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8)

4. 로렌스의 여섯 딸들

첫 티파티를 끝내고 샐리의 앞으로 몇 장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그날의 티파티 때 만났던 여인들이 보내온 것이다.

“생각보다 반응이 빠른걸.”

몇 명은 샐리에게 호감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초대장을 보내올지는 몰랐다.

‘공작 저하 덕분이겠지.’

장미꽃을 직접 들고 찾아온 에스테반 공작의 모습이 강력하게 적용된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이 엘리제에 대한 두려움을 지웠을 것이다.

초대장 수는 여전히 적었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질 낮은 여인들이 보내온 것은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무난히 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인들이 보내온 것이다.

그러니 한 장이라도 허투루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날짜만 겹치지 않는다면 도착한 초대에 모두 응할 생각이었다.

이 기회가 아니라면 겨우 열린 사교계의 좁은 문이 다시 닫혀 버릴지 모른다.

그때 한 장의 초대장이 눈에 띄었다.

“이건…….”

고급스러운 느낌의 다른 초대장들과 달리 알록달록한 도트 무늬로 꾸며진 초대장이었다. 일반적인 귀족 여성은 쓰지 않을 독특한 느낌의 초대장은 에이미 로렌스의 것이다.

특이하게도 파티 초대장이 아닌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초대장이었다. 이런 초대장은 서로 친분이 두터워야 보내는 것이라 조금 신기했다.

‘정말 귀여운 아가씨였지.’

동그란 눈동자에 깜찍한 리본을 좋아하는 아가씨. 샐리에게 ‘님’이라는 존칭까지 쓰며 엄청난 호감을 표시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한번 가 볼까.’

초대장은 특정한 날짜가 적혀져 있지 않고 언제든 편할 때 오기를 바란다고 정중히 적혀 있었다.

그러나 꾹꾹 눌러 담은 필체에는 샐리가 어서 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히 담겨 있었다.

그날도 카시스는 샐리의 방을 찾았다. 매일 저녁 함께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별 이야기가 나돌았다.

매일 밤 두 사람이 달콤한 사랑을 속삭인다는 둥 새벽에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를 들었다는 둥 야릇한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말이 나돌기를 바라고 함께 있는 것이었기에 두 사람은 일부러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소문과는 달리 방 안은 건전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은 아주 담백하게 각자 할 일을 했다.

카시스는 의자에 앉아 책이나 신문을 읽었고 샐리는 소파에 기대어 패션 카탈로그를 보거나 손톱을 정리하는 아주 한가로운 일상이었다.

“로렌스 자작가는 어떤 곳인가요?”

샐리의 목소리에 카시스는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샐리는 카시스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는 일이 전혀 없었지만 종종 궁금한 것을 물어 오곤 했다.

그때마다 카시스는 아주 친절하게 샐리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로렌스 자작가라.”

카시스는 머리를 굴려 관련된 정보를 찾았다. 그는 제국의 귀족들을 아우르는 공작가의 수장이었다. 제국의 웬만한 귀족에 관해서는 꿰고 있었다.

로렌스 자작가는 가지고 있는 역사도 재산도 그냥저냥인 귀족가였지만 한 가지 큰 특징이 있었다. 그건 바로 딸들만 무려 여섯 명이라는 것이다.

“여섯이요?”

“그래. 그래서 로렌스는 지참금을 준비하다 망해 버릴 거라는 말도 나돌았지.”

귀족 여인을 혼인시킬 때 신부의 집에서는 지참금이라는 것을 준비한다. 이름 높은 가문과 이어지는 결혼일수록 수많은 재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로렌스가는 딸들을 시집보낼 때마다 가세가 드높아졌어. 사윗감들이 하나같이 대단한 자들이었거든.”

로렌스가의 딸들이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문도 외모도 평범한 영애라면 그와 비슷한 가문의 사내를 소개받아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마법을 부린 것처럼 로렌스가의 딸들은 운명처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 남자들은 하나같이 재력이 넘치거나, 유서가 깊거나, 인망이 두텁거나, 뛰어난 이점을 가진 이들이었다.

능력 있는 사위들이 한두 명 늘어가면서 로렌스 자작가는 전에 없는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그것을 로렌스의 마법이라 말하더군.”

야욕이라곤 조금도 없는 로렌스가에서 벌어진 엄청난 일을 사람들은 마법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정말 멋진 이야기네요.”

샐리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반짝였다. 전생에는 왜 저런 멋진 이야기를 몰랐을까?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카시스와 엘리제, 사교계에서 자신과 어울려 주는 사람들뿐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샐리의 말에 카시스는 무감각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그런가? 확실히 확률이 아주 드문 기적 같은 경우이긴 하지.”

카시스는 기본적으로 사랑 같은 불확실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로렌스의 이야기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샐리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결혼을 가문을 번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귀족에게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바보 같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제국의 귀족들은 결혼과 사랑을 분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혼자에게 애인이 있는 경우도 아주 흔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카시스는 애첩에게조차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심장엔 사랑이라는 감정 한 조각마저 들어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당신은 앞으로도 얼음 같은 심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겠지.’

다시 만난 그와 샐리의 관계는 무척 달랐다. 사랑이란 감정을 품고 그에게 기대감을 품지 않는다면 그는 아주 말이 잘 통하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로렌스가의 마법 같은 낭만적인 이야기는 그와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다.

* * *

에이미는 아침부터 저택 로비를 떠날 줄은 몰랐다. 왔다가 갔다가 문 앞을 서성거리던 그녀에게 집사가 다가왔다.

“아가씨, 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이미는 빠른 걸음으로 문 앞으로 달려갔다. 어떤 상황이든 우아하게 걸어야 한다는 레이디의 겸양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아름다운 여인이 양산을 손에 들고 우아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샐리 님!”

귀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빛내며 에이미는 반가움을 표현했다. 요 근래 그녀를 가장 설레게 한 주인공이 나타난 것이다. 감정을 숨기지 않는 격한 반응에 샐리는 살짝 당황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미 님.”

“저야말로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두 볼을 복숭아처럼 붉히며 에이미는 샐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에스테반가의 웅장한 응접실에 비하면 아주 소박했지만 아기자기한 장식물들과 조명이 무척 포근한 느낌이 났다. 하얀 테이블에는 알록달록한 색상의 동그란 과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레쥬라의 마카롱을 준비해 봤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거든요. 예쁘게 생겼죠?”

수줍게 웃는 에이미를 향해 샐리의 미소가 번져 나왔다.

“그래요. 정말 귀엽네요.”

사실 샐리는 달콤한 과자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동그란 과자보다는 눈앞의 여인을 향한 말이었다.

전생을 통틀어서도 이렇게 순수한 여인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미 님, 오늘도 직접 만든 리본을 했네요. 잘 어울려요.”

“네.”

오늘은 보라색 다이아몬드 패턴이 들어간 리본이었다. 알아봐 주어서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리본을 만지작거리던 에이미가 작은 선물 상자를 샐리에게 건넸다.

“샐리 님 것도 만들어 보았어요.”

이전에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상자를 여니 검정색 바탕에 은색 큐빅이 촘촘히 박힌 리본이 보였다. 총천연색인 에이미의 것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였다.

“와, 정말 예뻐요. 고마워요.”

샐리가 기쁜 내색을 숨기지 않고 리본을 꺼내 머리 위로 대 보았다. 에이미가 달았을 때는 유치해 보였던 리본이 샐리가 다니 꽤 고혹적으로 보였다.

“어쩜. 샐리 님은 리본을 해도 섹시하네요.”

그 말에 샐리는 마시던 차를 내뱉을 뻔했다. 섹시라니. 보통의 귀족 여인이 쓰는 단어는 아니었다.

헉, 하고 안색이 어두워진 에이미가 말했다.

“혹시 섹시하다는 표현이 불쾌하신가요?”

음심이 가득한 말이라면 당연히 불편했겠지만, 동경하듯 눈을 반짝이는 여인의 말에 기분 나쁠 리 없었다.

“아니요. 칭찬인걸요. 고마워요.”

그 말에 에이미는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샐리 님은 올해 나이가 몇 살이라고 하셨죠?”

“스물이에요.”

스물. 어린 나이였다. 소녀에서 이제 막 벗어나 여인의 향기를 한껏 머금기 시작할 나이.

고운 피부와 맑은 눈은 상큼한 스물이 틀림없는데, 큰 키와 풍만한 몸매가 무척 성숙한 느낌이 났다.

“그 나이에 이렇게 어른스럽다니. 정말 멋져요.”

눈을 빛내는 에이미를 향해 샐리가 민망한 듯 웃었다. 전생의 샐리는 그 나이의 철없는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죽음을 겪고 다시 태어나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으니 드러나는 분위기가 훨씬 성숙할 수밖에.

샐리의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을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많이 보았는데 저렇게 순수하게 감탄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람마다 다 자기의 분위기를 가진 법이니까요. 저는 에이미 님의 밝은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샐리의 말에 에이미가 볼을 붉혔다.

“고마워요. 언니들은 항상 저보고 너무 어린애 같다며 핀잔주기 일쑤인데.”

‘언니들’이란 말에 샐리의 눈이 반짝였다. 카시스에게 듣기는 했지만 로렌스가의 여섯 자매 이야기는 꼭 소설 속 이야기처럼 샐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에이미 님은 언니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저는 자매가 없어서 정말 궁금해요. 자매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샐리의 말에 에이미는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주 전쟁이죠. 어떤 사람들은 로렌스가를 보고 화사한 꽃밭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꽃밭은커녕 치열한 야생의 장이에요. 새 드레스라도 사면 자기가 먼저 입으려고 얼마나 싸우는데요.”

드레스 한 벌을 가지기 위해 온갖 꼬집기 기술과 유치한 논리로 서로를 공격하는 그 모습을 본다면 절대 아름다운 자매애를 떠올리긴 힘들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승리는 보다 나이 많은 자매의 것이다. 그래서 에이미는 항상 패배자의 위치에 있었다.

에이미의 음울해진 눈빛을 보며 샐리는 풋 하고 웃었다.

“저런. 그런데 생각보다 집 안이 무척 조용하네요?”

딸만 여섯이라는 로렌스가의 저택은 아주 조용했다. 들어오면서도 복작한 느낌보다는 적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니들이 다 시집을 가 버려서 이제는 아주 조용해요. 하나 있는 남동생도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고요.”

에이미의 출생 후 데릴사위를 고민하던 로렌스 부부에게 꼭 6년 만에 찾아온 아이는 남자아이였다.

덕분에 에이미는 막내를 탈출했고 누나로 신분 상승도 했다.

“아주 귀여운 아이랍니다. 나중에 샐리 님께도 꼭 소개시켜 줄게요.”

에이미는 남동생을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에이미의 가족 이야기로 넘어갔다.

온화한 성품의 부모님과 여섯 명의 딸, 그리고 한 명의 아들. 잠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로렌스가가 얼마나 화목한 곳인지 느껴졌다.

“그런데 로렌스의 마법이라고 불리는 게 진짜인가요? 로렌스가의 자매들은 모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고 하던데요.”

샐리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소녀 같은 감성이 사라진 샐리가 듣기에도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귀족의 결혼은 대부분 조건을 맞춘 중매로 성사된다. 자연스럽게 서로 마음이 맞아 결혼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드문 일이었다.

그런 세계에서 자매가 모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다니 동화 같은 일이었다.

“사실과는 조금 달라요. 언니들 중에는 중매로 결혼한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중매로 만나서 첫눈에 반했다는 게 좀 특이하죠.”

에이미는 언니들의 연애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언니들의 숫자만큼 이야기도 다양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거나 연회장에서 눈이 맞거나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거나 중매로 만나거나.

그렇게 만난 남자들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그랬을 뿐인데 결혼 후 그녀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단한 위치에 앉은 여인은 장녀 ‘조세핀’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웨일스 자작 가문의 장자와 결혼을 했다.

우정이 두터웠던 부모들끼리 자식이 태어나면 결혼을 시키자며 농담처럼 말한 것이 현실이 된 셈이었다.

두 사람이 막 결혼을 했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을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자작 부부에게 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위세가 달라진 것은 결혼한 후였다.

조세핀의 남편 웨일스는 황실 소속 외교부 관료가 되어 당시에는 작은 공국이었던 알스의 외교관으로 발령 받았다.

그가 외교관으로 간 지 얼마 안 되어 알스 공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대거 발견되었다.

웨일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알스 공국의 다이아몬드를 제국에서 가공하여 만들 수 있게 협정을 추진하였다.

알스와 제국 양쪽에 이익이 되는 절묘한 협정으로 외교관인 웨일스는 양국에서 엄청난 칭송을 받았다.

그 일로 웨일스는 명예 후작으로 직위가 상승되었고 현재는 무시 못할 세력이 되었다.

“형부는 언니와 결혼한 후에 모든 게 잘 풀렸다며 언니를 꼭 신처럼 모신답니다. 언니가 뭔가 유심히 쳐다만 봐도 특별한 물건이 분명하다고 하는데 정말 웃겨요.”

에이미가 진중한 모습과 달리 엄청난 팔불출인 형부를 떠올리며 까르르 웃었다.

대단한 언니들을 이야기하는 내내 에이미에게서는 조금의 허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니들을 향한 순수한 애정만이 강하게 느껴졌다.

샐리는 문득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사라였다. 피를 나눈 자매는 아니지만, 그녀에게 가지는 이 감정이 에이미의 것과 좀 비슷하지 않을까?

회귀한 후 처음 사라를 만났을 때는 그다지 연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샐리의 몸은 어린 소녀였지만 그 안에는 치열한 삶을 산 여인이 그대로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에 대한 감정이 달라졌다. 사라는 샐리를 향해 농담을 걸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챙겨 주었다.

귀엽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자신을 보호해 줄 때면 듬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언니라…….’

샐리로서는 입 밖으로 내뱉기에 간질거리는 단어였다. 하지만 아가씨보다는 훨씬 좋은 느낌이었다.

샐리는 이 일이 끝나 공작가를 나가면 사라를 찾아 볼 셈이었다. 저 먼 이국에서 다시 만날 그녀를 재회하는 순간 언니라고 부르면 그녀는 놀랄까? 아니, 워낙 넉살이 좋은 성격이니 시원하게 웃을 것이다.

샐리는 그 모습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에이미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지더니 얼굴에 발그레 홍조를 띄었다.

“전 에스테반 공작님과 취향이 비슷한가 봐요.”

“네?”

“아, 아니에요.”

두 손을 내저으며 에이미가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그 뒤로는 수다 삼매경이었다.

가장 주된 대화는 에이미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였다.

귀족가의 결혼이란 엄청난 준비가 필요했다. 결혼이 성사되면 가문 간에 인사를 나누고, 서로 주고받을 재화를 정하고, 원하는 경우 약혼식까지 치른다.

그 후에 결혼 날짜를 정하고 가문과 긴밀히 연결된 이들에게 청첩장을 보내려면 1년은 족히 걸렸다.

이런 절차를 내리 다섯 번을 밞아야 했으니 여섯 번째 딸인 에이미의 결혼은 한없이 미뤄졌다. 에이미는 약혼한 지 5년이나 지난 최근에야 결혼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스물넷의 늦깎이 신부였지만 에이미는 아주 의욕이 넘쳤다. 특히나 웨딩드레스 이야기를 할 때의 두 사람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신나게 떠들어 댔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는 언제나 여자를 설레게 하는 법이었다. 드레스 이야기를 즐겁게 하던 에이미의 얼굴이 한껏 스산해졌다.

“그나저나 결혼식 전까지 허리를 2인치는 줄여야 할 텐데…….”

에이미의 두 손이 허리를 매만졌다. 코르셋을 하지 않은 편한 원피스를 입은 상태라 몰랑한 살이 잘 잡혔다. 아주 잘. 슬프게도.

에이미의 시선이 샐리의 가느다란 허리에 닿았다.

“샐리 님의 몸매가 정말 부러워요. 비결이 뭐예요?”

‘타고난 거예요.’라고 쉽게 말할 만큼 샐리는 녹록치 않았다. 샐리는 아주 열심히 몸매를 가꾸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비결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네?”

에이미의 말에 샐리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샐리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빈 접시가 놓여 있었다.

에이미가 준비했던 색이 고운 마카롱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에이미는 그 마카롱이 어디로 갔는지 깨닫고는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나는 먹은 기억이 없는데 얘들이 언제 다 배 속에 들어왔지?’

어쩐지. 입이 계속 달달하니 행복하다 했다. 에이미는 아련해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군요. 나 반성할게요.”

“지금도 충분히 예뻐요.”

“아니에요. 이런 토실토실한 걸 배에 두르고 웨딩드레스를 입진 않을 거예요. 절대요!”

두 사람은 그렇게 또 한동안 허리치수 줄이는 방법에 대해 치열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저택을 나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 진 햇빛이 꽤 강렬해 샐리는 양산을 폈다.

—샐리 님, 또 봐요. 꼭이요!

몇 번이나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에이미를 떠올리자 샐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쩜 그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몇 번이나 귀엽다는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른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 오랜만이었다.

전생에도, 다시 삶을 시작한 이후에도 이렇게 많이 웃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에이미 덕분이었다.

석양이 비친 로렌스가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샐리는 오랜만에 행복함에 취해 걸었다.

“에이미!”

허리 살에 대한 고뇌를 잊고 어느새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에이미는 황당한 눈으로 쳐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배가 볼록하게 나온 넷째 언니 메리였다. 그녀는 임신을 해서 잠시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는 중이었다.

“에스테반 공작의 첩이 다녀갔다며!”

“그분의 이름은 샐리야. 제대로 불러 줘, 언니.”

에이미가 진지한 얼굴로 메리의 말을 정정했다.

“샐리고 앨리고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너 그 여자가 사교계에서 어떤 위치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무슨 위치?”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에이미를 보며 메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그 여자를 초대했을 테지. 모두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눈치를 보고 있어. 아무리 공작 부인이 자애롭다지만 남편을 채 간 여자가 곱게 보이겠니? 게다가 그분을 따르는 여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 조금이라도 공작 부인을 건드는 것 같으면 그 여자들이 얼마나 극성을 떠는데.”

엘리제보다 무서운 것이 그녀를 추앙하는 무리였다. 사교계를 장악한 그녀들의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귀족가의 영애 하나쯤 매장시키는 건 그녀들에게 일도 아니었다.

“앞으로 그 여자랑은 인사도 하지 마. 알았지?”

동생인 에이미는 정말이지 너무 순했다. 나이는 스물넷이나 먹었는데 외양도 하는 짓도 어린애 같았다.

메리는 일부러 두 눈에 힘을 주고 단단히 말했다.

“싫어. 내가 왜 그런 눈치를 봐야 해? 난 샐리 님과 친해지고 싶어.”

저 눈빛은 도트 무늬 리본을 끈덕지게 사수했던 그 눈빛이었다. 평소엔 별 반발도 안 하는 순둥이가 무언가에 꽂히면 무시무시하게 고집이 셌다.

메리는 속으로 신음을 내뱉으며 볼록 나온 배를 쓰다듬었다.

‘아가, 저 철없는 이모를 어떡하면 좋니.’

몸이 무거워도 할 일은 해야 했다. 메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결혼을 해 멀리 떨어져 있는 언니들에게 이 심각한 상황을 알렸다. 제아무리 고집을 피워도 언니들이 전부 나서면 고집을 꺾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부터 메리는 에이미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에이미가 외출하려고 하면 사사건건 어디 가냐고 물었다.

“샐리 님을 만나러 갈 거야.”

에이미가 속 터지는 소리를 할 때면 메리는 부풀어 오른 배를 잡고는 ‘아고고’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면 에이미가 놀란 얼굴로 메리를 부축했다.

그렇게 힘겨운 메리의 에이미 보호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덕에 에이미는 의욕과 애정이 넘쳐흘렀음에도 샐리를 한동안 만날 수 없었다.

* * *

로렌스가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동을 모른 채 샐리는 이전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초대장을 보낸 이들의 파티에 참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초대장은 모두 로즈벨 남작 부인의 티파티 때 만났던 여인들이 보내온 것이다. 그녀들은 그날 샐리에게 호감을 느끼고 초대한 것이라 줄리엣과 같은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다.

아주 정중하게 샐리를 대했다. 다른 손님들이 샐리를 보고 놀라기도 했으나 친한 이들 몇 명만 함께하는 아주 작은 티파티였기 때문에 금세 분위기는 좋아졌다.

무엇보다 샐리가 함께하는 자리는 이야깃거리가 아주 풍부하고 즐거웠다. 그래서 몇몇 여인들은 다시 초대장을 보내왔다. 그중에서는 그레이스 백작 부인도 있었다.

그레이스는 품성이 좋고 점잖기로 소문난 여인이었다. 화려한 연회보다는 조용한 티파티를 즐기는 그녀는 요 근래 샐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푹 빠져 있었다.

“샐리, 요즘 날씨가 건조해서 피부가 많이 상했는데 좋은 관리법을 알아요?”

그레이스가 얼굴을 매만지며 물어 왔다. 그레이스는 특히 샐리와 액세서리나 미용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샐리는 늘 해박한 지식으로 그녀에게 적절한 답을 알려 주곤 했다.

“건조한 피부에는 오일을 발라 주시는 게 가장 좋죠.”

“써 보긴 했는데 영 효과가 없던걸요.”

“그럼 바르샤 왕국의 오일을 써 보시면 어때요?”

“바르샤 왕국이요?”

바르샤 왕국은 폐쇄적인 사막 국가였다. 제국과 정식 교역을 맺지 않은 나라기 때문에 바르샤산 물품들은 무척 구하기 힘들었다.

“네. 사막이 무척 건조하기 때문에 바르샤 왕국의 오일은 아주 발달되어 있어요. 향도 다양하고 질이 정말 좋답니다.”

“그건 몰랐던 사실이네요.”

“괜찮으시면 제가 쓰는 것을 몇 개 가져다 드릴게요. 한번 써 보시고 피부에 맞으시면 구매해 보세요.”

“어머. 고마워요.”

샐리의 호의에 그레이스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티파티가 끝날 무렵 그레이스는 샐리에게 말했다.

“다음번에도 초대장을 보낼 테니 또 봐요, 샐리.”

“매번 초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부인. 다시 뵐 날을 기대할게요.”

샐리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떠난 후 한 명의 손님이 남았다. 그레이스의 오랜 친구인 헬렌이었다.

요 근래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요양을 하다가 오랜만에 친구의 티파티에 참석했던 헬렌은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헬렌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레이스, 왜 저 여자를 초대한 거야?”

헬렌의 표정이 내내 어두웠던 것을 알았기에 그레이스는 곤란한 듯 웃었다.

“너도 봤으니 알 거 아냐. 샐리는 말도 잘 통하고 지식도 아주 풍부해.”

그 점에는 헬렌도 이의 없었다. 헬렌도 샐리를 보며 많이 놀랐다. 비천한 출신이라 경박하고 무식할 것이라는 소문과는 전혀 달랐다.

귀족 여인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예법과 유려한 화술을 가지고 있었다.

신분이 다르다고 눈치도 보지 않고 에스테반 공작의 이름을 두르고 오만하지도 않았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친구인 그레이스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는 네게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화가 미칠까 봐 겁나.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저 여자를 무시하고 있는 거잖아.”

무척 심각한 얼굴의 헬렌과 달리 그레이스의 얼굴은 평온했다.

“다들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야. 일전에 공작 부인의 생일 파티 때 남편의 애첩을 품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잖아. 그분은 정말 자애로운 분이셔.”

그레이스의 말대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은 엄청난 위세를 가짐과 동시에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유명했다.

단 한 번도 불쾌한 내색을 보이거나 아랫사람에게 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성녀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헬렌은 불안했다. 사교계의 여인들은 장미꽃과 같아서 아름다운 외양 아래에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가시를 가지고 있었다.

넝쿨진 가시에 한번 얽히면 피투성이가 되어 제 맘대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분명 이런 작은 티파티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으실 거야. 그분은 나를 알지도 못할걸?”

그레이스는 헬렌을 안심시키려 여유 있게 웃었지만 헬렌의 표정은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헬렌의 불안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되었다.

* * *

한 달에 한 번 황실에서 열리는 정기연회는 점점이 모여 노는 귀족 여인들의 전체적인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였다.

친분에 관계없이 일정한 작위를 가진 여인들에게 초대장이 보내지기에 참석한 이들이 꽤 많았다. 덕분에 꽤 복작한 분위기였다.

그레이스도 얼굴을 아는 부인들과 한창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데 한 여인이 그레이스의 앞에 나타났다.

뒤로 귀부인들 셋을 달고 아주 오만한 얼굴로 나타난 여인은 록산느 헤스티아 후작 부인이었다.

한껏 턱을 치켜 든 채 눈을 내리깐 그녀를 향해 그레이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후작 부인께 라일라 그레이스가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연회에서 자주 보기에 서로 안면은 있지만 전혀 친분은 없었다. 그레이스는 굳이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고민해 보았다.

록산느는 자신보다 직위가 낮은 여인을 일부러 찾아와 말을 거는 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가장 강력한 찬양자였다. 어느 때건 공작 부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에스테반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그레이스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록산느가 붉은 입술을 벌렸다.

“요즘 부인이 티파티에 그 계집을 부른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샐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아. 그 계집의 이름이 샐리였나? 그래요. 공작을 유혹한 그 요망한 계집이요.”

록산느의 말투는 귀족가의 여인이라고 하기엔 거칠기 짝이 없었다. 세가 높은 백작가의 영애로 태어나 결혼해서는 후작 부인이 된 그녀는 늘 사교계에의 윗물에서 살았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네. 맞습니다.”

그레이스의 대답에 록산느의 보라색 눈동자가 한층 어두워졌다.

“그럼 세 번이나 불렀다는 것도 사실이겠군요.”

초대 횟수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니 록산느는 충동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사나운 눈빛에 그레이스는 목이 짝 말라 왔다.

“한 번이야 호기심에 불렀다고 치더라도 계속 그 계집을 초대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대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꽤 우습게 보이나 보죠?”

록산느의 목소리는 이제 아주 위협적이었다.

“절대 그런 건 아니옵니다. 다만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대화가 아주 잘 통해서…….”

“하! 그런 천한 계집과 대화가 잘 통한다?”

그레이스를 바라보는 록산느의 눈에 경멸이 서렸다. 그레이스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등 뒤로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해야 할까?’

사실 그레이스는 죄가 없었다. 오히려 티파티의 손님을 가지고 타인이 왈가불가하는 쪽이 무례한 것이다.

그러나 사교계의 생태는 잔인했다. 권력이 높은 자가 한없이 유리한 곳. 그보다 낮은 자는 무조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그레이스가 용서를 구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럼 나도 당신의 티파티에 참석하겠어요.”

“네?”

“그 계집이 얼마나 혀를 잘 놀리는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주최자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제가 온다 간다 말하는 것은 무척이나 무례한 행위였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저 무례하고 포악한 여자를 자신의 조용한 티파티에 초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레이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 계집이 오는 날이 정해지면 내게 알리도록 하세요.”

그레이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록산느는 제 말만 일방적으로 하고 몸을 휙 돌렸다.

그레이스는 끔찍한 얼굴로 저 멀리 가 버린 록산느를 바라보았다. 록산느는 어느새 에스테반 공작 부인과 레이첼 황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곳에는 사교계의 정점과도 같은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조명이 가장 밝은 홀 가운데에 있는 그녀들은 엘리제와 레이첼을 제외해도 어느 누구 하나 만만한 여인이 없었다.

모두 대단한 가문을 등에 업은 여인들이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들은 고고하고 특별해 보였다.

그 속에 들어간 록산느는 방금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록산느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는 이는 엘리제였다.

그레이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엘리제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제는 그레이스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분노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맑은 미소였다.

그녀는 록산느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간 건지 상상도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레이스는 어색한 얼굴로 인사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스에게서 시선을 뗀 엘리제가 록산느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한 대로 그레이스 부인이 샐리를 티파티에 초대한 것이 맞죠?”

“네. 그렇다고 하더군요.”

“역시. 샐리와 어울려 주다니 소문대로 성품이 온화한 여인이네요. 다른 귀부인들은 샐리의 출신이 미천하다며 조금도 자리를 내주지 않잖아요.”

“그러게요.”

록산느는 눈썹을 내리며 곤란한 듯 웃었다. 엘리제의 옆에 서 있던 레이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록산느와 레이첼은 넌지시 눈길을 교환했다. 애첩에게 질투할 줄도 모르는 선하기 그지없는 공작 부인을 지켜 주기로.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엘리제는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 * *

카시스는 들고 있던 책에 시선을 줄 수 없었다. 늘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던 샐리가 오늘은 꽤 부산스러운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에는 손가락만 한 작은 유리병이 놓여 있었는데 병마다 아주 진한 향기가 났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샐리는 오일이 든 병을 여러 개 늘어놓고는 향기를 맡아 가며 분류하고 있었다.

“그레이스 부인께 선물로 드리려고요. 다양한 향이 있으니 부인께 어울리는 향을 고르고 있어요.”

그레이스 백작 부인. 그 이름은 요즘 자주 들어 카시스도 알고 있었다. 벌써 몇 차례나 샐리를 티파티에 초대한 여인이었다.

카시스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초대장들을 향했다.

‘요즘은 늘 초대장이 있군.’

일반 귀족 여인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이긴 했지만 한 장도 도착하지 않았던 일전과 비교하면 많아진 것이다.

그 덕에 샐리는 요즘 꽤 바빠 보였다. 다행히도 그녀를 초대해서 무례하게 구는 여인은 없는 것인지 티파티에 다녀온 후의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샐리는 당분간 카시스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카시스도 샐리가 도움을 청하기 전까지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 셈이었다.

도움을 주지 않아도 꾸준히 티파티에 초대될 만큼 그녀는 잘해 내고 있었다.

카시스는 어느새 책을 눕혀 놓고는 샐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신중히 분류한 병들을 모은 후 정성스럽게 포장하기 시작했다.

작은 병 하나하나에 리본을 묶는 작업은 번거로울 텐데 꽤 즐거워 보였다.

‘그레이스 백작가에서 요즘 새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었지?’

카시스는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빼곡히 저장되어 있는 귀족가의 정보를 꺼내 들었다.

그레이스 백작은 새로 시작하는 사업의 투자처를 구하고 있었다. 먼 동쪽에 위치한 차오의 물건을 수입하는 일이라고 했다.

요즘 들어 제국 귀족 사이에 이국의 물건에 관심 있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제법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그레이스 백작은 수완이 아주 좋은 이는 아니었지만 성실하게 제몫을 하는 이니 한번 불러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절대 샐리를 돕는 일이 아니었다. 사적인 감정이 지극히 배제된, 에스테반가의 재화를 늘리기 위한 업무 중 하나일 뿐이다.

* * *

샐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레이스의 저택에 도착했다. 한 손에는 그레이스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들려 있었다.

투명한 유리 상자에 오일병을 담아 벨벳 리본으로 묶어 포장하니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녀가 좋아할 모습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에이미 님?”

저쪽에서 걸어오는 익숙한 얼굴에 샐리의 눈이 커졌다. 언제나처럼 귀여운 도트 무늬 리본으로 머리를 묶은 에이미였다. 에이미는 눈을 빛내며 빠른 걸음으로 샐리에게 다가왔다.

“샐리 님!”

두 사람은 반갑게 손을 마주 잡았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한동안 보지 못해 정말 아쉬웠어요.”

또 보자는 에이미의 말에 샐리는 에이미의 초대장을 기다렸다. 도착한 초대장 중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쓰여진 에이미란 이름이 보이지 않아 내심 아쉬웠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그레이스의 티파티에서 에이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에이미가 수줍게 웃었다.

“그레이스 부인께서 종종 초대장을 보내 주시거든요. 그간 샐리 님이 온다는 말을 듣고 엄청 오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왔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샐리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에이미가 고개를 내저었다.

“네. 그럼요.”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자신이 아니라 넷째 언니 메리였다. 도대체 배 속의 아기는 왜 그렇게 틈만 나면 나오려고 용을 쓰는 건지.

샐리와 만나러 간다고만 하면 앓는 소리를 내며 진통을 해 대는 통에 도저히 외출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메리가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는 몇 번이나 샐리를 만나러 가면 안 된다고 당부했지만 에이미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마차를 타고 신나게 달려왔다.

‘언니도 참. 우리가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에이미는 샐리를 바라보았다. 샐리는 오늘 채도가 낮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는 심플했지만 매끈한 어깨선이 드러나 무척 고혹적이었다. 짙게 눈 화장을 한 금빛 눈동자와 마주치자 에이미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샐리 님은 오늘도 정말 섹시…… 아니, 아름다우시네요.”

샐리는 에이미의 말에 미소 지었다.

“칭찬 감사해요. 에이미 님은 오늘 리본 색상과 드레스 색을 맞춘 거죠? 밝은 색상이 정말 잘 어울려요.”

에이미는 오늘 아주 화사한 노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노란색 도트가 들어간 리본을 했다.

풍성한 드레스 라인이 에이미의 작은 체구와 어우러져 무척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샐리의 칭찬에 에이미의 입이 귀까지 걸렸다.

귀족가 영애는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면 안 된다고 수없이 배웠건만 에이미는 그런 것을 잘하지 못했다.

에이미는 샐리와 팔짱을 꼈다. 어린 영애들이 스스럼없을 정도로 친한 친구들에게나 하는 행동이었다. 에이미는 샐리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함께 들어가요.”

샐리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친숙하게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어린 영애나 하는 행동이라고 손을 치우기에는 닿은 체온이 무척 따뜻했다.

어차피 보는 이들도 많지 않은 편한 자리니 괜찮을 테지. 샐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걸어가는데 샐리의 시선 아래에 에이미의 동그란 머리통이 보였다.

‘어머나. 귀여워.’

이래서 남자들이 아담한 여자들을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일까? 동그란 머리통에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정말이지 귀여웠다.

샐리는 오늘의 티파티가 새삼 기대되었다. 에이미가 함께한 자리는 더더욱 즐거울 것 같았다.

두 사람을 안내하러 내려온 나이 든 집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 큰 아가씨들이 어린아이들처럼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두 여인은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집사에게 안내받은 응접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팔짱을 풀고는 우아한 여인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파티의 주최자, 그레이스 백작 부인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부인.”

인사를 끝내고 고개를 든 샐리는 유심히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늘 화사하게 웃으며 샐리를 맞아 주던 그레이스의 얼굴이 조금 굳어 있었다.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으신 걸까.’

샐리는 그녀의 기색을 유심히 살피며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그레이스에게 건넸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바르샤산 오일이랍니다. 부인께서 어떤 향을 좋아하실지 몰라 여러 향을 골라 왔어요.”

그레이스는 머뭇거리는 손으로 샐리가 건넨 상자를 받았다.

“……잘 받을게요.”

어색한 그레이스의 목소리에 샐리는 그녀의 감정이 좋지 않은 원인이 자신인 것을 깨달았다.

함께 화기애애하게 대화했던 것이 고작 3일 전이었다. 옆에 있는 에이미처럼 편하게 마음을 나눈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꽤 친분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가?’

곰곰이 고민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문제의 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티파티는 여느 때처럼 열댓 명의 여인들이 모인 소소한 모임이었다. 그런데 그레이스의 가장 가까운 자리가 비어 있었다.

늘 보던 여인들은 이미 자리에 와 있는데 누가 오지 않은 걸까. 샐리는 의아한 눈으로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한 여인이 등장했다. 초대장에 적힌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대단한 무례를 저질러 놓고도 여인은 아주 도도한 발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들어서는 오만한 얼굴의 여인을 보는 순간 샐리의 눈이 커졌다.

‘록산느 헤스티아!’

엘리제의 열렬한 추앙자 중 한 명이었다. 불같은 성정으로 엘리제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언짢게 하는 여인이 있으면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전생의 샐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에스테반 공작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조금도 표 내지 않았지만, 샐리가 혼자 있을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날 선 공격을 해 대었다.

백작가 영애로 태어난 록산느에게 사교계는 제집과도 같았고 샐리는 모든 것이 낯선 이방인일 뿐이었다.

아무리 샐리가 그녀와 대적하려고 의지를 불태운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특히나 그녀의 끔찍했던 점은 샐리만이 아니라 그녀의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까지 가차없이 굴었다는 점이다. 록산느의 분노에 사람들은 도망치듯 샐리의 곁을 떠나갔다. 수많은 이들이 떠들고 웃는 연회장에서 샐리는 나 홀로 서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이 자리에 온 거지?’

그녀는 엘리제와 레이첼, 그리고 몇몇의 여인들이 속해 있는 그룹과만 어울렸다. 그녀는 그 그룹에 속해 있는 것에 무척 자부심이 커서 자신보다 지위가 아래인 여인들이 여는 티파티에 절대 참석하지 않았다.

샐리는 그레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보다 훨씬 표정이 어두워진 그레이스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나 때문이구나.’

그제야 록산느가 이 자리에 온 이유가 확실해졌다. 샐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샐리의 최근 행보는 미비하기 그지없었다. 귀족 여인 몇 명의 티파티에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누구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오만한 록산느라면 더더욱.

오산이었다.

“헤스티아 후작가의 록산느라고 해요. 낯선 얼굴들이 많군요.”

이 자리에 있는 여인들과 록산느는 노는 물이 전혀 달랐다. 같은 사교계에 몸을 담고 있다고 해도 전혀 다른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여인들은 어색한 미소를 띠며 록산느를 바라보았다.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해 주시겠어요?”

정석대로라면 주최자인 그레이스가 대화를 주도해야 했지만 록산느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록산느에게는 이 고만고만한 여인들이 모인 티파티가 어린애 장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최자에게 리드를 맡겨 따분한 대화를 들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록산느의 눈짓에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있던 여인부터 인사를 시작했다. 여인들은 간략하게 자신을 설명하고 록산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록산느는 여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로렌스가의 여섯 번째 딸 에이미입니다.”

에이미까지 인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샐리의 차례였다. 샐리가 인사를 하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자, 소개가 끝났으니 티파티를 시작하죠.”

풍성한 속눈썹을 내리깔며 록산느가 우아한 손동작으로 찻잔을 들었다.

“샐리 님이 아직 인사를…….”

말을 꺼내려는 에이미의 팔을 잡고 샐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전 괜찮아요.”

샐리가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에이미 님, 이제부터 제게 말을 걸지 않는 게 좋겠어요.”

“네?”

샐리의 말에 에이미는 눈썹을 찡그렸다. 에이미는 사교계의 정세에 아주 둔감했다.

그녀는 갑자기 등장한 록산느라는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대놓고 샐리를 무시할 셈이라는 것은 눈치챘다.

“그렇게 해 주세요.”

샐리의 말에 에이미의 어깨가 하염없이 내려갔다. 방금 전까지 샐리와 즐겁게 수다를 떨 생각에 즐거웠던 기분은 처참히 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싫다고 대답하고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고 샐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에이미는 고작 자작가의 딸이었고, 록산느라는 여인은 후작가의 여인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에이미는 정말이지 너무 속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티파티는 생각보다는 무던하게 흘러갔다. 겉으로 보기에 부인들이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다들 어떤 차를 좋아하시죠?”

록산느의 질문에 자리에 앉은 부인들이 차례대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에이미까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고 샐리 차례가 왔을 때 또 록산느는 말을 돌렸다.

몇 번이나 이런 식이니 모두가 그녀의 심중을 헤아렸다. 록산느는 철저하게 샐리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귀족 여인이 사교계에 마음에 안 차는 이가 들어왔을 때 짓밟는 방법 중 하나였다.

철저한 무시. 저런 것을 몇 번 겪고 나면 제아무리 패기 넘쳤던 여성도 사교계에는 다시 발붙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것을 아는 그레이스와 여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록산느의 행동을 비난하지는 못했다.

“다들 좋은 차를 많이 알고 있네요. 그럼 이 차도 좋아하려나?”

록산느는 대동한 하녀를 불러 선물로 가져온 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첫 만남이니 만큼 차를 하나 준비해 봤어요. 요즘 빠져 있는 말레이산 홍차인데 아주 맛이 좋답니다.”

록산느의 손짓에 따라 티테이블 옆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부인들의 잔에 차를 따라 주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불편한 감정을 숨기고 록산느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물건은 꽤 고급품이었는지 뜨거운 차가 컵 속에 따라지자마자 제법 진한 향이 느껴졌다.

“어머나, 정말 향이 좋네요.”

“귀한 차를 가져오셨네요. 감사합니다.”

하녀가 샐리의 찻잔 위로 차를 따르려고 할 때였다. 록산느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뭘 하는 거지. 귀한 선물을 허공에 따를 셈이니?”

하녀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하녀는 록산느의 심중을 눈치채고는 허리를 깊게 숙여 사죄를 구하며 뒷걸음질로 멀어졌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들 중 샐리의 잔만 빈 잔이었다. 그 모습을 흘낏 본 록산느가 입술을 뒤틀어 웃었다.

기분 좋게 차를 음미하던 록산느의 시선이 그레이스로 향했다. 굳은 얼굴에는 애써 감춘 불쾌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록산느는 그녀의 감정 따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대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록산느는 그레이스의 감정을 비웃었다. 문득 록산느의 눈에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레이스 부인, 옆에 있는 그건 뭔가요?”

그레이스의 옆에 놓인 간이 테이블 위에는 작은 유리병들이 쪼르르 담겨 있는 유리상자가 있었다. 이국적으로 디자인된 작은 병은 그녀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손님께 선물받은 물건이에요. 한번 보시겠어요?”

그레이스는 고민하다가 록산느에게 상자를 건넸다. 록산느의 눈이 반짝였다.

그저 그런 여인들이 모인 자리라 재미도 없는 곳일 줄 알았는데 이런 물건을 발견할 줄이야.

사교계에 매일 사는 록산느는 사치품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상자에 든 작은 병들은 오일이었다.

유리병 자체도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뚜껑을 여니 이국적이면서 진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레이스에게 눈짓으로 동의를 구하고는 손등 위로 오일을 떨어뜨렸다. 오일은 금세 피부에 흡수되었다. 록산느는 매끈거리는 손등을 매만지며 감탄을 내뱉었다.

“바르샤산 오일이군요. 누가 이런 선물을 준 거죠?”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했다. 록산느가 저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준 것이다.

샐리가 주었다고 말하면 조금이라도 그녀를 대화에 끼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상황이 더 나빠질까.

닦달하는 듯한 록산느의 눈빛에 그레이스는 답을 내렸다.

“샐리랍니다.”

그 말에 반짝이던 록산느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속으로만 화를 낼 줄만 알았더니 이런 여우 같은 짓도 하는구나.

록산느는 사납게 그레이스를 노려보았다. 그레이스와 달리 그녀는 절대 제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아, 그렇구나. 어쩐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일에서 더러운 뒷골목의 냄새가 나더라니.”

“…….”

“이런 것은 그냥 버려 버려요. 출처도 불분명한 것을 썼다가 피부라도 엉망이 되면 어쩌려고요. 그곳이 얼마나 더러운 곳인 줄 알아요? 그런 곳에서 온 여자는 또 얼마나 더럽겠어요.”

록산느는 유리병을 그대로 뒤집었다. 뒤집힌 유리병 입구로 진한 향기를 품은 오일이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부인, 충고하건대 그런 여자를 상대해 줬다가는 당신에게도 금방 악취가 옮을 거예요.”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그레이스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았다. 차라리 대놓고 그레이스에게 욕을 했거나 제 맘대로 샐리를 내쫓았더라면 이 정도로 치욕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티파티의 분위기는 이제 가짜 웃음으로 무마할 수 없을 만큼 최악이었다.

두 사람을 초조한 얼굴로 지켜보던 여인들은 힐끗대며 샐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끔찍한 분위기를 만든 것은 록산느였으나 그녀들의 화살은 샐리를 향하기 시작했다.

‘왜 저런 여자를 초대해서는.’

사교계의 생태는 이토록 단순했다. 저 위에 손댈 수 없는 이보다는 발끝에서 휘두를 수 있는 존재를 탓하는 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덜 상하게 했다. 그것을 알았기에 샐리는 크게 분노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만 가 보는 게 좋겠어.’

단순히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면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지키려고 했다. 그런데 저 정도까지 패악을 부리니 그레이스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피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레이스는 나름대로 샐리를 배려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다가는 록산느의 성난 감정이 그레이스를 향할지 모른다.

이만 가 보겠다며 샐리가 일어서려던 찰나였다.

“사과하세요.”

샐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이 얼음보다 싸늘한 분위기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에이미였다.

그녀는 평소 같은 따스함이 아닌 원망이 가득 찬 눈빛으로 록산느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죠?”

록산느는 에이미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해 다시 물었다.

“방금 샐리 님께 하신 모욕적인 말씀을 사과하시라고 했어요. 남의 선물을 함부로 평가하고 버린 것들 모두 다요. 아무리 후작 부인이시라고 해도 한참 예의에 어긋나신 행동을 하신 거잖아요.”

에이미도 록산느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꽉 쥔 두 주먹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에이미는 너무나 화가 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록산느는 기가 막힌 얼굴로 에이미를 바라보더니 붉은 입술을 한껏 치켰다.

“아아. 로렌스가의 막내딸이라 했던가?”

록산느와 눈이 마주치자 에이미의 작은 어깨가 움찔거렸다.

“스물넷이나 되도록 시집도 못간 노처녀라고 소문이 자자한 분이군요. 위의 언니들 때문에 시집을 못 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네.”

록산느는 눈동자를 올렸다 내렸다. 에이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쓸어 본 그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나이에 그런 유치한 리본이나 달고 다니는 행색을 보고 혹시나 싶었어요. 영애의 정신은 유아기에 멈춰 있는 것이 분명해요.”

“……!”

록산느의 말에 에이미의 눈빛이 흔들렸다. 록산느는 미소를 지우고는 사납게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을 수가 있나! 고작 자작가의 딸이 감히 내게 사과를 요구하다니!”

서늘한 미소조차 사라진 록산느의 모습은 사냥감을 눈앞에 둔 포악한 괴물 같았다.

그녀의 기세에 눌린 에이미의 커다란 눈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자리에서 울면 안 되는데. 참아 보려고 했지만 결국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나와 버렸다.

“세상에. 귀족 여인이 이깟 일로 눈물을 흘리다니. 로렌스가는 귀족 예법을 공부시키지도 않나 보죠?”

록산느는 에이미의 얼굴을 보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미는 수치심에 입술을 꽉 깨물고는 날 선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귀부인 몇 명은 그 안쓰러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창백해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파르르 입꼬리를 떨며 웃는 것도 아닌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도 있었다.

늘 평온했던 그레이스의 티파티가 오늘은 지옥 같았다. 록산느는 이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감히 저 계집을 자리에 끼게 한 대가를 보라지!’

지금의 분위기를 봐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샐리와 함께 어울리면 어떻게 되는지 사교계에 널리 소문이 퍼질 것이다.

록산느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여인들을 훑어보았다. 잔뜩 상기된 기분의 그녀는 저 구석에 있는 샐리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 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샐리는 고개를 숙여 손수건 한 장을 에이미에게 건넸다. 에이미는 손수건을 받아 들고는 훌쩍이며 샐리를 올려다보았다.

“도,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해요.”

언니들이었다면 나보다 더 능숙하게 저 여자를 상대했을 텐데. 커다란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이는 에이미를 향해 샐리가 말했다.

“아니요. 충분해요.”

샐리가 말을 이었다.

“저, 진심으로 화가 났거든요.”

“……!”

샐리의 금빛 눈동자에는 방금 전까지 볼 수 없었던 서늘한 안광이 서려 있었다. 샐리는 몸을 일으켰다.

록산느는 오만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제 분수를 알고 도망을 가려는 건가?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샐리가 향한 곳은 록산느 쪽이었다. 샐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록산느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일부러 시선도 주지 않았던 샐리를 제대로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키가 큰 그녀가 허리를 곧게 펴고 걸어오는 모습은 꽤 위압적이었다. 새빨간 머리카락은 경박하다기보다는 아주 강렬했고 마주친 금색 눈동자는 너무나 선명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금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등 뒤로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록산느도 겨우 이 정도에 겁을 먹고 도망칠 여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선 샐리를 보며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작위도 없는 주제에 감히 귀족에게 무슨 짓을 할 셈인가요?”

“그럴 리가요. 분위기가 너무 험악하니 부인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까 해서요.”

록산느가 됐다고 하기도 전에 샐리는 입을 열었다.

“5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황제이신 필라프 3세의 이야기랍니다. 필라프 3세는 북쪽 저편까지 제국의 땅을 늘릴 정도로 전무후무한 전쟁의 왕이셨고 호전적인 영웅이셨지요. 그런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황제를 목소리 하나로 움직이는 여인이 있었어요. 바로 필라프 3세의 아름다운 애첩 시모나지요. 수십만 명의 병사를 움직여 하루 만에 지도에서 나라를 지우는 황제가 그 작은 여인의 한마디를 거절할 수 없었다지요.”

샐리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루는 시모나가 말했답니다. 폐하, 시모나라는 이름이 너무 흔한 것 같아 속상해요. 세상의 시모나는 저 하나뿐이었으면 좋겠어요. 이 말에 필라프 3세는 제국에 시모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에게 이름을 바꾸라는 명을 내렸어요.”

샐리는 붉은 입술을 유려하게 올리며 록산느에게 다가갔다. 록산느의 귀 끝에 달콤한 목소리가 닿았다.

“한 달 후,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은 여인들은 가차 없이 목이 베였답니다.”

정면에서 샐리의 스산한 눈빛을 한눈에 받은 록산느는 꼭 제 목이 베인 것 같은 싸늘함을 느꼈다. 록산느는 저도 모르게 목을 매만졌다. 그녀의 목은 잘 붙어 있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요?”

“설마요. 어떻게 제가 감히 후작 부인을 협박하겠어요. 저는 단지 에스테반의 애첩일 뿐인걸요.”

에스테반의 애첩. 샐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단순한 울림이 아니었다. 어떤 존재보다 무섭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이 제국에 에스테반이란 이름을 우습게 볼 수 있는 자가 어디 있을까. 늘 냉기가 서려 있는 공작의 눈빛이 이곳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 록산느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록산느 헤스티아 후작 부인, 부인께서 저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았습니다. 아주, 잘.”

샐리는 분명 웃으며 말하고 있는데 웃음기 없는 눈빛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실례인 것 같네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샐리는 가까이 앉아 있는 그레이스 부인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부인.”

그레이스는 미묘한 얼굴로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레이스가 저 멀리 에이미를 향해 눈짓했다. 눈짓의 의도를 알아챈 에이미가 그레이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샐리와 에이미가 손님들을 향해 우아한 몸놀림으로 고개를 숙인 후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록산느는 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었지만 테이블 아래 숨긴 그녀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서운 것은 에스테반의 이름?

아니면 저까짓 계집?

어느 쪽이든 인정하기 싫었다. 록산느는 힘겹게 고개를 흔들었다.

두 사람이 저택을 나왔을 때까지도 에이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에이미에게 방금 전 일은 견디기 힘들 만큼 무서웠을 것이다.

비록 말 몇 마디 오간 것이 전부였지만 독 묻은 화살을 건네받은 것처럼 서슬 퍼런 시간이었다.

“에이미 님, 괜찮아요?”

아직도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여 있을까 걱정을 가득 담아 말을 건넸다.

잠시 후 에이미가 고개를 들었다. 에이미의 커다란 눈망울에 고여 있던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샐리 님, 정말 너무 너무 멋있었어요!”

“……그런가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샐리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 대수롭지 않다는 대답마저 에이미에게는 너무나 멋지게 느껴졌다. 에이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눈을 반짝였다.

“후작 부인의 눈빛 봤어요? 티 내지 않으려고 꽤 애를 썼지만 언니가 다섯이나 있는 저의 눈은 피해 갈 수 없어요. 잔뜩 겁을 먹었더라고요!”

샐리가 보기에도 그래 보였다. 명색이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여인이니 드러내 놓고 표는 내지 않았지만 오만하게 웃던 얼굴이 잔뜩 굳어지긴 했었다. 그녀는 몰랐겠지만 치켜뜬 눈동자도 조금 흔들렸다.

“아유, 꼬셔!”

에이미는 정말 후련하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샐리도 에이미를 따라 웃고 싶었지만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오늘 일은 여파가 클 것이다. 록산느는 샐리를 초대하는 자리가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지 제대로 보여 주었다.

게다가 샐리는 귀족 여인들 앞에서 에스테반의 이름을 운운하며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샐리에 관한 소문은 아주 끔찍하게 나돌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든 감당하면 되는 문제였지만 에이미는 아니었다.

평화롭게 사교계 생활을 했던 그녀는 처음으로 여인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다. 록산느에게 수치를 당한 자작가의 딸.

한 번으로 지나가면 다행이지만 앞으로 록산느가 작정하고 에이미를 공격한다면 그녀에게는 낙인이 찍혀 버릴 것이다.

사교계에서 한번 박힌 미운털은 진저리 나게 따라다닌다. 에이미는 더 이상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귀족가의 여인이 사교계와 등진다는 것은 생명줄을 끊는 것과 같았다.

“저 때문에 심한 일을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잔뜩 표정이 어두워진 샐리의 말에 에이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말 말아요. 샐리 님이 저를 위해 그 여자에게 한 방 먹여 주었잖아요. 그 멋진 모습을 본 것만으로 저는 여한이 없어요.”

마냥 밝기만 한 에이미의 말에 샐리는 힘겹게 웃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기는 했으나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에이미는 샐리의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쳤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조금만 기다리면 상황이 나아질 거예요.”

시간이 이 일을 해결해 준다는 것일까? 그렇게 쉽게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샐리는 복잡한 얼굴로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 * *

카시스는 샐리의 방문을 여는 순간 겨울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시린 눈이 내리는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가득한 방 안에 샐리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지금껏 그녀의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카시스는 한 번도 해 본 적도, 본 적도 없는 포즈였지만 본능적으로 그녀의 감정을 느꼈다.

‘좌절하고 있군.’

카시스는 신기한 생물체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는 말없이 책을 폈다.

조금 후 웅크리고 있던 샐리가 고개를 들었다. 교차한 두 팔 사이로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빼꼼히 드러났다.

“왜 이러고 있냐고 묻지 않으시네요.”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알겠어. 말하고 싶어질 기분이 들면 말하겠지.”

물론 카시스도 샐리가 침울해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참을성이 많았다. 기다리는 것은 자신 있었다. 그는 샐리가 말할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샐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여러 번 깨물었다. 평소라면 그에게 이런 사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샐리는 오늘만큼은 그에게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답답한 마음을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었다.

“테이블을 보셨어요?”

그제야 카시스는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요 며칠 샐리를 바쁘게 했던 초대장이 오늘은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봉투에서 꺼내진 편지 몇 장이 나뒹굴고 있었다.

“초대장은 한 장도 오지 않고 대신 편지가 왔죠. 보내온 초대장의 초대를 취소한다는 편지였어요.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아주 정중하게 적혀져 있더군요.”

“그건 꽤 무례한 일이로군. 이유가 뭐지?”

귀족들 사이의 약속은 중요하다. 정말 피치 못할 일이 아니라면 초대를 취소하는 상황은 없었다.

카시스는 책을 덮고 제대로 샐리를 마주 보았다. 샐리는 무릎 위로 얼굴을 반쯤 파묻고 대답했다.

“저를 부르면 티파티가 엉망이 될 게 분명하니까요.”

“어째서?”

샐리는 잠시 망설이다 그레이스의 티파티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했다. 물론 록산느라는 여인이 얼마나 교묘하게 샐리를 괴롭혔는지에 대해 세세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후작 부인 한 명이 나타나 의도적으로 샐리가 참석한 티파티의 분위기를 망쳤다는 이야기만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카시스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런 걸 그냥 보고 있었나?”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결국 저하의 이름을 대고 아주 고약한 협박을 해 버리고 말았죠.”

“아주 잘했어.”

대번에 얼굴을 부드럽게 편 카시스와 달리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잘하긴요. 이틀 만에 사교계에 제 소문이 자자하게 났을 게 분명해요. 에스테반 공작의 총애를 무기 삼아 휘두르는 무서운 여자라고요.”

그 말에 카시스가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너를 거슬리게 하면 내가 목이라도 자른다고 떠들어 대려나.”

“그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나진 않았을 거예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소문이란 부푸는 법이니까요. 지금쯤 제 심기를 거스르면 저하가 그 가문을 없애 버린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녀의 말에 카시스는 설핏 웃어 버렸다.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에스테반 공작이 원한다면 웬만한 귀족 가문 정도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무시하는 것보다는 두려워하는 게 나아.”

사실 카시스는 샐리가 자신의 이름을 써먹지 않는 것이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기껏 에스테반의 애첩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써먹지 않았다.

에스테반을 내세우면 초대장쯤이야 하루에도 수백 통이 도착할 것이고 어디를 가서도 최고의 귀부인 대접을 받을 텐데도.

그러나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식으로 저하의 권력만 믿고 멋대로 사교계에 들어갔다간 평생 그곳에 섞일 수 없을 거예요.”

여인들의 세계는 남성들의 세계보다 훨씬 섬세하다. 무조건적인 힘으로 누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사교계 입장이 허락된 이와 달리 출신이 바닥인 샐리는 더더욱 조심스럽게 사교계에 들어가야 했다.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 인망을 얻고, 소문에 휩쓸리지 않으며, 우아한 모습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제대로 인지도를 쌓기도 전에 공작의 총애를 앞세웠으니 샐리에 대한 평가는 처참하기 그지없으리라.

그러나 카시스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사교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되지.”

그는 두 다리를 꼬고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곤 느긋하게 말했다.

“네가 꼭 사교계에서 들어가서 엘리제와 맞설 필요는 없어. 에반이 말하길 우리의 커플 연기가 꽤 훌륭하다더군. 웬만한 일엔 혀를 내두르지 않는 자신조차 말문이 막힌다고 했어.”

“…….”

그의 말에 에반이 아니라 샐리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카시스는 그런 샐리의 표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뱀 같은 여자라도 그 모습을 본다면 기가 차서라도 당장 이혼장에 도장을 찍을지도 모르겠다고 하더군.”

카시스와 샐리의 다정한(?) 모습을 본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는 세상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굴었다.

카시스는 그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방법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이세요?”

“물론.”

“그런 걸 좋아하시는지는 몰랐는데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좋아하고 안 좋아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그리고.”

카시스는 샐리와 눈을 마주쳤다. 늘 차분했던 남색 눈동자에 평소와는 달리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아주 싫지는 않아.”

샐리는 기가 찬 얼굴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전생에서는 내가 달라붙으면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전생에서 샐리는 어미를 뒤따라 다니는 병아리처럼 그를 쫓아다녔다. 한순간도 그와 떨어질까 초조해했다.

단둘이 있을 때면 그도 조금은 다정하게 구는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니었다. 샐리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껴안으려 하면 그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샐리를 피했다.

몇 번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샐리는 자신 같은 여자가 그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을 그가 부끄러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샐리는 점점 소심해졌다. 나중에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향해 미소 짓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가 싫어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 놓고는 지금 와서 왜 말이 다른 건데?’

샐리는 원망 어린 눈으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카시스가 흠,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그러는군.”

“뭐가요.”

“또 날 잡아먹을 것처럼 보고 있어.”

사라져 버린 그에 대한 감정과는 별도로 과거의 원망은 종종 튀어나와 표가 나는 모양이었다. 샐리는 그런 게 아니라며 시선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전생의 감정이 아니었다. 샐리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샐리는 사교계 입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샐리는 엘리제에게 지독한 빚이 있었다.

엘리제는 천사 같은 얼굴로 샐리를 위하는 척하면서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샐리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황당하게도 그녀의 남자를 빼앗아간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사교계에서 그녀보다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스산한 미소를 떠올리면 아직도 등 뒤에 한기가 어렸다. 선연한 두려움과 동시에 화도 났다.

사교계가 도대체 뭐라고 그토록 끔찍한 약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단 말인가.

샐리는 엘리제가 주었던 그 수많은 감정들을 청산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교계의 정점에 서서 그녀와 당당히 눈을 마주쳐야 했다.

‘무시하는 것보다는 두려운 게 낫다, 라.’

샐리는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에스테반 공작이 할 법한 말이었다. 차라리 그게 쉬울지 모르겠다.

여인들의 마음을 얻어 차근차근 사교계에서 명성을 쌓는 것보다 차라리 에스테반 공작의 총애를 등에 업고 뻔뻔하게 사교계에 진입을 하면…….

‘그럼 예전과 다를 게 없잖아.’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식으로는 가식적인 미소밖에 얻을 수 없다.

애첩이 제멋대로 공작의 권력을 휘두를까 두려워 눈앞에서는 웃어 주던 여인들은 뒤돌아서자마자 싸늘한 경멸을 날릴 것이다.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샐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에 빠진 샐리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카시스는 방금 전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샐리는 후작 부인이라고만 표현했지만 다른 귀족의 티파티에서 저토록 당당히 패악을 부릴 만한 후작가 여인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록산느 헤스티아인가.’

사교계의 여인을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엘리제의 곁에 딱 붙어 있는 여인이라 이름까지 기억했다.

늘 엘리제의 곁에 서서 일그러진 미소로 그를 바라보던 여인이었다.

‘헤스티아가에서 잡고 있는 사업이 뭐였더라.’

카시스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위세 높은 가문답게 헤스티아 가문에서는 수많은 사업체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요즘 후작이 밀어붙이는 사업이 차오의 다기를 수입하는 사업이었다.

‘차오의 다기라.’

카시스의 내리깐 눈이 스산하게 반짝였다.

* * *

“샐리 님!”

데이지가 평소와는 달리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소리쳤다. 요 며칠 외출할 일이 없어 기운 없이 소파에 앉아 있던 샐리가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니?”

“초대장이 도착했어요!”

“초대장이라니. 도대체 누가? ”

마른 가뭄에 빗방울처럼 내린 초대장에 샐리의 눈이 커졌다. 봉투에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이미 로렌스. 그 이름을 보자 갑자기 긴장이 확 풀렸다.

‘설마 나 때문에 티파티를 연 건가?’

에이미는 공식적으로 손님들을 초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티파티 같은 것은 잘 열지 않는다고 했다.

친분이 있는 이들을 개인적으로 초대하여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이런 초대장이라니.

정말 자신을 위해 티파티라도 열었나 싶어 샐리는 곤란한 얼굴로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초대장 한 장과 편지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익숙한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샐리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웃으며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샐리의 표정이 점점 바뀌었다. 샐리는 놀란 얼굴로 초대장을 손에 들어 살펴보았다.

봉투에 적혀 있는 이름은 에이미였지만 초대장에 적혀 있는 이름은 그녀가 아니었다.

‘조세핀 웨일스’

로렌스가의 장녀이자 현재 제국 외교관으로 알스 공국에 체류하고 있는 웨일스 후작 부인이었다.

그제야 에이미가 조금만 기다리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걱정 한 점 없던 그녀의 얼굴은 그저 느긋해서가 아니었다.

샐리는 편지지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한 줄의 글귀를 다시 눈에 담았다.

[로렌스가의 언니들이 모두 모이기로 했어요.]

* * *

로렌스가의 저택이 오랜만에 복작거렸다. 여섯 명의 딸들이 있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다섯 명의 딸들이 모두 시집을 가니 무척이나 조용해진 집이었다.

저택에 유일하게 남은 두 여인인 자작 부인과 에이미는 워낙 조용한 성격이라 손님들을 초대하는 일이 많지 않아 더욱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남편을 따라 알스 공국으로 갔던 첫째 딸 조세핀이 오랜만에 친정에 돌아온 것이다.

조세핀은 오자마자 티파티를 열기로 했다. 예전 같았으면 로렌스 자작의 첫째 딸이 연회를 열든 말든 크게 관심받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웨일스 후작은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 관료 중 한 명이었다.

현재 웨일스 후작이 외교관으로 체류하고 있는 알스 공국은 급격한 경제 발전과 함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나라였다.

알스에는 수많은 신흥 재력가들이 있었고 웨일스 후작 부부는 그들과 긴밀한 인맥을 자랑하고 있었다.

알스의 후광을 뒤에 업은 조세핀과 친해지기 위해 많은 이들이 초대장을 부탁해 몰려들었다.

덕분에 티파티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조세핀은 정원을 꾸며 대규모 티파티를 준비했다.

속속들이 도착한 여인들 중에는 샐리도 있었다. 오늘은 일부러 튀지 않기 위해 장식이 거의 없는 심플한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샐리를 알아본 여인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물론 시선만 보낼 뿐 샐리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그중에는 그레이스의 티파티에서 보았던 여인들도 몇 명 있었다. 그녀들은 샐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창백해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역시 날 불편해하는구나.’

예상대로의 반응에 샐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샐리 님, 어서 오세요!”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샐리를 향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에이미였다. 그녀의 모습에는 일전의 아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초대해 주어서 고마워요. 제가 괜한 곳에 온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네요.”

“아니에요. 언니가 먼저 샐리 님께 초대장을 보내라고 했는걸요.”

에이미는 너무도 편하게 언니라고 지칭했지만 그녀는 위풍당당한 웨일스 후작 부인이었다. 샐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여인일까?’

알고 있는 것은 조세핀이 알스의 사교계를 휘어잡았다는 소문이었다. 제아무리 제국의 외교관이라는 직위를 가졌다 하나 타국에서 입지를 다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때 모여 있는 여인들이 웅성거렸다. 티파티의 주인공인 조세핀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여인들의 모임인 티파티에 이례적으로 그녀는 남편의 팔짱을 끼고 등장했다.

그녀는 역시 에이미와 한 핏줄이었다. 타국의 사교계를 주름잡는 여인이라기에 아주 엄격한 외모를 생각했는데 동그란 턱과 눈매가 아주 부드러운 여인이었다.

에이미처럼 작은 체구 덕에 나이보다 어리게 느껴지기도 했다.

“귀한 시간을 내주어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조세핀은 여인들을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타국에 가 있느라 제국의 중요한 분들을 자주 뵙지 못해서 늘 아쉬웠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친정에 온 김에 급히 자리를 마련해 보았어요.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네요.”

커다란 정원 가득 그녀의 말이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많은 이들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주 능숙해 보였다. 여인들은 박수를 치며 그녀를 환영했다.

경쾌한 음악이 연주되며 티파티가 시작되었다. 조세핀의 남편 웨일스 후작은 부인과 함께 동석한 몇몇 남성들과 모여 저택의 응접실로 들어갔다.

조세핀은 직접 여인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차례대로 부인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걸었다.

조세핀이 한 부인과 인사를 끝냈을 때 에이미가 그녀를 향해 아이처럼 손을 흔들었다. 다가온 조세핀은 곤란한 듯 눈썹을 내렸다.

“에이미, 귀족가의 영애는 언제든 우아하게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지? 언제까지 그런 철없는 동작을 할 거니.”

“내가 키가 작으니 언니가 보지 못할까 봐 그랬지.”

입술을 내밀며 말하는 에이미의 말에 조세핀은 풋 하고 웃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동생을 보는 그녀는 마치 딸을 보는 것처럼 다정했다.

미소 짓던 조세핀은 샐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샐리는 치맛자락을 잡고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세핀 웨일스 후작 부인. 샐리라고 하옵니다. 고단한 여행길에 지치셨을 텐데 이렇게 성대한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담한 조세핀은 샐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샐리는 모은 두 손을 꽉 잡았다.

에이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면 역시 나를 싫어하겠지. 소중한 동생을 사교계에서 애매한 입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얼마나 꼴 보기 싫을까?

더 이상 에이미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는 순간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워요, 샐리. 당신의 이야기는 에이미에게 많이 들었어요.”

조세핀은 아주 인자하게 눈을 휘며 웃었다.

“에이미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지요? 부족한 것이 많은 아이인데 함께 어울려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무척 매력적인 아가씨라고 하더니 정말이네요. 예법도 더할 나위 없이 잘 배웠고 꾸밈새도 아주 아름다워요.”

그녀의 말은 겉치레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자상하고 부드러웠다. 에이미처럼 사심 없는 순수한 칭찬에 샐리의 긴장되었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에이미의 곁에서 가르쳐 줄 것이 많은데 아쉽게도 나는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대가 앞으로도 에이미의 좋은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알려 주세요.”

샐리의 심장 한편이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었다. 에이미도 그랬지만 이 여성도 처음 보는 귀족 여성이었다.

품위가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위압감 넘치면서도 자상하다. 샐리는 고개를 숙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따뜻한 봄바람처럼 은은하던 티파티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진한 자주색 드레스를 입은 록산느가 남편의 팔짱을 끼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샐리는 놀란 얼굴로 록산느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던 것일까? 왜?’

아니, 초대장을 보냈다고 해도 그녀가 초대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도 분명 에이미를 기억할 테니 이곳은 껄끄럽기 그지없는 장소일 것이다.

록산느는 남편과 함께 바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록산느는 샐리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조세핀의 앞에 섰다.

조세핀이 부채를 살랑이며 록산느를 바라보았다.

“어머나, 몸이 좋지 않아 오지 못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록산느는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남편을 흘겨보았다. 그녀의 팔짱을 낀 헤스티아 후작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웨일스 부부께서 제국에 왔는데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내의 아픈 몸을 부축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웨일스 후작은 어디에 있는지요?”

헤스티아 후작은 급한 성미를 드러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제야 샐리는 록산느가 이 자리에 온 상황이 이해가 갔다. 록산느의 남편 헤스티아 후작이 요즘 사업을 크게 늘리고 있다는 것은 유명했다.

그중에서 알스 공국을 향한 관심은 특별했다.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엄청난 재화가 도는 알스 공국은 사업을 하는 이에겐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름없었다.

알스 공국의 사업 인맥을 잡기 위해 웨일스 후작을 만나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부인들이 오는 티파티에 남성 혼자 덜렁 올 수 없으니 오기 싫다는 부인을 억지로 끌고 왔을 것이다.

“그이는 지금 먼저 온 남성분들과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답니다.”

조세핀의 말에 헤스티아 후작이 다급한 표정으로 황급히 시종을 앞세워 사라졌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알짜배기 정보를 다 뺏길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늘 아팠어야 하는 록산느만 덩그러니 남았다.

“록산느 부인,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요.”

록산느는 턱을 치켜뜨고는 퉁명하게 말을 받아쳤다. 두 사람은 동년배로 데뷔탕트까지 함께 치른 사이였다.

그때만 해도 조세핀은 그저 그런 자작가의 영애에 불과했고 록산느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던 백작가의 영애였다.

록산느가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사교계를 이끌어 갈 때 조세핀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비록 조세핀의 위세가 달라졌다고 하나 갑자기 행동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전히 그녀의 눈에 조세핀은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을 한 조세핀 로렌스로만 보였다.

“오지 않는다 하셔서 아쉬웠어요. 꼭 부인을 만나고 싶었거든요.”

조세핀의 말에 록산느는 코웃음 쳤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눈에 보여서였다.

“일전에 그레이스 백작 부인이 주최한 티파티에서 아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죠?”

역시나. 예상했던 말에 록산느의 붉은 입술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록산느는 옆에 서 있던 샐리와 에이미를 사납게 훑어보고는 다시 조세핀을 향해 시선을 돌려 말했다.

“그래요. 주제도 모르는 평민 출신의 여자 한 명이 껴서 우아한 귀부인들의 티파티를 망쳐 버렸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와는 다르네요. 티파티를 망가뜨린 것은 정식으로 초대도 받지 않은 어느 후작 부인이라고 하던걸요?”

그 말에 록산느의 눈빛이 사나워졌지만 조세핀은 은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국 사교계 분위기가 많이 바뀐 줄 알았건만 아직도 그런 식으로 권력을 등에 업고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이가 있다니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입니다.”

그 말은 정확하게 록산느를 겨냥하고 있었다. 두 여인 사이의 분위기가 이내 팽팽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여인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었기에 이 일이 어떻게 해결될지에 대한 궁금증도 어려 있었다.

록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 오기 전 몇 번이나 남편에게 다짐을 받았다.

절대로 조세핀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알스의 사업을 잡기 위해서는 그녀의 호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남편을 생각하면 얌전히 있어야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조세핀 로렌스 주제에!’

록산느는 치켜뜬 눈으로 조세핀을 바라보았다.

“부인이야말로 엉뚱한 사람을 비판하고 있군요. 잘못한 것은 남자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제멋대로 날뛰는 계집이지요. 지금 여동생의 일로 날 어떻게든 흠집 내고 싶은가 본데…….”

“록산느 헤스티아 후작 부인.”

“……!”

록산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세핀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순한 눈매가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녹색 눈동자에는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엄격함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에이미에 관한 일은 언급하지 않을 셈이었어요. 그대가 권력을 빌미로 무례를 저질렀다는 점만 이야기하려 했으나 당신이 그렇게 두지 않는군요. 내 동생에게 엄청난 수치를 안겨 주고도 그렇게 당당히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건 아직도 내가 힘없는 조세핀 로렌스로 보이기 때문이겠죠?”

그때였다.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던 여인들이 한 명 두 명 나와 조세핀의 곁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찾아온 로렌스가의 자매들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결혼해 수도를 떠나 있었기에 로렌스가의 여섯 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작은 체구에 순한 인상이었지만 누구 하나 눈빛이 당당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중얼거렸다.

“로렌스의 마법…….”

결혼 전에는 분명 소박한 로렌스의 딸이었던 이들은 지금은 여러 곳에서 영향을 끼치는 귀부인이 되었다.

10년 전과 지금의 로렌스는 전혀 달랐다. 자매들을 등 뒤로 두고 조세핀이 엄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우리 로렌스가 만만해 보이나 보군요.”

“……!”

록산느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록산느는 조세핀의 기에 짓눌리고 있었다.

록산느는 사교계에 엘리제와 레이첼이라는 어마어마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편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 혼자 상대하기에 로렌스가의 여섯 여인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조세핀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나긋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힘 있는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요. 알스 공국을 포함한 많은 곳에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제국의 사교계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사교계의 본질은 여인들의 우아한 사교의 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조세핀의 시선은 어느새 록산느가 아닌 주변의 여인들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사교란 서열을 매겨 제멋대로 사람을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며 친목을 다지는 것이라는 것을요.”

조세핀의 마지막 말은 부드러웠지만 여운이 깊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몇몇 여인들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선생님께 혼난 학생 같은 부끄러운 얼굴이었다.

샐리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다고 생각했던 조세핀이 누구보다 크게 보였다.

* * *

조세핀이 친정에 머무른 시간은 무척 짧았다. 메리에게 편지를 받고 급작스럽게 낸 휴가였기 때문이다.

비록 며칠간이었지만 그녀는 아주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결혼 전 즐겨 갔던 식당에서 오랜만에 남편과 식사도 했다.

가장 즐거웠던 건 역시 여섯 자매들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넓은 손님용 침실에 침대를 다닥다닥 붙여서 여섯 자매가 옹기종기 모였다.

어렸을 때처럼 편한 잠옷을 입고 과자를 먹으며 수다를 떠니 밤을 새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어느새 한 가문의 안주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서로의 앞에서는 말도 험하게 하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 자매의 모습 그대로였다.

조세핀이 다시 떠날 날이 되었다. 짐들을 꼼꼼히 확인하고 난 조세핀은 떠나기 전 자매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자매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손님이 찾아왔다. 샐리였다. 샐리는 조세핀과 눈을 마주치고 인사했다.

“오늘 알스 공국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왔어요. 인사를 꼭 드리고 싶어서요.”

샐리의 말에 조세핀이 인자하게 웃었다.

“정말 잘 왔어요. 나도 샐리와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출발까지 조금 시간이 남았으니 잠시 이야기를 나눌까요?”

샐리는 응접실이 아닌 조세핀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조세핀의 방은 아주 아기자기했다. 봄꽃이 수놓아진 화사한 이불, 달콤한 향기가 나는 꽃들, 선반에 앉아 있는 곰 인형들.

“집사에게 부탁해서 결혼 전처럼 꾸며 달라고 했어요. 여기 있는 동안은 예전처럼 편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귀엽죠?”

샐리는 미소로 대답했다. 이제는 30대 중반이 다 된 성숙한 조세핀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기도 했지만 그녀의 옛 시절이 그대로 느껴지는 방은 풋풋하고 사랑스러웠다.

조세핀이 따라 준 차 한 모금을 마신 샐리에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에이미에게 들었어요. 당신이 에스테반 공작의 지위를 운운하며 헤스티아 부인을 협박했다면서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샐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샐리의 얼굴을 본 조세핀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잘했어요. 혼자서 그 록산느 헤스티아를 상대하다니 정말 대담하네요.”

분명 비난받으리라 생각했던 일을 칭찬받자 샐리는 혼란스러웠다. 조세핀은 샐리와 눈을 마주 보았다.

“샐리, 제국 사교계는 내내 같은 모습이에요. 늘 권력의 정점에 선 이들이 사교계를 제 맘대로 휘두르고 있지요. 지금도 에스테반 공작 부인과 레이첼 황녀를 주축으로 형성된 세력은 아무도 손도 대지 못하고 것이 사교계의 현실이에요. 그것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고요.”

조세핀의 얼굴이 진지하게 바뀌어 있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죠. 그런 곳에서는 진정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어요. 갇힌 관계 속에서 귀족들은 점점 편협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되겠죠. 이대로는 제국 사교계에 더 이상의 발전은 없어요. 그래서 난.”

조세핀이 말을 이었다.

“당신을 응원해요.”

“네?”

“당신을 본 것은 고작 두 번째지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거든요. 당신은 제국 사교계에 신선한 새바람이 될 거예요.”

“제가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샐리가 눈을 크게 떴다. 저런 말을 들을 만큼 엄청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지지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조세핀의 말이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샐리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런 샐리가 귀여워 조세핀은 웃었다.

“그래요. 아무리 사교계가 썩었다고 한들, 폐쇄적인 세계 속에 갇혀 있다 한들 그들도 사람이랍니다. 사람은 정말 매력 있는 이에게는 자연스럽게 끌리기 마련이죠. 제가 보기에 당신은 아주 매력 있는 아가씨예요.”

조세핀의 말은 샐리의 가슴속 깊이 파고 들어왔다. 마법의 씨앗처럼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그 말은 앞으로 자라고 자라 아주 크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것 같은 그런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샐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로렌스가의 마법은 진짜 있었다. 마력석이 지닌 마법 같은 것이 아니었다. 로렌스가의 딸들이 마법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렌스가라는 평범한 가문의 딸들이 어떻게 대단한 사내들과 만나 부부가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평범하고 유순해 보이는 외모였지만 조세핀도 에이미도 마음이 곧고 강했다. 단단하고 선명한 초록의 나무는 외양만 화려한 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음에 만날 땐 연회장 구석에서 이방인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처럼 위세 등등하게 서 있는 모습을 기대할게요.”

조세핀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날 샐리는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조세핀의 말처럼 거창한 이유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엘리제와 대등해지기 위해서 어떻게든 사교계에 입성할 생각만 했다. 그 안의 사람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만났던 이들을 진심으로 대했다고 할 수 있어?’

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도 엘리제나 공작 저하와 다를 바 없어. 이 사람이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고, 어떻게 내 발판으로 삼을지 고민이나 했지. 한 번도 그 사람을 제대로 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어.’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절대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다.

그제야 샐리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너무 급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내게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지 말고 사람 자체를 바라보자.

‘중요한 것은 사람.’

가장 중요한 것을 처음으로 붙잡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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