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28)

3. 에스테반의 애첩

아침부터 에스테반 저택은 분주했다. 엘리제 에스테반의 스물세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기 때문이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인으로 인해 평소의 에스테반 저택은 무척 조용한 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에스테반 저택의 연회장이 열렸다. 까마득한 높이의 천정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마력석이 박혀 있었고, 수많은 기둥과 대리석은 신화 속에 나오는 신전처럼 매끈하고 아름다웠다.

웅장하고 신비로운 홀 안에는 수백 명의 시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파티를 준비했다.

황성과 비교해도 부족함 없는 화려한 연회 홀처럼 들어서는 이들도 하나같이 거물들뿐이었다. 엘리제가 고심해 초대한 이들이니 그럴 만했다.

엘리제는 들어서는 손님들에게 우아한 동작으로 인사했다. 저택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엘리제의 미모를 칭찬했다.

“생일 축하해요, 부인.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원래 아름다우시지만 오늘은 정말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 같으세요.”

오늘의 엘리제는 정말 아름다웠다. 금빛 머리카락은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최고급 진주 귀걸이로 포인트를 주었다.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 있는 하늘빛 드레스를 입고 레이스로 장식된 부채를 든 그녀의 모습은 그림 속의 귀부인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여린 꽃처럼 가련해 보였다. 그녀의 남편이자 저택의 주인인 에스테반 공작이 그녀의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카시스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이 자신의 부인을 냉대한다는 사실은 사교계에서 유명한 일이었다. 정략결혼을 통해 이어진 귀족 부부가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는 흔했다. 그러나 저토록 아름다운 외모와 성품을 가진 부인을 그리 취급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에게 한없이 냉담한 에스테반 공작의 성격 때문일 것이라며 사람들은 엘리제를 안쓰러워하곤 했다.

“엘리제.”

슬픔이 어린 얼굴로 등장한 이는 제국의 세 번째 황녀 레이첼이었다.

풍성한 밤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여인답게 앳된 모습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엘리제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숙였다.

“레이첼 황녀 저하께 인사 올립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시다니 영광이옵니다.”

레이첼은 인사를 하는 엘리제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엘리제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지난 며칠 동안 사교계를 휩쓴 엄청난 스캔들, 바로 에스테반 공작의 축첩이었다.

레이첼은 자신의 일처럼 가슴이 아팠다. 엘리제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엘리제와 카시스를 이어 주기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두고 그런 짓을 하다니 정말 너무해요.”

저 멀리 있는 카시스를 쏘아보며 내뱉는 레이첼의 말에 엘리제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런 말 마세요. 그이도 마음 둘 곳이 필요한 거겠죠.”

“그래도 자기 부인은 이렇게 냉대해 놓고 첩이라니요. 게다가 그 여자라는 게…….”

레이첼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인 것처럼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창부를 모시던 하녀라면서요. 그런 천한 여자를 어떻게 첩으로 들일 수가 있죠?”

흥분하여 커진 레이첼의 목소리에 손님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선연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엘리제는 그 시선을 느끼며 차분히 대답했다.

“남편이 선택한 여인이니 따지지 말고 품어 주어야죠. 무릇 능력이 뛰어난 사내라면 여러 여인을 거느리는 법이잖아요.”

주변에 있는 남자들을 의식하여 던진 말이었다. 그중에는 첩이 있는 자도 있었다.

남성의 권위가 강한 제국에서 엘리제의 말은 현숙한 귀족 아내의 표본과 같았다. 질투는커녕 넓은 마음으로 남편의 편이 되어 주는 엘리제의 모습은 한없이 자애로워 보였다.

귀족 남자들은 엘리제를 향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니 첩에 관해 부정적인 여인들도 자신의 감정을 티 내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매처럼 잘 지내고 싶어서 초대장까지 보냈는데 오지 않을 모양이에요.”

쓰게 웃는 엘리제의 모습은 정말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레이첼은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 여자에게 초대장까지 보내다니 정말 바보처럼 착해.’

그 선한 마음 때문에 엘리제를 좋아하는 것이지만 이럴 땐 정말 화가 났다.

“감히 공작 부인의 초대에 응하지 않다니요, 공작의 총애를 믿고 제 위치를 망각한 것 아닌가요?”

“전 괜찮으니 노여워하지 마세요.”

“아니, 이건 예법의 문제기도 해요. 제깟 것보다 훨씬 높은 공작 부인의 생일 파티인데 얼굴도 비추지 않다니 이럴 순 없어요. 당장 그 아이를 부르세요.”

“하지만…….”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제는 속으로 스산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조종하기가 쉬울까.’

레이첼은 항상 조금만 찔러 주면 제가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유치한 친구 놀음을 하는 보람이 있는 황녀였다.

“알겠습니다, 황녀 저하.”

엘리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사를 향해 손짓을 했다.

“마사, 황녀 저하의 명이시다. 방으로 가서 샐리를 데려오렴.”

마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진 후 엘리제는 연회장을 쭉 훑어보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신과 레이첼의 대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제 저 문을 열고 나타날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궁금하겠지. 에스테반 공작의 마음을 훔친 여자가 어떤 여자일지.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화상으로 썩어 문드러진 얼굴의 여자가 등장할 것이다. 호기심은 경악으로 바뀌고 그따위 여자는 절대 엘리제 에스테반의 자리를 넘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엘리제는 시선을 돌려 저 먼 곳에 있는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병을 옮기는 것도 아닌데 항상 그는 그녀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덕에 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신의 첩이 무슨 꼴을 당하는지 봐.’

부채 위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엘리제의 생각과 달리 카시스는 그녀를 신경 쓰고 있었다. 물론 제 부인에 대한 관심은 전혀 아니었다.

‘황녀를 이용해서 또 무슨 짓을 벌이고 있군.’

거리가 멀어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확실했다. 레이첼 황녀가 이따금 자신을 보며 눈을 흘겼으니까.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황녀인 그녀는 엘리제의 가장 큰 뒷배였다.

엘리제가 조금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 레이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가 바라는 것을 해 주곤 했다.

두 사람이 무엇인가 대화를 나누더니 마사가 연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엘리제와 가까이 있던 하녀 한 명이 다가와 카시스에게 말을 전하고 지나쳤다.

“황녀 저하께서 직접 샐리 님을 데리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저 뱀 같은 여자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루고야 말았다.

굳이 자신을 찾아와 초대장까지 건네고 황녀까지 이용했다.

‘그녀를 꼭 이곳에 불러내고 싶다는 거군.’

엘리제의 의도야 뻔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처참한 꼴의 샐리를 보여 주고 싶은 것이리라.

남을 짓누르고 교묘하게 자신을 빛내는 것은 엘리제의 특기였다. 샐리도 카시스도 이 상황을 예상했다.

항상 사람을 제 맘대로 가지고 놀던 엘리제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조금 후 가장 놀라게 될 이는 자신이라는 것을.

“공작 저하, 첩을 들이셨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모두가 쉬쉬하는 이야기를 너무나 쉽게 꺼낸 이는 리오넬 후작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느낌의 미남으로 결혼한 후에도 몇 명인지 모를 애인을 거느린 사교계의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평소라면 이런 무례한 질문 따위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상대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 남자의 사교계에서의 입김은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잘 말해 놓아야 카시스가 원하는 소문을 내줄 터였다.

“맞소.”

카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오넬 후작의 눈이 번쩍였다.

“평소 여성들에게 무척 담백하셨던 분이라 거짓 소문이 아닌가 했는데 정말이라니 놀랍군요. 도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저하 같은 사내의 마음을 녹인 겁니까.”

어떤 여자?

카시스는 잠시 멈칫했다.

단순히 소개를 나열하자면 설명할 것은 비루하기 그지없었다. 유곽에서 창부를 모시던 하녀, 성도 없이 이름만 가진 밑바닥 출신.

그러나 그런 것들은 샐리를 나타내기에 적합한 설명 같지가 않았다.

고민 끝에 카시스가 대답했다.

“고양이 같은 여자야.”

“호오.”

“경계심이 가득하고 단 하나도 내 예상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더군. 고분고분한가 싶다가도 제 맘에 안 들면 내 얼굴을 할퀼 기세야.”

카시스의 잘생긴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런데도 자꾸 시선이 가. 계속 말을 걸고 만지고 싶더군.”

리오넬 후작이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참. 저하께 그런 말을 하게 하다니 어떤 여인인지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언제야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곧 보게 될 거요.”

“과연. 에스테반 공작 부인과 비견될 만한 미인이 나올지 기대가 되는군요.”

리오넬의 눈빛은 꽤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닌지 많은 이들이 연신 누군가를 찾듯이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엘리제와 견줄 것을 바라고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엘리제는 평범한 미인과는 견줄 수 없는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영애와 부인들 사이에서도 엘리제는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시스는 샐리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저 그런 엘리제에게 기죽지 않고 자신의 옆에 서 있을 만한 담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작 몇 주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샐리는 변했다. 평생 그렇게 가꾸어진 여인처럼 매끄러운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는 나른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밋밋한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그녀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 순간의 그녀를 떠올리자 심장 한편이 간질거렸다.

‘언제 나오려는 걸까.’

카시스는 그답지 않게 초조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생경한 감정이었다.

저도 모르게 카시스는 연회장 입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리오넬 후작의 시선도 그곳을 향했다.

저 멀리 서 있던 엘리제도, 레이첼 황녀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연회장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이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하자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의 시선도 집중되었다.

감미롭게 연주되고 있는 음악 소리와 달리 연회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홀 안으로 한 여인이 들어섰다.

또각또각. 바닥을 내딛는 구두 소리가 경쾌했다. 짓눌릴 것 같은 시선 속에도 여인의 모습은 당당했다.

샐리였다.

삐뚤빼뚤 잘려 있던 붉은 머리카락은 탐스럽게 웨이브져 흘러내렸다. 몸에 딱 맞는 금빛 드레스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풍만한 가슴부터 잘록한 허리를 타고 내려온 선은 아름다웠고, 부채를 살랑이는 긴 팔은 우아했다.

옆으로 살짝 트인 치맛자락 사이로 살짝 보이는 가는 발목은 사내들을 아찔하게 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눈초리를 올린 눈 화장으로 눈매가 더욱 새침해졌다. 요염한 눈 아래 콕 찍혀 있는 청순한 눈물 점의 조화가 오묘한 매력을 냈다.

카시스는 커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류 한 번으로 드넓은 제국을 뒤흔드는 그였다. 존엄한 황제의 서릿발 같은 분노를 받아 본 적도 있고, 그의 권력을 탐한 세력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그는 이성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그는 생각이 멈추는 기분을 경험했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그를 보더니 곱게 휘어졌다. 심장이 철렁할 만큼 매혹적인 눈웃음이었다.

그렇게 그를 놀랜 아름다운 그녀는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황홀한 꿈에서 깬 것처럼 카시스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샐리가 향한 곳은 엘리제의 앞이었다. 그녀의 앞에 서서 샐리는 치맛자락을 올린 후 고개를 숙였다.

“감히 제가 올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망설였는데 마사까지 보내어 간곡히 초대하시니 이렇게 자리했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님.”

샐리의 붉은 입술이 유려하게 올라갔다.

“탄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오늘이 마님께 아주 기쁜 날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러나 엘리제의 표정은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내내 지켜오던 미소가 사라진 엘리제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아무 표정이 없었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엘리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이리 찾아와 축하해 주다니 고맙구나.”

눈을 마주치고 웃는 두 여인 사이로 레이첼이 끼어들었다.

“뒤늦게 찾아와 놓고는 인사하는 꼴이 뻔뻔하구나. 진작 찾아와서 인사를 했어야지.”

전생에서도 여러 차례 만난 적 있는 레이첼 황녀였다. 늘 엘리제의 옆에서 그녀의 편을 들어주던 앳된 황녀.

엘리제를 위해 샐리에게 모진 말들을 하긴 했지만 순수하게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걸 안다. 그래서 샐리는 아무런 원망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녀 저하께 인사드리옵니다. 샐리라 하옵니다.”

샐리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일찍 오는 것이 예의지만 치장이 익숙지 못해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예 오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저렇게 용서를 구하는데 독하게 혼을 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해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무는 레이첼을 보며 엘리제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쓸모없기는. 저따위 변명을 늘어놓는 계집을 당장 내쫓지 못하고.’

엘리제는 레이첼 황녀를 조금 더 건드려 보기로 했다.

“맞아요, 황녀 저하. 샐리는 며칠간 방에서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걸요. 이렇게 나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예요.”

레이첼은 샐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의 그녀는 건강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엘리제를 보기 싫어 꾀병을 부렸던 건가 싶어 눈썹이 찡그려졌다.

“멀쩡해 보이는데 어디가?”

엘리제도 샐리를 빤히 바라보더니 의아한 얼굴을 했다.

“분명 얼굴에 화상을 심하게 입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화장으로 가렸다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깨끗하구나.”

레이첼의 머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굴러 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엘리제보다 머리 회전이 빠르다는 엄청난 착각은 항상 그녀에게 엘리제가 원하는 결론을 내게 만들었다.

“거짓말로 공작 부인을 속인 거야?”

레이첼이 정색하며 샐리를 쏘아보자 엘리제가 놀란 듯 입을 가렸다.

“설마 그럴 리가요. 아니지, 샐리?”

너무 쉽게 조종당하고 너무 쉽게 연기를 하는 두 여인의 모습은 우스웠다. 어쩜 과거와 저렇게 다를 바가 없는지. 샐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마님.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요.”

“감히 마님을 능욕하는 겁니까!”

세 사람의 대화에 갑작스럽게 껴든 이는 엘리제의 뒤에 서 있던 마사였다. 제가 끼어들 자리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귀한 마님이 저따위 여자를 상대하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찻주전자의 물이 쏟아져 당신이 얼굴에 지독한 화상을 입어 방에 처박혀 있었다는 건 저택의 모든 이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 놓고 뻔뻔스럽게 멀쩡한 얼굴로 나타나다니요. 당장 마님 앞에 무릎을 꿇고 거짓말에 대한 사죄를 하세요.”

마사의 기세가 얼마다 대단한지 네 여자 사이의 기운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팽팽해졌다.

레이첼도 단단히 벼르는 얼굴로 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이란 것이 증명되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눈썹을 사납게 치켜세운 두 여자 사이로 엘리제만이 가련한 얼굴로 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샐리는 조금 놀란 듯 마사를 바라보더니 장밋빛 볼에 손을 대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님, 그리고 마사. 아까부터 자꾸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왜 자꾸 제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고 하시는지…….”

샐리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가 화상을 입은 곳은 얼굴이 아니라 몸 쪽이에요.”

“……?!”

엘리제와 마사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 샐리는 정말 궁금하단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보통 찻잔에 따르던 물을 아무리 잘못 부어도 얼굴에 닿을 일이 없잖아요. 작정하고 일부러 뿌린 게 아니라면요. 그런데 두 분은 마치 찻물이 제 얼굴에 닿았다고 확신하시니 신기할 따름이네요. 마치 이 사건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처럼요.”

마사는 그제야 저택 안에 가득 찼던 소문을 생각해 냈다.

샐리를 진찰하던 바란은 그녀의 상태에 대해 조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샐리의 상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를 얼마나 어떻게 다쳤는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상상을 하여 수군거렸을 뿐이다.

누구도 샐리가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고 콕 집어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다.

마사는 숨이 막혔다. 등 뒤에 있는 엘리제의 시선이 매섭게 박혀 왔다.

이렇게 공작 부인에 대한 한 자락 의심만 남기고 대화를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상한 의심으로 말을 돌리지 마십시오. 중요한 건 아가씨가 마님께 거짓말을 한 여부잖습니까. 제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마사가 샐리를 향해 뻗은 손을 누군가가 매섭게 내쳤다. 마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카시스가 차가운 눈으로 마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제 넘는 말을 하고 있군.”

그는 샐리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가는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아주 다정한 동작이었다.

“확인 따위 할 필요 없다. 내가 증인이니까.”

“저하.”

샐리가 부끄러운 듯 두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카시스가 그 모습을 보며 속상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아직 낫지도 않은 몸이라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고집을 피웠군. 네 몸에 나 있는 상처 자국만 보면 내가 어떤 기분일지 정녕 모르느냐?”

물론 카시스는 결코 샐리의 벗은 몸 한 자락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진지한 얼굴과 단호한 목소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시스는 다시 마사를 바라보았다. 샐리를 바라볼 때와는 달리 차갑고 싸늘한 눈동자였다. 마사가 창백해진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마사, 네 앞에 있는 여인이 누구냐.”

“저, 저하의 여인이십니다.”

“다행히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었군. 네게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한 여인이 아니지. 당장 그녀에게 네가 한 무례한 짓에 대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거라.”

마사는 샐리를 바라보았다. 샐리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노도 없는 저 표정이 마사의 속을 더 뒤집었다.

속에서 화가 치밀었으나 서슬 퍼런 공작의 눈빛이 무서웠다. 마사는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마님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것에 놀라서 그런 것이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흐음.”

샐리가 기다리듯이 마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다인 것이냐는 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마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감히 의심하여 함부로 말한 것 또한 저의 잘못입니다.”

샐리의 눈빛은 여전했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사는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샐리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마사, 교육을 잘 받은 하녀라고 들었는데 실망스럽군요. 본인이 한 실수조차 모르고 있다니.”

무엇을 말하는가 싶어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샐리는 힌트를 주듯 옆에 있는 카시스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턱을 들어 올려 마사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아까 나를 지칭할 때 당신이라고 불렀어요. 그 호칭은 내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죠.”

마사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샐리의 의도를 깨달았다.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카시스와 나란히 서 있는 샐리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공작의 여인이었다.

마사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디라도 도망가고 싶었으나 도망갈 길은 없었다. 결국 마사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용서하십시오, 샐리 님.”

같은 평민인 마사가 샐리에게 존칭을 할 이유는 없었다. 하물며 유곽의 하녀 출신이라는 샐리의 배경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그런 마사가 샐리 님이라고 존칭을 한 것은 바로 제가 모실 주인의 여자로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공작 부인의 가장 최측근인 하녀가 모든 이의 앞에서 공작의 첩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엘리제가 한 발짝 다가왔다.

“마사는 나를 위한 마음에 이따금 이렇게 철없는 행동을 하곤 한답니다. 제가 엄하게 혼낼 테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카시스를 보며 한 말이었는데, 그는 마치 어떡하겠냐는 듯 샐리를 바라보았다. 샐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마님을 위한 날인데 더 이상 시끄러워지는 것은 저도 싫어요.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요.”

타이밍 좋게 잔잔하던 음악 소리가 바뀌었다. 연회의 첫 시작을 여는 미뉴에트였다. 첫 춤의 시작은 저택의 주인이자 연회의 주인공인 에스테반 공작 부부가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카시스는 엘리제와 춤을 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평소라면 춤을 추지 않고 연회장을 나가 버렸겠지만 그의 곁엔 샐리가 있었다. 카시스는 샐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과거의 카시스도 엘리제가 아닌 샐리에게만 춤을 신청했다. 그와 함께 춤추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에 샐리는 거리낌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잡고 춤을 추면 엘리제는 한껏 서글픈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곤 했었다. 쓸쓸한 눈빛의 엘리제와 환희에 가득한 얼굴로 남자와 춤을 추는 창부.

엘리제가 가련해 보일수록 샐리는 한없이 악독해 보였다. 주변 이들의 시선이 더할 바 없이 싸늘했지만 그조차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샐리는 눈앞의 남자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샐리는 카시스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이 손을 잡고 춤을 췄을 때 얻을 것이라고는 주위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뿐임을 안다.

샐리는 고개를 젓고는 카시스의 손을 엘리제에게 향하게 했다.

“오늘은 마님을 축하하는 날이잖아요. 마님과 함께 춤을 추셔야죠.”

카시스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샐리가 쓸데없는 말을 할 리는 없을 것 같기에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카시스는 감정을 지운 무표정으로 엘리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제는 말없이 그녀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엘리제, 남편이 춤을 신청했는데 뭐 하세요. 어서 잡아야지요.”

옆에 있던 레이첼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엘리제는 저 가벼운 입을 뒤틀고 싶어졌다.

그녀는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그를 거절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리제는 거짓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 위로 손을 얹혔다.

연회의 주인공인 공작 부인과 공작이 두 손을 잡고 홀 중심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빛나는 조명 아래로 반짝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꼭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우아한 동작으로 맞절을 하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제게 춤을 신청하시다니 황송하군요.”

“내가 원해서 한 행동은 아닌 걸 알 텐데.”

“알고 있어요. 당신이 예뻐하는 첩 덕분인 것을요. 정말 놀랐어요. 제 생각보다 그 애는 더 영민하고 아름답더군요.”

포개진 두 손이 떨어지며 반대쪽으로 한 바퀴 돌아 엘리제가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저도 그녀가 참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 그녀를 예뻐해 줄게요, 아주 많이.”

엘리제는 천사처럼 웃었다. 그녀와 맞닿은 손끝으로 소름 끼칠 만큼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명심하시오. 역사 속에서 애첩에 빠진 이들이 얼마나 잔인해졌는지를.”

카시스도 지지 않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엘리제의 고운 눈썹이 찡그려졌지만 잠시였다. 이내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어 내고는 나비 같은 몸짓으로 빙그르 몸을 돌렸다.

연회장의 사람들은 귀한 구경거리를 보듯 춤추는 공작 부부를 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 곳만이 아니었다.

구석진 곳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인, 에스테반 공작의 첩에게도 수많은 시선이 달라붙었다.

미소 짓고 있었지만 쓸쓸함이 가득한 눈빛은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없이 천박하고 탐욕스러우리라 예상했던 천한 여인이 생각과는 다른 여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아련해 보였다.

물론 샐리는 두 사람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다만 과거의 엘리제에게 배운 것을 흉내 냈을 뿐이다. 때로는 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힘이 된다는 것을 그녀에게 배웠다.

따끔할 정도로 수많은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샐리의 곁으로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그녀는 에스테반 공작의 첩이었지만 동시에 창부를 모시던 하녀였다. 그런 미천한 출신의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한 사내가 샐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다면 제가 당신의 첫 춤 상대가 되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미남자, 리오넬 후작이었다. 샐리는 먼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여성 편력은 유명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자상한 남자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본처가 있는 남자라는 것이 큰 문제였지만.

“죄송해요. 춤추는 것이 아직 서툴러서요.”

“춤이라면 자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제가 리드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눈빛을 보니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의 감정을 거슬리게 하지 않고 넘어갈까 고민하던 중 저 멀리 한 여인이 눈에 띄었다.

홀과 떨어진 구석진 곳에 서서 두 손을 꼭 모으고 있는 여자는 후하게 평가해도 예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얼굴이었다.

최고급 드레스에 화려한 보석이 무색할 만큼 소탈한 외모의 여자는 바로 리오넬 후작의 부인 마가렛이었다.

후작 부인이라는 엄청난 직위와 달리 마가렛의 위세는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존재감이 없었으면 이런 연회에서도 그녀의 곁에 달라붙은 부인 하나 없었다.

연회에만 들어서면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며 뭇 여인들의 시선을 받는 리오넬 후작과는 딴판이었다.

과거에는 공작에게 정신이 팔려 이들에게 조금도 신경 쓸 새가 없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어찌나 가련한 부인인지.

“처음 보는 분의 춤 실력을 제가 어찌 알 수 있을까요. 함께 오신 파트너가 계시다면 춤추는 모습을 보여 주시겠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리오넬 후작은 조금 당황했다. 다시 한번 청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여인의 마음을 잘 아는 자였다. 한 발짝 물러나서 그녀의 호감을 얻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럼 잘 보아 주십시오.”

샐리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물론 그가 다시 찾아온다고 그의 춤을 받아 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리오넬 후작은 저 멀리 서 있던 부인을 찾아갔다. 마가렛은 상기된 얼굴로 후작의 손을 잡고 홀로 나왔다.

후작과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마가렛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귀까지 물든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샐리는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러나 자신은 그녀만큼 사랑스러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화려하게 꾸민 자신은 무얼 하든 그저 경박하고 천해 보였을 테니. 누구도 그녀가 진짜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겐 끔찍한 일을 시켜 놓고 다른 남자를 보고 있군.”

머리 위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샐리는 고개를 돌렸다. 카시스가 미간을 찡그린 채 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벌써 끝이 났나요?”

“그 여자와의 춤은 한번으로 충분해.”

테이블로 돌아간 엘리제는 미소를 머금고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인들의 중심에 선 그녀는 무슨 이야기 중인지 이따금 난처한 얼굴을 하기도 했다. 이쪽을 흘깃대는 부인들의 얼굴에서 어떤 말을 하고 있을지 대충 예상이 갔다.

카시스는 그 시선을 가리듯 샐리의 앞에 섰다.

“춤은 출 줄 안다고 했었지?”

“네. 부족한 솜씨나마 출 수 있어요.”

“그럼 한 곡 추는 게 좋겠지.”

함께 춤을 추는 것만큼 두 사람의 사이를 증명하기 쉬운 일도 없을 터였다.

샐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시스의 손 위로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이 홀에 들어서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연회를 시작했던 고아한 음악과 달리 분위기를 돋우는 템포가 빠른 곡이 나왔다.

“출 수 있겠나?”

현란한 스텝이 필요한 곡이라 카시스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샐리는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옆으로 트인 치맛자락 사이로 긴 다리가 아름답게 뻗어 나와 유려하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비같은 몸짓으로 카시스의 품으로 왔을 때 그는 아찔함을 느꼈다.

‘또 이 체향…….’

이전의 그 달콤한 체향이 진득하게 그를 자극시켰다. 그러나 잡을 틈도 없이 그녀는 다시 그에게서 떨어졌다. 가차 없이 멀리 떨어지는 그녀가 왜인지 얄미웠다.

카시스의 마음과는 달리 샐리는 순수하게 춤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전생에 귀족들을 상대하기 위한 예법과 춤을 같이 배웠다. 예법을 배우는 것은 끔찍했지만 춤은 제법 그녀의 취향에 맞았다.

에스테반 공작의 첩이 된 후에는 귀부인들처럼 정숙하게 춤을 춰야 한다는 압박감에 잠시 춤에 대한 즐거움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그녀는 춤추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새빨간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휘날렸다. 사소하게 틀리는 동작은 무시한 채 시원하게 움직이는 몸놀림은 귀족들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엘리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많은 이들이 멍하니 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곁에서 위로해 주며 샐리를 욕하던 이들 조차.

빼앗긴 시선 속에 엘리제의 표정이 처음으로 싸늘해졌다.

화려했던 연회가 끝나고 에스테반 저택은 평소의 고요를 되찾았다. 오늘 하루 제국 사교계의 관심을 받았던 세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카시스는 긴 다리를 꼬고 나른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무언가로 가득 차면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오늘의 그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 방금 본 것처럼 그녀가 선명히 기억났다.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과 반짝이던 금색 눈동자.

눈을 감아도 생각나는 모습에 카시스는 살짝 짜증이 났다. 그는 이런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밤바람을 좀 쐬고 와야겠군.’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가 복도를 걷다가 에반과 마주쳤다. 에반은 와인 한 병을 올린 쟁반을 들고 있었다.

집사인 에반에게 이런 사사로운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카시스를 제외하고는 저택에 단 두 사람, 샐리와 엘리제였다.

“누구의 명이지?”

“샐리 님께서 와인을 한잔하고 싶다고 하셔서 가져다 드리는 길입니다.”

카시스는 술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바람을 쐬기 위해 나온 것이었고, 그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한 당사자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그랬다.

샐리는 두 팔과 두 다리를 쫙 뻗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화장을 지우고 드레스를 벗은 채 편안한 차림을 한 그녀의 얼굴은 기분 좋아 보였다.

샐리는 오늘 귀부인처럼 보이려고 억지스러운 노력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취향대로 드레스를 고르고 화장을 했다.

예법에 급급해 딱딱하게 사람을 대했던 예전과는 달리 편하게 사람들을 대했다. 가벼운 농담을 하기도 했다. 정숙한 귀부인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오늘 스스로의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샐리는 침대에서 일어서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들어오세요.”

문을 연 사람은 에반이 아니었다. 카시스가 에반이 들고 있어야 할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샐리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이런 밤중에 해야 될 정도로 중요한 말이 무엇일까. 샐리는 고민해 봤지만 무슨 내용일지 알 수가 없었다. 샐리는 카시스의 손에 있던 와인을 가리켰다.

“마시면서 들어도 될까요?”

“그래.”

샐리는 카시스에게 건네받은 와인을 잔에 따랐다. 쪼르르, 와인과 함께 진한 과일향이 터져 나왔다.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니 진한 향만큼 깊은 맛이었다.

탁한 맛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질 좋은 와인의 맛이 샐리의 마른 혀를 기분 좋게 적셔 주었다.

“술을 좋아하나?”

“마시고 싶은 날에는 즐기는 편이죠.”

샐리는 손에 들린 잔을 흔들었다. 투명한 잔에 비친 붉은색 와인이 참방 튀어 올랐다.

“아까는 너무 긴장해서 전혀 못 마셨거든요.”

“의외로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연회장에서의 샐리는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그녀가 며칠 전까지 더러운 몰골의 하녀였다는 걸 아무도 믿지 못하리라.

카시스조차도 그녀의 이전 모습이 기억에서 흐릿해질 정도였다.

“동물원 원숭이도 그런 식으로 보진 않을 거예요. 제가 어떤 여자인지, 책잡힐 실수는 하지 않는지 노골적으로 보던데요. 그런 시선 속에서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겠어요.”

수많은 이들이 샐리를 주시했다. 호기심, 거부감, 경멸, 감탄, 저마다 다른 감정을 가진 시선들이 샐리를 가득 둘러쌌다. 그 속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당당히 서 있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카시스는 샐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답지 않게 말을 골랐다.

“줄 것이 있는데.”

이미 카시스는 오늘을 위해 샐리에게 많은 것을 준비해 주었다. 최고급 드레스에 고가의 보석들.

그런 그가 새삼 줄 것이 있다는 것이 무엇일지 감이 오지 않아 샐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시스가 내민 것은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이었다.

“이게 뭐죠?”

“너는 오늘 정말 훌륭했어. 그것에 대한 보상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샐리의 얼굴은 조금 씁쓸해졌다. 그는 제대로 일을 해내는 사람에게 후한 보상을 해 주는 사람이었다.

샐리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았으나 굳이 거절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아 상자를 받았다.

작은 크기의 상자는 무척 가벼웠다. 기껏해야 반지나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일 것이라 생각하며 무미건조한 손길로 포장을 뜯었다.

그런데 포장지 안에서 나온 것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건…….”

샐리가 눈을 빛내며 상자를 들어 올렸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마법으로 만든 것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새하얀 장미꽃 초콜릿이었었다.

수도에서 가장 이름 높은 디저트숍인 슈아드렌의 인기상품인 이 화이트 초콜릿은 놀랄 정도로 섬세한 장미 모양과 입에서 살살 녹는 달콤함으로 유명했다.

수도의 여인들 사이에선 죽기 전에 꼭 먹어 봐야 할 디저트로 꼽히기도 한 제품이기도 했다.

샐리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초콜릿과 카시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초콜릿과 에스테반 공작이라니. 세상에 이토록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 수가.

“어떻게 이런 걸 사실 생각을 하신 거예요?”

“네가 말하지 않았나. 달콤함은 최고의 보상이라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에게 이해나 공감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에스테반 공작은 이런 작은 초콜릿 따위보다 금화나 보석을 주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공작 저하께 이런 걸 받다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자신의 일을 잘해 낸 이에게 알맞은 보상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샐리의 시선을 느끼고는 에스테반도 조금 어색한 듯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샐리는 초콜릿을 매만졌다. 차가운 보석에는 없는 달콤한 향기가 마음에 들었다. 취기가 살짝 오른 샐리는 평소와는 달리 솔직하게 반응했다.

“이 선물은 꽤 마음에 드네요.”

눈을 접는 샐리의 얼굴에 카시스의 시선이 멈추었다.

달빛 아래의 그녀는 낮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민낯이라 콕 찍은 것 같은 눈 밑 점이 더욱 잘 보였다.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매끈한 목과 귀는 금욕적으로 느껴졌다. 얇은 드레스 아래로 드러난 쇄골과 다리가 아슬아슬했다.

카시스는 묘한 열기가 올라오는 느낌에 슬쩍 시선을 돌렸다. 계속 바라보았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의 스위치가 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샐리는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 취기가 올랐고 카시스는 여느 때와는 달리 부드러워 보였다. 샐리는 전생에서부터 미치도록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궁금한 것이 있어요.”

“뭐지?”

“저하께서는 마님께 정말 아무런 감정이 없나요?”

성정이 좀 잔혹하다고 싫어한다고 하기엔 엘리제는 너무나 완벽했다. 외양도, 몸짓도. 어떤 사내도 그녀를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그는 정말 그녀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없는 걸까? 과거에도 몇 번이나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릴까 봐,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은밀한 감정이 숨어 있을까 봐.

“전혀.”

샐리에게는 전생에서부터 가져온 심각한 질문이었는데 대답은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차가운 대답이었다.

“저하의 하나뿐인 아내인 데도요?”

“아내라.”

카시스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로지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이 탐나 결혼한 여자를 아내로 인정해야 하나?”

“귀족가의 여인이 그 정도 욕심을 가지는 건 특이한 일도 아닐 텐데요.”

샐리의 말대로 귀족으로 태어난 여자들은 결혼할 상대의 가문을 중요시한다. 귀족 여성이 지위를 올리려면 더 높은 신분의 남자와 혼인하는 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제국의 명문가 ‘에스테반’라는 이름은 많은 여인들에게 천상의 열매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여인들이 에스테반가의 젊은 후계자에게 달려들었다. 그중에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매달린 이도 있고, 거짓말로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한 여인도 있었다.

짜증이 치솟을 만큼 불쾌한 적이 여러 번이었지만 그녀들에게 분노한 적은 없었다.

귀족의 세상에서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들은 인간의 선을 넘지 않았지.’

카시스는 답답한지 셔츠의 목깃을 풀어 헤쳤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야.”

그저 단순히 악독한 처를 싫어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속내에는 더 깊은 감정이 도사리는 것 같았다.

언제나 동요가 없었던 남색 눈동자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단순히 ‘미움’으로는 부족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의 역린을 건드린 건가 싶어 샐리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깊게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관심도 없었다.

향기로운 향초가 켜진 공작 부인의 방에서 철썩 하고 가차 없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엘리제가 감흥 없는 눈빛으로 회초리를 휘갈겼다.

철썩.

회초리는 마사의 등으로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날개 뼈가 드러난 마른 몸 위로 새빨간 자국이 잔인하게 새겨졌다.

몇 번이나 계속된 폭행 속에 하얀 등은 새빨간 선이 사방으로 그어져 있었다. 상처에서는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지만 엘리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마사, 내가 누구지?”

“엘리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십니다.”

“그래. 나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야.”

철썩.

“그따위 계집애와 비교될 수조차 없는. 그렇지?”

철썩.

마사는 비명 소리를 내지도 못해 그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계집을 보고 있었을까?”

답을 내지 않으면 고통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신음 소리를 이 사이로 숨기며 마사가 힘겹게 대답했다.

“공작 저하께서 아끼는 첩이라고 하니 그런 것일 뿐 그, 그게 아니라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을 계집입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엘리제의 손이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 사파이어를 닮은 새파란 눈동자가 파란 안광을 내비쳤다.

“그래. 그 계집이 주목을 받은 것은 에스테반이란 이름 덕분이지.”

정답을 찾아내자 여린 몸에 가득 차 있던 분노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눈에 거슬리기 짝이 없는 계집은 결국 에스테반이라는 성도 쓰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다. 공작의 관심이 사라지면 그대로 사라질 먼지 같은 존재.

사교계는 여자들의 세계였다. 아무리 에스테반 공작이 대단한들 쉽게 껴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엘리제 에스테반이었다.

“마사, 오늘 파티에 온 여인들에게 와 주어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렴.”

편지의 내용은 뭐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편지 봉투에 적힌 에스테반 공작가의 문양과 엘리제라는 이름이었다. 그것만으로 그들은 알 것이다.

중요한 것이 누구인지.

자신들이 배척해야 할 것이 누구인지, 아주 잘.

* * *

며칠 전의 화려한 파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에스테반 저택은 고요했다. 그러나 작은 별채는 본채와는 달리 복작거렸다. 드디어 방문을 열고 나온 별채의 주인, 샐리 때문이었다.

샐리는 햇볕이 좋은 날이면 종종 별채의 앞마당에서 티타임을 가지곤 했다.

반짝이는 햇볕 아래 앉아 있는 샐리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이들은 별채의 하녀들이었다.

그녀들은 대놓고 쳐다볼 수는 없어 빗자루를 들고 주변을 서성이거나, 괜히 짐을 나르는 척하며 샐리를 슬쩍 쳐다보며 지나치곤 했다.

하녀 한 명도 그렇게 샐리를 몰래 보며 지나가는데 눈이 마주쳐 버렸다.

헉 하고 놀란 하녀의 눈이 커졌지만 샐리는 여유 있게 미소 지었다.

“항상 수고가 많아요.”

그녀의 인사에 하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한 차 향기를 남기고 샐리가 사라진 자리에선 하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세상에! 봤어?! 봤어?”

“어쩜 저렇게 생겼지?! 같은 인간이 맞느냐고!”

“코르셋으로 암만 졸라도 저런 허리가 가능해?!”

그리고 멀리서 하녀들을 바라본 데이지가 빠른 걸음으로 샐리를 따라 들어갔다.

샐리는 뒤따라온 데이지가 평소 같지 않게 입술이 튀어나온 것을 보았다.

“표정이 왜 그러니?”

“……샐리 님은 요즘 너무 인기가 많아요.”

데이지의 말에 샐리가 농담을 들은 것처럼 풋 하고 웃었다.

“내가?”

“고용인들 사이에서 난리예요. 샐리 님의 신분이 어쩌니 하며 수군거렸을 때는 언제고. 저보고 자리를 바꾸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물론 절대 바꾸지 않을 거지만요.”

데이지가 그녀답지 않게 구시렁거렸다. 평소라면 조용히 속마음을 숨겼을 데이지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샐리는 꽤 재미있었다.

요즘의 데이지는 제법 그 나이 때의 소녀 같았다. 대저택에서 오래 일해서 억눌려 온 진짜 모습이 때때로 튀어나오는 것이 귀여웠다.

“나는 데이지 네가 좋아. 앞으로도 내 시중은 너에게 부탁할 거야.”

“……헤헤. 제가 괜한 투정을 부린 것 같아요. 저도 샐리 님이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좋기는 해요.”

언제 입을 삐죽거렸냐는 듯 수줍게 웃은 데이지는 상기된 얼굴로 방 정리를 시작했다. 샐리는 능숙한 손길로 일하는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착한 아이야.’

엘리제의 생일 파티가 끝난 후 샐리는 데이지를 저택에서 내보내 줄 셈이었다. 데이지가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한 것을 안 마사의 분노가 언제 미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겁이 많은 데이지라 바로 떠날 줄 알았는데 데이지는 고개를 내저었다.

—샐리 님을 곁에서 모시고 싶어요.

케이크 때문일까 생각했지만 맑은 눈은 그런 장난스런 이유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샐리는 데이지가 진심으로 자신을 모시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전히 샐리의 편이 되어 주는 데이지 덕에 거대한 에스테반 저택의 일상은 외롭지 않았다.

게다가 별채의 하녀들은 대부분 유순하면서도 일은 능숙했다.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문제지.’

샐리는 빈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엘리제의 생일 파티가 끝난 것은 일주일 전. 꽤 시간이 흘렀다.

연회장에서 만난 여인들은 대부분 샐리에게 적대적이었지만 그래도 쫓아오는 시선들이 많았다.

그만큼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으니 누군가는 자신에게 초대장을 보내오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도 보내오지 않았다. 엘리제 에스테반의 이름이 작용한 것이 분명했다.

샐리는 저택의 안주인이 아니어서 파티를 주최할 입장도 아니었다. 이대로 아무도 초대장을 보내오지 않으면 사교계에 입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물론 에스테반 공작과 함께라면 어디든 못 갈 데가 없겠지만…….’

전생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샐리는 카시스의 팔짱을 끼고 어느 곳이든 함께했다.

그녀를 부른 곳이건 부르지 않은 곳이건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사교계에 뛰어들었으니 시선이 싸늘할 수밖에.

‘이번에는 내 이름으로 제대로 초대를 받아 가고 싶어.’

샐리는 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생각에 빠졌다.

‘나를 부를 수밖에 없게 자극을 좀 더 줘 볼까.’

그녀의 눈빛이 장난감을 눈앞에 둔 고양이처럼 빛났다.

* * *

제국을 호령한다는 에스테반 공작의 일상은 의외로 단조로웠다. 카시스는 언제나처럼 식당에서 혼자 아침을 먹고 완벽하게 단장을 마친 뒤 방을 나섰다.

등 뒤로 에반이 그림자처럼 따랐고 오늘 있을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종이 문을 열면 에스테반 공작가의 문장이 박힌 마차와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마부가 두 손을 모으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의 앞으로 카시스를 호위하는 기사들이 갑옷을 입고 주인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카시스는 허리를 곧게 펴고 마차를 향해 발을 뻗었다.

거기까지는 늘 이어지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저하!”

저쪽 별채에서 드레스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여인을 보는 순간 차분하기 그지없던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연한 레몬빛의 실내용 드레스를 입은 샐리가 아침 햇살 속에서 카시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잘못 본 건가 싶어 카시스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샐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카시스에게 가까이 다가온 샐리는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카시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제대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

늘 샐리를 만나는 건 모든 업무가 끝나고 저택에 돌아온 저녁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샐리의 두 볼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는데 그마저 일부러 화장을 한 것처럼 고와 보였다.

“무슨 일이지?”

카시스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다듬으며 물었다. 샐리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항상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어요. 오늘은 잘 다녀오시라 인사를 하고 싶었답니다.”

“…….”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샐리의 말에 카시스는 내리깐 눈으로 생각했다.

‘또 무슨 계획을 세운 모양이군.’

둘만 있을 때 샐리는 절대 이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건 저 작은 머리 안에 무언가 계획이 있을 때다.

함께 있는 이들이라고는 에반과 마부, 기사들밖에 없는데 뭘 원하는 것일까.

늘 그렇듯 샐리의 생각을 읽는 데 실패한 카시스는 적당히 반응해 주는 것을 택했다.

“이런 인사라면 언제든지…….”

그 순간 샐리가 카시스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자신에게 안기는 줄 알고 카시스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의 너른 품에 안길 새도 없이 샐리는 다시 멀어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주 선명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주름 하나 없는 새하얀 셔츠 깃에 연하게 찍힌 입술 자국이라니.

주위에 있던 과묵한 이들마저 헉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훈련으로 얻은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었다면 카시스도 그들과 같은 표정을 했을 것이다.

샐리는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눈을 내리깔고는 수줍게 말했다.

“아무리 바빠도 저를 잊어버리면 싫어요.”

눈을 흘기며 웃는 샐리의 얼굴은 그야말로 앙큼한 고양이 같았다.

오늘 카시스가 향한 곳은 수도의 귀족 사내들이 모이는 정기적인 모임이었다. 남자들의 사교를 위한 자리기 때문에 가문의 위세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모였다.

수많은 사내들이 모이니 여인들의 사교 파티보다 북적거렸다. 편하게 떠들어 대던 이들은 카시스 에스테반 공작이 등장하는 순간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에스테반의 이름은 특별했다. 압도적인 이름과 더불어 젊은 공작의 아름다운 외모 또한 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단장한 카시스가 등장하면 사내들마저 그의 외모에 감탄을 하거나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평소처럼 ‘오!’ 하고 튀어나오던 감탄사는 ‘엥?’ 하는 본능적인 놀람으로 바뀌었다.

“공작 저하의 셔츠 깃에 저건 뭔가?”

“입술 자국 아닌가.”

“저 에스테반 공작이 셔츠에 입술 자국을 달고 나타났다고?”

귀족 중의 귀족인 그는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새하얀 셔츠 깃에 묻어 있는 것은 여인의 입술 자국이었다.

다른 이가 했다면 계집에 빠진 추잡스러운 부랑자 같을 텐데 완벽하게 관리된 사내가 그런 것을 묻히고 있으니 아주 느낌이 묘했다.

모든 이가 경악스럽게 쳐다보았지만 카시스는 평소처럼 위엄이 넘치기만 했다. 그래서 누구도 그 셔츠 깃에 대해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주 작은 입술 자국 하나가 자리에 모여 있던 귀족 사내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저하는 모르시는 걸까?”

“저렇게 눈 하나 꿈쩍 안 하시는데 알고 저러시겠나.”

“허허. 내 평생 에스테반 공작의 저런 모습을 볼 줄이야.”

“저 입술의 주인은 소문의 그 애첩인 건가.”

살얼음판 같은 사이의 공작 부인일 리는 없으니 분명 요즘 빠져 있다는 애첩이 분명했다.

* * *

에스테반 공작의 셔츠 깃에 찍힌 입술 자국이라는 건 꽤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야깃거리였다.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갔고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은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

그와 함께 샐리의 앞으로 초대장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반응이 있어 다행이야.’

샐리는 안도하며 도착한 초대장을 확인했다.

사교계의 모든 여인이 엘리제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었다. 엘리제를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위세가 대단한 여인도 있었다. 아쉽게도 그런 여인들이 보내온 초대장은 아니었다.

위세 높은 여인의 초대장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작 에스테반의 애첩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샐리에게는 더더욱 초대장을 보낼 리 없었다.

초대장은 모두 엘리제의 눈치를 보지 못할 만큼 정세에 둔하거나 지위가 낮은 이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그들이 샐리를 초대하는 이유는 뻔했다.

‘화제가 되는 나를 초대해 어떻게든 제 이름을 높여 보고 싶은 거겠지.’

가문이 한미한 이들은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런 그녀들에게 샐리는 꽤나 이용하기 좋은 미끼였다.

에스테반의 애첩을 초대한다면 분명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자들이 보내온 초대장이었으니 자세히 살펴보아도 갈 만한 곳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부분이 심하게 인지도가 없거나 평판이 안 좋은 이들이었다. 이런 곳에 갔다가는 자칫 그들과 한 부류로 묶어져 훨씬 안 좋은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 한 초대장이 눈에 들어왔다. 봉투 겉면에는 ‘줄리엣 로즈벨 남작 부인’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줄리엣 로즈벨이라.’

샐리는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전생에 샐리는 전투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교계 활동에 매진했다.

남성이 초대하는 파티건 작위가 하찮은 자들이 초대하는 파티건 닥치는 대로 갔다.

조금이라도 많은 이들에게 카시스의 여자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제법 많은 귀족들을 알고 있었다.

‘아. 그녀구나.’

생각이 났다. 줄리엣 로즈벨 남작 부인. 가문의 이름조차 생소한 한미한 가문의 여인이었다.

사교계에서의 입지도 형편없는 여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가 놀랄 정도로 의욕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높은 신분의 귀부인들에게 어떻게든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귀부인들이 일부러 들리지 않은 척 무시해도 그녀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귀부인들 사이에 위축되어 있던 샐리는 그런 그녀가 무척 신기해 보였다.

‘이곳이라면 제법 괜찮을 것 같아.’

기억하기로 줄리엣은 그리 훌륭한 인품이 아니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줄리엣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중요한 건 그곳에 초대되는 사람들.

줄리엣이라면 분명 샐리를 미끼로 괜찮은 여인들을 끌어모을 것이다. 샐리는 줄리엣의 초대장을 손에 들었다.

이곳이 샐리의 첫 시작이었다.

* * *

줄리엣 로즈벨은 아침부터 꽤 들떠 있었다. 오늘은 자신이 주최하는 티파티가 열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의 티파티는 평소와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이들이 초대에 응했다.

“쿡쿡쿡. 난 정말 머리가 좋아.”

에스테반 공작의 첩을 향한 관심은 엄청났지만 다들 엘리제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그녀에게 초대장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줄리엣은 이럴수록 대담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줄리엣은 에스테반 공작의 첩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그녀에게서 참석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역시. 제아무리 에스테반의 공작의 위세를 업고 있다고 해도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계집이야. 초대장을 보내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는 꼴이라니.’

줄리엣은 오만하게 웃었다. 줄리엣은 그녀가 이번 티파티 때 올 것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 덕에 평소에는 초대장을 보내도 시큰둥했던 이들이 너도나도 오겠다고 난리였다.

주목받는 티파티의 주최자가 된 기분은 그녀를 흥분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제법 냉정하게 초대하는 이들을 골랐다.

“어서 오세요, 세턴 백작 부인.”

덕분에 오늘 줄리엣의 티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평소와는 달리 괜찮은 가문의 여인들이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여인들을 향해 줄리엣은 우아하게 인사했다.

“줄리엣, 그분은 왔어요?”

오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이리저리 둘러보는 여인은 로렌스 자작가의 딸 에이미였다.

어린 시절부터 줄리엣과 꽤 가깝게 지낸 사이로 동그란 얼굴에 순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언니들이 많은 탓에 아직까지도 결혼을 못한 늦된 미혼 아가씨이기도 했다.

“에이미 영애, 품위를 지키셔야죠. 그리고 저는 로즈벨 부인으로 불러 달라고 말했을 텐데요.”

같은 나이인 데도 결혼을 한 후로 줄리엣은 부쩍 어른처럼 굴었다. 에이미는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던지라 그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아직 안 온 거예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줄리엣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에이미가 안달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분이요. 에스테반 공작 저하의 첩!”

“아아. 샐리요?”

“어머나. 그분 이름이 샐리예요?”

소문 속 인물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에이미가 흥분된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줄리엣, 그렇게 호칭도 붙이지 않고 불러도 되는 거예요?”

“고작 첩에게 호칭이 어디 있어요?”

줄리엣의 말대로 황실의 여자가 아닌 이상 첩에게 신분은 없다. 고작해야 저택 내에서 하인들에게 존칭을 받는 정도가 다였다.

“그래도 좀 무례해 보이는데.”

걱정스레 말하는 에이미를 향해 줄리엣은 코웃음을 쳤다.

“무례할 게 뭐 있어요. 신분도 없는 데다 나이도 우리보다 어린 여잔데.”

“그렇지만…….”

“에이미, 뭐에 겁먹은 거예요. 제아무리 에스테반 저하의 첩이래도 나이 어린 여자애일 뿐이라고요. 할 줄 아는 거라곤 공작 저하의 뒤에 숨는 것밖엔 없을걸요. 실제로 보면 대단치도 않을 거라고요.”

반은 진심이었다. 고작 하녀였던 여자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줄리엣은 호감으로 그녀를 초대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티파티를 위한 자극제로 초대한 것이고, 직접 대면해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첩이니 뭐니 해도 밑바닥에서 사람을 모시던 어린 여자애라면 뻔했다. 그네들은 조금만 위엄을 보여도 금방 무릎을 꿇고 조아린다.

평생에 걸쳐 각인된 것이 공작의 첩으로 갑자기 신분 상승을 했다고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에이미 영애?”

이야기를 떠벌리던 줄리엣은 에이미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동그란 눈을 평소보다 더 동그랗게 뜨고는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며 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놀란 것을 보는 것 같은 얼굴에 줄리엣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저쪽에서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웨이브진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멀리서도 시선을 잡아끌었다.

줄리엣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금빛 눈동자가 곱게 접히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즘 제국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 샐리였다.

샐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두 여인의 표정은 점점 달라졌다.

에이미는 흥분을 가리지 못해 볼이 붉어졌고 줄리엣은 당혹스러움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여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샐리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로즈벨 부인,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스테반가에서 온 샐리라고 해요.”

샐리가 붉은 입술을 보기 좋게 올리며 인사했다. 줄리엣은 저도 모르게 조금 뒷걸음질을 쳤다.

‘뒷골목에서 일하던 하녀라고 들었는데.’

화려한 외양만이 아니라 내리깐 눈동자와 곧은 걸음걸이에서는 그녀의 천한 신분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줄리엣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래요.”

일부러 쌀쌀맞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형식적인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샐리의 모습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하녀 신분의 첩을 지그시 눌러 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예상했던 모습이라 샐리는 놀랍지도 않았다. 문득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내리니 줄리엣의 옆에 있던 아담한 여인이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로렌스 자작가의 에이미라고 해요.”

“네, 반갑습니다.”

샐리는 오히려 그녀의 눈빛에 당황했다. 수많은 귀족들을 만나 보았지만 저런 눈빛은 처음 보았다. 질투나 멸시와는 다른 순수한 감탄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샐리 님은 키가 정말 크시네요.”

평균보다 키가 큰 편인 샐리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어서 오늘은 눈에 띄게 컸다.

단순히 키만 컸다면 둔해 보였을 테지만, 가는 목과 잘록한 허리까지 우아한 선을 만드는 몸매는 꼭 신화 속에 나오는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저보다 어리다고 들었는데, 어쩜. 키가 크셔서 그런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아주 우아하고 성숙해 보여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에이미를 향해 줄리엣이 이죽거렸다.

“그러게요. 제 나이보다 들어 보이니 안타깝네요. 아직 어린 나이신데.”

“줄리엣, 난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에요!”

줄리엣은 아까의 당황스러움을 벗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샐리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살짝 올렸다.

그 부분이 자존심 상해 치마 속에 숨겨진 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잘 그려진 눈썹을 최대한 들어 올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귀족가에서 주최하는 티파티는 오늘이 처음이시겠죠? 잡일이나 하던 하녀였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귀족으로 자란 줄리엣에게 아랫사람 다루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위엄을 담아 말하면 그들은 수치심에 덜덜 떨면서도 한마디 반격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곤 했다. 어떤 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기도 하고, 죄송하다고 빌기도 했다.

“네, 그래서 오늘 아주 기대가 되네요.”

겁은커녕 은은하게 미소까지 짓는 샐리의 얼굴에 줄리엣의 알량한 자존심에 금이 갔다.

여기서 뭐라고 더 쏴야 하는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 함께 공격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옆에 있는 것이라고는 맹하기 그지없는 에이미뿐이니.

줄리엣은 잠시 후퇴하기로 했다. 어차피 티파티는 이제 시작이니까.

지금은 저렇게 고고한 척해도 귀족 여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앉으면 기가 팍 죽을 테지. 그때 자기 처지를 알게 해 주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티파티를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어요. 어서 자리에 앉으시죠.”

줄리엣은 손님을 위한 안내도 하지 않고 에이미만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혼자 남은 샐리는 멀어지는 두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귀엽네.’

엘리제와 매일 마주쳤던 과거 덕분일까.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두 여인의 모습은 웃음만 나올 따름이었다.

그래도 긴장은 늦출 수 없었다. 지금 걸어가는 곳은 만만치 않은 여인들이 한가득 앉아 있는 곳일 테니.

샐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두 여인의 뒤를 따랐다.

이름만 남작일 뿐 인지도나 가문의 위세가 형편없는 로즈벨가의 안주인이 주최하는 티파티.

평소라면 줄리엣이 결혼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여인들 몇 명을 초대하는 소박한 파티가 되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심지어 초대해 달라고 어필해 온 사람까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최대한 많은 이들을 초대해 대규모 티파티를 성공시키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능력도, 돈도 없었다. 인원이 많아지면 아무래도 재정에 부담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줄리엣은 고르고 골라 사교계에서 제법 명망 있는 여인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렇게 오늘의 티파티에는 열다섯 명 정도의 여인들이 함께했다. 줄리엣과 비교하면 가문이나 사교계에서의 위치가 대단한 이들이었다.

정원에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테이블의 앞에는 주최자인 줄리엣이 앉고 그다음부터는 주최자의 권한으로 손님들의 자리를 배치했다.

일반적으로 작위가 높고 가문의 위상이 높은 순대로 자리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저 먼 테이블의 끝이 샐리의 자리였다.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서 다행이네. 덜컥 상석이라도 줄까 봐 걱정했는데.’

샐리는 조금의 불쾌감도 내비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제아무리 기세 높은 에스테반 공작의 첩이라지만 첩은 첩일 뿐.

게다가 샐리의 신분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였다. 그런 샐리에게 상석을 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상석의 자리를 내주었다면 오히려 그녀의 의도를 고민해야 했을 터.

줄리엣은 조용히 자리에 앉는 샐리를 바라보며 속으로 고소해했다.

‘자기 주제는 알고 있구나, 다행히도.’

샐리를 내리눌렀다는 생각이 들자 줄리엣은 긴장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손님들이 다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그녀가 일어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맨 앞자리에 앉은 이들은 그레이스 백작 부인, 새턴 백작 부인, 아드리아나 자작 영애 등 우아함이 몸에 밴 여인들이었다.

사교계를 뒤흔들 만큼 위세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여인들이었다.

그런 여인들 앞에 앉아 주목을 받자니 줄리엣의 기분은 한껏 고양되었다. 오늘이 바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기회라는 생각에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오늘의 티파티를 주최하는 줄리엣 로즈벨입니다. 이렇게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향긋한 차와 다과를 준비했으니 편히 즐겨 주시길 바라요.”

티파티가 시작되었다.

티파티는 매끄럽게 흘러갔다. 줄리엣이 최고의 티파티를 열겠다는 일념으로 무리해서 준비한 고급 차와 디저트는 제법 괜찮았다.

티파티는 주최자에 따라 분위기가 결정되는데, 줄리엣은 최선을 다해 대화를 이끌어 갔다. 필사적인 모습이 좀 부담스럽긴 했으나 그럭저럭 좋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어차피 그녀들의 관심사는 주최자가 아니었다. 바로 구석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샐리였다.

주최자인 줄리엣을 포함하여 누구도 샐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에 샐리는 아직 한마디 운도 떼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먼저 나서 봤자 무시당하기 딱 좋은 것을 알기에 샐리는 조용히 그녀들의 대화를 들었다.

줄리엣은 주로 아부 섞인 칭찬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세턴 백작 부인의 드레스가 참 아름다워요. 마리에띠에서 구입하신 건가요?”

“맞아요.”

“역시나. 올해 마리에띠에서 선보인 드레스는 정말 최고죠.”

세턴만이 아니라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느낌의 옷들을 입고 있었다.

마리에띠에서 선보인 하늘거리는 파스텔 색상의 쉬폰 드레스. 상체는 팔까지 덮는 긴 소매로 가는 목만 살짝 드러내어 정숙함을 강조하고 얇고 하늘거리는 쉬폰 소재의 풍성한 치마로 청순한 느낌을 극대화시키는 드레스였다.

그리고 이 드레스는 사교계의 동경과 흠모를 받는 엘리제 에스테반이 유행시킨 스타일이기도 하다.

줄리엣 또한 유행에 따라 마리에띠의 쉬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재정 상태로는 꽤 무리해서 구입한 드레스였다.

그녀는 절대적인 방어를 자랑하는 갑옷을 입은 것처럼 오만한 얼굴을 했다.

“귀족 여인이라면 마리에띠 드레스를 모를 수가 없는데 말이죠. 요즘 유행하는 옷이 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나 봐요, 샐리.”

조곤조곤 대화가 이루어지던 테이블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줄리엣이 처음으로 샐리를 대화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것도 명백한 조소를 깔고.

모두의 시선이 끝자리에 앉아 있는 샐리에게 닿았다. 구석진 자리임에도 샐리가 시선을 잡아끌었던 건 에스테반 공작의 첩이라는 이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유행하는 드레스와 전혀 다른 차림과 화장을 하고 있었다.

큐빅이 박힌 진한 남색 드레스는 별다른 장식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심플한 스타일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이다.

무엇보다 목을 사선으로 감싼 후 어깨와 등이 노출된 홀터넥 스타일은 귀족들은 입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유행을 모르면 최대한 노력이라도 했어야지요. 드레스가 정말 민망하네요.”

남세스럽다는 듯 눈썹을 찡그린 줄리엣이 아, 하고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샐리는 유곽의 하녀로 일했다고 했죠. 혹시 창부의 드레스를 따라 입은 건가요?”

호들갑스러운 줄리엣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꼭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입은 옷 같네요.”

“아무리 첩의 신분이래도 에스테반 공작의 여자가 저런 모습으로 다니는 건 좀 부끄럽지 않나요?”

애초에 샐리에게 호감을 가져 모인 이들이 아니었다. 단순히 호기심을 가져 찾아온 이들은 자극적인 대화에 신나게 끼어들기 시작했다.

줄리엣은 완전히 기세등등한 얼굴이 되었다.

“그쪽 여자들은 그렇게 자기 몸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는 모양인데 귀족가에서는 아주 부끄러운 짓이에요. 샐리를 위해 하는 말이니 알아 두세요.”

샐리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줄리엣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명한 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줄리엣은 흠칫 놀랐다. 모두가 자신의 편이니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무슨 소리든 해 봐, 콧대를 눌러 줄 테니.’

첫 티파티에서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인다면 천한 신분인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두근대는 가슴으로 샐리를 바라보자 샐리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서 카모라 님께 친히 부탁하신 드레스인데 귀부인들 눈에는 많이 부족해 보이나 봐요.”

“……?!”

순간 줄리엣과 여인들이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디자이너 카모라. 수도를 넘어 전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다.

귀족 영애로 태어나 평범한 길을 거부하고 디자이너의 길을 택한 그녀는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박음질 하나도 남에게 맡기는 것이 싫어 혼자 만들기 때문에 일 년에 만드는 드레스도 많지 않았다.

그렇게 만든 그녀의 드레스는 그 자체로 예술품처럼 귀하게 여겨졌다. 그만큼 가격도 만만치 않았기에 이 자리에 있는 여인들은 차마 엄두도 못낼 드레스였다.

“카모라 님께서 제 몸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목선부터 이어지는 어깨선이니 그곳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만든 거라 하셨어요. 저 같은 체형이 지금 유행하는 쉬폰 드레스를 입으면 인형 옷을 억지로 구겨 입은 것 같을 거라고요.”

샐리는 시원하게 목이 드러난 부분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드레스를 가장 아름답게 입는 방법은 무작정 유행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디자인을 찾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로즈벨 부인의 생각은 어떠세요?”

샐리의 생각대로 줄리엣은 바로 반격하지 못했다. 그녀처럼 상하 관계가 철저한 여인에게 카모라의 이름은 쉬이 반격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리엣은 눈매를 앙칼지게 만들고는 말했다.

“아무리 카모라 님이 만든 드레스라도 격식은 차렸어야죠. 귀부인들의 티파티에 그런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온 것을 부끄러워 할 눈치도 없나요?!”

“네.”

샐리는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는 듯 아주 당연하게 대답한했다. 그녀는 줄리엣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내 몸의 아름다운 곳을 뽐내는 게 왜 부끄러운 짓인지 모르겠어요. 꼭 어릿광대처럼 무작정 남을 따라 하는 게 더 부끄러울 것 같은데요.”

샐리의 말에 줄리엣과 여인들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저 유행이기 때문에, 유명한 엘리제 에스테반이 입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 드레스를 입었다.

이 드레스를 선택하는 데 자신과 잘 어울리는가는 그녀들의 고민 사항이 아니었다.

여인들은 수치심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정곡을 찔린 탓에 수치심을 느꼈고, 감히 미천한 하녀 출신 주제에 저따위 말을 입 밖에 내뱉는 것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바닥을 보며 시선을 헤매던 여인들의 눈빛이 점점 표독스럽게 바뀌면서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이대로 샐리가 한마디라도 더 하면 누구라도 그녀를 눌러 버릴 기세였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 에이미만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세요, 샐리 님.’

샐리는 선을 넘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여인들 중 저런 말을 그냥 넘어갈 만큼 허술한 자는 없었다.

평민 출신의 여자 하나 정도 몸이 상할 만큼 매타작을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샐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여는 것을보며 에이미는 끔찍한 심정에 눈을 꾹 감았다.

“그런 의미로 여기 계신 부인들께서는 정말 훌륭하시네요.”

방긋이 웃으며 샐리가 감탄 어린 눈빛으로 저 멀리 상석에 앉아 있는 그레이스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레이스 부인께서 손에 끼신 반지는 류니엘에서 만든 것이죠?”

방금 전까지 싸늘하게 굳어 있던 그레이스는 어느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곳을 알아요?”

류니엘은 그녀가 결혼 전부터 좋아했던 작은 숍이었다.

“류니엘은 유명하진 않지만 세공 안목이 뛰어난 분들이 찾는 솜씨 좋은 곳이죠. 특이하게도 모든 액세서리를 백합 문양으로 디자인하는 곳이라 한눈에 알아보았어요.”

“눈썰미가 좋군요.”

“류니엘에서는 알이 큰 보석은 사용하지 않고 작은 큐빅만 사용해서 아주 섬세하게 백합 문양을 만들죠. 점잖으면서도 청순하신 백작 부인과 정말 잘 어울려요.”

“어머나.”

그레이스가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미소 짓고 말았다. 샐리는 그 옆에서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세턴 백작 부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세턴 부인께서 오늘 바른 립스틱은 어느 제품인가요? 색상이 정말 예뻐서 아까부터 여쭤보고 싶었어요.”

“로즈마리 숍의 신상 립스틱이에요. 루비 더 퀸이라는 제품이에요.”

탐탁지 않았지만 상세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세턴이 아주 고심해서 고른 립스틱이었기 때문이다.

“정말요? 그 제품인지 몰랐어요. 제가 발랐을 땐 너무 색이 과하다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세턴 부인께서 바르시니 아주 화사해요. 부인께서 아주 정열적이신 분인 것이 느껴져요.”

무뚝뚝한 세턴의 얼굴은 그레이스만큼 풀어지진 않았으나 광대가 올라갈 듯 말 듯 움직였다.

내성적인 세턴은 검정색 머리카락과 진한 피부색으로 칙칙한 분위기가 고민이었다. 그래서 립스틱만큼은 강렬한 색을 고르곤 했는데 저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다음부터 차례대로 샐리의 아주 섬세한, 예상치도 못한 칭찬이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 자기 차례에 무슨 말을 듣게 될까 기다리게 될 정도였다.

엄청나게 반짝이는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던 에이미도 칭찬을 들었다.

“에이미 영애의 머리를 장식한 리본은 혹시 직접 만드신 건가요?”

샐리의 말대로 에이미가 직접 만든 리본이었다. 에이미는 사실 아주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화려한 원색의 아기자기한 패턴이 들어간 옷을 좋아했지만 언니들로부터 어린애나 좋아할 것을 좋아한다고 타박받곤 했다.

이런 외부 행사에는 반강제적으로 언니들이 준비한 드레스를 입어야 했는데 리본만큼은 겨우 취향을 사수한 것이다.

“숍에서 파는 리본은 무늬 없는 벨벳으로 만든 게 대부분인데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했어요. 도트 패턴을 넣다니 정말 독특하고 귀엽네요. 저도 한번 해 보고 싶을 정도예요.”

“샐리 님 것도 만들어 드릴게요!”

수백 개를 만들 것 같은 기세로 에이미는 힘차게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샐리와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아드리아나 영애에게까지 칭찬이 이어졌다.

“아드리아나 영애의 옆에 있으니 달콤한 향이 나서 참 기분이 좋았어요. 이 향수는 오뜨랑 리볼레 맞죠? 앞으로 이 향기를 맡으면 영애가 기억날 것 같아요.”

그 말에 아드리아나는 수줍게 얼굴을 물들였다.

여인들은 샐리의 말 하나하나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아부뿐이었다면 그녀들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을 것이다.

샐리는 엄청난 눈썰미로 그녀들의 매력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분위기는 아주 이상해져 있었다. 적어도 줄리엣의 입장에선 그랬다.

“샐리 님, 줄리엣을 빼먹었어요.”

줄리엣이 고약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자신을 빼먹어서 심술 난 것인 줄 착각한 에이미가 슬며시 말했다.

“로즈벨 부인.”

빤히 그녀를 바라보던 샐리가 ‘아!’ 하고 무언가를 발견한 듯 박수를 쳤다.

“누군가 자꾸 생각난다 했더니 엘리제 마님과 똑같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요.”

줄리엣의 얼굴은 험악하게 구겨지고 말았다. 사교계에서 추앙받는 엘리제를 따라 한 줄리엣을 비꼰 것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누군가 ‘쿡’ 하고 비웃는 소리까지 들렸다.

‘지들도 엘리제 에스테반을 따라 한 주제에!’

어느새 줄리엣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못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 후 티파티는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해졌다. 샐리가 물꼬를 튼 덕에 여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와 아이템을 이야기하기에 바빴다.

그 주제가 보통의 티파티 때라면 빤히 나올 만한 유행하는 패션이나 브랜드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화는 무척 다채로웠고, 여인들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차오에서 온 외국인이 숍을 차렸다는데 아시는 분 있나요?”

“그런 곳이 있어요?”

그리고 대화의 중심에는 샐리가 있었다.

“‘온’을 말씀하시는 거죠?”

“샐리, 그곳을 아나요?”

“네. 소문을 듣고 궁금해 찾아가 보았어요. 작은 숍인데도 정말 인상 깊던걸요. 드레스 디자인이 제국과는 완전히 달라요. 레이스나 리본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고 심플한 스타일인데 아주 신비로워 보였어요.”

샐리의 해박한 지식에 여인들은 눈을 빛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주최자인 줄리엣은 대화에 끼지 못한 지 오래였다.

뭐라도 끼어들고 싶었지만 줄리엣은 그녀들이 말하는 브랜드 따위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아는 이야기인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티파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어머나.”

여인들이 놀란 눈빛으로 입을 가렸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티파티에 등장한 것이다.

“부인들의 자리에 실례합니다.”

에스테반 공작이었다. 여인들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은발의 미남자를 바라보았다.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면 사교 파티에도 거의 나오지 않는 그가 이런 작은 티파티에 나타나다니.

평소라면 그와 얼굴을 대면할 수 없는 지위의 여인들이었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푸른 장미꽃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장미꽃을 든 남자는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아기자기하게 차려져 있는 디저트와 찻잔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그는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한 여인의 앞에 섰다.

“이때쯤 끝날 것 같아서 데리러 왔는데 방해를 한 건가?”

샐리는 누구보다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첩으로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며칠 전 그에게 로즈벨가의 티파티에 참석한다고 이야기는 했다. 그는 알았다며 샐리에게 카모라의 최고급 드레스를 선물해 주었다.

—에스테반의 애첩이라는 좋은 증거가 될 테지.

그의 말대로 남자가 선물해 주는 드레스만큼 그의 애정을 자랑하기 좋은 것은 없다.

샐리는 카시스가 생각보다 능동적으로 이 계획에 동참하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샐리는 하나 더 부탁을 했다.

—티파티 때 꽃을 한 아름 보내 주시겠어요?

—드레스로 애정을 나타내기에 부족한가?

—충분해요. 꽃은 제가 아니라 부인들에게 주시면 돼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무슨 해괴한 짓이냐는 카시스의 표정에 샐리는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뇌물이죠. 내 여자 좀 잘 좀 봐 달라는.

카시스는 영 탐탁지 않아 보였지만 알았다고 대답을 하긴 했다. 그래서 샐리는 티파티 중 장미꽃이 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장미꽃의 배달원이 그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만.

“표정이 영 이상하군.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싸늘해진 카시스의 목소리에 그제야 샐리는 정신을 차렸다. 카시스의 눈빛에 저 혼자 찔린 줄리엣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요. 모두 우아하고 인자하신 분들이라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다행이군.”

“여기까진 왜 오신 거예요? 제가 실수라도 할까 못 미더우셨던 거죠?”

샐리는 일부러 입술을 내밀고는 애교스럽게 말했다.

“잘 아는군.”

카시스는 사나운 눈매를 풀고는 부드럽게 샐리를 바라보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로 손을 얹은 샐리는 손에 든 부채를 우아하게 접으며 자리에 일어섰다.

따사로운 햇빛 아래 손을 맞잡고 서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여인들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로즈벨 부인.”

카시스의 목소리에 얼음처럼 굳어 있던 줄리엣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엣?”

저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는데 나를 왜?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가득 휘젓는데 카시스가 그녀에게 장미 꽃다발을 건넸다.

건조한 손길이었음에도 그에게 꽃을 건네받는 순간 줄리엣은 한순간에 잡생각은 날아가고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이, 이건 왜…….”

“샐리를 파티에 초대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제, 제가 받기엔 너무 큰…….”

그녀의 황홀해하는 얼굴에 카시스는 미간을 찌푸리려다 참았다.

“걱정 마십시오. 참석한 모든 이들을 위한 선물이니.”

그의 말대로 장미꽃은 다발이 아니라 한 송이씩 리본이 묶여 있었다. 그의 의도를 안 줄리엣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했으나 수치심을 숨기지 못한 채 줄리엣은 어색한 손놀림으로 여인들에게 장미꽃을 한 송이씩 건넸다. 푸른 장미꽃을 받은 여인들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푸른 장미라니 정말 독특하네요. 정말 아름다워요.”

“잘 받을게요, 공작 저하.”

게다가 이 장미꽃은 에스테반 공작이 손수 준비해 온 것이다.

여인들 중에는 한때 에스테반 공작을 마음에 담았던 이도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제국에서 손꼽히는 미남이 주는 꽃은 특별했다.

흡족한 표정으로 장미꽃을 든 여인들을 향해 샐리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에스테반 공작의 첩을 가까이 하면 에스테반의 호의가 따라온다. 이보다 더 달콤한 대가는 없겠지.’

장미꽃 한 송이의 파급력은 엄청날 것이며 자신의 좋은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샐리는 카시스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여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실례해요. 먼저 자리를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장미꽃의 효과는 굉장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끝날 무렵인 걸요. 가 보세요.”

“그래요. 저하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방금 전까지 샐리와 좋은 분위기를 만들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샐리 개인에 대한 호감.

에스테반 공작의 첩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순간 적대감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부인들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럼 가지.”

“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로즈벨 부인.”

마무리 인사까지 정중하게 마친 샐리는 카시스의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 여인들은 흥분된 얼굴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세상에. 에스테반 공작 저하께서 이런 자리에 와서 꽃까지 선물해 주다니요.”

“잠깐 빠진 애첩을 대하는 수준이 아니던데요.”

“어머머. 그럼 그 에스테반 공작이 사랑에라도 빠졌단 말이에요?”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예요. 전 공작 저하의 그런 얼굴은 처음 봤어요!”

에스테반 공작이 원치 않은 결혼을 한 것은 귀족들 사이에 유명한 이야기였다.

부인인 엘리제와 함께 있을 때는 남보다 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던가. 그랬던 그가 첩을 들였다.

별 소문이 다 돌았다. 아내와 관계하지 않는 그가 밤 상대를 구한 것이라는 둥 마녀가 그를 홀렸다는 둥 엘리제가 그에게 첩을 만들어 주었다는 둥 별 해괴한 소문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본 카시스와 샐리의 모습은 생각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샐리는 생각처럼 경박하지도 무식하지도 않았다. 대화를 나누기에 훌륭한 상대였다. 예법도 나무랄 데 없었고 화술도 능숙했다.

무엇보다 그런 샐리를 대하는 카시스의 모습은 아주 정중했다. 절대 잠시 데리고 놀 여자를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샐리에 대한 평가는 단 한 번의 티파티로 인해 바뀌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참석한 여인들에게만큼은 아주 확실하게.

등 뒤로 들리는 여인들의 소란스러움을 듣지 못한 척, 샐리와 카시스는 다정히 팔짱을 끼고 걸었다. 샐리는 카시스를 향해 미소 지으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직도 우리를 보고 있어요.”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서 나는 달콤한 체향에 카시스는 아찔해졌다. 그녀는 한마디 말을 속삭이고는 다시 멀어졌다.

샐리는 저택 앞에 서 있는 마차를 탈 때까지도 더할 나위 없이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차 안에 들어서자마자 샐리는 재빨리 그의 팔에 걸고 있던 팔을 뺐다.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감춘 그녀는 그의 반대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둘만의 공간에서 연기를 할 이유는 없는 게 맞지만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멀어진 그녀를 보자 이유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저 모습은 변하지가 않는군.’

첫날부터 그녀는 절대 카시스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다가오기는커녕 가까이 해 보았자 이로울 게 없는 것처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 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 때는 방금 전 같은 분명한 목적이 있을 때 뿐이었다.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그녀의 모습은 매번 그의 기분을 아주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런 카시스의 마음을 모른 채 옷을 정돈하던 샐리의 눈이 커졌다. 샐리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새빨간 장미꽃 한 다발이었다.

“이 꽃은 뭐예요?”

“네 거야.”

“왜요?”

‘정말요?’ 같은 의아함도 아니고 ‘고마워요!’ 같은 기쁨도 아니고 ‘왜요’라니.

그녀는 진심으로 그가 이 꽃을 주는 것에는 아주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저런 표정으로 이유를 묻자 오히려 카시스가 당황했다.

‘그냥.’

이라는 대답은 선물의 이유로는 너무 궁색했다. 일반적인 남녀 사이라면 꽤 근사한 이유였겠지만 두 사람은 그런 사적인 감정과 얽힐 리 없는 사무적인 관계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서비스로 주더군.”

샐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만한 장미꽃을 서비스로 준다고?’

바람이 제법 쌀쌀한 가을이었다. 이런 날씨에 자연적으로 장미꽃은 재배할 수 없어서, 마력석을 이용하여 아주 섬세하게 꽃을 피워야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장미꽃은 엄청난 고가였다. 그런 장미꽃 한 다발을 서비스로 준다니.

‘꽃집 사장이 얼굴에 약한가?’

샐리는 아까 장미 꽃다발을 들고 등장했던 카시스를 바라보던 여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샐리도 시선을 멈출 만큼 그는 장미꽃과 잘 어울렸다.

꽃집 사장이 여자라면 필시 서비스만이 아니라 아까 그 장미꽃들도 무료로 그의 품에 안겼을지도 모른다.

‘뭐.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카시스는 쓸데없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 장난도 싫어하고.

그래서 샐리는 심각한 얼굴을 지우고는 장미꽃을 손에 들고 향기를 맡아 보았다. 아침의 싱그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장미꽃에서는 아주 진한 장미향이 났다.

가까이서 본 장미꽃은 흠집 하나 없는 붉은색 벨벳 드레스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다 문득 과거의 일이 생각났다.

‘그래. 이런 붉은 장미꽃이었지.’

그날도 언제나처럼 에스테반 공작의 첩이라는 이름을 두르고 귀족들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녀를 상대해 주는 건 주로 방탕하게 노는 귀족들뿐이었다.

그들이 권하는 술을 마시며 그들에게 입바른 아부를 잔뜩 해 주었다.

오직 에스테반에 어울리는 여자로 보이고 싶은 욕심에 조금이라도 점수를 따고 싶었기 때문이다.

술에 절어 돌아온 에스테반 저택은 고요했다. 방으로 향하는 길목까지 그녀는 아무도 마주치지 못했다. 술에 취해 들어온 첩 따위를 챙겨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휘청거리며 방 가까이 갔을 때 샐리의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짜증 나.’

진짜 울고 싶지 않았다. 궁상떨고 싶지 않았다. 이건 다 술에 취해서야. 수없이 변명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테이블 위에 무언가 있었다.

새빨간 장미꽃이었다. 아주 탐스럽고 아름다운.

향기로운 꽃향기가 마음을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다. 샐리는 꽃다발을 품에 안고는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렸다.

‘결국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없었지.’

장미꽃 위로 네모난 카드가 적혀 있었지만 글을 몰랐기에 읽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읽어 달라고 해 볼까 고민했지만 자신의 소중한 보물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싫어 그냥 혼자 간직하기로 했다.

‘저하가 준 것이 아닐까 생각은 해 봤지만 그럴 리가. 지금보다 훨씬 나를 차갑게 대했던 사람인데.’

샐리가 고갯짓하며 시선을 돌리자 카시스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샐리가 아련한 눈빛으로 꽃다발을 매만지는 모습이 눈에 남아 말했다.

“꽃을 좋아하나 보지?”

그의 말에 샐리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주 어린 시절 가난을 겪은 샐리에게 꽃은 예쁜 것 말고는 쓸모없는 사치품이었다. 그녀는 몸을 화려하게 치장할 수 있고, 재산으로서도 가치 있는 보석을 좋아했을망정 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꽃은 그저 목욕할 때 쓰는 입욕제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전생의 그 일 이후 붉은 장미꽃은 그녀에게 특별해졌다. 샐리는 장미꽃을 얼굴에 가까이 대고는 눈초리를 살짝 휘었다.

“빨간 장미꽃은 아주 좋아해요.”

장미꽃보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구불거리며 하얀 얼굴을 장미꽃에 파묻은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카시스는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간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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