙은 황성의 숲에서도 유효하겠죠?”

그 말에 황제의 눈이 커졌다.

“자네 설마 그걸 잡아 볼 생각이야?”

“대답해 주십시오.”

“그래, 맞아.”

“그럼 잡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시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냥감을 찾아와.”

그의 명령은 짧았다. 매는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캬아악’ 소리를 내며 도약했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어떠한 준비도 없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순식간에 저 하늘 위로 날아간 매는 이내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저 귀한 매까지 가져와 그걸 잡겠다니. 어지간히 잘 보이고 싶나 보군.”

“오늘따라 말이 많으시군요. 사냥만 하면 입도 다물고 집중하셨던 분이.”

“이제부터 그럴 생각이야.”

재미있는 구경은 이만하면 꽤 했다. 황제는 이제 제대로 사냥을 시작할 셈이었다.

“이제부터는 쉬지 않고 달릴 거다. 쫓아오지 못하는 놈은 무능한 놈으로 간주할 테니 그리 알거라.”

큰 소리로 외친 황제는 “이럇!” 하고 우렁찬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그에 맞추어 시종과 하인들이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어서 쫓아가지 않고 뭘 하니!”

샬롯이 황급히 존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어머니, 갑옷이 너무 답답해 숨 쉬기도 힘들어요. 조금 쉬고 갈게요.”

존이 찡얼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뱀처럼 표독스러운 어머니의 눈빛을 보고는 황급히 고삐를 움켜잡았다.

평소의 어머니라면 지금처럼 힘들다는 말에 다정하게 달래 주었을 테지만 저런 눈빛을 할 때는 아니었다.

존은 결국 울먹이는 얼굴로 말을 몰아 황제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샬롯은 입술을 짓이겼다.

귀여운 아들이지만 저럴 때는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샬롯의 승마 실력은 형편없어서 겨우 말에 올라타 있는 것이 다였다. 여기까지도 겨우 따라온 그녀였다.

그러나 이렇게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황제와 존을 따라가야 했다.

“어서 나를 저쪽 말로 옮기거라.”

샬롯의 목소리에 하인들은 그녀를 안아 말에서 내리게 한 후, 다른 말에 옮겨 태웠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샬롯이 준비해 온 거대한 군마였다. 워낙에 큰 말이라 두 사람이 타도 거뜬했다. 승마 실력이 뛰어난 하인이 뒤에 타고 그 앞에 샬롯이 탔다.

어서 황제의 뒤를 쫓아가라는 샬롯의 재촉에 이내 두 사람이 탄 말이 저 멀리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샬롯의 하인들이 우르르 쫓아갔다.

샐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샬롯까지 자리를 뜨자 복작이던 공간은 무척 조용해진 상태였다. 카시스와 샐리, 그리고 몇 명의 수행원이 남았을 뿐이었다.

“우리는 따라가지 않아도 되나요?”

“목표로 한 사냥감을 발견하면 이든이 알려 줄 테니 이곳에서 기다리면 돼.”

그러고 보니 아까 황제와 카시스가 나눈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황제가 그토록 놀란 것을 보면 카시스가 노리는 동물은 평범한 토끼나 사슴은 아닐 터였다.

“도대체 어떤 동물을 잡으실 생각이기에 폐하께 허락까지 맡으신 거예요?”

샐리의 질문에 카시스가 대답했다.

“여우.”

* * *

한편 테오도라와 라엘은 토끼를 쫓고 있었다. 아직 사냥이 미숙한 라엘 이었기에 몰이꾼들이 토끼를 몰아주었다.

“지금입니다.”

몰이꾼의 말에 라엘은 말을 멈추고 활을 당겼다. 방향은 정확했으나 아직 힘이 많이 부족했다. 화살은 토끼에게 가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이런!”

라엘이 안타까운 얼굴로 신음을 내뱉었다. 벌써 이런 식으로 사냥감을 놓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때였다. 그를 스쳐 힘차게 날아간 화살이 저 멀리 도망가는 토끼에게 명중했다.

화살은 토끼의 급소에 정확히 맞았다. 토끼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움직임을 멈추고 쓰러졌다.

엄청난 실력이었다. 라엘은 눈을 크게 뜨고는 화살을 쏜 이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라가 활시위를 잡은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여신 같아 라엘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라엘과 눈이 마주친 테오도라가 활을 내리며 말했다.

“그냥 두면 또 놓쳐 버릴 것 같아 내가 나섰습니다. 혹시 불쾌했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라엘이 힘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테오도라는 하인이 가져온 토끼 사체를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급소를 맞아 즉사한 토끼는 피도 거의 흘리지 않고 아주 깨끗했다.

“크기가 커 털이 제법 많이 나올 것 같군요. 가죽을 벗겨 공자에게 장갑을 만들어 드리죠.”

“아닙니다. 황녀 저하께서 잡으신 것 아닙니까. 그렇게 귀한 것을 어찌 제게…….”

“먼 곳까지 온 선물입니다. 게다가 추위를 많이 타잖아요. 남부에서는 몰라도 이곳에 있는 동안은 필요할 겁니다.”

그 말에 라엘은 두 볼을 붉게 물들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제야 테오도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인에게 토끼의 손질을 지시했다. 활을 쏘는 것도 그렇고 동물을 다루는 것까지 아주 능숙해 보였다.

라엘은 지금껏 저런 여인은 처음 보았다.

“사냥을 많이 해 보셨나 봐요.”

“아바마마를 따라서 조금이요.”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활 쏘는 솜씨가 무척 좋으시던 걸요.”

라엘의 칭찬에 테오도라는 피식 웃었다.

“표가 났나요? 사실 활은 스승을 두어 제대로 배웠습니다. 남자에 비해 힘이 약한 여자가 효율적으로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니까요. 멀리서 저격하면 힘을 겨룰 필요 없이 단숨에 목숨을 거둘 수 있죠.”

여인이 입에 담기에는 거친 말이었다. 약혼자 앞에서는 더더욱 하기 힘든 말이었다.

주변에 있던 하인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지만 라엘은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그래서 그렇게 좋은 실력을 가지셨군요. 제 아버지께서는 검을 쓰는 것을 중요시해 활 쏘는 법은 기본만 가르쳐 주셨거든요. 저도 활을 제대로 배웠다면 황녀 저하처럼 멋지게 사냥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순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그는 어떤 의미로는 참 대단했다. 테오도라의 어떤 모습을 보아도 실망이라는 걸 할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토끼의 간을 떼먹는 모습을 보아도 참 비위가 좋다며 박수를 칠 것 같은 모습이랄까.

그 모습에 테오도라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오래 끌지 말고 오늘 말하는 것이 좋겠어.’

그래서 테오도라는 라엘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내가 한 수 가르쳐 줄까요?”

“네? 정말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라엘이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자 테오도라는 또 가슴 한편이 콕콕 쑤셔 왔다. 테오도라는 양심의 가책을 이겨 내며 말을 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다만 내가 공자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이면 말이 돌 테니 하인들을 물리는 것이 좋겠군요.”

아무리 어려도 귀족가의 공자가 여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듣기 좋은 소문이 아닐 터였다. 그래서 한 말은 맞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테오도라는 라엘과 단둘이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솔직히 자신의 말을 전할 타이밍이.

테오도라와 라엘은 하인들을 모두 물리고 숲속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 모습을 란슬롯 후작 부부가 보았다면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는 것이냐며 감격에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약혼자들끼리 나눌 만한 달콤한 대화가 아니었다.

“부족한 힘을 보충하기 위해선 활시위를 최대한 빠르게 튕겨 내 화살을 쏴야 합니다.”

테오도라는 활을 든 것과 거의 동시에 시위를 잡아당겨 화살을 쐈다. 마치 튕겨 나가듯 날아간 화살은 목표한 나무 정중앙에 꽂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엘은 박수를 쳤다.

“정말, 정말 대단하세요.”

아까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활 쏘는 모습은 너무나 멋있었다. 그 순수한 모습에 테오도라는 곤란한 듯 웃고는 한 발짝 물러났다.

“이제 공자가 해 봐요.”

라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활을 들었다. 분명 방금 전 보았던 테오도라의 모습이 머릿속에는 선명한데 몸으로 따라 하려니 쉽지가 않았다.

그것을 안 테오도라가 라엘의 옆으로 다가왔다. 테오도라는 활대와 활시위를 잡은 라엘의 손 위에 손을 얹어 섬세하게 각도를 잡아 주었다.

“활을 보며 자세를 잡으면 표적은 이미 도망가 버려요. 이 각도를 몸으로 외우세요. 활을 드는 순간 이렇게 시위를 잡은 후에 빠르게 놓는 겁니다.”

탕. 화살이 날아갔다.

아까 라엘이 혼자 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정중앙은 아니었지만 나무에 화살이 단단히 꽂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테오도라가 환히 웃으며 물었다.

“어때요. 느낌이 오나요?”

그러나 라엘은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테오도라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에서 배어나오는 청량한 향기가, 뜨거울 정도로 따스한 손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새하얀 얼굴이 마치 폭발할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 테오도라는 아차 싶어 몸을 뗐다.

그가 너무 작고 여려서 때때로 그가 사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열셋이라도 사내는 사내였다. 다 큰 여인의 스킨십이 부담스러울 만했다.

“아, 미안해요. 무례를 저질렀군요.”

테오도라가 솔직히 사과를 하며 떨어지자 라엘이 붉게 물든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하께선 저의 약혼녀이신걸요.”

“…….”

테오도라는 그 말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정말 중요한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라엘 란슬롯 공자.”

“네?”

낮은 목소리에 라엘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테오도라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은 앞으로 들려올 말이 무엇일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뜨끔. 또다시 가슴 한편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테오도라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죠. 나는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 라엘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어려서 그러신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단지 내 욕심 때문이 그렇습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아요. 그래서 그 모든 걸 이룰 때까지 결혼을 미루고 싶어요. 그리고 그 시간은 아주 오래 걸릴 거예요. 기약할 수 없을 만큼.”

라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커다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테오도라는 내리깐 눈으로 힘겹게 말했다.

“그러니 이 약혼을 파기하기를 원한다면 솔직히 말해 줘요. 최대한 공자께 피해가 가지 않게 파혼해 주겠어요.”

사실 이런 말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제대로 힘도 쌓지 않은 지금 파혼을 해 버리면 테오도라가 잃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의 분노를 사고 란슬롯 후작 부부의 충성을 잃게 된다. 그러니 이번 고비만 어떻게든 넘겨 약혼을 유지하는 것이 테오도라에게는 가장 좋았다.

라엘은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그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분명 그는 결혼식을 미루고 기다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냥 순수한 라엘을 보며 테오도라는 결심했다.

더 이상 이 어린 약혼자를 이용하지 않기로. 그녀의 야망에 기만당하기에 그는 너무 어렸고 맑았다.

‘울어 버리면 어쩌지.’

여인의 눈물은 많이 보았지만 사내의 눈물을 본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긴장한 얼굴로 라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엘은 울지 않았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는 크게 숨을 쉬었다. 깊이 안도한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싫어 결혼을 하기 싫은 게 아니란 말씀이시죠?”

“……그렇긴 하지만.”

“그럼 전 괜찮아요. 기다리는 것은 자신 있어요.”

힘차게 웃는 라엘의 모습에 테오도라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 쉽게 대답할 일이 아닙니다. 공자는 아직 너무 어려요. 더 좋은 인연이 나타날 기회도 많을 겁니다.”

“아뇨. 제 일생에 앞으로 당신보다 멋진 여인은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라엘의 눈빛이 전에 없이 단호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에 도리어 당황한 것은 테오도라였다. 라엘은 다부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녀 저하, 전 아직 열세 살이에요.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스물셋이고, 이십 년이 지난 후에도 서른셋이죠. 그러니 마음 놓고 하고 싶은 것을 하세요. 제가 황녀 저하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시간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러니 제게 파혼을 하라는 말씀도 하지 말아 주세요. 파혼을 하겠다는 말씀도 하지 말아 주세요.”

테오도라는 자신의 가슴께 오는 어린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여전히 그는 작았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여린 외모였다.

그런데 그 눈빛만큼은 마치 다 자란 사내같이 단호하고 단단했다. 살랑, 하고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해가 질 무렵, 사냥을 나갔던 이들이 다시 모였다. 황제는 호언장담했던 대로 커다란 사슴을 무려 열 마리나 잡아 왔다.

“다 잡아 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큰 놈만 골라잡아 온 거야.”

황제가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성대하게 열릴 바비큐 파티를 기대하며 하인들은 상기된 얼굴로 환호성을 질렀다.

황제는 라엘과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옆에는 토끼 세 마리가 놓여 있었다.

황제가 잡은 사슴에 비한다면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라엘의 얼굴은 꽤 뿌듯해 보였다. 그래서 황제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네가 잡은 것이냐.”

“한 마리는 테오도라 황녀께서 잡으신 것이고 나머지 두 마리는 제가 잡았습니다. 물론 황녀 저하께서 많이 도와주시긴 하였지만요.”

맑게 웃는 라엘의 옆에 서 있던 테오도라가 말을 덧붙였다.

“활 쏘는 법을 조금 알려 드렸을 뿐입니다. 소질이 있으시더군요.”

그녀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유약한 외모와 달리 라엘의 운동 센스가 좋았다.

원체 가는 몸이라 근력이 부족할 뿐이었다. 좀 더 자라서 힘이 붙으면 분명 꽤 좋은 솜씨를 가지게 되리라.

테오도라의 칭찬에 라엘은 한껏 얼굴은 붉혔고, 황제는 그 모습이 귀여워 어린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테오도라는 허튼소리는 하지 않지. 앞으로 더욱 정진하거라.”

“네! 그리하겠습니다.”

라엘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황자들이 황제에게 달려와 말했다.

“아바마마, 저희도 잡았습니다.”

“너희가?”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황제의 눈이 커졌다.

“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쌍둥이 황자가 손을 내밀었다. 어린 황자들의 두 손 안에 있는 것은 커다란 사슴벌레였다.

그것을 본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 사냥이라기보다는 채집이었지만 아직 어린 황자들로서는 꽤 큰 수확이었다.

쌍둥이 황자들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눈치챈 황제가 어린 황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장하구나.”

엄한 아버지의 칭찬에 쌍둥이 황자는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황제는 저 멀리 존과 샬롯을 바라보며 말했다.

“큰 형보다 훨씬 낫군.”

저 멀리 고개를 푹 숙인 존과 허리에 손을 얹고 화를 내고 있는 샬롯이 보였다.

“어떻게든 폐하를 따라갔어야지! 중간에 포기하면 어쩌자는 거니!”

“하지만 계속했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았단 말이에요.”

“죽기는 왜 죽어! 이 어미가 옆에서 쫓아가고 있는데!”

존은 결국 중간에 사냥을 포기했다. 힘들어서 더 이상 못 가겠다며 바닥에 대자로 누워 떼를 쓰자 샬롯도 별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독사처럼 무서운 여인이라도 드러누운 아들을 채찍질하여 강제로 움직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존은 오늘 제대로 된 사냥감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놀랍지도 않은 광경이라 황제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카시스는 아직인가?”

황제의 옆에 있던 시종 알프레도가 대답했다.

“사냥이 끝났다는 나팔 소리를 들으셨을 테니 곧 오실 겁니다.”

“흐음.”

황제는 숲 안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걸’ 잡았을까?

그리고 잠시 후,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카시스와 샐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루 종일 사냥을 했던 이답지 않게 깨끗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뒤따라오는 하인의 손에 들린 우리 안에는 작은 동물이 누워 있었다. 그 동물을 본 황제와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은빛 여우였다. 반짝이는 은빛 털을 가진 여우로 황성의 숲에서만 자라는 귀한 여우였다. 늘 수풀 속에 숨어 있어 발견하는 것조차 힘든 동물이기도 했다.

먼 과거 저 여우를 가지고 싶었던 황제의 명에 의해 사냥꾼 수십 명이 한 달을 고생한 일화는 유명했다. 그토록 귀한 여우를 그가 잡아 온 것이다.

황제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하, 정말 잡아 버렸군.”

“운이 좋았습니다.”

카시스는 태연하게 대답했으나 황제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열 마리의 사슴과 한 마리의 은빛 여우.

제아무리 커다랗고 맛있는 사슴이라고 하나 은빛 여우의 가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늘의 사냥이 사냥감을 품평하는 대회였다면 자신은 카시스에게 진 것이다.

황제는 아이처럼 승부욕이 강한 사내였다.

“다음 사냥 대회 때는 꼭 은빛 여우를 잡아야겠어.”

“그러십시오.”

카시스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저 대단한 동물을 잡아 놓고도 얌전한 얼굴이라니.

황제는 이럴 때 가장 그를 놀리고 싶었다. 그래서 황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은 사냥의 성공을 기념하는 파티를 열 셈이네. 당연히 함께할 테지?”

‘아니요. 피곤합니다.’라고 단칼에 거절하려던 카시스였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시선이 닿은 곳은 자신이 아니라 샐리였기 때문이다.

“그대를 위해 특별히 맛있는 부위를 골라 요리를 대접하지.”

어찌 황제의 말을 거절할 수 있을까. 샐리는 허리를 숙였다.

“영광이옵니다.”

“그래. 그럼 에스테반 공작은?”

황제의 능글거리는 눈빛에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날 밤 파티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성안 가득 사슴 고기가 구워지는 냄새가 가득했다.

오늘 밤만큼은 파티를 즐기라는 황제의 명으로 성의 하인들도 모두 나와 신나게 고기를 뜯었다.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은 정원에 꾸려진 테이블에서 파티를 즐겼다. 평소의 기품 넘치는 식사와는 달리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특히나 황제는 카시스를 바로 옆에 앉히고는 몇 번이나 술을 권했다. 평소라면 황제의 술을 거절했을 카시스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또 그녀를 들먹일 테지.’

영악한 황제는 카시스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

자신이 마시지 않는다면 또 샐리를 귀찮게 하며 그녀에게 술을 권할 것이 뻔했다. 그럴 바에는 자신이 다 마시는 것이 나았다.

그게 몇 잔이라도, 몇 병이라도.

그리고 카시스는 술 취한 티를 내지 않는 데 꽤 능숙했다. 파티가 끝나고 황성을 나오는 순간까지 누구도 카시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의 단정한 얼굴은 조금의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예법도 모두 완벽했다. 샐리를 에스코트하여 마차를 탈 때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그러나 마차가 움직이는 순간 샐리는 카시스가 평소와 다른 것을 느꼈다.

마주 본 그의 눈빛이 평소와는 무척 달랐다. 어딘가 야릇한, 선연한 욕망이 남긴 눈빛이었다. 그제야 샐리는 깨달았다.

‘이 남자, 취했구나.’

샐리는 저런 눈빛을 한 남자들이 뭘 원하는지 잘 알았다.

취기가 오른 사내가, 이런 좁은 공간에서,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인과 함께 있으면 야릇한 욕망이 오르기 쉬웠다. 그것이 냉정한 에스테반 공작일지라도.

‘이렇게 취한 것을 보는 건 오랜만이네.’

전생의 샐리는 그를 유혹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다. 그가 취할 만큼 술을 먹이는 방법도 그중 하나였다.

술에 취한 날 그는 평소보다 강렬하게 샐리를 원했다. 마치 그를 구속하던 무언가가 풀린 것처럼.

그래서 샐리는 술에 취한 그가 좋았다. 사랑한다고 마음껏 소리쳤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는 알았다고 속삭여 주고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마치 그의 마음에는 샐리밖에 없는 것처럼.

그러나 그건 모두 전생의 이야기였다. 샐리는 그런 식으로 몸이 닿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그와는 더더욱.

“저하, 취하셨죠?”

“아니.”

자기가 취했다고 인정하는 사내는 세상에 없다.

“취하셨네요.”

샐리는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이내 창문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몰려들었다. 졸던 사람도 정신이 번뜩 들 만큼 싸늘한 바람이었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눈썹을 찡그리는 카시스를 향해 샐리가 말했다.

“찬바람을 쐬면 조금은 술이 깨실 거예요.”

“안 취했다니까.”

“안 믿어요.”

샐리는 새초롬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카시스 쪽에 있는 창문을 열기 위해서였다. 샐리가 창문을 열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열지 마, 추워.”

“저도 추워요. 그래도 술이 깨는 게…….”

“추워.”

아이처럼 말하며 카시스는 샐리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갑작스럽게 그의 품에 갇힌 샐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늘 안아 보고 싶었어.”

“…….”

샐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다정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지독히 낮았던 그 목소리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좀 더 대담한 행동이었다면 세차게 그를 거절했을 것이다. 가슴을 만지거나, 입술을 탐하거나, 허리를 감싸 안거나 그랬다면…….

그러나 그는 아이처럼 샐리를 자신의 품에 꼭 안았을 뿐이었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듯이.

“달콤하고, 부드럽고, 따뜻해.”

“…….”

귓가에 휘감기는 그 목소리에 샐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술에 취해서야. 술에 취해서.’

사내가 술에 취하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 말들을 떠드는지 샐리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말에도 별다른 의미는 없을 것이다.

머리로는 그토록 잘 아는데 왜 이렇게 심장은 쿵쾅거리는 것일까.

결국 샐리는 카시스의 곁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 샐리를 껴안는 그의 온기가 너무 서늘해서, 그녀가 아니면 정말로 너무나 추울 것 같아서.

‘어차피 내일이면 모두 잊어버릴 텐데, 뭘.’

전생에도 그랬듯이 그는 지금 했던 모든 말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맞닿았던 체온이 거짓말인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조금만…….’

샐리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의 등 위로 손을 얹었다.

* * *

다음 날 아침, 샐리는 눈을 크게 떴다. 카시스가 자신의 방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가 어젯밤 일을 기억해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심장이 덜컹거렸지만 그건 아니었다.

“어제 술에 취해 버려서 중요한 것을 주지 못했더군.”

“무엇을요?”

카시스가 샐리에게 건넨 것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여우였다. 여우는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여우를 제게 주신다고요?”

“그래. 온순한 녀석이니 키우기는 어렵지 않을 거야.”

샐리는 조금 당황했다.

황성의 숲에 사는 은빛 여우는 아름다운 생김새만큼 어마어마한 몸값으로도 유명했다. 대저택 하나를 살 가격에 여우를 원하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귀한 여우를 자신에게 준다니.

그의 아름다운 애첩이 되기 위해 필요한 보석과 드레스와는 전혀 다른 선물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잔뜩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요?”

“그야…….”

카시스는 샐리와 눈을 마주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샐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어젯밤 느꼈던 그의 체온이 생각나서였다.

‘괜찮아. 어차피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그 자신도 모르는 술주정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불안한 감정을 겨우 숨기고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너는 나의 애첩이니까.”

“…….”

“사내가 마음에 품은 여인에게 사냥을 나가 잡은 동물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잖아.”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리고 카시스가 무언가 샐리에게 줄 때 늘 하는 말이기도 했다.

너는 나의 애첩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 총애를 보여 주기 위해 주는 것이야.

그런데 어째서 심장이 이렇게 뛰는 것일까.

불안할 만큼, 불쾌할 만큼.

샐리는 처음으로 그의 선물을 거절하고 싶어졌다.

* * *

며칠 후 란슬롯 후작 부부가 황성에 도착하는 날이 왔다. 황제는 후작 부부를 위해 작은 연회장에 식사를 준비했다.

긴 테이블에는 황제와 테오도라가 먼저 앉아 있었다. 두 손을 모은 테오도라는 평소답지 않게 긴장된 얼굴이었다.

사냥이 끝나고 열린 연회에서 라엘은 말했다.

—제가 부모님께 말씀드릴게요. 결혼을 연기하고 싶다고요. 부모님은 분명 이해해 주실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여린 얼굴과는 다른 또렷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쉽게 마음이 편해질 수 없었다.

후작 부부는 이 결혼을 누구보다 열망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아들의 말에 따라 줄까?

만약 그들이 라엘의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면 오늘 혼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게 뻔했다.

‘최악의 경우엔 오늘 이 자리에서 결혼 날짜가 잡힐 수도 있어.’

그리고 그 날짜는 올해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이 결혼은 테오도라가 싫다고 관둘 수 있는 것이 아닐 터였다.

한번 물살을 탄 황족의 혼사는 개인의 의지로 막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대로 결혼을 하게 되면 황제가 될 가능성은 아예 사라져 버린다.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키워 온 꿈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무언가에 겁내는 법이 없던 그녀에게는 아주 낯선 감정이었다.

“황제 폐하, 란슬롯 후작 부부와 공자가 도착하였습니다.”

문 너머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테오도라는 굳은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문이 열리고 란슬롯 후작 부부와 라엘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테오도라는 후작 부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두 사람을 본 것은 알스로 유학 가기 전,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란슬롯 후작은 무척 큰 체구를 가진 사내로 투박한 느낌의 얼굴이었다. 반대로 옆에 있는 후작 부인은 라엘과 꼭 닮은 가녀린 몸매의 미인이었다.

후작 부부는 황제의 앞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제국에서 가장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폐하의 은총 덕분에 힘들지 않았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한 후작 부부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테오도라는 란슬롯 후작의 얼굴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치켜 올라간 눈썹과 사나운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어떻게 보아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얘기가 잘 안 된 모양이구나.’

테오도라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라엘은 후작을 설득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황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렇게 그대 부부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두 사람의 결혼 때문이야. 샬롯이 조용한 지금이 두 사람을 결혼시킬 적기라고 생각하네만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란슬롯 후작이 입을 열었다.

“너무하십니다, 폐하.”

“……뭐?”

예상치 못한 반응에 황제는 눈을 깜빡였다. 늘 깊은 존경심으로 황제를 대했던 란슬롯 후작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의 험악한 얼굴에는 서운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라엘이 더 성장하기를 기다려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당장 결혼해도 문제 될 게 뭐 있나. 내 라엘을 만나 보니 머리도 제법 영특해 보이고 태도도 어른스럽더군. 그거면 됐지, 나이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싶은데.”

생각지도 못한 란슬롯 후작의 말에 당황한 황제는 저도 모르게 라엘의 칭찬을 죽 늘어놓았다.

그러나 존귀한 황제의 칭찬에도 란슬롯 후작의 표정은 풀어지긴커녕 더욱 험악해졌다. 그는 콧김을 내뿜으며 대답했다.

“중요합니다. 지금 결혼해 보았자 첫날밤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지 않습니까!”

곰처럼 우렁찬 목소리가 연회장 가득 울리는 순간 연회장에는 엄청난 적막이 가득 찼다. 황제와 테오도라는 입도 다물지 못한 채 커다래진 눈으로 굳어 버렸다.

그러나 란슬롯 후작은 두 사람의 반응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평생을 함께하는 부부에게 첫날밤이 얼마나 의미 깊은지 폐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날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황제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말이 튀어 나갈 뻔했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간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냐고도 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후작 부인마저 맞는 말이라는 듯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설마 후작 부인도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여인에게도 첫날밤은 일생일대의 소중한 날인걸요. 남편의 뜨거운 체온도 모르고 그날 밤을 보내야 한다니 황녀 저하가 너무 가엽습니다.”

후작 부인은 망측하기 그지없는 말을 가녀린 목소리로 잘도 내뱉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아련한지 황제는 자신이 뭔가 놓치는 것이 있나, 생각할 정도였다.

‘아니야. 고작 첫날밤이 무슨 대수라고. 이들이 호들갑 떠는 거야.’

고개를 내저으며 황제는 마지막으로 라엘을 바라보았다. 그가 느끼기에 라엘은 테오도라에 대한 애정이 무척 컸다. 분명 그는 자신의 편이 되어 줄 터였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황제의 물음에 라엘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폐하께 감히 말씀드립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새하얀 얼굴을 복숭아꽃처럼 빨갛게 물들이며 라엘은 말을 이었다.

“제가 황녀 저하를 온전히 여자로 대할 수 있을 때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아직은 제가 너무 작아 그녀를 제대로 안아 들 수도 없습니다. 신부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신랑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 부끄럽습니다.”

어찌나 수줍게 말하는지 보는 이가 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는 황제조차 왠지 귓가가 빨개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해. 아직 너무 어린 소년이 아닌가.

아니, 첫날밤이 도대체 뭐라고 이 난리야.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황제를 향해 쐐기를 박는 라엘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용맹한 황제 폐하의 사윗감이 되기엔 아직 제가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함께 달리며 사냥을 할 정도는 되어야 폐하의 사윗감으로 당당하지 않겠습니까.”

듣기 좋은 그 말을, 너무도 고운 얼굴로 말하니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끄응. 황제는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럼 언제야 결혼을 할 거라는 말이냐. 설마 네가 성년이 되었을 때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라엘은 이제 열세 살. 성인이 되려면 7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성미 급한 황제에게는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라엘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 키가 황녀 저하만큼 자랄 때쯤이면 되지 않을까요?”

황제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테오도라는 보통의 성인 남성보다 키가 컸다. 7년이란 시간이 지나도 라엘은 테오도라를 따라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토록 맑게 웃는 얼굴을 보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 결국 황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아무리 황제가 원하는 혼사라 해도 아직 어린 소년에게 결혼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말대로 라엘은 아직 어렸다.

첫날밤이니 뭐니 하는 낭만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기도 가질 수 없는데 굳이 일찍 결혼을 강행할 필요도 없었다.

황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아직은 네게 이른 것 같구나. 내 마음이 너무 급했던 것 같아.”

“그렇다면…….”

“그래. 혼담은 미루도록 하지. 그러니 어서 크거라.”

그 말에 라엘은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우유도, 고기도 두 배는 더 먹고 빨리 자라도록 하겠습니다.”

사르르 웃는 라엘의 모습은 정말 기뻐 보였다. 황제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꼭 그 말을 지키라고 말했다.

테오도라는 그 모습을 믿기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했던 걱정이 무색할 만큼 너무도 쉽게 혼담이 미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무도 화내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건 저 작은 약혼자, 라엘의 힘이었다.

후작 부부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하룻밤만 묵고 다시 영지로 떠나야 했다.

“남부는 지금 수확 철이거든요. 물자를 잘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라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무척 바쁘세요.”

라엘이 테오도라에게 설명했다. 물론 테오도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더욱 의아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한걸음에 황성으로 달려올 만큼 그들은 이 혼담을 강렬히 원했다는 뜻이니까.

‘라엘 공자가 도대체 어떻게 설득했기에 생각이 바뀐 거지?’

아들의 말은 무엇이든 들어줄 만큼 아들에 대한 사랑이 돈독한 것일까 하고 고민하던 테오도라는 이내 그 답을 알게 되었다.

후작 부부와 라엘이 떠나는 날 아침, 테오도라는 짐을 꾸린 마차 앞으로 배웅을 나갔다.

미래의 시부와 시모가 될 이들에게 테오도라는 짐짓 어색한 마음을 가지며 인사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험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란슬롯 후작이 말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 한번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중년의 귀족 사내가 다 큰 황녀를 안는다는 것은 무엄하기 그지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너무나 간절해 테오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슬롯 후작은 테오도라를 덥석 껴안았다. 후작의 체격이 곰처럼 엄청났기에 테오도라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란슬롯 후작은 정말이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에 만났을 때는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는데 정말 잘 자라셨군요. 참 곱게 크셨습니다.”

테오도라는 이 품이 낯설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도 그는 자신을 이렇게 안아 주었던 것 같다.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란슬롯 후작 부인이 고운 눈가에 서린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타국으로 유학까지 가셔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이렇게 건강하게 자란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저희가 직접 보살펴 드리고 싶은데 거리가 멀어 그러지 못하니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괜찮습니다.”

테오도라는 놀란 감정을 숨기며 겨우 대답했다. 그들이 친절하게 대해 줬던 것을 기억하고는 했으나 그저 황후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란슬롯 후작 부인이 테오도라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저하, 라엘에게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아직 결혼이 하고 싶지 않으시다고요.”

“……!”

그 말에 테오도라의 눈이 커졌다. 그가 모든 것을 솔직히 말했을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후작 부부의 눈에는 어떠한 원망도 보이지 않았다.

“황녀 저하를 하루빨리 가까이서 보살피고 싶은 마음에 저하의 마음은 생각지도 못하였어요. 부담을 드린 것 같아 어찌나 죄송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큽. 그래도 역시 아쉽긴 합니다. 황녀 저하께서 남부로 오시면 맛있는 음식을 잔뜩 대접해 드리고 싶었는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란슬롯 후작의 말에 후작 부인이 눈을 흘겼다.

“이이도 참. 그런 내색 안 하기로 했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테오도라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그들이 마음을 바꾼 이유가, 황제에게 그토록 열성적으로 했던 말들이 모두 자신을 위해서였단 말인가.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테오도라를 향해 후작 부부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언제든 오고 싶어질 때 란슬롯가로 와 주세요, 황녀 저하.”

“라엘을 아주 멋진 신랑감으로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테오도라는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저런 식으로 대하는 이들을 보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지요.”

그래서 테오도라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어색하게 대답했다. 후작 부인은 그 모습이 귀여운 듯 호호 웃더니 옆에 서 있던 라엘의 어깨를 톡톡 쳤다.

“떠나기 전에 황녀 저하께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오렴.”

후작 부부의 배려로 라엘과 테오도라는 잠시 산책로를 걸었다. 라엘이 처음 온 날 테오도라가 안내했던 그곳이었다.

휘이잉. 그때처럼 세찬 봄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던 테오도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손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라엘의 손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가 느껴지는 부드럽고 하얀 손이었다. 그러나 검을 잡아 생긴 굳은살이 잘 어울리는 그런 손.

라엘이 테오도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눈이 마주 칠 만큼 자라면 다시 오겠습니다.”

“…….”

“그때는 데이트 신청을 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겠죠?”

어딘가 마음 한편이 물렁해지기도 하고 얼굴에 조금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새하얀 뺨에 입을 맞추고 싶다면 위험한 생각일까. 민망한 감정을 억누르고 테오도라는 웃었다.

“기대하고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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