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28)

8. 가짜 편지

“샐리 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어쩜 이렇게 보기가 힘들어요.”

샐리가 로렌스가의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 에이미는 반가운 얼굴로 샐리에게 달려왔다.

귀족 영애의 체면 따위 잊고 아이처럼 달려온 에이미를 샐리도 살포시 안았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요 근래 샐리는 정말 바빴다. 밀려드는 초대장 덕분이었다. 고르고 골라 가는데도 샐리의 일정은 꽉 차 있었다. 반면 에이미는 사교계 활동을 많이 하지 않으니 두 사람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쌓인 이야기가 많았다. 열심히 재잘대던 에이미가 샐리에게 한 장의 봉투를 건넸다.

“참, 조세핀 언니에게서 온 편지예요.”

“제게요?”

에이미의 언니이자 알스 공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조세핀 웨일스 후작 부인. 그녀에게서 편지가 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샐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 나갔다. 향긋한 백합 향이 나는 편지지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샐리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녀처럼 따뜻함이 가득 뿜어져 나오는 편지에 샐리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중에 한 글귀가 샐리의 눈에 남았다.

[알스의 공국에 머무르셨던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곧 제국으로 귀환하실 거예요. 제국을 한참 떠나 계셨던지라 사교계에 아는 분이 많지 않아요. 샐리가 그분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세요.]

샐리가 낯선 이름을 되새겼다.

‘테오도라 황녀라고?’

전생의 기억과 최근의 활동들로 귀족들이라면 많이 알고 있었지만 황족은 거의 알지 못했다. 신분이 낮은 샐리가 그들을 볼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샐리가 알고 있는 황녀는 엘리제의 가장 큰 뒷배이자 황태후의 예쁨을 독차지하고 있는 레이첼 황녀뿐이었다.

다른 황녀들도 몇 명 있었지만 수도를 떠나 시집을 갔거나 아직 어려 볼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레이첼의 위세에 눌려 황녀들은 하나같이 기를 못 폈다.

‘그러니 친구가 되어 달라고 말씀하시는 거겠지.’

샐리는 얼굴도 모르는 황녀의 이름을 잘 기억해 두었다. 그녀를 만나면 할 수 있는 만큼 잘 챙겨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황녀 저하께서 나와의 인연을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제국에서 황족은 고귀한 존재였다. 신분이 미천한 샐리와 말을 섞는 것조차 원치 않을 수도 있었다.

샐리는 냉정한 판단을 하며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런 샐리를 바라보며 에이미가 ‘흠, 흠’ 하고 작은 기침을 했다.

“이번에 골든리아 공작 부인께서 손녀딸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연회를 연다면서요.”

샐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사교계의 소식에 관심이 없는 에이미가 저런 세세한 소식을 아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어요?”

“저도 초대장을 받았으니까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에이미가 꺼낸 것은 초대장이었다. 초대장 위로 찍힌 날카로운 매는 골든리아 공작가의 문양이었다. 그것을 본 샐리는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에이미 님, 공작 부인의 초대를 받으신 거예요? 대단해요!”

그것은 흔한 귀부인의 초대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캐롤라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은 아무에게나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신중하게 엄선하여 초대장을 보내기에 그녀에게 초대장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가 될 정도였다.

에이미가 그녀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로렌스가의 위세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조용히 세력을 키워 가는 로렌스가의 딸을 보고 싶은 마음이리라.

“대단한 건 언니들이지만요.”

에이미가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샐리 님도 이 초대장을 받았죠?”

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미의 표정이 환해졌다.

에이미는 연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들과 소소한 수다를 떠는 티파티와는 달리 밤에 열리는 연회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걷기 힘든 무거운 드레스를 입는 것도 싫고, 남자들을 상대하는 것도 불편하기만 했다. 정말 중요한 자리가 아니면 이런 연회는 요리조리 꾀를 부려 참석하지 않곤 했다. 그러나.

“밤의 샐리 님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 기대돼요!”

“네?”

샐리가 당황해 눈을 깜빡였지만 에이미는 황홀한 눈빛을 하고는 상상에 빠졌다.

햇빛 아래에서 우아하게 웃는 샐리도 아름답지만, 달빛 아래에서 요염하게 웃는 그녀는 더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정도였다.

그런 에이미를 멍하니 보던 샐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초대장을 받고 저렇게 마음 편한 여인은 에이미 님밖에는 없을 거야.’

캐롤라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첫 번째 초대장은 탐색의 의미다. 첫 만남에서 그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냉정하게 판단한다.

그래서 처음 초대장을 받은 여인들은 조금도 흠 잡히지 않기 위해 등에 바짝 힘을 주고는 연회장에 들어서곤 했다.

그러나 에이미는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에이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손녀딸의 생일 연회를 직접 챙겨 주다니 흔치 않은 일이네요.”

“공작 부인께서 하나뿐인 손녀를 무척 아끼신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죠.”

“그렇구나. 무척 무서운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의외네요.”

귀부인들에게는 한없이 엄한 그녀의 또 다른 모습, 그녀는 손녀딸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런 그녀니 이번 연회를 아주 정성껏 준비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샐리에게 이 연회는 중요했다. 샐리가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초대장을 받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녀가 세 번이나 초대를 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만남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면 그녀와의 거리는 분명 가까워질 것이다.

‘사교계의 큰 어른과 좋은 관계가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야.’

이제는 사교계의 중심에서 벗어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수많은 귀족 여인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여인과 친분을 맺는다는 것은 아주 의미 깊은 일이었다.

샐리의 방에 들어선 카시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샐리의 방에서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샐리의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작은 향수병들이 놓여 있었다.

“여인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나?”

일전에 그레이스 백작 부인에게 선물했던 바르샤산 오일에 대한 반응이 무척 좋았다.

그때부터 샐리는 이따금 귀부인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곤 했다. 오일, 립스틱, 에센스. 주로 여인들이 관심이 많은 화장품 종류였다.

“네. 골든리아 부인의 손녀딸의 생일 연회에 초대받았거든요. 열다섯 살 생일이라고 하니 향수를 선물로 주려고 해요.”

“향수를 선물받기에는 아직 어리지 않나?”

“소녀에게 어울리는 향수도 많아요. 그리고 그 나이 때는 어른들이 하는 모든 것들이 탐나는 나이인걸요. 분명 좋아할 거예요.”

보통 향수는 성년이 되는 열일곱 살 생일에 선물받는다. ‘향’이라고 하는 것은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소녀라고 향기를 몸에 두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제 막 피어나려고 하는 소녀들은 성인 여성들처럼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법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샐리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그녀가 열다섯 살의 어린 소녀가 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네가 그랬나 보지?”

뜻밖의 질문에 샐리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카시스가 팔짱을 끼고는 샐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샐리는 쓴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저도 그랬어요.”

늘 낡은 앞치마만 두르고 다녔던 열다섯 살의 샐리도 그런 마음이 피어났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레이스가 달린 리본을 매고 싶었다. 곱게 화장을 하고 높은 구두도 신어 보고 싶었다. 손톱이 새까맣게 때가 탄 어린 하녀에게는 가당치 않은 것들이었지만.

그 후 샐리가 꿈꾸던 것을 누렸을 때는 억지로 꾸며져 창부가 되었을 때였으니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랬던 것치고는 처음 만났을 때는 꽤 파격적인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나.”

카시스는 처음 만난 날의 샐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단순히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마치 일부러 그런 꼴을 하고 다닌 것처럼.

“창부가 되기 싫었으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말에 카시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샐리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제대로 된 모습으로 있었다간 그랬어야만 했을 거예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요.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요.”

“…….”

그 말에 카시스는 손이 차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영특한 모습에 종종 잊어버리곤 했지만 그녀는 유곽에 노예처럼 잡혀 있던 하녀였다.

제아무리 더러운 꼴을 한다 해도 언젠간 제 모습을 들켰을 것이다. 그럼 그녀는 원치 않게 화려한 단장을 하여 몸을 파는 여자가 되었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을 떠올리자 등 뒤가 서늘해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달리 샐리의 얼굴은 무척 태연해보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나는 네가 그러고 다니는 게 그저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라고 생각했어.”

“설마요. 아무리 가진 것 없는 하녀들이라도 보통은 그런 꼴로 다니지 않아요. 아무리 가난해도 곱게 보이고 싶은 게 소녀의 마음인걸요. 낡은 옷이라도 최대한 빨아 입으려고 노력하고 매일매일 수건으로라도 몸을 씻으려고 한다고요.”

“그렇군.”

“이런 향수도 무척 써 보고 싶어 해요. 향수는커녕 싸구려 비누도 쓰지 못하는 처지였지만요.”

가난한 자들에게는 비누도 사치품이었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카시스는 새삼스레 첫날밤을 지낸 후 아침, 그녀의 향기가 떠올랐다.

‘의외로 좋은 향기가 나서 놀랐었지.’

은은한 향은 고급 향수 향이나 비누 향이 아닌 그녀의 체향이었다.

‘저런 인위적인 향기와는 전혀 달랐어.’

그 향기는 아주 은은하면서도 자연스러웠고, 그래서 더 야릇했다. 카시스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이제 그때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잘 관리된 보드라운 새하얀 피부, 흐트러진 새빨간 머리카락, 최고급 실크 원피스.

그녀는 누가 보아도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었다. 은은한 체취보다는 고급스러운 향수가 잘 어울리는. 어쩐지 카시스는 그 사실이 조금 아쉬워졌다.

그런 카시스의 마음을 조금도 알 리 없는 샐리는 열심히 향기를 맡았다. 작은 향수병에 코를 가져다 대고 ‘음-’ 하고 음미하는 모습은 꼭 향에 취한 고양이 같았다.

마음에 드는 향을 발견했는지 ‘오’ 하고 눈을 반짝이며 더 열심히 코를 찡긋거릴 때는 더욱 그랬다.

카시스는 어느새 턱을 괴고는 샐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샐리는 그 일에 집중해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샐리가 고개를 올렸을 때 카시스의 심장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황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칠 때 종종 그는 그런 기분을 느꼈다.

“향수를 몇 개 골라 보았는데 어떤지 한번 맡아 봐 주실래요?”

“……그래.”

샐리는 작은 향수병을 시향지에 뿌려 카시스에게 건넸다. 카시스는 시향지를 코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수십 개의 꽃향기를 합친 것 같은 진하고 달달한 꽃향기가 났다.

“아나이스라는 향수예요. 열다섯 살 소녀가 쓰기에 어떤 것 같아요?”

과연. 달콤한 꽃향기는 성숙하기보다는 사랑스러운 느낌이었다.

“향기는 괜찮아. 그러나 소녀가 쓰기에 좀 진한 것 같군.”

그의 말에 샐리가 자신의 손목에 향수를 뿌렸다. 그러고는 카시스의 앞으로 자신의 손목을 내밀었다.

“워낙 농도가 진한 향수라 그냥 맡으면 향기가 강하지만 피부와 어우러지면 순해지거든요. 향수는 체향과 섞였을 때의 향이 더 중요하기도 하니까요. 한번 더 맡아 보세요.”

카시스는 내밀어진 손목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샐리의 손목에 다가가는 순간 긴 목선이 드러났다. 내리깐 눈매와 콧대가 그린 듯이 유려했다.

그는 흠,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가는 손목 위로 달콤한 꽃향기가 그의 코끝을 자극시켰다. 분명 같은 향수인데 아까와는 달랐다.

‘그녀의 향기로군.’

오랜만에 맡는 향기였다. 샐리의 체향이 섞인 향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카시스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좋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샐리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조금도 닿지 않았는데도 그와 가까이 있는 손목부터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감정이 당황스러워 샐리는 황급히 손목을 가슴 위로 가져왔다.

“다행이네요.”

갑자기 그녀가 손목을 빼는 덕분에 카시스는 홀로 허공의 향기를 맡는 꼴이 되어 버렸다.

카시스는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샐리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향수병을 매만지고 있었다. 너무나 매정하게도.

* * *

엘리제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초대장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를 아는 이들이라면 상상하지도 못할 감정 없는 얼굴이었다.

수백 장의 초대장 중 마사가 선별해서 가지고 온 초대장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가문으로의 초대였지만 조금도 그녀를 설레게 하지 못했다.

그때 마사가 두 손을 모으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릴리로부터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엘리제의 새파란 눈동자에 빛이 났다. 엘리제는 우아한 동작으로 마사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았다.

편지의 봉투에는 한 자 한 자 눌러 담은 것이 분명한 글씨가 눈에 보였다.

[from. 마틴 자비스]

그리고 수신인에는 샐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편지는 늘 그렇듯 아주 정갈한 글씨로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었다.

궁금하지도 않은 지루한 일상 이야기를 늘어놓은 내용은 끔찍할 만큼 재미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을 보는 순간 엘리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샐리, 사랑합니다. 더 이상 이 마음을 참을 수 없을 만큼.]

그 문장에 옆에 서 있던 마사도 웃음을 참기 위해 코를 실룩였다.

이토록 바보처럼 순진한 젊은이라니. 고작 편지를 몇 번 주고받았다고 사랑을 고백하는 행태가 아주 우습기 그지없었다.

자기감정에 취해 샐리가 다른 남자의 여인이란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틴 자비스라.”

자비스 백작가의 아들.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그는 사교계에 큰 입지는 없는 이였지만 평판은 꽤 좋았다.

훌륭한 인품으로 소문난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를 닮아 성실하고 바른 청년이라는 평이 대부분 이었다.

그런 자가 천한 계집에게 흠뻑 빠져 해롱거리는 꼬락서니라니. 조금의 의심 없이 릴리가 전해 주는 편지를 샐리의 편지라고 믿는 모습은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샐리에게 온 마음을 토로하는 편지를 보는 역겨운 일도 이제는 마무리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엘리제가 중얼거렸다.

“이토록 사랑하는 사이인데 이제 슬슬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줘야겠지.”

언제가 좋을까. 가능하면 두 사람의 사랑을 축하해 줄 만한 이들이 많은 날이 좋을 것이다. 엘리제는 편지지를 두드리며 고민하다가 눈을 반짝였다.

“요즘 샐리가 골든리아 공작 부인에게 초대장을 받았다며 꽤 기고만장했지?”

며칠 후에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손녀딸의 생일 연회가 열렸다. 샐리가 그곳에 초대받았다면 절대 그 초대를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나 기다려야 할 늙은 여인은 아직도 사교계에서 제법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까다롭고 오만한 노인네. 지금의 사교계는 엘리제의 것이건만 아직도 제 것인 과거를 잊지 못하고 종종 설교를 해 대는 모습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절묘하지 않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추락시킬 기회였다.

“마사, 대필하렴.”

“예.”

마사는 테이블 위에 놓은 펜을 들고 주인의 말을 기다렸다. 엘리제는 노래하듯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당신을 너무나 만나고 싶어요.”

* * *

샐리는 오늘 꾸밈새에 신경을 더 썼다. 평소 같은 성숙하고 요염한 느낌이 아니라 앳된 느낌이 나는 모습이었다.

복숭앗빛 볼로 수줍은 느낌을 주고 입술색은 앵두 같은 느낌의 맑은 주홍빛을 택했다.

드레스도 평소에 즐겨 입었던 선이 딱 떨어지는 심플한 디자인이 아니라 레이스가 장식된 스타일로 입었다.

스무 살이란 제 나이가 온전히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오랜만이군, 샐리.”

그리고 샐리가 이토록 신경 쓴 이유는 바로 캐롤라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 때문이다.

새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노부인은 연륜 있는 귀부인들에게는 무척 엄격한 반면 어린 영애들에게는 무르기만 했다.

딸에게는 엄한 엄마지만 손녀에게는 약한 할머니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랄까.

골든리아는 샐리를 훑어보고는 눈을 휘었다.

“오늘도 아주 잘 꾸몄군. 싱그러운 봄꽃이 들어선 것 같아.”

“칭찬 감사합니다.”

샐리는 고개를 숙이며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이 골든리아에게 귀엽게 보였는지 무뚝뚝한 얼굴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에스테반 공작은?”

“저하께서는 황성에 일이 있으셔서 조금 늦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런. 내 손녀가 에스테반 공작을 내내 기다렸건만.”

그 말에 샐리는 공작 부인의 옆에 서 있던 소녀를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손녀이자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소녀는 눈에 띄게 실망한 모습이었다. 처진 어깨로 입술을 꾹 깨문 모습이 처량 맞기 그지없었다.

에스테반 공작이 어린 소녀들까지 설레게 한다는 말이 정말인 모양이었다.

샐리는 소녀를 보고는 싱긋 웃으며 작은 상자를 건넸다. 소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늘 내내 받았던 커다란 리본이 휘황찬란하게 매달린 상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물 상자는 작은 큐빅으로 장식되어 심플하고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었다.

“열다섯 생일을 축하드려요. 저와 저하가 함께 고른 선물이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 주세요.”

“공작 저하도 함께요?”

“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마워요.”

한결 표정이 풀어진 소녀가 할머니인 골든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상자를 열어 봐도 되죠?”

“그럼.”

골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설레는 표정을 가득 안고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작은 병이 들어 있었다.

크리스탈 모양으로 섬세하게 세공 된 아름다운 유리병을 보는 순간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소녀를 향해 샐리가 설명했다.

“프로바티의 제품 중 하나인 아나이스라는 향수랍니다.”

“이 아이에게 향수라니 좀 이르지 않은가 싶은데.”

골든리안 공작 부인의 걱정 어린 말에 샐리가 웃으며 말했다.

“열다섯이면 어엿한 레이디지요. 나이에 어울리는 향이니 부담스럽지 않게 쓰실 수 있을 거예요.”

“맞아요, 할머니. 저도 이제 향수가 필요한 나이예요.”

소녀는 귀족 여인처럼 턱을 치켜들고는 우아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골든리아는 엄격한 얼굴을 지우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내가 그걸 잊고 있었구나.”

골든리아는 손녀를 보며 인자하게 웃고는 샐리를 바라보았다.

“센스 있는 선물을 준비해 주어서 고맙군.”

샐리는 그녀를 향해 웃었다. 고민을 다해 고른 선물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샐리는 골든리아 공작 부인과 인사를 마쳤다.

그녀가 발을 떼자마자 눈을 빛내며 다가온 이는 후작 영애 삼총사 도로시, 레이라, 미란다였다. 세 영애는 샐리의 주변을 쭈르르 둘러싸다.

“샐리 님이 이 연회에 오실 줄 알았어요.”

“평소 같으면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연회에 절대 제 발로 오지 않지만 이번엔 어머님께 졸라 따라왔답니다.”

“그간 잘 지내셨죠?”

참새가 지저귀듯이 조잘대는 세 영애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샐리가 세 소녀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하려는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샐-리-님!”

풍성한 드레스를 휘날리며 다가온 여인은 에이미였다. 가까이 온 에이미는 샐리를 꽉 껴안았다. 그 모습을 본 세 영애의 얼굴이 굳고 말았다.

‘저 여자는 뭐지?!’

지금까지 샐리를 탐내는(?) 여인은 많았지만 저런 식으로 스킨십까지 과감하게 하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샐리가 자그마한 여인의 등을 두들겨 주는 순간 세 영애의 얼굴엔 경악이 서렸다. 저런 식으로 샐리가 누군가를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세 영애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샐리 님, 누구신지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쪽은 저의 친구인 에이미 님이에요.”

“반가워요. 로렌스 자작가의 딸, 에이미라고 해요.”

동그란 얼굴로 방글방글 웃는 여인의 얼굴에서는 적의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 영애는 쉽게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그녀들은 샐리를 대할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새침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레모테라 후작가의 딸, 도로시입니다.”

“그리스 후작가의 딸, 레이라입니다.”

“카페르시오 후작가의 딸, 미란다입니다.”

까칠하기 그지없는 인사였건만 에이미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저쪽에서 또 다른 여인들이 샐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올게요. 기다리고 계세요.”

샐리가 자리를 비우자 그곳에는 후작 영애 삼총사와 에이미만 덜렁 남았다. 세 영애는 여전히 잔뜩 눈에 힘을 주고는 에이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에이미는 저 멀리 있는 샐리를 바라보았다. 조금 후 에이미가 황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샐리 님은 평소와 전혀 다른 스타일이네요. 이제 막 태어난 꽃의 요정처럼 귀여우면서도 섹시하네요.”

“……!”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인 얼굴로 엄청난 말을 내뱉는 에이미를 보는 순간 세 영애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여인은 자신들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그것을 안 순간 세 영애를 둘러싸던 적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렇죠? 평소와는 다른 스타일인데도 훌륭히 잘 소화하셨어요.”

“평소에는 꽃의 여왕처럼 도도했지만 오늘은 꽃의 요정이라는 표현이 정말 딱 어울려요.”

“사랑스러움과 요염함을 함께 겸비하다니 정말이지 놀라울 따름이에요.”

세 영애들의 말에 에이미가 전에 없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말을 받아 준 이는 마가렛 부인 외에 처음이었다.

“맞아요. 어쩜, 아직 어리신 나이에도 뛰어난 안목을 가진 영애들이시군요.”

“호호호. 에이미 영애도요.”

“뭐, 안목이라면 역시 샐리 님이 최고지만요.”

모로 가든 도로 가든 샐리로 대화가 끝나는 엄청난 화법으로 네 명의 여인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어쩜 이렇게 샐리에 관한 말은 해도 해도 끝없이 나오는지. 게다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즐겁기만 했다.

입이 마를 때까지 열성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여인들에게서 나오는 기운은 어마어마해서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을 정도였다.

연회는 아주 즐거웠다. 주인공인 손녀딸의 환한 미소 덕분에 골든리아 공작 부인은 평소보다 부드럽게 웃는 순간이 많았다.

연회장의 분위기도 평소와는 달랐다. 부모를 따라 함께 온 어린 영애들이 많아 아기자기한 분위기였다.

샐리도 기분 좋은 얼굴로 의자에 앉아 어린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아하고 성숙한 귀부인들은 수없이 봤지만 저런 연령대의 소녀들을 이토록 많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 새를 따라하는 아기 새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레이디 행색을 내는 모습이 새침했다. 커다란 리본과 레이스가 화려하게 달린 드레스를 입은 모습도 앙증맞았다.

‘귀여워.’

샐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소녀들 또래의 소년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이는 사내들은 대부분 성인 남성들뿐이었다.

“고위 귀족이라면 저 나이 때부터 이성 간의 만남에 조심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에이미가 아쉬운 듯 말했다. 모든 귀족이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가문의 위세가 드높을수록 이성 관계에 보수적이었다. 고위 귀족의 영애일수록 작은 스캔들은 큰 추문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제 막 성년이 되기 직전인 공작가의 여식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정식으로 약혼자가 정해질 때까지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손녀는 제 또래의 사내와는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못할 것이다.

“맞아요. 저희 어머님께서도 이제부터는 애가 아니니 사내와 함부로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영식들과도 요즘은 만나지 못한답니다.”

“춤도 아무 상대와 추면 안 되잖아요. 저는 샤론 영식과 춤을 추고 싶은데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괜한 소문이 나면 곤란하다고요. 교제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춤만 추겠다는 건데 정말이지 너무해요.”

“후우. 정숙한 레이디가 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후작 영애 삼총사의 말에 샐리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들에게 강요되는 정숙함이라니.

조금이라도 추문이 나면 여인에 대한 평가에 흠이 나니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지만 그럼에도 씁쓸한 일이었다.

‘귀족 여인도 고달픈 건 다를 게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샐리는 손을 들었다. 샐리를 보고 술병을 든 시종이 가까이 다가왔다.

샐리의 빈 잔에 와인을 따르던 시종이 실수를 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와인 병이 손에서 조금 미끄러져 와인 몇 방울이 샐리의 드레스 끝자락에 튀고 말았다.

시종이 창백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를 지었습니다.”

주인이 주최하는 중요한 연회에서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것은 매질을 당해도 할 말 없을 치명적인 실수였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용서를 구하는 시종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다행히도 공작 부인은 이곳의 작은 해프닝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어나요. 괜히 문제가 커지기 전에.”

샐리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시종이 고개를 들었다. 샐리의 눈짓에 노여움이 서려 있지 않은 것을 본 시종은 황급히 일어났다. 샐리는 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으니 다른 테이블로 가 보세요.”

시종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샐리를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졌다.

사라진 시종에게서 고개를 돌린 샐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옆에 앉아 있던 에이미와 세 영애가 제 일처럼 속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으세요?”

“그럼요. 다행히 드레스의 끝자락만 살짝 젖은 것이라 조금만 정돈하면 돼요. 휴게실에 잠시 다녀오도록 할게요.”

“같이 갈까요?”

에이미의 말에 ‘저도요!’를 외치는 세 영애를 향해 샐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미만이면 모를까 세 영애까지 우르르 몰려가면 휴게실이 너무 복잡해질 것이다.

에이미와 세 영애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세 높은 공작 부인이 주최한 연회답게 몇 개의 방이 휴게실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샐리가 향한 곳은 가장 구석에 있는 작은 휴게실이었다.

아무리 휴게실이라도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에서 드레스를 정돈하는 모습은 품위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메인 휴게실은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거릴 테니 이런 곳이 좋을 것이다.

혼자가 된 샐리는 소파에 앉아 드레스를 살펴보았다.

와인이 물든 것이 아니라 물방울이 조금 맺힌 것뿐이라 조금 말리고 나가면 될 것 같았다. 마른 천으로 드레스 끝자락에 묻은 물방울을 닦아 내자 금세 깨끗해졌다.

드레스를 정돈한 샐리는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북적대던 연회장에 있다 조용한 휴게실에 오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조금 쉬고 가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작은 휴게실에 누가 온 거지?’

샐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방으로 들어온 이를 보는 순간 샐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여인이 아니었다.

자비스였다.

“샐리, 드디어 다시 만났군요.”

그의 얼굴엔 전에 없는 환희가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의 당신은 그때와 같군요. 구두를 벗고 흰 발을 드러내고 앉아 있던 그 모습이 너무나 강렬하여 매일 밤 그 모습을 떠올렸답니다.”

그 말에 샐리는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샐리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자비스를 바라보았다.

자비스의 얼굴은 샐리가 아는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그녀가 기억하는 자비스는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청년이었다. 결코 이런 식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쳐 온 적이 없었다.

샐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비스 영식, 그때를 기억하신다면서 어째서 또 같은 실수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이곳은 여성 휴게실입니다. 남성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에요.”

“하하. 알고 있어요.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금기된 곳에서의 은밀한 만남이었기에 더욱 설레었다고. 그러니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연회장에서 다시 한번 그때처럼 다가와 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쭉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혼자 휴게실에 들어가기를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당최 모르겠군요. 저는 자비스 영식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아니, 그날 이후로 우리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잖습니까.”

그 말에 자비스는 그녀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한 듯 ‘풋’ 하고 웃었다.

“맞아요. 안타깝게도 우리가 눈을 마주 보며 만나지는 못했지요. 하지만 저는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말보다 달콤한 편지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으니까요.”

그 말에 샐리는 무언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비스는 샐리도 모르는 사실을 진짜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조금도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사태는 심각해 보였다.

그가 갑자기 정신병에라도 걸린 게 아닌 이상 샐리가 모르는 일들이 그의 주변에서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전 자비스 영식께 편지를 드린 적이 없어요.”

일부러 말을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자비스는 또 한 번 웃었다.

“당신은 생각보다 말장난을 좋아하는군요. 물론 당신은 제게 편지를 준 적이 없으시지요. 당신은 그저 편지를 썼을 뿐, 그 편지를 전달해 준 이는 바로 릴리였으니까요.”

“……!”

그제야 얼마 전 자비스를 마주친 상황이 생각났다. 그 장면을 유일하게 목격했던 이는 바로 릴리였다. 릴리가 그 날을 이용하여 무슨 수작을 벌이 것이 틀림이 없었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자신과 릴리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미운 감정은 없었다. 릴리는 매번 샐리를 괴롭히려 들긴 했으나 그녀가 하는 못된 짓이라곤 유치한 말이 전부였다.

그런 릴리가 이런 식으로 대담하게 귀족 사내를 조종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를 믿었던 마음에 대한 허탈함과 원망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샐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마음 편히 릴리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은 눈앞의 사내를 방에서 내보내야 했다.

샐리는 눈썹을 올려 자비스를 노려보았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분노가 여실히 드러난 모습이었다.

“자비스 영식,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모르는 일이에요. 그러니 어서 이곳을 나가 주세요.”

아름답기만 할 줄 알았던 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이자 자비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한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다.

예전 같았다면 그녀의 눈빛에 죄송하다며 도망갔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홀렸으면서 이제 와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라니.

“아무리 당신이 장난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제 그만하시죠. 더 이상 그런 농담은 재미없습니다.”

“장난도 농담도 아니에요! 전 자비스 영식께 그 어떤 편지도 쓴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 우리가 얼마나 많은 편지를 나누었는데.”

자비스는 수없이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한 장 한 장 생생하게 기억했다. 너무도 행복해 수십 번, 수백 번을 읽었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밤이면 당신이 생각나네요.]

[당신을 보고 싶어요.]

[저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수많은 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던 편지는 결코 꿈이 아니었다. 꿈이었다면 이토록 그의 심장을 흔들고 미치게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저렇게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비스는 필사적으로 그 이유를 찾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답은 나왔다.

“그래. 에스테반 공작 때문이로군요.”

같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자비스는 한 번도 그와 대등한 적이 없었다.

그 자신도 자비스 백작가라는 유서 깊은 가문의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에스테반의 이름 앞에선 한없이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고개를 들어 서늘한 눈동자와 마주칠 때면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들어왔다.

샐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가 그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은 샐리의 편지를 받으며 더욱 커졌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나야.

에스테반 공작을 두려워했던 자비스는 이제 없었다.

“새삼스럽게 공작이 무서운가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답니다. 내가 당신을 지켜 줄 테니까요. 이 자비스가 누구도 당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거야.”

자비스의 눈빛은 전에 없이 기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샐리는 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의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샐리.”

자비스가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왔다. 샐리는 잔뜩 몸을 움츠리고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다가오지 마세요!”

“나예요. 당신의 자비스.”

“소리 지르겠어요!”

“얼마든지요.”

자비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과 나의 관계를 세상에 알린다니,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예요.”

자비스는 샐리와의 사이가 공표되길 바랐다. 에스테반 공작은 분노할 테지만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본부인도 아닌 고작 첩과 바람난 남자에게 내릴 수 있는 벌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자비스가의 영식이었다.

자비스 백작가와 에스테반 공작가는 꽤 긴밀한 사이였다. 겨우 첩 한 명 때문에 자비스 가문과의 관계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에스테반 공작은 그런 남자였다. 돌처럼 차갑고 서늘해 사랑이라고는 모르는 남자. 그런 사내에게 저 아름다운 여인은 어울리지 않았다.

자비스가 샐리에게 다가와 가는 손목을 잡아채고 속삭였다.

“샐리, 당신을 사랑합니다.”

골든리아 공작 부인은 몇 명의 부인들과 걷고 있었다. 그녀의 가장 친한 부인들과 잠시 쉬기 위해 휴게실을 찾아온 참이었다.

몇 개나 마련되어 있는 휴게실을 보며 부인들이 감탄했다.

“휴게실을 정말 넉넉히 마련해 두셨네요. 역시 골든리아 부인이세요.”

요즘 열리는 젊은 부인들의 연회는 연회장만 화려하게 치장하고는 휴게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말 잘 준비된 연회란 휴게실까지 완벽하게 마련해야 한다.

여인들의 칭찬에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요. 당연한 것을요.”

골든리아 공작 부인과 오랜 친구인 한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특히 저 끝에 있는 방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사람이 들락날락거리지 않아 아주 조용하고 안락하더군요. 다른 휴게실과는 달리 방 크기도 아담해서 사람이 많이 들어오지 않으니 편히 쉴 수가 있어요.”

“그럼 우리도 그곳에 갈까요? 나이가 드니 사람이 많은 곳은 좀 지치네요.”

한 부인이 주름진 눈을 내리깔며 말하자 다른 여인들이 맞는 말이라며 작게 웃었다.

끝 방을 향하는 골든리아 공작 부인을 따라가며 부인들이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눴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들은 여전히 사교계의 수다쟁이들이었다.

“휴게실 하니 몇 년 전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떠오르네요.”

“아아. 밀레 백작 부인이 사내와 휴게실에서 밀회를 나누다 들킨 일 말씀이시죠?”

“맞아요. 그 일로 밀레 백작 부인은 사교계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죠.”

쯧, 하고 혀를 차는 나이 든 부인의 얼굴에 동정심은 없었다.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귀족이 드문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요령 좋게 들키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들킨다면 타격은 컸다. 여인은 더더욱 그랬다. 제아무리 대단한 가문의 여인이라도 추문이 붙는다면 사교계에서는 절대 버틸 수가 없었다.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일이지요.”

골든리아 공작 부인은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특히 경박한 몸가짐으로 물을 흐리고 다니는 여인들을 싫어했다.

심하게 꾸짖은 적도 여러 번이었고, 결국은 이 사교계를 떠나게 한 이도 여러 명이었다.

그래서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주최하는 연회는 다른 연회보다 분위기가 점잖기로 소문났다.

“설마 이 휴게실 문 너머에서 그런 일을 벌이는 이는 없겠죠?”

한 부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다른 여인들이 키득거렸다.

감히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주최하는 연회장에서 그런 짓을 할 만큼 정신 나간 이들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끼이익- 시종이 문을 여는 순간까지는 그랬다.

“세상에!”

눈앞에 보인 모습에 부인들이 품위도 잊고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골든리아 공작 부인은 차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굳은 얼굴로 방 안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소파에 뒤엉켜 있는 이는 분명 두 남녀였다. 이곳은 여성 휴게실이었다. 절대 남성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의 분위기는 너무나 수상했다. 남자는 여자의 두 손목을 꽉 잡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었다. 농밀한 키스라도 할 것처럼.

여인들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소리쳤다.

“휴게실에서 무슨 추잡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겁니까!”

“이런, 더러운…….”

샐리가 아니라고 말할 틈도 없이 자비스가 외쳤다.

“저와 샐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저희는 마음을 나눈 진실된 사이입니다!”

그 말에 여인들은 황당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저 청년은 자비스 백작가의 아들인 마틴 자비스가 분명했다. 평소 점잖고 조용한 성격의 바른 청년이었다.

그런 자가 이런 망측한 일을 벌이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정신 차리세요, 자비스 영식. 여자에게 눈이 멀었군요.”

“지금 당신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모르나 보죠?”

어느새 작은 휴게실 밖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이 방 안을 보기 위해 기웃거렸다.

샐리는 엉망이 된 모습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시선 속에 노출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자극적인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에스테반의 애첩이 자비스 영식과 은밀한 짓을 벌이다가 걸렸다는군요.”

“하여간. 미천한 출신이라더니 결국 일을 치는군요.”

“그러게요. 온갖 우아한 척은 다 떨더니 결국 출신은 숨길 수가 없는 법인 거죠.”

특히 평소에 샐리를 거슬려 하던 여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 서린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독화살 같은 말과 냉담한 시선이 샐리의 마음을 사정없이 난자했다.

“샐리의 이야기도 한번 들어 보아야…….”

샐리에게 호의를 가진 여인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지만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눈빛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늘 차분했던 그녀의 얼굴이 호랑이처럼 사납고 엄하게 변해 있었다.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녀는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감히 내 저택에서 이따위 추잡한 짓을 벌이다니, 연회의 주인으로서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오!”

샐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겨우 목소리를 내어 외쳤다.

“오해입니다, 부인. 저는 이자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일방적으로 이곳에 들어와…….”

“그만! 조잡한 거짓말 따위 듣고 싶지 않군요!”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호된 분노에 샐리는 파르르 눈을 떨었다. 샐리는 저런 눈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공작 부인의 눈빛에 가득한 것은 벌레를 보는 것보다 강렬한 멸시와 혐오였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 갔고, 몰려든 이들의 눈빛은 모두 골든리아 공작 부인과 같았다.

다시 한번 아니라고 제대로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하면 뭐해?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텐데.’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도 그저 급급한 변명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조잡한 거짓말을 한다고 더한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지독한 절망감에 샐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저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샐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카시스 에스테반, 그의 목소리였다.

문 앞에는 카시스가 차가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차마 주인께 그의 방문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집사가 난처한 얼굴로 서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에이미와 세 명의 후작 영애가 서 있었다.

카시스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에이미가 달려와 ‘샐리 님이!’라고 외쳤다. 그 순간 제대로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이곳으로 온 참이었다.

에스테반 공작의 등장에 모두들 숨을 멈추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골든리아 공작 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대단한 타이밍에 도착하셨군요, 공작 저하. 저하의 애첩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한번 보십시오.”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방 안을 흘겨보며 말했다. 카시스는 그녀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두 남녀가 있었다. 카시스의 눈은 사내를 무시하고 본능처럼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에게 향했다.

샐리를 본 순간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흐트러진 모습을 한 샐리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카시스는 샐리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답지 않은 황급한 발걸음이었다.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고 정황을 냉정하게 파악하여 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을 때 버릇처럼 따져 보던 그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샐리와 눈을 마주친 그가 말했다.

“괜찮아?”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샐리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의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너무나 자상하고 부드러워서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제야 샐리는 자신이 무척 상처받았음을 깨달았다.

늘 괜찮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아니었다.

샐리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마치 엄마에게 이르는 아이처럼. 나는 괜찮지 않다고, 나는 상처받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카시스의 가슴이 애달프게 조여 왔다. 허공을 몇 차례 맴돌던 그의 손이 샐리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누구도 상처받을 수 없게 널 보호해 주겠다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그 말에 샐리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멍하니 카시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눈가가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눈물을 흘릴 생각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본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공작 저하, 지금 상황 파악이 제대로 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그녀는 자비스 영식과 밀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저의 연회장에서요.”

그녀의 말에 카시스의 눈이 저쪽에 있던 자비스를 향했다. 자비스는 주먹에 힘을 주고는 어떻게든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 노력했다. 마치 자기 여자를 빼앗긴 사내처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카시스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어떤 상황인지 이제야 알겠군.”

검을 손에 든 것도 아니었고,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한 감정이 그에게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엄청난 위압감이 팽팽하게 방 안을 가득 찼다.

지금 당장 그가 자비스를 죽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강한 살기였다.

꼿꼿이 서 있던 골든리아 공작 부인마저 어깨를 움찔할 정도였다. 카시스가 자신을 향해 걸음을 뗀 순간 자비스가 ‘히익’ 하고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그때 부드러운 손이 카시스의 손을 잡았다. 시선을 내리자 평소처럼 차분한 눈빛으로 돌아온 샐리가 보였다. 아까의 처연한 눈빛은 사라진 채였다. 카시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지 마.”

그러나 샐리는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카시스는 이를 악물었다. 한번 터진 분노를 삭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녀를 상처 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서 카시스는 자비스에게서 힘겹게 흉흉한 눈빛을 거두었다. 서늘했던 분노도 꾹 눌러 담았다. 커다란 사자가 흉악한 본성을 겨우 참아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카시스를 멈춘 샐리는 그를 지나쳐 자비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자비스는 대번에 얼굴이 환해졌다.

“샐리! 날 지켜 주었군요. 그대는 역시 나를…….”

철썩.

샐리는 자비스의 뺨을 후려쳤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자비스가 눈을 깜빡거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헉 소리를 내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감히 평민이 귀족에게 손을 댄 것은 큰 죄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엄청난 짓을 지적할 수 없었다. 샐리의 뒤편에 카시스가 형형한 눈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샐리는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분명 몇 차례나 말했습니다. 저는 자비스 영식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황당한 표정으로 볼을 매만지던 자비스가 필사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 하지만 분명 난 당신과 몇 번이나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당신과 나는 사랑하는 사이라고!”

그의 눈빛은 너무도 절절해 거짓말 같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어물쩍 일을 넘기면 분명 사람들은 자비스와 샐리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샐리는 그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그런 편지를 드린 적이 결코 없어요. 그런데도 계속 같은 말을 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샐리의 눈빛이 자비스를 지나 골든리아 공작 부인,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수많은 이들을 향했다. 샐리는 그들 모두에게 들릴 만큼 또박또박 말했다.

“정식으로 제국 법원에 이 사건의 조사를 요청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몰려 있던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사교계에서 남녀 간의 추문은 그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덮기 급급한 사건이었다.

그런 것을 고귀한 제국 법원에 정식으로 요청한다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숨기지 않고 밝힐 거예요. 그리고 저를 곤란하게 한 자에게는 마땅한 죄를 치르게 하고 제 명예를 지킬 겁니다. 저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으니까요.”

샐리는 매서운 눈으로 자비스와 자신을 조롱했던 부인들을 노려보았다.

* * *

긴 하루였다.

‘어떻게 집까지 온지도 모르겠어.’

샐리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에스테반 저택으로 돌아와 있었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으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새빨간 자국이 나 있는 손목을 보자 차갑게 몸이 식었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손목을 잡아 오던 아픔이 생각나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미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어린 나이부터 부모도 없이 거리를 전전하였기에 오늘보다 더 심한 일도 겪어 보았다. 무섭게 다가오는 사내들을 피해 도망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여러 번 겪어 보았다고 익숙해지는 일은 아니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곳에서 도저히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사내를 상대하는 건 한없이 두려운 일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도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내에게 강압적인 일을 당할 뻔한 모멸감 속에서 샐리는 철저히 혼자였다.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경멸 어린 시선에 숨이 턱 막혀 와 어떤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저하가 나타나서 다행이었어.’

마법처럼 나타난 카시스의 얼굴은 깊은 심해 속에서 허둥대다가 발견한 한 줄기 빛 같았다.

그의 존재만으로 엉망으로 뒤엉켰던 머릿속이 차분히 정리되고, 쿵쾅대던 심장은 차분해졌다.

그를 본 순간 그토록 안심이 되었던 건 그가 에스테반 공작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곳에 모인 수많은 이들보다 막강한 권력자라서?

아니,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샐리를 안도시켰던 건 그런 이름 같은 것이 아니라 그의 눈빛이었다.

조금의 의심도 원망도 경멸도 없는 오로지 너의 편이라는 그 눈.

샐리를 보는 눈빛에는 조금의 의심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를 걱정하는 자상함만이 가득했다. 그 눈빛은 너무나 따뜻했고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그때와는 너무 다르잖아.’

전생의 그의 눈빛은 늘 싸늘하기만 했다. 마치 투명한 방어벽에 쳐진 것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정말로 다른 사람 같았다.

복잡한 마음으로 샐리는 테이블에 놓인 차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달콤한 향과 함께 몸이 따뜻해지며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그때 노크 소리가 함께 카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겠나?”

“들어오세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해가 되었다면 미안하군. 혼자 있고 싶을 거란 생각도 들었지만 신경이 쓰여서 찾아왔어.”

“…….”

그러고는 그는 심각한 얼굴로 샐리를 아주 세심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치 다친 아기 새를 살피는 엄마 새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혹시 울기라도 한 건 아닌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 느껴져 샐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많이 괜찮아졌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러나 카시스는 그녀의 웃음에도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굳어 있는 카시스를 향해 샐리가 손짓했다.

“차 한잔하시겠어요?”

“……좋아.”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자리에 앉았다. 샐리가 부드러운 동작으로 차를 따랐다.

“꿀을 잔뜩 넣은 레몬차랍니다. 저하가 드시기에는 꽤 힘드실 거예요. 아주 달거든요.”

카시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뜨거운 김과 함께 아주 진하고 달콤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그래. 달콤한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지.”

“맞아요.”

샐리의 말에 찻잔을 빤히 바라보던 카시스가 찻잔을 입가에 대고 홀짝였다.

혀끝에 닿는 진득한 달콤함이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찻잔을 깨끗이 비웠다.

그런 그를 샐리가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얼마나 단것을 싫어하는지 알았기에 그의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빈 찻잔을 내려놓은 카시스가 괴로운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전혀 효과가 없군.”

“…….”

“분노가 사라지질 않아.”

“…….”

샐리는 눈앞의 그를 바라보았다.

잘 정돈된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얼굴,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옷매무새, 곧은 허리까지, 그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남색 눈동자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푸른 불꽃같은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서늘해 보이지만 손을 대는 순간 뜨겁게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한 그런 불꽃.

차마 갈무리 못한 감정이 빠져나온 듯 찻잔을 든 손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왜 아까 나에게 그들을 벌하라고 부탁하지 않았지? 그랬더라면 그자와 그 자리에서 네게 험한 말을 한 자들에게 오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할 만큼 벌을 내렸을 거야.”

지독히 낮은 그의 목소리에 샐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에스테반의 힘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 테죠. 하지만 그래선 저에 대한 소문은 더욱 안 좋아졌을 거예요.”

그가 어떤 이유로든 자비스를 벌준다면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 나갈 것이다. 애첩과 밀회를 나눈 남자에 대한 공작의 횡포라고.

샐리에게 버림받은 자비스는 동정 받을 테고, 그와 함께 놀아난 샐리는 난잡한 여인이라 손가락질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샐리가 자비스와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해도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샐리가 정성껏 쌓아 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법원에 조사를 요청한 건가?”

“네. 가장 객관적이고 신뢰가 가는 곳에서 조사를 한다면 사람들도 믿을 테니까요.”

“하지만 법원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야. 더한 시선을 받을 수도 있어.”

사교계에서 여성의 추문이란 입에 담지도 못할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 추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법원의 문을 두드리다니 분명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일을 키운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샐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곳이어야만 했다. 제대로 진실을 밝혀 억울한 오명을 풀어야만 했다.

“괜찮아요. 그런 시선은 잠깐인걸요. 더러운 추문이 도는 것보단 나아요.”

“…….”

“무엇보다 이 일은 엘리제 마님이 연결되어 있어 있는 게 분명해요.”

그 말에 카시스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샐리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비스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릴리였지만, 그런 릴리를 뒤에서 조종한 자는 엘리제가 분명했다.

“법원에서 제대로 조사를 한다면 마님도 마음 편히 있진 못할 거예요. 마님이 꾸민 일이 밝혀진다면 가장 좋겠지만 밝혀지지 않더라도 한동안 몸을 사리겠죠. 이건 제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라요.”

셀리가 애써 힘찬 목소리로 말했건만 카시스의 눈빛은 서늘하기만 했다. 카시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기회 따위라고 하지 마.”

“…….”

“네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잖아. 실제로도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고.”

그 말에 샐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사실은 안아 주고 싶었어.’

그녀를 본 순간 너무나 애처로워 그 품에 가두고 싶었다. 누구도 보지 못하게 품에 가두고는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런 도움 따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토록 화나고 답답할지는 몰랐다.

카시스는 분노를 억누르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너의 생각은 이해했어. 하지만 법원에서 진실이 밝혀진 후에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거다. 이 일을 벌인 모든 이들에게 결과에 상응하는 벌을 주겠어. 엘리제, 자비스, 그리고 널 향해 더러운 말을 내뱉던 여인들 모두.”

스산한 눈동자에는 동정 한 자락도 들어갈 틈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 그들이 있다면 목이라도 비틀어 버릴 것처럼 난폭한 눈동자였다. 그래서 샐리의 기분은 아주 이상해졌다.

이 일은 카시스에게도 아주 좋은 기회였다. 제대로 진상이 밝혀진다면 엘리제의 죄를 근거로 정식으로 이혼 소송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카시스는 그런 것에는 조금도 관심 없어 보였다.

머릿속에 엘리제와의 이혼만이 가득한 줄 알았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관심은 오로지 샐리만을 향해 있는 것 같았다.

‘날 정말로 걱정하고 있구나.’

사나운 눈동자에 담긴 그의 마음이 느껴져 샐리는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이런 감정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저러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사나운 눈동자가 자신의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샐리는 결국 눈썹을 내리며 웃어 버렸다.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분노에 위로받았다.

* * *

샐리가 정식으로 요청한 사건에 법원은 술렁거렸다. 조사를 요청한 샐리는 평민이었지만 연루된 자는 자비스 백작가의 아들이었다.

귀족이 연계된 사건은 최고위 법관이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 사건을 맡는 것을 거절했다.

“이런 망측한 사건을 나보고 판결을 내란 말이오?!”

최고위 법관은 모두 귀족 출신의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고작 평민 여인이 요청한 남녀의 추문을 조사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게다가 샐리와 자비스의 뒤에는 각각 에스테반 공작과 자비스 백작이 있었다. 어떤 판결을 내든 한 가문에는 밉보일 테니 맡아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지지부진하게 시간이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을 맡아 줄 법관이 정해졌다. 법관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귀족들은 경악했다. 엘리제도 마찬가지였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그 사건을 맡기로 했다고요?”

“그래요.”

레이첼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황태후가 어여뻐하는 레이첼은 다른 황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있을 만큼 세가 강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대등한 황녀가 테오도라였다. 테오도라는 현 황후가 낳은 유일한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내었던 테오도라는 여성으로서 이례적으로 알스의 아카데미로 유학을 다녀왔다. 긴 유학 생활을 끝내고 제국으로 돌아온 것이 고작 며칠 전이었다.

엘리제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서 무슨 자격으로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나요.”

테오도라가 알스에서 최고의 아카데미를 수료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녀는 황녀였다.

법원에 요청된 사건은 기본적으로 황제에게 권위를 인정받은 법관이 판결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테오도라 언니가 직접 아바마마께 이 사건을 맡고 싶다고 요청하셨다네요. 그래서 아바마마께서 황제 대리인의 자격을 주셨고요.”

레이첼의 말에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황제께서 직접 권한을 주신 이상 그녀를 말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맡지 않을 줄 알았던 사건을 황족이 맡는다니 예상치 않게 일이 커졌다. 너무도.

“하여간 언니도 별나다니까요. 저런 사건을 신경 쓰다니 말이에요.”

“……그러게요.”

엘리제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유별난 성격이지만 한번 맡은 일은 제대로 해내는 성격이니 잘해 내겠지요. 자비스 영식과 샐리, 누가 정말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말이에요.”

레이첼의 말에 엘리제는 영혼 없는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고작 이런 일에 황족까지 나서다니 일이 너무 커졌어.’

엘리제가 이번 일을 통해 원했던 것은 샐리에게 더러운 추문을 만드는 것이었다.

연회장에서 은밀하게 남자를 만나고 있던 샐리에게 연회의 주최자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은 분노할 테고,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질 것이다.

여러 사내와 난잡하게 노는 여자라는 꼬리표는 사교계에서 더 이상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다. 그럼 샐리는 더 이상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 수 없게 된다.

사건은 거기에서 끝이 났어야 했다.

보통 이런 일이 있을 때 여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제 주제도 모르고 법원에 조사를 요청할 줄이야.’

이것은 엘리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였다. 엘리제는 눈을 내리깔았다.

‘괜찮아. 변하는 건 없어.’

제 딴에는 어떻게든 누명을 밝히고 싶어 법원까지 끌어들인 모양이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사건을 법원까지 가져왔다며 비난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사건의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든 자신이 초조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 사건이 에스테반 공작 부인에게 닿을 증거도, 증인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

* * *

사건이 있은 후 샐리는 사교계에 발길을 일절 끊었다. 밖에서 어떤 소문들이 나돌지 예상은 갔지만 사람들에게 일일이 소문을 부정하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노력해 보았자 난잡하게 노는 여자의 변명으로만 보일 뿐이니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샐리는 공식적으로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런 샐리에게 한 손님이 도착했다. 그간 몸이 좋지 않다는 말로 찾아온 손님을 물렸던 샐리였지만 그 손님은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손님은 바로 이번 사건의 판결을 맡은 테오도라 황녀였기 때문이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께 인사드립니다. 찾아와 주셔서 황송하옵니다.”

샐리는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고개를 들게.”

테오도라의 목소리는 귓가를 울릴 만큼 낮았다. 샐리는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샐리의 눈이 커졌다.

이제 스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진한 군청색 드레스를 입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높이 묶은 테오도라는 나이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다.

황가의 특징이라고 하는 금빛 눈동자는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샐리를 놀라게 했던 것은 테오도라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나보다 키가 큰 여인은 드문데.’

테오도라는 샐리보다 한 뼘이나 키가 컸다. 키만 큰 것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편 어깨와 탄탄한 몸은 무척 단단하고 튼튼해 보였다.

샐리가 늘씬한 영양 같다면 그녀는 강하고 아름다운 흑표범 같았다.

“몸은 좀 괜찮은가?”

“배려해 주신 덕분에 괜찮사옵니다.”

그 말에 테오도라가 크게 웃었다. 그녀의 시원한 웃음소리에 샐리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의를 차린 인사란 정말 우습군. 일면식도 없이 찾아온 내가 무슨 배려를 해 주었단 말인가. 오히려 나 때문에 편히 쉴 수도 없는걸. 안 그런가?”

“…….”

샐리는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본래 예법이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나 계급이 높은 자를 대할 때일수록 더욱 그랬다. 황제에게 가족이 처형당해도 황족을 향해선 덕분에 가문이 평안하다는 인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저런 식으로 예법을 논하는 황족은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심각해진 샐리의 얼굴을 보고 테오도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그대를 너무 곤란하게 한 모양이군. 그저 내 속마음을 말한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게.”

아무리 사사로이 한 말이라도 어찌 황족이 한 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도대체 이 젊은 황녀가 말하는 것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파악하지 못한 샐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샐리를 보며 테오도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듣던 것과는 다른걸? 기센 후작 부인을 협박할 만큼 당찬 여인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조세핀의 안목이 틀릴 리 없을 텐데 이상하군.”

그녀의 말에 샐리는 며칠 전 조세핀에게서 온 편지를 기억해 냈다.

알스에서 유학을 마친 테오도라 황녀가 제국으로 귀국하니 잘 지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조세핀이라고 편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니 샐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 사람의 사이는 가까운 모양이었다.

“알스에서 나와 조세핀은 꽤 친밀하게 지낸 사이야.”

테오도라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서 시시각각 바뀌는 표정이 무척 잘 보였다.

“조세핀이 몇 번이나 말하더군. 내가 그대를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니 꼭 만나 보라고.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이런 식’이란 바로 자비스와 샐리의 사건을 가리킨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안 샐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셨군요.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온전히 환영받으셔야 할 황녀 저하의 귀국 시기에 어지러운 사건을 일으켜 마음이 무겁습니다.”

샐리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에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덕분에 테오도라의 귀국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게 되었다.

샐리는 그녀가 그 점을 꼬집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테오도라의 눈빛엔 조금의 원망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 오히려 이 사건은 내게 좋은 기회가 되었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샐리는 도대체 이 사건이 무슨 기회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테오도라는 그런 샐리를 보며 쿡 하고 웃었다.

“사교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더니 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나 보군.”

그 말대로 샐리는 황족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테오도라가 현 황후가 낳은 유일한 자식이라는 건 알았다.

제국에는 수많은 황녀가 있지만 황후의 친자라는 것만으로 그녀는 다른 황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테오도라가 말했다.

“샐리, 나는 현재 이 제국에서 제일 눈엣가시 같은 황녀야. 어마마마도 마찬가지지. 아들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황후, 그런 황후의 유일한 자식인 황녀.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제국의 황제는 오직 한 명의 아내만 둘 수 있다. 그러나 황후에게 자식은 딸뿐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여러 명의 애인을 만들어 자식을 보았다. 그녀들이 낳은 자식은 서류상으로는 황제와 황후의 자식으로 입적되었으나 친모의 자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핏줄을 낳은 여인들은 공식적인 애인으로 인정되어 작위를 받아 황성에서 함께 거주했다.

하지만 애인이라는 불완전한 직위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황제의 총애를 다투게 만들었다.

여인들의 자식은 곧 권력으로 이어졌기에 서로의 자식을 해하려는 악질적인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황후의 자식, 테오도라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알스로 유학을 간 게 아니야. 제1황자의 모친인 샬롯 백작 부인의 눈을 피해 도망을 간 것이지. 그리고 나의 어머니, 이사벨라 황후는 병환으로 쓰러진 지 오래라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다야. 3년 만에 귀국한 딸의 환영회도 성대하게 치러 주지 못할 만큼.”

놀라운 이야기였다. 귀부인들은 쉽게 황족의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자칫 입을 잘못 놀렸다간 큰 화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샐리는 이런 상세한 속사정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수치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테오도라는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런 나에겐 이 법정에 서는 것이 어떤 연회보다 강렬하게 나의 귀국을 알릴 수 있는 자리라네.”

샐리는 그제야 그녀가 적극적으로 이 일을 맡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을 공개 재판으로 진행할 생각이야. 수많은 이들이 지켜볼 수 있도록.”

테오도라는 샐리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은 그것에 관해 허락을 구하러 온 거야. 많은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이 그대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일 수 있으니까.”

샐리는 지금 더러운 소문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여인이 수많은 이들의 시선 속에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황녀의 부탁이라지만 거절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샐리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원하는 바예요.”

“…….”

“저는 죄가 없어요. 부끄럽지도 않고요. 제가 법원에 이 사건의 조사를 요청한 이유는 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인걸요. 최대한 많은 이들 앞에서 진실을 알릴 수 있다면 잘된 일이죠.”

“……그렇게 생각하나?”

“네. 그런 생각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법원에 조사를 요청했겠어요.”

샐리는 테오도라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러니 그렇게 숨겨야 할 이야기를 풀어 놓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저하께 원망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까요.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사건을 맡아 주신 것만으로 제게는 은인이신걸요.”

테오도라는 커다래진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런 것까지 눈치챘을지는 몰랐다.

과연. 당차고 영특한 여인이라고 하더니 조세핀의 말이 꼭 맞았다. 안쓰러운 모습으로 울고 있지도 않았고, 사내의 뒤로 도망치지도 않았다.

당당히 고개를 들고 어떻게든 자신을 둘러싼 추문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이야기해 주니 마음이 편해지는군.”

테오도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시원한 미소였다.

“황족의 명예를 걸고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여 진실을 밝히겠네.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일 테지.”

* * *

테오도라가 말한 대로 사건은 공개 재판으로 진행되었다.

사교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에스테반의 애첩과 자비스 백작가의 아들이 얽혀 있는 스캔들.

게다가 황제의 권위를 받은 황녀가 판결을 내리는 이례적인 사건.

이 흥미진진한 재판을 보기 위해 수많은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많은 이들이 지위를 앞세워 법정에 들어오는 통에 결국 법정을 채운 건 고위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라 가라 하기 힘든 귀족들까지 모여 자리를 채워 귀족 회의에서도 보기 드물 만큼 엄청난 장관이 만들어졌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테오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이로써 제국의 대단한 귀족 중 이 테오도라가 귀국한 것을 모르는 이가 없다고 봐야겠군.”

테오도라는 드레스 위에 검정색 법의를 걸쳤다. 각이 선 법의를 걸친 그녀는 스무 살의 여린 황녀가 아니라 근엄한 법관이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테오도라가 귀국한 것을 알리고 끝내기엔 이 기회가 너무 아쉽지. 오늘 이곳에 온 귀족들은 알게 될 거야. 3년 동안 외국에 나가 있던 제국의 제1황녀가 어떤 인물인지 말이야.”

“그래야죠. 그동안 그들은 저하에 대해 너무 무지했습니다.”

그녀의 말에 호위기사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젊은 기사의 눈에는 그녀를 향한 어떠한 조바심이나 의심이 들어 있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그의 눈빛에 테오도라는 빙긋이 웃었다.

“그럼 가지.”

새까만 법의를 휘날리며 그녀가 당당히 걸음을 내디뎠다.

법원의 방청석은 가득 차 있었다. 자리가 없어 서 있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저 앞에 앉아 있는 자비스와 샐리를 향해 있었다.

한 노부인이 안타까운 얼굴로 자비스를 바라보았다. 자비스는 며칠 사이에 처참해진 몰골이었다.

“세상에. 자비스 영식의 저 얼굴을 봐요. 그가 얼마나 바른 청년인지 아시잖습니까. 연회장에서 여인에게 쉽게 말도 못 건네는 분인데…… 분명 저 천박한 여자에게 놀아난 것이 분명해요.”

단정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그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 쯧쯧 거리며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와 달리 샐리를 향하는 눈빛은 매서웠다.

“게다가 평민의 신분으로 감히 귀족의 뺨을 때렸다죠?! 에스테반 공작의 총애를 받고 오만방자하게 구는 여자, 한번 혼쭐이 제대로 나 봐야 해요!”

물론 반대의 의견도 있었다.

“이 사건의 조사를 법원에 요청한 것은 샐리예요.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왜 법원에 이 사건을 요청했겠어요?”

“뒷골목 출신의 미천한 여자가 뭘 알겠소. 그저 당황해 되는 대로 지껄이다가 여기까지 온 것일 테지. 감히 법원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도 모르고.”

여론은 다양했다. 자비스를 편드는 자, 샐리를 편드는 자, 두 사람 모두를 비난하는 자.

그러나 이들 누구도 큰 소리를 내어 떠들지는 못했다. 방청석 뒤편에 앉아 있는 에스테반 공작과 자비스 백작 때문이었다.

입술을 꾹 다문 그들은 말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풍겨져 나오는 기운 만으로 사람들을 압도했다.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단한 두 가문이 얽힌 이상 사건은 단순한 남녀의 스캔들이 아니었다.

“사건의 조사관이자 판관이신 테오도라 프란츠 황녀 저하께서 납시옵니다.”

시종의 목소리에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말이 멈추었다. 조용해진 법정 안에 테오도라가 나타났다.

긴 시간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등장한 그녀를 보는 순간 많은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3년 전, 알스로 떠나기 직전의 그녀는 미성숙한 소녀였다. 키만 크고 깡마른 볼품없는 소녀.

그러나 3년 사이에 성숙해진 테오도라는 아주 건강한 느낌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가는 허리와 청초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제국의 미녀상과는 많이 달랐다지만 큰 키와 탄탄한 몸은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현 황제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보통보다 큰 체격과 새까만 머리카락, 황금의 눈동자는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핏줄을 증명하고 있었다.

테오도라는 우아하고 시원스러운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이 사건을 맡은 황녀 테오도라 프란츠요. 제국 모든 것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로부터 권위를 받아 이 사건의 판결을 맡게 되었소.”

그녀가 입을 떼는 순간 사람들이 조금 수군거렸다. 보통의 스무 살 여인은 잘 쓰지 않는 딱딱하고 무거운 말투였다.

그 말투는 허스키한 테오도라의 음성과 잘 어울려 아주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본래 이런 사사로운 개인의 사건은 비공개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사건에 대한 관심도와 중요도가 크다고 판단하여 공개적으로 재판을 진행하게 되었소. 이 점에 관해서는 마틴 자비스와 샐리의 동의를 얻었음을 확인하는 바이오.”

테오도라는 앞에 앉아 있는 자비스와 샐리에게 각각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눈빛에 자비스와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의 개요는 아주 단순하오. 캐롤라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주최하는 연회의 휴게실에서 한 남녀가 발견되었지. 처음 이 장면을 목격한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말로는 두 사람이 아주 친밀한 사이처럼 보였다고 했소. 특별한 사이임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말이오.”

저쪽에 앉아 있던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 제국 법률상 배우자가 있는 자의 바람도 불법이 아닌데다가, 다들 고매한 얼굴로 내숭 떨고 있긴 하지만 연회장에서 끈적끈적하게 놀음을 즐기는 일은 아주 허다하지 않소?”

테오도라의 말은 황녀가 내뱉기에 너무나 직접적이었고 선정적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몇몇 사내들과 여인들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 얼굴에 그녀는 속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두 사람이 하는 말이 다르다는 사실이지.”

테오도라가 자비스를 바라보았다. 잠도 제대로 못 잔 듯 얼굴이 잔뜩 상한 그는 처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틴 자비스의 말에 따르면 샐리와 아주 특별한 사이라고 했소. 두 사람은 몇 번이나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애틋한 사이라고. 그리고 그 증거로 이 편지를 제출했지.”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장미 향기가 나는 분홍빛의 편지지였다.

샐리의 편지를 이런 식으로 절대 공개할 수 없다는 그를 겨우 구슬려 받아 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틴 자비스가 샐리와 주고받은 편지요. 맞소?”

자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굳이 이 자리에서 밝히지 않겠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아주 구구절절한 사랑 편지라고 해 두지.”

편지 속의 여인은 끝없이 마틴 자비스를 사랑했고, 찬양했고, 그리워했다. 마치 그렇게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그런데 샐리의 말은 다르더군. 샐리는 이 편지를 본 적이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이 편지는 그대가 쓴 것이 아닌가?”

“네. 제가 쓴 편지가 아닙니다.”

“그녀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비스가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저 멀리 앉아 있는 카시스를 원망하듯 노려보며 말했다.

“에스테반 공작께 우리 사이를 들키면 화를 당할까 봐 두려워 그러는 것 입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확실히 저 모습은 그들이 알던 성실하고 순진한 마틴 자비스가 아니었다. 역시 여자에게 홀린 것이 분명하다고 누군가 혀를 찼다.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테오도라는 눈썹을 찡그렸다.

“마틴 자비스, 이곳은 법정이오. 머릿속의 상상만으로 내뱉는 말은 삼가시오. 이곳에서의 발언은 논리와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하오.”

자비스는 부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점은 이 편지가 샐리가 쓴 것인지 아닌지겠지.”

테오도라는 다른 한 장의 편지를 내밀었다.

“이 편지는 로렌스가의 에이미 영애가 샐리에게 받았다는 편지요. 사건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받아 온 편지이고 편지는 몇 장이나 있어. 자비스의 말이 맞는다면 두 편지는 한 사람에 의해 쓰였겠지.”

테오도라는 저쪽에 서 있던 한 나이 든 사내에게 눈짓했다.

“확인 작업을 위해 전문가를 불렀소. 이 두 장의 편지가 같은 사람이 쓴 것인지 확인을 요청하네.”

가까이 다가온 사내는 테오도라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두 장의 종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두 종이에 적힌 글씨는 얼핏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사내는 자비스의 편지를 심각한 눈으로 살펴보며 말했다.

“필체나 글자의 크기가 한쪽을 의도적으로 따라 한 티가 납니다만, 잉크가 맺히는 타이밍이 확연히 다릅니다. 편지는 각각 다른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두 편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건가?”

“다른 자의 글씨를 따라 하면 어색함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쪽 편지가 다른 편지의 글씨체를 따라 쓴 것처럼 보입니다.”

사내가 들어 올린 것은 자비스가 받은 편지였다. 테오도라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샐리가 다른 자에게 대필을 시켰다면 자기 것과는 다른 필체로 쓰게 했겠지. 이런 식으로 자기 글씨를 따라 한 듯한 필체를 쓰진 않았을 거요.”

테오도라는 자비스의 편지를 잡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편지는 샐리가 쓴 것이 아니야.”

“아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이 편지는 그녀가 쓴 게 맞아요!”

자비스는 충격받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매일 밤 그를 설레게 했던 그 편지가 샐리가 쓴 것이 아니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창백해진 자비스를 향해 테오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틴 자비스, 샐리에게 직접 편지를 받은 적이 있나?”

“그건 아니지만 릴리라는 여자가 편지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예전에 샐리와 같은 가게에서 일했다고 했습니다. 샐리와 오랜 친구라고요!”

“그대는 사교계의 소식에 너무도 둔감하군. 과거에 두 사람이 같은 곳에서 일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이는 조금도 친밀하지 않았네. 조금이라도 사교계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 사실을 아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텐데.”

자비스는 테오도라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언제나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찾아왔던 릴리가 생각났다.

‘샐리가 전해 주라고 했어요.’

‘샐리가 정말 기뻐했어요.’

그에게 다가온 그녀는 늘 샐리를 입에 담으며 편지를 주고 가곤 했다.

자비스의 주먹 쥔 손이 분노로 부들거렸다.

“그 여자를 불러 주십시오! 릴리에게 직접 물어보겠어요.”

“나도 그리해 주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해.”

테오도라의 황금색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릴리는 실종됐네.”

그녀의 말에 자비스의 표정이 굳었다. 저쪽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샐리도 눈썹을 찡그렸다.

“아주 이상한 타이밍이지. 분명 자비스 그대는 샐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릴리에게 줬고, 릴리는 샐리의 답장을 가져왔어. 그러나 그 편지는 샐리가 쓴 것이 아니야. 그럼 그 편지를 쓴 것은 누구일까. 릴리일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일까?”

두 사람 사이에 제3자가 있다는 사실에 관객석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마틴 자비스는 속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더 이상 단순한 남녀의 스캔들이 아니라, 귀족을 능멸한 사기 사건이었다.

“가짜 편지로 귀족 사내를 능멸하고, 한 여인의 명예를 훼손한 죄는 크오. 이 편지를 쓴 자가 누구인가를 밝혀내면 이 사건을 일으킨 주범을 알 수 있게 되겠지. 하나 아쉽게도 이 편지지와 봉투만으로는 범인을 알 수 없더군. 유력한 용의자인 릴리는 현재 실종된 상태지. 하여 이 사건은 귀족을 능멸한 사기 사건으로 별도로 조사를 진행할 것이오.”

자비스는 편지가 가짜라는 사실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절망적인 얼굴은 동정심이 들 정도였으나 테오도라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가짜 편지로 속았다고 하나 죄는 죄. 샐리는 분명 몇 차례나 자신이 쓴 편지가 아니라고 해명했음에도 그대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강요했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인에게 대단히 위협적인 행동을 한 셈이지. 이 건에서 만큼은 마틴 자비스는 명확한 가해자. 그리고…….”

테오도라는 시선을 돌려 샐리를 바라보았다.

“샐리는 끔찍한 일을 겪은 피해자일 뿐이야.”

그 말은 샐리를 덮고 있던 더러운 추문들이 온전히 씻겨 나가는 말이었다. 샐리는 마주 잡고 있던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이토록 명료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 받을 줄은 몰랐다. 어려운 자리에 선 보람이 있었다.

샐리는 벅찬 얼굴로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테오도라와 눈이 마주쳤다. 내내 엄숙했던 테오도라의 눈빛이 잠시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다시 냉정한 법관의 얼굴로 돌아간 테오도라가 말했다.

“최종 판결을 내지.”

테오도라는 위엄 있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자비스 백작가의 아들 마틴 자비스는 샐리의 의사를 무시하고 위력을 행사했기에 아래와 같은 형벌을 내린다. 마틴 자비스는 샐리에게 진심 어린 사죄의 말을 전하고, 피해 보상금 1000골드를 보낸다. 계략에 빠졌다는 것을 참작한 바, 형사적인 형벌은 묻지 않는다.”

테오도라의 말에 법정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귀족이 평민에게 사죄의 말을 하라는 것도 파격적이었는데 피해 보상금이라니?!

이런 문제로 물질적인 보상을 한다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액수도 웬만한 귀족들은 부담스러울 만큼 컸다. 결국 한 귀족 사내가 손을 들었다.

“이의를 제기합니다. 전례 없는 마구잡이식 판결입니다! 고작 평민 계집을 조금 건드렸다고 1000골드의 보상액을 지급하라니요!”

법관이 결정한 판결에 항의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도저히 이 사건의 판결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다른 귀족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이 평민 여성을 건드리는 일은 허다했다. 단순하게는 손을 잡기도 했고, 심하게는 몸을 요구하는 일도 빈번했다.

그러나 그것을 대단한 죄로 비난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작 평민 계집이 아닌가.

테오도라는 그를 바라보았다.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았자 그녀는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황녀를 향한 감정을 숨기지 않을 만큼 못난 자라니 우습기 그지없지 않은가.

“과한 처사라고 생각한다면 ‘고작’ 이라고 평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그대는 그런 일 하나 조심하는 게 그리 힘든가?”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인상을 팍 쓰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한 사내를 향해 테오도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것 보게. 고작 조금 수치를 준 것만으로 그렇게 불쾌한데, 여인이 느꼈을 불쾌함은 얼마나 클까. 그러니 여인이 받을 아픔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게. 단순히 한순간의 수치심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저런 식의 소문이 나면 사교계 활동은 물론 앞으로의 결혼까지도 영향을 끼치지. ‘고작’ 그런 일로 여인은 평생을 휘둘리게 된다는 말이야.”

테오도라는 방청석에 앉아 있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저마다 아름답게 치장한 귀부인들은 한없이 도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온전히 권력을 가지지 못한 그네들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위치에 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툭하면 아비의 손에 이끌려 정략결혼을 해야 했고, 남편에게 휘둘려도 제 할 말 못하는 여인들 천지였다. 이 얼마나 가련한 여인들인지.

“제국의 여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 그렇다면 이 정도 보호막은 필요하지 않은가.”

테오도라의 말에 여인들은 미묘한 얼굴을 했다. 늘 정숙을 강요당했고, 그 정숙을 지키지 못하면 본인이 감당해야 했다.

소문이 심하게 나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일생을 보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정숙을 지키기 위한 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인의 가는 팔밖에는 아무것도.

그런데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주는 이가 있을 줄이야. 사내가 다시 한번 뭐라고 이야기를 하려던 찰나, 여인 한 명이 그를 향해 톡 쏘듯 말했다.

“공께서는 목숨이 한두 개가 아닌 가 봅니다. 황제 폐하의 권위를 받은 황녀 저하께 자꾸 반박하시는 걸 보면 말이에요.”

“그, 그게 무슨!”

“귀족의 품위를 지키라는 당연한 말이 뭐가 그리 거슬린다고 그러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게요. 찔리는 게 많으신 걸까요?”

몇몇 여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수군거리자 그는 결국 붉어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보던 테오도라가 고개를 돌려 샐리와 눈을 마주쳤다.

“할 말이 있으면 하게. 그대에게는 꽤 힘든 시간이었을 테니.”

그 말에 샐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조금 후 샐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많은 이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뒷골목의 평민 출신입니다.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희롱당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억울하다고, 화가 났다고 말하지 못해요.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네가 처신을 잘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비난받기 일쑤니까요. 그래서 여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입을 꾹 다물지요. 하지만 제대로 말을 못했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화가 나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샐리의 싸늘한 눈빛이 자비스를 향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자비스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차 샐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저를 피해자로 인정해 주셔서, 그리고 저의 분노를 합당한 것이라고 이해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샐리는 테오도라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고개 숙인 시간만큼 그녀의 고통이 느껴져 법정은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런 샐리를 멍하니 보던 자비스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럼 이상으로 재판을 끝내겠네.”

테오도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판결이 끝나자마자 법정은 소란스러워졌다. 이 판결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에 대해서 격한 토론이 이어졌다.

샐리에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여인들도 있었다. 정말 고생 많았다고 위로하는 여인들을 상대하던 샐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카시스가 서 있었다.

그의 등장에 여인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들은 더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눈이 되었다. 히끅, 하고 딸꾹질이 나와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여인도 있었다.

재판 내내 얼음보다 차가운 표정이었던 그가 웃은 것이다.

“그대의 명예가 지켜져 기쁘군.”

카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한 발짝 샐리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여인들 속에 있는 샐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샐리는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보더니 빙그르 웃었다. 그녀는 카시스의 손을 마주 잡고는 당당한 얼굴로 일어섰다.

“저도 그래요.”

재판이 끝난 후 뒷이야기는 사교계에 많은 의미를 주었다.

우선 예상과 달리 에스테반 공작가와 자비스 백작가의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비스 백작은 많은 이들이 인정할 만큼 고결한 인품을 가진 자였다. 그는 판결을 깨끗이 인정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카시스와 샐리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곁에서 자비스는 샐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백작가의 아들이 고작 평민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변명조차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덧없는 폭력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듯이.

샐리는 차가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한마디 말과 돈으로 용서 받기에는 그녀의 상처는 너무 컸다.

그리고 자비스 백작가에서 보내온 1000골드가 샐리에게 전해졌다.

가장 놀라운 일은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샐리를 찾아간 것이다. 그녀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여인이었다.

사건이 있었던 날 샐리와 자비스를 본 그녀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샐리가 피해자라는 것을 납득하기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테오도라 황녀의 판결을 납득하지 못한 그녀가 샐리를 엄하게 꾸짖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그대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아 큰 상처를 받았겠군.”

골든리아의 말에 샐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는 그랬네. 그대가 사내와 은밀한 관계로만 보여 화가 났어. 그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보호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리하지 못했지. 연회를 연 주인의 본분을 잊고 그대에게 최악의 대접을 해 버렸어.”

골든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평생을 귀족으로 자란 오만하고 까다로운 여인이었지만 사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그런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잘못된 일에 사과를 하는 것이 진정한 품위를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미안하네.”

유서 깊은 골든리아의 공작 부인이 비천한 출신의 평민 여인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노부인의 사과에 샐리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사건이 일어난 밤, 샐리는 미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 감정엔 골든리아 공작 부인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조금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몰아치는 그녀가 무섭고 미웠다.

그래서 그녀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이미 틀어져 버린 감정이 다시 되돌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똑같아. 부인의 말을 제대로 들을 생각이 없었지.’

정성스럽게 준비한 연회에서 불경한 모습을 본 그 순간, 부인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제대로 알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샐리도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샐리는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저야말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큰 위로가 됩니다.”

골든리아의 엄한 얼굴도 그제야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 후 골든리아 공작 부인의 연회에는 늘 샐리가 참석하게 되었다.

그것은 샐리가 까다로운 사교계의 대모로부터 완전히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누군가 골든리아에게 물었다.

“부인께서는 테오도라 황녀의 판결을 인정한 것입니까?”

남녀의 추문과 여인의 정숙에 유난히 엄격한 여인이 그것을 쉽게 납득했는지 의아해한 질문이었다.

그 말에 골든리아는 주름진 눈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나 때에는 귀족 여인에게 추문이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어. 그것이 강제적이었던 자의적이었던, 추문이 돈 순간 그것은 무조건 여인의 잘못이었고, 여인의 인생은 끝이 나 버렸으니까. 하지만 테오도라 황녀 저하는 그것은 여인의 탓이 아니라고 말해 주더군. 엄연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뉠 일이라고 말이야.”

골든리아는 저 멀리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녀는 남녀가 뒤섞인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며 까르르거리는 소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그녀의 주름진 눈이 미소 지었다.

“그건 정말 기쁜 말이지. 내게는 사랑스러운 손녀가 있거든. 이 일로 인해 저 아이가 사는 세상은 조금 더 나을 세상일 거야.”

물론 모든 이들이 테오도라의 판결에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 귀족들은 귀족이 평민 따위에게 한 행동에 죄를 묻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테오도라 황녀 저하의 생각을 알 수 없군요. 귀족은 귀족, 평민은 평민. 엄연히 계급이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고작 그런 일로 죄를 물다니요.”

“그분은 알스에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알스는 평민들이 제 분수도 모르고 돈으로 나라를 휘두르는 곳입니다. 유서 깊은 귀족가가 나라를 지지하고 있는 제국과 비교하면 천박하기 그지없는 곳이지요.”

“하아. 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몇몇 귀족 여인과 백성들은 마냥 자기편을 들어주니 좋다고 황녀의 이름을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도무지 테오도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귀족 사내가 평민 여성에게 피해 보상을 하게 한 판결은 평민들에게까지 퍼져 나가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덕분에 수도의 평민들은 이제 막 귀국한 테오도라 황녀에게 열광하고 있었다. 전례 없는 인기였다. 이 판결을 통해 테오도라는 그녀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다.

많은 이들의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와중에 누구보다 싸늘한 얼굴을 한 이가 있었다. 엘리제였다.

재판 전날 카시스가 그녀를 찾아왔다. 늘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에스테반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다시 한번 이런 짓을 한다면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 분노를 증명하듯 카시스는 집요하게 릴리를 쫓기 시작했다.

테오도라 역시 ‘가짜 편지’에 대한 수사를 계속하겠노라고 밝혔다. 그 모든 것이 엘리제를 분노케 했다.

엘리제는 내리깐 눈빛으로 마사를 바라보았다. 몇 시간이나 계속된 매질에 마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릴리는?”

“그곳에 잘 있습니다.”

엘리제는 철두철미한 여자였다. 릴리의 가벼운 입을 막는 것보다는 그녀 자체를 숨기는 것이 안전했다.

그래서 릴리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은밀한 곳에 가둬 놓은 상태였다. 일이 진정되면 저 멀리 외국으로 보낼까 생각도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그렇게까지 해 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계획은 실패했다. 제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개에게 무슨 상을 준단 말인가.

엘리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 계집애가 다시는 내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새빨갛게 피가 새어 나오는 등을 움츠리며 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