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47 외면 (4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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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세상 참 흉흉해졌어. 무서워서 밤길 다닐 수 있을는지 몰라. "

 왁자지껄한 주점에서 한 사내가 조금 과장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말 내용이 참 건장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인이 옆에서 웃으며 사내를 툭 쳤다.

" 무섭기는, 이 양반아. 아 산적도 때려눕히게 생겼구만 뭘 무서워하나? "

" 소문 못 들어보셨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사람이 몇인데. "

" 사라지다니? "

" 여기저기 사람들 실종되고 난리잖소. 어디 여기뿐인가? 느칸다 바깥도 난리요, 난리. "

 사내의 호들갑스러움이 통했던 것인지, 한창 마시고 떠들던 사람들이 주의가 사내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 저기 있는 공방 주인 딸도 사라졌지 뭐요. "

" 어머, 세상에. 그래서 저번에 뵈러갔을 때 상태가 안 좋으셨구먼. "

" 나도 들었는데, 옆 마을에서도 실종자가 무려 넷이나 늘었다지 뭔가. "

" 무슨 일이래요? "

 다시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런 웅성거림에서 틈을 보고 있던 사내가 마치 둘도 없는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소리를 죽였다.

" 어디 가서 이런 말하면 모가지가 오락가락하지 싶어 말 안했는데 말이오, 높으신 분이 미쳐서 잡아간다는구먼. "

" 아니, 누가? "

 사내는 부러 뜸을 들였다. 역시나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대번에 튀어나왔다.

" 내 목숨이 달린 것인데 이리 쉽게 말하기가 좀……. "

" 이 양반아, 우리 못 믿어? "

 초면에 만난 주제에 중년인이 버럭 하며 성질을 내었다. 그에 사람들이 동조하며 서운함과 조급함을 티내자 그제야 사내가 은밀히 속삭였다.

" 임금이 잡아간답디다. "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경악에 비명을 꽥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신반의하며 헛웃음을 짓는 사람, 그리곤 거짓부렁이라며 화내며 돌아가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 허참, 내 오랜만에 허무맹랑한 소리 한번 거하게 들었다. "

" 주인장 아니시오? 주점에 간다더니만 벌써 오시는구랴. "

" 기가 찬 소릴 들으니 술맛이 똑 떨어지지 않소. "

" 무슨 소리 말이오? "

" 아 글쎄……. "

 소문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나이시라가 국경선을 지나 느칸다에 입국했을 때 이미 변방 도시에는 소문이 쫙 퍼지고 난 후였다.

" 생각보다 빨리 퍼지는구나. "

" 사실을 말했으니 당연한 거죠. "

" 은연중에 수상쩍은 심증들이 제법 있었을 테니 백성들도 긴가민가하다가 믿게 될 겁니다. "

 의심하는 와중에 사소한 것 하나에 좌우되는 법이라며 일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이시라는 왕실 안까지 퍼질 때까지 걸릴 시간을 가늠하다 가볍게 혀를 찼다.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 아직 신전 측에서 나온 것은 더 없더냐? 일정을 좀 더 앞당겨야 할 터인데. "

" 아직 입니다. 본관에서 일을 꾸미는 듯 한데, 숨어들기가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

" …산 제물을 받는다면 중간 지점이 있을 것이다. 은밀히 일을 진행하지 못한 걸 보면 돈이 급했던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겠지. "

" 숨어들기 적당하겠군요. 알렘에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

 일신이 자리를 뜨고 나서 등이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던 나이시라는 물끄러미 타린을 바라보았다.

" 왜, 왜요? "

" 답변은 받아왔느냐? "

" 어……. "

 나이시라는 폐비가 되는 순간 이라프의 척살 령이 떨어질 것을 감안하고 샤나일에게 미뤄달라는 청을 타린을 통해 했었다. 그 답변을 캐묻자 타린은 우물쭈물하기만 하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샤나일과 연락이 닿아있는 것을 나이시라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별 생각 없이 시킨 일이었지만 타린은 속였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듯 했다.

" 타린, 너와 내가 계약을 맺었다하여 모든 것을 내게 알려줄 이유는 없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 인상 좀 펴거라. "

" 헤헤… 그 말씀은 전했는데요, 걱정할 필요 없대요. "

" 어찌해? 이미 폐비에 대한 상소가 올라왔어도 세 번은 올라왔을 것이다. 미루기 쉽지 않을 터인데? "

" 뭐 지가 알아서 잘 하겠죠. "

" 타린. "

 심드렁히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하는 태도에 나이시라가 낮게 꾸중하자 타린이 해맑게 웃어 보인다. 소녀의 티 없이 맑은 웃음에 나이시라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미소 짓고 말았다.

" 이번 계획에 있어 확증이 필요한 요소다. 그가 힘에 부칠 수도 있어. "

" 그 전하 잔머리 잘 돌아가잖아요. 자기 왕비 자리 하나 못 지켜요? "

 정치 쪽은 아예 귀 닫고 사는 타린의 말다웠다.

"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야. 황권이 강하다 해도 드리슬란의 명문가들이 합세한다면 뜻을 꺾진 않아도 돌리기 마련이지. 특히나 태자비의 자리다. 가만있는 것이 더 이상할 테지. "

" 아… 진짜 이런 건 딱 질색인데. "

" 역시 안 되겠다. 직접 뵈어서 말을……. "

" 아, 안 돼요! "

 타린이 당혹감에 덥석 소리 지르자 놀란 나이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마, 마, 많이 바쁘다네요, 그 전하 놈이. 암요, 바쁘죠,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다는데 바쁘겠죠. "

 누가 봐도 더 캐묻지 말아달라는 모습에 나이시라는 한숨을 쉬고 포기했다. 보나마나 자신을 위한답시고 저러는 것일 테니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수밖에.

" ……전하 뜻이 그러하시다면 서신은 느리고, 네가 계속 수고해 주어야겠구나. "

" 그렇게 할게요. "

 타린은 이마에 식은땀을 닦으며 답했다. 그리곤 속으로 투덜거렸다. 궁주와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이 이렇게 작용할 줄이야. 영락없이 전서구가 될 판이었다.

" ……그게 다라고요? "

" 그래. "

" 진짜? "

" 몇 번을 얘기하느냐. "

" 그러니까 전하 말뜻은 내가 다 알아서 하니 신경 쓰지 마, 이거잖아요. "

" …표현은 다르다만, 뜻은 비슷하군. "

" 아 저번에 그렇게 전했는데 궁주가 안 된다고 했다니깐! "

 도돌이표 대화에 타린이 버럭 했다. 나이시라의 전언 이후 이틀 사이에 타린이 오간 것이 세 번, 그리고 전달 내용은 똑같았다. 샤나일은 막무가내로 신경 쓰지 마라며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이시라는 구체적인 계획 전반을 요구했다. 벽과 벽끼리의 싸움처럼 타린의 속은 답답함에 터져버릴 지경이다.

" 아, 왜! 왜 그냥 얘기해주면 안되냐고요, 전하, 예? "

 샤나일 역시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는지 미간을 꾹 누르더니 조금 머뭇거렸다.

" 시라가 알아보았자 머리만 아플 테니까. ……미리 선수 쳐서 벌어놓은 시간이 무쓸모가 됐단 말이다. "

" 뭔 소리래? "

" 전하께서 두 달 정도 손을 써두셨는데, 다른 가문들이 개입해서 곤란한 상황이 됐습니다. 곧 태자비가 될 분이 병석에 누워만 계시니 역시나 말이 많아지더군요. 그래서 왕비님 병세가 좀 나아지셨다고 해서, 대신할 분을……. "

" 질마! "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걸 깨달은 질마가 합,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치가 비상하게 빠른 타린이 못 알아들을 리도 없었다.

" 대신? 우리 궁주 대신할 사람을 구했다는 거예요? "

" 구했다는 것이 아니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왕비님과 닮은 분을 구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워, "

" 질마, 그 입 좀 다물 거라. "

" 예, 전하. "

 금세 수그러든 질마를 내버려두고 타린은 이해가 가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발을 탁탁 굴렀다.

" 아니 계속 그냥 병석에 누워있다고 하면 되지, 게다가 손 써뒀다면서 갑자기 왜요? "

" 몇 달을 몸져누웠다고 말한 상태다. 이미 권세가들 사이에는 죽을병이라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요양을 핑계로 밀어낸 뒤 죽이려들 것이다. 병으로 죽었다하면 그만이니. "

" 느칸다 옹주를 암살시킨다구요? "

"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겠지. "

 뻔하지만,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며 샤나일이 태연히 덧붙였다.

" 차라리 잘 된 것이지. 밖에 있으니 암살 위협은 받지 않을 것 아니냐. "

" 그래서 얼굴 내비추기 용으로 사람을 구하겠다, 란 말인 것 같은데 우리 궁주랑 닮은 사람은 어디서 구하시게? "

 그 말에 샤나일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가장 문제였다. 어차피 귀족들의 가장 주요세력들은 포섭해 두었으니 아주 잠깐만 얼굴을 내보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나이시라를 닮은 사람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 몇몇 좀 닮은 분이 계셨는데, 전하가 다 퇴짜를 놓으셨지요. "

 어렵사리 밤샘을 해가며 찾아왔던 처자를 모조리 거절한 샤나일에게 울분을 담아 질마가 꿍얼거렸다.

" 안 닮았잖느냐. "

" 생김새는, 그나마 비슷한 격이었습니다. "

" 전혀. 하나도 안 닮았다. "

" 그래도……. "

" 안 닮았어. "

 단호한 샤나일의 말과 표정에 질마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생김새는 비슷했으나 그 특유의 분위기를 가진 여인은 볼 수 가 없었다.

" 그냥 우리 궁주한테 말해보면 어때요? "

" 예? "

" 아니 잠깐 얼굴 비추는 건데, 그 뒤에 가면 되는 거죠, 뭐. "

 요 며칠 계속 장거리를 오가는 이리아가 고생 좀 하겠지만 이게 가장 손쉬운 방법 같았다. 그러나 샤나일은 여전히 부정적인 듯 했다.

" ……안 돼. "

" 아이고오, 왜요, 그 얼굴 안 본다는 약속이요?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이건 일이라구요, 일. 까닥하다가 폐비되면 그 놈팽이 사병 움직일게 뻔 한데 그럼 규모가 얼마나 커지는지 자알 아시잖아요, 예? "

 타린이 조금 빈정거리듯 이야기했다. 불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샤나일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보고 싶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보고 싶은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샤나일은 태평스럽기 짝이 없는 나이시라의 수족을 보고 쓰게 웃었다.

" 너는, 걱정도 안 되나? "

" 무슨 걱정이요? "

" 내가 이 기회에 계속 들러붙으면 어쩌려고? 나를 너무 믿는 것 아니냐? "

" 허, 참. 내가 믿는 건 나거든요? "

 일만 끝나면 칼같이 접근 못하게 할 거니까 걱정 말라며 타린이 태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물론 타린은 자신이 막을 자신도 있었지만, 더 이상 샤나일이 이전처럼 알짱거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었다. 무슨 일이 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그가 좀 바뀐 듯 보였다.

 샤나일은 자신만만한 그녀의 대답에 편히 웃었다.

" 우문현답이로군. 좋다. 널 믿고 그녀를 데려오는 걸로 하지. "

" 언제쯤이요? "

" 길게 끌 거 없겠지. 어차피 이번 일로 가주들이 죄다 모여 있으니 내일 자리를 만들겠다. "

 실은 이틀 정도 미리 여유를 두는 것이 맞았지만 샤나일은 저도 모르게 조금 조급해졌다.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아내로서 앉을 나이시라의 모습에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다, 샤나일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더는 그녀를 억지로 잡지 않겠노라. 그러나 무심결에 나오는 생각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보고 싶다. 진심은 탄식처럼 짧게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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