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천박한 여자
카모라 쇼는 대성공이었다. 카모라 쇼를 본 많은 여인들이 그날의 드레스를 앞다투어 극찬했다.
카모라 쇼에 가지 못한 이들은 그들의 설명을 들으며 부러움과 호기심을 폭발시켰다.
카모라의 드레스만큼 여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이름은 샐리였다.
‘카모라의 뮤즈.’
그것이 샐리에게 붙은 새로운 별명이었다.
샐리에 대한 여인들의 관심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이었다.
“샐리라는 여자는 지금 저택에 있나요?”
햇볕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어느 오후의 티파티. 천진한 목소리에 연회장은 정적이 맴돌았다.
티파티의 주최자인 엘리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자신에게 질문을 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샐리에게 무슨 용무가 있으신가요, 스팅스 백작 부인?”
엘리제는 언제나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엘리제의 미소에 스팅스는 안도했다.
본처 앞에서 첩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었지만 너무 궁금해 말을 꺼냈다.
그녀의 예상대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은 정색하지 않고 이야기를 받아 주었다. 스팅스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카모라의 선택을 받았다느니, 귀부인들의 상담을 해 준다느니 하도 많은 이야기가 들려와서요. 한번 불러 보면 어때요?”
기가 찬 말이었지만 엘리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저런 헛소리에 대답해 줄 이들이 많았다.
“스팅스 부인, 그따위 여자를 보고 싶어 하다니 진심이세요?”
마르시아 후작 부인이 정색한 얼굴로 스팅스를 흘겨보았다. 여인들은 눈썹을 찡그리며 너도 나도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진 건 반반한 얼굴밖에 없으니 뭐라도 해 보려고 카모라에게 부탁했겠죠. 품위 있는 귀족 여인들은 그런 모델 일 따위 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선택했을 테고요.”
“그 상담이라는 것도 그래요. 뒷골목에서 주워들은 천박하고 질척한 지식을 뽐내는 거죠. 출신이 미천하여 창피한 줄도 모르나 봐요.”
“저도 얘기 들었어요. 온갖 더러운 상담을 다 해 준다죠? 상담하는 부인들은 또 무슨 생각인지. 체면도 잊었나 봐요.”
“에스테반 부인만 고생이시죠. 그딴 여자가 저택에 돌아다니는 걸 봐야 한다니.”
엘리제는 눈썹을 내리며 난처한 듯 말했다.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남편이 선택한 여인이에요. 모진 말을 듣고 있기가 괴롭네요.”
그러나 엘리제의 말에도 샐리에 대한 여인들의 말은 계속되었다. 우아한 말투로 포장한 악질적인 험담이 대부분이었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을 편들기 위해 열심히 한 말이었지만 정작 엘리제는 점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껏 티파티의 주인공은 항상 자신이었다.
오로지 아름답고 우아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을 향한 칭찬과 경배가 가득했다. 그러나 오늘 그녀의 존재는 빛바래져 있었다.
고작 저따위 추악한 말들로 인해.
티파티가 끝나고 사람이 복작이던 정원은 텅 비었다. 엘리제는 주황빛 노을빛 아래 앉아 있었다.
반짝이는 노을빛이 반사되어 금빛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잘 가꾸어진 꽃으로 가득한 정원에서 눈을 감은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천사 같은 얼굴 속에 얼마나 포악한 생각들이 가득 차 있는지는 그녀 외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거슬려.’
샐리가 이토록 빨리 사교계에 입지를 만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사교계는 반반한 얼굴만으로 자리 잡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 계집에게 귀족 여인의 마음을 홀릴 만한 기술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온전히 샐리의 능력만으로 그 일이 가능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고작 첩이라고 해도 에스테반 공작이 그 옆에 붙어 있었다. 제국 사교계에 에스테반의 이름은 영향력이 컸다. 수많은 여인들이 그 이름에 홀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 점이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에스테반의 이름을 가진 여인은 오직 자신 하나여야만 했다.
‘당장에 그 가는 목을 졸라 버리고 싶지만.’
물리적인 힘으로 어떻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카시스의 방어가 워낙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별채의 하녀들은 뇌물이 통하지 않는 이들뿐이었고, 샐리가 움직일 때는 호위 기사를 대동했다. 아무도 모르게 교묘히 없애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잠시 후 엘리제가 눈을 떴다.
“마사.”
“네.”
언제나처럼 엘리제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사가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샐리가 일했던 가게에 대해서 조사해 오렴. 세세한 것까지 샅샅이.”
“알겠습니다.”
엘리제는 샐리의 가장 큰 약점을 알고 있었다. 뒷골목 유곽 출신의 미천한 여자. 거기서부터 흔드는 것이 가장 쉬울 것이다.
제아무리 에스테반의 이름으로 가려 보았자 더럽고 천박한 출신은 가릴 수 없을 테니.
“그리고…….”
엘리제는 내리깐 눈으로 티파티 때 샐리의 이야기를 처음 꺼낸 여인을 떠올렸다.
리엔 스팅스 백작 부인. 눈치가 지독히 없었지만 엘리제를 한없이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귀여워 함께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도를 넘었다.
그 가벼운 입이 항상 문제지.
“스팅스가에 매수해 두었던 하녀에게 연락해. 시킬 일은 별거 아니구나. 그냥 스팅스 부인이 마실 찻잔에 아주 작은 유리 조각을 넣으면 돼.”
정말 작은, 그저 그 짜증나는 입이 찢어질 정도로만.
마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서야 치솟았던 짜증이 조금 나아졌다. 미소 짓는 엘리제의 얼굴은 한없이 아름다웠다.
이제껏 살면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거슬리는 것들은 보이지 않게 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 * *
“오늘도 양이 대단하군.”
카시스는 테이블 위에 쌓인 초대장을 보며 말했다. 일반적인 귀족 여인들이 얼마나 초대장을 받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만큼 엄청나지는 않을 것이다.
샐리는 테이블 위의 초대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갈 곳과 가지 않을 곳을 선별하고 있었다.
“정말 좋은 기회예요. 이제부터 제대로 사교 연회에 참석하려고 해요.”
지금까지 샐리는 소소한 티파티에만 참석했다. 친한 지인 몇 명이 모여 오붓하게 즐기는 티파티와는 달리 사교 연회는 훨씬 많은 이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샐리에 대한 반감이 큰 상태에서 참석했다간 ‘밑바닥 출신의 첩’이라고 공격을 받기 쉬웠다.
그러나 귀부인들의 상담과 카모라 쇼 이후 샐리에 대한 시선이 크게 달라졌다. 이제 면전에서 대놓고 샐리를 비난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 바로 사교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타이밍이었다.
“이곳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어요.”
샐리는 골라 둔 몇 장의 초대장 중 한 장을 골라들었다. 연회의 주최자는 캐롤라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
그녀에게서 초대장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작가의 적녀로 태어나 공작 부인이 된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귀부인이었다.
손주를 본 지금까지도 그녀는 사교계 입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초대장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초대장을 보냈다는 건 사교계에서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탔다는 이야기였다.
카시스는 샐리의 손에 들려 있던 초대장을 건네받았다.
“일주일 후군. 이 날은 일이 있는데…….”
고민하는 듯한 카시스의 말에 샐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하는 오지 않으셔도 돼요.”
여인들만 참석하는 티파티라면 모를까 사교 연회는 파트너와 함께 참석하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샐리는 한동안 카시스와 동석할 생각이 없었다.
에스테반 공작은 파트너로 데리고 다니기에는 너무 눈에 띄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여인들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없을뿐더러 애꿎은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
친해지기도 전에 질투와 시기가 먼저 생겨 버리면 곤란했다. 여인들과의 관계를 넓히는 게 목적인 샐리에게는 진한 향수 같은 그의 존재만이 필요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강렬한.
“한동안은 저 혼자 갈 테니 저하는 신경 쓰지 마세요.”
“…….”
그런데 이상했다. 마치 큰 실망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남들은 몰랐을 감정 변화지만 과거에 그의 미세한 표정까지도 신경 썼던 샐리는 알 수 있었다.
‘연회는 질색하는 데다가 그날 일까지 있다고 했잖아. 그럼 오지 말라는 말에 좋아해야지 표정이 왜 저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샐리는 눈썹을 모으고는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설마 연회에 가고 싶으셨던 거예요?”
“아니, 전혀.”
그런 시시콜콜하고 귀찮은 연회에 가고 싶을 리가 없었다. 오지 말라는 말에 후련해야 하건만 이상하게 카시스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눈을 내리깐 그는 꼭 토라진 아이 같았다.
‘정말…… 요즘 안 어울리는 행동을 한다니까.’
샐리는 희한한 생명체를 보는 눈빛으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한번 더 물어볼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설마 저 에스테반 공작이 제 하고 싶은 말을 참을 리 없었다. 괜한 관심은 그를 귀찮게 할 뿐이었다.
샐리는 카시스에게 시선을 돌려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녀는 에이미가 주고 간 신문을 손에 들었다.
신문의 이름은 시크릿 로즈. 제작자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신문으로 주로 사교계의 이슈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섬세하게 다룬 사교계의 이야기들이 꽤 흥미로워서 귀족 여인들 사이에 유행이라고 했다.
[카모라의 드레스, 제국의 밤을 지배하다.]
최근의 신문은 카모라 쇼에 관한 기사를 주로 실었다. 카모라가 선보인 파격적인 드레스에 관한 묘사와 찬양, 여인들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샐리는 그중에서 한 줄의 기사를 보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피날레의 장면에서 카모라의 뮤즈는 에스테반 공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에스테반 공작의 표정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청혼을 받은 여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카모라의 뮤즈는 그여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극한의 아름다움을 가진 그라면 여인의 드레스도 예술적으로 소화할 것이 분명하다.]
기사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카시스 에스테반을 저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쿡쿡 웃는 샐리의 웃음소리에 카시스가 읽던 책을 내리고 샐리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지?”
“기사가 좀 재미있어서요.”
샐리는 신문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꼭 비밀을 들킨 것처럼.
“어떤 부분이?”
카시스는 결국 테이블 위에 책을 놓고 샐리의 옆으로 다가왔다.
“별것 아니에요.”
신문을 꽉 쥐는 샐리의 모습이 수상해 카시스는 신문의 끝을 슬쩍 잡아당겼다.
“얼마나 재미있기에 그렇게 웃은 건지 나도 좀 보고 싶군.”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은데요.”
얇은 신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어째서지?”
“저는 이 신문을 앞으로도 계속 읽고 싶거든요.”
에스테반 공작에 대해 이렇게 쓴 것을 안다면 당장에 제작자를 찾아내어 다시는 신문을 발행할 수 없게 할지도 모른다. 샐리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내가 상당히 거슬릴 만한 내용인가 보군.”
샐리는 카시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회귀 이후 이렇게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얼굴이지만 새삼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다.
눈, 코, 입, 모든 부분이 완벽한 모양으로 절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엄청난 기사를 적는 심정도 이해가 간다. 기사의 문구를 떠올리자 다시 풋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대단한 칭찬이 적혀 있는 것뿐이랍니다.”
“……!”
장난스러운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카시스는 숨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또 그 미소다.
카모라의 쇼 이후 종종 샐리는 저런 미소를 보여 주었다. 답답한 가면을 깨부순 것처럼 맑은 그 미소는 튀어나올 때마다 자신의 감정을 파도처럼 흔들어 놓았다.
멈춰 있는 카시스의 손에서 쏙 하고 신문을 빼낸 샐리는 반대편 의자로 걸음을 옮겼다.
샐리가 여유로운 얼굴로 다시 신문을 넘기는 순간에도 카시스는 한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그도 알 수 없었기에.
* * *
골든리아 공작가의 저택 앞. 위세 높은 공작 부인이 주최하는 연회답게 공작가 바깥에 선 마차들이 꽤 많았다. 에스테반의 문양을 단 마차가 도착하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향했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남자가 은발을 찰랑이며 나타났다. 먼저 내린 그는 정중한 동작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로 하얗고 가는 손이 포개어지고 장미보다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등장했다.
꽃으로 장식된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화사하게 꾸민 모습은 평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까지의 그녀가 농익은 여인의 모습이었다면 오늘의 모습은 이제 막 피어나는 청초한 소녀의 느낌이 났다.
샐리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카시스는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미치겠군.’
매일 저녁 보는 얼굴이었고, 이토록 아름답게 꾸민 그녀를 본 것도 여러 차례였다. 그러니 이제는 이런 식으로 이성이 조각나는 기분은 들지 않아야 했다.
카시스는 필사적으로 요즘 그를 괴롭히는 영지의 세금 문제 따위를 떠올렸다. 머리 아픈 문제들을 떠올리면 저 무지막지한 미소 덕에 엉망이 된 이성이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저하. 그럼 잘 다녀오세요.”
사르르 웃는 샐리를 보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카시스는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카시스가 사라진 후 혼자가 된 샐리에게 연회의 주최자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 다가왔다.
“만나서 반갑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캐롤라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 처음 인사드립니다. 샐리라고 하옵니다.”
샐리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가의 주름마저 우아해 보이는 그녀는 이제 노년에 접어든 여인이었다.
한때 사교계의 꽃이었다는 말을 증명하듯 기품이 넘쳐흘렀다. 골든리아는 저 멀리 사라진 마차를 보더니 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대만 두고 가다니 에스테반 공작께서는 일이 있으신가 보지?”
“네. 밀린 업무가 있다 하셔서 저만 참석했습니다.”
“공작께서 늘 일에 치여 사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그런 분이 그대를 이곳까지 데려다주다니 놀랍군. 과연 소문의 총애는 사실인가 보군.”
“아닙니다.”
샐리는 부끄러운 듯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캐롤라인은 그런 샐리가 귀엽다는 듯 설핏 미소를 지었다.
사실 골든리아가 샐리를 초대한 것은 호감보다는 호기심이 컸다. 그녀를 찾는 귀부인들마다 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어떤 여인인지 한번 보기 위함이었다.
에스테반 공작의 총애를 두르고 버릇없이 행동하는 여인이라면 따끔히 혼낼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샐리의 인사는 훌륭했고, 오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까다로운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점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합격이었다.
“오늘 참석한 분들 중에 그대를 찾는 이들이 많아. 많은 대화 나누도록 하게.”
“네. 배려에 감사합니다.”
골든리아의 말대로였다. 그녀가 샐리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주위에 있던 여인들이 샐리를 둘러쌌다.
“반가워요, 샐리. 당신이 그 카모라 쇼의 모델이죠?”
“카모라 쇼는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꼭 직접 만나 얘기 나눠 보고 싶었어요. 무대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미인이군요.”
흥분이 가득한 말투로 말을 건 여인들이 가장 먼저 입에 담은 것은 카모라 쇼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직접 쇼를 본 여인들은 물론 직접 쇼를 보지 못했던 이들조차 입소문을 통해 샐리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 선명한 빨간 머리카락은 처음 봤어요. 염색한 건 아니죠?”
“피부가 어쩜 이렇게 매끄럽죠? 부러워라.”
“저 샐리 님에게 드리고 싶어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그중에는 오페라 스타를 보는 듯 열망 어린 시선도 있었다. 어느 나이 어린 영애는 샐리에게 편지를 건네고는 수줍은 듯 도망가기도 했다.
카모라 쇼 이후 처음 참석한 자리였으니 어느 정도 관심을 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대단한 열기였다.
본래 첫 만남에서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에 자리를 비키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나 여인들은 한동안 샐리의 주변에서 떠나질 않았다.
샐리는 한참을 쉬지도 못하고 다가오는 여인들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앉아 음료를 마시지도 못할 정도였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에야 샐리의 주변은 조금 한산해졌다. 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옆에는 최후의 승자가 된 세 여인이 기쁨의 미소를 띠며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후작가의 영애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 온 사이였다.
이름은 차례대로 도로시, 레이라, 미란다. 세 영애는 카모라 쇼 이후 샐리의 엄청난 팬이 되었다. 샐리를 만나기 위해 어머니를 졸라 연회에 온 그녀들은 내내 샐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샐리 님을 향한 관심이 엄청나네요. 이렇게 사람이 몰려든 것은 처음 봤어요.”
“그럴 만하죠. 카모라 쇼는 정말 대단했으니까요. 사교계는 온통 그 얘기뿐인 걸요.”
세 영애는 샐리에 대한 관심이 자신을 향한 관심이라도 된 것처럼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샐리 님께서 너무 고되실까 봐 걱정이네요.”
“그러게요. 조금도 쉬지 못하셨잖아요.”
“샐리 님의 고운 피부가 상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세 영애의 걱정스런 눈빛에 샐리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아뇨. 괜찮아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정말이었다. 샐리의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연회였다.
‘이곳이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었다니.’
샐리는 새삼스런 눈으로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귓가를 두드리는 아름다운 선율, 드높은 천장 위로 반짝이는 샹들리에, 꽃처럼 아름답게 꾸민 여인들과 곧게 허리를 펴고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들.
중앙 홀에서 우아하게 춤추는 이들 중에는 사랑이 시작된 듯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전생을 통틀어 질릴 만큼 다녀 본 연회장이었는데 이렇게 달라 보이다니 신기했다.
과거에는 연회장이 이런 식으로 보인 적이 없었다. 샐리를 보는 여인들의 시선은 경멸 어린 시선이거나 진실을 숨긴 가짜 미소뿐이었다.
사내들은 질척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다. 그 가운데서 샐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목을 뻣뻣이 들고는 애써 미소를 만들어야만 했다. 연회장의 아름다운 모습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다가오는 여인들의 눈빛에는 호의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도도한 귀족 여인들은 샐리의 신분도 잊은 모양이었다. 그들의 시선 속에 샐리를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감정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카모라 쇼에서 가장 예뻤던 건 역시 봄의 드레스였어요. 화려한 장신구나 보석이 없어도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워요. 게다가 굽이 낮은 신발을 신다니 얼마나 파격적이에요.”
“파격적인 것을 따지자면 여름 드레스가 가장 혁신적이었죠. 천 하나로 훌륭한 드레스가 만들어지다니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어요. 전 여름 드레스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봐요.”
“두 분의 취향을 보편적인 사실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 주세요. 취향을 배제하고 보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건 겨울 드레스였죠. 그때 관람석의 모든 사람들이 숨도 쉬지 않고 무대를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하시겠죠?”
과거에는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무서운 악마들처럼 보였다. 그들이 인정하는 신분이 아니면 인간으로도 보지 않는 악마.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었다. 신분이라는 것을 몸에 두르고 잔인하게 휘두르기도 하지만, 결국은 매력에 홀려 두 다리가 풀려 버리는 평범한 사람.
“물론 샐리 님은 어떤 드레스를 입어도 아름답겠지만요.”
“당연한 말씀을.”
“그 점엔 저도 이의가 없어요.”
조잘조잘 참새처럼 떠드는 세 영애를 바라보며 샐리는 두 번째 생을 살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천한 여자라고 무시당하지도, 첩이라고 경멸당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샐리’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호의를 얻었다.
샐리는 그것이 너무나 기뻤다. 회귀하지 못했다면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못난 여자라 생각했을 것이다.
“고마운 말씀이네요.”
샐리는 빙긋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미소를 본 세 영애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정말이지 오늘의 연회는 아주 즐거웠다.
* * *
릴리는 굳은 얼굴로 걸음을 내디뎠다. 더러운 뒷골목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왔던 그녀는 항상 귀족들을 동경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없으리라 생각했던 기적을 경험하고 있었다.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 건물 가득 채워진 꽃향기,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드높은 천장과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햇빛까지. 이곳은 마치 천국 같았다.
‘더러운 뒷골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어.’
긴장과 환희가 동시에 밀려들어 왔다. 하녀가 안내해 준 커다란 방에 들어선 릴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엄마야.’
그곳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귀부인이 앉아 있었다.
햇빛에 찰랑이는 금빛 머리카락, 상처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와 신비로운 파란 눈동자, 내리깐 눈매마저 우아했다.
가게에서 일하며 보았던 천박한 여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귀한 분위기가 철철 넘쳐흐르는 여인이었다.
“마님께 무릎 꿇고 인사하지 않고 뭐 하나.”
하녀의 엄한 목소리에 릴리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의 앞에서 인사를 받은 아름다운 여인, 엘리제는 자애로운 얼굴로 웃었다.
“여기까지 와 주어서 고맙구나.”
“화, 황송하옵니다. 릴리라고 하옵니다.”
“그래. 네가 바로 샐리와 같은 가게에서 일했다지? 샐리와 아주 친하겠구나.”
릴리의 고개 숙인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더러운 몰골의 샐리가 에스테반 공작의 첩이 되었다는 해괴망측한 소문이 진짜였던 모양이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고귀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었다. 남편을 뺏어간 첩에게 그녀가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다.
‘그래서 나를 부른 걸까? 샐리 대신 화풀이라도 하려고?’
몇몇 귀부인들은 제 남편과 밤을 보낸 창부를 용서하지 않았다. 귀부인들에게 조용히 불려 갔던 여자들은 며칠을 내리 앓고는 했다.
그 모습을 떠올린 릴리는 겁에 질렸다. 오들오들 떠는 릴리를 보며 엘리제는 눈썹을 내리며 난처한 듯 웃었다.
“그렇게 겁먹지 말렴. 안 좋은 일로 널 부른 것은 아니니까. 샐리의 친한 친구라면 챙겨 주고 싶어 부른 거야.”
눈앞의 천사 같은 여인은 도저히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았다. 온화한 눈동자에 릴리의 긴장도 조금 수그러졌다.
“남편이 귀여워하는 여자니까 샐리에 대해 궁금한 게 많거든. 그런데 그 애는 자기 얘기를 도무지 해 주지 않더구나.”
‘당연하지. 더러웠던 시절의 얘기 따위 하고 싶을 리 없잖아.’
릴리는 샐리의 예전 모습을 생각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 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네가 아는 이야기가 있다면 해 주겠니?”
릴리는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워낙에 눈치가 없어 무작정 나서기만 하다 핀잔을 듣거나 매질을 당해서 그럴 기회가 없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런 고귀한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고 하니 의욕이 샘솟았다.
릴리는 아주 오래전 기억까지 끌어모아 세세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릴리의 이야기는 대부분 샐리의 더러운 외양에 관한 것이다. 포대자루 같은 펑퍼짐한 옷을 걸치고, 씻지도 않은 거지같은 모습이 정말 우스웠다고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해 댔다.
반복되는 이야기에 엘리제는 지루함을 느꼈다.
‘회초리를 한 대 휘두르면 머리를 굴려 필요한 말만 딱딱 하려나.’
다행히도 릴리는 제게 회초리가 날아오기 전에 흥미로운 말을 입에 올렸다.
“그런데 사라가 샐리를 개인 하녀로 쓴 덕에 아주 편히 지냈죠 뭐. 사라가 워낙 샐리를 싸고돌았거든요.”
“사라가 누군데?”
“샐리가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여자예요. 다른 사람들이랑은 제대로 대화도 안 하면서 사라에게는 꽤 알랑거렸죠.”
“그 사라라고 하는 여자는 지금 어디 있지?”
“저도 잘 몰라요. 한참 전에 가게를 나갔거든요. 결혼을 해서 꽤 먼 곳으로 나갔다는 것만 알아요.”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 보면 샐리에게 유일한 인맥은 사라라고 하는 여자였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친했는지에 대해선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꽤 유용하게 써먹을 만한 정보였다.
“아무튼 샐리가 주제도 모르고 이런 곳에서 살게 된 건 다 사라 덕분이에요. 사라가 이곳을 소개해 주지 않았다면 감히 그 애가 귀족가에 발을 들이밀 수나 있었겠어요?”
이글거리는 릴리의 눈빛에서는 추악한 질투와 시기가 느껴졌다. 엘리제는 그런 눈빛을 아주 좋아했다. 저런 눈빛을 한 여자처럼 조종하기 쉬운 게 없었으니까.
“꽤 이쪽 세계에 들어오고 싶은 모양이구나.”
“네엣? 아, 아닙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변명해 보았지만 엘리제는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엘리제는 릴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저 그런 계집이라고 하더니 정말 딱 그대로의 외모였다. 볼 것이라고는 출렁이는 가슴밖에 없는. 촌스러운 화장만 지우면 얼굴은 그럭저럭 곱상했지만 그게 다였다.
교양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몸가짐과 말투는 상종하고 싶지 않을 만큼 천박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사는 세계가 달라져 샐리가 많이 외로워한단다. 같은 출신의 친구가 있다면 무척 기뻐할 테지.”
샐리의 곁에는 저런 여자가 딱이었다. 천박한 두 여인이 붙어 있는 꼴이 아주 볼 만할 것 같다.
* * *
릴리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침 햇빛에 눈을 뜨니 하녀 두 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릴리는 침대에 앉은 채로 하녀가 준비해 온 따뜻한 물로 세수를 했다.
아침 식사는 빵과 스프였는데, 늘 먹는 평범한 메뉴였음에도 이전에 먹었던 음식과는 확연이 달랐다.
부드러운 빵과 게살이 들어간 향이 진한 수프는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던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화장대에 앉자 솜씨 좋은 하녀들이 달라붙었다. 어느새 얼굴은 곱게 화장되어 있고 머리카락은 세련되게 정리되어 있었다.
준비되어 있는 드레스를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랐다. 거리의 고급 드레스 숍을 지나치며 유리창 너머로 구경만 했던 최고급 드레스였다.
섬세하게 새겨진 자수와 반짝이는 보석이 치렁치렁 달려 무척이나 화려했다.
손 하나 까딱 앉고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드레스를 입고 부채까지 들고 나니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귀부인 같아.’
릴리는 황홀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을 열고 차가운 얼굴의 마사가 들어왔다. 릴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준비는 끝냈느냐.”
엄한 마사의 목소리에 릴리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사는 준비한 마차에 릴리를 태웠다. 릴리가 가끔 타 본 싸구려 마차와는 차원이 다른 최고급 마차였다.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한 릴리에게 마사가 쌀쌀맞은 말투로 말했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은 키예프 자작님의 저택이다.”
자작이라는 단어에 릴리의 눈이 번쩍 빛났다.
“키예프 자작님은 부인과 사별한 지 30년이 되었지. 그 후로는 재혼을 하지 않고 있고.”
“30년이라면…….”
“키예프 자작님의 나이는 올해로 60세야.”
‘60살이라면 곧 죽을 늙은이잖아.’
릴리의 얼굴이 썩은 것을 먹은 것처럼 확 구겨졌다.
“그리고 네 명의 첩과 수십 명의 애인을 가지고 있지.”
“……?!”
자작이란 단어에 빛냈던 눈빛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릴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마사는 그런 릴리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 커다란 가슴과 아직 젊은 나이에 감사하거라. 오직 그것만으로 너는 자작님의 첩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니까.”
릴리는 싫다고 말할 셈이었다. 나이 많은 늙은이, 그것도 본처도 아니고 여러 명의 첩 중 하나라니.
아무리 귀족의 첩이라도 되고 싶었던 릴리라고 해도 끔찍하기만 한 자리였다. 마사는 그런 릴리를 보더니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오늘 하루가 다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나 보지?”
“……!”
“뭐, 익숙했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네 자유지만.”
릴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일상은 냄새나고 더러웠다. 질척이고 끔찍했다. 경멸 어린 시선과 강압적인 손놀림이 가득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잠시 맛보았던 일상은 상상했던 것보다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릴리는 일그러진 표정을 펴고 입꼬리를 올리고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이것은 다시없는 기회였다.
* * *
오랜만에 샐리는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저녁 약속만 있어 낮 시간이 비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편하게 뒹굴거리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 직접 만든 레몬 팩을 했다. 턱을 괴고 며칠째 보지 못하고 쌓아 둔 패션 카탈로그를 보며 다리를 흔들었다.
‘즐거워.’
얼마만의 여유인지 모르겠다. 그제야 샐리는 요 몇 달간 쉼 없이 달려왔음을 깨달았다. 모르는 새에 피로가 꽤 쌓였던 모양이다.
피로가 사르르 풀리며 잠이 찾아왔다. 따스하게 비치는 햇살 아래에서 둥글게 몸을 만 고양이처럼 막 낮잠이 들려던 때였다.
“샐리 님.”
노크 소리와 함께 조심히 방문을 연 것은 하녀 데이지였다. 샐리는 나른하게 감겨 오던 눈을 힘겹게 떴다.
“무슨 일이니?”
“엘리제 마님이 정원으로 잠시 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샐리는 잠이 확 깨는 기분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엘리제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샐리를 불러 낸 적이 없었다. 같은 저택에 살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완벽하게 분리되어 살고 있었다.
엘리제는 딱히 별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거의 얼굴을 맞댈 일 없이 지내 왔다.
‘무슨 속셈이지?’
“혹시 마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이유를 알겠니?”
“정원에서 마님께서 친한 귀부인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샐리 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다며 꼭 내려와 달라고 하셨어요.”
‘날 보고 싶은 분이 있다고?’
엘리제와 친한 귀부인들은 하나같이 콧대가 드높은 여인들이었다. 고고한 그녀들은 샐리와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싫어했다.
샐리와 같은 연회에 초대되기라도 하면 그런 여인이 있는 자리에는 가지 않겠다고 빠지는 일도 허다했다.
그런 그녀들이 샐리를 보고 싶어 한다니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엘리제는 아무런 속셈 없이 움직이는 여인이 아니었다. 분명 어떤 꿍꿍이가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피해 버릴까?’
몸이 아프다고 말하고 내려가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엘리제는 대외적으로 고상하고 자애로운 공작 부인. 아프다는 샐리를 강제로 끌고 갈 만큼 티 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야.’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식으로 무작정 피했다가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 무언가 함정이 있다 해도 직접 마주 보는 것이 나았다.
“준비를 하고 내려가겠다고 말씀을 전하렴.”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정원을 향해 걸어갔다. 티파티가 꾸며진 장소에 다가갈수록 기분 좋게 웃는 귀부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발로 호랑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샐리는 전생에 엘리제가 자신에게 했던 짓들을 떠올려 보았다. 엘리제는 귀족들 앞에서 샐리에게 자주 창피를 주었다.
—미안, 샐리. 네가 이런 것도 모를 줄은 몰랐어.
주로 샐리가 잘 모르는 귀족의 문화 같은 것들이었다. 그때마다 엘리제는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귀족들은 엘리제를 찬양했다. 남편을 빼앗은 천박한 여자에게 너무 친절하다고. 세상에 없을 안쓰럽고 너그러운 여인을 보는 듯이 대했다.
반면 수치심에 떠는 샐리를 향해서는 날 선 조롱과 멸시가 이어졌다.
엘리제를 동경하고 질투했던 그때는 그녀와 비교되는 그 순간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겨우 그 정도의 괴롭힘이라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
샐리는 눈에 힘을 주고는 허리를 곧게 펴고 걸음을 내디뎠다. 샐리가 등장한 순간 조잘대던 테이블에 정적이 감돌았다.
엘리제는 샐리를 향해 천사같이 맑은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응해 주어서 고맙구나. 너를 찾는 분이 있어 이렇게 불렀단다.”
“괜찮습니다. 저도 귀한 부인들께 인사를 드릴 좋은 기회인걸요.”
샐리는 웃으며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레이첼 황녀, 렉스터 후작 부인은 전생에도 엘리제를 추종하던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방금 전 가득했던 미소가 사라진 여인들은 싸늘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귀부인들의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경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샐리!”
샐리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릴리?”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여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분명 릴리였다.
릴리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부채를 손에 들고 있었다. 드러낸 풍만한 가슴과 진한 화장이 귀부인들에게는 없는 질척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정말 보고 싶었어!”
말을 끝낼 새도 없이 릴리가 달려와 샐리를 꽉 껴안았다. 과하게 뿌린 향수가 코끝을 아릿하게 찔러 왔다. 릴리의 어깨 너머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엘리제의 얼굴이 보였다.
“릴리 양이 샐리와 친한 친구라고 하더니 정말이었군요.”
엘리제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레이첼은 그 말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릴리는 어색한 동작으로 연회장 구석에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천박한 신분이 느껴져 무시했는데 샐리와 관계있는 여인인 모양이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죠?”
레이첼의 목소리에 릴리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릴리는 여인들을 향해 드레스 자락을 들고 고개를 숙였다. 피에로처럼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몸짓이었다.
“키예프 자작님의 첩 릴리라고 합니다.”
키예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여인들이 놀란 눈으로 수군거렸다.
“키예프 자작이라면 올해 60살이 되는 분이시죠?”
“최근에 어린 첩을 또 한 명 두었다고 이야기가 많았죠.”
“게다가 그 첩이라는 게 몸을 팔던 창부라고…….”
“세상에.”
수군대는 귀부인들 속에 레이첼은 경멸감을 숨기지 못하고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왜 저런 여자를 이런 자리에 불렀냐는 눈빛이었다.
엘리제는 두 손을 모으고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릴리 양이 저를 찾아와 부탁했어요. 샐리를 만나고 싶다고요. 어찌나 간절하게 부탁하던지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 걸 왜 엘리제에게 부탁해요? 저 여자를 직접 찾아가면 되잖아요.”
레이첼이 샐리를 째려보며 말했다. 샐리 때문에 엘리제가 저런 저급한 여자와 엮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불쾌했다.
“그건…….”
엘리제가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릴리가 나섰다.
“몇 번이나 찾아와도 샐리가 만나 주질 않아서 마님께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뻔뻔한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한 릴리는 샐리를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이해는 해. 이런 귀한 분들과 함께하게 되었으니 나 같은 건 다시 만나기 싫었겠지. 더러운 유곽에서 하녀로 일했던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귀부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녀였던 시절에 함께 지냈던 사이인가 봐요.”
“세상에. 저런 자들이 지금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티파티에 껴 있는 거예요?”
그들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미천하기 그지없는 밑바닥 출신의 여인이었다. 귀부인들은 그런 이들이 자신들의 세계에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용서되지 않았다.
여인들은 경멸의 눈빛으로 샐리와 릴리를 노려보았다.
‘노린 것이 이것이었구나.’
샐리는 여인들의 저 눈빛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 수도 없이 봐 온 눈빛이었다.
엘리제는 이런 식으로 샐리와 귀부인들 사이에 지워지지 않는 선을 그었다.
너는 우리와 달라. 하찮은 출신의 계집과 귀족가의 여인들이 같을 수 있니?
한번 선이 그어지면 어떤 말을 해도 편견과 멸시에 휩싸인다. 어떤 노력을 해도 그 선을 지운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아니, 이번에는 쉽게 당하진 않을 거야.’
샐리는 당황했던 심장을 차분히 만들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 릴리. 그런 이유로 널 피할 리 없잖아.”
샐리는 릴리의 손을 맞잡았다. 샐리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반응해 오자 릴리의 어깨가 움찔했다.
“네가 찾아왔다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없어.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걸 알았더라면…….”
샐리는 릴리의 손을 잡아끌어 드레스 자락을 쥐여 준 후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섬세하게 모양을 만들어 주었다. 그 후 릴리의 허리부터 목까지 곧은 선을 만들었다.
방금까지의 흐느적거리는 자세와는 전혀 다른, 예법의 표본과 같은 완벽한 자세가 되었다.
“귀부인들께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할 수 있게 가르쳐 주었을 텐데 말이야.”
샐리는 커다랗게 눈을 뜬 릴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곧바로 샐리는 몸을 돌려 귀부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릴리가 하고 있는 포즈를 취하고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림처럼 우아한, 누구도 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인사였다. 샐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향해 당당히 미소 지었다.
“갑작스럽게 아는 이를 만나 인사가 늦었네요. 샐리라고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인사에 귀부인들은 할 말도 잃고 멍하니 샐리를 바라보았다.
릴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릴리가 보아도 자신의 인사와는 천지 차이인 걸 알 만큼 다른 몸놀림이었다.
고개를 돌린 샐리는 릴리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인사해 봐. 동작을 잡아 주었으니 어렵지 않을 거야.”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 같은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뻔했다. 릴리가 한 인사가 형편없었다고 꼬집어 준 것이다.
얼굴이 새빨개진 릴리는 과한 몸짓으로 샐리가 잡아 준 동작을 엉망으로 만들며 소리쳤다.
“흥. 잘난 척하는 성격은 여전하구나. 예법은 일부러 배우지 않은 거야. 자작님께서 내가 예법을 모르는 게 더 귀엽다고 하셨거든.”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익히고 나와야지. 안 그러면 심한 창피를 당할지도 모른단다.”
두 눈을 휘며 부드럽게 웃는 샐리는 훌륭한 귀부인 같았다. 릴리와는 전혀 다른.
그것을 느낀 릴리는 주먹 쥔 손을 부들거렸다.
샐리는 엘리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님, 이렇듯 옛 지인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약속이 있어 이만 자리를 떠나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에 앉아 있던 귀부인 중 한 명이 비아냥거렸다.
“흥.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이 자리가 불편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샐리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샐리와 눈이 마주친 여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샐리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설마요. 이토록 우아한 부인들과의 만남인걸요. 마음 같아서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답니다. 다만 초대장을 보내오신 캐롤라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께서는 약속 시간에 늦는 무례를 끔찍하게 싫어하셔서요. 모쪼록 다음번엔 미리 초대해 주세요. 그럼 부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골든리아 공작 부인이라고?!
여인들이 커다래진 눈으로 수군거렸다. 사교계의 큰 어른인 골든리아 공작 부인은 까다로운 여인이었다. 워낙에 사람을 골라 사귀었기에 그녀의 초대장을 받는 이들은 손꼽힐 정도였다.
그 대단한 부인의 초대를 받았다는 말에 여인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오직 릴리만이 처음 들어보는 그 이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샐리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여인들을 향해 인사했다. 이어 릴리에게도 짧은 인사했다.
“먼저 갈게, 릴리.”
인사를 마친 샐리는 몸을 돌렸다. 어깨를 펴고 멀어지는 뒷모습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샐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릴리만 홀로 남았다. 그녀는 잔뜩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렇게 사라지면 어떡해?!’
먹잇감이 사라져 제가 할 일을 해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꽤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엘리제는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샐리가 꼭 함께 있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저 천박한 릴리의 쓰임새는 이제부터였으니까.
“까다롭기로 유명한 골든리아 공작 부인과 교류를 하다니 정말이지 샐리는 대단해요. 여기 앉은 귀부인들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인데 말이죠.”
엘리제의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귀부인들의 얼굴에 수치심과 질투가 서렸다.
“엘리제는 속상하지 않아요?”
레이첼이 괴로운 얼굴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레이첼도 요즘 샐리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카모라의 뮤즈니 뭐니 떠들어 대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엘리제가 생각났다.
출신부터 비교가 안 되는 여자가 저런 식으로 떠받들어지니 얼마나 어이가 없고 속상할까.
그러나 레이첼의 걱정과 달리 엘리제의 얼굴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전혀요. 샐리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아가씨인걸요.”
그 말에 레이첼과 귀부인들은 새삼 감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화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엘리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은 이런 순간까지도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샐리는 예전부터 저렇게 곱고 매력적인 아가씨였겠죠?”
엘리제의 눈빛이 향한 곳은 릴리였다.
“……!”
푸른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릴리는 마사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제야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릴리는 과장스러운 손놀림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아니요. 사실 샐리는 가게에 있을 때 엄청난 몰골이었어요. 늘 더러운 얼룩투성이에 쓰레기를 묻히고 살아서 악취가 진동했죠. 그랬던 애가 저렇게 아름답게 꾸민 모습을 보니 정말 신기하네요.”
“샐리가요?”
릴리의 말이 놀랍다는 듯 엘리제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여인들도 충격적인 이야기에 수군거렸다.
“남자들에게 인기 있어서 금세 하녀신분에서 벗어난 저와는 달리 샐리는 워낙 몰골이 형편없어서 내내 하녀 노릇만 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커다란 가슴을 출렁이는 모습은 정말이지 최고의 장면이었다.
그 반응에 릴리는 신나서 뒷골목에 관한 이야기까지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피곤에 찌든 여인들은 싸구려 담배를 피우고, 부랑배인 사내들은 말끝마다 욕설을 달고 살았다. 아이들은 배가 고파 빵 한쪽이라도 달라며 구걸하고 한편에서는 늙은 노인들이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몸을 파는 여자들의 상황은 더더욱 처참했다. 진한 향수를 바르고, 한 명의 고객이라도 더 받기 위해 환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릴리의 말이 계속될수록 여인들은 경악에 찬 얼굴이 되었다. 엄청난 경멸감에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릴리의 말을 멈추지 않았다. 늘 잔잔한 대화만 나누는 그녀들에게 릴리의 이야기는 너무나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것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도 없었다.
릴리가 긴 이야기를 끝냈을 때 여인들의 눈빛은 이전과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벌레보다 더욱 끔찍하단 눈빛으로 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제만이 대견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곳에서 자랐지만 지금 두 사람 모두 아름다운 숙녀가 되었잖아요. 특히 샐리는 카모라의 뮤즈로 불릴 정도로 유명해졌으니 대단한 거죠.”
그러나 엘리제의 말에도 여인들의 얼굴에 어린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엘리제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제 앞에서 표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들 중에는 샐리에 대한 관심이 생긴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여자에게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느껴졌으리라.
‘정말이지 무식하고 하찮기 짝이 없는 년이지만…….’
엘리제는 내리깐 눈으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릴리는 주변의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대단한 자리의 대화를 주도한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있었다.
‘그 더러움이 심할수록 다른 이에게도 쉽게 악취를 묻히기 마련이지.’
릴리는 제법 쓸모가 있는 쓰레기였다.
* * *
그 후 릴리는 사교계에 나타났다. 나이 든 키예프 자작의 네 번째 첩, 남자들에게 몸을 팔았던 창부.
소문은 너무나 빨리 퍼졌다.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여인들은 차가운 눈으로 숙덕거렸지만 릴리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그렇게 쳐다보라지.’
릴리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저런 이름만 귀족인 어중간한 자들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 존재가 자신의 편이었다.
‘엘리제 에스테반 공작 부인.’
사교계에서 가장 위상 높은 여인이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 주었는데 무엇이 겁이 난담.
릴리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콧대를 꼿꼿이 들었다. 여느 때처럼 커다란 가슴을 흔들며 당당히 연회장을 누비던 릴리가 외쳤다.
“샐리!”
몇 번의 연회에 참석하고 나서야 드디어 만난 샐리였다. 수많은 여인들이 샐리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릴리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기를 쓰고 그녀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릴리는 샐리의 앞에 섰다.
“너를 이런 곳에서 보니까 정말 신기하다.”
릴리는 샐리의 어깨를 툭 쳤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여인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저런 식으로 남의 신체를 만지는 것은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예법에 한참 어긋난 행동이었다.
그러나 릴리는 여인들의 눈빛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릴리는 눈을 흘겨 샐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샐리, 그런데 너 드레스가 너무 초라한 것 아니니?”
색이 진한 프러시안 블루의 드레스는 레이스나 리본은 조금도 달려 있지 않은 심플한 스타일이었다. 목 부분만 보석으로 포인트를 준 것이 다였다.
화려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드레스에 릴리는 그저 비웃음만 나왔다. 거리의 여자도 저 드레스보다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을 것이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의 첩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없네. 혹시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서 너한테 돈을 많이 아끼셔서 그런 거니? 키예프 자작님은 내게 원하는 대로 드레스를 맞추라고 하시거든.”
릴리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가슴을 내밀고는 자신의 드레스를 내보였다.
릴리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드레스는 엄청났다. 반짝이는 커다란 보석과 몇 겹으로 겹친 레이스, 한껏 부풀어 오른 치마까지 화려함의 극치였다.
샐리가 뭐라 답할 틈도 없이 릴리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귀걸이는 왜 이렇게 작아?”
알이 커다란 루비 귀걸이를 한 릴리와 달리 샐리의 귀걸이는 알이 너무 작았다. 반짝이는 광택이 꽤 아름답긴 했지만 저렇게 작아서야 멋이라곤 조금도 없지 않은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귀걸이를 하다니. 보는 내가 다 창피하다, 얘.”
풋 하고 릴리가 웃는 순간 결국 주변에 있던 세 영애가 나서고 말았다. 샐리를 흠모하는 후작 영애 삼총사 도로시, 레이라, 미란다였다.
“정말이지 수준이 너무 떨어져 들어줄 수가 없네요.”
도로시가 릴리를 향해 눈을 흘겼다.
“샐리 님이 입고 계시는 드레스는 에스타산 최고급 미카도 실크로 만든 옷이에요. 흔한 실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최고급 드레스랍니다.”
에스타산 미카도 실크는 일반 실크보다 훨씬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광택이 나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 물건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라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하고 계신 귀걸이는 알렉산드라이트 캐츠아이로 만들어진 귀걸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보석 중 하나죠. 당신의 그 시장 바닥에서 산 것 같은 질 낮은 루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석이라고요.”
마지막은 미란다였다.
“제대로 물건을 보는 안목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모습이라니 정말이지 천박하기 짝이 없네요.”
어린 세 영애의 쏘아보는 눈빛에 릴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키예프 자작은 릴리에게 푹 빠져 조르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사 주었다.
그래서 릴리는 드레스 숍에서 가장 화려하고 비싼 드레스를 골랐고, 보석상이 가져온 보석 중 알이 가장 큰 보석만 골라 몸에 달았다.
릴리는 자신이 평생 일해도 벌 수 없을 엄청난 금액을 몸에 걸치고는 기고만장했다. 제아무리 신분 높은 여인들도 자신보다 화려한 이가 없어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창피를 당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릴리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릴리는 어린 나이부터 밑바닥에서 살아온 저력이 있었다.
아무리 독하게 쏘아 보았자 고작 어린 여자들의 눈빛 아닌가. 조금만 화가 나면 손과 발이 날아오는 마담과 비교하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저는 샐리의 예전 모습을 아니까 걱정되어 한 말이에요. 샐리가 가게에서 하녀로 일할 때 화장은커녕 제대로 씻지도 않고 거적때기 같은 것을 입고 다녔거든요. 얼마나 고약했는지 길가의 거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니까요.”
그녀의 말에 세 영애의 얼굴이 굳었다. 릴리는 그들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얄밉게 말했다.
“뭐. 말하신 것처럼 잘 꾸민 거라면 다행이고요.”
릴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샐리를 뺀 여인들에게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엉덩이를 실룩실룩 흔들며 사라지는 뒷모습을 세 영애는 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 여자 도대체 뭐예요?”
“연회장에 나타날 때마다 수준 떨어지는 대화를 해 대는 걸로 유명하다더니 정말이네요.”
“툭하면 샐리 님의 옛날이야기를 떠들어 댄다더니 정말 무례하기 그지없어요.”
샐리는 세 영애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영애들은 후작가의 영애라는 대단한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샐리에게 ‘님’이라는 존칭을 붙이고 극진한 대접을 했다. 지금도 제 일처럼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샐리 님, 괜찮으세요?”
걱정 가득한 눈빛에 샐리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는 별로 릴리가 신경 쓰이지 않는데. 저 정도의 말로 상처받지도 않고.’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어쨌건 릴리는 같은 곳에서 자란 동무였다. 그녀가 엄청난 악의를 가지고 저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릴리는 조금 못되긴 했지만 음흉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보이는 수가 뻔했다. 그래서 샐리는 릴리에게 원초적인 미움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마냥 괜찮다고 말하기에는 세 영애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했다. 마치 아름다운 레이디를 지키는 기사처럼 다부진 얼굴이었다.
‘귀여워라. 그럼 나도 어울리는 반응을 해 주어야지.’
샐리는 손에 들려 있던 부채를 우아하게 폈다. 나비처럼 자연스러운 손동작으로 부채를 입가에 가져간 샐리는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고마워요. 세 분이 그리 제 편이 되어 주시니 힘이 나네요. 정말 기뻐요.”
세 영애는 넋을 놓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샐리를 바라보았다.
“우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다가오는 신년회에서 어떤 드레스가 유행할지에 관한 이야기였죠?”
샐리는 일부러 흥미로울 이야깃거리를 입에 담아 화제를 돌렸다. 두 눈을 휘며 요염하게 말하는 샐리를 향해 세 영애는 두 볼을 붉게 물들이고는 대화를 이어 갔다.
패션에 관해 관심이 많은 샐리와 영애들의 다채로운 대화에 주변에 있던 다른 여인들도 대화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샐리의 주변은 여인들로 가득 찼다. 방금 전 릴리와 샐리와의 일은 이미 여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샐리는 힐끗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릴리를 바라보았다. 릴리는 어느새 다른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쪽을 향해 힐끗힐끗 쳐다보는 모습이 아마도 샐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겨우 그런 말들로 내가 제 위치까지 낮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샐리의 출신을 들쑤셔서 어떻게든 다시 밑바닥으로 내릴 셈이라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카모라의 쇼에 서기 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샐리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샐리는 릴리가 발목을 잡아끈다고 해서 함께 내려갈 만큼 녹록지 않았다.
현재 사교계 여인들이 샐리에게 가지는 관심과 호감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샐리는 릴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들이었다.
샐리를 등진 릴리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더러운 샐리 주제에 날 무시해?’
과거에도 사라의 뒤에 숨어서 점잖은 척하더니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꼬드겼는지 제 편을 잔뜩 만들어 놓고는 팔자 좋게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든 저 기고만장한 샐리를 짓밟아 주고 싶은데, 함께해 줄 여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천한 것이 잘난 척은.”
싸늘한 목소리에 릴리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릴리의 곁에 다가온 여인들이 저 멀리 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 부인께서 배려해 주어 이런 곳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것도 모르고 기고만장하기는.”
“뭘 알겠어요. 뒷골목에서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살았을 계집애가.”
여인들의 눈빛에는 환멸과 악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릴리의 얼굴에 더 할 수 없는 경의가 가득 찼다.
‘엘리제 님!’
그녀가 보내 준 여인들이 틀림없다. 우아한 분이니 직접적으로 자신을 도와주라고 말은 하지 않았겠지만, 절묘한 말솜씨로 여인들을 움직였을 것이다.
애초에 이 커다란 연회장에 샐리를 찬양하는 무리만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샐리의 출신과 위치를 멸시하는 여인도 존재하고, 엘리제를 따르는 이들이 수도 없었다.
단지 너무 많은 여인들이 샐리에게 달려드는 분위기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릴리는 아까의 처참한 패배감이 사라지고 황홀한 감정이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예전에는 저렇게 오만하진 않았는데. 동무로서 조금 섭섭하네요.”
릴리의 말에 여인들의 눈빛이 흥미롭게 반짝였다.
“릴리라고 했던가? 저 계집애와 같은 가게 출신이라더니 정말인가 보지?”
“네. 맞습니다.”
그 말에 여인들의 눈이 빛났다.
저 주제 모르고 기세등등한 첩의 과거를 아는 천박한 여인이라니. 이처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여인들의 흥미에 화답하듯 릴리는 신나게 자신과 샐리의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적절한 허풍이 더해져 샐리는 구정물이 나올 만큼 더러운 소녀가 되어 있었고, 하층민이 모여 사는 뒷골목은 악마들이 들락날락할 법한 지옥 같은 공간이 되어 있었다.
릴리의 말이 거짓이건 아니건 여인들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본디 이런 이야기는 더럽고 추잡할수록 즐거운 법이었으니.
그렇게 즐겁게 나누고 있을 때였다. 릴리의 곁으로 시녀 한 명이 다가왔다.
“릴리 님, 키예프 자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
릴리가 눈썹을 찡그리며 시녀의 시선을 따라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사내들과 이야기를 마친 키예프 자작이 연회홀 입구에 서 있었다.
‘뭐야,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는 참인데.’
앞으로 할 얘기가 많았다. 여기서 이야기를 끊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말씀드리렴.”
릴리는 대충 대답하고는 시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릴리의 이야기를 듣던 부인들의 눈이 커졌다. 마치 무언가를 보고 놀란 것처럼.
‘왜 그러지?’
그녀들의 시선이 누군가를 보고 있음을 안 릴리가 몸을 돌렸다. 어느새 키예프 자작이 그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백발이 무성한 그의 바짝 마른 얼굴 위로 날카로운 눈매가 독사처럼 빛났다.
“무슨 이야기 중이기에 바로 오지 않은 거지?”
혹시 화가 났나 싶어 움찔하긴 했지만 릴리는 겁나지 않았다. 키예프 자작은 신경질적인 사람이었지만 요 며칠 릴리에게 푹 빠져 있었다. 드레스며 구두며 사 달라는 것은 다 사 주었을 만큼.
그런 그의 마음을 풀어 주는 일쯤이야 간단했다. 릴리는 요염하게 눈을 휘며 키예프의 팔을 어루만졌다.
“샐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 계집이 얼마나 웃긴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요.”
키예프에게도 샐리에 대한 것을 몇 번이나 말했던 적이 있기에 그 정도만 말해도 충분했다.
그런데 키예프의 반응이 이상했다. 키예프는 서늘한 눈빛으로 릴리를 내려다보았다.
“고작 그런 대화를 위해서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한 것이군.”
“네? 네에?”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한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이었다.
쫙-!
큰 소리와 함께 릴리의 얼굴에 엄청난 아픔이 밀려들어 왔다. 릴리는 커다래진 눈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한쪽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릴리는 버들거리는 손으로 부어오른 볼을 매만지며 키예프를 바라보았다.
“자, 자작님. 도대체 왜…….”
“감히 그따위 이유로 나에게 망신을 주고는 웃음이 나오나? 귀여워서 봐주는 것도 선이 있는 법이지.”
둘만 있는 침대 위에서와 사교계의 귀족들 앞에서는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릴리는 모르고 있었다. 그 점이 키예프를 노하게 했다.
“교육이 필요하겠어.”
키예프는 엄청난 여성 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여성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하물며 저런 미천한 출신의 어린 첩에게 휘둘리는 꼴을 보였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자, 자작님?”
릴리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그의 손이 날아왔다.
철썩. 무참하게 뺨을 휘갈기는 키예프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제야 릴리는 덜컥 겁이 났다.
저 눈빛을 알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수없이 받아 보았던 눈빛이었다.
경멸과 무시도 존재하지 않는, 마치 길 위의 돌멩이라도 보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시선이었다.
저런 시선을 한 이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잔혹한 짓을 서슴없이 했다. 죽기 직전까지 맞아 본 적도 있었다. 그때가 생각난 릴리는 온몸을 버들버들 떨었다.
‘누가, 누가 좀 도와줘.’
릴리는 겁에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릴리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 놀라워할 뿐, 아무도 릴리를 걱정해 주지 않았다. 릴리는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다시 한번 키예프의 손이 들렸을 때 릴리는 눈을 꼭 감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키예프 자작님, 그만하십시오.”
차분한 목소리였다. 릴리가 부들거리며 눈을 뜨니 샐리가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었다.
키예프는 눈썹을 치켜떴다. 릴리에게 여러 번 이야기를 들어 그도 샐리를 알고 있었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모양새는 귀부인 같지만 릴리와 같은 하찮은 뒷골목 출신이라고 했다.
“미천한 출신의 계집이 감히 나를 막느냐.”
키예프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여차하면 샐리를 향해서도 손이 올라갈 기세였다. 그러나 샐리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제가 어떻게 자작님을 막겠습니까. 저는 단지 예법을 논하는 것입니다. 자작님께서는 지금 이 연회를 여신 주최자분께 큰 실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테지요?”
키예프에 맞서는 금빛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키예프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주제도 모르고 감히 자신을 가르치려는 모습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키예프가 샐리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을 때 한 귀족 사내가 그를 막았다. 사내는 키예프의 귓가로 넌지시 속삭였다.
“그만하시지요, 자작. 저 여자를 건드린 대가로 헤스티아 후작가가 어떻게 됐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키예프가 어깨를 움찔했다. 불확실하게 전해진 소문이었지만 애첩을 괴롭힌 것에 분노한 에스테반 공작이 후작가를 괴롭힌 이야기는 유명했다.
공작의 손짓 한 번으로 후작가는 사업체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녀는 단순히 아름답게 치장한 장식품 같은 애첩이 아니었다. 고작 그 정도였다면 에스테반 공작이 그토록 후작가를 괴롭히진 않았을 것이다.
키예프는 차가운 눈빛의 에스테반 공작을 떠올렸다. 새파랗게 어린놈이었지만 도저히 그가 상대할 수 없는 강대한 권력을 가진 자였다.
키예프는 이를 으득이며 샐리를 노려보았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를 봐서 이 정도로 넘어가는지 알거라. 그분의 후광이 아니었다면 너 따위 계집, 매질을 당했을 것이다.”
그의 말에 샐리는 입꼬리를 올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큰 배려에 감사합니다.”
고작 계집의 미소임에도 어딘가 오싹한 기분이 들어 키예프는 눈썹을 찡그렸다. 키예프는 사나운 얼굴로 휙 돌아섰다.
그가 저 멀리 사라지자 두 뺨이 빨개진 릴리가 눈을 깜빡이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정신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때 샐리가 릴리의 손에 무언가 쥐여 주었다. 릴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손에 닿은 것은 차갑게 적신 손수건이었다. 서늘한 냉기에 릴리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찜질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차분한 목소리에 릴리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 말은 인간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코 울 순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눈물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릴리는 알고 있었다.
눈물이 도움이 되는 것은 자기편이 많은 여인들뿐이었다. 자신이 울어 보았자 약자라는 방증밖에 되지 않았다.
릴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는 키예프 자작을 따라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본 샐리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릴리가 느낀 공포를 아는 것은 자신뿐일 것이다. 자신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 이에게 당하는 폭력은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차라리 이 세계를 떠나면 좋을 텐데.’
계속 이 세계에 있다면 릴리는 방금 전 뺨을 맞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서운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을 겪느니 자작의 곁을 떠나는 것이 나았다.
작은 빵 한 조각을 먹으며 마음 편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삶. 그것이 최고급 보석으로 치장하며 부채로 감정을 숨겨야 하는 귀족의 생활보다 훨씬 행복할지도 모른다.
* * *
수도의 이름난 귀족 사내들이 모이는 연회에 라이언 리오넬 후작이 나타났다.
연회란 연회는 다 다녔던 그는 요즘 부쩍 이런 자리에서 보기가 힘들었다.
아내인 마가렛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어디를 가든 졸졸 쫓아다니기 바빴다.
항간에는 그가 마가렛의 개가 되었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까지 들렸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그가 부인과 떨어져 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오늘의 연회는 중요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볍게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교 모임이었지만 주고받는 이야기는 꽤 심도 깊었다. 맞물린 여러 가지 정세들을 파악하고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평소 같았으면 누구보다 유쾌한 얼굴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리오넬은 오자마자 초조한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카시스에게는 그 망측한 모습이 너무 잘 보였다.
“리오넬 공, 어딘가 몸이 좋지 않은 건가?”
카시스는 넌지시 리오넬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사사로운 건강 걱정 따위는 아니었다. 옆에서 비비적거리는 모습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몸이 좋지 않다고 대답하면 즉시 집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리오넬은 대화에 제대로 집중도 하지 않고 있으니 눈앞에서 치우는 편이 나았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시스의 말에 리오넬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카시스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내내 몸을 들썩이고 있기에 물은 거요.”
‘엉덩이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이 말이야.’
카시스는 그 말은 생략했다.
그의 말에 리오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아픈 곳은 없습니다. 다만…….”
리오넬은 그답지 않게 눈을 내리깔고 심각한 얼굴이 되더니 힘겹게 말했다.
“아내가 혼자 연회에 가 버렸습니다.”
“뭐?”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카시스의 얼굴이 굳었다. 말문이 터진 리오넬은 끔찍하단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가지 말라고 애원했는데도 가 버렸단 말입니다. 그것도 그 망할 차오의 드레스를 입고! 아니, 물론 잘 어울립니다. 너무 잘 어울려서 탈이지요. 그런 드레스를 입고 그렇게 곱게 화장을 하고 파트너도 없이 혼자 가 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
리오넬의 외침에선 절절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괴로운 눈빛으로 이를 으득거렸다.
“내년도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마가렛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왔다. 제아무리 부인에 푹 빠져 제정신이 아니라는 평을 듣는 그라지만 그는 수많은 사업체를 굴리고 있는 사업가였다.
무엇보다 점점 아름다워지는 부인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돈을 잘 벌어야 했다. 돈은 사내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좋은 무기였으니.
그러나 이토록 처연한 사내의 외침에도 카시스의 얼굴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마치 네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 점이 리오넬을 거슬리게 했다.
“저하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으신 겁니까? 샐리 님께서도 늘 연회에 혼자 다니시지 않습니까.”
“아니.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은데.”
그 대답에 리오넬은 경악에 찬 얼굴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하아. 정말이지 대담하시다고 해야 할지, 느긋하시다고 해야 할지…….”
“아까부터 그대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군. 기껏해야 연회장에 혼자 가는 것이 뭐가 문제라는 건가. 어린아이도 아닌데.”
“그 ‘혼자’라는 것이 문제지요! 사내놈들이 혼자 있는 여인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모르십니까? 매력적인 여인이라면 더더욱 수십 명의 사내가 달라붙기 마련이죠.”
리오넬은 얼마 전까지 그 수십 명의 늑대 중 한 명이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연회는 남녀가 뒤섞여 즐기는 자리였고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그렇다 보니 남녀 간에 야릇한 분위기가 생기기 쉬웠다.
밤바람과 달콤한 술이 어우러지면 없었던 설렘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 덕에 연회에서 눈이 맞은 남녀가 연인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다. 몸과 몸을 섞는 농염하고 은밀한 관계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것을 알기에 리오넬은 더더욱 초조했다. 그러나 리오넬과 달리 카시스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감히 에스테반의 여자에게 다가온다는 거지?”
얼음처럼 서늘한 카시스의 목소리에는 어느 누구도 그의 것을 건드릴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리오넬이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제정신인 사내라면 감히 에스테반 공작 저하의 애첩을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겠지만…….”
귀족 남성들은 카시스의 앞에서 섣불리 샐리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괜한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카시스가 없는 자리에서는 아니었다. 사내들이 얼마나 흥미롭게 눈을 빛내며 샐리의 이야기를 하는지 안다면 저렇게 차분한 얼굴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샐리 님의 외모는 평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정도 미인이라면 웬만한 사내의 정신 따위는 날려 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요.”
그 말에 한순간 눈빛이 섬뜩해지는 카시스를 향해 리오넬이 말을 이었다.
“뭐, 저하께서 어련히 잘 처신하실 테지만 말입니다.”
“…….”
고개를 휙 돌린 리오넬은 다시 초조한 듯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카시스도 고개를 돌려 테이블의 중앙을 바라보았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은 여전히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점점 귀족들의 세납에 대해 독촉하실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대응하면 되겠습니까?”
툭하면 귀족들 것을 빼앗지 못해 안달인 황제를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카시스는 그 문제가 조금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리오넬의 목소리만이 가득했다.
—샐리 님께 정신을 못 차리는 사내놈들이 수두룩할 겁니다.
어느샌가 카시스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고 있었다. 입술까지 깨문 그의 모습은 방금과는 다르게 한없이 초조해 보였다.
두 사내의 대화를 전혀 알 리 없는 샐리는 밝은 얼굴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오늘 온 곳은 존스가의 안주인인 클라라가 주최하는 연회였다. 클라라는 일전에 샐리에게 남편과의 잠자리 고민을 상담했던 여인이었다.
“어서 와요, 샐리.”
클라라가 남편인 존스와 함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샐리를 맞았다.
“초대장을 보내긴 했지만 샐리가 와 줄지는 몰랐어요.”
샐리는 요즘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인이었다. 너도 나도 샐리에게 초대장을 보냈지만 샐리의 몸은 하나인지라 대부분은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클라라는 초대장을 보내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터였다.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 당연히 와서 축하를 해 주어야지요.”
샐리가 환하게 웃으며 클라라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리본으로 장식된 상자를 열자 앙증맞은 신발이 담겨 있었다. 신발을 만지작거리는 클라라의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어쩜. 너무나 귀엽네요. 정말 고마워요.”
“이 신발은 여자아이의 것인가?”
존스는 커다란 손 위에 작디작은 신발을 올려 두고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샐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성별과 상관없이 신을 수 있는 신발을 골랐어요. 대령님께서는 바라는 성별이 있으신가요?”
“흐음. 군인이 될 아들이길 바라지만 엄마를 꼭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으니 아주 고민이야.”
“엄마를 꼭 닮은 딸이 태어나 군인이 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네요.”
“……?!”
존스는 상상도 못했던 말을 들은 것처럼 충격에 빠진 얼굴을 했다.
제국법상 여자가 군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드문 일이었다.
긴 역사 속에서 아주 간간이 참모나 스파이로 활약했던 여인이 있을 뿐이었다.
여린 딸이 칼을 들고 시꺼먼 놈들 사이에 있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주름 한 점 없는 빳빳한 군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하자니 그 모습은 꽤 마음에 들었다.
“어렵군. 어려워.”
세상 심각한 눈빛으로 존스는 아내의 볼록한 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클라라는 제 남편의 모습이 귀여워 웃으며 배를 매만졌다.
“그런데 에스테반 공작 저하는 함께 오지 않으셨군요.”
“네. 무척 바쁘신 분이시니까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원래도 바쁜 남자였는데 연말인 요즘은 더더욱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가 이런 소소한 연회까지 올 리가 없었다.
“흠. 파트너 없이 여성 혼자 연회에 오면 꽤 곤란할 텐데.”
군인인 존스는 사교계의 생리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부대의 군인들이 이런 연회에만 다녀오면 온갖 여자들에게 집적댄 이야기들을 자랑처럼 해 대서 알고 있었다.
저런 젊은 여인이 혼자 다녔다가는 별의별 남자들이 다 꼬여들 것이 뻔했다.
‘호호’ 하고 클라라가 웃으며 남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당신도 참 별걱정을 다 하네요. 샐리는 무척 당차니까 알아서 잘 처신할 거예요.”
클라라의 말에 샐리는 웃음으로 답했다. 클라라의 말대로 혼자 연회에 참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나름대로의 처세술이 있었다.
사이좋은 부부가 사라지고 샐리가 혼자가 되자마자 많은 이들이 그녀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가장 빠른 발걸음으로 몰려든 것은 여인들이었다. 샐리와 친해지고 싶은 욕심이 있는 여인들은 대단히 의욕적이었다.
“샐리, 오랜만에 보네요.”
“날 기억하죠? 이전 연회 때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잖아요.”
그리고 그녀들만큼 안전하고 튼튼한 방어벽은 없다.
“그럼요. 다들 오랜만이에요.”
샐리가 화사하게 웃으며 아는 척을 하자 여인들은 들뜬 얼굴로 샐리를 둘러쌌다.
샐리에게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보려고 했던 사내들은 난감한 얼굴로 주변을 서성거렸다.
제아무리 용기 있는 사내라도 저 엄청난 여인의 벽을 뚫고 들어가는 건 힘든 일이었다.
간혹 기회를 노려 말을 걸어오는 사내들도 있었지만 샐리는 거의 상대하지 않았다. 춤 신청은 부드럽게 거절하고 대화도 길게 하지 않았다.
샐리는 사교계에서 남성과 엮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여인들과의 호의적인 관계였다.
특정 남성과 엮였다가는 괜히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지도 몰랐다. 뒷골목의 하녀 출신이니 더더욱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남성들 사이의 평판이야 여인들과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오르기 마련이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여인들에게 일일이 대답해 주며 상대해 주는 것은 꽤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샐리는 꽤 힘겨워졌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샐리는 연회장 한편에 마련된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던지라 샐리는 소파 위로 편하게 몸을 기대었다.
“정말 피곤하네.”
원래는 클라라에게 간단히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워낙에 열성적인 여인들 덕분에 시간을 지체해 버렸다. 그 와중에 새로 산 구두가 잘 맞지 않는지 발끝이 무척 아파 왔다.
‘혼자 있으니 상관없겠지.’
잠시라도 신발을 벗어야 고통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샐리는 몸을 숙였다.
풍성한 드레스의 치맛자락과 허리가 꽉 잡혀 있는 옷 때문에 구두를 벗는 일이 쉽지 않았다. 발을 꽉 조인 구두도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됐다!”
겨우 벗겨진 구두는 매정하게도 저 멀리 데구루루 굴러 가 버렸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샐리는 구두를 가지고 오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헉. 샐리는 저도 모르게 잇새로 날 선 비명을 질렀다. 저쪽으로 굴러 간 구두 뒤로 한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여성 휴게실이었다. 남성이 이곳에 들어오는 일은 무례를 넘어선 일이었다.
샐리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남자는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샐리는 기억을 더듬어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자비스 영식?”
최근 연회장에서 몇 번 마주쳤던 자비스 백작가의 아들이었다. 연회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어왔지만 샐리는 한두 마디만 대꾸해 주고는 자연스럽게 그를 피했다.
그 후로도 별다른 대화를 한 기억은 없었다.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샐리의 말에 마법이라도 풀린 것처럼 자비스의 눈이 빛났다. 그가 한 발짝 다가오자 샐리는 소파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샐리 님을 보고 어떻게 말을 걸지 몰라 고민하다가 여기까지 따라오게 됐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얼굴을 빨갛게 물든 채 말하는 사내는 무척 순박해 보였지만 샐리에게는 꽤 위협적으로 보였다.
닫힌 휴게실에서 낯선 사내와 둘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샐리는 그와 인사를 나눌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샐리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비스 영식, 이곳은 여성 전용 휴게실입니다. 남성이 들어오면 안 되는 공간이에요.”
“아. 그렇군요. 이런 연회는 잘 와보질 않아서 몰랐습니다. 그저 샐리 님께 인사를 하려고 들어온 것뿐인데…….”
그 말이 정말인지 자비스의 얼굴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자비스는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샐리의 구두를 집어 들었다.
“구두만 돌려 드리고 나가겠습니다.”
“아니요. 그대로 두고 가 주시면 충분합니다.”
“하, 하지만…….”
우물쭈물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억센 고집을 품고 있었다. 샐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리를 지를까?’
그러나 소리를 질러 버리면 연회장의 분위기는 엉망이 될 것이다. 클라라의 임신을 축하하는 자리에 그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남자와 단둘이 있었다는 것에 어떤 말이 나돌지 모른다.
샐리는 그런 소문은 절대 사양이었다. 어떻게 사내를 돌려보낼까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휴게실 문이 열리더니 한 여인이 들어왔다.
“꺅!”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휴게실에 울려 퍼졌다. 샐리는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비명을 지른 여인은 바로 릴리였다. 자비스도 갑자기 등장한 릴리를 보고는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릴리는 황당하단 얼굴로 자비스를 보며 말했다.
“남자가 왜 여기에 있어요? 여긴 여자만 들어올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릴리는 의아함에 확인차 물어본 것이었지만 자비스에게는 자신을 비난하는 말로 들렸다.
자비스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곳에 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시,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잔뜩 당황한 얼굴로 자비스는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그가 사라진 곳에는 릴리와 샐리 둘만 남았다.
샐리는 이마 위로 손을 얹었다.
이 상황은 너무나 피곤했다. 릴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귀부인들을 상대로 팔아먹기에 딱 좋은 이야깃거리이니 신나게 떠들고 다니려나.
그러나 릴리는 그녀답지 않게 소란 떨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구두를 힐끗 쳐다보더니 구두를 집었다. 샐리에게 다가간 릴리는 구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샐리는 놀란 얼굴로 그녀의 옆에 놓인 구두를 바라보았다. 릴리는 눈을 흘기며 퉁명하게 말했다.
“하여간 주제에 안 맞는 구두를 신으니 그 모양이지. 할멈이나 신을 것 같은 투박한 구두나 신던 애가 이런 높은 구두를 잘 신을 수 있겠니?”
샐리는 의아한 얼굴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속셈이야?”
“뭐가?”
“너 나만 보면 깎아 내리기에 바빴잖아.”
샐리의 말에 릴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니. 난 너한테 조금도 관심도 없거든?!”
“너는 몰라도 엘리제 마님은 아니지. 그분이 네게 명령했겠지. 내 출신을 들쑤셔서 어떻게든 나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보라고.”
“……!”
커다랗게 눈을 뜬 릴리의 모습에 도리어 샐리가 놀랄 정도였다. 그렇게 티 나게 일을 벌여 놓고는 모를 줄 알았다니 그게 더 놀라웠다.
릴리는 콧대를 치켜들고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예전부터 알았던 사이니까 너한테 아는 척한 것뿐이야. 엘리제 마님은 그런 내 맘을 알고 친하게 지내라고 말씀하신 것뿐이고.”
릴리의 목소리에서는 엘리제에 대한 믿음이 여실히 담겨 있었다. 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릴리,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절대 친구가 아니야.”
“당연하지.”
릴리가 질색한 얼굴로 말했다. 샐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같이 어린 시절을 보낸 동무지.”
“…….”
“그러니 충고를 하나 할게. 엘리제 마님께 어떤 식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마님과 엮이지 마. 그분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무서운 분이야.”
“너한테나 그렇겠지. 엘리제 마님이 나한테 얼마나 자상하게 대해 주시는데.”
릴리는 피식 웃으며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샐리는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으로는 웃으면서 손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 귀족이야. 그들이 얼마나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지 아니? 그게 보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사교계를 떠나도록 해. 그게 널 위한 길이야.”
그 말에 릴리의 얼굴이 심술궂게 구겨졌다. 자신을 가르치려는 것 같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샐리는 늘 그랬다. 같은 나이 주제에 자신을 어린애 취급했다. 똑같이 귀족의 첩이 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말이다.
“잘난 척하지 마! 너도 결국 이 세계가 좋아서 신나게 연회를 다니고 있는 거잖아. 나도 조금만 더 있으면 사교계의 중심이 될 수 있어. 그렇게 될까 봐 초조한가 보지?”
릴리는 눈에 힘을 주고는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며 여인들 몇 명이 들어왔다.
“샐리, 한참을 돌아오지 않기에 찾아왔어요.”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요.”
여인들의 말에 샐리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구두에 문제가 좀 생겨서요. 발이 좀 아프네요.”
“저런. 여분 구두는 가지고 왔나요?”
“사이즈가 맞으면 제 구두를 빌려 드릴게요.”
어느새 여인들은 샐리의 주변을 감쌌다. 릴리에게는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릴리는 여인들 사이로 웃고 있는 샐리를 바라보았다.
호기롭게 외치기는 했지만 릴리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위치는 전혀 달랐다. 지금의 샐리는 릴리가 무슨 짓을 해도 닿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그 점이 릴리를 무척 분하게 했다. 릴리는 속상한 얼굴로 몸을 돌려 휴게실을 나왔다.
샐리는 꽤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최근에는 어딜 가도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힘들기는 했지만 오늘은 더 힘들었다.
휴게실을 나온 후에도 졸졸 따라온 여인들은 샐리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여인들은 샐리가 조금이라도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 있으면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잡아끌었다.
“샐리, 조금만 더 이야기 나누고 가요.”
“그래요. 아직 연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샐리는 차마 표내지 못하고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너무 피곤한데.’
어떻게 하면 여인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고 떠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샐리의 가까이 있던 여인 중 한 명이 ‘어멋’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다른 여인들도 술렁이며 한곳을 바라보았다.
샐리는 그녀를 짓눌렀던 피로함이 몽땅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만큼 그녀는 놀랐다.
연회장 안으로 카시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조명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과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아름다웠다.
치켜든 턱선 위로 내리깐 눈동자는 나른하고 섹시한 느낌이 났다. 허리를 곧게 펴고 걷는 모습은 꼭 세상의 피조물이 오직 저 하나뿐인 것처럼 당당하고 오만했다.
샐리는 그에게 시선을 빼앗긴 이유를 알았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정말 처음 그를 만났었던 때로.
그때도 그는 저토록 엄청난 존재감을 뿜으며 등장했었다. 연회장의 공기마저 그의 차갑고 청량한 향으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샐리.”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샐리는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보석 같은 남색 눈동자에 샐리가 비치고 있었다. 샐리는 그제야 완전히 제정신을 차렸다.
현실의 그와 자신으로.
“저하,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일찍 끝나서 데리러 왔어.”
일찍 끝날 모임은 아니었다. 모임을 반강제적으로 일찍 끝낸 것은 카시스였다. 테이블을 연신 톡톡대던 카시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언제까지 똑같은 이야기를 할 셈인가.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와인을 마시며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대화가 전쟁터를 방불케 하듯 급속히 진행되었다.
모임은 역대 최고의 속도로 마무리되었다. 그 점을 모르는 샐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샐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샐리는 그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그 모습에 주변의 여인들이 ‘꺄아악’ 하고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샐리는 부채로 입을 가리곤 그에게 속삭였다.
“정말로 왜 오신 거예요?”
‘치근대는 사내놈들이 있을까 봐.’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카시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네가 이렇게까지 혼자 다니면 내 총애가 의심스럽지 않나.”
그의 말대로 요 근래 샐리는 너무 혼자 다니긴 했다. 오늘만 해도 에스테반 공작은 왜 함께 오지 않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은 차였다.
에스테반 공작과의 사이도 공고히 하고, 그를 핑계로 이 자리를 자연스레 빠져나갈 수 있으니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잘하셨어요.”
두 눈을 휘며 웃는 샐리를 보며 카시스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해 쏠려 있었다.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로 연회의 주최자인 클라라와 존스가 튀어나왔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 인사드립니다.”
클라라는 귀부인의 체면을 지키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는데 문제는 그의 남편 존스였다.
“에, 에, 에, 에스테반 저하께서 이런 곳에 찾아주시다니 여, 영, 영광입니다. 알렉산더 존스라고 합니다.”
새빨개진 얼굴은 마치 첫사랑을 만난 것 같았다. 클라라가 남편의 넓은 어깨를 토닥이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남편이 에스테반 공작 저하의 아카데미 후배랍니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를 만나 뵙게 되어 무척 기쁜 모양이에요.”
물론 카시스는 저런 크고 험상궂게 생긴 후배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카데미 시절에 자신을 남몰래 흠모하는 후배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렇군.”
카시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것만으로도 존스는 흥분이 가득한 얼굴로 콧김을 벌렁거렸다. 클라라가 겨우 이성을 잃은 남편을 진정시켰다. 샐리는 그 모습이 무척 신기하게만 보였다.
‘아까는 그렇게 늠름한 군인으로만 보였는데.’
샐리는 새삼스럽게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저런 반응이 처음이 아닌지 아주 태연해 보였다. 카시스는 샐리를 향해 눈짓했다.
“그럼 가지.”
“네.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럼 몸조리 잘하세요, 부인.”
샐리가 웃으며 부부에게 인사했다. 두 사람이 걸음을 내딛는 순간 홍해가 갈라지듯이 몰려 있던 사람들이 뒤로 빠졌다.
“아카데미에서 인기가 꽤 좋으셨나 봐요?”
샐리의 속삭임에 카시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원했던 건 아니야.”
그가 아주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샐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다정해 보였다.
그래서 몰려든 이들은 저마다 다양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두 사람을 향한 선망 어린 눈빛, 아름다운 두 남녀의 외모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눈빛.
물론 모든 이들이 그렇게 따뜻한 시선인 것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질투와 시기로 얼룩진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사이에는 릴리도 있었다.
‘말도 안 돼.’
저 멀리에서 선 릴리는 충격적인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릴리는 에스테반 공작을 처음 보았다. 잘생긴 미남자라는 말은 몇 차례 들었지만, 직위가 높은 이에 대한 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토록 근사한 남자라니. 자신이 봐도 심장이 떨릴 정도였다.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고귀한 귀부인을 대하듯 샐리를 에스코트하는 모습에 입술이 꽉 깨물어졌다.
‘도대체 내가 샐리보다 부족한 게 뭔데?! 어째서 나는 그따위 나이 많은 늙은이고 너는 저런 남자인 거냐고!’
진심으로 화가 났다. 릴리는 더 이상 두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연회장을 나갔다. 쿵쿵거리며 걷는 발걸음에는 우아함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사나운 얼굴로 걷던 릴리의 팔을 누군가 잡아끌었다.
“아얏!”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올리자 한 사내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까 일은 정말 실수였습니다. 여성 휴게실에 남자가 들어가면 안 되는지 정말 몰랐어요.”
그제야 릴리는 사내가 누군지 깨달았다. 아까 전 휴게실에서 마주쳤던 자비스였다. 눈알을 빙글빙글 돌리며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폼이 꽤 초조해 보였다.
릴리는 총명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내는 수없이 다루어 보았다. 방금 전의 분노 어린 눈빛을 순식간에 지운 릴리는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자비스를 바라보았다.
“그럼요. 아무렴 이렇게 멋진 분이 일부러 그런 짓을 저지르셨겠어요? 걱정 마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저, 정말입니까?”
“그럼요. 릴리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입꼬리를 올린 모습은 꼭 순진한 소녀 같았다. 그제야 자비스는 안심한 듯 큰 숨을 내쉬었다. 릴리는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아까 전 샐리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아니요! 그저 인사를 하기 위해 들어갔을 뿐입니다. 절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자비스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칫 의심이라도 받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군요. 단지 샐리와 가까운 사이다 보니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샐리 님과 친하십니까?”
“네. 아주 친한 사이랍니다.”
릴리의 말에 자비스의 반응이 아주 이상했다. 수상할 정도로 기뻐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하고 싶은 말을 입에 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 릴리는 그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좋아, 샐리. 너는 역시 나에게 당할 운명인가 보다.’
릴리는 안타까운 눈빛을 만들며 자비스를 바라보았다.
“혹시 샐리와 친해지고 싶으신 건가요?”
자비스는 차마 대답도 못하고 푹 고개를 숙였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
자비스가 휙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애달픈 눈빛이 마음에 걸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릴리는 눈썹을 내리고 연한 미소를 지어 진심으로 상대를 위로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그다지 지을 리 없고, 짓고 싶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 표정은 사내를 다루기에 꽤 유용했다.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지으면 사내들은 여지없이 경계를 허물고 그녀에게 마음을 보여 주곤 했다.
눈앞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침울했던 사내의 눈에 안광이 번쩍였다.
“정말입니까?”
그 눈빛은 릴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추잡한 욕망, 삐뚤어진 애정, 어설픈 순애보, 억눌린 정욕.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얻어 낼 것 같다는 사실에 릴리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럼요.”
릴리의 말에 자비스가 기대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릴리는 저 눈빛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재빨리 고민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언젠가 들었던 사랑이야기가 생각났다. 귀족 사내와 하녀의 은밀하고 농염한 사랑이야기. 신분의 차이로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그들이 이용했던 방법이 있었다.
“처음은 편지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요? 제가 샐리에게 전달해 드릴게요.”
편지라는 애틋한 단어에 자비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벅찬 얼굴이 되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릴리는 환희에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