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11화 (12/28)

11. 레이몬드 호수에서 생긴 일

신년회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테오도라에게는 그러했다.

황후를 대신하여 손님을 맞았고, 황제와 함께 춤을 추었다. 그리고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여인도 자신의 사람으로 공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테오도라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덕분에 샬롯 백작 부인의 눈치를 보느라 몇 장 도착하지 않았던 초대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와, 대단하네요.”

쌓여 있는 수십 장의 초대장을 보며 샐리가 감탄했다.

“그대만큼은 아닐 텐데, 뭘.”

테오도라의 말에 샐리는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샐리가 테오도라를 찾아온 것은 이 초대장들 때문이다. 사교계에 빠삭한 귀부인들이야 초대장의 이름만 보고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테지만 테오도라는 아니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제국을 떠나 있었기에 현 제국 사교계의 정세에 밝지 못했다. 그래서 샐리가 그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아만다 백작 부인은 조용하신 성격이라 많은 이야기가 들려오는 분은 아니시죠. 하지만 아주 점잖고 우아하시기 때문에 좋아하는 분이 무척 많으세요. 숨은 인기인이시죠. 반대로 몬테 후작 부인은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듯 보이지만 적이 무척 많아요. 뒤에서 험담하는 걸 아주 좋아하시거든요.”

샐리는 자신이 아는 한도에서 그들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사교계에서 직접 마주쳐 알고 있는 제대로 된 정보였다.

샐리는 테오도라에게 있어 가장 좋은 사교계 선생님인 셈이었다.

초대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던 테오도라가 놀란 눈을 했다.

“애니카 백작 부인도 초대장을 보내왔군.”

샐리에게도 같은 초대장이 도착했기에 읽지 않아도 그 내용을 잘 알았다.

“애니카 부인의 생일 연회 말이죠? 가능하시면 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분은 사교계에 친구가 무척 많으니까요.”

“그녀와 꽤 친한가 보군.”

테오도라의 말에 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사이라기보다는 부인께서 제게 무척 호의를 보여 주신답니다. 과분할 정도로요.”

그녀의 부부 생활에 관련된 은밀한 고민을 들어 준 후 애니카 부인은 샐리에 대한 애정이 폭발했다.

그녀가 주최하는 모든 연회의 초대장을 보내왔다. 샐리가 다른 일정으로 가지 못한다고 하면 정말 시간이 안 되냐고 다시 물어 오기까지 했다.

자존심 강한 귀부인이 그런 말까지 한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애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테오도라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한테도 초대장을 보낸 것이군. 내가 오면 그대가 따라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 말에 샐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애니카 백작 부인은 샬롯 백작 부인과 친분이 있어. 그렇기에 샬롯 백작 부인의 눈치가 보여 열심히 나를 피했지. 그런 여인이 새삼스럽게 내게 초대장을 보내왔다면 그 이유는 뻔하지 않나.”

굳이 테오도라에게까지 초대장을 보냈다는 것은 앞으로도 샐리와 친분을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샬롯 백작 부인과 사이가 벌어지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는 애니카 백작 부인만이 아니었다.

샐리의 인맥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었고, 친분이 깊었다. 샬롯 백작 부인의 눈치를 보던 이들이 그 두려움을 버리고 테오도라를 향해 다가올 만큼.

그 의미는 아주 컸다.

“역시 그대와 손을 잡길 아주 잘한 것 같아.”

샐리는 그 말에 차분히 말했다.

“아직 첫 초대장이잖아요. 첫 초대는 탐색의 의미가 강하죠. 이것만으로 이분들이 모두 테오도라 저하의 편이 된다는 것은 아니에요. 앞으로가 중요하죠.”

황녀의 솔직한 칭찬에 흥분하기는커녕 당돌한 말을 차분히 내뱉는 모습에 테오도라가 웃었다.

“그대는 무척 엄하군. 마치 조세핀을 보는 것 같아.”

“그분과 닮았다니 영광스런 말이네요.”

샐리가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테오도라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나머지 초대장을 넘겼다. 마지막 초대장을 살폈을 때는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테오도라는 가문과 사교계에서의 위치로 초대장을 고르지 않았다. 그저 소문이 너무 좋지 않은 여인들을 가려냈을 뿐이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택한 방법이었다. 덕분에 추린다고 추린 초대장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저하의 몸이 열 개라도 이 모든 연회에 가시기는 힘들 것 같네요.”

“내 생각도 그래.”

테오도라가 산처럼 쌓여 있는 초대장을 보면서 말했다. 샐리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역시 저하께서 연회를 한번 주최하는 편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직접 얼굴을 보면 어느 여인과 가까이 지내면 좋을지 확실히 정하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그리고 저하께서 사교계에 정식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도 있고요.”

테오도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테오도라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영애라는 것이다.

부모의 보호를 받는 영애는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멋대로 연회를 열 수 없었다. 무릇 연회를 여는 것은 안주인의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가 찬 영애가 연회를 열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동의와 도움이 필요했다.

딸을 대신하여 어머니는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초대장을 보내고 연회를 준비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테오도라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처지가 그와 비슷했다. 그녀의 어머니인 황후는 벌써 몇 년째 병을 앓고 있어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그런 그녀가 딸을 위해 연회를 준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황후 폐하께서 가능하실까요?”

“많이 쇠약하시긴 하지만 동의 정도야 해 주실 수 있어. 물론 내 대신 초대장을 보내 주신다거나 연회를 준비해 주시진 못하실 테지만 말이야.”

그 말에 샐리가 안도한 듯 말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초대장을 쓰는 것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연회 준비는 골든리아 공작 부인께 말씀드리면 분명 도움을 주실 거예요.”

“화려한 도우미들이군.”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여인과 사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인의 도움을 받는다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럼 황성에서 연회를 여는 것으로 하지. 장소는 역시 메인 연회홀인 크리스털 홀이 좋겠지?”

황성의 가장 큰 연회홀인 크리스털 홀은 웅장한 크기와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곳에서 연회를 연다는 것 자체로 이 연회의 무게감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하의 이름으로 여는 첫 연회잖아요. 조금 더 특별한 장소였으면 좋겠어요. 크리스털 홀은 너무 많은 연회가 열리는 곳이라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할 거예요.”

‘첫 연회’는 중요했다. 그 연회로 주최자의 인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샐리는 테오도라에게 어울리는 아주 특별한 연회를 열고 싶었다.

“생각해 둔 곳이 있나?”

샐리는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면 시원한 바람이 생각났다. 갇힌 홀에서 수다나 떠는 파티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여인들이라고 해서 꼭 실내에서 차를 마시거나 무도회를 여는 만남만 가지는 건 아니었다.

승마장에서 말을 탄다든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낭독회도 있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샐리가 말했다.

“레이몬드 호수에서 뱃놀이를 열면 어떨까요?”

그 말에 테오도라의 눈이 커졌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레이몬드 호수. 황성 안에 있는 호수지만 평민들조차 그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호수였다.

그러나 요 몇 년 레이몬드 호수를 본 이들은 거의 없었다. 호수가 있는 곳이 황후궁 뒤쪽 정원이었기 때문이다.

황후가 깊은 병환에 걸린 것과 동시에 레이몬드 호수가 있는 정원은 폐쇄됐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벌써 십 년이었다.

“아직도 레이몬드 호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

테오도라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국 사람 중 그 이름을 잊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요즘도 종종 귀부인들께서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하세요. 분명 그만큼 좋은 장소는 없을 거예요.”

“……그렇군.”

테오도라는 조금 놀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녀가 미소 지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야.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거든. 어마마마께 부탁드려 보도록 하지.”

* * *

황금으로 만들어진 벽은 눈이 부실 만큼 반짝였고, 천장에 달린 마력석은 어두운 한밤에도 환하게 빛이 났지만 황후궁은 어둡기만 했다.

궁의 주인인 황후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황후는 십 년째 깊은 병환을 앓고 있었다. 몸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병은 아니었다. 단지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한 마음의 병이라고 했다.

그녀의 눈은 총기를 잃었고 몸은 빼빼 메말랐다. 방 한편에 놓인 커다란 보석이 달린 왕관은 쓰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녀는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

황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귓가에 들려온 낮고 청량한 목소리는 그녀가 반응하는 유일한 목소리였다.

테오도라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

황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햇빛이 아주 좋아요. 산책이라도 같이 가시겠어요?”

황후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마음을 닫은 어머니와의 대화는 조용했고 침울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위엄이 넘치던 황후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기에, 그녀는 감히 나약해진 어머니를 동정하지 않았다.

“어머니, 부탁이 있어요. 제 이름으로 연회를 열고자 해요. 레이몬드 호수에서 말이에요.”

그 말에 초점 없던 황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레이몬드 호수는 황후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황후가 아직 건강했던 시절, 매일같이 수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녀는 황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인 레이몬드 호수로 손님들을 안내하곤 했다.

소문의 레이몬드 호수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그 크기와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레이몬드 호수는 황후의 자랑이었으며, 드높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호수 앞에서 위엄 있게 빛나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도 테오도라의 기억 속에서 생생했다.

테오도라가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샐리라는 여인에 대해선 말씀드렸죠? 그녀가 레이몬드 호수에서 연회를 열면 좋겠다고 말해 주었어요.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 호수를 그리워하고 있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좀 기분이 이상해졌답니다. 마치 그 말이 어머니를 향한 말 같았거든요.”

“…….”

“어머니께 부담을 주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황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연회를 여는 것은 허락해 주시는 거죠?”

황후는 흐린 눈으로 가만히 딸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약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 황후의 목소리였다.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최대한 성실히 대답을 한 셈이었다. 테오도라는 그 뜻을 알고 환히 웃었다.

“감사해요, 어머니.”

테오도라는 바짝 마른 황후의 손을 꼭 잡았다. 장성한 딸의 손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의 온기였다.

그 후 황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오도라 혼자 요즘 있었던 아주 소소한 이야기들을 떠들 뿐이었다. 조금 후 황후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기력이 다했다는 의미였다.

“이만 가 볼게요. 쉬세요.”

테오도라는 생기 하나 없이 메마른 어머니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방을 나온 테오도라는 조금 더 걸어 황후궁의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거대한 황성에는 몇 개의 정원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황후궁의 정원이 가장 넓고 아름다웠다.

십 년이나 외부인의 출입이 닫힌 곳이었지만 정성껏 관리된 덕에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정원의 끝자락에 레이몬드 호수가 보였다. 호수는 선명한 에메랄드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 있었다. 샐리였다.

그녀는 테오도라가 온지도 모른 채 넋 놓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오도라가 그녀를 이곳에 데려왔던 그대로 멈춰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샐리.”

테오도라의 목소리에 그제야 샐리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되었나요?”

“허락하셨어.”

그 말에 샐리가 두 손을 가슴에 얹고는 기쁜 얼굴을 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이 호수를 포기해야 하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레이몬드 호수에 반했나 보군.”

샐리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레이몬드 호수에서 연회를 열자고 이야기는 했지만 사실 그녀는 레이몬드 호수를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나이 있는 귀부인들에게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 본 호수의 모습에 샐리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봄의 여신의 가호를 입었다는 호수는 봄의 풍경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연둣빛 나무들과 푸르른 새싹이 호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나무와 풀 냄새가 뒤섞인 기분 좋은 봄 향기가 났다.

샐리는 이곳에서 열릴 연회를 상상해 보았다.

아름다운 선율과 어우러지는 여인들의 웃음소리, 화사한 봄꽃처럼 곱게 꾸민 여인들이 새하얀 배를 타고 노는 호수의 풍경은 꿈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울 터였다.

“꿈같은 연회가 될 거예요, 분명.”

그 말에 테오도라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될 거야, 분명.”

* * *

두 사람의 연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테오도라는 레이몬드 호수를 연회장으로 재정비하는 일을 맡았다. 초대장을 만들고 연회장을 꾸미는 일은 샐리가 돕기로 했다.

샐리는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조언을 받아 아주 세심하게 연회를 준비했다. 그릇, 차, 음식, 꽃 장식, 테이블보,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그중에서 샐리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초대장이었다.

“단순히 위세 높은 여인들을 초대하는 것보다는 황녀 저하께 먼저 초대장을 보내온 이들 중 사람을 추려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 좋겠어요.”

“좋은 생각이야. 그녀들은 내게 먼저 호의를 보여 준 셈이니까 그것에 대한 보답이 되겠지.”

동시에 테오도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던 이들에게 이는 큰 자극이 될 것이다. 사람은 본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더더욱 열망하기 마련이니까.

테오도라는 사교계의 여인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기에 초대 명단을 작성하는 것은 오로지 샐리의 일이었다.

샐리는 성품과 인품, 사교계에 미치는 영향 등을 꼼꼼하게 따졌다. 고심 끝에 서른 명의 여인들을 추렸다.

초대장은 따로 제작하지 않고 황후가 사용하던 초대장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황실의 상징인 황금색 봉투에 화사한 금가루가 반짝이는 고급 종이로 만들어진 초대장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샐리의 방에 들어선 카시스가 조금 커진 눈으로 말했다.

“……아직도 쓰고 있군.”

샐리는 어젯밤부터 초대장을 쓰기 시작했다.

작은 초대장에 들어가는 문구는 편지와는 달리 단순했다. 받는 이의 이름과 연회가 열리는 시간과 장소만 기입하면 끝이었다.

펜으로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는 일은 고단하긴 했지만 이토록 오래 걸릴 만한 일은 아니었다.

“신경을 좀 쓰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오늘밤에는 꼭 마무리해야죠.”

샐리는 미간에 주름이 잡힐 만큼 진지한 얼굴로 글씨를 쓰며 말했다.

카시스는 테이블 위에 있던 초대장을 한 장 읽어 보았다. 그제야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눈치챘다.

“받는 이에게 맞추어 초대장의 문구를 하나하나 다르게 쓰고 있는 건가?”

“네, 맞아요. 이거 꽤 힘든 일이네요.”

보통은 초대장의 글귀를 통일하고 이름만 바꾸어 초대장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샐리는 받는 이에 맞추어 모두 다른 글귀를 적었다. 고작 한 문장이었지만, 아니 한 문장이기에 더더욱 고민이 필요한 일이었다.

샐리가 적은 초대장을 모두 훑어본 카시스는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신경 써 만든 글귀는 물론 글자 한 자 한 자 무척 고심한 것이 느껴지는 초대장이었다.

누가 본다면 여인들이 모이는 연회가 아니라 나라의 큰 행사를 준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만큼 정성이 가득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럼요. 황녀 저하께서 사교계에 첫인상을 남기는 아주 중요한 자리인걸요. 무엇보다 이 연회는 성인이 된 황녀 저하를 위해 열리는 첫 연회잖아요. 저하께는 데뷔탕트와 같은 셈이에요.”

테오도라는 성인이 되기 전 알스로 떠났기에 제국에서 정식으로 데뷔탕트도 치르지 못했다. 테오도라는 그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샐리는 아니었다.

“그러니 조금도 부족함 없이 최고의 연회를 열 수 있게 도와 드리고 싶어요. 제게는 정말 고마운 분이시니까요.”

누구라도 박수를 쳐 줄 만한 아주 곱고 예쁜 말이었다. 그런데 카시스는 마음 한편 어딘가 싸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혐오스러운 것을 보았을 때의 불쾌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무언가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뭉쳐 신경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기묘한 통증이었다.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별 증상이 다 나타나는군.’

카시스는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하며 손에 든 책을 펼쳤다. 긴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대어 책을 읽는 그의 귀에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왔다. 펜으로 글씨를 쓰는 소리였다.

한밤의 적막 속에 들려오는 소리는 아주 선명했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몇 시간 후였다.

카시스는 책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들었다. 열심히 초대장을 쓰던 샐리가 어느새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초대장 몇 장이 흐트러져 있었고 손에는 그대로 펜을 든 채였다.

‘많이 피곤했나 보군.’

본격적으로 연회 준비를 시작한 이후 샐리는 무척 바빴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새벽에야 잠들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간간이 다른 연회에도 참석해야 했으니 몸이 남아날 리 없었다.

카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잠든 그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가 감기니 인상이 무척 달라 보였다.

눈을 뜬 그녀가 새침데기 소녀 같다면 눈을 감은 그녀는 순진한 아이 같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 긴 속눈썹, 살짝 젖어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 살짝 벌어진 입, 작은 숨소리.

그녀의 모든 것을 시선에 담았는데도 부족했다. 이대로 밤새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고 싶은 기분이랄까.

무례한 일이었다. 목적이 불분명한 가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카시스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어 샐리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샐리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환한 아침이었다.

‘도대체 언제 잠든 거지?’

샐리는 눈을 크게 뜨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더욱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자신이 너무도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 위로는 이불까지 곱게 덮여 있었다.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초대장을 쓰다 잠들어 버렸으니 자신의 몸은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침대 위에 편히 누워 있다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어젯밤 이 방에 있었던 사람은 자신과 카시스뿐이었다.

‘설마 그가 날 침대에 눕혀 준 건가?’

아니, 그가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자신을 깨우는 지극히 쉽고 효율적인 방법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샐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침대로 올라왔나봐.’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려 잤다면 지금쯤 몸이 무척 뻐근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푹신한 침대에서 편히 잔 덕에 몸은 아주 개운했다.

쉽게 결론을 내린 샐리는 서둘러 초대장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런 사사로운 고민을 오래할 정도로 그녀는 여유 있지 않았다.

점심이 되기 전 드디어 서른 장의 초대장을 모두 완성했다.

샐리는 테오도라를 만나 초대장을 건넸다. 초대장을 한 장 한 장 살펴본 테오도라는 감탄했다.

“글씨도 아주 예쁘고 무엇보다 각각 다르게 쓴 이 글귀가 인상 깊어. 누구라도 이 초대장을 받는다면 기분이 무척 좋을 거야.”

그 말에 샐리가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지었다. 테오도라가 저렇게 말해 주니 열심히 쓴 보람이 있었다.

테오도라는 샐리가 정성껏 만든 초대장 위에 인장을 찍었다. 어머니께 받은 황후의 인장이었다. 금빛 독수리가 찍힌 황금 초대장은 더더욱 특별해 보였다.

테오도라는 손에 든 초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겨우 종이 한 장이지만, 이 초대장이 주는 파장은 어마어마할 테지.”

“물론이죠.”

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테오도라의 초대장이 발송된 후 사교계는 난리가 났다. 아무도 그녀가 연회 초대장을 보내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황후가 딸의 연회를 챙겨 줄 줄이야.

그러나 그 생각을 비웃듯 테오도라가 보내온 초대장에는 황후의 인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뒤에 있는 황후를 여실히 드러내는 일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거의 정신을 차리는 날이 없을 정도로 쇠약하시다더니 그게 아니었나요?”

“분명 그리 들었어요. 실제로도 요 몇 년간 황후 폐하를 만난 이들이 없지 않습니까.”

황후의 병환이 혹시 나은 것 아니냐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

무엇보다 여인들을 설레게 한 것은 연회가 열리는 장소가 레이몬드 호수라는 사실이었다.

“레이몬드 호수라니. 도대체 그곳을 본 것이 언제 적인지.”

나이가 있는 여인들은 과거에 보았던 아름다운 곳을 추억하며 그리운 눈빛을 했다.

“그 레이몬드 호수를 직접 보게 되다니 꿈만 같아요.”

젊은 여인들은 말로만 전해 들었던 호수를 볼 생각에 잔뜩 상기된 얼굴을 했다.

사실 아무리 아름답다고 소문났다 해도 한낱 호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긴 시간이 레이몬드 호수를 전설처럼 신비롭게 만들었다.

“게다가 단순한 티파티가 아니라 호수 위에서 뱃놀이도 함께 즐기는 연회라면서요?”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설레네요.”

이토록 화제가 되는 초대장을 받은 이들은 신년회 직후 테오도라에게 초대장을 보냈던 여인들이었다. 초대받은 서른 명의 여인들은 기쁜 얼굴로 아름다운 초대장을 자랑했다.

반면 초대장을 받지 못한 여인들은 후회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조금 더 상황을 살펴보고 입장을 정하려던 것이 실수였다.

“지금이라도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 찾아가 초대장을 부탁하면 보내 주실까요?”

체면을 잊고 그리 말하는 여인도 있을 정도였다. 수많은 여인들이 이 화제의 초대장을 가지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 들뜬 분위기는 샬롯 백작 부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샬롯은 손에 잡히는 것들을 모두 던져 버렸다.

쨍그랑!

평민들은 평생을 일해도 살 수 없는 최고가의 유리 세공품이 산산조각 났지만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분노로 파르르 눈을 떠는 그녀를 본 시녀들은 온몸을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평소에도 변덕이 심해 화를 잘 내는 샬롯이었다. 그러나 요 며칠 그녀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신년회 때 테오도라가 황후의 자리에 앉아 인사를 받고, 황제와 함께 춤을 추었던 것을 본 순간부터 시작된 감정이었다.

“다 죽은 송장인 어미를 이용해서 감히 황성에서 연회를 벌이다니, 요망한 년!”

샬롯은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갈았다. 제1황자의 친어머니였지만 샬롯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애인일 뿐이었다.

황성의 안주인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황성에서 연회를 열 수 없었다. 연회를 열고 싶다면 황성이 아닌 그녀 소유의 저택에서 따로 열어야 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너무도 당당하게 황성에서 연회를 주최했다. 그 점이 미치도록 괘씸하고 질투가 났다.

그와 더불어 초대장을 받고 희희낙락했다는 여인들도 용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감히 그년의 초대장을 받다니 겁을 상실한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이라도 초대장을 받은 년들을 찾아가 본때를 보여 줄까?’

샬롯이 제 눈앞에 나타나 그 눈앞에서 초대장을 찢어 버린다면 감히 그 초대에 응할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목숨을 내놓고 연회에 갈 만큼 겁을 상실한 년은 없을 테니.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벌벌 떨며 들어온 시녀 한 명이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샬롯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내가 손님을 받을 경황이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매섭게 말하며 샬롯은 손에 들고 있던 보석 상자를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보석 상자에 맞은 시녀의 이마에서 피가 나왔지만 시녀는 비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 그것이 아주 중요한 손님이셔서…….”

“누군데! 황제 폐하라도 오셨다니!”

“엘리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십니다.”

“뭐?”

그제야 불꽃처럼 타오르던 샬롯의 분노가 멈추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샬롯은 의아한 눈빛으로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시녀의 눈빛에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밖에는 없었다. 왜냐고 물어보았자 저 멍청한 년이 아는 것은 없을 것이다.

샬롯은 숨을 골랐다.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조금 차분해졌다.

“준비를 해야 하니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해.”

안내받은 응접실에서 엘리제는 우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 안에는 식어 버린 찻잔이 들려 있었다.

벌써 시녀가 몇 번이나 찻물을 바꿔 주었지만 또 차가 식어 버린 것이다.

“귀한 분을 맞으시려니 준비가 좀 오래 걸리시나 봅니다.”

낯이 어두워진 시녀가 엘리제의 잔에 새로 차를 따르며 애써 변명을 했다. 오랜 기다림에 짜증을 낼 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엘리제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속마음은 서늘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감히 샬롯 따위가 날 두고 기 싸움을 하겠다는 거구나.’

갑작스런 방문이었기에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쳤다.

이토록 오랜 시간 응접실에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의도는 명확했다. 제가 얼마나 만나기 힘든 사람인지 유세를 떠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자기보다 아랫사람들의 기선을 제압할 때 쓰는 치졸한 방법이었다.

고작 백작 부인인 샬롯이 에스테반 공작 부인을 상대로 사용하기에는 당치 않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엘리제는 조금의 분노도 표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기다림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잔이 새로 채워졌을 때 구두 소리와 함께 샬롯이 등장했다.

샬롯은 엘리제보다 직위가 아래였기에 먼저 고개를 숙여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래 기다리게 하여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내리깐 눈으로 고개를 슬쩍 까닥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죠? 그토록 나를 무시할 때는 언제고.”

조금도 돌리지 않고 치고 들어온 말에 엘리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큰 오해를 하고 계시네요. 제가 부인을 무시하다니요.”

“흥.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내가 보낸 초대장은 모두 무시하고, 연회에서 나를 마주쳐도 인사만 하고 지나쳤잖아요. 그게 무시가 아니면 뭐죠?”

샬롯은 지난날을 떠올리며 날 서린 말을 서슴없이 꺼냈다. 그 말대로 엘리제는 그녀를 제대로 상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엘리제에게 샬롯의 가치는 형편없었다.

이름도 없는 한미한 가문 출신에 황제에게 큰 총애를 받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제1황자를 믿고 모든 여인들에게 오만방자하게 구니 적만 많았다. 그녀를 겁내는 이들은 있을지언정 따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 여인과 어울릴 필요성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엘리제는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부인이 아시는 것과는 달라요. 레이첼 황녀 저하께서 부인과 친하게 지내지 않길 바라시어 함부로 말을 걸 수 없었을 뿐이랍니다.”

레이첼이라는 이름에 샬롯의 치켜세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제의 또 다른 애인이 낳은 딸, 레이첼. 그 어린 황녀는 테오도라만큼은 아니어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 중 하나였다.

볼 것도 없는 멍청한 계집이 황태후의 예쁨을 받아 기세등등한 모습은 정말이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황태후만 아니었다면 그 볼기짝을 갈겨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만큼 레이첼도 샬롯을 싫어했다. 자연스럽게 레이첼을 따르던 여인들도 샬롯을 멀리했다. 엘리제 에스테반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여인이 갑자기 찾아와 친한 척을 하니 그 진의가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샬롯의 흉흉한 얼굴에도 엘리제는 달콤한 말을 술술 늘어놓았다.

“하지만 어찌 계속 그럴 수 있을까요. 부인께서는 황제 폐하의 성은을 입은 귀한 몸이시고, 무엇보다 제1황자 저하의 어머니이신걸요. 앞으로 황태후가 될 분을 챙기지 않아서야 되겠어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을 쭉 늘어놓는데 아무리 서운한 감정이 있다 한들 그 화를 유지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샬롯은 미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는 건가요?”

한층 누그러진 그녀의 말에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답니다.”

샬롯은 ‘흠’ 하고 기침을 하며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금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은 불순한 의도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맑은 얼굴이었다.

긴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푸르른 눈동자는 거짓말을 조금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사교계의 가장 아름다운 꽃인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저토록 달콤한 말을 내뱉는데 넘어가지 않을 자가 있을까.

“그래요. 그 말을 조금은 믿어 보도록 하지요.”

엘리제는 턱을 치켜들고 한껏 오만하게 대답하는 샬롯을 바라보았다.

천박할 정도로 화려하게 꾸민 겉모습하며 고작 황자의 어미란 이유로 제 위치도 잊고 황후처럼 오만한 태도하며. 정말이지 멍청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멍청하기에 이렇게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제는 기쁨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에요.”

그 후로 두 사람은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샬롯은 엄청난 수다쟁이였고 제 말을 남에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늘 뻔했다. 황자가 얼마나 영특한지, 황자가 앞으로 이 제국을 통치할 것이라는 이야기, 황제가 하사한 수많은 금은보석에 관한 이야기.

허세로 잔뜩 포장된 이야기를 엘리제는 끈기 있게 들었다. 한참 후에야 샬롯은 엘리제가 원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하여간 테오도라 황녀 때문에 너무 속상해요. 아무리 내가 친어머니가 아니라 해도 그래요. 황성의 어른인 내게 허락받지도 않고 제멋대로 초대장을 보내다니 기가 차서 원.”

입술을 짓이기는 샬롯을 보며 엘리제가 조심히 말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연다는 연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역시 알고 있군요.”

“요즘 사교계에 모르는 이가 없는 이야기니까요. 일반적인 티파티가 아니라 레이몬드 호수에서 뱃놀이를 주최한다지요? 정말 즐거울 것 같다며 기대하는 분들이 많아요.”

엘리제는 순수한 얼굴로 말했지만 샬롯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인들이 만나 차나 마시며 수다나 떨면 됐지 뱃놀이라니. 테오도라는 어떻게든 눈에 띄고 싶어 작정한 것 같았다.

“그토록 철없는 생각을 하는 황녀나 그것을 좋다고 꺄악대는 여인들이나 기가 찰 따름이에요.”

그 말을 들은 엘리제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부인께서 무얼 걱정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여인들끼리 뱃놀이라니. 혹여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도 생길까 봐 신경 쓰이는 것이죠?”

“……뭐?”

그 말에 샬롯이 눈을 깜빡였다.

‘필요한 말을 재빨리 알아듣지 못하는 멍청함이라니.’

엘리제는 친절한 마음으로 한 번 더 말해 주었다.

“배에서 누군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연회는 엉망이 되고 테오도라 황녀 저하의 체면도 땅에 떨어질 테죠. 물론 총명하신 분이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하실 테지만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엘리제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황녀를 순수하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샬롯은 그 아름다운 미소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떠오른 흉악한 간계에 샬롯의 눈빛이 뱀처럼 흉악하게 빛났다.

그 눈빛을 본 엘리제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 * *

그토록 기다리던 연회 날이 다가왔다. 샐리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했다.

평소에 입었던 화려한 드레스와는 다른 스타일의 드레스를 골랐다. 진한 푸른빛 드레스는 레이스나 리본 같은 장식이 일절 없는 아주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드레스 입는 것을 돕던 데이지가 말했다.

“파티용 드레스가 아니라 외출용 드레스 같네요.”

샐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의 연회는 테이블에 앉아 평범하게 차를 마시는 티파티가 아니니까.”

페티코트를 입은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는 제대로 뱃놀이를 즐기기 힘들었다. 움직임이 편한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

그래서 구두도 너무 높지 않은 것으로 선택했다. 대신 새빨간 루비가 박힌 목걸이로 포인트를 주어 화려함을 잃지 않았다.

“연회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너무 일찍 나가시는 것 아니세요?”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완벽하게 정리한 데이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은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참이었다.

“중요한 자리잖아. 연회장을 한번 더 둘러보고 문제가 없나 확인을 해야지.”

오늘의 연회는 테오도라의 이름으로 주최되었지만 샐리의 연회이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샐리는 모든 것을 완벽히 하고 싶었다.

바깥바람이 쌀쌀했기에 샐리는 망토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별채는 고요했다.

별채를 나온 샐리의 눈이 커졌다. 대기하고 있던 마차 앞에 카시스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샐리를 보더니 말했다.

“황성까지 데려다줄게.”

지금은 카시스가 한참 분주하게 외출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이렇게 한가하게 자신을 데려다 줄 만큼 그의 아침은 여유 있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 샐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기사가 전쟁터에 나갈 때는 무릇 많은 이들이 배웅을 나오는 법이지. 좋은 기세를 받는 것이 승패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거든.”

“저는 전쟁터에 나가는 게 아니에요.”

“그만큼 중요한 날이라는 거야.”

태연히 말한 카시스는 샐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샐리는 그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의 손 위로 손을 얹혔다. 맞닿은 그의 손은 무척 찼다.

‘도대체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추운 데서 기다리지 말고 방 안으로 들어왔으면 좋았을 텐데.’

샐리는 새삼 그의 체온이 속상했다.

샐리가 카시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른 후 카시스도 깔끔한 동작으로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에스테반의 문양이 찍힌 하얀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샐리는 마차에 달린 창문을 열었다. 창문 사이로 청명한 아침 공기가 흘러 들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휘날렸다.

아침 햇빛에 반사된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그럼요. 그토록 열심히 준비한 연회인걸요. 무척 설레요.”

카시스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요 몇 주 그녀는 정말 열심히 연회를 준비했다.

그래서 카시스는 요 근래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제대로 이야기한 시간이 거의 없었다.

자신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늘 무언가에 골똘해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아주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떤 말을 해야지 자신을 바라볼까 하는 유치한 고민까지 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뭐가 묻었나요?”

샐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카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평소에도 늘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하는 그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 시선이 무척 집요하달까? 뚫어지게 쳐다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시선이었다.

“오랜만이라서.”

“뭐가요?”

“모든 게 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샐리는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썹을 찡그렸다. 카시스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느새 황성 앞으로 마차가 도착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카시스가 샐리의 손을 잡고 그녀를 내려 주었다. 샐리의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하고 와.”

담백하기 그지없는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한 이가 에스테반 공작이기 때문인지 정말로 힘이 생겨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좋은 기세를 전달받는다는 것일까? 샐리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긴 시간 적막에 쌓여 있었던 황후궁이 오랜만에 복작거렸다. 화려하게 꾸민 여인들은 저마다 설레는 얼굴로 야외에 꾸며진 연회장을 향했다.

연회장 입구에는 두 여인이 서 있었다. 황금색 드레스를 입은 테오도라와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샐리였다.

훤칠한 키에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의 모습은 누구라도 시선이 갈 만큼 눈에 띄었다.

여인들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중에는 에이미도 있었다.

에이미는 사뭇 긴장된 얼굴로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 인사드립니다. 로렌스 자작가의 딸, 에이미라고 하옵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끝낸 에이미는 고개를 들었다. 키 차이가 꽤 나는 덕분에 에이미는 한껏 고개를 올려야 했다. 그 모습에 테오도라가 눈을 빛내며 웃었다.

“그대가 에이미로군. 샐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아주 사랑스러운 여인이라고 하더니 정말인 것 같아.”

그 말에 에이미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어져 버렸다. 고귀한 황녀가 일개 자작가의 영애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뭐랄까.

‘너무 달콤하지 않나요?’

게다가 어찌나 타이밍 좋게 바람이 부는지, 휘날리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시원한 이목구비는 묘하게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미안해요, 알렉스.’

에이미는 결국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약혼자에게 사과의 말을 속삭였다.

요즘 들어 부쩍 약혼자에게 미안해지는 일이 많은 그녀였다. 그 상대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에이미 님, 제가 자리를 안내해 드릴게요.”

그런 에이미를 정신 차리게 한 것은 샐리의 목소리였다.

에이미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샐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이미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샐리에게 속삭였다.

“저 테오도라 황녀 저하를 이렇게 직접 마주 본 것은 처음이에요.”

“어떤 분이신 것 같아요?”

“아주 멋진 분이시네요. 샐리 님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요.”

두 볼이 발갛게 물든 에이미의 얼굴에 샐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꿈속의 기사님과 마주친 어린 소녀 같은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을 한 이는 에이미뿐만이 아니었다. 앞서 지나간 여인들 중에서는 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은 여인도 있었다.

‘역시 테오도라 황녀 저하는 위험한 분이셔.’

샐리는 다시 한번 그 사실을 확인하며 에이미를 연회장 안으로 안내했다.

연못이 보이는 풀밭 위에 마련된 연회장에 도착한 에이미가 눈을 크게 뜨고는 입을 막았다.

“세상에.”

아주 추운 건 아니었지만 제국은 지금 겨울이었다. 수도의 나무들은 키가 큰 겨울나무를 제외하고는 바싹 메마른 채였다.

그러나 레이몬드 호수를 둘러싼 초록빛 나무들은 마치 봄이 온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바닥의 풀잎들도 긴 겨울을 지내고 막 나온 새순처럼 푸르렀다.

간간이 작은 꽃이 핀 곳도 있었다. 봄 냄새 짙은 풀밭 너머로 펼쳐진 선명한 에메랄드 호수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레이몬드 호수가 봄의 여신의 가호를 입었다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저는 그저 아름다운 호수를 예찬하는 말인 줄만 알았어요.”

에이미가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처음 이곳을 보았을 때 놀랐어요. 소문보다 더더욱 아름다운 곳이라서요.”

“정말 그래요.”

에이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호수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이미 연회장에 들어서 있는 다른 여인들도 홀린 것 같은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샐리가 기대했던 그 얼굴들이었다. 샐리의 가슴 한편이 벅차올랐다.

연회는 분명 성공할 것이다.

초록 풀밭에 마련한 새하얀 테이블은 어느새 아름답게 단장한 여인들로 가득 찼다. 상기된 얼굴로 레이몬드 호수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여인들은 시선을 한데 모았다.

손님맞이를 끝낸 테오도라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테오도라는 자리에 착석한 손님들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렇게 이 테오도라 프란츠의 첫 연회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같이 손님들을 맞아 주셨어야 할 어마마마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모쪼록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여인들은 안타까운 눈빛을 했다. 황후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긴 시간 겪어 온 만큼 이미 담담해진 일이었다.

그러나 아름답게 자란 딸이 어미 없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애잔하기 짝이 없었다.

황후와 친분이 깊었던 나이 든 부인들 중 몇 명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매만질 정도였다. 테오도라는 그 모습을 보고 위로하듯 부드럽게 웃었다.

“비록 어마마마께서 이 연회를 함께하시진 못하셨지만 아름답고 귀한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무척 기쁩니다. 부디 오늘을 시작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과 특별한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환하게 웃는 테오도라의 모습에 여인들 몇 명은 얼굴을 붉혔다.

한때 수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황제의 젊은 시절과 똑 닮은 얼굴 때문이다.

고작 스물한 살의 여인이라고 하기에 그녀는 너무나 당찼고 근사했다.

테오도라는 그런 여인이었다.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한 제국의 제1황녀.

아무리 오랜 시간 타국으로 떠나 있었다고 하지만 제국의 사람이라면 그녀에게 다양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라는 연못 위에 띄운 새하얀 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처럼 호수에서 열리는 파티니 만큼 숙녀분들을 위한 배도 준비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시다 호숫가의 정취를 느끼고 싶으실 때면 편히 뱃놀이도 즐겨 주길 바랍니다.”

몇몇 여인들은 처음부터 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상태였다.

뱃놀이는 귀족 여인들이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배를 관리하기가 까다롭고 신경 쓸 것이 많아 쉽게 즐길 수 없는 놀이이기도 했다.

그런 즐거운 놀이를 다른 곳도 아닌 이 아름다운 호수에서 할 수 있다니.

기대를 하고 온 여인들이 한시라도 빨리 배를 타고 싶어 하는 것이 느껴져 테오도라는 웃었다.

“모쪼록 즐거운 추억을 만드시길.”

드디어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의 주최자인 테오도라는 오랜 유학 생활로 제국 사교계에 친분 있는 이가 거의 없는 황녀였다. 그리고 아직 제 이름으로 연회를 주최하기에 너무 어리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연회를 무척 기대한 한편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아무리 연회장을 잘 꾸몄다고 한들 손님을 맞는 주최자가 능숙하지 못하면 분위기가 엉망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연회는 물 흐르는 듯 유려하게 진행되었다.

테오도라는 앉아 있는 여인들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를 시작했다.

“아만다 백작 부인이시죠? 우아한 몸가짐을 가진 분이시라더니 정말이군요. 저는 아무리 엄한 예법 선생을 모시고 수업을 해도 몸가짐이 거칠어 고민입니다.”

“과찬이셔요. 황녀 저하의 몸가짐도 아주 훌륭하신걸요.”

아만다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을 이리 다정하게 불러 주는데 웃지 않을 여인은 없었다.

황녀의 위엄을 과하게 내보이지 않고 편안히 다가오는 모습에 여인들은 조금씩 경계를 풀었다.

테오도라와 대화를 하면 이내 여인들은 까르르 웃었다. 원래 알고 있던 사이처럼 대화가 너무나 잘 통했기 때문이다.

“어쩜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계세요?”

“우연히도 부인과 취향이 같아서겠죠.”

테오도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 말은 거짓이었다.

테오도라는 샐리에게 들은 여인들의 정보를 모조리 외웠다. 이름부터 외양의 특징, 성격, 좋아하는 대화 소재까지.

그리고 그녀들이 관심 갖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까지 준비했다.

노력을 한 보람이 있었다. 처음의 굳은 얼굴이 사라진 여인들은 환하게 웃으며 테오도라를 둘러쌌다.

샐리는 골든리아 공작 부인과 함께 호수의 배 위에 앉아 있었다. 배의 양 끝에 양산을 쓴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앉아 있었고 배의 가운데에 선 하인이 노를 젓고 있었다.

골든리아가 건너편의 샐리를 향해 말했다.

“황녀 저하의 말솜씨가 꽤 훌륭하구나.”

“이 연회를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하셨어요.”

“이야깃거리를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능력이지.”

그 말에 샐리는 빙긋이 웃었다.

테오도라가 이 연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에 그 칭찬은 샐리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골든리아는 지긋한 눈으로 연회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봄빛 가득한 잔디밭 위에 마련된 테이블에서는 곱게 단장한 여인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메랄드빛 호수 위의 새하얀 배 위에서는 볼이 발갛게 물든 여인들이 해맑은 얼굴로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사교계에 몸담았던 그녀로서도 본 적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정말이지 훌륭한 연회야. 누구도 감히 이 연회에 대해 흠잡을 수 없을 거다.”

골든리아의 말에 샐리가 미소 지었다.

“부인의 조언 덕분이지요. 부인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준비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 말은 정말이었다. 이토록 많은 귀족 여인들이 참석하는 연회를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골든리아는 여인들의 자리 배치에서부터 초대장의 문구, 음식 준비까지 아주 세세하게 도움을 주었다.

“흠. 나는 그저 기본적인 것만 알려 주었을 뿐인걸. 내 말만 듣고 이토록 잘 꾸민 것은 황녀 저하와 너의 능력이지. 초대장의 글귀부터 아주 인상적이었어.”

[세월이 주는 우아함을 간직한 골든리아 공작 부인을 초대합니다.]

그 글귀를 떠올리며 골든리아는 웃었다.

“무엇보다 뱃놀이를 곁들였다는 점이 무척 놀라웠다. 우아함을 해치는 일은 아니면서 아주 이색적이야.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 설레며 연회에 올 줄 누가 알았겠니.”

골든리아의 솔직한 말에 샐리는 풋 하고 웃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골든리아가 말했다.

“이건 너의 생각이지? 테이블 세팅도 네가 한 것이고.”

무릇 귀부인들의 관계는 굉장히 섬세한 법이었다. 대놓고 사이가 나쁘면 차라리 알아차리기가 쉬웠겠지만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같은 테이블에 앉히면 여인들이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귀족의 품위를 지켜야 하기에 미소 짓기는 했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는 가짜 미소였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리 훌륭한 연회라 한들 온전히 즐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샐리는 신경을 써 자리 배치를 했다.

연회 때 주로 사용하는 긴 테이블이 아니라 둥근 모양의 테이블을 여러 개 놓아 서열의 구분을 적게 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을 꼼꼼히 확인하여 자연스럽게 떨어뜨려 놓았다.

“단순히 여인의 서열로만 쭉 늘어놓은 것보다 훨씬 보기 좋더구나. 배치도 아주 절묘하게 잘했어.”

“실수가 없었다고 하면 다행이네요.”

샐리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화려하게 꾸민 외양과 달리 샐리는 드러내 놓고 잘난 척하는 일이 없었다. 늘 차분하고 겸손했다.

골든리아는 샐리의 그러한 모습을 좋아했지만 오늘만큼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안타깝구나. 너는 첩이라는 위치 때문에 네 이름을 건 연회도 열지 못하지 않느냐.”

아무리 사교계에서 그 위세가 대단하다 해도 샐리는 고작 첩. 저택의 안주인이 아닌 그녀는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건 연회를 열 수 없었다. 그것이 골든리아는 너무나 속상했다.

“내 벌써 몇 번 말했지만 첩이라고 해도 결국 단순한 애인일 뿐이야. 서류상으로는 아무것도 이어진 게 없는 상태지. 그러니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하렴. 내 괜찮은 귀족 남성들을 소개해 줄 테니까. 너 정도 여인이라면 신분에 상관 않고 부인으로 맞고 싶어 할 이가 많을 거다.”

늘 귀부인들에게 정숙을 강조하는 골든리아가 맞나 싶은 파격적인 말이었다.

요즘 샐리에게 깊은 애정이 생긴 그녀는 종종 이런 식의 말을 꺼내곤 했다.

진중한 얼굴이 농담 같지가 않아 샐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좋은 남성분을 그렇게 많이 아신다면 아직 혼자인 분들께 소개시켜 주세요.”

“너도 참. 그렇게 에스테반 공작이 좋은 거니?”

골든리아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기에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하고 계십니까?”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든 것은 테오도라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배를 타고 가까이 다가온 테오도라를 향해 골든리아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녀 저하께는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보통 골든리아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그 기에 눌려 도망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능글맞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니 더욱 궁금하군요. 제게도 알려 주세요.”

샐리는 그 모습에 조금 웃고 말았다. 조금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은 연회를 준비하면서 제법 가까워졌다.

테오도라는 사교계의 여인들이 누구나 어려워하는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골든리아는 그런 황녀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정말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했는지 몇 차례나 묻는 테오도라를 향해 골든리아가 졌다는 듯 말했다.

“샐리에게 좋은 남자를 소개시켜 줄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말에 테오도라는 눈을 크게 뜨더니 한바탕 웃었다.

제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에스테반 공작이 푹 빠져 있다는 애첩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과연 무서울 것 없는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에스테반 공작이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긴. 공작 부인의 인맥이라면 지덕체를 완벽히 갖춘 분을 여럿 알고 계실 테죠.”

테오도라의 말에 골든리아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부정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아쉬울 따름이에요. 샐리는 아직 공작에게 푹 빠져 있는 것 같거든요.”

그 말에 샐리는 어색하게 웃었고 테오도라는 다시 한번 호쾌하게 웃었다.

“한참 그럴 나이가 아닙니까.”

이제 갓 스물이 지난 나이. 한창 사랑의 열기에 빠질 만한 나이였다. 그 말에 새삼 골든리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저 같은 늙은이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황녀 저하도 샐리와 같은 나이가 아닙니까.”

“저야 뭐 평범한 상황이 아니니까요.”

테오도라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는 제국의 황녀였다. 그것도 프란츠 황실의 혈통을 온전히 이어받은 유일한 황녀.

그렇기에 그녀에게 사사로운 연애는 허락되지 않았다. 황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아주 까다롭게 물색된 약혼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아는 골든리아가 혀를 찼다.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이럴 때는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대부분의 귀족 여인은 가문의 혈통이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정략결혼을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골든리아는 안타까운 얼굴로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정략결혼이라도 금슬이 좋은 부부가 많아요. 저하께서도 분명 좋은 분과 연을 맺으실 겁니다.”

사실 테오도라는 억지로 정해진 약혼이라는 것에 큰 불만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약혼을 파기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황좌의 길을 가고자 결심했고, 그 길에 결혼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굳이 그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저 골든리아의 눈빛에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느껴져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그때였다.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에 이어 첨벙 하는 물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테오도라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샐리도, 골든리아도 놀란 눈으로 비명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배에서 떨어진 한 여인이 물에 빠져 발버둥 치고 있었다. 차마 살려 달라는 말도 못하고 여인은 비명만 내지르고 있었다.

“어서 구하지 않고 뭐 하나!”

테오도라의 커다란 외침에 그제야 여인 근처에 있던 하인이 황급히 호수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것인지 둔한 몸놀림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여인이 발버둥 치는 통에 그녀의 몸에 제대로 손도 대지 못했다.

첨벙.

“황녀 저하!”

샐리가 커다랗게 소리 질렀을 때 테오도라는 이미 호수 안으로 뛰어든 상태였다.

레이몬드 호수는 물살이 거의 없고 수심도 깊지 않았다. 테오도라 정도의 키라면 아슬아슬하게 발이 닿는 정도의 깊이였다.

다행히 테오도라는 품이 넓은 드레스를 입은 상태가 아니었다. 몸에 달라붙는 심플한 드레스를 입고 있던 덕에 물살을 헤치며 여인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녀의 허리를 감아 자신의 몸에 가까이 붙인 테오도라가 크게 소리쳤다.

“몸에 힘을 빼!”

그러나 여인은 패닉 상태인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계속 버둥거리기만 했다.

그럴수록 여인의 입에 물이 차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테오도라는 억센 힘으로 여인의 손을 자신의 목에 감았다.

“그냥 눈을 감아. 나를 믿고, 어서!”

그 말에 여인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눈을 꼭 감았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테오도라는 목이 콱 조여 와 괴로웠지만 물살을 해치며 배 가까이 다가갔다.

하인이 서둘러 두 여인을 배 위로 끌어올렸다. 물에 젖은 여인은 어느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테오도라는 황급히 여인의 목 위로 손을 대었다.

‘숨은 쉬고 있어.’

다행히도 숨결이 골랐다. 너무 놀라 잠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체온이 너무 찼다.

테오도라는 황급히 여인의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온기가 돌아오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인이 그 모습을 보고 기함을 했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저하께서 하시기에는 너무 고된…….”

“됐으니 어서 부둣가로 가!”

테오도라의 외침에 하인은 황급히 노를 저었다. 부둣가까지는 금방이었다. 부둣가에 몰려들었던 여인들이 도착한 배 위의 풍경을 보고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흠뻑 젖은 테오도라가 축 늘어진 여인을 필사적으로 마사지하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젖은 머리카락 위로도 땀방울이 주르륵 흐르고 있을 정도였다. 그 모습에 누구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체온이 차. 마른 수건과 차를 당장 가져와!”

그 말에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조금 후 여인의 손이 움찔했다.

이내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여인이 스르르 눈을 떴다. 여인은 자신을 힘껏 매만지는 이를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신이 드는가?”

제 앞에 있는 이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여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황녀였다.

그제야 여인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이 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물속에 뛰어들었다. 황족의 목숨을 위험하게 한 죄는 컸다.

여인은 잘 움직이지도 않는 굳은 몸을 애써 움직여 황급히 바닥에 몸을 조아렸다.

“화, 황녀 저하를 위험에 빠뜨려 소, 송구하옵니다.”

여인은 바들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그리고 정성껏 준비하신 연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정말 죄송하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게다가 그토록 완벽하고 아름다웠던 연회가 자신 때문에 망쳐진 셈이었다. 그녀는 창피함보다 연회를 망친 황녀의 분노가 두려워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차마 테오도라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바들바들 떠는 그녀 위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 그대는 손님이야.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 사과해야 할 것은 나야.”

“…….”

차갑게 식은 어깨 위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테오도라가 시녀에게 받은 수건을 여인에게 덮어 주며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

그 말에 여인은 입을 틀어막더니 이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귀족 여인의 품위나 예법 따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여인의 감정은 격해졌다.

테오도라는 말없이 여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여인들은 입도 다물지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샐리는 그런 여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평화롭고 우아한 연회는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연회장에서 가장 우아해야 할 주최자는 물에 젖은 처참한 모습이었고 손님은 체면도 잊고 서럽게 울부짖었다.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비웃고 있지 않아. 비난 어린 표정도 없어.’

이토록 엉망진창인 광경을 보고 표정을 일그러뜨린 이가 없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샐리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카시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샐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샐리는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황녀 저하께서 물에 뛰어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어요. 저하의 발이 닿는 깊이여서 들어갔다고 하지만 웬만한 성인 여인의 키만큼 수심이 무척 깊은걸요. 물도 아주 차고요. 다른 누구도 아닌 황녀 저하께서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카시스가 오늘의 연회가 어찌 되었는지 물은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담담히 연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샐리가 한 영애가 호수에 빠진 이야기를 할 때부터 눈빛이 바뀌었다.

“드레스도 흠뻑 젖고 머리도 엉망으로 헝클어져 버렸는데 그 모습이 조금도 초라해 보이지 않았어요. 화려하게 차려입은 옷과 보석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기품이 넘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말하는 샐리의 눈빛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 같기도 하고 신의 기적을 눈앞에서 본 신자 같기도 했다.

카시스는 샐리가 저런 식으로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흥분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가 아는 그녀는 늘 이성적이고 차분했다.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철저히 선을 긋는 야박한 구석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저토록 눈을 빛내며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을 줄이야.

“새 드레스로 갈아입고 오신 테오도라 황녀께서 손님께 인사하며 연회는 마무리되었답니다. 큰 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나쁘지 않았어요.”

여인들은 테오도라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인사했다. 정말 아름다운 연회였다고 칭찬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테오도라의 몸을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누구 하나 엉망이 된 연회에 대한 불쾌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녀들은 감정을 숨기는 데 누구보다 능숙한 사교계의 여인들이니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다.

‘진심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내일이 되면 알 수 있겠지.’

사교계의 소문은 빨랐다. 오늘 같은 파격적인 사건은 더더욱 그러했다. 내일 아침이면 참석했던 여인들이 이 연회에 대하여 어떻게 평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럭저럭 무난했다는 심심한 평은 절대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연회 혹은 최고의 연회. 둘 중 하나로 평이 갈릴 것이다.

그리고 샐리는 내심 좋은 평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봤다면 연회를 최악이라 평가할 순 없어.’

황녀가 제 몸도 돌보지 않고 사람을 구했다. 그 모습을 그저 품위 없다고 깎아 내릴 만큼 여인들은 멍청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샐리가 본 여인들의 눈빛은 그랬다.

‘그 눈빛이 진심이라면 많은 이들의 마음이 황녀 저하께 기운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앞으로 테오도라 황녀 저하의 입지는 분명 크게 오를 거야.’

샐리가 깊게 생각에 빠져 있는 그때였다.

“그런 상황이라면 나도 물속으로 뛰어들었어.”

“네?”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샐리가 눈을 깜빡이며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황당해하는 샐리의 마음도 모른 채 카시스는 아주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귀족의 체면이라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여인의 목숨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니까.”

그 말에 샐리는 생각했다.

‘거짓말.’

그 에스테반 공작이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여인을 위해 그런 행동을 할리 없다.

그는 타인에게 지독히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품위를 내던질 사람이 아니었다.

‘저토록 고귀한 얼굴로 세상 진지하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아 넘어갈 테지만 난 아니랍니다.’

그래서 샐리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진심이라곤 조금도 들어 있지 않는 목소리에 카시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믿지 않는 건가?”

“그런 건 아니고요. 뭐…… 그런 날도 있으시겠죠.”

그가 미쳤거나 정신이 나갔거나 정말 심심하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건만 카시스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수영이라면 자신 있어. 선생에게 정식으로 배워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도 수영을 할 수 있지.”

딱히 능력에 대한 의문은 아니었는데 그는 장황히 자신의 능력에 대해 설명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의아해하는데 결정적인 말이 들려왔다.

“테오도라 황녀보다 더, 잘.”

“…….”

그제야 샐리는 그가 왜 저런 이상한 말을 하는지 눈치챘다. 그는 테오도라보다 자신이 더 잘났다고 열심히 어필하고 있었다. 그 에스테반 공작이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말이다.

‘하긴 전생에도 내게 애정이라곤 조금도 없으면서 내가 다른 사내들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하면 표정이 굳어지곤 했지.’

그럴 때면 전생의 샐리는 그의 싸늘한 눈빛을 보는 순간 바들바들 떨었다.

자신이 천한 창부 출신이어서 그가 망측한 오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의 팔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말했다.

방금 전 말은 실수였어요. 제가 마음에 품은 이는 오로지 저하뿐이에요.

그렇게 매달리며 한편에는 그가 자신을 조금은 사랑한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오만한 자존심이었다.

비록 거짓으로 만든 가짜긴 해도 그의 애첩이었다. 고귀한 그를 두고 감히 다른 이에게 관심을 주었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했을까.

샐리는 이제 그런 표정 하나에 휘둘리는 바보 같은 여자가 아니었다. 이제는 그의 저런 눈빛에도 덤덤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샐리는 고양이처럼 눈초리를 올리며 새초롬하게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하세요?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 질투라도 하시는 건가요?”

“질투…… 라고?”

“그래요. 조금이라도 지지 않으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꼭 그래 보이는걸요.”

“…….”

카시스는 그런 단어를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 아주 생경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말의 사전적인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남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감정.

그러나 에스테반 공작인 그는 단 한 번도 쓸 일 없었던 단어였다. 그런 카시스를 향해서 샐리는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을 보니 감히 그에게 질투 운운한 것에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가짜 애첩인 자신을 위해 사내도 아닌 황녀를 향해 질투라니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우스운 이야기였다.

샐리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뭐, 남들이 볼 때는 그런 모습을 보이시면 좋겠지만, 저만 있을 때는 그러지 않으셔도 되니 무리하지 마세요.”

새침하게 말을 마친 샐리는 카시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카시스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진 채였다.

이 묘한 감정이 생겨난 것은 얼마 전부터였다. 테오도라, 테오도라. 웃음을 머금으며 그 이름을 담는 샐리를 보면 알 수 없는 짜증이 샘솟곤 했다.

단순히 기분이 안 좋은 거라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에서야 이 불쾌한 감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카시스가 작게 중얼 거렸다.

“질투…….”

* * *

테오도라는 연회 이후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극심하게 열이 올라 테오도라는 모든 이의 병문안을 거절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면회가 가능하다고 연락이 왔다. 샐리는 황급히 황성으로 향했다.

“왔군.”

침대에 누워 있던 테오도라가 샐리를 보며 웃었다. 테오도라는 편한 실크 잠옷을 입고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묶은 채였다.

늘 생기 넘치던 얼굴이 조금 핼쑥해져 있었다. 샐리는 걱정 어린 얼굴로 테오도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삼 일 정도 쉬었더니 괜찮아졌어. 지금은 기침만 좀 하는 정도지.”

“정말 다행이에요.”

샐리는 테오도라의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곱게 포장된 상자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으실 것 같아 부드러운 마들렌을 만들어 왔어요. 삼키기도 좋으실 거예요.”

“요즘 수도의 여인들에게는 아픈 사람에게 과자를 선물하는 것이 유행인가?”

테오도라의 말에 샐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눈치를 챘다. 테오도라의 침대 주변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들과 편지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달콤한 버터 향기가 나는 상자도 여럿이었다.

“어머. 누가 보면 저하의 생신이신 줄 알겠어요.”

“나도 그렇게 착각할 뻔했다지.”

테오도라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샐리가 준 상자의 포장지를 풀었다. 상자 안에는 노란빛 마들렌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테오도라는 마들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레몬 향이 나는 부드럽고 달달한 마들렌이 그녀의 입가를 기분 좋게 채웠다.

“맛있군.”

“식사는 좀 하셨어요?”

“물론. 하루라도 빨리 낫기 위해 열심히 먹었지. 난 이렇게 침대 위에서 가만히 누워 있는 건 질색이거든.”

“그런 분치고는 꽤 즐거워 보이시네요.”

“선물과 편지를 확인하느라 심심할 새도 없었으니까. 다들 내가 감기에 걸린 건 어떻게 알았는지 말이야.”

테오도라의 말에 샐리는 빙긋이 웃었다. 사교계에 테오도라의 감기 소식을 알린 것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샐리를 향해 여인들이 다가와 물었다.

—샐리, 무슨 일이 있나요?

—실은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지독한 감기에 걸리셨다는 연락이 와서요. 열이 심하게 나신다고 하여 마음이 무겁네요.

한마디였을 뿐이지만 파장은 엄청났다. 이토록 수많은 선물과 편지가 테오도라에게 도착할 만큼.

“그만큼 저하의 인기가 대단하시다는 거죠. 병환을 털고 사교계에 나오시면 놀라실 거예요. 여인들이 그날의 연회에 대해서 얼마나 열심히 이야기하는지 몰라요.”

아름다운 레이몬드 호수에서 벌어진 놀라운 사건은 순식간에 여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제국의 귀한 황녀가 일개 귀족 여인을 구하기 위해 직접 물에 뛰어들었다는 건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여인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물에 젖은 여인을 다독이는 모습을 보고 주책맞게도 눈물이 조금 나와 버렸답니다. 세상 어느 황녀께서 잘 알지도 못하는 귀족 여인을 위해 그렇게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겠어요.

샐리가 예상한 대로였다. 여인들은 테오도라의 행동에 크게 감동받았다.

연회에 참석했던 여인들은 레이몬드 호수에서 열렸던 꿈결 같은 연회를 극찬했다.

반은 연회의 아름다움에 관한 칭찬이었고 나머지 반은 테오도라가 보여 준 용기에 대한 칭찬이었다.

열성적인 여인들의 평가는 테오도라의 첫 연회가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단 한 번의 연회로 저하는 사교계의 인기인이 되셨어요.”

“그래. 보내온 편지와 초대장을 보니 그렇더군. 샬롯 부인의 눈치를 보며 나를 피하던 모습이 거짓말 같을 정도야.”

“사교계 여인들은 경계심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대담하니까요. 무엇보다 그녀들의 호기심은 무시할 것이 아니랍니다.”

그 과정을 온전히 경험했던 샐리가 웃으며 말했다. 엘리제의 위세에 눈치 보던 이들이 샐리를 향해 초대장을 보냈던 것도 결국 호기심 때문이었다.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지만 진정 매력을 느낀다면 그녀들은 마음 한편을 나누어 주었다.

고작 평민인 샐리에게도 그러했는데 고귀한 황녀에게는 어떠할까. 테오도라는 곧 수많은 이들을 거느린 사교계의 중심이 될 것이다.

“앞으로도 내 스승에게 배울 게 많겠군.”

테오도라의 장난스러운 말에 샐리가 쿡 하고 웃었다. 이런 훌륭한 제자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상자에 있던 열 개의 마들렌을 순식간에 모두 먹어 버린 테오도라가 손수건으로 입매를 닦으며 말했다.

“보니타 영애는 만나 보았나?”

테오도라의 물음에 샐리의 표정이 달라졌다. 심각해진 얼굴로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니타 영애는 레이몬드 호수에 빠진 여인의 이름이었다. 샐리는 테오도라 대신 그녀의 안부를 묻기 위해 보니타가를 찾았다.

다행히도 보니타는 감기에도 걸리지 않았고 마음도 많이 진정된 상태였다.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앳된 영애였다. 호수에 빠지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황녀를 붙잡고 엉엉 울어 버린 일은 그녀에게 아주 끔찍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씩씩했다. 그 자리에 있던 테오도라와 많은 여인들이 괜찮다며 부드럽게 위로를 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보니타 영애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레이몬드 호수가 너무나 아름다워 배를 타긴 했지만 워낙에 물을 무서워해서 아주 조심했다고 해요. 손잡이를 꼭 잡고 앉아 있었다고요.”

그 말에 테오도라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배는 조그만 나무배였지만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해서는 절대 떨어질 리가 없었다. 레이몬드 호수의 물살은 은은하니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함께 배에 탔던 여인이 물가에 신기한 것이 있다며 자꾸 보라고 해서 물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고 합니다. 그 순간 배가 크게 흔들려 물에 빠졌다고 해요. 워낙에 놀라 확신할 순 없지만 누군가 등을 떠민 느낌이 났다고 했어요.”

그 말에 테오도라는 눈썹을 찡그렸다.

“왜 바로 그 말을 하지 않았지? 그랬다면 바로 조사를 해 범인을 잡았을 텐데.”

“보니타 영애는 아직 어린 데다가 위세가 미미한 자작가의 영애니까요. 그런 말을 했다가는 연회가 엉망이 될 것 같아 말할 수 없었을 거예요.”

테오도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온전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선택한 것이군. 무슨 일을 당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겠죠.”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누군가 이 사건을 인위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여인이 배에서 떨어진 것이 이상하다 싶었기 때문이다.

“깊지 않은 호수고 주위에 사람이 많으니 설령 빠져도 죽지는 않을 테고. 보니타 영애의 목숨을 노린 것은 아니었을 거야.”

그러나 여인이 물에 빠진 사건은 연회를 망치기에는 충분했다. 고작 연회를 망치기 위해 어린 영애를 물에 빠트린 저열한 음모. 이처럼 유치하고 못된 생각을 할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샬롯 부인일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어떻게든 내 연회에 온 여인을 한 명 매수해 일을 벌인 것이겠지.”

샬롯 백작 부인. 그토록 테오도라에게 못되게 구는 그녀가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녀라면 이토록 못된 간계를 꾸미고도 마음 편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이번 일을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셈이었다.

“은밀하게 말을 흘려. 보니타 영애가 호수에 빠진 것은 누군가의 흉계 때문이라고. 조금만 운을 떼도 소문은 커질 테지.”

현재 사교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테오도라의 연회였다. 그 연회에서 일어난 일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꾸민 소행이라고 한다면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그리고 황녀가 여는 연회에서 이토록 대담한 흉계를 꾸밀 이가 누구일지 사교계의 여인들은 능히 짐작하리라.

테오도라 황녀를 향한 적의와 더불어 샬롯의 포악한 성정은 아주 유명하니까.

샬롯의 소문이 악랄할수록 테오도라는 더더욱 빛이 날 것이다.

제국의 고귀한 혈통을 이은 유일한 황족, 여인의 몸으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알스의 아카데미를 수료한 총명함, 다른 이를 위해 몸을 바치는 용기. 수많은 요소들이 여인들을 환호하게 만들 것이다.

* * *

테오도라는 본격적인 사교 활동을 시작했다. 영애 한 명을 위해 물에 뛰어든 황녀라는 이야기의 힘은 대단했다.

특히나 평범한 황녀도 아닌 황가의 순혈이라는 점이 더더욱 그녀를 특별한 존재로 보이게 만들었다.

테오도라의 인기는 엄청 났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오셨어요!”

“오늘도 샐리 님과 함께 왔네요!”

테오도라가 도착하는 순간 후작 영애 삼총사 도로시, 레이라, 미란다가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테오도라의 옆에는 늘 샐리가 있었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요염한 여인과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훤칠한 여인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몰려든 건 세 영애만이 아니었다. 나이가 찬 여인들도 소녀처럼 두 볼을 붉게 물들이고는 두 사람의 주위를 감쌌다.

까르륵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여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여 차마 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순식간에 파트너를 잃고 혼자가 된 사내들은 차마 말도 못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야 원. 안쓰러워 못 보겠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리오넬 후작이 쯧쯧 혀를 찼다. 바람둥이였던 과거라면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슬퍼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아내 마가렛이 아닌 여인들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 일처럼 사내들을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와 팔짱을 끼고 있던 마가렛이 입을 여는 순간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다.

“저도 황녀 저하와 샐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올게요.”

마가렛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저 멀리 서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이 서린 리오넬을 보며 마가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세요? 설마 이젠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 참견을 하실 셈은 아니시겠죠?”

얌전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지만 엄격함이 서려 있는 말투였다. 그래서 리오넬은 차마 그럴 거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순하디순한 성품을 가진 부인이었지만 제대로 화를 내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얼마 전 연회에서 만난 열일곱 살짜리 소년을 향해 아내에게 집적거리지 말라고 으르렁거렸을 때도 그녀는 화를 냈다.

—앞으로 일주일은 제 방에 들어오지 마세요!

지옥 같은 일주일이 지난 것이 고작 어제였다. 이번에도 그녀를 화나게 한다면 또 얼마나 긴 밤을 혼자 지새워야 할지 모른다.

“그럼요, 부인. 다녀오세요.”

그래서 리오넬은 힘겹게 미소 지으며 팔짱을 풀었다. 마가렛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여인들을 향해 가 버렸다.

결국 리오넬도 별수 없었다. 그 역시 칙칙하기 그지없는 사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터덜터덜 향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본 샐리가 마가렛에게 말했다.

“부인, 후작님의 넓은 어깨가 이만큼 내려왔어요. 부인과 함께하지 못해 무척 아쉬운 모양이에요.”

그 말에 마가렛이 부채로 입을 가려 웃었다.

“알아요. 그래서 더 오래 여기 있으려고요.”

짓궂은 말에 샐리와 주변의 여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테오도라가 참석한 연회장에서는 유독 저런 사내들이 많았다.

“제가 누구랑 대화를 하던 관심이 없던 남편이 이상하게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 간다고 하면 눈빛이 달라지더라고요.”

“저도 그래요. 어느 날은 체면도 잊고 황녀 저하가 자기보다 좋으냐고 묻기까지 하던걸요.”

그 말을 들은 테오도라가 난처한 듯 턱을 매만졌다.

“도대체 왜지?”

‘그야 황녀 저하께서 너무 멋있으니까요.’

여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지만 무엄하게 황녀의 앞에서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대신 샐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에스테반 공작께서는 그런 유치한 말 같은 건 하지 않으시죠?”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분은 아니시죠.”

“역시. 사내라면 무릇 그런 진중함을 가지고 있어야 멋진데 말이에요. 내 남편은 너무 경망스러워서 민망하다니까요.”

“그만큼 부인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거잖아요. 기쁘시겠어요.”

샐리의 대답에 여인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렇긴 해요.”

연회는 아주 평화로웠다. 들려오는 연주는 아름다웠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얼굴도 평온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여인이 ‘꺅’ 하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사람들은 모두 여인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보았다.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샐리도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내 샐리의 눈이 커졌다.

‘세상에.’

카시스였다. 평소에도 눈에 띄던 그였지만 오늘은 더 눈에 띄었다. 그가 입은 검정색 정장 때문이다.

연회장의 밝고 화사한 옷들 사이로 칠흑 같은 옷은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흑표범 같은 매끈한 검정색 원단 위로 그의 눈동자를 닮은 푸르른 사파이어 브로치가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아한 걸음으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마치 밤을 지배하는 귀공자 같았다.

천천히 걸음을 내디딘 카시스는 샐리의 앞에 섰다. 샐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쩐 일이세요? 오신다는 말씀 없으셨잖아요.”

여전히 카시스는 샐리와 함께 연회장에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니, 지금 와서는 더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에스테반 공작이 없어도 샐리는 충분히 제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등장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카시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시간이 남아서.”

거짓말. 늘 새벽부터 한밤까지 일해야 하는 그가 시간이 남을 리가.

무엇보다 이 연회는 아주 평범한 연회였다. 신년회처럼 그가 꼭 참석해야 할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가 참석할 이유가 전혀 없는 자리였다.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년회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테오도라였다. 카시스는 가까이 다가온 황녀를 향해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테오도라 역시 고개를 숙여 그의 인사를 받았다. 제아무리 황녀라 해도 에스테반 공작에게는 예우를 갖추어야 한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위압감이 대단해 샐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세 사람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작 테오도라는 순수하게 카시스의 외모에 감탄하고 있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검정색 정장을 입은 늘씬한 그의 모습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그토록 타인에게 무관심한 아버지가 왜 그렇게 그에게 관심이 많은지 조금은 이해가 갈 정도였다.

“멋진 정장이군요. 공작 저하께 정말 잘 어울립니다.”

테오도라의 칭찬에 카시스의 남색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강조하듯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샐리가 제게 선물해 준 옷입니다.”

“그랬군요. 정말이지 그녀다운 안목이네요.”

“이 브로치도 샐리가 골라 준 겁니다.”

카시스가 가슴 위에 달린 브로치를 가리키며 말하자 테오도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샐리’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귀를 쫑긋 세우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샐리는 아니었다.

‘엘리제가 저하의 스프에 독버섯이라도 탄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저토록 유치한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받은 선물을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가.

“두 분의 사이가 듣던 대로 아주 뜨거운 모양입니다.”

다행히도 테오도라는 그의 의도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순수하게 두 사람의 깊은 애정에 감탄했다.

그러나 샐리는 그가 또 무슨 말을 할지 불안했다. 샐리는 황급히 카시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하, 이리 와 보세요.”

“얼마든지.”

무뚝뚝한 카시스의 얼굴에 연한 웃음이 스며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끌려가면서도 테오도라에게 말했다.

“샐리가 저와 함께 있고 싶다는군요.”

“네, 다녀오십시오.”

테오도라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샐리는 어이가 없었다.

사람이 없는 테라스로 카시스를 데리고 나온 샐리가 소리쳤다.

“솔직히 말하세요. 오늘 대체 왜 오신 거예요. 갑자기 절 놀리고 싶어지기라도 하신 거예요?”

“그럴 리 없잖아.”

“그럼 왜 이런 곳까지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건데요.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세요?”

샐리가 사준 정장은 사석에나 입을 법한 파격적인 디자인의 옷이었다. 이런 연회장에서 입기에는 너무 튀었다.

그가 굳이 그 옷을 입고 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일 터였다. 그리고 그 대상이 테오도라라는 사실이 가장 어이없었다.

카시스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남들 앞에서는 해도 된다고.”

“뭐를요?”

생뚱맞은 대답에 샐리가 미간을 모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 허락하긴 했었다.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으로 보일 만한 갖가지 행동들을.

스킨십, 에스코트, 속삭임 모든 것이 괜찮았지만 이런 식의 아이 같은 행동은 하라고 한 적이 없었다.

“질투.”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샐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그녀를 향해 카시스가 말을 이었다.

“네가 다른 자의 이야기를 하는 게 싫어. 그게 황녀라 해도, 여자라 해도, 그 누구라 해도.”

아이 같은 투정이 섞인 말이었다. 그러나 장난기라곤 조금도 없는 진지한 말이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펑!’ 하고 샐리는 얼굴이 폭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샐리는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독버섯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영혼이 저 남자의 몸에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에스테반 공작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정말로, 그럴 리 없었다.

* * *

같은 시간, 엘리제는 자신의 방에서 아주 스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편지는 렉스터 후작 부인이 보내온 것이다. 그녀는 엘리제의 티파티에 늘 참석하는 여인 중 한 명이었다.

편지는 초대에 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내용이 정성껏 적혀 있었다. 물론, 아무리 엘리제가 사교계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는 공작 부인이라 해도 그녀의 초대장에 모든 이가 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피치 못할 개인 사정이 있을 때는 초대장을 받고도 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소문이 사실이었군.”

렉스터 후작 부인이 요즘 샐리와 테오도라가 참석한 연회에 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친밀해 보였다는 여인들의 말에도 그저 웃어 넘겼다.

무척 괘씸하긴 했지만 렉스터 후작 부인은 고작 그런 이유로 잘라 내기에는 꽤 쓸모가 많은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호기심이 생겨 두 사람에게 다가가겠지만 결국은 내게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도착한 편지는 이따위 거절 편지였다.

감히 렉스터 따위가, 감히 이 에스테반에게.

엘리제의 새하얗고 가녀린 손이 편지를 무참히 구겨 버렸다. 너덜너덜 해진 편지를 바라보며 엘리제가 스산하게 입을 열었다.

“마사.”

“네.”

엘리제의 뒤에서 어두운 얼굴로 서 있던 마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렉스터가에 수배해 둔 하녀와는 연락이 잘되고 있겠지?”

“네. 돈이 급한 계집이라 제 쪽에서 먼저 안달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시켜 주면 잘해 낼 겁니다.”

친하게 지내는 이들의 저택에 엘리제는 자신의 사람을 심어 넣었다. 그런 수고스러운 일을 한 것은 이런 때를 위해서였다.

“뭐가 좋을까. 그래, 렉스터 부인이 죽고 못 사는 개가 새끼를 낳았었지?”

렉스터 후작 부인은 유명한 동물 애호가였다. 애완용 개를 제 자식처럼 유별나게 사랑했는데 얼마 전에는 개가 새끼를 낳았다며 성대하게 파티를 열었을 정도였다.

“냄새나는 개새끼들을 모두 죽여 버리라고 해. 갈가리 찢어서, 아주 잔인하게. 잘게 자른 시체를 후작 부인의 방 앞에 놓아주면 딱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이런 명령쯤이야 수도 없이 받아 보았기에 마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엘리제를 불쾌하게 한 것에 대한 벌이었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으로서 내릴 벌은 다른 것이어야 했다.

사교계에서 파벌이라는 것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저런 식으로 제멋대로 파벌을 빠져나간 자에게는 마땅한 보복이 필요했다.

엘리제가 공작가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공작 부인이었다면 가문의 힘을 이용하여 렉스터 후작가를 압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엘리제는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었다. 후작가를 옭아맬 실질적인 힘은 없었다.

그렇다면 엘리제가 쓸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엘리제가 가진 사교계의 위세를 이용하여 렉스터 후작 부인을 짓밟는 것이다.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곁을 떠나 마음이 아프다고 조금 눈을 내리까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감히 에스테반 공작 부인을 상처 준 이를 용서하지 못할 이들이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지금 와서 그럴 여인들이 몇이나 있을까.’

고작 몇 개월 사이에 사교계의 분위기는 너무나 바뀌어 있었다.

샐리, 그 계집이 문제였다. 그 계집이 등장한 순간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이상해지나 싶더니 여인들은 이제 이전만큼 엘리제를 우러러보지 않았다. 엘리제의 사람이 되고 싶어 안달하지도 않았다.

그토록 제 편을 만들고 남을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던 이들이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거리며 웃고 다니는 꼴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러니 렉스터 부인이 엘리제의 곁을 떠난다 한들 그녀에 대한 비난은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인은 렉스터 하나만이 아니었으니까.

“이건 정말이지 좋지 않아.”

그동안 엘리제가 샐리를 마음 놓고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천한 신분 때문이다.

명문가의 여인들은 신분에 민감했다. 그러니 미천한 출신의 샐리가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었다.

그러나 제국에서 제일 고귀하다는 피를 가진 황녀가 그 옆에 붙어 있으니 상황이 아주 고약했다.

‘역시 테오도라, 그녀부터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야 해.’

무엇보다 테오도라는 릴리의 사건도 조사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엘리제에게는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황녀였다. 황성의 보안은 엄격했다. 사람을 매수해 정보를 모으거나 못된 짓을 하는 것은 힘들었다.

죽이거나 약점을 찾아 쥐기에도 위험부담이 크니 다른 방법으로 테오도라를 멀리 보낼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다행히도 내게는 샬롯이 있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지만 움직이기는 아주 쉽지.’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금색 속눈썹을 짙게 드리운 아름다운 얼굴이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눈이 떠진 것은 한참 후였다.

외전. 그의 질투는 장미꽃 향이 난다 (전생의 이야기)

샐리는 한 손에 새하얀 꽃을 안고는 드레스를 펄럭이며 카시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소녀처럼 기쁨이 가득했다.

“저하, 이것 보세요. 저 선물을 받았어요.”

물론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인 그녀가 선물을 받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선물은 형식적인 선물이거나 첩인 여인에게 보낼 법한 화려한 보석 같은 사치스러운 물건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아한 귀족 영애에게 줄 법한 고운 꽃다발을 선물로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누가 이런 것을 주었지?”

“리오넬 후작께서요. 제게 어울릴 것 같다며 주셨어요.”

그러나 샐리의 환한 얼굴과는 달리 카시스의 표정은 너무나 싸늘했다. 늘 냉정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험악한 감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제야 샐리는 자신이 무언가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네게 조금도 어울리지 않아.”

서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샐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버렸다.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샐리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샐리의 손 안에 들린 새하얀 꽃의 이름은 심비디움이었다.

꽃말은 우아한 여인. 그런 꽃이 자신에게 어울릴 리 없었다.

이미 아는 일임에도 그의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결국 샐리는 울음이 터져 나올까 봐 도망치듯 카시스의 곁을 떠나 버렸다.

멀어진 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시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딘가 가슴이 콕콕 쑤셔 오고 그녀를 당장 쫓아가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이상한 가슴의 아픔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처럼 규정할 수 없는 것을 맞닥뜨렸을 때는 무시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카시스는 몸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던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가 다시 되돌아보았을 때 샐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날 카시스는 그 순간 보았던 샐리의 얼굴이 생각나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카시스는 저택을 나가 꽃을 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꽃을 사고 싶었다.

어제 보았던 희멀건 꽃다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녀에게 정말 어울리는 꽃으로.

비현실적일 만큼 새빨갛고 탐스러운 장미꽃을 하나하나 골라 묶었다. 고민 끝에 메모도 썼다.

[너에겐 이 꽃이 잘 어울려.]

차마 얼굴을 직접 보고 줄 자신이 없어 샐리의 방에 몰래 가져다 놓았다.

샐리가 그 장미꽃을 본 것은 새벽이 되어서였다. 피곤에 지친 얼굴로 방에 도착한 샐리는 장미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쉽게도 그녀는 글을 읽을 줄 몰랐기에 메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어 누구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충분했다.

샐리는 벅찬 마음으로 장미꽃을 안아 들고는 아이처럼 울어 버렸다. 텅 빈방 안에서 그녀를 맞아 준 향기로운 장미꽃은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다음 날, 샐리와 카시스가 마주쳤다.

카시스는 생각했다.

그녀가 먼저 장미꽃 이야기를 할 때까지 굳이 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제가 준 선물을 먼저 내색하는 것은 묘하게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샐리는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꽃을 받았다고 하면 또 화내실지도 몰라. 굳이 말하지 말자.

결국 두 사람은 장미꽃에 관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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