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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3 외면 (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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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쾅, 샤나일이 주먹이 상을 내려침과 동시에 서신이 우수수 떨어졌다. 옆에 서 있는 궁인들이 서둘러 치우기 시작했지만 곧 다시 서신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쪽에서 묵묵히 있던 질마가 답지 않게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샤나일을 보고 조심스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아무래도 이안 공작의 뜻에 따르는 귀족들이 많은 가 봅니다. "

" 말이 되느냐? 태자비의 자리를 비우겠다는데 얼씨구나 좋아할 작자들이 반대를 해? 기가 막히는군. "

 온갖 반대와 억지에 맞서 정책을 펼쳐왔던 샤나일이지만 이런 반대는 하다하다 처음이라 헛웃음을 들이켰다.

" 그 노인네가 무슨 꿍꿍이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질 않아…….  "

" 어차피 명문가들이 압박을 주면 순순히 넘어가지 않을까요? "

" 현 귀족 실세는 이안 공작이다. 명문가들이 합세한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오히려 나머지 귀족들이 싫어할 것이 뻔하지. "

" 예? "

 샤나일은 바닥에 버려도 버려도 보이는 나이시라 폐비의 반대 상소를 보고 한숨을 쉬며 마저 답해주었다.

" 지금의 느칸다는 귀족들이 보기에 썩 괜찮은 외척이다. 쉽게 말하자면, 안 그래도 큰 가문들이 황후의 외척이라 떵떵거리는 꼴을 못 보겠다는 뜻이다. "

 언제는 상대적으로 약소국 출신의 왕비라 고깝게 보지 않았냐며 질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 게다가 그 가문끼리도 서로 후보를 올린다고 싸운다 치면, 시라의 폐비 건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게 될 것인데…. "

 정말로 아까워하는 듯한 기색에 질마가 저도 모르게 툭 질문을 뱉었다.

" 괜찮으십니까, 전하는? "

 뱉고 나서 아차 싶어 뒤늦게 질마가 입을 막았지만 샤나일은 이미 똑똑히 들은 뒤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내지도, 슬퍼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 이안 공작을 보아야겠다. "

" 전하, 공작께선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

 벽처럼 가만히 서 있던 궁인이 무언가를 전해 들었는지 낮게 고했다. 샤나일은 소름 돋는 그의 등장 소식에 마저 서신들을 밀어내었다.

" 알현 시각도 아니거늘. 뭐, 상관없겠지. 들라하라. "

 샤나일의 허락과 함께 발을 들인 이안 공작은 황태자의 발치에 떨어진 종이 뭉치들을 보고 짧게 웃었다.

" 이런. 방이 엉망입니다, 그려. 제가 좀 더 늦게 왔어야했나 봅니다. "

" 그러게 말이오, 공작. 법도에 한 치 어긋남 없던 그대가 아니오? 알현을 청하기엔 너무 이른 시각일 터인데. "

 앉으라는 샤나일의 손짓에 이안 공작이 느긋하게 고개를 숙이곤 의자에 앉았다. 상당히 편해 보이는 것과 다르게 꼿꼿한 자세가 빈틈이 없어 보였다.

" 찾아온 용건이 무엇이오? "

" 전하와 같은 용건이지 싶습니다. "

 샤나일은 저도 모르게 우그러뜨린 서신의 끝자락을 놓고 웃는 얼굴로 상냥히 물었다.

" 경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바쁜 몸이니 간단히 말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

" 어찌 신하가 먼저 입을 뗄 수 있겠습니까? "

 자꾸만 약 올리는 듯한 느낌에 샤나일은 상냥한 얼굴을 집어치우고 평소대로 얼음장같이 얼굴을 굳혔다.

"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좋소. 나는 가급적 나이시라 왕비를 빨리 폐비시켰으면 하오. "

"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전하. 성대한 식을 열어 태자비로 맞이하실 거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렴 두 분 다 호기로우시니 다툼이 잦을 수 있지요. 허나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하지 않습니까? "

 금방 화해하실 겁니다. 이안 공작은 특유의 노인 웃음소리를 내며 어울리지 않게 과장스러운 말을 주절거렸다. 그와 동시에 샤나일은 픽 웃었다. 짐작이 안 가던 그의 속내가 드디어 어렴풋하게 잡힐 듯 했다.

" 뭔가 안 것이로군. "

" 어릴 때처럼 눈치가 비상하십니다. "

 샤나일은 긴 대화가 될 것이라 생각해서 불러들였던 다과를 물리고 흥미로운 눈으로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 일단은 들어보지. "

" 첫째로, 외척 걱정이 없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도 선황 폐하 시절에 외척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배워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

" 그보단 마닉스 공작의 딸이 가장 유력한 태자비로 꼽히기 때문에, 라는 이유가 좀 더 나를 납득시킬 수 있을 터인데. "

 가장 마찰이 잦은 경쟁 가문의 이름에 이안 공작은 아무렇지 않게 그럴 수도 있지요, 라며 어물쩍 넘어갔다.

" 둘째로, 나이시라 왕비님만한 분이 또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

" 경에게도 딸이 있지 않던가? 섭섭하겠군. "

" 아끼는 여식이나 태자비에 어울리는 아이는 아닙니다. 물론 제 여식도 잘 알고 있지요. "

 생각보다 냉정한 발언에 샤나일은 머릿속에서 짐작했던 태자비 후보에서 이안 공작의 딸을 지워냈다.

" 전하. 저는 오십 년이란 세월을 황궁에서 일했습니다. 사람 보는 안목은 누구보다도 탁월하다 자부하지요. 결왕 전하가 아닌, 우왕 전하를 모셔야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만드신 것도 그 분이십니다. "

 교묘한 행적.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결왕의 세력들. 이안 공작은 누구보다도 나이시라의 일처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방대한 세력이 있다는 것이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를 누구보다도 뒷받침해주기 딱 좋은 이였다.

" 그렇군. 내가 온전해지기 전에 이미 그대는 비와 여러 차례 얘기해본 적이 있었지. "

" 그리고 셋째는…. "

" 막대한 권력과 부인가? "

" ……그렇습니다, 전하. "

 나이시라가 십년을 넘게 일궈낸 세력과 자금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자원이었다. 그리고 이안 공작은 그걸 놓칠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 게 문제였다.

" 외척 걱정도 없으며 전하를 성심성의껏 도울 분이십니다. 어떤 군주가 그런 반려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

 그랬다. 샤나일도 원했으니까. 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처지인 것을 어떻게 그에게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샤나일은 당연히 동조할거라 믿는 이안 공작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 전하! "

" 나이시라 왕비는 폐비될 것이다. 그리해야만 해. "

" 어리석은 선택이십니다! "

 샤나일은 더는 듣지 않기 위해 물러가라 손짓해보였다. 이안 공작은 납득하지 못한 눈빛으로 얌전히 물러났다. 귀족들이 그를 따르는 이상 순순히 나이시라를 폐비시킬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 테니까.

" 쉬운 일 하나 없군. "

" ……루시스는 내일 부르도록 할까요? "

 아침부터 피곤해 보이는 안색에 질마가 물었다.

" 괜찮다. 촉망받는 인재를 또 불러낼 순 없지. "

 알현 시각까지는 좀 남았으니 괜찮다는 샤나일의 계산법이 질마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을 만나고, 알현 때도 만나고, 오후에는 회의에 참석해야하고, 저녁에는 가득 쌓인 서신들을 처리해야한다. 하루 종일 바쁜 그를 보며 느긋하게 쉬고 있을 황제가 떠올라 혀를 찼다. 이럴 거면 황제자리라도 물려주고 일을 시키던가.

" 전하. 이칸타히 자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샤나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안 공작과는 다르게 커다란 체격의 사내가 절도 있게 들어와 고개를 숙여보였다.

" 인사는 되었다. 앉거라. "

 긴장한 얼굴로 앉은 채 딱딱하게 굳어있는 루시스를 보며 샤나일은 물렸던 다시금 다과를 가져오라 시켰다.

" 별 것은 아니다만 루시스, 네 가문이 조금 특이해서 말이다. "

" 하문하십시오. "

 마치 모든 것을 시인할 것 같은 태도에 샤나일은 둘러 둘러 물어보기로 했다. 직설적으로 물었다간 마치 루시스가 목이라도 맬 것만 같았다.

" 듣자하니 무녀 집안이라 하던데. "

" 그렇습니다. "

" 내가 겪었던 괴현상에 대해 아는 자가 아무도 없더군. 너희 가문에 대해 듣고 혹여나 아는 바가 있을까 부른 것이다. "

" 괴현상이라 하심은? "

" 사람들이 단체로 이성을 잃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현상 말이다. "

 루시스는 그런 것이 있었나하고 의문에 빠져 모른다고 답하려 할 때였다.

' 조심해라. 이번에 들어온 괴물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더구나. '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가주의 옛 말씀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루시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떼었다.

" ……송구하나 정확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

" 그렇군. 가보아도 좋다. "

 경직된 채로 루시스가 나가려는 찰나 샤나일이 무심하게 한마디를 흘렸다.

" 네 형에게 안부전해주거라. "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샤나일은 다시 올라온 서신 더미를 하나씩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 이칸타히 가에 대해 정확히 알아 와라. "

" 그 입양된 자가 범인이라 보십니까? "

" 글쎄. 설령 범인과 관계가 없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루시스의 반응으로 뭔가 있긴 있다는 거겠지. 표정관리가 서투르기 짝이 없어. "

 무관들이 다 그렇죠. 질마는 자기는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지더니 이내 인기척 없이 사내 하나가  나타나 질마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 왕비님 수하가 온 모양입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

" 타린인가? 곧 있으면 알현 시간이니 조금 있다가……. "

" 금방 끝납니다. "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샤나일이 날카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샤나일은 잿빛 머리칼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항상 탐탁지 않게 자신을 바라보던, 불쾌한 시선의 주인이었다.

" ……일신이라 했던가? 무례한 방문이로군. "

" 긴말 않겠습니다. 궁주께 보상으로 합당할만한 것을 요구해주셨으면 합니다. "

" 하. "

 상당히 건방진 태도에 샤나일은 저도 모르게 기가 찬 웃음소리를 뱉었다.

" 시라가 시킨 일은 아닌 듯한데. "

" 시키신 일은 아니나 뜻은 같지요. "

 일신은 나이시라가 보낸 서신을 품에 꺼냈으나 샤나일에게 건네주진 않았다.

" 궁주께선 전하께 빚지셨다 생각하십니다. 아마 빚을 갚기 전에는 계속 이렇게 서신을 보내시겠지요. "

" 그래서? "

" 그러니 적당한 것을 요구해주십시오. 그리고 나면 더 이상 궁주께서 전하와 닿을 일은 없을 겁니다. "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나 샤나일은 그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품에 한 아름 안겨다 주면 주었지 가지고 있는 것을 뺏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답이 없는 샤나일을 재촉하듯 일신이 그가 숨긴 심정을 드러내보였다.

" 아니면 계속 궁주와 연을 닿게 하고 싶었습니까? "

 정말 보지 못하는 대신이었나 보다. 보지 못하는 대신 나이시라가 보낸 서신을 놓지 못했나 보다. 샤나일은 그의 말에 웃기는 소리라며 되받아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서신에 담겨진 정갈한 글씨체와 말하는 것처럼 빼다 닮은 문체, 어느 하나라도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것마저 없으면 어떡하라고 외치는 속마음은 감춘 채 샤나일은 일신에게 등을 보였다.

" 이렇게까지 찾아왔으면 적당히 생각해둔 바가 있겠지. 그대로 시라에게 전하거라. "

" 무례히 방문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이번이 마지막 방문이겠지만 말입니다. "

 끝까지 건방진 그녀의 수족이 떠난 것을 알면서도 샤나일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들고 가버린 서신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을지 뻔히 알면서 보고 싶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기에.

*

" 와. "

 예르민은 평소에 보기 힘든 동생의 모습에 주저 없이 감탄사를 뱉었다.

" 무서운걸. 과연 차기 대장군감이야. "

 부리나케 돌아오자마자 예르민이 있는 방을 거칠게 들어온 루시스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안색이었다.

" 무슨 짓 했어? "

" 꼭 내 짓이란 법 있나. "

 섭섭하다며 웃는 예르민의 얼굴은 전혀 섭섭해 보이지 않았다. 루시스는 문을 쾅 닫고는 침상에 앉아있는 그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었다.

" 무슨 짓을 하긴 했다는 거네. "

" 넌 참 쓸데없는 곳에서 예리하단 말이야. "

 쾅! 루시스의 주먹이 벽에 부딪히자 걸려있던 그림이 툭하니 침상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 말해, 예르민. 전하께 무슨 짓을 한 거야. "

" 아. 알아차렸단 말이지. 좀 곤란한데. "

 아직은 아니거든. 예르민이 웃으며 속삭이자 루시스는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당연히 무슨 일이냐, 난 아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 예르민! "

" 별 거 아니야. 그냥 좀 힘이 주체가 안됐는데 거기 네 소중하디 소중한 전하께서 계셨다고. 내가 전하더러 거기 있으라고 한건 아니잖아? "

 루시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침상에 툭 떨어진 예르민은 이내 편안하게 누워 동생을 보며 얄밉게 웃었다.

" 잘못했다간 황족 암살로 몰릴 수 있는 일이었어. 알아? "

" 그러니까. 그렇게 큰 일로 번지지 않게 루시스, 네가 날 좀 도와야겠다. "

" 뭐? "

 두고 보면 알거라며 예르민은 루시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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