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카모라의 뮤즈
“샐리 님, 오늘 도착한 초대장들이에요.”
데이지가 환하게 웃으며 초대장을 두 손 가득 들고 방에 들어왔다. 하루가 지날수록 샐리 앞으로 도착하는 초대장이 많아지고 있었다.
도착한 초대장에 다 응해도 며칠 걸러 하루는 쉴 수 있었던 이전과 달리 요즘은 거의 매일 티파티를 가야 했다.
“샐리 님께 초대장이 오는 건 좋지만 피곤하실 것 같아 걱정이에요.”
“걱정 마. 나는 꽤 즐겁단다.”
샐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매일 치장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데이지가 걱정할 만큼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티파티에 갈 때마다 많은 여인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물론 샐리가 일방적으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위치였다.
답답한 속내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샐리에게 하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여인도 있었고, 다른 이의 눈을 피해 샐리에게 비밀스러운 상담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이런 걸 좋아할지는 몰랐어.’
전생의 샐리는 아름다운 자신이 주목받는 일상을 무척 당연하게 생각했다.
모든 곳에서 주인공은 그녀여야만 했다. 그래야만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의외로 주인공의 뒤편에 그려진 배경 같은 일상도 즐겁고 평화로웠다.
‘이렇게 여유 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샐리는 엘리제를 떠올리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 사교계라는 거대한 꽃의 중심에 그녀가 있다.
꽃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달콤한 꿀을 머금는 그녀와 비교하면 샐리는 꽃 잎사귀도 되지 못한 작은 존재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엘리제와 나란히 서려면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샐리는 초대장을 톡톡 두들겼다. 제국 사교계의 중심부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다.
샐리가 오늘 가는 곳은 패션에 관심이 많은 로즈마리 백작 부인의 티파티였다.
이전에 만났을 때 그녀는 샐리가 가진 카모라의 드레스를 무척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샐리는 오랜만에 카모라의 드레스를 입었다.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인 카모라가 만든 짙은 남색의 심플한 홀터넥 드레스는 화려함과 우아함, 섹시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샐리가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마중 나왔던 백작가의 시종이 입을 쩍 벌리는 무례를 저지를 정도였다. 그를 향해 샐리는 붉은 입술을 올려 화답했다.
샐리를 본 로즈마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달려왔다.
“세상에! 카모라의 드레스군요.”
“한눈에 알아보실 줄은 몰랐어요.”
로즈마리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이 최고급 원단! 이 완벽한 박음질!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핏! 무엇보다 이런 아름답고 세련된 디자인은 그녀밖에 할 수가 없죠.”
드레스를 사랑하는 로즈마리.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를 너무 좋아해 백작가에서 버는 돈의 반 이상이 백작 부인의 옷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카모라의 대단한 팬이었다.
로즈마리의 감탄에 다른 부인들도 관심을 보이며 샐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로즈마리 백작 부인의 티파티에는 그녀처럼 패션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참석하곤 했다.
멋쟁이인 그녀들은 하나같이 완벽한 꾸밈새를 자랑했다. 그런 그녀들에게도 카모라의 드레스는 특별해 보였다.
“홀터넥 스타일의 디자인이군요. 수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디자인인데 독특하고 아름답네요.”
“그러게요. 샐리의 긴 목과 어깨선이 드러나 정말 우아해 보여요.”
여인들의 대화는 수준이 높았다. 일전에 같은 옷을 입고 갔던 줄리엣의 티파티에서 나왔던 ‘경박하다’라는 말 따위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그 점이 샐리를 즐겁게 했다.
“샐리, 어떻게 카모라의 드레스를 주문한 거예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한 여인이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국의 모든 여인들이 카모라의 드레스를 원했지만 그 드레스를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모라는 여느 드레스숍처럼 닥치는 대로 주문을 받지 않았다. 주문을 거절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더더욱 여인들에게 카모라의 드레스는 환상 속의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다.
“글쎄요. 아마 에스테반 공작이라는 이름 덕분이 아닐까요. 주문을 하신 건 공작 저하시거든요.”
카시스가 카모라의 드레스를 선물하겠다고 했을 때 샐리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카모라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시스와 함께 카모라를 찾아간 그날 그녀는 흔쾌히 드레스 주문을 받았다.
카모라가 카시스와 무언가 대화를 나눈 후에 수락했기에 에스테반의 이름이 그녀를 움직였다고만 생각했다.
“그건 아닐 거예요. 대단한 위세를 자랑하는 공작가의 캐서린 영애는 카모라에게 거절당했잖아요.”
“맞아요. 그런 반면 남작가의 타냐 영애는 카모라의 드레스를 받았죠.”
판이하게 차이 나는 두 가문의 영애가 함께 치른 데뷔탕트. 그곳에서 카모라의 드레스 하나로 두 영애의 인기가 뒤바뀌었던 일화는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이런 얘기가 있잖아요. 카모라에게 드레스를 받기 위해선 세 가지가 필요하다. 드레스 값을 지불할 수 있는 돈,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인맥,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 나머지 하나가 확실치 않았다. 마지막 그 하나로 카모라는 드레스 주문을 받을지 거절할지 결정했다.
“세 번째 조건은 역시 외모 아닐까요? 샐리도, 타냐 영애도 눈에 띄는 미인이잖아요.”
“그것도 아닐 거예요.”
손을 내저은 것은 로즈마리였다.
“제게 카모라의 드레스가 두 벌이나 있거든요. 저는 좋게 말해도 미인이라 평가될 얼굴은 아니잖아요?”
그 말에 여인들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무슨 소리세요. 부인도 미인이세요.”
“맞아요. 긴 속눈썹이 얼마나 고우신데요.”
열심히 자신을 위로하는 여인들을 보며 로즈마리는 쿡 하고 웃었다.
“저는 아름다운 얼굴보다는 아름다운 옷을 더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그렇게 애써 거짓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제야 겨우 여인들의 칭찬 세례가 멈추었다. 로즈마리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 세 번째 조건은 옷에 대한 애정 아닐까 싶어요. 카모라 님을 만났을 때 옷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누었거든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무릇 한 길을 걷는 장인이니, 그 길을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솜씨를 나누어 주고 싶어 한다는 건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한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패션에 대한 센스가 높기로 소문난 엘리제 에스테반 공작 부인께서는 카모라의 드레스를 한 번도 입은 적이 없지 않나요?”
사교계의 꽃인 그녀가 카모라의 드레스를 입었다면 모두가 주목했을 텐데 누구도 그녀가 카모라의 드레스를 입은 것을 보지 못했다. 입었다는 이야기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름다운 외모, 집안, 옷에 대한 애정, 지금까지 나온 모든 조건을 갖춘 그녀였는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모라가 엘리제에게 드레스를 만들어 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야 에스테반 공작 부인께서 카모라의 드레스를 주문하지 않으셨겠죠.”
“어머. 왜일까요.”
“글쎄요. 본인 자체로 워낙 아름다운 분이니 굳이 욕심나지 않으셨던 게 아닐까요?”
여인들은 엘리제의 빛나는 외모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여인들은 열성적으로 카모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서 여인들이 가장 흥분한 내용은 카모라의 아뜰리에에 대한 것이었다.
카모라와 친분이 있는 이들만 갈 수 있다는 그곳에는 공개되지 않은 카모라의 드레스 수십 벌이 걸려 있다고 한다.
“입어 보지 못해도 좋으니 눈으로라도 봤으면 좋겠네요. 그곳에 가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여인 중 하나가 두 손을 모으고 꿈꾸듯 말했다.
* * *
수많은 여인들을 설레게 하는 천재 디자이너 카모라의 아뜰리에에는 그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카시스 에스테반이었다.
그의 주위로는 수십 벌의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제아무리 품위 있는 귀족 여인이라도 보는 순간 비명을 내지르게 된다는 카모라의 드레스였지만 카시스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반짝이는 드레스를 배경으로 차가운 얼굴로 서 있는 미남자는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 볼까?’
라는 당치 않은 생각을 할 정도로.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었다간 눈앞의 남자에게 목숨을 위협받을지도 모르기에 카모라는 자신의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디자이너 카모라. 제국에서 제일가는 드레스 디자이너 중 한 명이자,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특이한 길을 걷는 귀족 영애.
독특한 이력만큼 그녀의 외양도 특별했다. 둥근 안경을 쓰고 주황빛 도는 머리카락은 턱 끝까지 올 정도로 짧았다.
보통 여인들이 입는 풍성한 드레스가 아니라 선이 딱 떨어지는 재킷과 치마를 입고 있었다.
카모라는 카시스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저하. 오랜만에 뵙네요.”
카모라는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런데 샐리는 함께 오지 않았나요?”
“드레스를 주문한 것은 나야. 계산하러 온 자리에 굳이 그녀와 올 필요가 있나?”
카시스가 카모라의 아뜰리에까지 직접 찾아온 것은 일전에 주문했던 드레스 때문이다.
카시스는 사실 업계에서 가장 보기 힘든 손님 중 하나였다. 사교계에서 여인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인을 위해 선물을 사는 법이 없었다.
그런 카시스가 여인과 함께 찾아와 드레스를 주문했을 때는 카모라라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절대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주문은 받지 않아요. 이 드레스에 대해선 엄청난 대가를 청구하겠어요.
—얼마든지.
얼마나 엄청난 액수를 요구하려고 저런 말까지 하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카시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 보았자 제국 최고의 부를 가진 에스테반의 재정을 흔들 만한 가격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드레스를 제작한 후에도 청구서가 오지 않아 의아했었다. 청구서를 보내는 것을 잊은 것일까? 그러다 최근에야 카모라에게서 청구서가 도착했다.
카시스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청구서를 봤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더군. 이건 무슨 의미지?”
카모라가 보낸 청구서는 청구하는 금액이 적혀 있지 않는 빈 종이였다. 함께 온 서신에 카시스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글을 보고 직접 온 참이었다.
“종이 한 장에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요.”
종이에 쓸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금액이라는 것일까? 그 금액이 쉽게 예상되지 않아 카시스는 카모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카모라가 웃으며 말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 제가 만든 옷의 모델이 되어 주세요.”
“뭐?”
카시스가 어이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눈썹을 찡그렸다. 카모라는 카시스가 격한 반응을 보이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올 겨울 카모라의 작품 발표회를 계획하고 있어요. 그때 남성복도 한 벌 제작할 생각이거든요. 그 모델을 저하께서 해 주셨으면 해요.”
“거절하겠어.”
일말의 너그러움도 없는 시린 칼날 같은 말투였다. 그러나 카모라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약속을 어기실 셈이신가요? 엄청난 대가를 청구하겠다는 제게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카모라는 눈을 내리깔고 턱을 들어 올렸다. 카모라가 한껏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든지.”
“…….”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시겠죠?!”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저렇게 자신을 흉내 내지 않아도 그때의 일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러나 카시스가 말한 것은 일반적인 금전적 보상이었지 이런 식의 해괴한 보상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
카시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카모라를 마주 보았다. 그가 말없이 그런 시선을 보내면 보통은 주춤하기 마련이건만 카모라는 당당하게 카시스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점점 냉기가 서리는 카시스의 눈동자에 카모라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하는 아주 잠시 등장하는 들러리일 뿐이니 그렇게 무서운 표정 하지 마세요. 어차피 쇼는 메인 모델이 진행할 거니까요.”
“메인 모델도 있나?”
“네.”
카시스는 기가 찼다. 도대체 이 여인은 에스테반 공작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무대에 올라가라는 말도 어이없었지만, 모르는 이와 함께 무대 위에 올라가는 말은 더더욱 불쾌했다.
“이야기는 그만 듣지. 비용은 통상 비용의 100배를 쳐서 지불하겠어.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법원을 통해 소송을 걸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카모라가 황급히 소리쳤다.
“메인 모델은 샐리예요!”
“……?!”
샐리라는 말에 흉흉한 냉기를 내뿜던 카시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빙고. 정답이었다.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러시겠죠. 아직 샐리에게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에 카시스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카모라를 바라보았다. 그런 카시스를 향해 카모라가 허리를 쭉 펴고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분명 샐리는 수락할 거예요. 이 카모라의 드레스를 마음껏 입을 수 있는 기회인걸요.”
당찬 목소리에는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카시스는 그녀의 말을 그저 허풍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카모라의 드레스를 처음 입었을 때 샐리가 얼마나 기쁜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떤 드레스와 보석을 걸칠 때도 얌전한 미소만 짓던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감정을 내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만약 저하께서 샐리와 함께 서는 무대가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어쨌건 저는 쇼를 진행해야 하니 다른 멋지고 근사한 남자 모델을 찾을 거예요. 그리고 그 모델은 샐리의 옆에 다정하게 설 테고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 당돌한 말에 카시스는 울컥 짜증이 났다. 무엇보다 ‘아주 근사한 남자 모델’이라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카시스는 태생부터 귀족으로 태어난 자였다. 절대 감정에 흔들려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말은 감정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물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뿐이다.
“알겠어. 약속을 지키지.”
올레! 카모라는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디자인 실력은 초일류, 흥정도 초일류였다.
세상 어느 누가 에스테반 공작을 모델로 무대 위에 세운단 말인가. 이 주 동안 밤새워서 드레스를 만든 보람이 있었다.
목적을 이룬 카모라는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카시스의 이어진 말을 듣기 전까지는.
“단, 샐리가 그대의 부탁을 받아들인다면.”
“네?”
카모라가 눈을 깜빡거렸다.
“샐리에게 이게 드레스 값 대신이라는 말은 하지 마. 그 이야기를 들먹였다간 괜한 책임감에 싫어도 떠맡을 수도 있으니까. 순수하게 제의를 해 본 후 그녀가 거절한다면 이 이야기는 끝내는 것으로 하지.”
“네?! 그건 너무 일방적인…….”
“이 정도면 그대의 일방적이고 제멋대로인 조건을 꽤 많이 들어준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카시스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러나 그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미소는 절대 호의가 아니라 그녀가 넘어선 안 되는 선을 긋는 미소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선을 넘으면 저 아름다운 남자는 냉담한 에스테반으로 돌아가 그녀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모른다. 이미 카모라는 선을 많이 넘은 상태였다.
‘장사를 하려면 눈치가 아주 중요하지.’
다시 한번 자평하지만 그녀의 디자인 실력은 초일류, 흥정도 초일류, 눈치도 초일류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카모라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속으로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에스테반 저택 앞에 파격적인 패션의 여인이 나타났다. 심플한 원피스 위로 오렌지색 재킷을 걸친 카모라였다.
“으음~. 고루하기 짝이 없어.”
카모라는 위엄이 가득한 에스테반 공작의 저택을 한마디로 평가했다. 옛 건축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이 카모라의 눈에는 아주 심심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카모라 님.”
에반이 저택에 들어서는 그녀를 보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곱게 묶은 사내가 주름 한 점 없이 빳빳한 집사복을 입고 인사하는 모습은 꽤 근사했다.
미남을 보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라 미소가 절로 나왔다.
“오랜만이에요. 오늘도 멋지네요, 에반.”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저택엔 무슨 용무신지요?”
카모라가 찾아올 것이라는 말을 따로 듣지 못했기에 에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카모라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샐리를 찾아왔어요.”
“샐리 님을요?”
의외의 이름에 에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떤 용무인지 묻기는 했으나 카모라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엘리제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카모라가 몇 번 엘리제를 찾아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제를 만나고 나면 눈을 빛내며 설레어하던 카모라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발을 뚝 끊었다.
여인들 사이에 있는 미묘한 사건을 자세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녀들 사이에서는 카모라와 엘리제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럼 응접실에 앉아 기다려 주십시오. 샐리 님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어요. 샐리에게 한시라도 빨리 전할 말이 있으니 바로 안내를 해 주세요.”
발을 동동거리는 카모라의 모습에 에반은 난감해졌다. 그녀는 엘리제를 만나러 왔을 때도 차나 마시며 여유 있게 기다릴 시간이 없다며 바로 엘리제의 방으로 향하곤 했다.
에반은 이런 식의 부탁에 약했다. 조르는 것에 가까운 부탁이 몇 번이나 계속되자 에반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따라 오시지요.”
“네, 고마워요!”
카모라는 미소 지으며 에반의 옆에 섰다. 에반이 거대한 저택 문을 열고 부드럽게 손짓했다.
“샐리 님의 방은 별채에 마련되어 있으니 나가셔야 합니다.”
본채와 별채 사이는 꽤 거리가 멀어 조금 걸어야 했다. 가는 길에는 잘 가꾸어진 산책로가 펼쳐졌다.
고르게 깔린 새하얀 돌길을 걷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어머나. 카모라?”
엘리제였다. 카모라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트러블 하나 없는 도자기처럼 투명한 피부, 그린 것처럼 완벽한 얼굴 선. 가녀린 체구를 더욱 가냘프게 느끼게 하는 하늘거리는 드레스.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이나 천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저런 느낌이 아닐까?
엘리제가 카모라를 향해 물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죠?”
“샐리를 만나러 왔습니다.”
카모라의 대답에 엘리제의 숨이 조금 멈추었지만 아주 찰나였다. 바로 미소를 만들어 낸 그녀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조금 서운하네요. 내게는 찾아와 주지 않는 건가요?”
“엘리제 님께서 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드레스를 입어 주시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만나기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반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이 드레스에 관련된 일이었다니.
무엇보다 그 카모라가 만든 드레스를 엘리제가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제국 여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드레스가 아니었던가.
엘레제는 아쉬운 듯 눈을 내리깔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카모라, 당신이 만들어 준 드레스는 정말 훌륭했어요. 그렇지만 그 드레스는 좀…… 내게 어울리지 않았어요.”
처음 카모라가 저택에 찾아온 것은 엘리제가 그녀에게 드레스 제작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여느 여인들에게는 그렇게 까다롭게 군다던 카모라는 엘리제의 주문을 서슴없이 받았다.
그 후로 카모라는 몇 번이나 엘리제를 찾아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후 카모라가 만든 드레스가 도착했다.
카모라가 보내온 드레스는 소문대로 다른 드레스와는 격이 달랐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바느질, 사람이 수놓은 것이 맞는지 의심할 만큼 섬세한 자수와 장식, 촘촘히 박힌 보석이 빛나는 드레스는 아름다웠다.
칠흑같이 새까만 드레스였다는 것만 빼면.
드레스를 보자마자 마사가 손을 부들거리며 정색했다.
—장례식에서나 입는 드레스를 마님께 드리다니요.
그녀의 말대로 검정색 드레스는 장례식이 아니면 아무도 입지 않는다. 저런 칙칙하고 어두운 색 따위 누가 입는단 말인가.
마사는 즉시 그 드레스를 눈에 닿지 않은 곳으로 가져갔고, 엘리제는 한 번도 그 옷을 찾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카모라와 엘리제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카모라는 진지한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드레스는 엘리제 님을 생각하며 만든 드레스였어요.”
엘리제를 처음 본 순간 카모라가 느꼈던 강렬한 이미지. 천사같이 아름다운 여인의 또 다른 모습.
그녀는 늪처럼 어둡고, 추악하고, 사악하며…… 아름다웠다.
엘리제를 만날수록 음산한 아름다움은 점점 크게 느껴져 카모라를 흥분시켰다.
신들린 것처럼 쉬지 않고 드레스를 만들 정도로 카모라는 엘리제의 매력에 취해 있었다.
“언젠간 부인이 제가 만든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네요. 그럼 실례합니다.”
카모라는 엘리제를 지나쳐 갔다. 엘리제는 말없이 카모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엘리제의 곁에 있던 마사가 카모라를 노려보다가 엘리제의 눈치를 살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따위 드레스를 보냈음에도 엘리제는 카모라에게 어떤 분노도 내비치지 않았었다. 다른 여인에게 하듯 은밀한 응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넘어가 주었는데 감사해하지 못할망정, 면전에서 저따위 해괴한 말들을 하고 사라지다니.
‘이번에야말로 마님의 화가 폭발할 거야.’
그리고 그 화를 받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일 터였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두 다리까지 떨려 오는데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쿡쿡쿡.
엘리제가 웃고 있었다. 남들에게 보이는 천사 같은 미소가 아니라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미소였다. 음산하면서 스산한.
“정말 재미있는 계집이야.”
엘리제는 기묘한 눈빛을 했다. 유리알처럼 파랗게 빛나던 눈동자가 심해를 담은 듯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분노나 원망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샐리의 방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에이미와 마가렛이었다.
“정말요?! 후작님과 아직도 같이 밤을 보내지 않으셨다고요?!”
에이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두 발을 동동거렸다. 마가렛은 부끄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렇게 모습을 바꾼 후로 아직 한 번도요.”
“그, 리오넬 후작님께선 어마어마하게 정력…… 아니, 남성적인 힘이 강하시다고 들었는데요.”
게다가 그가 요 근래 친하게 지내던 여인들과 관계를 끊었다는 사실이 사교계에 널리 퍼졌다. 그렇다는 건……!
“아주 고된 시간을 보내고 계시겠군요.”
샐리가 숙연한 얼굴로 말했다. 두 여인도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샐리 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에반의 목소리였다.
“손님?”
샐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온 손님이라면 여기 다 와 있는데 누구지?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깜짝 손님이 나타났다.
“안녕, 카모라예요!”
새빨간 옷을 입은 강렬한 여인의 등장에 세 여인은 굳었다. 카모라는 여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에이미를 꼼꼼히 살펴보며 카모라가 눈을 빛냈다.
“어머나, 이 리본, 직접 만든 건가 봐요?”
“네, 네에.”
“귀여워라!”
에이미는 갑작스러운 칭찬에 대답도 채 못하고 두 눈을 껌뻑거렸다. 카모라는 그런 그녀를 지나쳐 마가렛의 앞에 섰다. 아담한 여인이 입은 옷은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이국의 드레스였다.
“차오의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멋져요!”
“고,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샐리의 앞에 선 카모라의 눈빛이 바뀌었다. 카모라는 눈을 형형히 빛내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느슨하게 고정한 핀 아래로 몇 가닥 빠져나온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청초하고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
아주 좋아!
거기에 여려 보이는 흰 피부와 대조되는 치켜 올라간 고양이 같은 눈과 붉은 입술.
노출이 거의 없는 심플한 드레스는 점잖으면서도, 허리와 어깨에 포인트를 주어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났다.
우아하면서도 요염했고, 튀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웠다.
카모라는 감탄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박수를 쳤다.
“완벽해! 브라보!”
“…….”
세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충격적인 손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모라는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방문하여 세 분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여 죄송해요. 당장 샐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말이에요. 제 소개는 따로 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별다른 소개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 중 한 명이었으니.
에이미와 마가렛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이분들을 소개해 주겠어요, 샐리?”
재빨리 정신을 차린 샐리가 카모라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마가렛 리오넬 후작 부인과 에이미 로렌스 영애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웃으며 두 여인에게 인사를 한 카모라는 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샐리는 자신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유를 조금도 모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니 카시스로부터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여간 그 남자, 아무 말도 안 할 줄 알았어.’
카모라는 무뚝뚝한 남자를 향해 혀를 쯧쯧 차고는 이내 화사하게 웃었다.
“샐리, 카모라의 모델이 되어 줄래요?”
“네? 모델이요?”
“내가 만든 옷을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요.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전시하듯이 카모라의 옷도 많은 이들에게 내보이는 거죠. 그런데 움직이지도 않는 마네킹에 덜렁 걸어 놔서는 옷이 살아나지 않잖아요? 그래서 모델을 부탁드리는 거예요.”
살아 있는 사람이 입어야 진정한 옷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왕이면 옷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이였으면 했다. 카모라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함께할 남자 모델도 정해졌답니다. 바로 카시스 에스테반 공작 저하세요!”
“네엣?!”
놀란 목소리는 샐리가 아니라 옆에 있던 두 여인에게서 새어 나왔다. 에스테반이란 이름에 에이미와 마가렛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막았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쿡 하고 웃으며 카모라가 말을 이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와 어울릴 만한 여인이 샐리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무엇보다 샐리가 입을 걸 생각하며 벌써 드레스를 만들어 버렸답니다.”
카모라가 손가락 세 개를 펴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그것도 세 벌이나.”
샐리가 커다래진 눈을 껌뻑였다.
세 벌……. 샐리는 일전에 카모라에게 드레스를 주문한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한 벌의 드레스를 만드는 데 얼마나 초인적인 집중과 노력, 시간을 들이는지.
저렇게 영혼을 다해 드레스를 만들면 생명이 줄어드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샐리, 왜 대답하지 않아요? 설마, 서얼마아, 서어얼마아아 거절할 건가요?”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 말에 눈에 띄게 우울해진 카모라가 바닥에 처박힐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모델이 없으면 어떡하지? 완성된 옷들을 안고 그냥 죽어 버릴까?”
에이미와 마가렛이 다가와 쓰러질 듯한 카모라를 부축했다. 에이미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좌절하지 마세요. 아직 샐리 님이 거절한 것도 아니잖아요.”
허어? 이 옆집 강아지 같은 눈빛은 뭐지?!
마가렛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혹시 샐리 양이 못한다고 하면 제가 대신 모델 하실 분을 구해 볼게요. 남편이 아는 여자들이 무척 많거든요.”
이 사기 치기 쉬워 보이는 여인은 또 뭐야?!
카모라는 조금 당황했다. 카모라가 이렇게 온갖 오버를 다 떨어 대면 대부분 질려하거나 무서워하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진지하게 위로해 주는 여인들을 만나는 건 흔치않은 경험이었다. 조금 감동한 카모라는 감성을 한껏 폭발시키며 그녀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아니, 어떤 여자들도 안 돼요. 샐리 같은 몸매를 가진 여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 리 없어요. 결국 내 드레스는 어울리지도 않는 누군가에게 입혀져서 아주 볼품없어 보이고 말 테죠.”
“그렇지 않아요. 카모라 님은 엄청난 실력가시잖아요. 누가 입든 분명 아름다운 옷으로 보일 거예요.”
“물론 아름다움이 조금은 남아 있겠죠. 보통의 드레스숍에서 만든 드레스 정도로는요. 아아, 평범한 드레스라니, 끔찍해.”
무슨 말을 해도 구구절절 땅 파는 이야기로 흘러들어갔다. 듣다 못한 샐리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테니 그만하세요.”
“지금 당장 대답해 줘요, 샐리. 대답을 들을 때까지 난 작업을 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무척 중요한 사항이잖아요. 바로 대답 드리기는 곤란해요.”
의외로 신중한 모습에 카모라는 속으로 신음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카모라의 드레스라고?!’
제국의 여인이라면 그녀의 드레스를 한 번이라도 입는 것이 소원인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입술을 꾹 다문 샐리의 모습은 정말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거절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모라는 더 강한 무기를 써야 함을 느꼈다. 카모라는 자신을 토닥여 준 두 여인들을 향해 호기롭게 말했다.
“응원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 보답으로 두 분께 카모라의 드레스를 한 벌씩 선물할게요!”
“네에에엣?!”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큰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서 튀어나왔다. 카모라의 드레스는 그냥 드레스 한 벌이 아니었다.
작은 저택은 팔아야 구입할 수 있을 만큼 고가였고, 주문도 쉬이 받아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엄청난 드레스를 선뜻 두 사람에게 선물해 준다고 한 것이다.
마가렛과 에이미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카모라를 바라보았다.
“저, 정말요?”
“저, 저 같은 게 어떻게…….”
마가렛은 얼마나 놀랐는지 예전의 못난이 말투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카모라는 방긋이 웃으며 샐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샐리의 친구분들에게 이 정도 선물은 해 드려야죠.”
샐리는 황당한 얼굴로 카모라를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대단한 이도 카모라의 드레스를 쉽게 얻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카모라의 드레스를 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재력, 인맥, 그리고 세 번째는…….
‘세 번째는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였나.’
샐리는 곤란한 얼굴로 이 제멋대로인 디자이너를 바라보았다. 카모라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띠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리에 친한 이들이 있었다는 게 샐리의 패배 요인이었다. 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아무래도 이런 마이페이스에게 약한 것 같았다.
“알겠어요. 카모라 님의 모델, 할게요.”
“정말 기뻐요! 샐리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드레스를 만들게요.”
카모라는 샐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렇지. 역시 미인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
카모라는 휘감긴 손으로 은근 슬쩍 샐리의 아름다운 몸매 선을 느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 완벽한 몸매에 자신이 만든 드레스를 입힌다고 생각하니 창작욕이 무한히 샘솟기 시작했다.
* * *
카시스는 지친 얼굴로 저택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부터 있었던 귀족 회의는 그를 꽤 고단하게 만들었다.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귀족의 중심점이 되어야 하는 에스테반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은 꽤다 고달픈 일이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에반이 미리 준비해 둔 뜨거운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긴 다리를 펴고 욕조에 몸을 뉘인 채 눈을 감은 모습은 금욕적이면서도 색정적이었다.
촉촉이 젖은 은빛 머리카락 끝에 맺혔던 물방울이 톡 하고 떨어져 높은 콧날을 따라 내려가 굳게 다문 입술을 적셨다.
카시스의 손에 들린 잔에 와인을 따르며 에반이 말했다.
“오늘 카모라 님께서 샐리 님을 만나고 가셨습니다.”
카시스는 감은 눈을 천천히 뜨며 입술 위로 차가운 와인을 가져다 대었다.
카모라를 만나고 온 것이 어제였는데 바로 오늘 다녀갔다니 엄청난 행동력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욕심났다는 말이었다.
‘그럴 만하지.’
최근의 샐리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 미모를 어떻게 지금껏 숨겼는지 놀라울 만큼. 제대로 된 심미안을 가진 예술가라면 충분히 그녀를 탐낼 만했다.
‘모델 일을 수락했을까?’
카시스로서는 그녀가 모델을 수락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러면 자신도 그 우스운 광대 짓을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나 그 마음이 절대적이진 않았다.
카시스는 샐리가 카모라가 제작한 드레스를 처음 입었던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여성의 드레스는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카모라의 드레스는 특별했다.
이미 몇 번이나 그를 놀라게 했던 그녀의 아름다움에 다시 한번 놀랄 만큼.
카모라 쇼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그때 같은 드레스를 몇 벌이나 입는다는 것이다.
모델이 되어 무대에 서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하지만, 그 모습을 또 볼 수 있다면 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별생각을 다 하는군.’
카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카모라에게 약속을 한 상태였다. 그가 카모라 쇼에 설지 말지는 샐리의 대답에 달려 있었다.
‘궁금한 것은 물어봐야겠지.’
간이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은 카시스가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물방울이 세차게 떨어지며 남자의 몸이 드러났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관리해 온 매끈한 피부와 단단한 근육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몸은 신이 빚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에반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부드러운 타월을 카시스의 몸에 걸쳤다.
에반의 손길로 카시스는 이내 완벽하게 정돈된 귀족 남성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단정히 옷을 입은 카시스가 향한 곳은 샐리의 방이었다. 샐리의 방문을 두들겼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개인 하녀를 한 명만 두었기에 하녀가 자리를 비우면 종종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
몇 번이나 두들겨도 기척이 들리지 않아 카시스는 결국 조심스럽게 샐리의 방문을 열었다.
“샐리?”
방은 평소와 같았다. 에반으로부터 그녀가 분명 방에 있다고 들었기에 의아한 얼굴로 몇 발작 걸음을 내디뎠다.
“저하, 저 여기에 있어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욕실이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카시스의 얼굴에 살짝 당혹스러움이 드러났다.
“조금 후 다시 오도록 하지.”
“아니요. 괜찮아요. 저하도 들어오시겠어요?”
뭐? 카시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침묵의 의미를 느낀 것인지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몸으로 있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아니,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는데.
카시스는 이유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욕실 문을 열었다. 그녀가 이렇게 열심히 들어오라고 하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욕실 문을 열자 뽀얗고 뜨거운 김이 카시스를 덮쳐 왔다. 욕실 한편에 가져다 놓은 의자에 샐리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긴 다리를 한 여인이 정성스럽게 주무르고 있었다.
“카모라 님께서 마사지사를 보내셨어요. 쇼가 끝날 때까지 모델에 대한 최상급 관리를 약속하신다네요.”
샐리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지만 카시스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헐렁한 샤워 가운 사이로 살짝 드러난 쇄골과 볼록한 가슴선, 향긋한 오일로 촉촉하게 젖어 있는 긴 다리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왜 저런 모습으로 자신을 부른 것일까.
“저하도 마사지를 받아 보시라고 불렀어요. 솜씨가 정말 훌륭해요.”
천진하게 웃으며 마사지 타령이나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어이없었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 닿는 것도 피할 정도로 스킨십은 싫어하면서 종종 저런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 주곤 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날 여자도 모르는 놈 취급하고 있군.’
에스테반 공작이 여성에 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으나 그도 젊은 사내였다.
그런데 그녀는 절대 자신을 향해서 음심을 품을 리 없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카시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됐어.”
“흐음. 아쉽네요.”
카시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욕실 문에 기대어 샐리를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마사지사가 빠른 손놀림으로 마사지를 마무리하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뜨거운 김이 오른 공간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조용한 욕실 안에 카시스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모라의 요청을 수락한거군.”
“네. 도저히 수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귀여운 여인들 두 명의 마음을 인질로 잡혀 버렸거든요.’
샐리는 정말 카모라의 드레스를 받아도 되냐며 두 손을 맞잡아 오던 에이미와 마가렛을 떠올렸다.
“카모라의 드레스가 입고 싶어서인가?”
“그런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어요.”
샐리가 아기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며 웃었다.
“저하와 함께하는 일이니까요.”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카시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샐리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에스테반 공작의 첩으로서 모습을 보일 아주 좋은 기회잖아요.”
사람들에게 카시스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인 지가 꽤 되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이들과 친교를 쌓았다.
무조건적인 적의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선망의 시선을 받아 사교계의 중심부로 들어갈 때였다.
카모라의 이름이 걸린 쇼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무대였다.
“저하도 그래서 승낙하신 거죠?”
아무런 의심 없이 물어보는 얼굴에 카시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샐리의 말대로 이 일은 아주 좋은 기회였다. 에스테반 공작과 그의 애첩. 두 사람이 함께 카모라의 무대에 선다면 제국 사교계에 엄청난 화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자체만으로 고고한 엘리제의 입지를 흔들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일을 계기로 샐리의 평판이 높아지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 당연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다니.’
카시스는 지금껏 이 일의 대가를 조금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샐리가 이 일을 승낙할지, 그녀가 카모라의 드레스를 입으면 어떤 모습일지 같은 쓸데없는 생각만 했다.
그것이 믿기지 않아 카시스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야.”
* * *
카시스와 샐리가 아뜰리에에 나타났을 때 카모라는 며칠간 쌓여 있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미인이 두 명!’
꽁꽁 뭉쳐졌던 근육이 풀리고 침침해졌던 눈을 새것으로 갈아 끼운 기분이었다. 카모라는 빛나는 두 생명체를 보며 황홀한 얼굴을 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카모라는 고개를 붕붕 저으며 줄자를 손에 들었다. 아름다운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예술품을 만드는 것을 더 즐기는 창작자였다.
“치수를 먼저 재도록 하죠. 입고 계시는 옷을 벗고 이 옷으로 갈아입어 주세요.”
카모라가 준 얇은 옷을 들고 카시스와 샐리는 나란히 붙어 있는 방으로 각각 들어갔다.
카시스가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던 중이었다.
“꺄악! 샐리!”
샐리라는 이름에 카시스가 민첩하게 반응했다. 벌어진 셔츠 깃을 제대로 여미지도 않은 채 방을 나서려는데 카모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난번보다 가슴이 더 커졌잖아요!”
카시스는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몸이 굳었다.
“허리 사이즈는 그대로인데 어떻게 가슴만 커졌지?! 어머머. 설마 밤마다 에스테반 공작께서 샐리의 가슴을 주물주물…….”
“아니요. 카모라 님께서 보내 주신 마사지사의 마사지가 효과를 본 모양이에요.”
“난 그 마사지 10년째 받았는데도 전혀 효과가 없던데. 역시 될 놈은 뭘 해도 되나 봐요. 나도 그런 말 많이 들었는데.”
쉴 새 없이 수다를 떠는 카모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시스는 지친 얼굴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기운이 빠진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저질스러운 여자로군.’
조금 후 카모라가 카시스가 있는 방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를 마음껏 즐긴 카모라는 매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카모라는 카시스를 보는 순간 손에 든 줄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어머나. 여기도 꽤 위험하네.’
카시스가 입고 있는 옷은 치수를 재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얇은 재질의 셔츠였다.
얇은 셔츠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조각상 같은 사내의 몸이 그녀의 시야로 선명히 들어왔다.
카모라는 프로였다. 여기서 잔뜩 흥분했다가는 저 까다로운 남자가 도망갈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할 일을 해야 한다.
침착함을 되찾은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카시스의 몸 위로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이상적인 비율로 만들어진 뼈대, 섬세한 모양을 그리며 붙어 있는 단단한 근육, 신이 빚은 조각상처럼 완벽한 몸이었다.
“카모라.”
“네에?”
“콧김이 닿아 무척 불쾌하군.”
그제야 카모라는 필요 이상으로 카시스에게 가까이 붙어 있음을 깨달았다. 카모라는 아쉬운 손길로 그에게서 떨어졌다.
“치수는 다 재었습니다. 그럼 이제 나가서 자세한 설명을…… 잠시 실례 할게요!”
카모라의 눈빛이 한순간 바뀌더니 카시스를 남겨 두고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카시스는 어이없는 얼굴로 다시 옷을 갈아입고 방 안을 나왔다.
아뜰리에 한 켠에 놓인 책상으로 달려간 카모라가 미친 듯이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기고 있었다.
어떤 영감이 떠오른 모양인지 ‘오오’ 소리를 내며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카시스의 옆에 다가온 샐리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예술가란.”
“아아.”
긍정의 의미는 아니었다. 대단하다기보다는 해괴했다.
카시스는 샐리를 바라보려다가 다시 카모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의 가슴으로 향해 버리는 시선 때문이었다.
“저렇게 자신의 일을 사랑할 수 있다니 부럽네요.”
“부러워?”
카시스가 샐리의 말이 신기한 듯 되물었다.
“자신의 일에 저토록 빠질 수 있다니, 얼마나 즐거우면 저러겠어요.”
“일에 필요한 건 의무와 책임이 아닌가. 그런 감정이 왜 필요하다는 건지 난 잘 모르겠군.”
샐리는 카시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분하고 무심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두려울 것 없을 만큼 엄청난 권력과 재산을 가진 에스테반가의 주인.
그러나 그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많은 이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을 그저 평생 이고 가야 하는 짐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그에게 매달렸는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그를 웃게 해 주고 싶었다. 그의 짐을 덜어 주고 싶었다. 어림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웃고 사랑한다고 외쳐도 그는 조금도 샐리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전생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의 모습에 어쩐지 가슴 한편이 씁쓸했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샐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그날 이후 샐리의 하루가 무척 바빠졌다. 낮에는 티파티를 다녀오고 저녁에는 카모라의 아뜰리에로 가 쇼를 위한 연습을 했다.
“봄바람을 맞는 아이처럼 사뿐사뿐 걸어 주세요.”
“거기서 턴. 치맛자락이 최대한 우아하게 펼쳐지게 돌아야 해요.”
높이가 10㎝가 훌쩍 넘는 구두를 주며 이런 요구를 할 때도 있었다.
“바닥을 보지 말고 턱을 들고 아주 도도하게 걸어 주세요.”
높은 굽을 신는 것이 익숙한 샐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샐리는 며칠 내내 그 구두를 신고 다녔다. 구두가 제 발처럼 편하게 느껴지고 나서야 카모라가 원하는 느낌대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만족도 잠시, 카모라는 그게 아니라며 신경질 냈다가 ‘오! 샐리’를 외치며 극찬했다가 바꿀 부분이 생겼다며 갑자기 드레스를 수선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정신없었던 그녀의 모습도 시간이 지나니 점점 익숙해졌다. 샐리는 열정적인 카모라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그녀와 함께 무대를 만드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무척 즐거웠다.
긴 줄자를 든 카모라가 샐리를 향해 물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는 요즘도 바쁜가요?”
“네. 어제도 새벽 일찍 나가셔서 밤늦게 돌아오셨답니다. 오늘은 정말 못 오실지도 모르겠어요.”
카시스는 마음대로 놀고먹어도 되는 팔자 좋은 귀족이 아니었다. 에스테반이라는 무거운 이름만큼이나 막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쌓여 있는 서류를 결재하고, 가신들과 골치 아픈 회의를 끝내고, 황성에 들러 황제와 정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에도 그 바쁘다는 에스테반 공작은 오늘도 아뜰리에로 찾아왔다.
그는 잠깐 등장하는 들러리였기에 연습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인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연습용으로 만든 무대 옆 의자에 앉아 샐리를 구경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연습이 끝나면 샐리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 카시스를 볼 때마다 카모라는 광대를 올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또 그런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군.”
카모라의 시선을 예민하게 감지한 카시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어머머. 잘생긴 얼굴로 노려봐 주면 나야 좋지요.’
카시스의 날 선 시선을 카모라는 히죽 웃으며 받아넘겼다.
요 며칠 두 사람을 지켜본 카모라는 알게 된 것이 있다.
두 사람은 소문만큼 끈적끈적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달달함과는 담쌓은 아주 담백한 사이였다.
그런데 저 얼음 같은 남자는 종종 뜨거운 눈빛으로 샐리를 바라보곤 했다.
정작 샐리는 연습에 집중하느라 그의 눈빛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 점이 카모라를 참을 수 없을 만큼 흥미롭게 만들었다.
* * *
샐리는 오랜만에 로즈마리 백작 부인의 티파티를 찾았다. 늘 새로운 패션에 관한 열띤 대화를 여는 로즈마리가 내민 것은 카모라 쇼의 초대장이었다.
오렌지색 초대장에는 카모라의 이름이 독특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카모라 님께서 초대장을 보내오셨어요. 카모라의 신상 드레스를 선보이는 쇼를 한다는군요.”
로즈마리의 말에 여인들이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역시. 로즈마리 부인이라면 받으실 줄 알았어요.”
그녀들은 로즈마리가 들고 있는 초대장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져 봐도 되나요?”
한 여인이 귀한 보물을 대하듯 물어 오자 로즈마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깃털보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건넸다.
“부디 조심히 만져 주세요.”
바들거리는 손으로 카모라의 초대장 한 장 들고 살피는 여인의 모습은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러나 남들이 어떻게 보든 이 자리에 모인 여인들만큼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 카모라가 보내온 초대장이 아닌가!
패션을 사랑하는 그들에게 카모라는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였다.
“정말 부러워요, 로즈마리 부인. 이 초대장을 받은 이들만 쇼에 갈 수 있다면서요?”
“워낙에 많은 이들이 가고 싶어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리한다는군요.”
“아아. 정말 보고 싶은데 아쉬워요.”
한 여인은 아이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카모라의 팬이 유독 많은 이 자리만이 아니라 최근에 갔던 티파티에서도 여인들의 주된 이야기는 곧 열릴 카모라 쇼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날짜와 장소 빼고는 모든 일이 비밀에 부쳐졌기에 여인들의 관심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드레스쇼라니 과연 카모라예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신상 드레스를 선보이는 브랜드는 없었잖아요.”
보통 새로 디자인한 드레스는 드레스숍의 가장 잘 보이는 창가에 진열시켜 계절 내내 볼 수 있도록 전시하기 마련이었다.
드레스를 오페라쇼나 오케스트라처럼 무대 위에서 선보인다니 독특하기 그지없었다.
“마네킹이 아니라 모델이 무대 위에서 드레스를 입고 옷을 보여 주는 쇼라고 하더군요.”
“어떤 무대든 굉장할 거예요.”
그녀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여인들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어떤 드레스가 나올지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하던 중 누군가 물었다.
“이런 대단한 쇼의 모델이 과연 누구일까요?”
여인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드레스에서 모델로 넘어갔다.
“외국에서 모셔온 엄청난 미인이라고 들었어요.”
“어머. 제가 듣기로는 제국의 영애 중 한 명이라던데요? 남쪽 지방에 아름다운 외모로 소문난 영애가 며칠 전 카모라 님의 아뜰리에에 다녀갔다고 해요.”
“저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라고 들었어요. 카모라 님께서 거리에서 발견하여 모델로 발탁했대요.”
이야기는 점점 커져서 황가의 황녀라느니 외국에서 추앙받는 성녀라느니 별별 이야기들이 다 나왔다. 물론 사실관계가 입증되지 않은 부풀어 오른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누구든 그녀는 분명 아름다울 거예요. 카모라 님께 선택받아 드레스를 입을 정도의 여인이니까요.”
로즈마리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말투로 단호히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카모라에 대한 엄청난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다.
그녀의 말에 다른 여인들도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샐리는 꽤 당혹스러운 얼굴로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심히 해야겠네.’
샐리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카모라의 유명세는 엄청났고, 여인들의 관심도 높았다. 이 관심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인 동시에,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의 비난도 엄청날 것이다.
샐리는 사뭇 긴장된 얼굴로 손에 들었던 케이크 조각을 접시 위로 내려놓았다.
* * *
“오늘은 쇼의 피날레 부분을 연습하도록 할게요.”
지금까지는 샐리 혼자 연습을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드레스를 선보이는 장면에서는 카시스와 샐리가 함께 연습을 해야 했다.
카시스는 평소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카모라의 아뜰리에를 찾았다.
“마지막 드레스의 테마는 ‘여인의 유혹’이에요.”
‘유혹’이라는 단어에 샐리와 카시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일단 저하는 의자에 앉아 주세요.”
카모라의 말에 따라 카시스는 무대의 중앙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됐나?”
“음~. 좀 딱딱한데. 평소처럼 앉아 주시겠어요?”
“평소처럼이라니?”
“평소에는 더 오만방자하게 앉아 계셨잖아요.”
“…….”
카시스는 이제 카모라의 무례에 화도 나지 않았다. 카시스는 몸에 준 힘을 살짝 풀었다.
곧게 편 허리, 살짝 든 턱 선과 내리깐 눈이 초상화 속의 귀족처럼 오만하고 우아했다.
“아주 좋아요!”
카모라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이제 저 콧대 높은 남자를 카모라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가차 없이 흔들어 놓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쾌감이 일었다.
“자, 그럼 샐리. 저하를 향해 걸어가며 저 오만하기 그지없는 사내를 유혹해 주세요!”
샐리를 바라보는 카모라의 눈은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샐리는 무척 난감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저 에스테반 공작을 유혹하라니.
‘아니야. 어려울 게 뭐 있어.’
샐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를 유혹하는 법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잘 알고 있었다.
옅은 미소에서 시작하여 점점 더 진한 미소로 농염하게.
샐리는 꽃이 만개하듯이 눈초리를 화사하게 접어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창부 시절 지겹도록 거울을 보며 익혔던, 남자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미소였다.
카시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농염한 미소는 사내의 중심부를 쫘르르 흔들어 놓을 만큼 야했다.
“그만!”
카모라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미간을 찌푸린 카모라가 실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일차원적이고 자극적이기만 해요. 마음은 하나도 없이 겉만 웃고 있잖아요.”
까다롭기 그지없는 요구였다. 몇 번을 계속해 보아도 카모라는 ‘그만! 그만! 그만!’을 수차례 외쳐 대었다.
카시스는 샐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평소의 당당함이 사라진 그녀는 꽤 풀이 죽어 보였다. 카시스는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카모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 사내를 유혹하는 미소라고 하지 않았나.”
카모라는 어디 더 해 보라는 눈빛으로 카시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눈에 힘을 주고 단호히 말했다.
“그녀의 미소는 제법 매혹적이었어.”
카시스의 말은 어쭙잖은 위로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카시스가 보기에 샐리의 미소는 완벽했다. 어느 사내가 보아도, 아니 어느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고 할 만한 미소였다.
그의 말에 카모라는 ‘흥’ 하고 눈썹을 찡그리며 앙칼지게 말했다.
“어머나. 그래서 그렇게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으셨구나.”
“……그 정도로 제멋대로 근육이 움직이게 둔 적은 없어.”
카시스는 짐짓 표정을 갈무리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말에 카모라가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 카모라의 눈은 피해 갈 수 없어요. 설령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없다고 시치미 떼셔도 상관없어요.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자기 할 말을 하는 사내라니. 이것만 봐도 샐리는 저하를 조금도 유혹하지 못한 것이 분명해요.”
카모라의 날카로운 말에 샐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강렬한 마음이 담긴 미소예요. 단순히 몸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내의 마음, 영혼까지 갈구하는 그런 열망이요. 그런 미소로 유혹당한다면 제아무리 에스테반 공작 저하도…….”
카모라의 보라색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이성 따윈 날아가 버릴걸요.”
카시스는 카모라의 말이 엄청난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여인의 미소가 아닌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린 적 없었던 에스테반의 이성을 사라지게 만든다고? 제 아무리 대단한 마력석을 쓴다 해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시스를 향해 카모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이 이상 해 보았자 나아질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카시스도 동의했다. 계속해 보았자 차도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잠시 멈추는 것이 나았다.
카시스가 의자에서 일어나 겉옷을 입을 때까지 샐리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잠시 후 샐리가 카시스를 보며 말했다.
“저하 먼저 돌아가세요. 저는 연습을 마무리하고 갈게요.”
잔뜩 내려앉은 어깨와는 달리 오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샐리의 황금색 눈동자는 아직도 생생히 빛나고 있었다. 이대로 어설프게 일을 끝내 놓고 가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야 너지.’
늘 그렇듯 샐리에게는 자신의 어쭙잖은 위로 따위는 필요 없어 보였다. 카시스는 고개를 숙여 샐리와 눈을 마주쳤다.
샐리는 남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조금 놀랐다. 계속 반복된 연습에 차갑게 가라앉아 있을 거라 생각했던 눈동자는 오히려 따스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샐리는 그 눈동자가 어색해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카시스는 고개를 돌린 샐리를 보며 말했다.
“그래. 마차를 보내 놓을 테니 편한 시간에 돌아오도록 해.”
고저 없는 음이 여전히 딱딱하기 그지없었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카시스가 사라지고 넓은 아뜰리에 안에는 카모라와 샐리 둘만이 남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카모라가 피곤한 듯 안경을 벗어 눈가를 매만졌다.
“커피 한잔할까요, 우리?”
“그래요.”
샐리도 피곤한 얼굴로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카모라는 샐리의 앞에 커피 잔을 건네며 말했다.
“내가 너무 까다로워서 질렸어요?”
“아니요.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진심이었다. 카모라는 자신의 미소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단순히 남자의 음욕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미소에는 감정 한 조각 따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카모라가 수차례나 외친 ‘마음’을 담아 달라는 요구를 샐리는 전혀 들어줄 수 없었다. 회귀한 순간부터 깊은 곳에 봉인해버린 것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이니 단순히 입꼬리를 더 올린다고 해서, 눈매를 부드럽게 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카모라는 뜨거운 물이 든 포트를 가져왔다. 쪼르르, 뜨거운 물을 따르자 뽀얀 김과 진한 커피 향이 솟아올랐다.
카모라는 커피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여인에게 드레스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죠. 가문의 부유함을 자랑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나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도구이기도 해요. 그리고 마음에 둔 사내의 마음을 얻고 싶을 때 입는 전투복이기도 하죠.”
카모라는 그 순수한 열망을 드레스에 담고 싶었다. 드레스를 입고 예뻐지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 그 원초적인 열망이 카모라의 바늘을 쉼 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아름답게 꾸민 모습에 담은 마음, 사랑 고백과 같은 애틋한 유혹이에요.”
“…….”
“샐리는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없나요?”
총명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샐리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속 깊이 숨겨 둔 비밀을 알아챌 것 같았다.
샐리는 카모라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전생의 샐리가 수도 없이 품었던 마음이니까.
‘나를 바라봐 주세요.’
‘나를 사랑해 주세요.’
샐리는 그때의 마음 한 자락도 꺼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끄집어내어 표현하는 순간 혹시라도 그 감정이 다시 되살아날까 봐 두려웠다. 그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래서 다시 만난 카시스의 앞에서는 모든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했다. 옅은 미소, 작은 한숨조차 그냥 지은 적이 없었다.
마치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머리로 한번 생각하고 표현했다. 단 한 번도 카시스의 앞에서 그때처럼 순수하게 미소 지은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샐리는 당당하고 용감한 여성이에요. 뭐가 그렇게 당신을 두렵게 하는 거죠?”
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카모라는 샐리의 내면에 아주 깊은 고통이 어려 있음을 깨달았다.
“샐리, 내 얘기를 좀 들어 볼래요?”
무척이나 권위적인 한 귀족 가문이 있었어요. 엄한 아버지는 항상 딸에게 이야기했어요.
“완벽한 교육을 받아 우아한 귀족 여인이 되어야 한다.”
포크라도 한번 잘못 집으면 엄하게 혼을 내는 아버지를 소녀는 참 무서워했죠. 소녀는 완벽한 귀족 영애가 되기 위해 아주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했어요.
소녀는 모든 수업 시간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자수 시간만큼은 너무나 즐거웠어요.
소녀는 바늘과 실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좀 이상하다 싶을 만큼 아주 많이요.
소녀는 많은 것을 만들었어요. 작은 인형의 옷, 장갑, 손수건.
소녀의 솜씨는 훌륭했고 주위 사람들은 소녀를 칭찬했어요. 귀족 여인에게 바느질 솜씨는 자랑할 만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엄한 아버지도 소녀의 바느질을 막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죠. 소녀는 자수 시간 외에도 시간만 나면 틈틈이 바느질을 했다는 것을요.
아버지가 저택을 비우기라도 하면 방 안에서 나오지도 않고 밤을 새기 일쑤였죠.
소녀의 어머니와 하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 그 비밀을 지켜 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예정보다 일찍 집에 들어왔어요. 그는 보고 말았죠. 잔뜩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바느질을 하고 있는 딸의 모습을요.
그 모습은 그가 아는 정숙하고 얌전한 딸과는 너무 달랐어요. 눈은 기괴하게 빛나고 있었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은 퀭한 얼굴이었죠.
그는 그제야 자신의 딸이 가진 바느질에 대한 애정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결국 그는 소녀의 보물과도 같았던 반짇고리를 모두 태워 버렸어요.
“자수는 지금 정도만 놓을 수 있으면 충분하다. 이제부터는 예법을 익히고 사교 활동에 나가거라. 네가 해야 할 것은 이런 바느질이 아니라 레이디로서 교양을 쌓는 일이야!”
불같이 화내는 그 모습에 소녀는 바들바들 떨었어요. 소녀에게 아버지는 늘 무서운 존재였으니까요. 그래서 소녀는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그래. 난 아름답고 우아한 귀족 영애가 되어야 해. 이제 바느질은 그만할 때야.’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요. 살짝 열려 있는 빈방에 천 쪼가리와 바늘이 놓여 있었어요. 누군가 제대로 정리를 하지 않고 간 것이었죠. 소녀는 작은 바늘을 향해 다가갔어요.
안 돼. 그만둬. 혼날 거야. 머리로는 온갖 경고음이 울리는데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 작은 바늘을 손에 잡는 순간 시끄러운 소음이 멈췄죠. 소녀는 미친 듯이 바느질을 시작했어요. 그 짧은 시간 동안 천 쪼가리를 이어 한 장으로 만들고 그 위에 자수를 새겨 넣었어요.
조각조각 나 있던 천은 어느새 아름다운 손수건이 되어 있었죠. 그 손수건을 품에 안고 소녀는 생각했어요.
‘이건 나의 운명이야. 나는 이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찾지 못할 거야.’
소녀는 그날 아버지에게 말했어요.
“전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될 거예요.”
처음으로 엄한 아버지를 거역한 날이었죠.
“그 말을 할 때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아버지가 너무 화가 나서 나를 쫓아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무척 화내긴 하셨지만 제가 생각한 것만큼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 제국의 제일가는 디자이너가 되었죠. 그러니까 요는 말이죠.”
카모라는 조금 멋쩍은 듯이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더 이상 도망가지 말고 맞서 봐요. 생각보다 그건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있어요.”
달이 구름 속으로 기운 새벽이 돼서야 샐리는 에스테반가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샐리는 눈을 크게 떴다. 마차의 열린 문 너머로 카시스가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샐리에게 카시스는 손을 내밀었다.
“바람이 차군. 어서 들어가지.”
샐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잡고 내렸다. 닿은 손은 아주 차가웠다. 아주 오랜 시간 바깥에 있던 것처럼.
“절 기다리셨어요?”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잠시 산책을 하러 나왔던 것뿐이야.”
이 추운 겨울밤에 산책이라니. 너무나 서툰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카모라가 원하던 정답은 찾았나?”
샐리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생경한 눈빛으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에스테반 공작은 저런 사소한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질문은커녕 두 사람 사이엔 거의 대화가 없었다.
샐리가 용기를 내어 미소 지으며 다가가면 그는 끔찍하다는 듯 샐리를 피해 버렸다.
단 한 번이라도 카시스가 이런 식으로 대해 주었다면 샐리는 너무 기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에 대한 원망은커녕 다시 한번 그를 사랑하리라 맹세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지?’
아직까지 심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샐리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아직이요. 그런데 조금만 실험을 해 보면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실험?”
“네. 저하께서 도와주시겠어요?”
샐리의 눈빛이 제법 진지해 보여 카시스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잘 이해 못할 해괴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늘 목적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뭔가 필요한 바가 있을 터였다.
사라락,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속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작게 숨을 내쉰 샐리는 고개를 올려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의 사내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과거에는 진한 남색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칠 때면 심장이 바스라질 듯이 조여 왔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의 요동도 없었다.
‘괜찮아.’
이번엔 카시스의 손 위로 손을 가져가 보았다. 손이 닿는 순간 차가운 그의 손이 움찔거렸다.
샐리의 다섯 손가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차가운 그의 손과 뜨거운 그녀의 손이 서로를 탐닉하듯 얽혔다.
얽힌 손으로 서로의 체온이 뒤섞이는 것이 느껴졌다. 전생이라면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을 것이다.
‘이것도 괜찮아. ……마지막으로.’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샐리가 그의 품으로 파고든 것이다. 갑작스레 안겨 든 그녀의 몸에 카시스는 차마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그러나 샐리는 그의 반응은 무시하고 가차 없이 그의 허리에 손을 감고는 그의 가슴 위로 살포시 얼굴을 대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많은 것이 느껴졌다.
그의 맥박 소리, 그의 체온, 그의 체향, 그의 작은 움직임까지.
전생에 이런 식으로 그를 온전히 느꼈다면 참지 못하고 그의 입술을 탐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도 그런 욕망이 일어나지 않았다. 심장도 마냥 고요하기만 했다.
‘나 정말 괜찮구나.’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의 심장은 견고했고, 전생의 감정은 지워졌다.
그 점이 샐리에게 엄청난 해방감을 일으켰다. 놀랄 만큼 상쾌하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이제 됐어요. 협조 감사합니다, 저하.”
샐리는 조금 전과 대비되는 밝은 얼굴로 카시스에게서 떨어졌다. 카시스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카시스는 인생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을 경험하고 있었다. 늘 정리가 돼 있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차분했던 감정은 요동쳤다.
카시스의 감정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샐리는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저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을? 에스테반 공작을 놀리는 것을?
카시스는 정말로 그렇게 묻고 싶었다.
* * *
찬바람이 부는 겨울의 어느 날 밤, 카모라 쇼가 시작되었다.
오페라나 연주회가 아닌 개인이 만든 의상을 전시하는 이례적인 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에이미 영애, 어서 와요.”
“마가렛 부인, 일찍 오셨네요.”
샐리에게 초대장을 받은 에이미와 마가렛이 두 손을 맞잡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에이미가 마가렛 옆에 있는 리오넬 후작을 향해 인사했다.
“후작님께 인사드립니다. 로렌스가의 에이미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아름다운 딸들로 유명한 로렌스가의 영애시군요.”
리오넬은 정중한 말투로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에이미는 그의 말에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이라는 말은 자신과 썩 어울리는 수식어는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바람둥이로 소문난 남자답게 부끄러운 칭찬을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미의 옆에 서 있던 청년도 후작 부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에이미 양의 약혼자인 알렉스 아프리모입니다. 반갑습니다.”
알렉스는 화려한 외양은 아니었지만 이목구비가 아주 단정한 미남이었다.
부드러운 눈빛의 사내가 새빨간 꽃다발을 든 모습이 꽤 낭만적으로 보여 마가렛이 두 볼을 살짝 붉혔다.
“반가워요, 아프리모 영식. 에이미 영애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호감 어린 마가렛의 시선에 웃음 지은 알렉스의 얼굴 아래로 음산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라이언 리오넬이오.”
에이미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무척이나 섬뜩한 얼굴을 한 리오넬 후작이 마가렛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꽃은 뭐지?”
리오넬은 무척이나 싸늘한 눈빛으로 알렉스의 손에 들린 꽃을 가리켰다.
“설마 내 부인에게 주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대답하면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다. 흉흉하기 짝이 없는 리오넬 후작의 손등을 마가렛이 찰싹 때렸다.
“그만하세요. 다른 여성의 파트너를 상대로 철없이 무슨 짓이세요?”
“방금 부인이 얼굴을 붉히시지 않았습니까!”
마가렛의 시선이 닿는 순간 리오넬의 눈에는 그저 한 명의 라이벌, 아름다운 부인을 뺏어 갈지도 모르는 위험 인자로만 보였다.
마가렛은 부끄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리오넬 후작의 팔을 잡아끌었다.
“실례했어요, 에이미 영애. 나는 이이를 좀 진정시키고 들어갈게요.”
“네. 그러세요.”
아내에게 끌려가듯이 사라지는 부부를 보며 알렉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리오넬 후작님이라면 그 바람둥이로 유명한 분 맞으시죠?”
“맞아요.”
“그런데 왜 저렇게 되신 거죠?”
“부인이 너무 예뻐져서요.”
“허어…….”
본의 아니게 유부녀를 꼬드기는 남자 취급을 받은 알렉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한 걱정을 하시는군요. 나는 어떤 미인이 와도 당신밖에 보이지 않는데.”
“……알렉스.”
“……에이미.”
약혼한 지 5년이 된 두 사람은 얼마 전 첫날밤을 보낸 후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는 연인처럼 뜨거운 사랑을 자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핑크빛 오오라를 발산하며 두 손을 마주잡았다.
“와.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단한 귀족들이에요.”
관객석에 앉은 에이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최근에 사교계에서 가장 이슈가 된 카모라 쇼이니 만큼 초대받은 이도 하나같이 위세가 대단한 이들이었다.
사교계의 여인들을 잘 알지 못하는 에이미가 알 정도로 대단한 가문의 여인들이 많았다.
완벽하게 꾸민 귀부인들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던 에이미와 달리 알렉스는 빈 무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세요?”
“무대 장치에 꽤 공을 들인 것 같아서요.”
알렉스는 제법 눈썰미가 좋았다. 무대는 오페라나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비하면 훨씬 작았지만 무척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게다가 무대의 천장 쪽에는 마력석까지 장착되어 있었다.
“이런 쇼에 마력석까지 쓰다니. 카모라 님은 듣던 것보다 대단한 디자이너인가 보군요.”
마법의 힘을 담은 마력석. 신비로운 효과를 주는 데 제격이었지만 무척이나 고가였기 때문에 황족이나 고위 귀족들을 위해 준비된 최고급 무대에서나 쓰이곤 했다.
이런 개인이 주최하는 무대에서 쓰이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럼요. 카모라 님은 제국 역사상 최고의 천재 디자이너라고도 불리는걸요. 알렉스 님도 카모라 님의 드레스를 보면 놀랄걸…… 어?”
에이미가 놀라 두 눈을 껌뻑거렸다. 관객석의 조명이 모두 꺼졌기 때문이다.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관객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사고인가?”
“시작도 하기 전에 무슨 일이죠?”
그러나 웅성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무대 위로 환한 조명이 비쳤다.
관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대를 향했다. 적막이 흐르는 공간 속에 아주 작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기교도 없는 순수한 노랫소리는 여리고 사랑스러운 음색이었다. 조명 색도 연두색, 노란색, 하늘색으로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싱그러운 빛의 향연 속에 한 여인이 등장했다.
연한 분홍빛의 드레스는 장식이 거의 없이 무척 수수했다. 지나치게 치켜 올린 가슴도, 숨 막히게 조여진 허리도 없었다.
섬세하게 절개된 옷과 꽃잎처럼 하늘거리는 치마가 사랑스럽게 휘날릴 뿐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녀의 신발이었다. 가는 발목 아래로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일반적인 귀족 영애는 예법을 배우기 시작하며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다. 굽이 낮은 구두는 자신의 방에서 쉴 때나 신을 수 있었다.
투박하리라 생각한 신발은 의외로 앙증맞고 귀여웠다. 무대 위를 걷는 샐리의 모습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귀족들이 어린 시절부터 진저리치게 배우는 걸음걸이와는 전혀 달랐다. 예법 따윈 무시한 어린아이 같은 발걸음이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귀족적인 걸음걸이를 배웠던 이들은 언제 저렇게 편하게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무대 끝에 선 샐리가 드레스 자락을 들고 몸을 돌리자 치마 끝자락이 나비 날개처럼 나풀거렸다. 샐리는 다시 처음 걸어왔던 길로 돌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머나. 벌써 사라져 버렸어요.”
“꼭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요정 같았어요. 정말 사랑스럽네요.”
어둠 속에서 여인들은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 더워진 것 같지 않아요?”
한 여인의 말대로 어디선가 나온 뜨거운 열기가 관객석을 후끈하게 만들었다. 어떤 여인은 부채를 꺼내 살랑이기까지 했다.
대부분 두툼한 겨울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에 살짝 높아진 온기에도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때 조명이 바뀌고 샐리가 다시 등장했다.
샐리는 긴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망토는 섬세한 자수가 수놓아져 아름다웠지만 무척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붉은빛의 조명과 관람석에 가득한 열기가 더해져 더욱 그렇게 보였다.
“하아. 보는 제가 다 덥네요.”
그 순간 샐리는 덮고 있던 망토를 바닥에 버리듯 내려놓았다. 보는 이들의 답답함을 날려버리는 것처럼 시원한 손놀림이었다.
망토 속에 숨겨져 있던 드레스가 드러났다. 드레스는 독특하게도 한 장의 긴 천으로 만들어졌다.
얇고 속이 비치는 소재의 천은 절묘하게 매듭지어져 아름다운 드레스가 되었다.
진한 바다색 같은 프러시안 블루의 드레스는 여인의 몸을 드러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부터 시작해 골반까지, 육감적인 여인의 몸이 드러났다.
그때 무대 위쪽으로 바람이 살짝 불었다. 샐리는 시원하게 올려 묶은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무대를 바라보던 여인 중 한 명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여름에 입고 싶어.”
제국의 여성들에게 여름은 무척 고된 계절이었다. 여름 드레스는 아무리 시원한 소재를 사용했다고 하나 다리까지 덮는 긴 치마였다.
그 안에 코르셋까지 착용하면 땀이 차 심하게는 피부병이 나는 일도 많았다.
저런 드레스를 입는다면 천 사이로 바람이 솔솔 들어와 너무나 시원할 것 같았다.
상쾌한 바닷바람 같은 샐리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뜨거웠던 열기도, 시원한 바람도 사라졌다.
여인들은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신기한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음악이 거의 사라진 무대 저편에서 선명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당차게 땅을 내딛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샐리는 익숙하면서도 특이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상체 부분이 재킷으로 만들어진 드레스였다. 남성들이 입는 재킷과 거의 비슷한 디자인이었지만 섬세하게 어깨선과 허리 절개선을 잡아 슬림하면서도 우아했다.
재킷 아래로는 단정하게 떨어지는 드레스가 발목까지 내려왔다. 꼭 남성복을 여성의 드레스로 바꿔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긴 머리를 틀어 올려 짧게 고정시킨 머리카락, 진한 화장에 무표정으로 걷는 샐리의 얼굴은 빳빳한 드레스와 어우러져 무척이나 도도해 보였다.
샐리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샐리와 눈이 마주친 여인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샐리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여인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벌써 마지막 드레스네요.”
“어떤 드레스일지 상상도 되지 않아요.”
파격적인 드레스의 향연에 여인들의 눈빛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마지막 드레스는 얼마나 독특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무대의 조명이 잠시 꺼지고 새까만 어둠이 몰려들었다. 잠시 후 무대 위의 조명이 다시 켜졌을 때 여인들이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꺅!”
무대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제국의 귀족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남자, 에스테반 공작이었다.
세련되게 정돈한 헤어스타일과 몸을 감싸는 예복이 어우러져 평소보다 근사했다. 어깨를 쫙 펴고 허리를 곧게 편 모습은 오만하면서도 우아함이 가득했다.
“제,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것 아니죠?”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눈을 깜빡이는 여인도 있었다.
“네. 분명 에스테반 공작 저하가 맞아요.”
여인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사교 연회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다른 곳도 아닌 카모라 쇼의 무대에 나타나다니!
소란스럽던 여인들이 조용해진 것은 그의 뒤로 한 여인이 나타난 순간이었다.
“세상에.”
에이미는 두 손을 모아 입을 막았다. 지금까지 조용히 무대를 바라보았던 알렉스마저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툭 떨어뜨렸다.
반짝이는 조명 속에 등장한 여인은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앞서 나왔던 파격적인 드레스들과는 달리 누구에게나 익숙한 제국의 클래식한 드레스였다.
가는 목과 유려한 어깨선이 강조되고, 가느다란 허리 아래로 풍성한 치맛자락이 늘어졌다.
섬세하게 수놓아진 자수와 한 치의 오차 없이 박혀 있는 보석들이 빛났다.
누구나 아는 모습임에도 조금도 뻔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여인은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곧게 편 허리와 똑바른 시선, 오차 없이 일정한 보폭, 흔들림 없는 어깨.
귀족 여인들이 눈물로 배우는 예법의 정수가 그곳에 있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 걸음걸이에 관람석에서는 작은 감탄사만이 새어 나왔다.
샐리가 다가갈 때까지 카시스는 무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에게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의 앞에 선 샐리는 드레스 끝자락을 손에 쥐고 살짝 무릎을 구부려 인사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우아한 인사였다.
“어머나!”
말도 못하고 무대를 바라보던 여인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샐리가 카시스를 향해 손을 내민 것이다. 그것은 아주 파격적인 장면이었다.
제국의 여인들은 늘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남성이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저런 식으로 여인이 먼저 사내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은 상상도 못할 행동이었다.
그러나 차마 말도 건네지 못하고 부채 너머로 흘낏대는 시선 속에는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었다.
나를 봐요.
내가 아름답지 않아요?
당신을 가지고 싶어요.
“……!”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샐리가 미소 짓는 순간 카시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정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의 미소는 강렬했다.
평소 그에게 보여 주었던 차분한 미소가 아니었다. 남들 앞에서 커플 행세를 할 때의 장난스러운 고양이 같은 미소도 아니었다.
그 눈빛은 탐욕적이기 그지없었다. 마치 카시스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강렬하면서도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러면서도 살짝 붉어진 두 볼은 차마 숨기지 못한 그녀의 연정이 드러난 것 같아 사랑스러웠다.
그제야 카모라가 했던 말을 이해했다.
‘제대로 유혹했다면 사내는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다.’
카모라의 말대로였다. 그 미소 한 번에 카시스의 이성은 사라지고 제어하기 힘든 감정만이 남아 버렸다.
카시스는 처음으로 어린 시절부터 배운 지독한 교육에 감사했다.
‘감정을 숨기고 이성으로 몸을 움직여라.’
그것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입을 맞추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가지고 싶다고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면 지금보단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이성으로 억누른 욕망은 그를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깊은 고통과 열망을 겨우 감추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과 닿은 부분부터 찌릿하고 전기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카시스와 샐리가 손을 잡고 나란히 선 순간, 천장에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력석의 힘이었다.
꿈결처럼 내리는 흰 눈 속에서 카모라가 등장했다. 오렌지색 드레스를 입은 아주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관람석을 향해 인사했다.
짝짝짝.
그 순간 숨 막히는 정적이 깨지고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조금 후 무대 위 조명이 꺼졌다. 새까만 어둠이 다시 찾아왔지만 박수 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다시 조명이 들어왔을 때 무대는 텅 비어 있었다. 바닥에 쌓인 눈의 잔재만이 방금 전 보았던 무대의 증거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아요. 도대체 내가 뭘 본 거죠?”
“오늘 밤 잠자는 건 글렀네요. 도저히 심장이 진정되질 않아요.”
여인들은 저마다 흥분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대기실은 몰려든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카모라는 수십 개의 꽃다발 속에 파묻혀서 인사하기 바빴다.
“카모라, 정말 최고였어요!”
“오늘 본 드레스 모두 구입하고 싶어요!”
“어머. 예약은 제가 먼저예요!”
그녀의 작품에 대한 극찬과 욕망이 어우러진 반응들은 모두 카모라가 바라던 것이다.
카모라는 뿌듯한 얼굴로 여인들을 상대했다.
“그런데 무대에 선 모델은 대체 누구예요?”
카모라가 대답하기 전에 한 여인이 나섰다. 그레이스 백작 부인이었다.
“샐리예요.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요.”
여인의 정체를 들은 많은 이들이 놀란 눈을 했다. 그러고 보니 붉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를 가진 요염한 여인이라는 소문과 외양이 일치했다.
“그래서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서 무대에 오르신 거군요.”
“애첩에게 빠져 계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저런 무대까지 함께 서실 줄은 몰랐어요.”
“저는 좀 이해가 되던걸요. 어떤 남자라도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엄청난 미인이잖아요.”
“맞아요. 에스테반 공작 부인과 비견해도 부족하지 않을 미모였어요.”
그 말에 한 여인이 쉿, 하고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이곳에 모인 여인들 중에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을 따르는 이들도 많았다. 쉽게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가는 어떤 시비가 붙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그런 눈치를 볼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샐리는 안목도 무척 뛰어나요. 꾸밈새가 무척 세련되어서 만날 때마다 늘 감탄을 한답니다.
“그녀와 친하세요?”
“조금요. 제가 주최하는 티파티에서 종종 만남을 갖는 사이랍니다.”
“정말요?”
이내 여인들은 그레이스를 둘러싸고 샐리에 대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아는 사실들을 자랑하듯 말했다.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며 리오넬 후작 부인을 변신시켜 준 사람, 카모라의 모델. 모든 것이 그녀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도대체 어떤 여인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그러나 아무리 대기실을 열심히 살펴보아도 샐리는 보이지 않았다.
“카모라 님, 그녀는 도대체 어디 있어요?”
독촉하는 사람들을 향해 카모라는 영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궁금하네요. 공연을 훔쳐보던 마법사가 탐을 낸 건지, 두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지 뭐예요.”
카모라가 말한 것처럼 마법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샐리와 카시스는 무대의 조명이 꺼지자마자 공연장 한편에 있는 작은 방에 숨었다.
조명이 켜지는 순간 많은 이들이 밀어닥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귀찮아서는 아니었다.
뭐든 넘치는 것보다는 부족한 편이 귀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샐리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 여인들의 관심은 점점 커질 테고 그 감정이 커질수록 샐리의 인기는 올라갈 것이다.
그것을 위해 샐리는 피날레의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작은 방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긴장이 풀린 나른한 몸으로 소파에 기댔다.
‘드디어 끝났다.’
실수 없이 무대를 마쳤다는 사실이 그녀의 기분을 무척 고양시켰다. 눈을 감고 작게 숨을 내쉰 샐리는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소파의 자리가 남아 있음에도 그는 앉지 않고 조금 떨어진 문 옆에 서 있었다.
마치 그녀를 일부러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시선은 닫힌 문을 향한 채였다.
‘어색한가?’
그럴 만도 하지. 아무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한 그라도 화려한 조명이 빛나는 무대에 오르는 일은 전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샐리는 피날레에서는 그를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그 앞에서 보였던 가짜 미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미소였으니 그로서는 꽤 황당했을 것이다.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저러지?’ 싶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샐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내가 특별한 마음이라도 품은 것처럼 보였나.’
그는 타인의 감정에 둔감하지만 자신에 대한 관심에 대해선 예민한 편이었다. 더군다나 그 관심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전생에서 끈질기게 그에게 다가온 여인들에게 냉담한 독설을 내뱉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괜한 오해로 두 사람의 사이가 어색해지는 건 사양이었다.
“저하.”
샐리의 목소리에 카시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하, 저 좀 보세요. 할 얘기가 있어요.”
카시스는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흔들림 없는 곧은 등에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 무척 혼란에 빠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이성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카모라가 준비해 놓은 방은 왜 하필 이렇게 작은 곳일까.
최대한 그녀와 떨어져 있으려 해도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작은 숨소리조차 귓가에 속삭이듯 너무나 선명히 들려왔다.
카시스는 샐리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조금 거칠어진 숨이 가라앉았다. 낯선 열기는 여전히 온몸을 순회하고 있었으나 이성으로 제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괜찮아.’
카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샐리를 보는 순간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젠장.’
소파에 기댄 그녀는 구두를 벗고 있어 맨발이 드러나 있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왜 이렇게 야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게다가 저 드레스, 카모라가 마법이라도 건 것이 분명하다.
연습을 하는 내내 수없이 보았던 드레스인데 오늘따라 왜 저렇게 특별해 보이는 것인지.
카시스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주먹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무슨 얘기지?”
평소보다 한껏 낮은 목소리와 경계감 가득한 눈빛에 샐리는 확신했다. 그는 역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하,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무엇을?”
“저는 저하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어요. 믿어 주세요.”
“……?!”
“방금 전은 좀 당황스러우셨죠? 혹시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카모라 님이 주문한 대로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절대 저하에 대한 어떠한 흑심도 없으니 안심하세요.”
카시스는 그 말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샐리의 눈빛은 진지하고 맑았다. 조금도 장난이나 거짓말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의 말은…… 나에 대한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지?”
“네. 그래요.”
단호한 대답에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샐리는 그랬다. 그녀의 눈빛은 하염없이 담백하기만 했다.
처음 보는 사내와 한방에서 밤을 보냈던 첫날밤에도 그녀는 그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몇 차례의 스킨십이 있었지만 모두가 필요에 의해서 했던 것일 뿐, 목적을 달성하면 지금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때마다 무언가 불쾌하기는 했지만 지금만큼 화가 나기는 처음이었다.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닌 것을 안다고, 그러니 그렇게 몇 번이나 말할 필요 없다고 말해 줄 셈으로 카시스는 샐리에게 다가갔다.
몇 번의 보폭만으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샐리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카시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대 위에서 보았던 그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카시스의 침착했던 얼굴에 다시 열기가 몰려들었다.
“저하?”
“…….”
카시스는 늘 사람의 눈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왜 자꾸 시선이 붉은 입술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붉은 입술에 시선이 갈 때마다 머릿속은 엉망이 되고, 기껏 가라앉힌 감정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정말이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샐리 님!”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카시스와 샐리는 어정쩡한 자세로 방 안에 등장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에이미였다.
“어…… 그러니까 카모라 님께서 여기로 가 보라고 해서 온 건데.”
에이미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저 마주 보고 있는 것뿐인데 두 사람이 왜 이렇게 에로틱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제가 실례를 했나요?”
“아니에요, 에이미 님. 와 주어서 정말 기뻐요.”
조금 전 카시스를 향한 심각했던 얼굴은 어디로 간 것인지 샐리는 한껏 밝아진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샐리는 카시스를 바라보며 에이미를 가리켰다.
“인사하세요, 저하. 일전에도 보신 적이 있으시죠?”
그제야 에이미가 수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공작 저하께 인사드립니다. 에이미 로렌스라고 합니다.”
그녀의 동그란 눈과 마주치는 순간 카시스는 방금까지 자신을 휩쓸던 격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조정되지 않는 뜨거운 열기가 식자 차가운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카모라 님께서 지금은 후문 쪽에 사람들이 없으니 나오셔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것을 저하께 전해 달라고 하셨답니다.”
에이미는 손에 든 쪽지를 카시스에게 전했다.
‘카모라가 나에게?’
카시스는 의아한 얼굴로 건네받은 쪽지를 폈다. 쪽지에는 엄청난 악필이 휘갈겨 있었다.
[너무 작은 방을 드려 걱정이네요. 부디 애정 행각은 드레스를 곱게 벗어 놓고 해 주세요.]
“……?!”
카시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에이미는 험악해진 카시스의 눈치를 보며 머뭇머뭇 말했다.
“카모라 님께서 말씀하시길 샐리 님이 지금 입은 드레스가 잘 구겨지는 재질이라 걱정된다고 저보고 어서 가 보라고 하시던데……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 순진한 여인만 아니라면 누구나 알아들었을 것이다. 카시스와 샐리는 카모라의 말속에 담긴 뜻을 단박에 이해하고 굳은 얼굴을 했다.
“저보고 드레스 치마가 구겨지지 않게 정돈해 달라는 것일까요?”
에이미는 풍성한 드레스를 바라보며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샐리는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괜찮아요. 그런 뜻은 아닐 거예요.”
카시스는 기가 찬 얼굴로 이마를 내리눌렀다.
모두가 잠든 새벽, 어둠 속에서 카시스는 침대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정신도 몸도.
그럼에도 그는 잠들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미소 짓던 그녀가 선명히 떠올랐다.
자신의 눈을 당당히 마주 보며 짓던 그 미소를 떠올리면 심장이 꽉 조여 왔다.
‘왜 이러지?’
지금껏 카시스에게 고민이란 아주 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것이었다. 문제가 명료하고 확실한 방안을 찾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문제들.
그러나 이 이상한 감정은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해결 방향조차 보이지 않았다.
‘물질적인 피해나 이득이 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마라.’
수없이 그를 세뇌시켜 왔던 엄한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끊임없이 교육받은 대로라면 이런 이유 모를 것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미소만 떠올리면 아버지의 목소리는 모래처럼 사르르 부서졌다.
결국 그날 카시스는 잠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