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28)

10. 황제의 초대장

샐리가 카시스에게 한 번 더 시간을 내 달라고 한 것은 어느 날의 오후였다. 두 사람은 함께 거리로 나왔다.

샐리가 카시스와 함께 향한 곳은 화려한 숍들이 늘어선 거리였다. 특히나 드레스나 보석 같은 것들을 파는 곳이 많아 여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리이기도 했다.

‘필요한 물건이 있는 건가.’

샐리를 따라 걸으며 카시스는 생각에 빠졌다. 샐리는 아주 열성적으로 사교계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에 맞는 드레스와 귀금속도 거침없이 구입하여 몸에 걸쳤다.

물론 모든 비용은 에스테반 공작 앞으로 청구되었다. 샐리는 물건을 사기 전에 일일이 그의 허락을 받았다. 언젠가는 그것에 대해 카시스가 말했다.

—그냥 마음대로 사고 청구서만 넘기도록 해.

—제가 걸치긴 하지만 엄연하게 모든 것은 저하의 물건이에요. 저하의 계획을 위하여 저하의 돈으로 구입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허락을 받아 구입하는 것은 당연하죠.

에반이 저택에 필요한 고가의 물건을 구입할 때 카시스에게 결제를 받을 때와 똑같은 말투였다.

그 말이 묘하게 거슬리긴 했지만 맞는 말이라 카시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쇼핑가로 데려오다니. 또 뭔가 사기 전에 허락을 구하려나 싶었다.

‘이런 식으로 나를 부른 것은 좀 이상하지만.’

샐리는 최대한 카시스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연회에도 그를 동행시키지 않았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카탈로그를 보여 주어 확인받았다.

‘눈으로 확인받아야 할 만큼 아주 값비싼 물건인 걸까?’

그러나 샐리의 옆모습을 암만 바라보아도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조금 후 도착한 곳은 아주 의외의 장소 였다.

최고급 드레스숍이나 보석숍을 가리라 생각했건만 도착한 곳은 남성의 정장을 파는 곳이었다. 카시스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곳에는 왜 온 것이지?”

“그야 옷을 사러 왔죠.”

더더욱 이해 못할 말이라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때 샐리가 몸을 돌려 카시스와 눈을 마주쳤다.

“며칠 전 제 부탁을 들어주셨잖아요. 작은 부탁에도 답례를 하는 법인데 대단한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 부탁을 드렸으니 그에 마땅한 보답을 해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카시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답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샐리의 눈이 반짝였다.

그 얼굴에 카시스는 저도 모르게 눈썹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저런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을 때는 늘 그에게 난처한 일들이 일어나곤 했으니까.

최고급 의상 숍에는 옷을 입어 볼 수 있는 피팅룸이 준비되어 있었다. 남성 정장 전문점인 ‘베르시엔’도 마찬가지였다.

커튼이 둘러진 단상이 있었고 그 앞에는 일행이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준비되어 있었다. 드레스숍의 피팅룸과 다른 것이 있다면 남녀의 위치가 뒤바뀐 정도였다.

샐리는 그 소파에 편안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점원이 서서 샐리를 정중하게 대접했다. 잠시 후 드레스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저하께서 옷을 다 입으셨습니다.”

그 말에 샐리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촤르륵. 커튼이 열리며 카시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얀 원단에 금실 자수가 섬세하게 수놓아진 정장을 입은 카시스가 서 있었다.

카시스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그 모습에 감탄하던 점원이 정신을 차리고 샐리에게 말했다.

“신사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제작된 정장입니다. 특히나 장장 1년 동안 수놓은 황금 자수가 옷의 포인트지요. 자수의 아름다움만큼은 여느 여성의 드레스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 보이는군요.”

고개를 끄덕인 샐리가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저하는 어떠세요?”

“너무 화려해.”

카시스가 단칼에 잘라 말했다. 그에 샐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옷은 훌륭했으나 아름다운 카시스의 얼굴이 문제였다. 너무 과한 아름다움은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법이었다.

그 말을 들은 점원이 황급히 말했다.

“그럼 다른 옷을 입어 보시죠.”

그 후로도 몇 차례나 피팅룸의 커튼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여성의 드레스도 그렇지만 남성의 정장도 탈의가 번거롭기는 마찬가지다.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고 끼고, 재킷을 입고 벗는 일은 생각보다 힘겨운 일이었다.

그러나 카시스는 묵묵히 옷을 갈아입고는 곧게 허리를 펴고 섰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귀족 수업을 받은 그에게 이 정도는 괴로움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커튼이 열릴 때마다 보이는 샐리의 얼굴을 보는 것이 꽤 즐거웠다. 자신을 샅샅이 바라본 후 고개를 내젓거나 작게 감탄을 하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라니.

그래서 네 번째 커튼이 닫혔을 때도 카시스는 묵묵히 옷을 벗었다.

벌써 네 번이나 장황한 설명을 마친 점원이 샐리의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주었다.

향긋한 내음을 맡으며 샐리는 차를 홀짝였다.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샐리를 보며 점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없으십니까?”

“옷은 아주 훌륭해요. 그런데 아직 마음에 확 와 닿는 것은 없네요.”

그 말에 점원은 힘겹게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본 정장은 모두 최고의 의상 숍인 베르시엔이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옷이었다.

세련된 디자인의 옷과 함께 달콤하기 그지없는 말을 조금 곁들여 주면 대부분 홀린 듯 옷을 구입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 온 손님은 정말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뭐가 마음에 들면 뭐가 마음에 안 들고, 뭐가 어울리면 뭐가 안 어울리고.

정장의 색상부터 디자인, 단추 하나하나까지 어찌나 꼼꼼히 보는지 점원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처럼 여인이 까다롭게 굴면 사내가 이만 하자고 할 법도 한데 그것도 아니었다. 피팅룸의 남자도 소파에 앉은 여자도 누구 하나 만만한 이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겨운 손님이라도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에스테반 공작이란 대어를 놓칠 수는 없지.’

수많은 귀족 단골이 있는 숍이었지만 에스테반 공작은 다른 손님과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오늘 그에게 베르시엔의 옷을 사게 해야 한다. 그 대단한 에스테반 공작에게 옷을 판다면 어마어마한 성과가 될 터였다.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는 직원의 앞으로 다섯 번째 커튼이 열렸다. 고개를 든 점원은 헉, 하고 작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앞서 내내 차분한 얼굴로 카시스를 꼼꼼히 살폈던 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커다래진 눈으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몸에 딱 들어맞는 검정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옷은 극도로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절제된 디자인이지만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섬세한 단추가 달려 있어 고급스러움을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새까만 옷과 대비되는 카시스의 새하얀 얼굴이었다. 그는 마치 옛 이야기 속에 나오는 뱀파이어처럼 도도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어떠신가요?”

입을 다물지 못했던 점원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샐리에게 말을 건넸다. 샐리도 크게 떠졌던 눈을 차분히 만들고는 말했다.

“……멋지네요.”

카시스는 그 짧은 말을 똑똑히 들었다. 많은 옷을 입었지만 그녀가 칭찬한 것은 이 옷이 처음이었다.

짧은 칭찬이건만 꽤 기분이 좋아졌다. 카시스가 보일 듯 말듯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마음에 드는군.”

그 말에 점원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결국 마지막에 본 검정색 정장으로 결정했다. 자연스럽게 카시스를 향해 청구서를 내민 점원에게 샐리가 말했다.

“청구서는 제게 주세요.”

그 말에 점원이 놀란 얼굴을 했다. 워낙에 유명한 소문이었기에 점원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과 그의 애첩. 애첩이라면 본디 고양이 같은 애교를 피며 갖은 선물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샐리는 청구서를 받아 당당하게 서명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시스는 아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물건을 다른 누군가가 사 준 것은 아주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 상대가 샐리라니.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숍을 나온 두 사람은 잠시 거리를 걸었다.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은 진한 주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찬 겨울바람이 지나가자 샐리는 살짝 몸을 움츠렸다. 시선을 돌리니 카시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어요. 제가 어떻게 이런 돈이 있는지 궁금하신 거죠?”

최고급으로 맞추는 남성의 정장은 여성의 드레스만큼 어마어마한 가격이 붙었다.

보통 평민이 일 년을 벌어야 살 수 있을까 말까 한 가격이었다. 그리고 샐리는 몇 개월 전까지 가진 것이라곤 몸뿐인 하녀였다.

“일전에 자비스가에서 보내온 돈을 썼어요.”

“그랬군.”

카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비스와 얽힌 사건에 대한 피해 보상으로 1000골드를 받았다.

빈손으로 공작가에 왔던 그녀에게 그 돈은 전 재산일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마 그녀는 오늘 그 전 재산의 대부분을 썼을 것이다.

“고작 그런 부탁에 대한 보답으로 전 재산을 쓰다니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사치스러운 거죠.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주세요.”

샐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모르겠지만 샐리는 돈 쓰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얼마 만에 제대로 돈을 써 본 건지 모르겠다. 덕분에 오늘은 아주 즐거웠다.

“그렇게 하지.”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토록 밝은 얼굴을 하는데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선물을 받았다.

거리는 평소보다 분주했다. 큰 길에는 화려한 마차가 수도 없이 오가고 있었다.

인부들이 길 곳곳에 황금 사자로 장식된 등불을 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샐리가 말했다.

“벌써 신년회 준비로 정신이 없네요.”

새해를 맞아 치러지는 신년회는 제국의 가장 큰 행사였다. 신년회가 다가오면 거리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 사자로 꾸며지고, 귀족들은 거리를 바삐 움직였다.

새해 첫날 황제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황성에서의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를 포함한 이름 높은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니 만큼 여인들은 최선을 다해 연회를 준비했다.

사교계의 여인이라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행사건만 샐리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카시스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연회에 초대받는 것은 선택받은 귀족들이지.’

그리고 그녀는 평민이었다. 수많은 귀족 여인이 가는 그곳에 그녀는 갈 수 없었다.

카시스의 남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온 제국이 분주해졌다. 다가온 신년회 때문이다. 제국의 가장 고귀한 존재인 황제가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축복하는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다.

평민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하사한 술과 고기를 먹으며 축제를 즐겼고, 귀족들은 황성에 초대되어 연회를 즐겼다.

귀족들은 축제 준비로 분주한 평민들보다 더욱 바빴다. 황성에서 열리는 연회 때문이었다.

황족을 포함한 이름 높은 제국의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였다. 이 연회에서 존재감을 잘 드러내면 위세 높은 귀족들과 연을 맺을 수 있고, 황족들과도 인연이 생기니 누구에게나 큰 기회였다.

귀족 여인들은 이 날을 위해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최고급 드레스와 보석을 주문했다.

덕분에 이 시기는 드레스숍과 보석숍이 최고의 호황을 누리는 시기였다. 그것은 제국의 제일가는 디자이너 카모라도 마찬가지였다.

샐리는 카모라의 아뜰리에에 들어섰다. 시기가 시기니 만큼 저 괴상한 형체가 카모라여도 납득이 갔다.

언제 감았는지도 알 수 없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엎어져 있는 사람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샐리는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카모라 님?”

“…….”

그러나 형체는 미동조차 없었다. 샐리는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슈아드렌의 커피와 케이크를 사 왔어요. 가장 달콤한 케이크로요.”

그 말에 죽은 것 같았던 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샐리는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자신이 아는 카모라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여인의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다.

눈 밑의 그림자는 턱까지 내려왔고 바짝 말라 튀어나온 광대 덕분에 그녀의 얼굴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오로지 보라색 눈동자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장! 당장 그것들을 내 입에 넣어 주세요!”

샐리는 케이크와 커피를 황급히 카모라의 입에 구겨 넣었다. 귀족 영애의 우아함은 개나 주라지.

카모라는 배고픈 거지도 한 수 접을 정도로 케이크와 커피를 우악스럽게 먹었다. 달콤한 당분이 들어갈수록 카모라는 점점 제 모습을 찾아 갔다.

마지막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순간에는 어느 정도 본래 카모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기름져 뒤엉킨 머리카락과 얼굴의 초췌함은 여전했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았다.

“정말 고마워요. 샐리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에요.”

그 말에 샐리가 풋 하고 웃었다. 생명의 은인이란 말은 조금 과장되었지만 아까의 카모라를 생각한다면 진심인지도.

“식사도 제대로 안 하시고 작업을 하신 거예요?”

“신년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신년회에 입고 갈 드레스라고 어찌나 까다로운지 평소보다 배는 힘들다니까요.”

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년회는 어느 연회보다 중요한 자리니까요. 그럴 만해요.”

제국 여인들에게 신년회는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날고 기는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이니까.

여인들이 신년회의 꾸밈새에 얼마나 신경을 쓰느냐 하면 신년회가 끝나자마자 다음 해의 신년회를 준비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카모라 님께 신년회에 입을 드레스를 주문하려면 평소 요금의 다섯 배를 지불해야 한다고 하던데 맞나요?”

그 말에 까르르 웃은 카모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요.”

역시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 생각하는데 카모라가 웃으며 말했다.

“열 배예요. 무려 신년회의 드레스 인데 그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카모라의 드레스는 평소에도 엄청난 고가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 가격의 열 배라니.

상상도 되지 않는 가격에 샐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표정을 본 카모라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샐리는 나의 뮤즈인걸요. 돈 따윈 받지 않을 테니 아름답게 입어 주세요.”

“네?”

갑작스러운 카모라의 말에 샐리는 당황했다. 눈을 깜빡이는 샐리의 표정에 카모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어머나. 그 표정은 뭐죠? 설마 이 카모라를 두고 다른 숍에 드레스를 예약한 것은 아니겠죠?”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감사한 말씀이지만 드레스는 필요 없어요. 저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니까요.”

샐리의 차분한 말에 카모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네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신년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세요? 지금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이요?!”

카모라 쇼를 성공적으로 해낸 후에는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인들에게 한정된 유명세를 탔다면, 최근의 재판이 있은 후에는 남성들과 나이 든 이들까지 그녀를 알게 되었다.

호감과 경계심과 호기심,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관심이었지만 어쨌건 두 사건으로 샐리는 현재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제는 ‘샐리’라는 이름으로 소개해도 그녀가 누군지 알 만큼 말이다.

“유명해졌다고 해서 작위가 생기는 것은 아닌걸요.”

웬만한 귀족 가문의 여인보다 유명해졌지만 그렇다고 샐리의 신분이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샐리는 여전히 에스테반의 애첩이었고, 평민이었다.

“신년회는 황제 폐하의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만 입장 가능하잖아요. 저는 들어갈 수 없어요. 저는 그저 에스테반의 애첩일 뿐 성도 없는 평민 여인일 뿐이니까요.”

에스테반 공작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나섰던 전생에도 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이번 신년회에 나설 생각은 애초에 포기했다. 대신에 친한 귀부인들의 준비를 돕는 역할을 맡을 셈이었다.

이번에 카모라를 찾아온 것도 그녀에게 최신 유행에 관한 정보를 듣기 위해서였다.

분명 카모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샐리는 그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샐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신년회 준비는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요?”

“네, 그래요.”

샐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모라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치 샐리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웃음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샐리를 향해 카모라가 말했다.

“신년회에 귀족만 입장할 수 있다는 규칙은 없어요. 신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황제 폐하의 초대장을 받아야 하고, 그 황제 폐하의 초대장이 대부분 귀족에게 전달될 뿐이죠. 그분의 초대장이 있다면 평민이라도 당당하게 입장할 수 있답니다. 그러니까 샐리에게도 기회는 있어요.”

카모라는 아주 쉽게 입에 담았지만 그 초대장이라는 것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이 제국의 황제다. 황제의 초대장은 여느 귀부인이 보내는 초대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샐리는 그렇군요, 하고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카모라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두고 봐요. 샐리에게 폐하의 초대장이 도착할 테니.”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렇게 자신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저는 사교계에서 조금 유명할 뿐인 여자인걸요.”

고작 그 정도로 황제가 그녀를 눈여겨볼 이유는 없었다. 황제는 여인에게 크게 관심이 없기로 유명했고, 귀족들의 연회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을 만큼 사교계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 말에 카모라의 눈빛이 아주 음흉하게 바뀌었다.

“그야 샐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카시스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니까요.”

“네?”

“황제 폐하는 타인에게 관심 없기로 소문나신 분이죠. 하지만 그분은 에스테반 공작에게만큼은 그 관심이 무척 지대하시답니다. 그리고 에스테반 공작은 황제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아주 잘 알고 있죠. 평소라면 그 관심을 무시하시겠지만…….”

카모라가 샐리를 바라보았다. 카모라 쇼가 열렸던 날, 무대 위에서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을 보던 카시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표정은 분명 아무 감정도 없는 여인에게 보여 줄 법한 표정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애첩을 기쁘게 할 만한 것이 달려 있다면 다르죠. 분명 공작 저하께서는 샐리를 위한 황금의 초대장을 받아 오실 거예요”

상상도 못한 추측에 샐리는 눈을 깜빡였다. 에스테반 공작이라는 엄청난 직위를 가지고 있기에 그가 황성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그녀도 알 만큼 에스테반 공작과 황제는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황제와 공작의 형식적 관계가 아니었던가.

이따금 황제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카시스는 대번에 눈썹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표시하곤 했다.

그런 그가 황제께 초대장을 받아 온다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럴 리 없어요.”

샐리가 고개를 내저었지만 카모라는 샐리의 손을 맞잡았다.

“아뇨. 제 감은 틀린 적이 없어요. 그러니 샐리는 신년회 준비를 해야 해요. 바로 이 카모라의 손으로요!”

* * *

그 시간 카시스는 황성에 가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인 그는 여느 귀족보다 황성의 출입이 잦았다.

대부분 에스테반 공작으로서 정무를 논하기 위함이었지만, 오늘처럼 황제와 개인적인 만남을 위해 찾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카시스의 앞에 있는 이는 레오나르도 프란츠 3세. 제국의 23대 황제였다. 테오도라의 아버지기도 한 그는 그녀와 똑 닮은 외모를 가졌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 커다란 체구를 가진 미남이었다. 4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타고난 건강 덕분에 생기 넘치는 젊은이처럼 보였다.

그는 아주 흥미로운 얼굴로 카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가 먼저 날 찾아오다니 정말 기쁘군.”

황제가 카시스를 부른 적은 잦았지만 이처럼 그가 황제를 제 발로 찾아온 적은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황제는 해야 할 정무도 뒤로 미루고 카시스와 만남의 시간을 만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카시스의 말에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뭐가 그리 급한가. 일단 왔으니 차부터 마시게. 그대를 위해 특별히 내온 에스티산의 차네.”

황제의 말에 카시스는 눈을 내리깔고 찻잔을 입에 담았다. 차를 입에 대자마자 카시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끔찍하군.’

차는 지독하게 달았다. 꿀을 쏟아부어 만든 것처럼. 그리고 눈앞의 황제는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된다는 것처럼. 이런 차를 내온 것은 일부러였을 것이다. 그래서 카시스는 찌부려지는 미간을 간신히 표 나지 않게 가다듬었다.

그가 원하는 반응은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카시스가 평온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자 황제는 눈썹을 찡그렸다.

“너무하는군, 정말.”

“무엇이 말입니까.”

“어릴 때는 설탕 한 스푼에도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으면서. 그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어떻다고.”

카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놀리는 것을 좋아했다.

황금의 사자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이런 유치한 장난까지 쳤다. 그래서 카시스는 황제가 싫었다.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게.”

나름대로 기대 가득했던 장난이 허무하게 끝나자 황제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카시스는 그 모습을 무시하며 말했다.

“이번 신년회에는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미리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뭐얏?!”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황제가 커다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커다란 덩치만큼 큰 소리에 가까이 있던 시종의 귀가 아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황제를 마주한 카시스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황제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못 온다는 건가. 신년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나?!”

신년회는 평범한 연회가 아니었다. 황제가 직접 귀족들을 초대해 대접하는 자리였다. 황실과 귀족의 관계를 친밀히 다지자는 의미도 있었다.

오죽하면 다리가 부러져도 참석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오지 않겠다는 선언은 파격적이었다.

“참석 못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게 뭔데.”

카시스가 지독히도 바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신년회에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큰일이 생겼나 싶어 황제는 초조한 눈빛으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황제는 기가 찼다. 갑자기 웬 여행이란 말인가. 평소에는 제대로 잠도 자지 않을 만큼 일에 미쳐 있는 에스테반이 말이다.

“여행은 신년회가 끝나고 가면 되잖나.”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녀와 약속을 해 버렸으니까요.”

“……뭐?”

‘그녀’라니? 갑작스럽게 등장한 호칭에 황제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카시스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황제가 설마 싶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라고 하면 엘리제?

그 순간 평온하던 카시스의 얼굴이 한껏 스산해졌다. 나이스, 드디어 첫 공격에 먹혀들었다.

황제는 작은 기쁨을 느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말을 이었다.

“……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니 소문의 그 애첩을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애첩과 여행을 가기 위해 황제가 초대하는 연회에 오지 않겠다고?”

“맞습니다.”

무덤덤한 얼굴로 예쁘게도 대답하는 그 모습에 결국 황제는 다시 한번 커다랗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직도 황제는 젊은 치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제법 황제다운 모습을 보였지만 친근한 이들 앞에서는 저속한 말도 입에 담곤 했다. 황제는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신년회를 안 와?!”

“고작이 아닙니다. 제게는 아주 소중한 여인입니다.”

“……!”

정말이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에스테반 공작이 맞는지 황제는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보자마자 사람을 홀려 버리는 저 아름다운 얼굴은 분명 에스테반이 맞았다. 그렇다면 그가 정말 단단히 미쳤거나, 저주를 받았던가 아니면…….

“애첩에게 푹 빠졌다는 게 사실이었군.”

황제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황제는 사교계에는 쥐뿔도 관심이 없고, 사사로운 이야기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에스테반 공작에게만큼은 달랐다. 카시스가 애첩을 들였다는 소식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황제가 그다지 그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은 조금도 변함없는 카시스의 모습 때문이다.

젊은 혈기에 실수로 벌인 일이거나 무슨 계략이 있어 벌인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이 황제의 초대를 거절할 정도로.

아무리 대단한 신년회라고 해도 결국은 정무와는 관계없는 연회였다. 싫다는 그를 강제적으로 끌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황제의 월권을 이용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에스테반이었다. 에스테반을 그렇게 대할 수는 없었다. 행여 그런 방법을 쓴들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정말 서운하군.”

“죄송합니다.”

축 처진 어깨로 잔뜩 아쉬운 얼굴을 했건만 카시스는 덤덤히 사과했다. 그 모습에 황제는 한탄했다.

‘에스테반이 없는 신년회 따위 의미가 있나.’

황제는 우아한 척 떠들어야 하는 연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신년회도 황제의 의무로 여는 것일 뿐, 그의 취향은 사냥을 하거나 검을 휘두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신년회를 기다린 이유는 카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 황제의 머리에 번뜩 비범한 아이디어가 스쳤다. 이 방법이라면 제대로 카시스를 신년회로 끌어올 수 있었다.

황제의 취미 중 하나인 짜증 난 카시스를 볼 수도 있었다. 일타이피의 방법이었다.

황제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토록 그대가 빠져 있는 여인이라니 궁금하군. 안 그래도 그녀를 한번 만나 보고 싶었어. 주변에서 어찌나 그대의 애첩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지 귓가가 따가울 정도였거든.”

황제가 빙그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녀를 신년회에 초대해야겠어.”

그 말에 카시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함께 여행을 간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 알 바 아니네만. 싫으면 안 오겠지.”

억지스러운 말이었다. 에스테반이 아닌 이상 누가 황제의 초대장을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평민입니다. 반발하는 귀족들이 있을 겁니다.”

“그게 뭐가 문제야. 내가 준다는데.”

“정말이지 제멋대로시군요.”

“나는 황제니까.”

황제는 씨익 웃었다. 너무나 만족스럽게도 카시스는 아름다운 얼굴을 찡그렸다. 그 점이 무척이나 그를 기쁘게 했다.

목표한 것을 얻어낸 황제는 방심했다. 그는 잔뜩 불쾌한 표정을 지은 카시스의 눈빛 안에 서린 번뜩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날 저녁. 카시스가 건넨 상자를 받은 샐리의 눈이 커졌다.

“이건…….”

화려한 금색 실크로 감싸진 상자를 여니 그 안에는 초대장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황금빛 초대장에는 방패를 휘감은 사자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황금 사자는 황제를 의미했다. 그리고 황금 초대장에는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Sally’

샐리는 정말이지 그 글씨가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확인했다. 분명 자신의 이름이 맞았다. 입을 벌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샐리를 향해 카시스가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네게 전해 달라고 하더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이 초대장의 무게감은 어마어마했다. 무려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 레오나르도의 이름으로 보내온 초대장이다.

그것도 위세 높은 귀족만 모인다는 신년회의 초대장. 작위도 없는 평민 여성이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모라 님이 말한 대로 되다니.’

샐리는 모든 것을 예견한 카모라의 안목에 새삼 감탄했다. 옷에 미쳐 있어 사교계에는 관심 없다고 여겨지는 그녀지만, 실상 그녀는 누구보다 정세에 밝았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 초대장은 카시스가 직접 황제 폐하를 구슬려 얻어 낸 것일까?

샐리는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쉽게 주지 못할 것을 준 당사자는 정작 아주 태연해 보였다.

“혹시 저하께서 부탁하신 건가요?”

“아니.”

카시스의 대답에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가 황제를 조른 적은 없으니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샐리의 눈빛은 의심이 가득했다.

“그럼 왜 황제 폐하께서 제게 초대장을 주신 거죠? 제게 보내실 이유가 전혀 없는걸요.”

“에스테반의 애첩이 어떤 여인인가 궁금하시다고 하더군.”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 궁금증을 일으키기 위해 조금의 조작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카시스의 얼굴에 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와 카시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그라도 황제를 상대로 협박을 했을 리는 없으니 그만의 방식으로 받아 낸 것일 터였다.

어쨌건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을 위해 황제의 초대장을 받아 주었다는 것이다. 초대장을 가슴에 품은 샐리가 방긋이 웃었다.

“저를 위해 애써 주신 거죠? 고마워요, 저하.”

그 말에 카시스의 가슴 한편이 간지러워졌다. 요즘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너무 자주 듣는 것 같다.

그 말을 듣기 위해 한 것은 아닌데 막상 그녀의 인사를 받으면 저도 모르게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여 버린다.

제멋대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바로하고 카시스는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 그 초대장이 독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직 모르는 거니까. 신년회는 황족을 비롯한 제국의 수많은 귀족이 모이는 자리지. 그곳에 간다는 것은 사교계의 중심부에 들어선다는 말과 같아.”

그 말에 샐리도 미소를 지우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서 치러지는 연회는 지금까지 갔던 연회와는 그 무게감이 전혀 다른 곳이었다.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이들만 초대되는 곳이었기에 그곳은 우아하고, 아름답고, 치열한 전쟁터였다. 전생의 샐리는 들어가 보지 못한 세계였기에 더더욱 긴장이 되었다.

샐리의 얼굴을 본 카시스가 말했다.

“참석은 강제 사항이 아냐. 네가 원치 않는다면 가지 않아도 돼.”

카시스의 말은 진심이었다. 샐리의 쓸쓸한 눈빛이 신경 쓰여 황제에게 초대장을 받아오기는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샐리에게 너무 부담스러운 자리는 아닐까 생각했다. 놀랄 만큼 능숙하게 사교계에 자리 잡긴 했지만 그녀는 고작 스무 살의 여인이었다. 황실이란 무대의 위압감은 제아무리 그녀라도 버거울지 모른다.

“설마요. 제게는 아주 좋은 기회인걸요.”

그러나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샐리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가야만 비로소 엘리제 에스테반에게 닿을 수 있었다.

“마님도 신년회에 오시겠죠?”

“그럴 테지.”

수많은 연회에 참석했지만 샐리는 지금껏 엘리제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엘리제와 친분이 두터운 여인들이 샐리를 초대하지 않기도 했지만, 혹시나 그녀가 나타날 것 같은 자리는 샐리가 먼저 피했다. 아직 그녀와 대등하게 서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피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샐리는 에스테반의 애첩이 된 후부터 쉴 새 없이 사교 모임에 나갔다. 수많은 귀부인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친분을 쌓았다.

친해진 여인들에게는 틈틈이 편지와 선물을 보내 우정을 쌓았고, 모임이 없는 날은 여인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찾아 공부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한가로운 애첩의 일상이었겠지만 하루도 편히 쉰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토록 노력한 것은 바로 그녀와 대등하게 서기 위해서였다.

“그럼 더더욱 참석해야죠. 마님과 나란히 설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으니까요.”

엘리제 에스테반 공작 부인. 최고의 가문, 아름다운 외모, 우아한 예법까지 따라갈 이 없는 완벽한 여인.

그녀는 물론 대단한 여인이었지만 샐리도 노력했다. 적어도 전생에서처럼 무참히 비교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폐하께 참석하겠다는 편지를 써야겠어요. 도와주시겠어요?”

당당한 샐리의 목소리에 카시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샐리가 황제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소식은 사교계에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아무리 에스테반의 애첩이라고 해도 작위도 없는 일개 평민 여인이 황제 폐하의 초대장을 받다니.

게다가 다른 연회도 아닌 신년회의 초대장이었다.

“흥. 에스테반 공작에게 졸라 폐하의 초대장을 받은 거겠지요. 고작 평민의 신분으로 하는 짓이 정말이지 건방지기 짝이 없군요.”

“부인도 참. 폐하의 성정을 모르십니까? 아무리 공작께서 부탁하신다 한들 순순히 들어주실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그게 아니면 황제 폐하께서 왜 초대장을 보냈겠어요?”

“그야 샐리가 어떤 여인인지 궁금하셨겠죠. 귀족들 사이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해졌으니까요.”

여인들마다 제각각 생각하는 바가 달랐으나 중요한 사실은 샐리가 개인의 이름으로 황제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입지를 올려놓았다.

“샐리 님,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데이지가 두 손에 든 바구니에는 선물과 편지가 가득 들려 있었다. 혼자서 모두 가지고 올 수 없어 몇몇 하녀들과 나눠 가지고 올 정도였다.

샐리의 방에 쌓이는 크고 작은 선물들을 보며 에이미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마어마하네요.”

“그러게요.”

난감하다는 듯 샐리는 눈썹을 내렸다. 권력의 최정상에 선 황제의 초대장이니 어느 정도 영향은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다들 어디서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샐리를 향해 고가의 선물과 초대장을 보내왔다.

물론 이전에도 선물과 초대는 있었지만 그것은 샐리라는 여인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과 호의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보내지는 것들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었다. 권력을 가진 이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선명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

에이미가 질린다는 얼굴로 선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에게도 부쩍 샐리와 만나게 해 달라는 여인들이 많아졌어요.”

에이미가 샐리와 친분이 두텁다는 소식은 어디서 안 것인지 부쩍 에이미에게 친한 척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예전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에이미의 도트 무늬 리본을 칭찬하며 샐리와 함께 만나자고 살랑대는 모습이 정말이지 무서울 정도였다.

덕분에 에이미는 요즘 환자 행세를 하며 찾아오는 손님을 거절하는 일이 많아졌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좀 귀찮긴 하지만 기쁜걸요. 그만큼 샐리 님이 대단해졌다는 거잖아요.”

에이미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에 샐리는 마음 한편이 말랑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에이미 님도 신년회에 참석하시죠?”

“네. 아마 올해도 어머니께 끌려갈 거예요.”

에이미는 신년회라는 말에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치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연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신년회는 특히나 끔찍했다. 에이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황성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부담스러워 죽을 것만 같아요. 특히 황족들은 하나같이 어찌나 키가 크고 눈빛도 매서운지 너무 무서워요. 전 황족 중 누구라도 다가오면 은근슬쩍 뒷걸음질 쳐서 도망치는 게 일이랍니다.”

그 말에 샐리가 귀엽다는 듯 쿡쿡 웃었다. 이해는 갔다. 제국에서 황족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황족과 마주치는 일은 누구라도 긴장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샐리는 에이미처럼 그들에게서 도망칠 순 없었다.

사교계의 중심부에 선 여인들은 저마다 황족과 긴밀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샐리도 이 기회를 통해 황족과 깊은 인연을 만들어야 했다.

샐리가 황제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편지를 보내왔다.

[황제의 눈도장을 받았다고 소문이 났으니 분명 네게 다가오는 황실의 여인이 있을 테지. 황실의 여인과 연을 맺는다는 건, 귀족가의 여인과 우정을 나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지. 네게 가장 힘이 돼 주실 수 있는 분을 선택하도록 하거라.]

골든리아는 최근에 부쩍 샐리를 친근하게 대했다. 그 편지에는 제 손녀를 걱정하듯 샐리에 대한 걱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샐리는 진중해진 눈으로 쌓여 있는 선물과 해맑은 에이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에이미 님과 같은 관계는 만들지 못할지도 몰라.’

조세핀 부인의 말을 받아들여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인연을 맺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우정. 권력과 가까워질수록 그런 관계는 욕심일지 모른다. 그 점이 샐리를 조금 씁쓸하게 했다.

* * *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편지에서 말한 대로였다. 제국의 다섯 황녀 중에서 무려 두 명의 황녀가 편지를 보냈다.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이들의 편지였건만 샐리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조금도 끌리지 않네.’

고급스러운 종이에 쓰인 아름다운 글씨체는 우아하기 그지없다. 내용도 정중했다.

그럼에도 그 내용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편지가 너무나 형식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샐리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글에는 샐리라는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호기심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접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무려 황족들이 보내온 편지이니 그럴듯한 답장을 해야 했다. 그 골치 아픈 일을 하기 전에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데이지, 산책 준비를 하렴.”

“네!”

샐리의 말에 데이지가 밝게 목소리로 대답했다. 샐리는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했지만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은 데이지를 데리고 나갔다.

금세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에스테반 공작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자작나무 숲이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새하얀 자작나무가 가득한 이곳은 샐리가 종종 찾는 곳이었다.

자작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빛이 눈이 부셔 샐리는 양산을 펴들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향긋한 나무 향기가 운치를 자아냈다. 청량한 공기에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샐리는 깊게 숨을 들여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황족이라. 생각나는 분이 있긴 하지만…….’

샐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황녀를 한 명 떠올렸다. 찰랑이는 새카만 머리카락에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

그러나 그녀는 제국의 1황녀였다. 샐리에게 종종 호의를 보여 주곤 했지만 너무 귀한 여인이라 자신과 특별한 연을 맺는 것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 저기 테오도라 황녀 저하 아니신가요?”

“그래.”

샐리는 넋 놓고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놀란 눈으로 정신을 차렸다. 데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저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숲속 저편에는 세 마리의 말이 있었다. 그리고 세 마리의 말 중 가운데의 새까만 흑마를 탄 여인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이는 분명 테오도라였다. 장군의 말처럼 큰 말의 보폭은 컸고 이내 샐리와 데이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반갑군.”

테오도라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말에서 내렸다. 샐리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귀족 여성 중 승마를 배운 이는 많지만 이처럼 커다란 말을 타고 다니는 여인은 처음 보았다. 이처럼 승마용 바지를 입고 바깥을 당당히 돌아다니는 여인도.

그래서 샐리는 조금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황녀 저하께 인사드립니다.”

늦은 인사에 테오도라가 피식 웃었다.

“산책을 나온 건가?”

“그러하옵니다.”

“좋은 선택이야.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이곳의 산책길은 꽤 훌륭하지.”

테오도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황녀 저하께서도 산책을 오신 건가요?”

“그래.”

“말을 타고 산책을 나오시다니 놀랐어요.”

“승마는 꽤 즐거운 스포츠지. 위급한 순간에 요긴하기도 하고.”

테오도라는 새까만 말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같이 좀 걸을까?”

의외의 제안에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라와 함께 왔던 시종이 그녀의 말고삐를 넘겨받았다. 샐리와 테오도라는 함께 숲길을 걸었다.

데이지와 테오도라의 시종과 호위기사는 저 멀리서 거리를 두고 뒤따라 왔다.

“소식은 들었네. 아바마마의 초대장을 받았다지?”

“그렇습니다.”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그대가 황제 폐하의 초대를 받아 황실에 입성하게 되었어. 그러니 그대가 얼마나 욕심날까. 많은 이들이 그대에게 다가왔겠지. 그중에서는 황실의 사람도 있었을 테고.”

“어떻게 그리 잘 알고 계십니까?”

황실의 사람들이 접촉해 왔음을 아는 것에 샐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황족이 보내온 편지 말미에는 항상 이 편지의 내용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가 붙어 있었다. 그래서 샐리는 누구에게도 황족들이 보내온 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마치 그 편지를 자신이 보낸 듯이 술술 말을 이어 나갔다.

“황성이라는 곳은 초대장만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랍니다. 앞으로 내가 그대를 이끌어 주도록 할게요. 이런 글들로 그대를 유혹했겠지.”

그 말에 샐리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황족들이 자주 쓰는 레퍼토리였나 싶어 조금 웃음도 나왔다. 그 표정을 읽은 테오도라가 피식 웃었다.

“뻔해. 황실의 여인, 특히 황녀는 사교계에서 제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제 사람을 만들어야 하거든. 그러니 눈에 띄는 여인이 있으면 편지를 보내 제 사람으로 만들 작업을 시작하지.”

아직 결혼 전의 황녀는 그 위치 때문에 귀족 영애처럼 사교계 활동을 왕성히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교계의 유명한 여인들을 제 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썼다.

황녀가 귀족 여인과 특별한 사이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친분을 넘어서 아주 긴밀한 동맹을 맺는다는 의미였다. 그 관계는 서로를 지키는 아주 강한 힘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황녀 레이첼과 엘리제였다. 엘리제는 레이첼로부터 권력을 얻고, 레이첼은 엘리제로부터 선망과 사람을 얻었다.

“그래. 그중에 마음에 드는 이는 있나?”

테오도라의 말에 샐리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마치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랐냐는 듯 가벼운 말투 때문이다.

“황족을 상대로 어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뭐 어떤가. 내게만 말해 보게. 응?”

장난스러운 테오도라의 말에 샐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샐리도 테오도라의 말을 백번 이해했고, 황실의 여인과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쉬이 마음 가는 이가 없었다.

“조금 더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눈을 내리까는 샐리를 보며 테오도라의 눈이 빛났다.

“아직 마음에 차는 이가 없나 보군. 그래서 말인데…… 나는 어떤가?”

“네?”

샐리는 눈을 깜빡였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테오도라는 아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역시 그대가 탐이 난다는 말이야.”

예상치 못한 말해 샐리는 눈만 크게 뜬 채 굳었다. 차마 대답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테오도라가 부드러운 눈으로 말했다.

“바로 대답해 달라는 것은 아니야. 언제든 그대의 대답을 기다리도록 하지.”

* * *

샐리는 머리가 아팠다. 테오도라를 존경하지만 쉽게 결정하지 못할 문제였다.

황족에게 받은 제의를 다른 누군가에게 쉽게 상담할 수가 없어 결국 샐리는 카시스를 기다렸다.

카시스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샐리는 테오도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말을 들은 카시스가 말했다.

“놀랄 일도 아니군. 벌써 몇 번이나 직접 너를 찾아온 적이 있지 않았나. 그건 어지간한 호의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

“알스에서 친하게 지냈던 조세핀 부인께 이야기를 들어 저를 좋게 보신 것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건 또 다른 일인걸요.”

별다른 힘이 없는 다른 황녀들이야 샐리 정도로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황후의 유일한 친자이자 제국의 제1황녀였다.

그 신분에 어울리는 대단한 가문의 여인을 제 사람으로 만들어야 사교계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제국의 사교계는 넓어요. 뛰어난 가문에 총명함과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들이 많죠. 그런데 고작 평민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저라뇨.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황녀의 마음을 알 것 같은데.”

카시스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교계에 들어와 제대로 된 초대장도 받지 못했던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지.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카시스의 시선이 테이블에 가득 쌓여 있는 초대장을 향했다. 단순히 양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위세 높은 가문의 이름, 사교계에서 인기를 떨치고 있는 여인들의 이름도 있었다. 이 제국에 이만큼 초대장을 받는 여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에스테반의 애첩이라는 위치와 여러 사건이 뒤섞인 호기심이 그 절반인걸요.”

샐리의 차분한 말에 카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한 호기심은 넘어섰어. 고작 그런 관심이었다면 네가 황제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말이 돌았을 때 다들 인정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나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더군. 그만큼 네가 인정받았다는 거겠지.”

“그 황제 폐하와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서 지켜보고 계시는데 납득하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그럴듯한 대답이었지만 카시스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귀족들은 그리 순순한 존재가 아냐. 황제 폐하와 내가 책잡힐 일을 하기만 기다리는 자들이지. 그런 그들이 왜 그렇게 조용한 줄 아나? 네가 귀부인들에게 해 준 은밀한 상담 때문이야.”

“……!”

그 말에 샐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에겐 한 번도 누군가의 상담을 해 준다고 말한 적이 없었기에 그가 그 사실을 알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에이미를 상대로 시작했던 그 작고 은밀한 상담은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었다. 여전히 누구에게도 말 못할 부부 관계 같은 사사로운 주제들이 많았다.

“그 상담 덕분에 체면도 잊고 실실 웃고 다니는 이가 리오넬 후작만이 아니라는 소리지.”

카시스는 좀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늘 근엄한 얼굴을 했던 귀족 사내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 꼭 며칠 내에 카시스에게 다가와 ‘애첩에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는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던 것을 리오넬 후작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알았다. 그 후로도 종종 카시스는 그 인사를 받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카모라 쇼는 여인과 동행했던 사내들도 많이 보았지. 덕분에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는 자가 있을 정도야.”

카시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눈치 있는 이들은 그저 잘 보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지나갔지만 철없는 자들 중에는 카시스의 앞에서 샐리의 아름다움을 극찬하는 이들도 있었다.

흥분한 목소리로 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그들은 그녀에게 관심이 무척 지대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을 만큼.

정신을 놓고 샐리의 이야기를 하던 그들은 카시스의 싸늘한 눈빛을 보고는 이내 입을 꾹 다물곤 했다.

“사내들끼리 모여 있는 자리에서 여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흔한 일인걸요. 그러니 그리 자랑할 일도 아니에요.”

샐리도 귀족 사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종종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어차피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음험한 이야기가 대부분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여 너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단순히 여인의 외양에 대한 평가뿐만이 아니야. 자비스 사건으로 재판을 요청한 이후는 더더욱 그 평가가 바뀌었지.”

“그건 저도 조금 느끼고 있지만…….”

“그전에는 너를 단순히 아름다운 인형 같은 여인이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평민의 신분이라도 귀족을 상대로 법정까지 갈 만큼 당찬 여인이지. 게다가 그 뒤에는 에스테반 공작과 황제가 있으니 그 누가 너를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할까.”

카시스가 똑 부러진 목소리로 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겸손을 떠는 말 같은 건 하지 마. 사교계에 둔감한 귀족 사내들도 너를 신경 쓸 정도면 여인들의 세계에서는 더하겠지. 오만하기 그지없는 세계에서 거기까지 올라간 것은 너의 힘이야. 그런 너를 황녀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고마운 칭찬이었다.

샐리는 최근에 아부 섞인 말과 함께 칭찬을 넘치도록 듣고 있었다.

전생에도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내들에게 온갖 칭찬을 다 받아 보았다. 칭찬을 받는 것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일까.

무엇보다 저 말을 하는 사람이 카시스라는 사실이 너무나 어색했다. 샐리는 빨갛게 달아오른 볼이 민망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알았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니 무척 감사해요. 그러니 이제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

“무엇을?”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그는 샐리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조금도 모르는 것 같았다. 차분한 말투로 그토록 부끄러울 만큼 칭찬을 내뱉어 놓고 말이다.

‘하여간 이상한 데서 둔한 건 여전해.’

샐리는 열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카시스는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테오도라 황녀의 사람이 되고 싶은 건가?”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고민 중이에요.”

“레이첼 황녀를 제외하면 다른 황녀들은 위세가 미비해. 실상 테오도라 황녀만큼 든든한 뒷배가 돼 줄 이는 없을 거야.”

“그건 그렇긴 하지만…….”

사교계의 여인들은 드러내진 않았지만 지지하는 황녀들로 편이 갈라져 있었다.

독보적인 세를 자랑하는 것은 레이첼 황녀와 그녀를 모시는 엘리제였다. 황태후에게 가장 사랑받는 황녀와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힘은 강력했다.

‘그러나 내가 테오도라 황녀 저하의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일개 존재감 없는 황녀였다면 그렇게까지 파장이 크지 않을 테지만 테오도라는 달랐다.

레이첼 황녀와 대등한 힘을 가진 유일한 황녀. 그런 황녀의 편에 선다는 것은 제대로 그들과 힘겨루기를 한다는 선언과 같다.

“무엇보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어요.”

그녀가 아주 현명하며 시원한 인품을 가진 것은 알고 있다. 샐리가 존경하는 조세핀 부인으로부터 좋은 말도 많이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만 이야기한다면 샐리는 그녀에게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평범한 귀족가의 여인이었다면 분명 그녀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제1황녀이자 현 황후의 유일한 친딸이었다. 언젠간 그녀에게 들었던 것처럼 황실 내부에 아주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정이 무언지도 알지 못한 채 선뜻 그녀의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카시스는 그 말에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 대단한 황녀의 선택을 받았다면 대부분은 기쁨에 취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런 신중한 점이 좋았다.

“그래, 네 말대로 황족은 사사로운 감정만으로 친하게 지낼 존재는 아니지. 그 손을 한번 잡으면 쉽게 놓을 수도 없는 존재이기도 하고. 신중히 알아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을 거야.”

* * *

카시스의 말대로 샐리는 테오도라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가짜 편지’ 사건 이후로 테오도라는 여인들 사이에 꽤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아주 은밀한 이야기를 하듯 조심스럽게 그녀에 대한 칭찬을 하곤 했다. 마치 누군가가 듣기라도 할까 봐 조심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샐리가 테오도라에 대한 것을 묻자 여인들은 저마다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딴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테오도라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연하지요. 독을 품은 뱀이 테오도라 황녀를 휘어 감고 있으니까요. 그 독니에 물리는 것이 무서워 누구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을 테죠.”

샐리의 질문에 대해 대답해 준 이는 카모라였다. 샐리는 카모라가 신년회를 위해 만든 드레스를 입고 아뜰리에의 피팅룸에 서 있었다.

카모라는 샐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디자인을 찾아 드레스 위로 몇 번이나 장식을 바꿔 달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사벨라 황후와 샬롯 백작 부인의 이야기를 알고 있나요?”

“그 이야기는 알고 있어요.”

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알게 된 황실의 이야기 중 하나였다.

제국의 황후이자 황제의 아내인 이사벨라 황후는 몸이 너무 약했다. 그래서 그녀가 낳은 자식은 테오도라뿐이었다.

황제는 후손을 두기 위해 몇 명의 애인을 두었지만 자식 복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제국의 첫 황자를 낳은 것이 바로 자작가의 영애였던 샬롯이었다.

황제와 만난 첫날밤에 황자를 잉태한 그녀는 백작 부인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카모라가 리본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이사벨라 황후 폐하는 깊은 병환으로 성에서 나오지 않으신 지 오래세요. 사교계 활동조차 끊은 지 오래 되었지요. 그와 달리 샬롯 백작 부인은 아주 건강하고 활기가 넘치죠. 황후 폐하의 유일한 친딸인 테오도라 황녀를 집요하게 못 살게 굴 만큼요.”

뱀. 그것은 바로 샬롯 백작 부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샐리는 그 이야기가 잘 와 닿지 않았다.

정실이 되지 못한 여인의 투기는 있을 법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이 그 딸을 향할 필요가 있을까.

“테오도라 황녀는 황후 폐하의 유일한 친딸이세요. 고작 백작 부인이 그 귀한 분을 그토록 대놓고 괴롭힐 수 있나요?”

“샬롯 백작 부인도 보통은 아니니까요.”

카모라가 붉은 입술을 올리며 말했다.

“뭐,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게 가장 좋을 거예요. 샐리를 위해 이 카모라가 힘을 써 줄까요?”

카모라가 아주 앙큼한 일을 계획했다. 바로 샐리를 그녀의 조수로 변장시켜 샬롯 백작 부인의 거처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샐리는 장식이 거의 없는 밋밋한 옷을 입고 품이 넓은 머릿수건까지 머리 위로 둘렀다. 눈에 띄는 외모가 자연스럽게 가려져 아주 평범해졌다.

“음, 완벽해. 이 정도면 누구도 샐리인지 쉽게 모를 거예요.”

샐리를 변장시킨 카모라는 무척 신나 보였다.

두 사람은 황성에 도착했다. 샬롯 백작 부인은 비록 정실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공식 애인임과 황자의 어미인 것을 인정받아 황성에 거주하고 있었다.

‘와.’

샐리는 황성에 온 것이 처음이었다. 제국의 500년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황금빛 성은 아름다웠다. 연이어 세워져 있는 화려한 기둥을 지나 도착한 곳은 바로 샬롯 백작 부인의 방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샐리는 눈을 크게 떴다. 벽면이 모두 얇은 금으로 도금되어 있는 방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넓은 방 안은 진귀한 작품과 보석들이 수도 없이 장식되어 있었다. 장식이 너무 과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카모라가 샐리에게 속삭였다.

“제1황자를 낳은 덕분에 백작 부인의 자리에 오르셨지만 결혼 전에는 무너져 가는 자작가의 영애셨어요. 그 때문인지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고 자존심이 아주 세시죠. 허영심도 아주 대단하시답니다.”

조금 후 구두 소리와 함께 그녀가 나타났다. 샬롯 백작 부인이었다.

과연 황제를 유혹했을 만큼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유난히 길게 찢어진 눈매였다. 쌍꺼풀 없이 가늘게 찢어진 그 눈매는 무척이나 표독스러워 보였다.

허영심이 많다는 말을 증명하듯 몸에 걸린 드레스와 보석들도 화려했다.

무엇보다 샐리를 놀라게 한 것은 샬롯 백작 부인의 머리 중앙에 반짝이고 있는 화려한 머리핀이었다. 보석을 이어 만든 머리핀은 마치 황후가 쓰는 왕관처럼 보였다.

‘제1황자를 낳은 후부터 황후 폐하의 자리를 탐낸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토록 노골적일 줄이야.’

샐리는 그 작은 머리핀 하나로 그녀가 어떤 여인일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카모라와 함께 소파에 앉은 샬롯이 가는 입술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카모라. 매번 내 주문을 몇 번이나 거절해 놓고 잘도 내 앞에 얼굴을 드러냈군.”

“밀려 있는 주문이 많아 쉬이 부인의 드레스를 만들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올해 생신 연회 때 입으실 드레스를 만들어 드리기 위해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흥. 그리하지. 만약 이번에도 거절했다면 그대의 목을 졸라 버렸을지도 몰라.”

조금도 농담 같지 않은 싸늘한 말에 카모라는 작게 딸꾹질을 했다. 그러나 다행히 이 난폭한 성정의 여인은 자신의 팬이었다.

샬롯이 기분 좋아 할 만한 칭찬을 몇 마디 하자 대번 그녀의 눈빛이 풀어졌다.

“하여간 그대의 입담은 못 당하겠어.”

그 후 분위기는 꽤 부드러워졌다. 샬롯은 오랜만에 찾아온 카모라에게 여러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그대의 쇼에 섰던 모델 말이야. 이름이…….”

“샐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 여자,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라면서?”

갑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구석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샐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맞습니다.”

“요즘 꽤 인기가 좋은가 봐? 간간이 이름이 들려오더군.”

“사교계의 떠오르는 별이지요.”

“흐음. 생긴 것도 꽤 마음에 들어 그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까 잠깐 생각을 해 보았지.”

폭탄과도 같은 말에 샐리와 카모라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그만뒀어.”

“이유가 있으신가요?”

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모라가 물었다.

“그 계집이 벌인 재판 덕분에 테오도라가 주목을 받아 버렸잖아? 그 재판만 아니었어도 내 직접 초라하기 그지없는 환영회를 열어 주었을 것을.”

샬롯의 눈빛이 뱀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그 재판은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샬롯이 테오도라에 대한 말을 하고 있던 시녀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시녀는 샬롯이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테오도라가 재판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줄줄 외우며 눈을 반짝였다. 테오도라에 관한 칭찬도 아낌없이 내뱉었다.

지난 3년간 테오도라가 유학을 가 있는 동안 잠잠했기에 샬롯의 성정을 잊은 모양이었다.

샬롯은 시녀를 매섭게 채찍질했다. 서럽게 울며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 때까지.

그 후로 이 황성에서 감히 테오도라의 이름을 입에 담는 자는 없었다. 적어도 샬롯의 앞에서는 그랬다.

“뭐, 테오도라가 멋대로 나서는 것도 이제는 끝이야. 귀부인들에게도 따끔히 당부했거든. 제정신이 박힌 이들이라면 감히 이 제1황자의 어미의 말을 어기고 테오도라와 어울릴 생각을 하지 않을 테지. 제가 나서고 싶어도 나설 무대가 없을걸.”

샬롯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쿡쿡 웃었다. 샐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귀국한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태오도라의 모습은 연회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샐리는 단순히 그녀가 연회를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저토록 치졸한 수법을 썼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황녀 저하를 초대하는 곳이 그렇게 적었구나.’

샬롯이 저토록 대놓고 미워하니 어느 누가 쉽게 그녀를 초대할 수 있을까.

샬롯은 비록 이름뿐인 백작 작위에 볼품없는 가문을 가졌지만 제1황자의 어미였다. 가장 황제의 자리에 가까운 이의 친모.

그런 그녀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후에 어떤 불길이 튈지 알 수 없으니 눈치를 볼 만했다.

“이번 신년회가 좀 걸리긴 하지만 그 자리만큼은 내가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석하겠지.”

샬롯은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찻잔을 쳤다. 그러고는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연회 전날 황녀의 차에 독을 타 버릴까?”

스산한 목소리에 카모라와 샐리의 표정이 변했다. 그 얼굴을 본 샬롯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내 어찌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런 짓을 하겠어.”

그녀는 정말이지 재미있다는 듯 웃었지만 샐리는 조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샐리는 치맛자락 위로 두 손을 파르르 떨었다.

친하지도 않은 이 앞에서 저런 잔혹한 말을 할 정도면 평소에는 얼마나 더할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마님, 제1황자 저하께서 납시셨습니다.”

“존이?!”

제1황자라는 말에 샬롯이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서 들어오라고 해.”

기쁨이 서린 목소리와 함께 제1황자인 존이 방 안에 들어왔다.

이제 열다섯 살 정도 되었을까, 키도 작고 비쩍 마른 그는 아직 덜 자란 소년의 모습이었다.

황제를 빼닮은 테오도라와 달리 어미를 닮아 뱀처럼 날카로운 눈매만이 희번덕 빛났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인지 금색 자수가 박힌 화려한 옷이 백작 부인의 드레스처럼 호화스러웠다. 그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두 팔을 벌린 샬롯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그래, 존. 나의 아들. 이 제국을 이을 귀한 황자님.”

샬롯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존을 품에 안았다.

“오늘은 카일로 선생의 수업이 있지 않았니. 어찌 벌써 어미의 품에 왔느냐.”

“황당하기 그지없는 수업을 한다기에 거절하고 왔습니다. 저보고 수도의 빈민가에 사는 평민들을 보러 가자고 하더군요.”

“뭐야?! 제1황자에게 감히 그런 제안을 했단 말이냐. 귀한 몸이 더러운 곳에 가서 병이라도 옮겨 오면 어쩌려고.”

“그분은 가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울상을 짓는 존을 향해 샬롯이 말했다.

“쯧. 폐하께서 직접 붙여 주신 선생이 아니었다면 진작 매질을 해 쫓아냈을 텐데.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늙은이야. 그래서 선생은 어디에 있니?”

황성에 아직 남아 있다면 불러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샬롯이 물었다. 존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그게…… 테오도라 누님과 함께 빈민가로 가 버렸습니다.”

“뭐?”

테오도라라는 이름에 샬롯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어미의 눈빛에 존이 황급히 대답했다.

“누님께서 아바마마께 허락을 맡았다며 선생의 수업을 함께 듣기 위해 들어왔어요. 수업 내내 둘이 죽이 맞아 떠들다가 함께 황성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하여간 그 애는 나서지 않는 곳이 없구나. 황족이 체면도 잊고 빈민가를 가다니.”

“요즘 누님이 이것저것 끼어들어 잔소리를 하시니 저만 괴롭습니다. 계속 알스에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존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공부하는 것은 지독히 싫어했으나 장난치는 것은 누구보다 좋아했다. 황성의 수많은 이들에게 쉴 새 없이 짓궂은 장난을 쳤다.

성정이 불같은 어미까지 뒤에 업은 제1황자였으니 감히 누가 그를 혼낼 수 있을까.

그러나 네 살 많은 누이가 돌아오자마자 자유로운 그의 황성 생활이 달라졌다. 사사건건 그를 막는 통에 아주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샬롯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게 말이다. 괜히 돌아와 사람을 힘들게 하는구나. 조금만 참거라. 내 하루라도 빨리 황녀를 황성에서 치워 버릴 테니.”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어머니.”

어리광 피우듯 존이 말했다. 샬롯은 그 모습이 귀여운지 다 큰 아들의 뺨을 어루만졌다. 샐리는 기가 찬 얼굴로 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자들이 제국의 백작 부인이며 제1황자라니.’

짧은 대화만으로 제1황자가 얼마나 미성숙하고 현명하지 못한지 한눈에 보였다.

그 친모도 마찬가지였다. 백작 부인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녀는 품위라고는 조금도 없이 오만하기만 했다.

그제야 카모라가 왜 자신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지 이해가 갔다. 상식을 넘어선 이들이었다. 아무리 카모라가 말로 설명해 보았자 샐리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 후에야 카모라와 샐리는 샬롯의 방을 나올 수 있었다. 방에서 한참 멀어진 후에야 샐리가 넌지시 말했다.

“카모라 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무엇을요?”

혹시 왜 저런 여자의 드레스를 만들어 주는 거냐고 물어보면 카모라도 할 말이 많았다.

샬롯 백작 부인이 카모라에게 드레스를 부탁한 것이 벌써 열세 번째라는 것과 이번마저 거절했다간 진짜로 자객을 보낼 것 같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수락했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샐리가 궁금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테오도라 황녀 저하에 대한 적의를 저토록 마음대로 드러낼 수 있는 거죠? 고귀한 제국의 제1황녀 저하를 대놓고 무시하다니요.”

다음 황제에 가장 가까운 제1황자와 그의 어미라고 하지만 저것은 너무 심했다. 평민들 사이에서도 저만큼이나 선명한 악의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카모라가 아주 쉬운 문제의 정답처럼 간단히 말했다.

“그야 황성에는 황녀 저하의 편이 돼 주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까요.”

“어째서요?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두 분이 모두 계시잖아요.”

“황제 폐하는 여인 한 명의 투기를 신경 쓸 만큼 섬세한 분이 아니시고, 황후 폐하는 병환이 깊어 제 몸을 건사하기도 힘들어 하세요. 제아무리 제국의 가장 고귀한 핏줄이라도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를 누가 무서워할까요.”

“…….”

샐리는 그 말에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그토록 밝은 테오도라에게 이런 아픔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샐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모라와 걸어온 복도는 아주 길고 넓었다. 천장은 까마득하게 넓고, 기둥은 수없이 많았다.

‘집이라고 하기에 이곳은 너무 크구나.’

안락함을 바랄 수 없을 만큼.

황금으로 장식된 벽은 아름답지만 벽난로의 따스함은 조금도 없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부모의 보호 없이 자란 어린 소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마음이 아파 왔다.

* * *

샐리가 다시 황성을 찾은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테오도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모습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얼굴을 들고 들어갔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테오도라의 방에 들어섰을 땐 정말 놀랐다. 일전에 갔던 샬롯의 방과는 너무도 달랐다.

벽면은 황금이 아닌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코를 찌르는 독한 향수 냄새가 아니라 종이 냄새가 느껴졌다.

햇볕이 드는 커다란 창문 아래에는 커다란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곳은 내 서재야. 나는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아주 좋아하지.”

샐리의 맞은편에 앉은 테오도라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황성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범한 일상용 드레스에 왕관도 쓰지 않았지만 테오도라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래, 그대가 내린 답은 뭐지?”

“답하기 전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 말에 테오도라는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말하게.”

“일전에 신분을 숨기고 황성에 들어와 샬롯 백작 부인과 제1황자 저하를 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테오도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테오도라는 이내 못 말린다는 듯 낮게 웃었다.

“출입이 까다로운 황성에서 그만한 일을 해내다니 대단한데. 그래서 뭔가 얻은 것이 있나?”

“황성에서의 황녀 저하의 위치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좋지 않은 일이군.”

테오도라가 난처한 듯 말했다. 샐리가 점잖게 표현하긴 했지만 샬롯 백작 부인과 존이다.

두 사람은 분명 엄청난 말들을 쏟아 냈음이 틀림이 없었다. 늘 그렇듯이 말이다.

샬롯 백작 부인의 적의를 눈앞에서 본 이들은 겁을 먹거나 질려 도망가 버렸다.

황녀 한 명을 위해 그 포악한 여인의 분노를 받아 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테오도라는 샐리의 표정을 보고 생각했다. 그 얼굴은 겁을 먹은 얼굴도, 질린 얼굴도 아니었다.

“나를 동정하게 되었나?”

“……송구합니다.”

샐리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샬롯 백작 부인을 보고 온 그날 샐리는 잠이 들지 못했다. 그녀의 말들이 미웠고 한편으로는 테오도라가 없는 곳에서 그런 말들을 듣고 온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가장 싫었던 것은 테오도라에게 알량한 동정심이 드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상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뿐이었다. 그것이 너무 죄송스러웠다.

그래서 샐리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감히 이런 감정을 품은 자신을 혼낸다면 기꺼이 그 감정을 받아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분노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벌이라도 내려 달라는 태도로군.”

“…….”

“나는 그대가 생각한 것처럼 약하지 않아. 감성적이지도 않지. 그대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뻤을 정도야. 동정은 별다른 노력 없이 사람을 얻기 좋은 수단이니까. 여기서 조금만 처연한 얼굴을 해도 그대는 나의 편이 되어 줄 테지?”

“……!”

화내거나 슬퍼할 줄 알았던 테오도라의 목소리는 청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러진 않겠어. 그대가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내보인 만큼 나도 그대에게 솔직해지고 싶으니까. 고개를 들게. 나는 조금도 화나지 않았어.”

그 말에 샐리는 조심히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당당하게 어깨를 편 테오도라는 조금도 상처받지 않아 보였다. 미소 어린 얼굴엔 조금의 그늘도 없었다.

“샐리, 샬롯 백작 부인이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 줄 아나?”

“황후 폐하를 시기하여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하나지.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나를 짓밟지 못해 안달이 난 진짜 이유는 바로 내가 프란츠 황실의 피를 온전히 이어받은 순혈이기 때문이야.”

현 황제인 레오나르도에게는 수많은 여자가 있었지만 그들 중 프란츠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건 황후뿐이었다.

그리고 황후가 낳은 자식은 오로지 테오도라였으니, 황실의 자손 중 제국의 순혈을 잇는 것은 오직 테오도라뿐이었다.

“제국에서 황실의 피는 고귀하게 여겨지지. 만약 내가 황족과 결혼해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제1황자를 제치고 황태자가 될 가능성이 크지. 그녀는 그걸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샬롯은 첫 황자를 낳아 위세 등등했지만 제1황자의 위치가 아주 견고한 것은 아니었다.

제1황자는 황실의 피를 온전히 잇지 못하였고, 친모는 정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직 정식으로 황태자 책봉도 받지 못한 채였다.

이런 상태에서 테오도라가 결혼해 아들을 낳는다면 샬롯으로서는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셈이다.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저 조절 못해 튀어나오는 감정인 줄 알았던 적의에 그러한 야망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그래서 샐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굳은 얼굴로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라는 찻잔을 들이켜 한 모금 목을 축였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녀의 속에만 쌓아 둔 아주 은밀한 이야기였다.

“억울한 얘기지. 내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저런 추잡한 견제 따윈 받을 리 없이 적합한 황태자가 되었을 거야. 그 생각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많이 힘들었지. 늘 내가 사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원망스러웠어.”

누구보다 빨리 글을 깨우치고 처음 보는 책이라도 읽기만 하면 단번에 이해했다. 사내들도 놀랄 만큼 말을 잘 탔고, 누구보다 담대했다.

‘사내로 태어났으면…….’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은 여자였다. 제국의 아름다운 황녀, 그 이상을 넘볼 수 없는. 그 사실이 테오도라는 너무나 분했다.

“그러다 알스로 유학을 가게 됐어. 내 차에 독을 탄 사건이 일어났거든. 다행히 그 차를 마시진 않았지만 충격적인 사건이었지.”

그 스산한 단어에 샐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예상가는 이는 있지.”

독을 넣었던 시녀는 자결해서 진범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런 악독한 짓을 할 이는 황실에 한 명뿐이었다.

샬롯 백작 부인.

그러나 그녀는 황태자가 될지도 모르는 제1황자의 친모였다. 테오도라가 차를 마신 것도 아니라 수사를 제대로 진행할 명분도 없었다.

결국 병약한 황후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린 딸을 먼 타국으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제국의 황녀로서 이례적인 장기 유학이었다.

“알스로 가서도 내내 분노했지.”

너무 분해 그토록 좋아하던 책을 모두 찢어 버렸다. 열심히 읽어 보았자 인정받지도 못할 지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많은 것이 보였지. 알스의 아카데미에는 황족과 귀족, 평민이 뒤섞여 있었어. 그리고 아카데미의 수석은 늘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지. 나는 죽어라 노력해도 그를 이길 수 없었어.”

테오도라는 그를 질투했다. 그러나 그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는 그 마음을 접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비로소 알게 됐지.”

원하는 책이 있으면 시종이 구해다 주었고, 배우고 싶은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건강한 몸과 용기도 가지고 있었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진 못했지만 두 분은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을 주었다.

누구보다 진한 프란츠 황실의 피.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테오도라는 진정으로 꿈을 꿀 수 있었다.

“여자니까 안 된다고 스스로를 옭아맸던 것은 나 자신이었던 거야. 제국의 법 어디에도 여인이 황제가 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

테오도라가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샐리, 나는 황제가 될 거야.”

샐리는 넋 놓고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우아하게 누워 있는 흑표범 같다고 생각했던 테오도라가 지금만큼은 사냥감을 눈앞에 둔 짐승 같았다. 황금빛 눈동자에는 숨기지 않은 야망이 가득했다.

500년이란 긴 제국의 역사 속에서 여인이 황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해괴한 소리를 늘어놓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테오도라의 저 눈빛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멀고, 내게는 인재가 필요해.”

테오도라가 샐리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은 밑바닥부터 올라와 제국의 사교계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에스테반의 애첩이라는 이유만으로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계급이 명확하게 갈라진 제국에서 샐리는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그대는 나와 닮은 점이 많지. 가지지 못한 것에 매달리는 대신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하는 점이 말이야. 우리는 분명 잘 맞을 거야.”

야망을 지운 테오도라는 천진한 얼굴로 웃었다. 마치 친하게 지내자고 말하는 아이 같았다.

그러나 샐리의 앞에 있는 이는 그저 아름다운 황녀가 아니었다. 황좌의 길을 걸어가길 천명한 여인이었다. 샐리는 아찔한 듯 눈을 깜빡였다.

‘단순히 힘이 되어 줄 사교계의 뒷배로만 생각한 내게는 너무 버거운 존재야.’

자칫 잘못했다가는 엘리제만이 아니라 샬롯 백작 부인의 눈에도 찍혀 복잡한 정치 싸움에 휘말려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샐리는 그녀에게 끌렸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야수처럼 보이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사적인 감정으로 이분과 손을 잡지 않으려고 고민했으면서.’

그러나 그때의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감정이 먼저라면 어때.

이처럼 멋진 여인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샐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테오도라는 아주 환하게 미소 지었다.

* * *

새해의 첫날이 되었다. 황성에서는 제국의 제일 큰 연회인 신년회가 열렸다.

황제의 이름으로 열리는 연회니 만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황금 사자가 장식된 우아한 홀에는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두 모였다.

귀족들이 연회장 입구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큰 목소리로 그들의 입장을 알렸다.

“라이언 리오넬 후작과 마가렛 리오넬 후작 부인께서 입장하십니다!”

신년회에는 초대받은 가문의 가주와 그 아내가 함께 동행하는 것이 그 관례였다.

그래서 황성 앞에 에스테반 공작가의 문양이 찍힌 마차가 등장하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은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미남자가 등장했다. 카시스 에스테반이었다. 우아한 동작으로 마차에서 내린 그는 손을 내밀었다.

“누구와 함께 오신 거죠?”

“당연히 그 애첩이겠죠. 총애가 대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결혼을 한 3년 동안 카시스가 엘리제와 함께 등장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런 공식 석상에서도 각각 마차를 타고 올 정도로 부부의 사이는 냉랭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이 순간 등장하는 여인은 샐리일 것이라 생각했다. 에스테반의 애첩이며 황제의 초대장을 받아 더욱 유명해진 그녀 말이다.

그러나 화사한 금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등장한 여인은 엘리제였다. 그녀가 유행시킨 연한 하늘빛의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세상에. 엘리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시잖아요?”

“웬일로 두 분이 같이 온 거죠?”

예상했던 이가 아니라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수군거렸다. 엘리제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저것 봐요. 다들 놀라고 있어요. 당신은 평소 내게 조금도 다가오지 않았으니까요.”

“…….”

“나와 함께 마차를 타기로 한 것은 샐리의 생각이죠?”

카시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엘리제도 딱히 대답을 들을 생각은 아니었기에 말없이 그의 보폭에 맞추어 걸었다.

자신을 너무 미워하여 그저 튕겨 내는 것밖에 모르는 남자가 이런 교묘한 행동을 할 리 없다. 모든 것은 그 영악한 샐리의 계략인 것이 틀림없었다.

“두 분이 이렇게 함께하신 모습을 보니 정말로 보기가 좋네요.”

공작 부부를 향해 다가온 이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엘리제는 청아한 미소로 화답했지만 그 속은 짜증이 치솟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엘리제가 혼자 등장했다면, 많은 이들은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름다운 공작 부인. 아름답고 가련한 존재는 쉽게 많은 이들의 시선을 빼앗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오늘 엘리제의 등장은 에스테반의 동행으로 인해 소란스러움 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그때 레이첼이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두 분이 같이 오신 건가요? 세상에.”

레이첼은 나란히 있는 두 사람을 보더니 한껏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무색하게 카시스는 짧은 인사만 한 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제를 떠나려고 하는 것을 눈치챈 레이첼이 카시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부인을 혼자 두고 어딜 가시려고요?”

“황녀 저하, 남편과 아내가 언제든 붙어 있어야 한다는 법률은 없을 텐데요. 그리고 허락 없이 상대의 손을 잡는 건 매우 무례한 행위입니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남색 눈동자에 레이첼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따금 정제되지 않고 마주치는 그의 분노는 무척 무서웠다. 레이첼은 여린 어깨를 파르르 떨며 카시스를 잡은 손을 떼었다.

카시스는 그녀를 다시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저쪽으로 멀어져 버렸다. 레이첼이 잔뜩 속상한 얼굴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가 좀 달라졌나 했는데 아니었군요.”

엘리제는 속으로 조소했다.

‘멍청하게. 그것을 이제 알았니?’

이 자리에 에스테반 공작 부부의 사이가 정말 좋아졌다고 착각하는 이는 레이첼밖에 없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레이첼은 너무나 단순했다.

황태후는 그것이 귀여운 모양인지 모르겠지만 엘리제는 그 모습에 종종 짜증이 났다. 그 귓가에 머리를 좀 굴려 보라고 속삭이고 싶었다.

“그이가 절 싫어하는 감정이 쉽게 바뀔 리 없지요. 저는 괜찮아요.”

물론 엘리제는 속마음을 레이첼에게 표 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조금 슬픈 미소를 띠는 것만으로 레이첼은 엘리제가 가련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는 신경 쓰지 말아요. 어차피 저런 남자인걸요. 저쪽에 엘리제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함께 가요.”

레이첼은 엘리제를 위로하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레이첼의 손에 이끌려간 곳은 연회의 가장 중심에 있는 한 테이블이었다.

그곳에는 미리 도착한 부인들이 앉아 있었다. 레이첼과 엘리제와 친분이 두터운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엘리제가 도착하자 우아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마르시아 후작 부인, 렉스터 후작 부인. 하나같이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여인이었다.

아무리 엘리제가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라고 하나 과하게 극진한 대접이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레이첼 때문이었다.

“엘리제, 여기에 앉아요.”

레이첼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제는 레이첼의 옆에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을 날리며 살포시 앉았다.

황태후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레이첼 황녀가 이토록 싸고도니 감히 엘리제를 무시하는 이가 있을 수 있을까.

“에스테반 공작 부인께서는 오늘도 정말이지 아름답네요.”

“눈이 부실 정도예요. 오늘의 신년회에서 어느 누가 부인만큼 빛날 수 있을까요.”

여인들은 엘리제를 향해 꿀을 잔뜩 바른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수줍은 미소로 그녀들의 칭찬을 받았다. 아까의 불쾌감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녀는 정말이지 이 자리가 좋았다. 가장 화려한 황실 연회의 중앙 테이블, 가장 드높은 귀족들이 모인 곳의 중심에 선 자신이라니. 이 얼마나 완벽한 모습인가.

제아무리 에스테반의 애첩이라고 한들, 사교계에서 조금 인기를 얻었다 한들, 황제 폐하의 초대장을 받았다 한들 샐리는 고작 미천한 출신의 계집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조금 반반한 얼굴밖에는 없는.

반면 자신은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며 그 옆에는 황실의 권위를 몸에 두른 레이첼 황녀도 있었다. 대단한 가문의 여인들이 튼튼한 성벽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디 한번 와 보렴. 네 위치를 제대로 알려 줄 테니.’

제대로 느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로 엘리제 에스테반에게는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카시스는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몇 번이나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올 셈이지?’

카시스는 당연히 오늘 샐리와 함께 이 자리에 오려고 했다. 수많은 귀족들이 참석하는 행사에 함께 입장하는 것보다 두 사람의 사이를 공고히 하는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함께 입장하는 것은 너무 튀어요. 가뜩이나 신분이 높은 분들이 계시는 자리인걸요. 공작 부인을 제치고 제가 저하의 옆에 선 모습은 곱게 보이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이번 연회장에는 혼자 조용히 들어가도록 할게요.

다른 연회라면 모를까 신년회였다. 완벽하게 차려입은 화려한 이들이 가득한 곳. 그곳에 혼자 입장하는 모습이 얼마나 초라할지 모르는 걸까.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도 그 초라함이 싫어 파트너를 구해 입장하는 곳이었건만 그녀는 아주 태연했다.

그런 표정을 지을 때의 그녀는 영특하게 생각을 정리한 후였다. 그래서 카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에 따랐다.

엘리제와 함께 연회장에 입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고작 그런 것이 그가 샐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이제 곧 시작인데.’

황제가 초대한 자리에 지각하는 것은 대단한 무례였다. 혹시나 늦었다간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른다.

다시 한번 초조한 눈빛으로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찾았던 샐리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은빛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아주 신비한 느낌이 났다.

한 발짝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은실로 수놓아진 드레스는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알이 큰 보석 하나 몸에 달지 않았지만 그녀의 온몸을 감싼 은빛이 어느 보석보다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

카시스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이는 그만이 아니었다.

샐리를 본 많은 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 이 연회장에는 수없이 많은 미인이 있었다. 그녀보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이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다른 이에게 시선을 줄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아름다움은 특별했다.

‘카모라 님의 드레스는 역시 대단해.’

샐리도 자신을 보는 이들의 눈빛에 서린 감정을 눈치 챘다. 오늘의 그녀는 스스로 보아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가 가진 최상의 아름다움을 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카모라 덕분이었다.

“저하.”

샐리는 저쪽에서 카시스를 발견하고는 그를 불렀다. 그는 시끄러운 주변에 파묻힌 여린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카시스는 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내 그는 샐리와 마주 보았다. 샐리가 민망한 듯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카모라 님께서 마지막까지 어떤 구두가 좋을지 고민하시는 바람에 늦어 버렸지 뭐예요. 아슬아슬하게 제시간에 도착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샐리는 치맛자락 아래로 구두를 살짝 내밀었다. 다이아몬드가 섬세하게 세공된 구두였다.

그녀가 곧게 다리를 펴니 구두는 얄밉게도 치마 속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보이지도 않지만 말이에요.”

“그렇군.”

그 말에 카시스는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주변에 서서 두 사람을 보던 이들이 헉 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볼에 홍조가 오른 이도 있었다.

많은 이들 앞에서 스킨십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사랑을 속삭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말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보여 준 그의 표정은 뭇 여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때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제국의 23대 황제, 레오나르도 프란츠 3세 폐하가 납시옵니다!”

황제의 등장에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샐리와 카시스도 대화를 멈추고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건장한 체격의 황제는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연회장에 마련된 상석으로 향했다. 황제가 의자에 앉자 귀족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들 이렇게 연회에 참가해 주어서 고맙군. 모두들 알다시피 황후는 병환이 깊어 참석하지 못했네. 모쪼록 이해 바라네.”

황제의 말에 귀족들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병을 앓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런 공식적인 행사에도 나오지 못할 만큼 몸이 약해 황후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한두 해가 아니었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황후가 중요한 자리를 비운 것을 무척 마음 아파하더군. 하여 자신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 줄 이를 보내왔네.”

그 말에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아무리 병약해졌다 한들 고귀한 황후의 자리에 누가 앉는단 말인가.

설마 샬롯 백작 부인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냐고 놀라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등장한 이는 바로 테오도라 황녀였다.

“제국의 제1황녀, 테오도라 프란츠입니다. 오랜 시간 제국을 나가 있던 터라 이렇게 정식 연회에서 많은 이들을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오늘은 어마마마를 대신하여 귀한 손님들을 맞으려 합니다. 불편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아주 부드러운 눈길로 귀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마친 테오도라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황제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 많은 이들의 감탄이 새어 나왔다. 나란히 앉은 두 부녀의 모습은 똑 닮아 있었다.

프란츠 황실의 피를 증명하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 남다른 기운과 기품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황제는 그 모습을 흡족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제국을 위해 힘써 주는 그대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부디 즐겁게 즐겨 주길 바라네.”

그와 동시에 아름다운 음악이 연회장 가득 흐르기 시작했다. 첫 춤은 황제가 추는 것이 관례였지만 황제는 황후의 병환을 이유로 항상 그 부분을 생략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서 테오도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선율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똑 닮은 훤칠한 외모의 부녀가 춤을 추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3년이나 떨어진 시간이 무색할 만큼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그러게요. 정말 흐뭇한 광경이에요.”

귀족들 따스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실상 춤을 추는 황제와 테오도라가 주고받은 말을 달랐다. 춤추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황제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황후가 부탁하지 않았다면 절대 추지 않았을 거다.”

“알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테오도라가 정중히 대답했다. 애초에 황제는 딸을 위해 사사로운 행동을 해 줄 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병약한 황후의 작은 부탁을 거절할 정도로 못된 이는 아니었다.

오늘은 테오도라의 정식 데뷔 무대였다. 오늘 보여 준 황제의 후광은 그녀에게 좋은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그것으로 테오도라는 원하는 것을 얻은 셈이었다.

두 사람의 춤이 끝난 후 황제는 사냥감을 향해 날아가는 매처럼 정확하게 카시스를 찾아왔다. 그는 카시스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왔군.”

카시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샐리는 허리를 숙여 최고의 예를 취했다.

“일어나거라.”

황제의 말에 샐리는 몸을 일으켰다. 황제의 진한 황금빛 눈에 샐리가 비쳤다. 표 내지 않았지만 그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것 참.’

본디 그는 여성의 외모에 크게 관심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갈 만큼 여인의 외모는 범상치 않았다.

새빨간 붉은 머리카락과 고양이 같은 금빛 눈동자.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한 미인이었다.

‘엘리제와는 전혀 다르군. 이런 여인이 취향이었나.’

샐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이 길어지자 조금 긴장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카시스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 보십시오.”

“허어?”

“닳습니다.”

그 순간 샐리와 황제,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정작 그 말을 한 카시스도 놀란 모양인지 그도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저 먼 곳으로 시선을 주고 눈을 내리깔았다.

입도 다물지 못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본 황제는 이내 큭, 하고 웃어 버렸다.

‘아아. 이놈의 체면! 이 몸이 황제만 아니었으면 황성이 떠나가라 웃었을 텐데.’

그러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황제는 겨우 웃음을 참고는 샐리를 향해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신년회는 처음 와 보는 것이겠구나.”

“네. 황제 폐하께서 보내 주신 초대장 덕분에 귀한 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성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황제는 씨익 웃었다.

“그렇게 고마우면 앞으로 자주 보면 좋겠군.”

그 말에 샐리가 당황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설마 황제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일까. 유혹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카시스는 그런 황제를 보며 이마를 감쌌다. 황제의 병이 도진 것이 틀림이 없었다.

황제는 자신과 관계된 사람을 발견하면 저런 식으로 귀찮게 들러붙곤 했다.

평소라면 저러든 말든 무시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카시스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기다리는 분들이 많으니 함께 가시죠.”

“어허? 같이 가 줄 건가.”

황제가 웬일이냐는 듯 눈을 빛냈다. 카시스가 제 입으로 자신에게 어딘가를 가자고 하는 건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기쁜 내색을 숨기지 못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가 보도록 하지.”

황제가 몸을 움직이자 샐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황제를 따라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은 카시스가 샐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샐리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는 저의 시간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황족과 귀족들이 모인 황성의 연회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오만한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카시스는 그 모습을 눈에 담고는 설핏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황제와 카시스가 사라지자마자 샐리의 곁으로 수많은 여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동안 샐리와 친분을 쌓았던 여인들이었다.

사교계의 큰 어른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부터 리오넬 후작 부인, 로즈마리 백작 부인, 에이미 자작 영애.

그녀들은 마치 어린 영애들처럼 환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골든리아가 샐리를 향해 말했다.

“막상 너를 황성에서 보니 아주 기분이 이상하구나.”

다른 이들에게는 깐깐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손녀를 대하듯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 말에 샐리가 소녀처럼 웃었다.

“저도 그렇답니다. 어색한 저와는 달리 공작 부인께서는 역시 이곳이 잘 어울리세요. 평소보다 더더욱 아름다우신 걸 보니 말이에요.”

그 칭찬에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무뚝뚝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하여간 네 칭찬은 못 당하겠어.”

그 말에 샐리가 쿡쿡 웃었다.

“오늘 입은 드레스, 카모라 님의 작품이죠? 정말 너무 너무 아름다워요!”

황홀함이 가득한 로즈마리의 눈빛에 샐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로즈마리는 카모라의 엄청난 팬이었다.

“맞아요. 카모라 님께서 선물해 주셨답니다. 혹시 드레스를 입어 보고 싶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빌려 드릴게요.”

“네?! 이 귀한 드레스를요?!”

로즈마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물었다. 샐리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옷을 사랑하는 동료잖아요.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죠.”

그 말에 로즈마리는 감동한 얼굴로 샐리를 껴안았다.

한편 중앙 홀에 앉아 있던 여인들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흘겼다. 엘리제와 레이첼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정말이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군요.”

“하찮은 평민 계집이 껴 있으니 다들 품위도 잊어버린 모양이에요.”

물론 그녀들이 그렇게 사납게 이야기하는 것은 함께 앉아 있는 엘리제를 위해서였다.

거슬리는 애첩이 저렇게까지 세력을 키웠으니 그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갈까. 그러나 엘리제는 그들을 향해 우아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내가 우세해.’

제법 세를 모으긴 했다만 샐리의 곁에 있는 여인들은 가문이 형편 없는 이들도 많았다. 뛰어난 가문의 여인들만 골라 넣은 자신의 세력과는 차이가 났다.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레이첼이 있었다. 황성에 연이 닿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그 차이는 컸다.

제 아무리 귀족 여인들과 친해졌다고 발버둥 쳐 보았자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줄곧 평온했던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내내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던 테오도라가 샐리의 곁으로 다가갔기 때문이다.

샐리의 곁에 있던 여인들은 놀란 얼굴로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라는 평범한 귀족이 아니었다.

황후의 친자이자 프란츠 황실의 피를 온전히 이어받은 제국의 제1황녀였다.

오늘만 해도 무려 황후를 대신해 손님들을 맞은 그녀였다. 그런 여인이 다른 이도 아닌 평민인 샐리에게 다가오다니.

“반갑군, 샐리.”

“테오도라 황녀 저하를 뵈옵니다.”

그러나 너무도 다른 위치의 두 사람은 아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테오도라가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준비된 와인이 아주 맛이 있더군. 한잔할 텐가.”

“영광이옵니다.”

샐리의 말에 테오도라는 손을 들었다. 와인 잔을 들고 연회장을 돌아다니던 시종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빈 잔에 와인을 따르려던 시종을 막고 테오도라는 직접 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우아한 손놀림으로 와인을 채운 테오도라는 그 잔을 샐리에게 건네주었다. 샐리는 고개를 숙여 그 잔을 받아 마셨다.

“맛있습니다, 아주.”

샐리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여인들은 모두 경악했다. 너무 놀라 입을 막는 이도 있었다.

신분이 높은 이가 직접 와인을 따라 준다는 것은 아끼는 신하에 대한 애정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잔을 마신다는 것은 주군께 기꺼이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다.

연회장에 있는 여인들은 모두 귀족들이었기에 그 의미를 알아챘다.

‘샐리가 테오도라 황녀의 사람이 되었다!’

샐리와 테오도라는 자신들의 관계를 공고한 것이다.

이 연회에서 가장 밑바닥 출신인 샐리와 가장 고귀한 출신의 테오도라가 손을 잡다니. 이 신년회의 가장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저 멀리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제 에스테반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샐리와 테오도라라니.’

각각 보면 괜찮았다. 제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 한들 테오도라는 사교계에 세력이 없었고, 제아무리 귀부인들과 친하게 지낸들 샐리는 제대로 된 힘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손을 잡는다? 전혀 즐겁지 않은 이야기였다.

연회장에 처음 왔을 때의 즐거운 감정 같은 건 이미 사라진 후였다. 엘리제는 스산한 눈빛을 겨우 감추고는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분명 누군가 있을 것이다. 저 끔찍한 조합을 자신만큼 괘씸해하는 자가. 잠시 후 엘리제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샬롯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테오도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칼부림이라도 할 듯한 흉흉한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엘리제의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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