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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1 외면 (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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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린이 그렇게 벼르고 벼르던 날이 다가왔다. 마윈이 엄선한 소수 정예군들은 신전을 습격할 준비를 하고, 타린을 비롯한 수족들은 가볍게 몸을 풀며 곧 있을 맞대결에 흥분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타린 혼자서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나이시라의 숙적을 처단하는 중대한 일인데도 싱글벙글한 타린의 얼굴에 일신이 불퉁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 …너무 기뻐하시는 거 아닙니까? 위험한 일입니다, 이건. "

" 내가 장담하는데, 걔네는 궁주한테 손 하나 까닥 못해. 그 전에 나한테 죽을 테니까. "

 저 잘난 말은 당해낼 수가 없었기에 그는 대꾸 없이 재정비에 신경 쓰기로 했다. 

" 궁주가 또 무슨 걱정이 있으시길래 이러게 표정이 어두우실까? "

 느칸다 지부 가장 깊은 방, 철통같은 엄호 속에서 나이시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이리아는 온갖 걱정과 망설임 속에서 싸우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이 짐작이 되어 안타까움에 한숨을 쉬었다. 확실하게 아무 피해 없이 끝날 거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 이리아. 내가 뻔히 짐 될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나 혼자 안전한 곳에 있는 것이 편치가 않아. "

" 궁주……. "

" 그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까 두렵기만 해……. "

 타린과 이리아가 처음 본 나이시라는 쓰러진 수족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자결하기 직전이었다.

" 궁주, 일신도 있고 작시아도 있고 무엇보다, 타린이 있잖아요? 장담해요. 전 타린이 진다는 걸 상상해볼 수가 없는걸요. "

" 그래, 그렇지. 삼군장이라 하였지. "

 아이반 역시 삼군장이란 말은 조용히 삼킨 이리아는 그녀의 등을 껴안고 다독였다.

" 믿어주셔요 우리를. "

 반드시 죽지 않고 나이시라의 곁에서 그녀를 도울 참이었다. 불확실한 것에 반드시라는 말을 붙이는 걸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모든 수를 써서라도 이루어지게 만드리라 다짐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자취를 감춘 해를 보고 일신이 마지막으로 그들의 계획을 되짚었다. 물론 꼼꼼한 그의 말에 타린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 우리가 먼저 움직이고 나면 마윈이 신전 지하로 움직일 겁니다. 곧 있으면 제물을 넘겨받을 텐데, 무조건 그들이 죽기 전에 일을 끝내야 됩니다. 염원을 공급받으면 골치 아파질 테니. "

" 어차피 제물로 받쳐진 사람 다 구해낼 거잖아. "

" 만약이란 게 있으니까요. "

 신전 쪽에서 제물로 염원을 쥐어짜내기 전, 그러니까 아크라힘의 염원으로는 버티기 가장 힘들어질 때가 목적이었다. 가장 불안정하고 약해질 때를 노리는 것인데 제물로 끌려 들어온 사람이 죽는다면 결국 제대로 맞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좋아, 좋아. 그럼 신전 한가운데서 난리 좀 쳐보실까나. "

 저번과는 달리 일신이 합세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하드마저 실력을 갈고 닦아 어느 정도 제몫을 해낼 것이다. 그러니 방해 없이 자신은 오롯하게 아이반과 싸울 테고, 승리하는 것은 장담하건데 이쪽이었다.

" 옵니다. "

 이리아가 얇게 막을 펼쳤다. 순식간에 다른 공간이 된 것처럼 바람이 막에 부딪혀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이쪽의 인기척은 느낄 수 없을 터였다.

 기다란 흰 기둥 사이로 아크라힘이 뒤의 신관과 헤우리들을 이끌고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 준비는? "

" 송구하오나 전하, 뒤늦게 도착한 곳이 있는지라 조금만 기다려주시옵소서. "

 그야말로 머리를 바닥에 부딪칠 정도로 허리를 굽실거리는 제물 관리인은 사치스러운 장신구를 온 몸에 휘감아, 주위의 단정하게 차려입은 신관들과 비교되었다.

 아크라힘이 미간을 찌푸린 채 중앙에서 기다리는 동안 신전의 높은 기둥 위에 숨어있던 일신과 이리아가 투닥거렸다.

" 모로우는 제가 맡죠. "

" 어머, 치사해라. 저도 진 빚이 있는걸요. "

" 니페가 남지 않습니까? "

" 그런 할 줄 아는 것 없는 꼬맹이는 관심 없는데 말이어요. 양보해주시지요? "

" 안 될 말씀입니다. 궁주를 끝까지 쫓은 게 그 자식이라며요? "

" 그러니 더더욱 제가 맡아야죠. "

" 먼저 치는 사람이 임자! "

 마지막 말은 타린의 외침이었다. 그렇게 대뜸 소리친 타린은 숨겨왔던 흉포함을 드러내며 밑에 있던 아이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그것을 기점으로 너나할것 없이 달려든 것은 당연지사였다.

" 감히 버러지들이……! "

 순식간에 퍼진 아수라장에 아크라힘이 분개해하며 이를 갈았지만 재빠르게 니페가 달려들어 아크라힘을 데리고 사라졌다. 가장 먼저 없애야 할 목표가 사라졌지만 타린은 씩 웃었다.

" 꽤나 여유롭네, 타린. 나름 내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

" 아하, 물론 만만치 않지. 이렇게 오래 상대할만한 놈이 몇이나 되겠어? "

 말을 끝으로 타린의 손이 아이반의 옆구리를 비껴나갔다. 옷자락이 뜯어져 옆으로 떨어졌다. 핏방울 역시.

" ……진심이로군. "

 떨어져 나간 살점을 보고 아이반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오랜 지기 중 하나이자, 같은 삼군장 중 하나인 타린이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별수 없었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길이었지만 그는 최대한으로 버텨야했다. 그리기 위해 금제를 어겨가며 남았으니까.

" 미안, 아이반. 몇 안 남은 지기를 죽이게 되서 슬프긴 한데 사실 지금은 썩 미안하진 않아. "

 내가 너무 실망을 많이 해서. 타린이 들끓는 목 울림소리를 내며 강철 같은 손으로 그의 급소를 노리고 뻗었다.

 아이반은 힘겹게 피하는 와중에 주변을 훑었다.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모로우는 이리아와 일신에게 붙잡혀 고전을 면치 못하고 나머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일 문제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힘이었다. 임시방편으로 손잡은 아크라힘의 추악한 염원은 자신을 머무르게 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제물로 잡혀온 인간들의 염원을 먹어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 빌어먹을! "

" 빌어먹을 것 같았으면 네 결정을 돌리려고 했어야지. "

 차게 이죽거리는 타린의 말소리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살고자 노력했다. 최상의 상태로 맞붙어도 이기기 힘든 상대였지만 그동안의 연륜과 오래된 지기의 공격습성을 기억한 그는 어찌어찌 피할 수 있긴 했다. 이곳저곳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것을 빼면.

" 제법, 재회 인사가 거치구료. "

 부채로 일신의 검 날을 막으며 모로우는 자신과 비슷한 공격을 퍼붓는 이리아의 사나운 바람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여야했다.

" 다리를 분질러준 값은 갚아야하지 않겠어요? "

" 보기보다 뒤끝이 긴 여인이로군. 허나 이 몸과 놀기에는 썩 마땅치 않아 흥이 나질 않소이다. "

" 제대로 피하고 그런 소리나 하셔요. "

 말 그대로 이리아의 바람은 모로우의 다음 동작을 읽어내듯 정확한 위치에 꽂혔다. 그의 몸이 너덜너덜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제대로 화가 난 듯한 이리아의 평소와 다른 기색과 몸놀림에 일신이 혀를 내둘렀다. 여태껏 제대로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던 일신은 과연 삼군장의 지기다워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로 끄덕이고 있었다.

" 그렇게 달려들어 보았자 어차피 이쪽의 승리거늘. "

 모로우가 안타깝기 짝이 없다며 혀를 끌끌 찼다. 물론 어이가 없는 일신은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 상황 판단 능력이 모자라나 봅니다. 지고 싶어도 질 수 없을 정도인데 말입니다. "

" 허, 모르겠소? 우리는 이른바 왕 놀이 중이오. 상대편의 왕을 먼저 잡는 편이 이기는 놀이 말이오. "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된다면 가장 먼저 아크라힘의 목을 치는 것이 가장 첫 번째 계획이었다. 물론 니페가 데려갈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별 차질 없이 두 번째 계획대로 헤우리들을 상대하고 있던 거였다.

 하지만 그들이 이를 들먹인다는 것은, 곧 나이시라를 노린다는 말과 진배없기에 일신의 눈초리는 사나워질 수밖에 없었다. 니페를 뺀 헤우리들은 이곳에 있는데 누가 그녀를 노릴 수 있단 말인가.

" 말이라는 것은 새기 마련이지. 그대들이 몸담고 있는 곳에 산나가 얼만지는 아시오? 크면 클수록, 새어나오는 말도 많아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

 자신들의 계획날짜가 이미 드러났다는 뜻이었다. 즉,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타린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너무 빠르게 니페가 즉각 대응한다 싶었다.

" 그래서? 우리 궁주를 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 물론, 너무 쉽지. "

 모로우가 큭큭 웃으며 속삭였다. 제 아비의 손에 죽게 될 불쌍한 여인의 죽음을 미리 애도해주는 것은 어떠냐며.

" 쥐새끼처럼 숨어있었군, 나이시라. "

 세상에서 다시는 듣지 않기를 바랐던 끔찍한 음성이 나이시라의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환청이길 수도 없이 바라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철통같이 지켜지고 있을 방 안에 감쪽같이 나타난 저주스러운 아버지가 일그러진 틈 사이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이시라는 그 균열이 무엇인지, 함께 붙어있는 소년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따라 들어오는 왕의 수하들을 보고 짧게 탄식했다. 거대해진 이라프에서의 완벽한 비밀은 만들어질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느칸다 왕에게 별 불만 없는 이들이 얼마나 태만하게 굴었을지 알아차렸어야 했다.

" 다시 뵙는군요. "

 침착하다 못해 밋밋한 그녀의 반응이 아크라힘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의 표정이 더없이 일그러졌다.

" 건방진 년. "

" 여전히 입버릇이 고약하십니다. "

" 시끄럽다! 네 년만 곱게 죽었어도 이리 일이 꼬이진 않았어. 헛으로 흘러간 세월이 얼만지 아느냐! 제대로 됐어도 이미 느칸다는 제국이란 명칭을 달 수 있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나라로! "

" 누구도 넘보지 못할 자신을 꿈꾸셨겠지요. "

 잔뜩 일그러진 채 소리치는 아비 앞에서 나이시라는 그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제발 죽어서 다시는 볼 일이 없기를 바랐다. 자신을 도피시킨 사실이 들통 나 죽은 양어머니와, 그저 자신을 낳았다는 죄로 죽은 친어머니를 위해서라도.

" ……왜 그리 저를 죽이려하십니까? "

" 뭐라? "

"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저를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요. 한 거라곤 그저 태어난 것 밖에 없는 그 때부터 어째서요! "

" 그게 죄니까. "

 단호하게 물음을 끊는 그의 말에 나이시라는 할 말을 잃었다. 태어난 것이 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말들이 떠올랐다.

" 그때 그러셨지요. 예언이라 직접 죽이지 못한다고. 그 예언이라는 것 때문입니까? 그게 뭐길래, 그 까짓게 뭐 길래……. "

" 감히 왕인 내 힘을 빼앗을 존재를 가만히 두는 게 말이 되느냐? 오롯하게 내 손에 들어왔어야 할 힘이다! 수백 년에 걸쳐서 드디어 나타난, 이 과인의 것이란 말이다! "

 이제는 정말 끝낼 때였다. 혈육이란 미련은 다 버리고, 손을 놓을 때였다. 성큼성큼 다가와 자신의 손에 단도를 쥐게 만드는 것을 나이시라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 자결을 시킬 생각만 했지, 이 방법은 몰랐던 것이 참 안타까워. 이런 묘수를 진즉 생각해내지 못하다니. "

 힘이 빠진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나이시라의 손에 검을 쥐어준 후, 그녀의 목에 가져다대며 아크라힘은 눈을 번들거렸다.

" ……혹시나, 했습니다. "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크라힘이 멈칫했다.

" 혹시나, 마음이 바뀌실 지도 모른다. 여태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 생각 하려했지요. 복수하겠노라 다짐하며 살았을 때도 말입니다. 그런데……. "

 나이시라는 가만히 아크라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지는 않더군요. "

 아크라힘의 왼 가슴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다.

" 네 년이, 네 년이……! "

 커다란 검이 이내 쑥하고 아크라힘의 가슴에서 빠졌다. 그와 동시에 다 쓰고 버려진 물건처럼 아크라힘이 고꾸라졌다. 뒤에는 그림자에 묶여 옴짝달싹 못한 채로 주인의 죽음을 목도한 수하들이 보였다.

" 감사합니다, 전하. "

" 감사 인사 받을 일은 아닌 것 같군. "

 피가 진득하게 묻은 검을 보던 샤나일이 쓰게 웃었다. 나이시라는 점점 방바닥을 타고 퍼지는 피를 보며 대꾸했다.

" 원래는 제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

 나이시라는 누구도 찾아가지 않을 아비의 장례식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단지 불쌍해서 그러는 것이다. 금이 간 유리병에서 물방울이 생기듯, 그녀의 눈가에서 작게 맺혔다 이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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