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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2 외면 (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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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크라힘이 죽고 나서 자연스럽게 그의 행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시신들이 드러나고 순식간에 신전에 대한 폭동이 일어났다. 왕좌는 비었고, 받아줄 곳 없는 백성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더 치솟았다. 그 덕택에 왕자들이 오히려 왕의 자리를 마다했으니 애먼 귀족들은 빈 용상을 보고 골을 싸매야 했다.

 나이시라는 소란스러운 바깥을 작은 창을 통해 힐끗 내려다보았다. 신전을 부수겠다고 이것저것 손에 들어 모여 움직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다.

" 느칸다 망했네요. 그죠? "

" 나라가 그리 쉽게 망하지는 않지. 누가 용상에 앉느냐에 따라 재정비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달라질 뿐. "

 딱히 느칸다의 존속에 관심이 없는 타린은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목표였던 아크라힘은 죽었고 더 이상 걸림돌은 없었으니까.

" 그나저나 진짜 쳐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좀 멍청한 것 같기도 하구. "

" 손쉬운 방법을 두고 돌아갈 위인은 아니잖느냐. 급한 성정은 변하기가 쉽지 않지. 예상이 너무 잘 맞아서 놀랍긴 하다만……. "

 나이시라가 머물 곳을 이라프 내부에서부터 흘려두었고 자연스럽게 첩자가 접했을 것이다. 헤우리들이 모두 신전에 가있으니 소수의 인원으로 나이시라를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겨 쳐들어왔겠지만, 샤나일이 기다리고 있으리란 생각은 못했으리라.

" 헌데 좀 이상하긴 하구나. 전하의 모습이 신전에 보이지 않았다면 필히 의심할 여지가 있었을 터인데. "

 첫 번째 습격에서 샤나일이 나이시라의 생존을 우선한다는 게 드러난 이상 그의 존재를 생각해두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미심쩍어하며 들고 있는 찻잔을 쉬이 못 내려놓는 나이시라를 보고 타린은 입을 내밀었다.

" 순간 머리가 안 돌아갔나 보죠. "

" 그 헤우리들은 어찌됐느냐? "

 태평스럽기만 하던 타린의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굳었다.

" …뭐 제가 말했던 대로 됐어요. 강제로 아메누리에 돌아갔으니 자격도, 힘도 박탈당했겠죠. "

 타린이 시원스레 웃어 보일 줄 알았던 나이시라는 그녀의 조금 경직된 어투를 알아차리고 뒷말대신 시무룩해진 소녀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 그 바보 머저리같은게……. "

 나이시라의 어깨에 파묻힌 채 타린은 아이반을 기운 빠진 목소리로 질책했다. 자신과 함께 오랜 세월을 지내왔던 이답게 현명한 자였다. 왜 하필 그가, 왜 하필 아크라힘의 손을 잡은 건지.

 모로우가 나이시라의 죽음을 확실시 여기며 비웃을 때, 타린은 둘도 없을 바보를 보는 것처럼 과장스럽게 이야기했다.

" 저런, 우리 궁주한테는 아직까지 헤우리가 둘이나 붙어있는 걸 까먹었어? "

 가이한과 한이 남아있는 것을 지적하며 타린이 낄낄거렸지만 모로우는 괘념치 않은 듯 보였다. 오히려 여유롭기까지 했다.

" 그대야말로 정신체와의 계약에서 맹점을 모르오? 육신이 없다는 것은 계약자의 육신을 움직인다는 뜻. 연약해빠진 산나의 몸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런지 모르겠군. 아, 실체화를 하는 놈도 있던가? 그래보았자 어디까지나 반 정신체가 아니오. 그 여인이 불안정해지면 그 놈도 제구실을 못할 것이 뻔할 터인데. "

 칫, 타린이 바람 빠진 소릴 내뱉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라 대꾸할 거리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육신이 없는 헤우리들은 물체에 기생하지 않고선 자아를 표출할 수 없었기에 하등하게 취급당하곤 했다. 계약에 있어서는 유리한 점이 있었지만, 모로우의 말처럼 근본 자체가 불안정하다.

 타린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모로우 대신 아이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 아이반, 저 놈들이야 미친 걸로 유명했다지만 넌 왜 그래? 무슨 일인 건데. "

 아이반은 지친 기색으로 웃어보였다. 아마 자신이 여기서 말하는 것을 거절하면 타린은 다시는 묻지 않을 것이다. 정말 말없이 죽이려만 들겠지.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 타린, 넌 이자러스를 이해할 수 있겠어? "

 초대 드리슬란의 황제이자 힘을 빼앗겨 자멸한 지기의 이름에 타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허망하게 가 버린 그를 타린은 안타까워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었다. 그것은 순리와 질서를 당연시 여기던 아이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강제로 남겨져 불완전해진 헤우리의 힘을 얻은 인간의 행보를 걱정했다.

" 너도 이해 못 했잖아. 왜, 새삼 이해가 돼? 뭐 때문에? "

" 그래,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내가 우습겠지. 하지만, 타린. 지금의 난 이자러스를 이해할 수 있어. "

" 그래서 금제를 없애시겠다? "

 높낮이가 사라진 타린의 말소리는 어느새 아이반의 왼쪽 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가 몸을 틀어 회피하는 순간, 타린의 주먹이 꽂히면서 그 자리의 땅이 푹 꺼졌다.

" 어떻게 우리가 그걸 노리는 지……. "

" 그게 지금 중요해? "

 타린은 손에 묻은 흙을 탈탈 털면서 조금 뻐근해진 목을 풀었다.

" 이자러스가 시도 때도 없이 얘기한 그 말에 홀린 건가? "

" 홀린 게 아냐. 찬찬히 따져보면……. "

" 따져? 따질 게 뭐가 있는데. 금제가 없었다면 행복해졌을 거라 믿는 그 놈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너부터 찬찬히 따져봐. 금제 없애는 게 제대로 된 일이라고? "

" 그래! 제대로 된 일이 아니지! "

 아이반의 울부짖음과 비슷한 소리침에 타린이 움직이려했던 다리에서 힘을 뺐다.

" 나도 알아! 아니, 너보다 잘 알지. 예전에 시도했던 병신들을 본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꼭 필요하다면 어쩔 건데? 이렇게라도 안하면 안 되는 것을, 이렇게라도……. "

 단정했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지는 것을 본 타린은 깊은 한숨을 뱉는 대신 삼켰다.

" 포기해, 아이반. 넌 우리를 이길 수 없어. 그러니까 금제도 못 없애. "

" 아니, 할 수 있어. 모로우의 말 대로 이타라희는 죽을 테니까. 그럼 더 이상 방해는 없어지겠지. "

 말귀가 어두워진 지기의 총기 잃은 눈빛을 보고 타린은 가볍게 그를 잡아채 아래로 깔아뭉갰다. 이렇게 힘없이 나약해졌으면서. 타린은 사라진 표정처럼 밋밋한 어투로 지기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게 내가 포기하랬잖아?

 아이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몸이 강제로 옮겨지고 있었다. 아크라힘이 죽은 것이다.

" 잘 가, 아이반. "

" 아, 안 돼. 타린, 이렇게는 안 돼. 제발……. "

 점점 느껴지는 익숙한 감각에 아이반은 거칠게 저항했다. 희미해져가는 손발의 모습에 아이반은 억지로 버티려 애썼다. 다급한 그의 시야 속에서 다른 헤우리들 역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금제를 어긴 대가는 혹독하다. 삼군장인 자신이 힘을 잃고 아메누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뜻이었다.

 아이반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지기의 손을 부여잡고 절규와 같은 외침을 남겼다.

" 타린, 내 딸, 내 아이 무사한지…! "

 결국에는 그런 것이었나. 타린은 여태까지 필사적이었을 지기의 마지막 모습을 끝까지 본 후 고개를 내렸다. 찢겨진 팔목의 소매가 너덜거렸다.

" 이 놈이나 저 놈이나……. "

 제 자식을 부탁하기만 하고 사라진 무책임한 놈들. 왜 이렇게 끝이 기구한 팔자들이냐며 타린이 콧등을 찡그렸다.

" 누구 말이냐? "

" 아니에요, 궁주. 그냥 도움 안 되는 놈들이 떠올라서요. "

 고개를 회회 젓던 타린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물론 반복하는 동안 차는 이미 식어빠진 뒤였다.

 누가 보아도 고민이 있다는 역력한 태도에 나이시라는 슬그머니 타린의 손에서 잔을 뺏은 뒤 빈 손을 마주 잡았다.

" 왜 그러느냐. "

" ……궁주, 죄송한데 뭐 좀 찾아봐도 될까요. "

" 그럼. "

"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

" 괜찮다. "

 타린은 한숨을 폭 쉬었다. 이래서 나이시라에게 말하기 싫었던 것이다.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려도 될 입장에서 그녀는 자신을 꼭 동생처럼 여기며 오냐오냐해주고 있었다. 지금도 타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지 않는가.

 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피해 무심코 고개를 살짝 올렸던 타린은, 이번엔 반대로 고민이 있어 보이는 나이시라의 한숨을 포착했다.

" 오늘 받은 서신 때문에 그래요? "

 나이시라는 탁자위에 놓인 작은 종이 때문에 미묘한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이 끝난 직후, 마치 볼일 다 본 것처럼 샤나일은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심지어 빚을 청산하기 위해 찾아뵙겠다고 한 나이시라의 청마저 거절하고 그녀의 서신에 간간히 답문만 보내고 있었다. 오늘 받은 서신만 해도 그랬다. 간결하지만 격식에 맞춘, 완곡하게 표현한 거절이 담겨 있었다.

" 빚을 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헷갈리시는 거죠? "

 무의식적으로 계속 쓸어내리고 있던 손이 멈칫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느릿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곤 자조적인 미소로 답했다.

" 첫 열병을 앓으면 약도 없다 하더니, 딱 내가 그 짝이 아니냐. "

 처음부터 너무 행복해서 문제였다. 나이시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제 사람이라서, 꿈꾸던 대로 자신을 아껴주어서, 그저 존재만으로 감사한 사람이어서. 그것이 문제였다.

" ……만나러 가보시던가요. "

" 뭐? "

 불퉁한 타린의 목소리에 나이시라는 놀란 기색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수족들에게 있어 샤나일은 아크라힘과 마찬가지의 원수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빚을 진 이 상황에서 나이시라의 뜻에 따라 가만히 있는 것 뿐.

 타린 역시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지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 어차피 천년만년 끌어안고 사실 거잖아요. 그냥 속 시원하게 만나서 해결하세요. 만나고 나서 결심하면 뭐라도 나오겠죠. 잊던가……. "

 용서를 하던가. 타린은 용서라는 단어가 싫어서 쏙 삼켰다. 어느 수족이 제 주인을 죄인처럼 매질하라 명령 내린 사람을 위해 용서하라는 말을 해주겠는가.

 뒷말을 삼키긴 했지만 나이시라는 다 알아 들을 거라 생각한 타린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나이시라는 그녀가 삼킨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어느 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 미안하구나. "

" 예? "

" 난 전하를 용서하고 싶지 않다. "

 정말 예상과는 다른 말이라 타린이 고개를 들어 나이시라의 눈을 보았다.

" 내가 너무 못돼 보이느냐? "

" 말이 되세요? 그게 당연한 거죠! 궁주가 독방에서 받은 고통이 얼만데! "

" 그래, 몸도 힘들었지. "

 때때로 제때 아물지 못한 상처들은 이따금씩 그녀를 이유 없이 지치게 만들었다. 제 나이 또래 여인들이 활발히 웃으며 사는 것과는 천지차이 나는 것을 볼 때면 다시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 헌데 그것보단, 그가 날 내쫓으려 했다는 사실이 더 괴롭더구나. "

" 내쫓다니요? "

" 모르겠느냐? 전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나처럼 득과 실을 쫓아 더 나은 패를 곁에 두는 법이지. 그리고, 그것에 나는 해당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

 아마 샤나일이 나이시라에게 아무 감정을 품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매질은 받지 않았겠지만 느칸다로 쫓겨나는 것은 기정사실이란 소리였다. 결국에 옆에 있길 바라는 것은 지금처럼 혼자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 결국에는 매한가지인 것을. 결국에는, 샨은 없는 것을……. "

 지르가는 보았을 것이다. 나이시라의 갈등을 보며 혀를 찼었다. 쉬이 인정할 수 없어 힘겹게 발버둥치는 그녀의 머릿속을 꿰뚫고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유일한 버팀목임을 알면서도 냉정하게 대신해서 끊어 내줄 수는 없었기에. 그저 바람처럼 멀리서 툭 던지는 것이 지르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버리려면 둘 다 버리거라. '

 흘려들어오듯 귓가에 맴도는 지르가의 말에 나이시라는 속으로 되물었다.

' 제가 어찌 버립니까. 제가, 샨을, 어찌요? '

' 허면 샤나일이란 자는 버릴 수 있다는 소리군. '

 자연스럽게 이어져 나올 답을, 그때 나이시라는 놓치고 말았다. 그녀의 머뭇거림에 지르가가 대신 입을 열었다.

'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시라. 결국에는 같은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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