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별채의 주인
에스테반 공작 저택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집사 에반이었다. 저택의 누구보다 일찍 일어난 그는 평소와는 달리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는 섣불리 정체모를 여인을 주인 앞에 데려갔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 잠이 들지 못했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니 아침이 되었다. 에반은 해가 뜨자마자 주인의 방으로 향했다.
주인이 자신에게 어떤 벌을 내리더라도 받아들일 자세로 문을 열었는데 카시스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나의 첩이 될 거야. 특이한 여자지만 무척 쓸 만하더군.”
그러니 지금부터 샐리를 공작의 애첩으로 대우해 주라는 말까지 이어 붙였다.
어젯밤 보았던 주인의 분노를 떠올리면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일이 진척이 된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에반은 신기한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까탈스러운 주인님을 설득했다고 하니 새삼 그녀가 달라 보였다.
“주인님께 간략히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주인님의 애첩이 되셨다지요?”
“가짜 애첩이요.”
샐리는 일부러 ‘가짜’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이 일은 서로의 바라는 바가 일치한 계약일 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이 계획의 전모를 아는 사람에게는 이를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네. 가짜 애첩이요.”
에반은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어젯밤은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지요. 저는 에스테반 저택의 집사, 에반 테일러입니다.”
에반은 고개를 숙여 아주 정중하게 인사했다. 새까만 흑발을 단정하게 묶은 남자가 주름 하나 없는 새까만 집사복을 입고 허리를 숙이는 모습은 꽤 근사했다.
“별채에 샐리 님의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저택에서 지내시게 되셨으니 여러모로 저와 많이 마주치실 겁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네, 잘 부탁해요.”
“방으로 모시기 전에 먼저 들를 곳이 있습니다. 이 저택의 안주인이신 엘리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의 방입니다.”
“……!”
샐리의 어깨가 굳어졌다. 카시스와 재회했을 때와는 다른 긴장감이 그녀를 감쌌다. 그 모습을 본 에반이 그녀를 다독이듯 부드럽게 말했다.
“주인님의 공식적인 첩이 되시고 저택에서 지내게 되셨으니 마님께 인사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간단히 인사만 드릴 테니 너무 큰 부담은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은 됐지만 싫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저택으로 온 이상 그녀와의 만남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마님께 처음 인사를 드리는 자리니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셔야 할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급하게 구한지라 좋은 옷은 구하지 못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에반은 팔에 걸고 있던 드레스를 샐리에게 건넸다. 장식이 거의 없고 입기 편한 아주 수수한 드레스였다.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샐리의 옷차림은 심각했다. 당장 구정물이 나올 것 같은 저런 차림으로 갔다가는 공작 부인에게 어떤 책을 잡힐지 모른다.
샐리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드레스를 손에 들었다.
“곧 화장과 머리단장을 도와드릴 하녀도 올 것입니다.”
“옷은 갈아입을게요. 하지만 다른 건 됐어요. 머리는 적당히 정리하고 갈게요.”
샐리는 덤덤히 말했지만 에반은 쉽게 그녀의 생각을 지지할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은 미인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미인이 아니라 제국에서도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여인.
한껏 치장한 귀부인들도 그녀의 압도적인 미모 앞에서는 자신감이 사라져 고개를 푹 수그리곤 했다.
“그래도 최대한 꾸미고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간 하루가 다 가 버릴 거예요. 마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더 예의가 아니잖아요.”
샐리의 눈빛을 보니 쉽게 고집을 풀 것 같지도 않았다. 에반은 심각한 얼굴로 샐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무엇이죠?”
“혹시 그 스타일은 샐리 님의 취향이신 건가요?”
에반은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취향이 있다는 것을 존중했다. 하지만 만약 저 해괴한 모습이 그녀의 취향이라면 앞으로의 일이 곤란해질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샐리는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설마요. 곱게 꾸며 보았자 마님의 관심이 더해질 뿐이니 이렇게 가겠다는 거예요. 전 별로 마님을 자극하고 싶지 않거든요. 계속 이대로 있을 생각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그 말에 에반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에스테반 공작의 여자 취향이 괴상하다는 소문은 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샐리가 말한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샐리는 에반이 준 드레스를 입었다. 누더기같이 더러운 옷을 입었을 때보다는 깨끗해 보였지만 볼품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기장이 맞지 않아 발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어떤 곳은 헐렁하고 어떤 곳은 꽉 들어맞았다.
빗질을 했다고 하나 제멋대로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은 여전했기에 샐리는 꽤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음…… 적어도 불결해 보이지는 않으니 괜찮을 테지.’
고민 끝에 겨우 긍정적인 평가를 한 에반은 샐리를 공작 부인의 방으로 안내했다. 공작 부인의 방은 공작의 방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대대로 에스테반의 안주인이 사용했다고 하는 방은 문부터 남달랐다. 보통의 문보다 두 배는 커다란 문은 장식 하나하나까지 아주 세밀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문 앞에 선 에반은 정중하게 노크를 했다.
“마님, 에반입니다. 샐리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게.”
엄청난 위압감의 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여리고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샐리는 허리를 곧게 하여 자세를 다잡았다.
샐리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렴.”
전생의 기억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의 엘리제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 그곳에 있었다.
찬란한 아침 햇빛을 받아 황금처럼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은 한없이 신비로웠고, 진한 속눈썹 아래의 푸른 눈동자는 사파이어처럼 영롱했다.
신화 속의 천사를 재현한 것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녀는 샐리를 향해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을 짓고 있었다.
“공작 부인께 인사드리옵니다. 샐리라 하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샐리는 고개를 들어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허리를 곧게 펴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은 손의 모양, 팔의 위치, 턱의 각도까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예법의 표본이었다. 그녀는 꼭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그림 속의 귀부인 같았다.
“네가 그이와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는 아이구나.”
천사 같은 사랑스러움을 가득 품고 엘리제는 완벽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그이를 잘 받아 주렴. 나 혼자 품기에는 벅찬 사람이거든.”
남편과 하룻밤을 보낸 여인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친절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입은 행색이 무척 엉망이구나.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거니?”
엘리제는 샐리의 외양을 보고 비웃지도 않고 괘씸해하지도 않았다.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천진하게 물어 올 뿐이었다.
얼핏 자연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샐리는 그녀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었다. 지난 생에도 똑같은 질문을 했었으니까.
-수도의 뒷골목에서 왔습니다.
샐리는 바들거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었다. 그 순간 샐리는 자신을 받치고 있던 발판이 송두리째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우아함, 자애로움, 고결함.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라는 위치와 함께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 극렬하게 비교되어 샐리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 지금의 샐리는 아주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뒷골목의 한 유곽에서 하녀로 일했습니다.”
“저런. 유곽이라고?”
엘리제는 처음 듣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안쓰러워라. 어린 나이에 고생을 많이 했겠어.”
눈썹을 내린 엘리제의 표정은 누가보아도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힘들게 살다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니 편히 지내다 가렴.”
한없이 너그러운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제야 알았다.
‘너는 결코 이곳에 오래 있지 못할 거야.’
그 스산한 뜻을 알지 못했던 전생의 샐리는 그녀의 친절에 괴로워했다. 그녀가 새하얗고 깨끗한 빛과 같다면 자신은 추악하고 못된 어둠 같았다.
저 자애로운 여인의 남편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이 샐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배려 깊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마님.”
샐리는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래. 얼굴을 보았으니 됐어. 이만 나가 보렴.”
엘리제는 나비 같은 동작으로 손짓했다. 샐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 한 후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등 뒤로 엘리제의 시선이 느껴졌다. 문이 쿵 닫히고서야 샐리는 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고 해도 그녀를 대면하는 것은 역시 무척 긴장되는 일이었다.
‘여전히 그녀는 천사같이 아름답구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가짜였다. 그녀는 지난 생애처럼 진짜 모습을 숨기고 교묘하게 자신을 짓밟을 터였다.
샐리는 고작 미천한 출신의 애첩일 뿐이지만 엘리제는 에스테반 공작 부인이란 이름으로 사교계에 군림하는 여왕이었다. 애초에 상대가 될 수 없는 두 사람이다.
‘그래도 이번엔 과거처럼 당하지만은 않을 거야.’
단 한 가지 과거와 다른 것이 있다. 과거와는 달리 그녀의 가짜 모습에 속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샐리는 엘리제를 상대하는 데 큰 무기를 얻은 셈이었다.
“마사.”
샐리가 나간 후 엘리제는 나른한 목소리로 마사를 불렀다.
“네, 마님.”
철썩. 잘 가꾸어진 하얀 손이 가까이 다가온 마사의 뺨을 그대로 휘갈겼다.
“볼 것 없이 엉망진창이라더니 네 눈은 장식이니?”
“머리 꼴도 엉망이고 화장기도 하나 없기에 그리 보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주인의 화에 마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침에 보았던 샐리는 형편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그 천박하기 짝이 없는 애교밖에는 없어 보였다. 지금 샐리가 들어왔을 때도 그 형편없는 모습에 욕이 나올 뻔했다. 저따위 모습을 하고 잘도 공작 부인의 앞에 나타난 것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주인 엘리제는 그녀보다 눈썰미가 좋았다. 모든 것이 봐주기도 힘겨울 만큼 엉망이긴 했지만 원판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꾸민다면 제법 반반한 모양새가 나올 것이다.
“저 계집을 맡을 하녀는 정해졌느냐?”
“공작 저하께서 직접 임명하신다고 하셔서 아직 정해지지 않은 듯합니다.”
차분히 대답한 마사는 새하얀 찻잔 위로 차를 따랐다. 한쪽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지만 마사의 얼굴엔 조금의 원망도 서리지 않았다.
엘리제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따뜻한 찻잔을 짚었다. 향기로운 차를 음미하며 그녀는 생각에 빠졌다.
그 카시스 에스테반 공작이 고작 하룻밤을 보낸 여자를 첩으로 삼는다고 한다. 그것도 유곽에서 일하는 하녀 따위를.
깜찍한 생각에 엘리제는 웃음만 튀어나왔다.
‘저런 계집을 첩으로 삼으면 내가 수치라도 느낄 줄 알았나?’
엘리제에게는 카시스의 머릿속이 뻔히 보였다.
법원에 수없이 이혼장을 들이밀고 그녀를 수차례 찾아와 이혼을 요구하더니 결국은 저런 조잡한 수까지 생각해 냈다.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갈까. 그렇게 내가 싫으면 나를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엘리제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에스테반 공작의 힘이라면 여자 한 명쯤 죽여 버리는 것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일 텐데 그는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가 가진 그의 약점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국을 호령한다는 에스테반 공작이 그녀는 너무도 우스웠다.
‘아아, 가련한 에스테반 공작. 언제야 나를 인정할까.’
저런 저급한 수를 수백 번 쓴들 그는 자신에게서 에스테반의 이름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평생 그녀는 엘리제 에스테반 공작 부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황실이 받쳐 주는 그녀의 위치는 굳건했으며 남편의 첩 따위가 나타났다고 자극받을 만큼 유치한 감정도 없었다.
‘그러나 벌레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질색이니 치워 버려야겠지.’
쪼르르르, 엘리제는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찻잔에 담기는 물을 바라보며 우아한 말투로 말했다.
“하녀가 정해지면 불러 말하렴. 저 계집의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부으라고. 그 정도 실수는 할 수 있는 거잖니?”
샐리와 에반이 향한 곳은 저택의 뒤에 있는 별채였다. 엄청난 크기에 수많은 방이 있는 본채와는 달리 별채는 몇 개의 방이 있는 작은 이 층 건물이었다.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본채와는 달리 아주 조용했다.
그 별채의 2층, 가장 깊숙한 안쪽에 있는 방이 바로 샐리의 방이었다.
에반이 그곳의 방문을 열자 샐리의 눈이 커졌다.
‘모든 게 똑같아.’
따사로운 햇볕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 침대에는 폭신한 이불이 덮여 있었고 그 옆에는 색상을 맞춘 소파와 테이블, 의자가 놓여 있었다.
방 안에는 욕실과 화장실, 드레스룸까지 달려 있었다. 따로 밖에 나가지 않아도 방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무척 신경 써서 만들어진 방이었다.
샐리는 마치 추억 속의 장소에 온 것처럼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생활했던 시간은 일여 년.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차디찬 에스테반 저택에서 유일하게 샐리가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어쩜. 이 꽃까지 똑같이 있네.’
테이블 위에 오른 유리 화병에는 장미꽃이 꽂혀 있었다. 화병의 꽃은 매일 다른 꽃으로 바뀌어서 샐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혹시 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샐리가 눈을 내리깔고 방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모습이 신경 쓰여 에반이 말했다.
“아니요. 정말 멋진 방이에요. 특히 이 꽃이 마음에 들어요.”
샐리는 꽃을 매만지며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다행이군요.”
그녀의 칭찬에 에반의 표정이 한결 부드럽게 풀어졌다.
“별채의 방을 사용하는 분은 샐리 님뿐이시니 편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식사는 편하신 시간과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맞추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드시고 싶으신 메뉴가 있다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매일 아침 하녀가 들러 침구 정리와 방 청소를 하니 방 관리를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개인 하녀를 붙여 드릴 테니 혹시 세탁이나 자잘한 심부름시킬 일이 있으면 시키시고요.”
에반은 아주 상세하게 설명했다. 유곽의 하녀로 살던 샐리가 이런 저택 생활에 익숙지 않을 줄 알고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느껴졌다.
화려한 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덩그러니 서 있는 샐리의 모습을 보자니 더더욱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샐리 님은 저하의 총애를 받는 애첩이십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가 모시는 주인의 언질이 있었다고 해도 그는 아주 호의적이었다. 전생에 그러했듯이.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으니 편히 쉬십시오.”
에반이 인사를 하고 나가려 문을 연 순간 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반 님.”
“네?”
“어제는 에반 님을 속여서 죄송했어요.”
“…….”
허름한 복장 그대로 공작을 만나고 싶어 샐리는 에반을 속였다. 그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이야기가 잘되어 에반은 주인의 벌을 받지 않게 되었지만 그의 자존심은 상당히 상했을 것이다.
에반은 아주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무뚝뚝한 얼굴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괜찮습니다. 제가 샐리 님께 속은 덕에 주인님이 이처럼 똑똑한 분을 가짜 첩으로 두시게 되었으니까요.”
그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주인님께서 진심으로 화를 내시면 정말 무섭거든요.”
방 안에 있는 욕실은 아주 컸다. 샐리는 대리석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은 후 몸을 담갔다. 회귀한 후로 이렇게 제대로 목욕을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일개 하녀에게 목욕을 하라고 뜨거운 물을 줄 리 없었으니 눈치껏 천을 물에 적셔 몸을 닦았고, 사라의 개인 하녀가 된 후에는 사라의 방에 딸린 작은 샤워실에서 간단하게 몸을 씻곤 했다.
‘아가씨는 잘 돌아갔겠지?’
어젯밤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라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샐리는 욕조에서 나와 준비되어 있는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샐리는 눈을 깜빡였다.
더러운 얼룩을 씻어 낸 얼굴은 미인이었으나 전생의 샐리와 비견될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샐리는 장인이 수없이 갈고닦은 보석처럼 몇 년을 곱게 관리된 몸이었으니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의 샐리는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손톱도 엉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제일 최악은 머리스타일이야.’
샐리가 가위로 제멋대로 자른 머리카락은 삐뚤빼뚤하게 얼굴에 볼품없이 달라붙어 있었고, 관리가 되지 않아 빳빳하기 그지없었다.
몸매도 다를 바가 없었다. 타고난 골격으로 인해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지만 너무 빼빼 말랐다.
가슴과 엉덩이에 보기 좋게 살이 붙어 육감적이었던 전생의 몸매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일단은 나를 가꾸어야겠어.’
샐리의 목표는 명확했다.
사교계에서 엘리제를 위협할 만큼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
야생보다 치열한 여인들의 세계에서 미모는 제법 좋은 무기였다.
집안도, 작위도 없는 샐리이기에 그녀가 준비할 수 있는 무기는 최대한 갖추어야 했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샐리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어젯밤 잘 잤다고 생각했는데도 순식간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목욕 후의 나른함과 요 며칠 사이의 긴장감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샐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카시스가 저택에 돌아온 것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 봐야 하늘엔 이미 석양이 지고 있는 늦은 저녁이었지만.
“그 여자에게 인사를 가서는 별일 없었나?”
그 여자는 엘리제를 칭하는 말이었다.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웃으시며 샐리 님을 맞아 주셨습니다. 저하를 잘 부탁한다고 당부까지 하시더군요.”
그러나 카시스는 그 반응을 순진하게 믿을 만큼 엘리제를 모르지 않았다.
겉으로 천사 같은 미소를 지을지언정 속으로는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별채에 계십니다. 주인님과 함께 저녁을 먹겠다며 식사도 안 하고 기다리셨습니다.”
그 말에 카시스가 눈을 크게 떴다.
‘하긴. 애첩을 둔 첫날이니 저녁 식사는 함께하는 것이 좋을 테지.’
그녀의 속뜻을 이해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채에 가서 먹도록 하지.”
돌아오면 늘 제 방에 들어가 몸을 단정히 하던 카시스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별채로 향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처럼 우아했지만 고용인들은 수군거렸다. 마치 숨겨 둔 애인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내 같다고. 물론 그것은 카시스가 노리는 바이기도 했다.
“식사는 방으로 가지고 오도록.”
카시스의 말에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이들 앞에서 먹는 것보다는 닫힌 방에서 단둘이 먹는 편이 더 음험한 호기심을 부추기리라.
별채는 본채와 달리 사람을 많이 두지 않았다. 샐리의 요청으로 방 앞을 지키는 시종도 따로 두지 않았기에 카시스는 직접 샐리의 방문을 두들겼다. 그러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아주 크게 노크를 해 보고 자신의 이름을 말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인데.’
샐리는 피곤하다며 점심도 걸렀다고 했다. 저녁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으니 상당히 배가 고플 것이 틀림없었다.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 카시스는 문을 열었다. 원래라면 그런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겠지만 아무 대답이 들리지 않는 것이 영 신경 쓰였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샐리가 보였다. 쌕쌕 하고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그녀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카시스는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조금 민망해졌다. 흠, 하고 작은 헛기침을 한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깨워야 하나.’
샐리에게 특별히 볼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미 식사를 명령한 후였다. 곧 방 안에 식사가 차려질 텐데 식사도 하지 않고 나가는 것도 이상했다.
사소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데 문득 잠들어 있는 샐리의 얼굴에 시선이 갔다.
목욕을 하고 깨끗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것뿐인데도 어제의 그 충격적인 모습과는 확 달랐다. 드러난 피부는 뽀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여전히 마구 뻗은 머리카락이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저 머리카락, 거슬리는군.’
그것은 아주 이상한 감정이었다. 카시스는 원래 이런 사사로운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제국이란 거대한 국가의 땅과 재화를 고민하는 에스테반 공작이 기껏 저런 머리카락에 관심을 두다니.
그러나 카시스는 진지했다.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머리카락을 조금만 치우면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일 것 같았다.
카시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샐리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때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반쯤 감긴 몽롱한 눈으로 샐리가 작게 말했다.
“예쁘네, 은색 실 뭉치.”
“…….”
샐리는 손을 뻗어 눈앞에 보이는 은색 실 뭉치를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장난하듯 제멋대로 은색 실 사이를 손가락으로 빗질하던 그녀가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은색 실 뭉치, 아니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
“…….”
두 사람은 마주 본 채 굳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시스였다.
“노크를 아무리 해도 대답이 들리지 않더군. 잠들어 있을지는 몰랐어.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기에 들어온 것뿐이야.”
평소 그의 말투보다 1.5배는 빠른 목소리에는 멋대로 방에 들어온 것에 대한 필사적인 변명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샐리는 그런 것에 예민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에게 한 짓이 미치도록 창피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제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아 주세요.”
샐리는 그에게서 손을 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카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정돈했다.
평소라면 누가 그를 이런 식으로 마구 만졌다면 불쾌했을 텐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제 방이라.’
유곽에서 하녀로 지냈던 그녀라 귀족가의 방을 어색해할 줄 알았건만 그녀의 말투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 점이 묘하게 카시스를 기분 좋게 했다.
“방이 마음에 드나?”
“나쁘지 않아요.”
그에게 괜히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무뚝뚝하게 대답했더니 카시스의 눈이 진지하게 빛났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부족한 게 있는 모양이군.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해. 원한다면 방을 다시 꾸며 주지.”
다른 여자였다면 그의 말에 가슴이 떨렸겠지만 샐리는 아니었다.
전생에도 그는 샐리에게 수많은 것들을 주었다. 샐리가 원한다고 하면 값비싸고 귀한 것들을 모두 눈앞에 가져다주곤 했다.
20캐럿의 블루 다이아몬드, 금사로 수놓아진 최고급 드레스, 귀한 향료를 모아 만든 화장품.
하나같이 평범한 이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엄청난 물건들이었다. 그래서 샐리는 더더욱 착각했다.
이 남자는 역시 나를 사랑해.
아무리 그가 냉담하고 무뚝뚝하게 굴어도 결국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사내의 사랑을 물건으로 받는 것에 익숙했던 샐리에게는 당연한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것은 사랑이나 배려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그의 수준에 맞추어 여자를 꾸며 준 것뿐이었다.
“가짜라고 해도 너는 에스테반의 애첩이야. 가장 최고의 물건을 두를 필요가 있지.”
이어진 카시스의 말에 샐리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차라리 지금처럼 솔직히 말해 주었다면 좋았을걸.’
그렇다면 마음은 아팠을지언정 그의 마음을 얻었다는 착각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하게 모든 계획을 말해 주었던 어젯밤과 달리 전생의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가 엘리제와 이혼하기 위해 그녀를 첩으로 들였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편이 싸늘해진다. 그때의 배신감과 분노는 샐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감정이었다.
‘애초에 이용하기 위해 부른 여자였으니 굳이 자신의 치부를 말할 이유는 없었을 테지. 어차피 당신은 자신의 옆에 서 있을 창부 출신의 애첩이 필요했던 것뿐이었으니까.’
샐리의 얼굴을 본 카시스는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그가 한 말이라고는 샐리가 원하는 대로 방을 바꿔 주겠다는 것뿐인데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눈빛이 그렇지?”
“제 눈빛이 어떤데요.”
샐리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나갔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황금색 눈동자에 서린 감정은 무척이나 사나웠다.
‘개를 보는 고양이? 아니, 쥐를 보는 고양이인가.’
카시스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했다.
“나를 잡아먹을 것 같군.”
“……제가 어떻게 감히 저하를 잡아먹겠어요.”
샐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말은 만일 가능하다면 날 잡아먹겠다는 것인가.’
카시스는 등 뒤로 묘한 오한이 도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후 에반이 손수 식사를 챙겨왔다.
“샐리님이 다른 하녀들은 어색해하실 것 같아서 제가 왔습니다.”
테이블 위로 따스한 음식을 내려놓는 에반의 자상한 목소리에 샐리가 웃었다.
“배려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 모습을 본 카시스는 슬쩍 눈썹을 찡그렸다. 원하는 대로 방을 꾸며 준다고 했던 자신은 엄청난 눈빛으로 노려보더니 에반에게는 말투부터 너무 다르지 않은가.
자신이 없는 반나절 동안 꽤나 친해진 것인지 음식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이 거슬려 카시스는 일부러 샐리가 관심 가질 화제를 꺼내 들었다.
“네가 일했던 가게에 사람을 보냈어.”
그의 예상대로 샐리가 다시 고개를 돌려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감정이 정리된 것인지 아까의 그 사나운 고양이 같은 눈동자는 사라져 있었다.
“너를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으로 삼을 거라고 전했다. 이제 넌 그곳과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어. 그리고 네가 궁금해했던 사라라고 하는 여인은…….”
샐리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번쩍였다. 방금 전 카시스를 보았던 눈빛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이었다.
“오늘 아침 한 남자가 찾아와 데려갔다는군.”
“세상에.”
샐리가 벌린 입을 손으로 가렸다. 기껏해야 사라가 잘 들어갔는가에 대한 안부를 부탁했던 것이었는데 이런 엄청난 소식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알아봤나요?”
“외국인이었다고 해. 사라와 함께 남자의 고향으로 간다는 것 외엔 마담도 확실히 아는 것이 없다더군.”
외국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샐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국에 있다면 언젠간 다시 만나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그렇게 멀리 떠나 버릴 줄은 몰랐다.
그 표정을 읽은 카시스가 말을 이었다.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입고 있는 옷과 타고 온 마차가 무척 화려했다더군. 여자를 아주 극진하게 데려간 모양이야.”
“……그렇군요.”
그제야 샐리의 불안감이 조금 사라졌다.
‘정말 다행이야.’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역시 이곳으로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어젯밤 이곳에 온 사람이 사라였다면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뻔했다.
단 하루 차이로 두 사람의 인연이 어긋났다고 생각하니 오싹했다. 역시 이곳에 올 사람은 자신이었고, 사라는 그 남자와 다시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라라고 하는 여자가 네게 무척 특별한 모양이군.”
“모시던 아가씨였으니까요.”
“……흐음.”
카시스는 두 다리를 꼰 자세 그대로 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작 모시는 아가씨라는 이유만으로 저런 눈빛을 하나?’
지금까지 샐리가 자신에게 보여 준 눈빛들은 그를 당황하게는 하였으나 익숙한 것들이었다.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가끔은 미움이 담긴 눈동자.
그러나 방금 전 보았던 눈빛 같은 것은 아주 낯설었다. 그녀는 숨기려는 듯했지만 금색 눈동자에 서린 것은 따뜻한 애정이었다.
‘이상한 여자야.’
제국에서 제일가는 권력자인 에스테반 공작은 사납게 노려보더니, 고작 모시던 창부 한 명을 위해서는 애틋한 눈빛을 한다. 그 점이 카시스에게 묘한 호기심을 일으켰다.
“앞으로 나는 이 방에 자주 찾아올 거야.”
“알고 있어요. 저하의 애첩이 있는 곳이니 자주 찾아 오셔야겠죠. 가끔은 이렇게 식사도 함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을 테고요.”
샐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착각 따윈 하지 않는 그녀였다. 그녀는 이제 중요한 것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샐리의 대답에는 조금의 기대감도 없이 의무감만이 가득했지만 카시스는 아니었다.
그는 저 신기한 여자를 볼 수 있는 시간이 꽤 기대가 되었다. 그 자신도 놀랄 만큼.
* * *
다음 날 저택의 집사인 에반은 고용인들을 모두 소집했다. 에스테반가에서 일하는 고용인의 숫자는 300여 명. 저택의 위용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날의 일정이나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중요한 시간이었기에 모인 이들은 조용히 에반을 바라보았다.
“주인님께서 첩을 들이셨습니다.”
고용인들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어제, 고용인들 사이에 에스테반 공작이 한 여인을 애첩으로 삼아 별채의 방을 내주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첩을 들이는 것은 아주 특이한 일은 아니었지만 명예롭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토록 완벽한 귀족의 귀감인 에스테반 공작이 첩을 들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입소문으로 듣게 된 여인의 신분은 더 충격적이었다.
‘창부를 모시던 하녀.’
신분이라고 칭하기에도 뭣한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인 위치였다.
굳이 첩으로 들일 필요 없이 하룻밤 상대로 데리고 놀아도 그만인 여자가 아닌가.
그런 여자를 굳이 공식적인 첩으로 집에 들인다는 건 공작이 그녀에게 아주 푹 빠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얼음같이 차가운 에스테반 공작이 말이다.
잘 교육된 이들답게 입 밖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자는 없었으나 에반은 그들의 눈빛에서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샐리 님은 앞으로 별채에서 생활하시게 될 겁니다. 주인님의 관심을 받고 계시는 분이니 무례를 저지르지 말고 성심을 다해 모셔야 합니다.”
아주 정중한 말투였지만 에반의 눈빛은 꽤 묵직했다. 평소엔 무척 친절하지만 시종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하는 순간 그가 얼마나 가차 없는지 알았기에 고용인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의 반응. 일개 하인들이라 해도 그들은 에스테반 공작가라는 명망 있는 가문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주인님이 빠져 있다고 하나 일개 하녀였던 여자를 모셔야 한다는 상황이 반갑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무리 명령을 하고 협박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에반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신경을 많이 쓰는 수밖에 없겠어.’
에반은 그 외의 자잘한 공지를 전달하고 고용인들을 해산시켰다.
고용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오늘 전달된 엄청난 소식에 대해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막 열여섯 살이 된 하녀 데이지도 또래 하녀들과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청소 같은 잡일만 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엄청난 일을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서둘러 몸을 움직이는데 기둥 뒤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데이지.”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사였다.
그녀는 엘리제 마님의 측근으로 하녀장도 손대지 못할 만큼 엄청난 위세를 자랑했다.
저택의 사용인들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그러니 데이지 같은 건 그녀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
데이지는 귀족을 대할 때만큼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 데이지를 향해 마사가 손짓했다.
“네게 할 이야기가 있어. 이리 와 보렴.”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데이지는 도대체 마사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마님을 곁에서 모시는 마사와 허드렛일을 도맡기 일쑤인 데이지 사이엔 접점이라고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사의 포악한 성정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데이지는 겁먹은 얼굴로 그녀의 곁으로 갔다.
구석진 곳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아 아주 은밀한 밀실처럼 느껴졌다. 그런 곳에서 마사와 마주 보고 있으려니 데이지는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마사는 스산한 눈빛으로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네가 오늘 그년의 시중을 들지?”
“……!”
그년이라는 저급한 표현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군지는 한 번에 알아챘다. 바로 오늘 데이지가 배정받은 별채의 주인이자 주인님의 애첩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마사의 말대로 데이지는 에반에게 직접 샐리의 시중을 지시받았다.
데이지는 성실하고 손재주가 좋았지만 워낙에 소심했다. 그래서 하녀들 사이에 경쟁률이 치열한 윗분의 시중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 잘해 내야겠다고 힘껏 다짐을 한 차였기에 데이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상전이 물으면 재빨리 대답을 해야지!”
마사의 표독스런 시선에 데이지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대답했다.
“네. 맞아요.”
그 모습이 겁먹은 토끼 같아서 마사는 위세 등등해졌다. 마사는 겁 많은 하녀들을 다루는 데 아주 능숙했다.
“좋아.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이건 명령이란다. 명령을 어기면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알고 있겠지?”
데이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말이었다. 데이지는 잔뜩 움츠린 어깨로 고개를 억지로 끄덕였다.
마사의 입술이 잔인한 모양으로 벌어졌다.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데이지의 눈빛이 하염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별채에서 보낸 첫날 밤, 샐리는 정말 편하게 잠을 잤다. 등이 아플 만큼 딱딱한 침대에서 냄새나는 낡은 이불을 덮고 잤던 하녀 시절과는 너무도 달랐다.
푹신한 침대와 따스한 햇볕은 포근하기 그지없었다. 누구라도 숙면을 취할 수밖에 없는 아늑한 잠자리였다.
눈을 뜨니 커다란 창문에서는 햇볕이 환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샐리는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로 부드러운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푹 잤네.’
전생과는 전혀 다른 아침이었다. 전생에서 맞이한 별채에서의 이튿날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카시스와 첫날밤을 보낸 기쁨은 엘리제를 만나고 난 후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은 첩일 뿐이었다. 고작 별채의 방 하나를 얻은 천한 여자.
귀족들과 어울리기 위해 죽도록 배운 예법도 그녀의 앞에서는 조잡한 짓처럼 보였다.
누구와 비교해도 당당했던 외모조차 그녀에게 비교하니 천박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샐리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그녀가 여기 있을 수 있는 이유, 에스테반 공작이 당장 필요했다.
어젯밤처럼 그가 함께 있어 준다면 이런 불안감 따위 사라질 것 같았다.
곧 올 거야.
곧, 곧.
그러나 그날 카시스는 샐리의 방을 찾지 않았다.
그가 오지 않으니 괴로운 상상이 자꾸 샐리를 괴롭혔다.
—마님에게 간 게 분명해. 그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부인인걸. 나 같은 여자는 그저 호기심으로 안은 것일 뿐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콱 막혀 왔다. 추악한 질투는 커져 가는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끝없이 떨어졌다.
툭, 하고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그날 샐리는 아이처럼 서럽게 울며 밤을 샜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괴로웠을까.”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편이 짠해진다. 수많은 사내를 제 맘대로 휘두르던 창부가 어쩜 그렇게 어린애가 되어 버렸는지.
아니, 어린애도 그만큼 절절하게 사람에게 목매진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유치하고 바보 같은지.
샐리는 냉소 어린 미소를 짓고는 옷을 벗고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샤워 가운을 몸에 걸쳤다.
샐리는 소파에 편안히 앉아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기 시작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한 소녀가 들어왔다. 양 볼에 주근깨가 난 빼빼 마른 하녀였다.
“샐리 님께 인사 올립니다. 오늘 샐리 님을 모시게 된 데이지라고 합니다.”
바짝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고 인사한 데이지는 카트를 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데이지가 세수용 접시를 손에 들자 샐리가 먼저 말했다,
“샤워를 했으니 세수는 됐어.”
“그, 그럼 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샐리는 힐끗 카트 위를 바라보았다. 카트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주전자와 찻잔이 있었다. 이런 쌀쌀한 아침은 뜨거운 차로 잠을 깨우기 마련이었다.
데이지는 찻잔을 샐리의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샐리는 눈앞을 지나가는 데이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그때 그 하녀야.’
전생의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일을 잊을 리가 없었다.
잠도 자지 못하고 울다 부어 버린 눈으로 지쳐 앉아 있는데 하녀 하나가 들어왔다.
귀부인을 대하듯 허리를 조아려 인사하는 하녀를 보니 샐리는 밤새 극한으로 내몰렸던 자신감이 조금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마님처럼 우아하고 자애로운 귀부인이 되는 거야. 그럼 공작 저하도 나를 더 좋아하게 될 거야.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며 샐리는 힘겹게 엘리제가 자신에게 보였던 미소를 떠올리며 하녀가 건넨 찻잔을 받았다.
—꺄아악!
찻잔에 떨어져야 할 뜨거운 물이 샐리의 팔에 닿은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때의 고통을 떠올리자 샐리는 왼쪽 팔이 쓰라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연한 화상 자국이 남았던 이전과는 달리 드러난 손목은 매끈하고 깨끗하기만 했다.
바들거리는 손으로 찻주전자를 들고 가까이 다가오는 데이지를 향해 샐리가 말했다.
“어디에 뿌리라고 했니?”
“네?”
“팔은 좀 약한 것 같아서. 사실은 얼굴이 아니었을까 생각했거든.”
“……?!”
쨍그랑, 하녀의 손에 들려 있던 찻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찻물이 펄펄 김을 내며 바닥에 스며들었다. 샐리는 그 모습에 쓰게 미소 지었다.
“정답이었니?”
“요, 용서하십시오! 용서해 주세요!”
데이지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온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바닥에 넙죽 엎드린 그녀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전생에도 어설픈 동작으로 물을 뿌려 놓고 샐리보다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샐리는 화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어린 하녀에게 모질게 소리 질렀다.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는 버들거리며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하녀에게 소리를 지르는 샐리만 보였다.
피해자는 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용인들에게 샐리는 표독스러운 여자로 찍히고 말았다.
하녀의 어설프기 그지없는 동작 덕에 화상은 크지 않았으나 고용인들과 샐리 사이에는 지울 수 없는 벽이 생겼다.
그 간격은 생각보다 너무나 커서 샐리가 저택을 나갈 때까지 좁혀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순 없어.’
전생의 샐리는 고용인들과의 간격을 좁힐 생각이 없었다. 피해자는 자신인데 도리어 가해자로 모는 그들이 너무 원망스럽기도 했고, 귀부인은 저런 자들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편견이 샐리를 사로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이었던지.
고용인들은 하나하나 보면 힘없고 약한 자들이지만 크게 보면 사교계를 촘촘히 이어 주는 존재다. 귀족 가문과 가문 사이의 소문은 고용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그들의 마음을 다 사로잡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적대적인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데이지는 너무나 안쓰럽게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커다란 눈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열여섯 살의 어린 소녀였다. 이런 끔찍한 짓을 하기에는 마음도 몸도 미숙한.
‘그러니 과거에도 그렇게 어설프게 일을 벌인 거겠지.’
그녀가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면 샐리는 얼굴에 흉측한 화상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자신을 해한 여인이지만 샐리는 그녀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불쌍하고 미안하기까지 했다.
추잡한 어른의 싸움에 끼어든 불쌍한 희생양. 약하기 때문에 강제로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샐리도 같은 위치에 있어 보았기에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샐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몸을 숙였다. 샐리가 무릎을 꿇고 눈을 마주쳐 오자 데이지의 눈물 젖은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겁먹지 마. 아직 무슨 짓을 벌인 것도 아니니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게다가 이 일을 계획한 사람은 네가 아니잖아.”
데이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까는 샐리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이 할 일의 끔찍함에 눈물을 흘렸지만 지금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이 느껴졌다.
“이 일을 지시한 건 마사지?”
정확한 이름을 입에 담자 데이지의 얼굴은 흙빛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녀는 몇 번이나 얼굴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제, 제가 실수로. 제가 못된 마음을 먹고…….”
급기야 데이지는 자기가 저지른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아직 어렸지만 귀족가의 저택에서 일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채 명령한 이의 이름을 그대로 고했다가는 자신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게다가 아까 그 마사의 눈빛을 떠올리니 더더욱 두려워졌다.
“걱정 마. 마사에게 이 일을 캐물을 생각은 없으니까.”
데이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샐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린 하녀가 이 일을 지시한 사람이 마사라고 밝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아니,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전생에 그러했든 천박한 애첩이 우아한 마님을 욕보이기 위해 처참한 쇼를 벌였다고 몰아가겠지.
그 황당한 말이 먹힐 정도로 엘리제의 입지는 단단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데이지도 그냥 자기가 한 짓이라고 말하기를 택했을 것이다.
귀족가의 저택에서 어린 하녀의 쓰임새란 너무도 가차 없었다. 이런 잔인한 일의 도구로 이용해 먹고는 난 그런 적 없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감히 귀족에게 누명을 씌우냐며 즉결 처분까지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미 데이지는 이 계략에 들어와 버렸고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쉽게 나갈 수도 없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너는 마사에게 무사하지 못할 테지? 하지만 내 말대로 한다면 마사에게 큰 화를 당하진 않을 거야.”
그 시간 카시스는 저택의 서재에 앉아 서류를 결재하고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에게는 팔자 좋게 놀 수 있는 여타 귀족과는 달리 어마어마한 업무가 가득 쌓여 있었다.
특히 그는 친황제파인 동시에 수많은 귀족을 이끄는 대귀족이었으므로 둘 사이를 중재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카시스는 매일같이 수많은 귀족과 황족을 만나야 했는데 결혼한 후에 손님을 공작가의 저택으로 초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늘은 그가 저택에 있는 아주 드문 날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문서를 보던 카시스가 입을 열었다.
“샐리에 대한 고용인들의 반응은 어떻지?”
“대놓고 티내진 않지만 좋진 않습니다.”
“……그래.”
카시스도 예상한 바였다. 미천한 신분으로 주인의 총애를 꿰찬 여인이라니 누구든 좋게 보진 않을 것이다.
대놓고 무례를 저지르진 않을 테지만 아주 작은 곳에서 표가 날 것이다. 그런 것은 명령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별채를 관리하는 이들은 최대한 유순하고 정중한 이들로 배정하도록.”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정도가 카시스가 샐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여자의 반응은 어떻지?”
방금 전과는 달리 카시스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그 여자, 즉 엘리제를 이르는 말이었다.
“어제 샐리 님과 인사를 나눈 뒤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라고 하십니다. 하녀들에게 별채에 있는 샐리 님을 잘 돌봐 달라고 말씀하셨다는군요.”
카시스의 얼굴에 냉소가 어렸다.
“하녀들 사이에서 또 성녀니 천사니 하는 말이 나돌았겠군.”
“그렇지요.”
에반이 눈썹을 내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엘리제의 사람의 마음을 얻는 능력은 상당했다. 아름다운 외모의 공작 부인이라는 직위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조금의 친절함만 더해 주었을 뿐인데 하녀들은 엘리제를 추앙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공작 부부의 사이가 최악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제의 저택에서의 입지는 나쁘지 않았다.
하녀 중 몇 명은 아름다운 공작 부부의 사이가 냉담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고, 언젠간 얼음 같은 주인님의 마음이 녹아 아름다운 부인을 받아 주길 바라는 아주 순진한 생각까지 했다.
물론 카시스가 알았다면 아주 끔찍해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바란이 오기로 하였지?”
“네.”
어제 마사를 골려 주기 위해 공작가의 주치의인 바란을 불렀다. 샐리가 뜨거운 밤의 대가로 몸이 아프다는 것은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었으나 애첩에 대한 총애를 표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샐리가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그는 애꿎은 발걸음만 하고 돌아가 버렸다. 바란은 환자를 진료하지 못하였으니 그는 오늘 다시 방문한다고 했다.
자신이 진찰할 사람이 거짓 환자인지도 모르고 책임감에 한 말이었다. 카시스는 굳이 그의 재방문을 막진 않았다.
공작 부부 내외만을 진찰하는 주치의가 샐리를 진찰한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으니까.
드레스와 보석을 선물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고용인들에게 그녀에 대한 총애를 보여 주는 일이 될 것이다.
“바란 님이 도착하실 시간이니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에반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가 나간 후에도 카시스는 기계처럼 서류를 작성해 나갔다.
어릴 때부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도록 훈련받은 그는 서류를 결제할 때면 특히 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빠르게 글자를 읽고, 내용을 이해하고, 필요한 지시 사항을 기재했다.
‘이런.’
그런데 또다. 벌써 세 번이나 글의 문맥을 놓쳤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문득문득 한 여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카시스는 작게 고갯짓을 했다.
‘특이한 여자라서 그런 거겠지.’
카시스에게 그녀는 기이한 생물체로 보였다. 외모도, 성격도, 말 한마디까지 모든 것이 그랬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무엇보다 그녀가 그의 호기심을 끄는 이유는 아직도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애첩의 얼굴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다니. 그 누가 들어도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는 것은 얼핏 보이는 턱선이 제법 곱다는 것이고, 피부는 아주 희다는 것, 그리고 막 잘려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제법 강렬하다는 것이다.
‘황금색이라니.’
꿈속의 그녀와 똑같은 금색 눈동자는 너무나 독특하고 강렬했다. 색이 밝은 눈동자는 아무리 머리카락 사이에 감춰져 있어도 너무나 형형하게 빛이 났다.
카시스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호기심을 가진 것이 처음이었다. 특히나 여자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유치한 호기심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달려 있겠지.”
결국 자신의 호기심을 억누르기 위해 그녀의 얼굴에 대한 답을 억지로 내었다.
그때 다급히 문이 열리며 에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님!”
거친 숨을 내쉬며 뛰어온 에반을 카시스는 차분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반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카시스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샐리 님이 큰 화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바란 님은 바로 그쪽으로 가셨습니다.”
“뭐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시스가 엄청난 속도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바란 님을 모시러 일 층으로 내려갔는데 별채를 관리하던 하녀가 울면서 뛰어들어 왔습니다. 찻주전자를 떨어뜨려 찻물이 샐리 님께 튀어 버렸다고요. 펄펄 끓인 물이라 아주 심각하다고 합니다.”
카시스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아니, 공작가의 하녀가 되어서 찻주전자를 떨어뜨리는 실수 따위를 할 리가 있나. 엘리제인가?!
그 사악한 여자가 벌써 일을 쳤어. 감히 이런 짓을!
놀람이 가시지 않는 얼굴에 분노가 어리기 시작했다. 굳게 잡은 주먹에 새파랗게 혈관이 튀어나왔다.
‘바란이 갔으니 괜찮을 거야.’
그는 수도에서 제일가는 의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갔다니 무슨 조치를 해 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카시스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품위 있는 귀족은 절대 달리지 않는다는 예법 따윈 생각도 나지 않았다.
별채가 이렇게 멀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있는 방이 보이자마자 벌컥 문을 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에 샐리를 진찰하는 바란이 보였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샐리는…….
“저하…….”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너무도 멀쩡해 보였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꼼꼼히 확인해 보아도 눈에 띄는 곳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피부는 매끈했고 무엇보다 샐리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화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카시스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 그녀의 얼굴은 역시나 깨끗했다.
“아무 이상이 없는 건가?”
“네. 괜찮아요.”
샐리는 조금 놀랐다. 이렇게 놀란 얼굴로 달려올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전생에는 뜨거운 손목의 아픔이 고통스러워 그의 얼굴 같은 걸 볼 여유가 없었다.
‘그때도 이런 표정이었을까?’
무척 의외라고 생각했다. 얼음 같은 그라도 역시 화상을 입었다는 끔찍한 말엔 걱정이 들었던 걸까.
‘안 어울리네.’
속으로 생각하며 샐리는 카시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봐.”
카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두 사람 사이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은밀한 이야기를 하실 생각이면 저는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본의 아니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던 닥터 바란이었다.
수도의 소문난 의사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비쩍 마른 체구에 눈 아래로 다크 써클이 가득한, 지독히도 피곤해 보여 종종 환자라는 오해를 받는 그였다.
샐리가 갑자기 화상을 입었다는 말에 본의 아니게 달리기까지 하게 된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부쩍 피곤해 보였다.
그는 정말이지 이런 식의 비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사양이었다. 들어 보았자 괜히 귀찮기만 했다.
“그래. 나가 보게.”
카시스의 명에 바란은 고개를 숙이고 문을 나섰다. 카시스는 샐리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설명해 봐. 분명 에반이 말하길 하녀가 달려와 네게 뜨거운 물을 쏟았다고 했는데?”
“그럴 뻔했죠.”
“뭐?”
카시스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그 여자가 벌써 무슨 짓을 벌인 거군.”
카시스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겨우 하루. 그가 애첩을 들인 지 하루가 되었을 뿐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끔찍한 짓을 시도하다니 피가 차갑게 식었다.
“맞아요. 그 계획은 실패해 버렸지만요.”
그러나 뜨거운 물을 뒤집어쓸 뻔한 당사자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소식을 하녀에게 전하게 한 거지? 그 덕에 저택은 지금 난리가 났어.”
“마님께서 그 얘길 듣고 싶어 하실 테니까요.”
샐리의 눈빛이 총명하게 빛났다.
“제가 화상을 입었다는 소식은 마님께도 전해질 거예요. 엄청난 화상을 입었다고 했으니 아주 만족하고 계실 테죠. 마님은 이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카시스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제의 흉악한 간계보다 그것을 눈치챈 샐리의 반응이 그를 더 당황시켰다.
샐리의 얼굴엔 조금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굳이 그 여자의 장단에 맞춰 줄 필요가 있나?”
샐리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럼요.”
샐리는 심심해서 이런 식의 일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샐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자기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마님이라도 더 이상 무슨 일을 벌이진 않겠죠. 화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여자 따위가 자신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하리라 생각할 테니까요.”
“오래 속일 순 없을 텐데.”
“상관없어요. 제게 마님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조금의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해요.”
다 안다는 샐리의 말투에 카시스는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기로 했다.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음에도 그녀는 너무도 편안해 보였다. 저 작은 머릿속에 무슨 계획이 있는지는 지켜보면 알 터였다.
“바란이 좋은 타이밍에 온 셈이군. 며칠간 그를 이곳에 들르라고 하지. 지독한 화상을 입었다면 의사의 진찰이 필요할 테니.”
“좋은 생각이네요. 그런데 바란 님께선 이런 일에 엮이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아니시라 저하의 명령만으로는 움직이기 힘들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바란은 실력도 좋고 입도 무거웠지만 이런 은밀한 계획 따위 알고 싶지도 협조해 주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어딜 가서 함부로 입을 놀리진 않겠지만 누군가 추궁해 온다면 귀찮아서라도 다 불어 버릴 성격이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런 분께 협조를 구하려면 명령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드리는 게 훨씬 쉬운 방법이죠.”
문득 카시스는 의아한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투가 마치 예전부터 바란을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바란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지?”
그 말에 샐리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그의 앞에서 너무 편하게 바란의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전생에 공작의 애첩으로 살았을 때 바란을 만났다는 말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샐리는 눈동자를 미세하게 굴리며 대답했다.
“가게에서 일할 때 주워들어 알고 있어요.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시니까요.”
카시스는 여전히 그녀를 향한 눈빛을 풀지 않았다. 아무리 그곳이 수많은 정치와 풍문이 오가는 곳이라고 해도 샐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샐리에 대해 뒷조사한 시종이 전해 온 말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가게로 들어와 일을 시작한 흔하디흔한 하녀라고 했다.
“너는 정말 수상할 정도로 아는 게 많군.”
“이왕이면 유능하다고 표현해 주세요.”
샐리는 여유 있게 카시스의 말을 받아넘겼다. 카시스는 혀를 쯧 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작에게 말 한마디도 지지 않는 하녀라니. 세상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하녀였다.
“또 내게 할 말이 있나?”
“제게 차를 쏟는 것을 명받은 하녀가 있어요. 그 아이의 처분은 제게 맡겨 주시겠어요?”
협박을 받았건 뇌물을 받았건 이런 분란을 일으킨 하녀는 절대 저택에서 일을 하게 두지 않는다.
게다가 공작이 아끼는 애첩에게 끓는 물을 부으려고 했다니, 매질을 당해 쫓겨나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심한 경우는 감옥에 끌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카시스는 얼굴도 보지 못한 하녀지만 엘리제의 입김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여자를 샐리의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널 해치려고 했던 자야. 괜한 동정을 베풀 필요 없어.”
카시스가 저런 말을 할 때는 아주 냉혹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상하 관계가 확실한 귀족이었다. 고용인에게 칼처럼 냉정했다.
샐리는 그의 그런 점이 가끔은 무서웠다. 계급을 따지자면 그녀도 그의 발밑에도 못 미치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가 저런 식으로 말하면 샐리는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서 기가 죽곤 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그 아이는 제가 화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아이이니 제 개인 하녀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괜히 다른 하녀들을 곁에 두었다간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많아질 뿐이니까요.”
샐리의 말을 듣다 보면 꽤 논리적이라 설득당하고 만다. 카시스는 샐리를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네가 그 하녀를 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변함이 없군.”
“오해세요. 단순히 이해관계가 맞을 뿐이랍니다.”
샐리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샐리는 애꿎은 동정심이나 애정으로 사람과 연을 맺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지긋지긋한 관계는 전생으로 족하다.
특히나 에스테반 공작의 첩으로 있는 동안은 더더욱 그랬다. 어차피 그녀는 일이 끝나면 떠나갈 사람이었다. 서로가 필요해서 이어진 인간관계면 족했다.
그와 자신의 관계처럼.
* * *
“별채의 여자가 끔찍한 화상을 입었다는 게 정말이야?”
“그래. 데이지가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렸어.”
“그런데 그런 짓을 벌인 데이지가 그 여자의 개인 하녀가 되었다며! 이게 말이 돼?!”
별채의 여자. 샐리를 무시하는 이들이 부르는 지칭이었다. 그리고 그 별채의 여자가 첩이 된지 하루도 되지 않아 끔찍한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은 고용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더불어 그런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데이지는 난생처음 수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데이지는 작은 동물처럼 오들오들 떨며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데이지, 말해 봐. 자기한테 그런 짓을 한 널 왜 개인 하녀로 삼은 거야? 그 여자가 몰래 매질이라도 하는 거 아냐?”
데이지는 작은 목소리로 겨우겨우 대답했다.
“제가 실수로 뜨거운 물을 흘린 것이니 죄를 묻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샐리 님께서는 매질 같은 건 하지 않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애첩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주인님이 왜 널 그냥 두는 거니?”
“샐리 님께서 저를 위해 부탁해 주셨어요. 벌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요.”
데이지의 말은 고용인들에게 별채의 여자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샐리에 대한 관심은 눈덩이처럼 불고 있었지만 고용인들은 쉽게 샐리를 마주칠 수 없었다.
샐리는 화상을 입은 후로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샐리의 방을 오고 가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샐리를 볼 방법이 없었다.
그 사이엔 마사도 있었다.
“쥐새끼처럼 처박혀 있으니 그년의 상태에 대해서 알 수가 없군.”
저택의 일이라면 개미 새끼 하나하나의 일이라도 보고받는 마사였건만 별채의 작은 방에 갇혀 있는 샐리에 대한 안부는 알 수가 없었다.
데이지를 데려와 캐내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늘 저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거나 샐리의 방에 가 버리곤 해서 제대로 붙잡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임무에 대한 확인을 따로 할 필요는 없었다. 매일같이 별채를 드나드는 바란이 바로 그 증거였다.
바란은 공작가의 의사이긴 하지만 귀찮은 일은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공작의 명이라도 아픈 곳도 없는 이를 위해 걸음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마사는 별채로 향하는 그를 향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여자의 상태는 어떤가요?”
바란은 그저 끔찍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마사는 스산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샐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란을 향해 미소 지었다. 끔찍한 화상을 입었다는 그녀는 아주 멀쩡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공작가에 올 때면 끌려가듯 걸어오던 모습과 달리 바란의 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마사가 샐리 님의 상태를 묻기에 썩은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아주 기분 나쁜 표정으로 웃던데요.”
“마사는 참 솔직해요, 그렇죠?”
샐리가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저는 의사입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거짓말은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게 포인트지요.”
바란은 솜씨 좋은 의술만큼이나 까다로운 성격으로도 유명한 자였다. 그는 절대 환자의 비밀을 남들에게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마사에게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 따위 느끼지 않았다. 어떻게 착각하든 그건 그녀의 자유니까.
무엇보다 바란은 마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초췌한 눈에는 전에 없던 생기가 돌았다.
“전에 말했던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하께서 허락하셨어요. 제나 의료원은 앞으로 10년 동안 저하의 지원을 받게 될 거예요.”
그 말에 바란이 희열에 가득한 얼굴로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얏호!”
평소의 그를 아는 자라면 이렇게 순수하게 좋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평소에 피곤하기 그지없는 표정만 짓기 때문이다.
“그 에스테반 공작 저하가 이런 일을 허락하다니. 믿기지가 않는군요.”
에스테반 공작은 돈을 쓰는 데 후한 편이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의료원에 사비를 내줄 만큼 만만한 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귀족가의 주치의보다 3배는 많은 급료를 카시스에게 요구하여 그 돈으로 의료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료원의 손님들은 태반이 가난한 이들이라 돈을 못 내는 경우가 잦았다. 바란이 아무리 고위 귀족들을 진료하고 다녀도 적자는 날이 갈수록 쌓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들려온 샐리의 제안은 정말이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화상을 입지도 않은 그녀를 매일 진료하러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주치의에게 환자만 보이면 그만이지 귀찮은 일에 자신을 이용해 먹는 작태가 화가 나 급료고 뭐고 주치의를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때 샐리가 그에게 먼저 제나 의료원의 일을 꺼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제나 의료원을 후원하도록 저하께 말씀을 드려 봐도 될까요?
뜬금없이 그녀의 입에서 제나 의료원이 나와 바란은 놀랐다.
그곳은 아주 작은 개인 의료원이었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수도의 뒷골목에 있는 가난한 자들뿐이었다. 귀족들은 그런 곳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저는 뒷골목 출신이랍니다. 그래서 그곳을 알고 있지요. 이렇게 바란 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허락해 주시면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어요.
사실은 전생에 우연히 알게 된 일이었지만 샐리는 적당히 둘러말했다. 바란은 그 순간 여인의 등 뒤로 빛나는 후광을 보았다.
바란은 사실 아주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고, 그 에스테반 공작이 여자의 말 한마디에 얼마나 도와주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려 10년간의 지원이라니!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샐리 님은 저하의 어마어마한 총애를 받고 계시는군요.”
샐리는 굳이 바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샐리가 진짜 애첩이건 가짜 애첩이건 크게 관심 없을 것이다.
“좋은 일을 하시는 거잖아요. 저하께서도 평소에 도와주고 싶으셨을 거예요.”
“……아 뭐…….”
샐리의 말에 바란은 썩은 표정을 지었다.
“샐리 님, 저는 귀족들이 어떤 자들인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거 하난 알지요. 공작 저하는 제가 뭘 하든 조금도 관심 없다는 것 말입니다.”
“…….”
샐리는 이번에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저는 의사지요. 의사는 무엇이든 아주 명확한 것을 좋아하죠. 돈을 낸 분은 저하가 맞지만 이 일을 성사시켜 준 건 바로 샐리 님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샐리가 두 손을 내저었다.
“먼저 도움을 받은 것은 저인걸요. 제 거짓말에 동참해 주시는 것만으로 정말 감사해요.”
“고작 그 정도 거짓말에 동참하는 대가치고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10년 동안 저하께서 지원을 해 준다면 이 지긋지긋한 귀족가의 주치의 생활도 때려치우고 의료원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이건 정말이지 미칠 듯이 기쁜 일입니다!”
샐리는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정말 훌륭한 의사였다.
전생에는 자신을 진찰할 때마다 귀찮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고는 크게 오해했다.
—아무리 내가 귀한 신분이 아니라고 해도 저렇게 싫은 내색을 하다니 너무하잖아.
그래서 샐리는 마음속으로 바란을 조금 미워했었다. 다시 만나 그의 훌륭한 성품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란은 샐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전 인간관계 따위 관심 없어서 누구 편을 들진 않지요. 대신 도움에 대한 보답은 합니다. 샐리 님이 필요할 때 언제든 힘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샐리는 그와 손을 마주잡았다. 이만한 반응을 기대하고 그를 도운 것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바란이 나간 후 데이지가 방으로 들어왔다. 처음보다는 덜하긴 했지만 데이지는 아직도 샐리 앞에 설 때면 몸을 살짝 떨었다.
자신이 하려고 했던 짓이 너무나 끔찍하고 죄송해서 저러는 것을 알아 샐리는 일부러 데이지의 떨림을 보지 못한 척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저택의 분위기는 어떠니?”
샐리도 이 별채의 작은 방에 쏟아지는 관심을 알고 있었다. 저택의 많은 이들이 그의 표정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바란 님께서 어마어마하게 심각한 표정으로 방을 나오셔서 난리가 나 버렸어요.”
“어떤 말들을 하던?”
너무 끔찍한 말이라 데이지는 잠시 말을 주저했다. 샐리의 눈동자가 말을 재촉하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샐리 님의 얼굴이 다 뜨겁게 녹았다는 이들도 있고, 온몸에 흉측한 화상을 입었다는 이들도 있고, 또 생사가 걸려 있을 정도로 위독한 것 아니냐는 이들도 있었어요.”
“소문이 정말 엄청나구나.”
바란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니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소문이 끔찍할수록 엘리제는 흡족한 미소를 띠겠지.
배부른 사자는 사냥감을 쫓지 않는 법. 엘리제는 더 이상 샐리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바란 님의 협조 덕분에 아주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는걸.’
데이지는 저런 끔찍한 소문을 듣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샐리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데이지도 귀족가의 저택에서 몇 년을 일한 하녀다.
귀족 여인들의 화려한 세계 이면에는 그녀는 상상도 못할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만드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샐리는 계략을 꾸미는 자 특유의 음습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귀부인과는 달리 꾸미지 않은 소탈한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저 경쾌한 성격 때문일까.
데이지를 대하는 샐리에게선 그때의 일에 대한 어떠한 앙금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데이지를 다그치지도 않고 데이지에게 그런 일을 시킨 자가 누군지 따지지도 않았다.
데이지는 그 점이 의아하면서도 한없이 죄송스러웠다.
“달리 시킬 일이 없으니 앉아서 쉬렴.”
그리고 샐리는 거의 시키는 일도 없었다. 처음엔 자신을 개인 하녀로 지정한다기에 곁에 두고 벌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샐리는 간단한 심부름이나 방 정리 외엔 데이지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일이 없었다. 시녀들이 하는 그 흔한 세수나 목욕 시중도 데이지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매일 궂은일을 담당했던 것과는 천지 차이라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할 일이 없어지면 샐리는 데이지에게 앉아서 쉬라고 했다. 하녀는 모시는 분 앞에서 앉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주인이 다음 명령을 내릴 때까지 서 있어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처음에는 샐리의 눈치를 보던 데이지도 이제는 소심하게나마 의자에 엉덩이를 살짝 얹었다. 엉거주춤한 자세 덕에 아주 편하진 않았지만 퉁퉁 부은 다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데이지의 눈에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가 보였다. 접시 위에 놓인 딸기를 얹은 생크림케이크는 보는 것만으로 달콤해 보여 입에 침이 고여 왔다.
저 작고 달콤한 케이크는 데이지의 한 주 급료를 모아야 먹을 수 있는 최고급 디저트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황송한 아주 귀한 딸기 케이크님.
그런데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먹고 싶으면 먹으렴.”
“네에?!”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말을 들은 것처럼 데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아까 먹었잖니. 그건 네 몫으로 남겨 둔 거야.”
“제, 제 몫이요?”
“그래. 항상 네가 디저트를 맛있게 보기에.”
화끈, 하고 데이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좀 많이 달긴 하지만 맛있더라. 오늘도 열심히 일해 준 보답이라고 생각해.”
데이지는 정말이지 샐리의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녀였다. 그런 자신에게 이런 보답이라니.
“가, 감사합니다!”
데이지는 차마 거절하지도 못했다. 이 맛있는 게, 이 달콤한 게 자신의 것이라니 점잖게 거절하는 일 따위 열여섯 살 하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빛나는 포크를 손에 들고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케이크의 한쪽을 포크로 눌렀다.
“헉.”
정말 놀랐다. 조금도 힘을 주지 않았는데 포크는 너무나 부드럽게 케이크를 파고들었다.
지금껏 데이지가 알았던 벽돌 같은 빵과는 차원이 달랐다. 포옥, 하고 베어진 케이크를 성스럽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입에 넣었다.
“마, 맛있어! 어쩜 좋아!”
데이지는 정말 울 뻔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달콤하고 맛있었다.
어떻게 이런 맛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늘에 있는 구름을 먹는다면 이렇게 입에서 살살 녹을까?
샐리는 그 모습을 아주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케이크를 준비한 것은 일종의 보상이었다. 저택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샐리에게도 충성스러운 하녀가 한 명 필요했다.
데이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저 케이크였다.
‘어린애 장난 같이 보여도 케이크의 달콤함은 역시 다이아몬드만 한 가치가 있지.’
데이지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먹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잔뜩 겁먹은 얼굴이 아니라 제 나이의 소녀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날부터 샐리는 데이지를 위해 작은 선물들을 준비했다. 화려하거나 값비싼 것들은 아니었다.
케이크 한 조각, 쿠키 한 접시, 체리 한 컵.
선물은 주로 달콤한 음식들이었고 데이지는 어느 순간부터 샐리의 방에 들어올 때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데이지의 뒤로 동그랗게 말린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 같은 착각에 샐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달콤함의 효과는 샐리의 생각보다 굉장했다.
* * *
데이지가 달라졌다. 늘 차분했던 데이지가 별채의 방에 다녀온 후에는 달콤한 냄새를 잔뜩 묻히고는 웃음을 실실 흘렸다.
비쩍 말랐던 몸에 살이 오르고 피부는 전에 없이 반질반질해졌다.
“데이지, 솔직히 말해 봐. 그 방에서 뭘 하고 오는 거야?”
동료 하녀들이 아무리 닦달해도 데이지는 말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간의 일들을 말했다가는 샐리의 시중을 드는 일을 빼앗길 것 같아서였다.
데이지가 입을 다물고 도망갈수록 하녀들의 상상은 더욱 커졌다.
별채의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좋고 탐나는 일이.
그리고 그 생각에 가장 확실하게 못 박은 것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데이지의 말투였다.
“데이지, 너 설마 그런 천박한 여자에게 넘어간 거니?!”
하녀들이 데이지를 둘러싸고 말했을 때 데이지는 이전과는 달리 눈에 힘을 주고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아니라 샐리 님이야! 신분이야 어떻든 샐리 님은 아주 좋은 분이셔.”
데이지의 그런 반응은 모시는 이에게 진심으로 좋은 감정을 품었을 때야 나오는 말이었다.
하녀들은 숙덕거렸다.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데이지가 저렇게 바뀐 거지?”
“데이지 때문에 잔뜩 화상을 입고도 용서해 주셨잖아. 역시 엄청 너그러우신 분인 게 틀림없어.”
그리고 샐리의 방에 들어갔던 몇몇 이들의 말이 더해지자 샐리에 대한 평은 빠른 속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샐리는 주로 방에서 식사를 했는데 방에서 나온 빈 접시 안에는 종종 작은 쪽지가 담겨 있다고 했다.
[호두파이가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어요.]
[입맛이 없었는데 새콤한 오렌지 드레싱 덕분에 맛있게 식사를 했어요.]
쪽지가 오는 것은 아주 가끔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방 하녀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들은 늘 얼굴도 모르는 귀한 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지만 이런 식의 인사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웬 쇼냐고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쪽지가 여러 차례 계속되자 하녀들은 쪽지를 받는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저택의 가장 귀한 분인 공작이나 공작 부인의 음식보다 더 정성껏 샐리의 음식을 세팅하고는 빈 접시가 올 때를 기다렸다.
쪽지가 오지 않는 날은 뭔가 부족했나 싶어 실망해 기운이 빠졌지만, 쪽지가 담겨 있을 때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쪽지가 왔어!”
한 명이 소리치면 주방에 있던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어떤 내용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주방장이 글을 읽으면 하녀들은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하는 그녀들에게 쪽지는 아주 작지만 달콤한 선물이었다.
하루는 그런 일도 있었다. 하인들이 샐리의 방으로 엄청난 무게의 짐들을 옮기는 날이 있었다.
아무리 체격 좋은 남자들이라지만 짐을 옮기는 건 꽤 힘겨운 일이었다.
헉헉대며 2층에 있는 방까지 짐을 가지고 올라와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데이지가 시원한 레몬티를 건넸다.
“샐리 님께서 준비해 놓으라고 하셨어요. 올라오시는 데 많이 고생하실 거라고요.”
정말이지 레몬티는 너무나 시원했다. 등 뒤로 났던 땀방울이 쏙 들어갈 만큼.
샐리가 한 것은 그런 아주 소소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그 파급력은 컸다.
“우리 같은 고용인들을 그렇게 신경 써 주시다니, 샐리 님은 정말 자상하신 것 같아.”
“그냥 모자란 여자겠지.”
“너는 말을 왜 그렇게 하니? 큰일을 겪으신 분한테.”
“그러게. 화상이 심한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저택의 고용인들이 샐리에 대해 좋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호감이 생기니 안쓰러운 마음도 생겼다.
물론 여전히 샐리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이들이 많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한쪽으로 쏠린 분위기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게 다른 변화는 하녀들이 데이지 대신 샐리의 방에 들어가고 싶어 한 것이다. 에반에게 그 일을 하고 싶다고 조르는 하녀들이 부쩍 늘어났다.
에반이 첫날 데이지를 선택한 것은 다른 하녀들이 샐리의 방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였다. 갑작스런 변화에 에반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 * *
업무를 마치고 저택에 들어온 카시스는 샐리의 방을 찾았다. 끔찍한 화상을 입었다고 소문난 샐리는 아주 멀쩡하게 소파에 앉아 책자를 보고 있었다.
‘장미향이 나는군.’
샐리의 곁에 다가가자 카시스의 코끝에 연한 장미향이 났다.
에반의 이야기로는 샐리의 부탁으로 여인들이 목욕할 때 쓰는 향유와 마사지유를 주문했다고 한다.
확실히 요즘 그녀는 달라졌다. 드러난 피부부터 예전보다 부드러워 보였고 매끈했다.
붉은 머리카락에도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건만 샐리의 제멋대로 잘린 앞머리는 여전히 샐리의 얼굴을 덮은 채였다.
‘답답하군.’
결국 카시스는 슬쩍 하고 싶은 말의 운을 띄었다.
“앞머리가 그렇게 길면 불편하지 않나?”
그 말에 긴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진 샐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혀요. 몇 년을 이렇게 살아왔는걸요.”
“그래도 남들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할 텐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모자를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리니까 상관없어요. 이런 제 얼굴을 보는 사람은 데이지와 저하뿐인걸요.”
그러니까 요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어린 하녀와 카시스뿐이니 머리카락을 자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정말 에스테반 공작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감정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려면 계속 기르는 게 나아요. 원하는 길이까지 길러 넘길 생각이거든요.”
‘저렇게 쭉 얼굴을 가리고 다닐 생각이 아니라니 다행이군.’
카시스는 작은 안도감을 느끼며,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이 방을 맡고 싶다는 하녀들이 늘어나서 에반이 무척 곤란해하더군.”
카시스의 말에 샐리는 빙긋이 웃었다.
“그래요?”
“하녀만이 아니라 너에 대한 고용인들의 평가도 많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카시스는 신기한 눈으로 샐리를 바라보았다.
카시스는 저택의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대귀족 가문의 고용인들은 그들이 모시는 가문의 이름만큼이나 자부심이 높다는 것은 알았다.
게다가 샐리는 화상을 입었다는 핑계로 꽤 오랜 시간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였다. 거북이처럼 웅크린 채로 그녀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별건 아니에요. 그저 고마움을 표현했을 뿐이죠.”
샐리의 말에 카시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고용인들에게 말인가?”
그 앞에 ‘설마’라는 말이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카시스는 아주 놀라워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나는 그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어. 에스테반 공작가에 한번 들어온 고용인들은 거의 나가지 않는 것을 알고 있나? 이곳이 다른 저택들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주기 때문이야. 그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고 일을 하는 것뿐인데 왜 그들에게 고마워하는 거지?”
사실 카시스 정도만 되어도 고용인들을 무척 존중하는 편이다.
태어날 때부터 계급 사회의 맨 위에 있던 고위 귀족에게 고용인이란 당연히 자신의 발아래에서 일하는 존재였다.
같은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닌 취급을 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카시스는 뼛속까지 귀족으로 자란 자였다. 그런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 같아 샐리는 대답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나는 잘 모르겠군. 고작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진단 말인가. 그런 말보다는 물질적인 보상이 훨씬 좋은 보상이 될 것 같은데.”
카시스는 진심이었다. 그는 피라미드 계급의 최상위층에 있는 이였기에 애초에 대등한 위치의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그의 아래에 있는, 그를 섬겨야 하는 이들이었다.
카시스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윗사람에게 바라는 건 그런 겉치레가 아니라 제대로 된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카시스는 아랫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에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릿발처럼 차가운 성격임에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샐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도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지.’
고맙다는 말뿐이 아니라 좋아해, 보고 싶어 같은 누구나 쉽게 내뱉는 그런 소소하고 작은 말들도 그는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샐리는 종종 그가 얼음으로 만들어진 사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아무리 뜨거운 불꽃처럼 사랑을 해도 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녹일 수 없을 것이라고.
‘설마 이 남자는 그런 말들을 제대로 들어 본 적도, 써 본 적이 없는 걸까?’
제국의 최고위 귀족으로 태어난 그는 샐리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익혔을 것이다.
과거에는 지독히 냉정하게 느껴졌던 말들이 그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이런 걸 생각해 보았자 뭐 해.’
샐리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이 꼭 그를 아주 다른 생물체 보듯 느껴져서 카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요. 저하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귀족의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거겠죠. 저는 귀족이 아니니까요.”
샐리는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
“제가 줄 수 있는 건 아주 작은 것들뿐이에요. 고맙다는 말이나 작은 쪽지, 시원한 물이나 혹은 케이크 같은 것들이요.”
“케이크? 그런 것들이 보상이 된다고?”
카시스의 눈빛에 전에 없던 경악이 서렸다. 그는 설탕을 들이부어 만든 디저트를 끔찍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것을 아는 샐리는 데이지를 떠올렸다. 입술에 생크림을 묻히며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케이크를 먹는 데이지를 본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보는 얼굴이 될 것이다.
그 장면을 상상하자 샐리는 풋 하고 웃어 버렸다.
“그럼요. 케이크는 정말이지 훌륭한 보상이에요.”
카시스는 샐리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늘 그의 앞에선 아주 딱딱한 얼굴을 하는 그녀가 저런 식으로 웃는 것은 처음이었다.
머리카락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 너무나 답답했다.
* * *
업무를 마치고 저택으로 들어온 카시스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 엘리제가 서 있었다.
부부라고는 해도 저택에서 둘은 마주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싸늘한 눈빛의 카시스와 달리 엘리제의 눈은 한없이 따뜻했다. 엘리제를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차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샐리는 좀 괜찮나요?”
샐리라는 이름에 카시스의 시선이 엘리제를 향했다.
“저택에는 온갖 끔찍한 소문만 가득한데 별채의 방에서 나오지 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죠. 그녀만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요. 큰일이 아니기를 신께 기도드리고 있답니다.”
걱정이 한가득인 눈빛은 진심처럼 보였다. 제가 한 짓인 걸 전혀 기억 못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카시스는 이런 식으로 앨리제와 말을 섞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그녀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기로 했다.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많은 고민을 했어요. 열흘 뒤에 열리는 제 생일 파티 때 샐리를 초대하고 싶어요. 다정하고 따뜻한 분들만 초대할 생각이니 함께하면 분명 기운이 날 거예요.”
엘리제는 조심스런 손짓으로 카시스를 향해 초대장을 내밀었다. 초대장을 보는 순간 카시스의 얼굴에 냉기가 서렸다.
‘화상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초대장이라고?’
이 여자는 역시 미친 게 아닐까? 누구라도 그의 앞에 선다면 다리가 풀릴 만큼 흉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도 엘리제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연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래서 카시스는 엘리제와 짧은 대화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가 분노할수록 엘리제는 미소 지었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엄한 교육이 아니었다면 카시스는 그녀에게 욕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카시스는 거친 손짓으로 하얀 손에 들린 초대장을 낚아챘다.
“고마워요. 받아 주는 건가요?”
앨리제는 두 손을 입에 모으고는 아주 순진하게 웃었다. 그녀의 나이가 무색해질 만큼 맑은 미소였다. 그러나 카시스의 눈에는 아주 음산한 미소로만 보였다.
엘리제를 지나쳐 걷는 카시스의 귓가에 하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어떤 말들을 할지는 뻔했다.
“주인님은 왜 저렇게 냉정하실까.”
“마님이 너무 안쓰러워. 저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저런 대접을 받으시다니.”
그따위 말들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하녀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말을 걸었겠지. 엘리제의 수는 항상 뻔했고, 그 뻔한 수는 질릴 만큼 잘 먹혔다.
카시스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꽉 조여 있던 목깃을 풀어 헤쳤다. 그는 손에 들린 초대장을 끔찍하게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엘리제와 말을 섞지도 않았고 초대장 따위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받은 것은 샐리가 원했기 때문이다. 하녀에게 전해 들은 것인지 샐리는 곧 있을 엘리제의 생일 파티에 대해 알았고 그곳에 참석하고 싶어 했다.
에반이 카시스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건네받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마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군요. 마님의 생일 파티라면 에스테반 공작의 애첩이 데뷔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카시스의 얼굴은 썩 좋지 않았다.
“첫 데뷔 무대로는 좀 과하지 않나.”
엘리제의 사교계에서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녀의 생일 파티는 단순한 개인의 파티를 넘어설 것이다.
제국을 흔드는 이들이 모인 엄청난 장소에 샐리가 나타나는 것을 상상해 보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카시스에게 여전히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해괴한 모습의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별채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그녀는 매일 단조로운 원피스만 입고 있었다.
그런 샐리가 귀부인처럼 완벽한 치장을 하고 파티장에 서 있는 모습은 상상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잘해 내실 겁니다. 샐리 님은 놀랄 정도로 센스가 있으십니다.”
에반의 목소리에는 믿음이 어려 있었다.
샐리는 마냥 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교계에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외출을 하지 않는 샐리를 위해 에반은 드레스와 보석, 구두 카탈로그를 가져다주었다.
에반은 샐리가 어떤 물건을 고르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귀족 여인들의 세계는 아주 세밀하면서 어렵다. 단순히 비싼 것을 고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유행에 뒤처져서도 안 되고 고급스러움을 놓쳐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은 공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 세계에 몸담아야만 알 수 있는 안목이었다.
살면서 그런 최고급품을 보았을 리 없을 샐리였기에 에반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화려하기만 하고 품격이 없는 물건을 고르기라도 하면 조심스럽게 도와주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샐리가 고른 물건들은 아주 훌륭했다. 하나같이 아름답고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그쪽으로는 애초에 걱정하지 않았어.”
에반의 칭찬에 카시스는 자신의 기분이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아름다운 그의 얼굴에 서려 있던 찡그림은 사라져 있었다.
카시스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에반에게 몸을 맡겼다. 매일 저택에 돌아오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이 카시스의 일과였다.
에반은 섬세한 손길로 주인의 셔츠 단추를 풀어 주었다. 단추를 풀던 에반이 아, 하는 얼굴로 말했다.
“참. 샐리 님이 오늘 미용사를 불러 머리를 정리하셨습니다.”
“뭐?”
카시스의 눈이 커졌다.
“미용사가 처음 샐리 님을 보고 경악을 하더군요. 그리고 머리를 자른 뒤에는 더 경악을 했습니다.”
‘저도 그랬지만요.’ 하고 말을 이으며 에반이 낮게 웃었다. 그러나 카시스는 조금도 웃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네?”
에반이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아는 주인은 저런 식의 비속어를 쓰는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시스는 자신이 어떤 말을 내뱉었는지 알지 못했다.
카시스는 풀어진 셔츠 단추를 빠른 손길로 잠갔다. 에반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주인님, 목욕은…….”
“다녀와서 하지.”
카시스는 테이블에 놓인 초대장을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에반은 사라진 주인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욕조에서 나온 샐리는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영양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이 드러났다. 요 며칠 관리한 몸은 완벽하게 전생의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앞머리를 정리해 드러난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푸석함이 사라진 매끈한 피부. 바짝 갈라졌던 입술도 도톰해져 윤기가 흘렀고, 붉은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곱게 구불거리고 있었다.
만족한 듯 웃은 샐리는 가운을 걸친 후 소파에 몸을 기댔다. 매끈한 다리 위로 향기로운 오일이 발라졌다. 오일이 닿을수록 피부는 더더욱 촉촉하고 매끈해졌다.
‘음. 역시 기분 좋아.’
머리카락을 찰랑이게 가꾸고, 오일로 몸을 마사지하고, 소파에 누워 얼굴에 팩을 한다.
처음에는 전생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하다 보니 점점 즐거워졌다. 역시나 그녀는 이런 것을 좋아했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영양제를 머리카락에 바르며 샐리는 탁자 위에 펼쳐진 카탈로그를 눈으로 훑었다. 에반에게 부탁해 받은 패션 카탈로그였다.
최신 유행하는 헤어스타일과 향수, 드레스 같은 것들이 그려진 종이를 보는 것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이렇게 좋아한다는 걸 잊고 있었어.’
젖은 머리카락으로 순수하게 내게 어울리는 예쁜 드레스는 어떤 것일까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첩이 되고는 그 즐거움을 아예 잊어버렸다.
언제부터인가 거울을 보고 꾸미는 것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수많은 시선들에게 평가받기 위해 준비하다보니 긴장감과 초조함만이 가득했다.
유행한다는 최고급 향수를 뿌리고 정숙한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몇 시간을 들여 힘들게 꾸며 놓고도 초조했다.
미천한 신분인 것이 티가 나면 어떡하지? 그와 어울리지 않으면? 엘리제와 비교되면? 수많은 상념들이 그녀를 뒤덮었다.
“바보처럼. 그까짓 게 뭐라고.”
이제는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형편없는 몰골로도 여태껏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카시스였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던 카시스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샐리는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과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샐리는 평소와는 달리 그에게서 비누향이 나지 않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무척 이상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시선을 고정한 채 멈추어 있었다.
“저하? 무슨 일이 있나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샐리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대답이 없어 샐리는 카시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가까이 다가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카시스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샐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는 마치 샐리를 처음 보는 괴물 보듯 했다.
‘이상한 생물체를 보는 것처럼 나를 본 건 여러 번이지만 오늘은 좀 심한걸.’
샐리는 카시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조금 후 카시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를 정리했군.”
“네.”
샐리는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작게 웃었다. 몇 년 동안 얼굴을 답답하게 가리던 머리카락을 정리하니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카시스는 입을 다물고 샐리를 바라보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흔한 장신구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 밋밋한 가운을 입은 모습은 수수하기 그지없는데 어째서일까.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수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완벽하게 치장한 여인들에게도 눈길이 가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환히 드러난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샐리가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어디가 이상한가요?”
그의 시선이 평소와는 달리 영 심상치 않아 보여서였다. 그제야 카시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주…… 아주 좋아.”
여인을 칭찬하는 말이라기에는 모호한 단어였지만 그 말이 카시스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카시스는 그제야 샐리에게서 시선을 떼고 품에서 카드를 건넸다.
“그 여자가 너에게 주라더군.”
아름다운 백합꽃이 그려진 봉투에는 에스테반 공작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봉투의 겉면에는 유려하고 정갈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from. Elysee Esteban’
샐리는 카드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샐리만의 별채에서 편히 즐기던 휴식은 이제 끝난 것 같다. 이제 엘리제와 제대로 마주 볼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